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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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람.


김영하 저, ‘여행의 이유’를 읽고.


이 시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김영하를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토종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소설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이력을 가진 작가는 아직 소수에 불과한데, 김영하는 그중 하나다. 그럼에도 나는 여태껏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다.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고전문학 읽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는 현대 작가들의 작품은 우선순위에서 밀어두고 있었다. 궁색하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의 작품도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독서모임 9월 도서로 선정되지 않았다면, 난 아마도 이 책을 일부러 구입하여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독서모임이 선사하는 다양성의 향연과 그에 따른 암묵적인 압박을 즐기기로 이미 오래 전에 결정한 나는 며칠 전 이 책을 구입했고 책을 통해 작가 김영하와의 첫 대면을 기쁘게 할 수 있었다. 출퇴근 길을 오갈 때도 일부러 김영하 작가의 강연을 몇 개 들었다. 그의 목소리와 표정 등으로 전달되는, 텍스트로는 좀처럼 파악하기 어려운 그의 모습을, 책만 읽으면 혹시나 생길지도 모를 괜한 오해 없이 사실적으로 알고 싶었다. 글이란 종종 가면 역할에 그칠 때가 많고, 글쓴이를 그가 쓴 가면을 통한 인격, 즉 그가 선정한 하나의 페르소나로서만 알게 되는 건 그닥 유쾌한 경험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다면 이런 작업은 차후에 진행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산문집은 아무래도 저자와의 만남을 환상 속에서 시작하는 것보단 현실에서 시작하는 게 더 낫다. 나름대로 이런 규칙을 가진 나는 김영하라는 사람을 동영상을 통해 먼저 조금이나마 이해한 후 그가 쓴 산문집을 읽게 되었다. 소설이 아닌 산문집으로 내게 처음 다가온 그는 어쩔 수 없는 작가였다. 그리고 그의 글은 의심할 여지 없는 작가의 글이었다. 때론 현미경과 같은 어린아이의 눈으로, 때론 나이를 지긋이 먹고 이런저런 인생 경험을 다 해본 어른의 지혜로, 또 때론 나와 조금도 다를 것 없고 친근한 한 인간으로서 그는 타자와 세상, 그리고 자신을 관찰하고 성찰하고 숙성시킨 후 그 결과를 이 책 ‘여행의 이유’를 통해 글로 내뱉았다.


책 제목에 ‘여행’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고 해서 이 책이 단순히 여행 경험담이나 노하우, 또는 올 컬러 사진으로 도배한 여행 답사 기록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는 달랑 단 하나의 사진이 소개되는데, 그것마저도 그의 여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구 사진이다. 심지어 그가 찍은 것도 아니다. 나사에서 제공한,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에서 찍은 사진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역설적이게도 여행 사진 하나 없는 여행에 관한 책이다. 이 점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차별화 전략일 수도 있고 상상하기 힘든 어떤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건 의도된 결과일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 책 ‘여행의 이유’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단순한 여행이나 여행 관련 정보가 아니다. 오히려 김영하라는 사람과 그의 타자와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는 여행 다녀 오기 전의 김영하와 다녀 온 후의 김영하가 있다. 여전히 여행 중일 수도 있고 일상일 수도 있는 기묘한 이중적인 의미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한 사람 김영하가 있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여행이 아닌 사람인 것이다. 여행은 가도 결국 남는 건 사람이다.


여행은 그저 사람을 있게 한, 사람을 더 사람답게 한, 마치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묻고 고뇌하는 유일한 존재자 (현존재)로서의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여행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이 책을 읽었고, 그렇게 김영하를 만났다. 그의 시선에서 많은 공감도 했고, 여러 에피소드나 그의 남다른 관찰과 통찰에서 소소한 감동은 물론, 여전히 답이 없는 질문과 고민들도 떠안게 되었다. 


여행의 이유? 나는 답을 잘 모른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한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의 시선을 따라 그 뒤에 펼쳐진 또 다른 세상을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낯섦 가운데 던져진 채로 역설적인 자유와 안도감을 느끼고, 연대와 환대를 경험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그네된 삶을 인간의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 어쩌면 여행의 이유는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라고 답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성의 없는 대답을 나는 해본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10?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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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장소, 환대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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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움, 그리고 사람다울 수 있는 이유.

김현경 저, ‘사람, 장소, 환대’를 읽고.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존재자 중에서도 존재를 묻고 드러내는 유일한 존재자, 즉 현존재다. 이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인간이 구별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김현경은 인간을 한 번 더 걸러낸다. 바로 ‘사람’이라는 단어를 통해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건, 사람이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결코 우생학적 관점에서 도출된 말이 아니다. 이 논리는 모든 존재자 중에서도 현존재인 인간을 구별한 하이데거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그 역시 인간의 우월함을 말하고자 현존재라는 개념을 만들어내진 않았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나 모든 사물은 순수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어떤 사용의 맥락 안에서 정의된다고 말했던 그가 인간의 우월함을 과시하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별됨이 언제나 상하 관계의 우열을 의미하진 않는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인간이지만, 모든 인간이 사람인 것은 아니다. 사람답지 못한 인간이 있고,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김현경은 1장 ‘사람의 개념’ 첫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됨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혼용되지만, 그 외연과 내포가 결코 같지 않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사람다움이란 무엇일까. 문득 나도 사람답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난다.

제목에서 보다시피 이 책은 사람, 장소, 환대, 이 세 가지 키워드에 대한 해제라고 볼 수 있다. 저자의 인류학, 사회학 등의 전공 배경이 저자만의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을 만나 탄생한 인문학적 성찰이다. 역사와 문명은 물론 현 세태의 민낯을 날카롭게 파헤친 저자의 통찰을 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대를 살면서 꼭 한 번 쯤은 깊게 생각해 봄직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에, 나는 이 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마치 논문을 읽는 것만 같은 딱딱함도 책 중간중간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런 부분을 과감하게 건너 뛰더라도 충분히 책 전반에 흐르는 저자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공돌이이자 인문학에 문외한인 나 또한 그랬기 때문이다.

이 책의 문을 여는 프롤로그는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소설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담겨있다. 문학을 좋아하는 나로선 반가운 도입부였고 덕분에 몰입을 잘 할 수 있었다.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기존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해설은 빈틈과 오류를 가진다. 기존의 해설들은 그림자를 영혼과 비슷한 개념으로 취급한데 반하여, 저자는 그림자를 오히려 영혼과 대립하는 외적이고 현세적인 그 무엇이라고 해석한다. 소설 속에 등장한 주인공 슐레밀은 그림자를 팔았지만, 여전히 인간으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슐레밀은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 즉, 그림자의 유무는 인간과 사람의 그 묘한 구별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 무엇인 것이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림자의 상실이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형상화된 이 소설은 이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알레고리를 선사한다. 슐레밀이 그의 괴로움을 칠십 리 장화를 통해 해결한다는 설정이 바로 그것이다. 어디든 한달음에 갈 수 있는 장화 덕분에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인류 전체에 속하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슐레밀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다. 이 해결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 대접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전제가 되어 있는 셈이며, 유일한 해결책은 사람들을 떠나는 것밖에 없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해준다. 슬프게도 슐레밀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기’를 단념하고 순수하게 관조적인 삶의 방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인류 전체에 속한다는 말은 브레네 브라운의 ‘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에서는 진정한 소속감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되었지만,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해석하는 김현경에 따르면, 그건 소외와 도피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슐레밀이 브레네 브라운의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진정한 자존감과 진정한 소속감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림자가 없어 사람들로부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게 가능했을까. 반대로 브레네 브라운이 김현경의 해석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그림자가 없는 인간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는 막다른 골목인 ‘비장소화’밖에 없다는 김현경의 통찰을 브레네 브라운은 어떻게 생각할까. 브레네 브라운의 이론은 사회구조라는, 인간이 속한 환경이라는 더 큰 숲, 더 큰 맥락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진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아무리 홀로 황야를 거치고 이겨낼 만큼 비장한 용기를 낸다고 해도 그림자를 다시 얻을 순 없기 때문이다.

슐레밀의 최종 선택은 스스로 소외당함이었다. 이는 저자에 따르면 ‘비장소화’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사람다움이란 사람 대접을 받을 때 비로소 주어지게 된다. 즉, 타자의 존재가 필수다. 홀로 존재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인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소외시키고 소외당하는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 역시 사람이 아니라 인간일 뿐일 것이다. 이를 다시 풀면, 우리 모두는 타자의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이때의 환대는 타자에게 자리/장소를 주는 행위로 설명이 가능하다.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저자는 환대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 장소, 환대, 이 세 가지 키워드가 서로 맞물린 채 사람다움이라는 한 단어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사람다움이란 한 인간이 타자에 의해 장소/자리를 제공받는 행위, 즉 환대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훌륭한 성품이라든지 고결한 도덕성이라든지 지고한 개인영성이라든지 하는 말로는 결코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런 단어들은 오로지 사적인 영역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성품과 고결한 도덕성, 그리고 지고한 개인영성은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 기반이 되어야 한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0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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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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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고.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 고랸치꼬프. 귀족 출신인 그는 자기 부인을 살해한 죄로 서부 시베리아 옴스끄 지방에 위치한 감옥에서 10년 간의 형기를 무사히 마치고, K시 이주민으로 정착하여 겸허하고 조용한 일생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과묵함을 넘어 대인기피증까지 있는 듯 사람들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피하며 살고 있었다. 이른바 은둔형 외톨이 타입. 원래부터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유형 생활이 혹시라도 그에게 남겼을지 모르는 어떤 트라우마 탓이었을까. 그는 죽을 때조차 고독 속에서 홀로 죽었다. 그의 단절된 삶은 결국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10년 간 강제로 빼앗겼던 자유를 마침내 되찾았건만, 그는 왜 마치 여전히 자유를 빼앗긴 사람처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립된 삶을 이어갔던 것일까. 과연 그에게 자유란 무엇을 의미했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왜 이런 한 사람의 모순된 삶의 결말을 먼저 보여주면서 이 책을 시작했을까.

‘나’라는 사람이 서두를 여는 이 작품은 액자식 구성으로써, 서두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은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가 직접 쓴 생생한 유형 생활 기록이다. 그가 죽고 남긴 유품 중 두툼한 공책이 하나 있었는데, 그 공책을 가득 메운 기록들이 ‘나’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 ‘죽음의 집의 기록’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 소설과는 달리 이 작품엔 강력한 서사가 없다. 주로 제한된 감옥 생활을 그리는 작품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다만, 이 작품은 마치 살아있는 현실인 것처럼 감옥 안 세계를 유감없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실적인 묘사에서 과장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직접 경험 없는 공상만으로는, 혹은 유경험자에게 귀동냥만 해서는 결코 써질 수 없는 글이 분명하다. 그렇다. 이 책 역시 비록 소설이라는 형식을 따르고는 있지만, 사실은 저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실제 경험이 그대로 반영된 작품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 속 주인공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인 셈이고, 그의 유형 생활 기록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화 된 수기로 볼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1850년부터 1854년까지 4년 간 유형 생활을 했다. 그는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를 따르는 뻬뜨라셰프스키 독서 써클에 속해 있었는데, 1849년 4월 15일 모임에서 당시 금서였던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고, 그때 마침 그 써클 안에 잠입해있던 경찰 스파이의 밀고로 인해 써클 회원 모두가 체포된다. 황제 니콜라이 1세 체제에서 정치범으로 몰린 것이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모두 사형 선고를 받는다. 단지 금서 하나 낭독했다고 사형이 언도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나중에 밝혀지기로는, 정치범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상부에서 조작된 반인륜적인 연극에 불과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실제 사형집행장에서 두 손과 두 발이 묶인 채 총구 앞에 서서 그야말로 죽음 직전까지 가는 극적인 경험을 해야만 했다. 물론 잘 짜여진 각본대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총살 직전 사면을 받고 감형되어 시베리아 옴스끄에서 4년 간 유형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 끔찍했던 경험은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고 그가 평생 앓은 간질병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내게 있어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가 묘사하는 감옥 안 세계는 책상 앞 상상력의 산물이 아닌, 오히려 도스토예프스키의 오감을 통과한 생생한 삶의 현장으로 읽혔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곳은 살아있으나 죽은 자들의 세계였다.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의 차이는 곧 ‘자유’의 유무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을 통해 감옥 유형수들의 현장을 세상에 드러내보임과 동시에 자유에 대해서 뭔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자유. 감옥 안 자유와 감옥 밖 자유. 둘은 과연 같을까 다를까. 아니면, 같은 자유를 다른 측면에서 보는 것에 불과할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린 이 책을 통해 감옥 생활을 거친 사람이 다시 맞이한 감옥 밖 자유 또한 고찰해 봐야 할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 같은 이 부분에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돈은 주조된 자유다.” 이미 유명해진 이 문장은 이 작품 첫 번째 장에 나오는 명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서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재료 중 하나인 돈과 자유에 대한 관계를 아주 짧고 간결하게 표현한 문장이다. 감옥 안에서의 사유재산은 당연히 금지되어 있다. 발각되면 즉시 빼앗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형수들은 돈을 벌기도 모으기도 하고, 비록 적은 양이지만 마음껏 탕진하기도 한다. 나름대로의 경제 구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유형수들은 감옥이라는 건물 안에만 갇혀 있지 않는다. 감옥은 유치장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이며 누군가에게는 죽기 전까지 살아야만 하는 모든 시공간의 베이스캠프다. 그들은 강제적으로 노동에 참여해야만 했다. 인근에 있는 건축 현장이라든지 농사 현장에 파견되어 철저한 감시 하에 나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노동을 부여받았다. 외부 민간인들과의 접촉이 허락된 건 아니었지만, 감시라는 것 자체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틈을 타 비밀리에 어떤 일을 청탁받고 (심지어 귀금속 세공자도 유형수 중에 있었다) 노동에 대한 댓가를 지불받는 것이었다. 물론 간수에 의해 적발되면 모든 걸 다 압수당했지만, 유형수들은 어딘가에 잘 숨겨두어 그들만의 경제 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다음은 위에 쓴 명문이 포함된 문장이다. 뒤의 몇 문장을 추가한다.

“돈은 주조된 자유였으며, 그래서 자유를 완전히 박탕당한 사람들에게 돈은 열 배나 더 귀중한 것이었다. 만일 돈이 주머니 속에서 짤랑짤랑 소리를 내기만 해도, 비록 그것을 쓸 수는 없지만, 벌써 반 이상이나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돈은 언제 어디서나 쓸 수 있었으며, 더욱이 금단의 열매는 두 배나 달콤한 법이었다. 감옥에서도 술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파이프 담배도 아주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지만 모두들 그것을 피우고 있었다. 돈과 담배는 괴혈병과 그 밖의 다른 질병으로부터 죄수들을 구해 주었다. 일도 그들을 범죄로부터 구해 주었다. 일이 없었다면, 죄수들은 유리병 속의 거미처럼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도 돈도 모두 금지되어 있었다.” (열린책들 3판 38-39페이지에서 발췌)

돈은 감옥 안에서도 힘이 있었다.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비록 엉성하지만, 감옥 안에서도 나름대로의 피라미드 체계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감옥 밖에서의 신분, 이를테면 귀족인지 평민인지에 따른 출신성분 역시 감옥 안에서도 유효했다. 죄에 대한 댓가로 자유를 빼앗긴,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자유를 갈망할 수밖에 없는 유형수들에게도 돈은 여전히 자유의 상징이었다는 점이 내겐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인간이 자유함을 느낀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시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을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권한이 곧 자유함 아닐까. 맘껏 돈 벌 수 있는 자유와 맘껏 돈 쓸 수 있는 자유 중 어느 것에서 우린 더 자유함을 느낄까. 돈이 자유에 대해 가지는 힘은 어디까지일까. 돈이 없다면 진정한 자유가 가능할 수 있을까. 이를 단순히 자본주의 시대에 국한된 문제로 치부하고 축소시키진 말자. 오히려 인간 본성에 관련된 철학적인 질문으로 발전시켜 생각해 보자. 자유란 무엇인지. 혹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타자의 반동적인 힘에 의한 만족으로부터 오는 행복에 국한된 느낌은 아닐지. 나의 자유를 위해선 누군가의 자유가 희생되어야 하는 건 아닌지. 그리고 결국 일해서 돈 벌 수 있는 자유보단 돈을 쓸 수 있는 자유에서 우린 진정한 자유함을 암묵적으로 느끼고 있진 않은지.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볼 문제일 것이다.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는 유형 생활에서 힘든 고통이 ‘자유의 박탈’과 ‘강제 노동’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나중에 가서 깨닫게 된, 그 무엇보다 더욱 힘든 고통은 ‘강제적인 공동 생활’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것, 24시간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파괴적인 구속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는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재발견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고립되고 단절된 삶은 곧 죽음을 의미하지만, 결코 혼자 있는 시간 없이는 사회적 동물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혼자 있을 수 있음은 곧 가장 기본적인 자유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휘관들이 죄수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는 인권을 말한다. 사람들이 흔히들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죄수들을 잘 먹여 주고, 잘 다루어서 모든 것을 법대로만 처리하면 만사가 끝이라고 믿는 것’이라고 일갈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가 모두, 그가 모욕을 당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본능적으로든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든지 자기의 인간적 가치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죄수 자신도 자기가 죄수라는 것을, 버림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간수 앞에서의 자기 위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낙인으로도, 어떠한 족쇄로도 그로 하여금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수는 없다. 실제로 그는 인간이므로, 결국 그를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을 수 없다.” (열린책들 3판, 177페이지에서 발췌)

그렇다. 어떤 죄를 짓고 그 댓가를 지불하기 위해 자유를 빼앗긴 채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고 해도 그 죄수는 여전히 인간이다. 그러나 죄를 지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 뒤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혐오하게 된다면, 그 행위야말로 더 큰 죄를 짓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죄수는 감옥 생활로써 이미 그 댓가를 지불하고 있다. 이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에서의 ‘모든’은 감옥에 갇힌 죄수도 포함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우리와 함께 숨쉬고 있는 여러 소수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유가 빼앗긴 감옥에서 얻은 이 깊은 인간 존중에 대한 깨달음. 지은 죄와 상관없이 인간은 인간이다. 이를 간과한다면 인간의 기본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며, 중죄를 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400 페이지 남짓한 분량의 이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 사건과 주제 이외에도 많은 사실적인 유형수들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는 그의 첫 1년과 마지막 1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썼다. 특히 마지막 1년은 그 동안의 감옥 생활보다도 많은 혜택을 누렸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의 떠남을 아쉬워하고 축하해주기도 했다고 기록했다. 여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의 26개월의 군생활에서 마지막 몇 달 동안 느꼈던 그 후련섭섭한 마음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는 마지막 페이지에 와서 다음과 같은 하소연을 한다.

“이 벽 속에 얼마나 많은 젊음이 헛되이 매장되었으며, 여기에 얼마나 위대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버렸는가! 이제는 모든 것을 말해야만 한다. 실로 이 사람들은 비범한 인물들이었다. 어쩌면 이곳에 세상에서 가장 힘 있고 가장 유능한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력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갔다. 그것도 변칙적이고 불법적이며 되돌릴 수 없이 파멸해 갔다. 하지만 누구의 죄란 말인가? 정말로 누구의 죄인가?” (열린책들 3판 431-432페이지에서 발췌)

유형수들은 비록 법적인 절차를 거쳐서 각자가 지은 죄의 댓가를 치르기 위해 감옥에 모였지만, 과연 이 감옥 생활이 그들에게 적절한 조치였을까. 과연 그 조치로 인해 사회는 더 안전해지거나 나아졌을까. 혹시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가 외친대로, 오히려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을 잃게 된 면도 많지 않을까. 그들을 감옥에 가둠으로써 얻은 것보다 잃은 게 혹시 더 많진 않을까. 감옥이란 도구를 이용하여 죄의 댓가로 자유를 빼앗는 행위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많은 질문들이 쏟아지지만, 일괄적인 대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 다를 것이 분명하고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어찌 객관적일 수 있겠는가. 다만, 나는 이 작품을 다 읽고 다시 서두를 들춰보며, 절망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서두에서 ‘나’에 의해 기록된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의 고립되고 단절된 삶, 그리고 그의 외로운 죽음은 이 숱한 질문들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암묵적인 답이자 그 제도에 대한 고발이 아닐까. 죄의 댓가는 과연 자유의 박탈로 상쇄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유행 생활 후의 삶이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의 외롭고 단절된 삶으로 수렴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하고 있진 않았을까. 비록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미래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3663661638109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3115109755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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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지음, 손성현 옮김, 김진혁 / 포이에마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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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를 향한 갈망, 그리고 진창 속에도 비치는 소박한 구원의 빛줄기.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저, ‘도스토옙스키 (부제: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를 읽고.

20세기 저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1919년 ‘로마서’ 제 1판을 출판한다. 이어서 3년 뒤 1922년, 제 2판을 출판한다. 2판은 1판과 많이 달랐다. 전면 수정이었다. 바르트 스스로도 거의 모든 부분을 다시 썼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의 신학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 변화로 인한 차이 때문에 ‘로마서’ 제 2판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는 별명까지 갖게 된다. 도대체 3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한 가지 단서는 ‘로마서’ 제 2판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1판 서문에는 없던 내용이다. 거기서 바르트는 자신의 새로운 성서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로 키르케고르, 그리고 뜻밖에도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언급한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신학자도 철학자도 아닌, 학위라곤 하나 없던, 러시아 출신의 생계형 소설가 이름이 당시 기독교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졌던 키르케고르와 나란히 전면에 등장했던 것이다. 

1판과 2판 사이의 3년이란 시간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만들어낸 균열의 틈으로 시대를 해석하는 새로운 신학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해제’에서 김진혁이 썼듯) ‘인간성의 깊은 어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식 없이 응시하면서, 깨어지고 부서진 인간을 찾아오는 신적 자비에서 희망을 찾는 신학’이었다. 하나님의 내재성보다는 다시 초월성을 강조하는 신학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신학은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서 배우지 못한 통찰을 던져줄 누군가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그 누군가가 바르트에게는 도스토예프스키였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바르트에게 소개해준 친구가 이 책의 저자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김진혁은 다음과 같이 썼다. “바르트가 이후에 밝혔듯 투르나이젠이 없었다면 바르트는 사회주의에 경도된 그저 그런 시골 동네 목사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신정통주의의 문을 연, 20세기 이후 오늘날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바르트 신학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있었으며, 둘 사이에 다리를 놓은 인물이 바로 투르나이젠이었다. 

신학자 혹은 목회자로 알려지기보단 바르트의 친구로서 더 잘 알려진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그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을 읽고 깊이 연구했으며, 대부분의 강연에서 도스토예프스키에 관련된 이야기를 거의 빠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연구는 1921년 스위스 아라우 대학생 총회에서 행한 강연으로 세상에 공식적으로 선보였으며, 그 강연 내용을 다듬어서 출간한 책이 바로 이 책 ‘도스토옙스키’이다. 번역은 ‘로마서’ 제 2판을 번역한 손성현이 맡았고, 김진혁이 해제를 담당했다.

감상 및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일러둘 것이 있다. 이 책의 이해와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즉 5대 장편이라 일컬어지는 소설 중 세 편은 먼저 읽고 접하는 편이 좋다. 그러한 공감대 없이 무턱대고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아마도 난해하다거나,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거나, 표면적으로만 이해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고 진지하게 그와 그 작품들을 이해하려고 애쓴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비록 200 페이지도 되지 않는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과 사상을 한층 더 깊이 이해하는데 탁월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와 그 작품들 이면에 흐르는 중심 사상에 대한 해제다. 도스토예프스키라는 깊은 우물에서 길어올린 물을 마셔본 사람이라면, 난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강력히 추천한다.

평온한 삶을 살던 사람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처음 만난다면 과연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 저자 투르나이젠은 그것이 마치 눈 앞에 갑자기 원시 야생의 세계가 펼쳐지는 느낌과 같을 것이라고 표현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맛을 본 독자들이라면 이 말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별다른 표현이 없어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포장을 다 뜯어내고 남은 날 것 그대로의 삶, 그 이면에 붉은 피처럼 선명하게 녹아있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창 가운데서도 꺼지지 않고 진주처럼 빛나는 저 너머를 향한 인간의 끊임없는 갈망의 불씨, 그리고 마침내 저 너머에서 소박하게 찾아오는 구원의 빛.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대부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 모두에게 공명을 일으키는 이유는 결국 우리네 인생도 작품 속 인생과 하등 다를 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인간성의 불가사의함과 수수께끼로 가득찬 원초적인 삶을 마주하게 되고, 그 안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투르나이젠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이르게 되리라고 말한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투르나이젠이 간파한 것처럼 이 단순한 질문이 곧 도스토예프스키와 우리의 공통된 질문, 다시 말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궁극의 질문이다. 저자는 이 질문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던진 유일한 질문이라고까지 말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도스토예프스키를 피할 수 없다며 투르나이젠은 그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통로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책상 앞이 아닌 현실 한복판에서 그 현실을 이야기로 만들었고, 그 시대의 흐름을 낱낱이 관찰하고 파악한 후 작품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갓 잡은 큰 물고기가 퍼덕대는 것처럼 살아있다. 야생 그대로의 느낌이다. 또한, 저자의 표현처럼, 그는 인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진지하게 읽어나가는 독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속에서 자기자신과 자기자신의 인생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단순히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에게 일종의 충격을 선사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것저것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자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답을 얻은 것 같았으나 그 답이 진짜 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막연하고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우린 노출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면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결코 경솔하게 답을 던져주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해석되어지지 않은 삶을 우리 앞에 펼쳐보일 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 차원 높은 의미의 사실주의자에 불과하다. 나는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낱낱이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인간의 본성을 파헤친 최고의 심리학자라고 치켜세우지만 어쩌면 그건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무런 해석이나 가치판단이 가미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어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저자가 간파했듯,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단순한 질문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그것이 이미 해답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뒤늦게 깨닫도록 이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인간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묻는 그 질문 자체에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수수께기와도 같은 인간, 결코 한 마디로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인간, 한계를 가진 유한한 존재이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저 너머와 연결되어 있는 무언가가 심겨져 있는 인간, 그래서 그 무엇을 갈망하는 인간. 그렇다. 인간 존재에 대한 치열한 질문이야말로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한 아름의 답일지도 모르겠다.

제 2장에서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세 장편에 등장하는 핵심인물, 즉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세 형제들, 그리고 ‘백치’의 미시킨을 중점적으로 분석하면서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추출하여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을 역으로 고찰한다. 각 작품에 대한 부분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죄와 벌.
관 같이 비좁은 방 안에서 홀로 세상과 타자와 단절된 채 스스로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라스꼴리니꼬프는 어설픈 공리주의에 입각한 이념에 빠져 살인을 계획하고, 불행하게도 그것을 실행에 옮겨 버린다. 그 얄팍한 이념의 핵심에는, 자기자신도 나폴레옹과 같은 비범인 (헤겔이 말한 ‘세계사적 개인’에 상응하는 존재)일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실제로 확인하고 싶었던 그의 내밀한 욕망이 숨어있었다. 투르나이젠이 간파했듯, 이를 달리 표현하면,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에게도 ‘모든 것이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믿음과 바람과는 정반대로 그는 도끼를 휘두르고 나서 처절한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고 결국 자수하게 된다. 그리고 시베리아에 가서도 몇 년 뒤에서야 소냐를 통해 인간의 이념으로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저 너머로부터 오는 그 무언가를 마주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곧 구원의 빛과도 같았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범인이 되려고 했던 그 무모한 도약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던 시도에 다름 아니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자신도 한계를 지닌 유한한 인간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투르나이젠은 라스꼴리니꼬프가 마침내 얻은 깨달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인간의 참된 삶, 본질적인 삶은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모습 너머에 있다는 깨달음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심연의 바닥에 다다랐을 즈음에야 인간이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투르나이젠은 ‘죄와 벌’에서 재앙의 중심이 이념에 있었다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는 그 중심이 여자 (그루셴카)에 있다고 말한다 (사실 난 이 해석에 완전 동의하진 않는다. 여자뿐만이 아니라 돈 문제를 빼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와 벌’에서의 주인공은 명백하게 라스꼴리니꼬프 한 사람이지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는 보다 복잡하고 다층적이어서 ‘죄와 벌’에서처럼 재앙의 중심에 어떤 한 가지가 놓여 있다고 동일한 잣대로 해석하기에는 뭔가 억지스러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르나이젠은 이 작품에서도 ‘죄와 벌’에서와 마찬가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인간이 결국 다다른 곳은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을 아는 자리였다고 말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핏빛어린 비극 안에도 여전히 최종적인 구원의 불씨가 남아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카라마조프 가의 피가 흐른다고 해서 무조건 구제불능의 운명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 카라마조프 가에 흐르는 총체적 난국이 우리네 삶에 흐르는 그것과 다를 게 없다면, 우리가 처한 운명이라는 굴레 안에도 구원의 빛이 흘러들어 아무리 깊은 바닥에서도 부활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백치.
바보, 정신박약, 머저리, 무지, 그리고 간질. 미시킨 공작에 대한 세상의 평가다. 그러나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러한 백치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온갖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의 세상을 뒤흔들고, 그들로 하여금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게 만든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백치의 존재는 “인생의 참된 의미란 얼마나 깊이 감춰져 있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과연 누가 백치이고 누가 지혜자인가? 투르나이젠은 이러한 역설적인 인물 미시킨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 그의 절대적인 모호성에 있다고 본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를 지칭한다. 인생의 거대함, 끔찍함, 모호함에 대한 놀람과 경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어린아이 말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존재. 흡사 그리스도 예수를 떠올리게도 만드는 존재.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백치’를 통해 다루고 있는 것이 곧 삶의 표현 불가능성,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신비라고 짚어낸다. 이는 라스꼴리니꼬프를 뒤흔들었던 것과 같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격정에 사로잡혀 뛰어들었던 것과도 같다. 이어서 저자는 나스타샤가 로고진의 격정보다는 미시킨의 연민과 사랑에 더 마음이 흔들렸던 이유가 미시킨을 통해 드러나는 용서의 빛, 즉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빛 때문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결국 ‘백치’ 역시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처럼 인간의 삶 속에서 얽히고설킨 모든 혼란의 해명과 해결이 갖는 가장 심오한 의미를 짚어주는 단어가 용서, 곧 ‘죄의 용서’라고 말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다 보면 저 너머에 있는 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 같아지고, 그 존재로부터 전적으로 비쳐오는 구원과 용서의 빛을 발견할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세 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들여다본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 (혹은 신학)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삶의 근원에 대한 질문, 곧 하나님을 향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 대신, 독자로 하여금 등장인물을 지표 삼아 옆길로 새지 않고 솔직하게 정면으로 그 질문을 마주하도록 유도한다. 유한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알고 보면 우리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인물들. 투르나이젠은 그들 모두가 자기 자신 너머의 어떤 것을 가리키는 존재라고 해석한다. 곧 하나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표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우리 자신과도 같다면, 우리 모두 역시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키는 존재다.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 사랑과 용서를 그려내는 작품은 이 세상에 허다하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만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양극성’이라고 투르나이젠은 말한다. 즉, 도스토예프스키는 사실적인, 너무나 사실적인 인물들의 인간성을 작품 속에서 철저히 해부해 놓는 동시에, 그 인물들이 삶과 죽음 너머의 세계를 향해 영원히 도약하는 모습까지도 한 작품 안에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투르나이젠은 이 양극성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 인간관의 총체적인 의미일 수도 있다고 하며,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특성과 비인간적이고 탈속적인 특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역설한다. 즉, 투르나이젠이 간파한대로, 완전한 사실주의를 통해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을 발견하는 것 (그래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의 핵심적인 경향인 것이다.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붙잡고 씨름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강조한 핵심적인 통찰은 곧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라는 문장에 함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결코 다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 즉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기울인 유일한 노력은, 그 초월적인 하나님을 이상화된 인간 영혼의 일부나 이 세상 현실의 일부로, 다시 말해 오로지 신적인 가능성에 속한 것을 또다시 인간에게 가능한 것, 혹은 어떤 식으로든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구성하는 관계, 즉 인생 저편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혀 알고자 하지 않고 감히 신과 같아지려고 도약한다. 곧 반역이다. 반역한 인간들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이반과 스메르쟈코프처럼, 혹은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처럼 “모든 일이 허용되었다”라는 구호를 따르며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다. 투르나이젠이 간파한 도스토예프스키의 관점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모순됨, 즉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알고 향하도록 지어진 피조물이지만, 정작 그 궁극적인 하나님의 존재와 그와의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면서, 인간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맞닿은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관점을 이야기하면서 종교와 교회를 겨냥한 그의 공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투르나이젠은 이러한 면에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인물 이반, 이반이 쓴 서사시 ‘대심문관’, 그리고 이반이기도 하고 대심문관이기도 하며, 혹은 이반과 대심문관을 소유하고 조종한 악마에 대해서 언급한다. 

앞서 도스토예프스키가 기울인 유일한 노력은, 가짜 하나님을 진짜로 만들지 않도록, 즉 그에게 하나님의 '하나님 다움'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지켜내는 것’이었고 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반역이란 초월적인 하나님을 끌어내려 알 만한 하나님으로 바꿔놓음으로써 (아론의 송아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문제 상황을 탈피하려고 하는 행위들의 전반일지도 모른다. 투르나이젠이 간파한 것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당시 세상의 종교와 교회가 교묘하게 이런 인간적인 시도에 가담하고 있음을 꿰뚫어 보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하나님께 반역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데, ‘대심문관’은 이러한 인간에게 예수는 오로지 ‘자유’만을 선사해주었는 데 반해, 대심문관으로 대표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연민보다 더 큰 연민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훨씬 자상하고 이해심 많은 사랑을 과시하며 인간의 짐을 덜어주고 필요를 채워주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도록 유도했다는 점을 드러낸, 일종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고소장인 셈이다. 이 고소장이 주장하는 바는 한 마디로, 하나님을 알도록 힘쓰고 돕고 전파하고 그 나라를 살아내는 모델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예수가 인간에게 주었던 자유를 빼앗은 뒤 오히려 하나님 자리를 꿰차고 거짓 선지자 혹은 가짜 하나님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의 껍데기는 그대로이나 예수가 증발한 교회. 어찌 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그건 교회가 아니라 악마와 손잡은, 혹은 악마의 현현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셈이다. 이러한 엄청난 메시지가 담겨 있는 서사시가 바로 이반이 만든 ‘대심문관’이다. 

마지막 장에서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문장 하나로 운을 띄운다. “형제들이여 인간의 죄 때문에 놀라서 뒤로 물러서지 말라. 비록 죄를 지으며 살고 있더라도 인간을 사랑하라.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사랑의 형상이니라.” 톨스토이는 평생토록 이 비극 너머로 가지 않았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일을 통해서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올 때 서로가 불안정한 존재라는 공통분모 덕분에 형제애가 비로소 가능해질 거라면서 ‘죄의 연대’를 이야기했다고 한다. 인간은 깊은 곤경 속에서 함께 버티고 구원을 기다리는 존재다. 이런 맥락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모든 생명과 모든 자연과 모든 인간을 향해 적극적인 관심을 쏟는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을 긍정하되, 그 존재가 지금 그대로의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역설적 긍정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톨스토이와 구별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신학은 다음 문장으로 다시 풀어 쓸 수 있다. “당신이 비록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죄와 더불어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죄 안에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투르나이젠이 강조한 것처럼, 모든 피조물과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모든 생명을 향한 적극적인 관심이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진실한 깨달음이 일어나는 곳은 진공상태가 아니라 지금 이 모양 이 꼴의 세상 한복판, 즉 인간 존재의 수렁 같은 문제 상황 속이라고 한 데 반하여, 톨스토이는 그야말로 거센 반항심 속에서 사회에 비판을 가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기존의 세상을 비판하면서도 신기할 정도로 너그러웠던 것이다. 즉, 도스토예프스키는 너무나 불의하고 끔찍한 사건에서도 그 속에 감춰진 긍정성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혁명의 파토스가 아닌, 그 위대한 이해와 용서의 파토스가 작동한다. 

투르나이젠이 꼽은 또다른 톨스토이와의 차이점은, 톨스토이의 작품에서는 필연적으로 경건주의적인 참회의 노력을 떠올리게 되는 데 반하여,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는 비록 그런 결단과 전환의 순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회심자와 비회심자,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하나님 자녀와 세상 자녀로의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나 경건주의자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그런 이분법적 구분이 있어야 하고, 심지어는 그러한 구분이 목표가 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주변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예수 안에서도 오히려 이 세상과 하나님, 죄인과 의인이 모두 함께 어우러졌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려내는 ‘결정적인 변화’ (즉, 구원의 빛이 임하는 시기)는 인간이 종교적 도덕적 노력으로 마침내 다다른 마지막 단계나 가장 높은 단계가 아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 여정은 인생의 바닥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을 향해 시선을 돌릴 때 가시화된다. 결정적인 변화는 인간이 발버둥치고 억지를 쓴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그분의 영원한 능력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그 변화를 위한 길은 특별한 성인이 가는 길이 아니다. 애쓰며 노력하는 사람의 길도 아니다. 오히려 누가봐도 세상의 자녀인 이들, 심지어 죄인과 창녀와 살인자, 불안하고 절망적인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인 것이다. 용서의 나라로 인도하는 길은 의인의 길이 아니라 죄인의 길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의미심장한 요소 하나는 어린아이의 존재다. 그는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요구한다.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어린아이처럼 무방비 상태로 인생 앞에 서라고. 절대적인 진실성을 지니고 순진한 무방비 상태로 삶을 맞이하라고. 마치 ‘백치’의 미시킨이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알료샤처럼. 왜냐하면 자신을 하나님께로 활짝 열고 어린아이로 돌아간 사람 속에서는 서서히, 혹은 갑자기 가장 위대한 것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에 대한 감각, 사랑과 구원의 작은 불씨, 한 조각의 부활 말이다. 

한 가지 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하여 따뜻한 애정을 가질 수 있는 점은, 그는 항상 낮은 곳에 있는 겸허한 사람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투르나이젠도 간파했듯,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개혁과 혁명보다는 그들의 감추어진 힘에 더 큰 기대를 걸기도 했었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부정적인 느낌을 가진 사람은 아마도 읽다가 중간에 그만 둔 사람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만약 한 작품이라도 끝까지 읽고, 가만히 그 작품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상관없이, 난 누구나 가슴 따뜻해짐을 경험할 거라고 믿는다. 죄의 심연에도, 그 참혹한 어두움 가운데에도 하나님은 존재하실뿐 아니라, 아직 죄로 흥건히 젖어있는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인 나는 다시금 인간이란 존재는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생각하며 인간의 정체성을 묵상할 수 있었으며, 죄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선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자발적 순종으로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아내야겠다는 다짐까지 조용히 할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 이면에 흐르는 그의 사상과 신학에 대한 해제를 읽고나니, 그 어떤 신학책, 철학책보다도 묵직하게 내 마음을 울렸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마치 흩어졌던 파편들이 모여져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36636616381098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77?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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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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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창 속에 빛나는 진주: 하나의 밀알, 한 사람에게 행한 작은 실천적 사랑.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고.

가끔은 감당하기 버거운 감동에 노출되고는 무얼 어떡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처럼 그저 넋을 놓고 가만히 멈춰있을 때가 있다. 나 역시 자극에 반응하는, 살아있는 생명체임에도,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그 앞에서 얼어붙는 것밖엔 없다. 감히 헤아릴 수 없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이 경외감마저 드는 순간. 느닷없이 찾아온 전율의 순간. 묵직한 펀치에 제대로 한 방 맞은 것처럼 나의 이성도 감성도 모두 숨을 죽인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고요 앞에서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그 순간을 맞이한다. 

얼마쯤 지났을까. 세밀하게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에 다시 내 숨은 샘물처럼 터지고 나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마치 처음 태어나는 것처럼,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모든 감각이 하나씩 깨어난다. 다시 눈을 뜨고 맞이하는 세상. 처음 보는 듯한 이 낯선 세상. 온기로 충만해진 가슴으로 보는 세상은 모든 게 새롭다. 모든 게 경이롭다. 텅빈 대기조차 온통 의미로 가득 차있는 것만 같다. 

살아가면서 이렇게 압도적인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건 실로 기적 같은 선물이다. 마지막 장을 뒤로 하고, 총 2000 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도로 책장에 꽂은 지 일주일이 지났건만, 여전히 나는 그 무언의 기운에 압도되어 있다. 읽기 전과 후, 책이 꽂혀있던 자리는 동일한데, 그것을 바라보는 내가 달라졌다. 여전히 동일하나, 결코 동일하지 않은 나. 나의 영점은 또 한 번 미세하게 재조정된다. 그렇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약 140년이란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내게 무언의 말을 건넨 것이다. 마치 ‘대심문관’에서 예수가 대심문관의 조롱과 파격적인 논리로 일관했던 일장연설을 잠잠히 다 듣고난 이후, 아무 말 없이 그에게 다가가 입을 맞춘 것처럼.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은 그림이라기보단 문자로 가득하지만, 그 특유의 장황한 문자들도 그를 가둘 순 없었다. 그의 글은 여전히 살아 역사한다. 그리고 나는 이제서야 그 역사의 숱한 증인 중 하나가 되었다.

감상문을 끝으로 독서를 마감하는 나에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헤세의 ‘유리알 유희’에 이어 두 번째로, 아니 한층 더 농밀하게, 압도적인 아우라를 선사한 문학작품이다. 두 작품은 공통점을 가진다. 모두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이전 작품들은 하나의 악기가 되어 마지막 작품에서 조화로운 오케스트라의 향연을 펼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 그의 전작,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의 특성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반복, 심화, 압축되어 나타나며, 각 작품을 탄생시킨 작가의 근본적인 질문들, 이를테면 신의 존재와 인간의 본성, 죄와 벌의 의미, 선과 악, 개인과 사회, 자본과 권력, 군림과 억압, 허무와 혼돈, 그리고 구원과 소망과 사랑 등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심리학적, 사회정치학적인 굵직굵직한 질문들이 모두 등장하여 한층 더 복합적이고 심층적으로 이 작품에서 다뤄진다. 그의 전작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읽고나서 아마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지지 않을까 싶다. 한 마디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수가 녹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작품만 읽어서는 결코 그 정수를 제대로 맛볼 수 없다. 파편들이 모여 하나의 큰 그림이 맞춰지는 광경은 완성된 그림만 보는 사람들로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경이로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내 인생으로 들어와 내게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예프스카야에게 바친다.”

이 작품을 펼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아내에게 바치는 헌사다. 이 방대한 작품은 단 2년 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 달 뒤 그는 운명을 달리했다. 속기사로 고용되었다가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된 안나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 작품은 영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말년에 병약해진 그를 대신해 펜을 쥐었던 그녀를 통하지 않고는 이 작품은 그저 글이 아닌 말로만 남아 끝내 공중분해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총 2부 중 1부에 해당한다. 저자가 원래 계획했던 작품의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 즉 2부는 영원히 그의 계획으로만 남아 그와 함께 묻혔다. 다시 말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완성도 높은 미완성의 작품인 것이다. 이는 또 한 번 안나의 존재감에 비중을 둘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1부조차도 완성되지 못했을 가능성까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헌사는 합당하다. 마땅히 그녀에게 돌려야 한다. 그리고 모든 독자들은 마땅히 그녀에게 감사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실로 도스토예프스키의 펜과 잉크였고, 우리는 시간을 초월하며 그녀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헌사에 이어 등장하는 두 번째 문장이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이다. 그의 세 번째 장편소설 ‘악령’에서도 성경 구절 (누가복음 8장 32-36절)이 대단원의 막을 올렸다. 내겐 그 성경구절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해석을 가능하게 해준 열쇠였고, 나는 그 방식이 방대한 문자와 사상의 총합 저변에 깔린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의도에 그나마 조금이라도 근접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같은 이유로 나는 이 작품에 대한 감상문을 요한복음 12장 24절의 의미, 즉 하나의 밀알과 죽음과 열매의 의미를 중심으로 해서 써보려 한다. 

하나의 밀알과 죽음과 열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라는 제목을 들어봤거나, 이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이라는 사실, 나아가 줄거리까지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많아도 이 작품을 완독한 사람, 그리고 완독하고 나서 작품의 의도와 의미를 고찰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워낙 물리적으로나 사상적인 면에서 방대한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쓰기 스타일에 대한 선경험이 부재한 사람이라면 그의 장황한 필체에 혀를 내두르며 십중팔구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는 중도에서 하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 문학작품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 등장인물의 낯설고도 긴 이름, 누가 누군지 도무지 헷갈리게 하는 애칭 등으로 거부감과 짜증이 밀려와 신경질적으로 책장을 확 덮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고백하건데 나 역시 동일한 이유로 중학생 시절 이 작품을 중도포기했었다.

하지만 러시아 문학 맛을 본 사람의 경우, 그나마 진도를 뺄 수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권으로 나눠진 이 작품을 다 읽어낸 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두 가지 대표적인 이야기, 즉 ‘대심문관’이라는 서사시와 ‘양파 한 뿌리’라는 우화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1권 끝에 ‘대심문관’이 등장하고, 2권 앞부분에 ‘양파 한 뿌리’가 등장한다. 이 작품을 추천 받고 마치 거대한 미션을 수행하기라도 하듯 큰 맘먹고 읽기 시작했으나 결국 중도포기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1권 끝이나 2권 앞부분에서 손을 떼게 된다는 사실은 그저 놀라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양파 한 뿌리’ 이야기를 알고 의미까지 곱씹은 사람의 경우는 그나마 낫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내겐  ‘대심문관’이 이 책의 핵심 사상을 대변하는 것처럼 함부로 떠들어대는 사람들보단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더 큰 그림을 이루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초기 의도에 조금은 더 근접한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대심문관’만 읽으면 마치 이 작품을 다 읽은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입장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라는 거대한 숲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 없이, 마치 그 숲의 절반만을 본 뒤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부풀리거나, 나아가 그 절반의 숲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나무 한 그루만을 가지고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나머지 절반의 숲까지도 대변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이 작품을 간략하게나마 대변하는 이야기를 둘 중에 선택하라고 요구한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할말을 잃게 만들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을 띠는 ‘대심문관’이 아닌, 비록 상대적으로 덜 매력적인 하나의 우화에 불과하지만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사랑’이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는 ‘양파 한 뿌리’를 고를 것이다. 언제나 진리와 행복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지 않고, 소탈하고 사소한 일상에 광택 없는 모습으로 흩어져있기 때문이다. 마치 '도둑맞은 편지'처럼.

그렇다. 눈치 챘겠지만, 나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결국엔 무신론을 논리적으로 당당히 주장하던 자들까지도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추잡하고 더럽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도 유일하게 작게나마 빛을 발하는 희망과 구원은 뛰어난 머리로 떠드는 인류 전체에 대한 보편적이고 이론적인 사랑이 아닌, 이웃 한 사람에게 행할 수 있는 개별적이고 실천적인 작은 사랑에 깃들어 있다고 해석한다. 이렇게 해석할 때, 즉 ‘대심문관’이 아닌 ‘양파 한 뿌리’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도를 더 잘 대변해준다고 해석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세 가지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책을 여는 성경구절인 요한복음 12장 24절의 존재와 의미가 명료하게 드러난다.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맺는 많은 열매는 거창한 사랑이 아닌 한 사람에게 행한 작은 사랑의 힘이다. 둘째, 전체를 여는 서문 격인 ‘작가로부터’에서 이 작품의 화자가 선택한 주인공이 이반이 아닌 알료샤라는 점을 별 의문 없이 이해할 수 있다. ‘작가로부터’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의 주인공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 (알료샤)의 전기를 시작함에 있어…..”. 셋째, 알료샤가 수도원을 나와 활동가로 활약한다는 내용을 담은 저자의 (비록 땅에 묻혔지만) 2부에 대한 간략한 시놉시스 (이 역시 ‘작가로부터’에 묘사되어 있다)를 1부와 연결지으면서도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이며 2부를 포함한 작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비록 우리가 아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완성도 높은 하나의 방대한 작품이지만, 아무리 완성도가 높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2부를 위한 전주곡 역할을 하고 있음을, 그래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마침표가 찍혀지지 않은 작품임을, 나는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시도하는 모든 독자들이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 속엔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이 등장하지만, 가장 중심된 이야기의 정점에는 아무래도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아버지, 즉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죽음이 위치한다고 봐야 한다. 그는 살해당했다. 그것도 끔찍한 친부 살해다. 어찌 보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이 살인사건 이전과 이후로 구성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그의 죽음이 작품의 초반부터 예정되어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할 수 있는데, 만약 이런 관점을 취한다면, ‘과연 누가 아버지를 죽일 것인가’ 내지는 ‘과연 어떤 사상이 피를 묻히고 어떤 사상이 궁극적 승리를 거둘 것인가’와 같은 내밀한 질문들을 염두에 두면서 책을 처음부터 읽어나가도 좋을 것이다. 참고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전개구도를 크게 나누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간략한 줄거리도 곁들인다.

세 권 중 1권은 등장인물 소개 (굳이 비중을 따지자면, 표도르 카라마조프가 어떤 사람인지 윤곽을 잡을 수 있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설정한 표도르는 추잡하고 방탕하고 탐욕스러운 졸부요 여자와 돈에 눈이 먼 호색한이다)와 그들의 관계도,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소개함으로써 시작한다. 그리고 이반으로 대표되는 무신론 사상 및 그의 놀랍도록 매력적인 이성/논리가 압축된 ‘대심문관’으로 마무리된다. 

‘대심문관’은 세 형제 중에서 가장 학구적으로 뛰어났고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 이반이 지어낸 서사시다. 그 내용은 그의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이뤄지는데, 이단들을 잡아 가두고 처형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던 16세기 스페인 세비야에 예수가 조용히 재림하게 되고, 대심문관에 의해 감옥에 가둬진 예수에게 대심문관이 밤에 홀로 조용히 찾아와 조롱과 비난이 낭자한, 그러나 논리적으로 반박하기엔 거의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그의 섬뜩할 정도로 논리적인 추궁과 나무람으로 일관된 궤변을 내뱉은 독백이다. 악마와 손을 잡은 존재, 혹은 악마가 현현한 존재라고도 볼 수 있는 무리들 (교회와 종교지도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예수의 정신과 정반대로 돌아선 그들의 거침없는 타락을 꼬집는 메시지로도 해석 가능할 것이다)을 대표하는 대심문관의 독백이 주요 타겟으로 삼은 성경 본문은 마태복음 4장, 즉 예수가 사십 일 금식 이후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 받는 장면이다. 예수는 기적과 신비와 권위라는 키워드로 각각 해석할 수 있는 사탄의 세 가지 유혹에 대하여 하나님 말씀 (신명기)으로 대처하셨다. 그러나 대심문관은 그때 예수의 선택과 대응이 부적절했고 심지어 지혜롭지 못했다고 일갈하게 되는데, 그 주된 일갈의 저변에는 예수의 인간에 대한 기대가 과장되었고 인간이란 존재에 비해 너무나도 고결해서 허무맹랑하기까지 했던 존중과 사랑을 인간에게 준 나머지 그들에게 주었던 자유 (의지)는 그들이 감당하기에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상이며, 감당할 만한 인간이 있다 하더라도 어차피 극소수에 불과할 테고, 그렇다면 결국 예수는 인간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논리가 흐른다. 한 마디로, 예수는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결국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되었다는 것이고, 예수가 인간에게 주었던 자유 (의지)는 결국 그들을 옭아맸을 뿐이며, 그들에게 준 평화는 그들을 불안과 초조에 떨게 만든 나머지 구속하는 효과를 냈을 뿐이라는 논리다. 이 치명적인 논리는 ‘대심문관’을 정직하게 읽은 모든 독자들의 할 말을 잃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음 발췌하는 문장은 대심문관의 핵심 논리를 잘 대변해준다.

“맹세코, 인간은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약하고 저급하게 창조되었단 말이다! 인간이 네가 행한 것을 행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인간을 너무도 존중한 나머지 너는 마치 그를 더 이상 동정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 꼴이 되어 버렸고, 이는 인간으로부터 너무도 많은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인간을 자기 자신보다 더 많이 사랑했던 그자, 바로 그자가 말이다!” (민음사 번역본, 539페이지 하단)

어떤가. 기가 막히지 않는가. 논리적으로 예수의 편에 서서 대심문관에게 반박을 해볼 텐가? 그러나 ‘대심문관’에서 예수는 끝까지 침묵을 고수하다가 대심문관에게 조용히 다가가 입을 맞춘다. 그리고 대심문관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감옥 문을 열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예수를 몰래 놓아준다.

“어서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두 번 다시 오지 말란 말이다. 절대로. 절대로!” 

이는 이성과 논리의 치밀함도 결국은 작은 실천적 사랑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장면이라고 해석 가능할 것이다. 또한, 이 서사시 속의 대심문관이 이반을 상징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데, 실제로 2권을 지나 3권에서 이반은 처절하게 무너진다. 이반의 무너짐은 대심문관의 굴복의 변주인 셈이다. 

2권은 내가 생각할 때 도스토예프스키의 큰 그림 (써지지 않았던 2부를 포함한)을 이루는 숨은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보이는 부분이다. 마치 1권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독자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이반의 사상에 대응하기라도 하듯, 신의 존재와 구원과 사랑을 대변하는 조시마 장로의 일대기로 시작한다 (굳이 ‘대심문관’에서 예수는 이 작품 속에서 누구를 대변하냐고 묻는다면, 조시마 장로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어서 ‘양파 한 뿌리’ 우화와 함께 알료샤의 이야기로 초점이 맞춰지다가, 돈과 여자 문제로 이미 아버지와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고 조만간 무언가 큰 사고를 칠 것처럼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호색한, 첫째 아들 드미트리 카라마조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며, 소설이 주는 긴장과 위기는 극에 달한다. 그리고 마침내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살인사건이 터지면서 소설은 절정에 이르고, 억울하게 살인혐의를 뒤집어쓰고 드미트리가 호송되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양파 한 뿌리’라는 우화는 단 한 페이지 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이며, 재미있게도 아버지 표도르, 그리고 첫째 아들 드미트리와 삼각관계에 놓였던 그루셴카가 알료샤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평생 착한 일이라곤 하나 하지 않았던 한 여인이 죽어 지옥 불바다에 떨어졌는데, 그 여인의 수호천사가 불쌍한 마음이 들어 여인이 살아있을 때 행했던 선행 하나를 기억해낸다. 구걸하던 거지 여인에게 양파 한 뿌리를 주었던, 아주 사소한 사건이다. 천사는 그 사실을 곧장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은 그 천사에게 그 양파 한 뿌리를 들고 불바다로 가서 그 여인이 잡고 올라올 수 있도록 내밀라고 한다. 그래서 실행에 옮긴 천사. 불바다에서 고통 당하던 여인은 천사의 도움으로 양파 뿌리를 구원의 동아줄로 잡았고, 천사는 그 줄이 끊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여인을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갑자기 불바다 속 다른 죄인들이 자기도 구원 받겠노라며, 양파 뿌리를 잡고 올라가는 여인의 다리와 몸에 필사적으로 달라붙기 시작한다. 자기에게 달라붙은 사람들을 발로 걷어차면서 여인이 내뱉은 말은 다음과 같다. “나를 끌어올려 주는 거야. 너희들이 아니라. 이건 내 양파지, 너희들 게 아니야.” 그 순간 양파 뿌리는 끊어졌고 여인은 다시 불바다 속으로 떨어진다. 

개별적으로 이 우화를 보면 그저 충분히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다. 혹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을 차치하고 생각한다면, 이 우화를 선행과 구원에 대한 인과관계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라는 거대한 숲 (써지지 않은 2부를 포함한)의 맥락에서 이 우화는 그저 의미심장하기만 하다. 

이 우화의 의미를 기독교적 해석과 무관하게 단순히 일차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양파 한 뿌리를 거지에게 건네는 것처럼 아주 사소한 선행 (실천적 사랑)도 구원의 이유가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요지는 구원의 ‘성취’가 아닌 구원의 ‘상실’에 있다. 수호천사 덕에 구원의 기회가 열린 사건보다는 타자를 발로 걷어차면서 자기만 구원 받겠다고 소리친 여인의 결과, 즉 구원의 상실 사건에 이 우화가 던지는 메시지가 보다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왜 구원을 잃어버렸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한다. 양파 한 뿌리의 작은 선행은 그 여인이 자기 몸에 달라붙은 다른 죄인들을 걷어찼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즉, 작은 선행이 구원의 이유라면 그녀의 구원은 유효했어야 한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양파 뿌리는 끊어졌다. 왜일까?

이 질문의 답은 양파 한 뿌리의 작은 선행이 구원의 이유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가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답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구원이란 작은 선행만으로 받을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양파 한 뿌리’로 말하고자 했던 구원은 아마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오히려 더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이지 않았을까. 양파 한 뿌리의 작은 선행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사소한 선행을 대표하는 일이자 인간이란 존재가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일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인간의 어떤 행위로도 얻을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여인이 타자를 걷어찬 이유 역시 이러한 구원의 유일한 방법, 즉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다시 불바다 속으로 빠졌던 그 여인의 마음 속에선 양파 한 뿌리가 구원의 동아줄로 내려왔을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맞아. 양파 한 뿌리를 내가 거지 여인에게 건네 줬었지! 내가 왜 그걸 몰랐을까. 고마워 수호천사. 나는 구원 받기에 합당했었던 거야!”라고 말이다. 즉, 이 우화는 기독교적인 해석에 어긋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강화시키고 있는 이야기이며,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 해석은 곧장 ‘하나의 밀알’로 이어질 수 있다. ‘양파 한 뿌리’의 선행으로 상징되어지는 인간의 모든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선 사소하디 사소한. 생각해 보라. 양파도 작은데 그 뿌리는 얼마나 작은지) 실천적 사랑은 그 자체로써 구원의 척도는 될 수 없으나, 하나의 밀알로써 이후의 많은 열매를 위해 쓰임 받는다는 해석이다. 거기엔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으며 사랑이 있다. 진창 속에서도 구원의 빛이 임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속에도 진주가 있기 때문이고, 그 진주는 바로 하나의 작은 밀알, 작은 실천적 사랑일 것이다. 

3권은 갈등/위기/절정을 지나, 마치 표도르의 살인사건과 무관한 것 같이 느껴질 수도 있는, 콜랴 크라소트킨과 일류샤로 대표되는 아이들과 알료샤와의 관계 회복 이야기가 거대한 폭풍 후 다시 찾아온 조용한 햇살과 잔잔한 바람처럼 펼쳐지며 시작된다. 이어서 이야기의 초점은 다시 이반에게로 향하는데, 1권 끝에서 독자들을 압도시켰던 그 치명적인 매력은 ‘양심’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매개물을 통과하며 조금씩, 그러나 철저하게 산산조각나기 시작한다. 그는 악마를 보는 등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육신까지 병약해지고 만다. 이반의 무너짐. 여기에 도스토예프스키의 메시지가 숨어 있지 않을까. 이 무너짐을 위해 그토록 압도적이었던 ‘대심문관’의 서사시를 이반이 창조하도록 만든 게 아니었을까.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의 낙차가 더 큰 것처럼. 

그리고 이어지는 법정 공방. 이 작품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그리고 중도포기한 사람은 한 번도 맛보지 못했을, 이 작품의 또 다른 빼어난 보석이다. 검사와 변호사에 의해 치열하게 진행되는, 정곡을 찌르는 변론, 이어지는 증인들의 증언이 스릴 넘치게 펼쳐지는데, 재미있게도 이 마지막 챕터의 제목은 ‘오심’이다. 드미트리는 아무런 물적증거 없이 (21세기 현대적인 관점으로는 이해가 안 갈 수 있다. 드미트리 옷과 피부에 묻은 피가 누구의 피인지 굳이 CSI 같은 과학수사대의 철저한 검토도 필요 없이 아주 단순한 DNA 검사만 하면 단박에 드미트리는 누명을 벗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소설이 쓰였던 19세기 말에는 그런 조사가 가능하지 않았다) 넘쳐나는 정황적인 증거만으로 공식적인 살인자의 혐의를 쓰고 유죄 판결을 받게 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갈 날만 기다리게 된다. 

 

여기서 드리트리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비록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이루는 거대한 두 축을 이반과 알료샤로 보고는 있지만, 정작 스토리를 주로 이끌고 가는 인물은 드미트리라는 점을 감안할 때, 드미트리 역시 도스토예프스키의 눈이 머물고 그를 통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드미트리는 이반과 알료샤와는 또 다른 존재다. 드미트리는 표도르와 첫 번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데 반하여, 이반과 알료샤는 두 번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굳이 드미트리를 이반과 알료샤와 다른 배에서 태어나도록 설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셋 중에서 드미트리가 표도르를 가장 많이 닮은 아들이라는 점, 너무 많이 닮아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하게 여자와 돈 문제로 서로 대립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여기서 한 가지 추가적으로 재미난 사실은, 마치 선과 악을 대변하듯 설정된 알료샤와 이반이 같은 배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세 형제 모두 표도르의 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까지, 아니 표도르의 사생아이자 결국 그를 살해한 인물, 악의 화신 스메르쟈코프 역시 그의 씨에서 나온 열매라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네 아들들은 한 아버지 표도르의 분열된 자아 내지는 파생되고 분화된 열매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 형제를 모두 합치면 우리네 인간 군상을 대변한다고 볼 때, 카라마조프 가에 흐르는 피는 곧 우리 인간 안에 흐르는 피일 것이다. 곧 인간을 넘어서는 무언가 (신의 존재일 것이다)로부터 지속해서 등지고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반역과 죄를 의미한다고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앞선 네 장편소설에서 굳이 가장 비슷한 인물을 고르라고 한다면,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라고 나는 대답할 것이다. 물론 확연한 차이점도 있다. 이를테면, 라스꼴리니꼬프는 단절된 세상에서 엉뚱하고도 위험한 사상에 도취되어 살인을 저지른 반면, 드미트리는 비록 타인의 눈에는 충분히 살인을 저지르고도 남을 정도로 과격한 호색한으로 비춰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살인자가 아니다. 오히려 드미트리는, 겉은 단순무식하게 보일 정도로 폭력적으로 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도 여린 인물이라고 해석하는 게 바람직하다. 작품 속에서 그는 돈과 여자 문제로 분노하며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일으켰던 인물이지만, 그 누구의 부탁이나 바람과는 별개로 명예심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한 사람으로부터 입은 은혜, 즉 타자의 작은 실천적 사랑을 기억하고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사람을 죽일 정도로 폭력적인 분노의 벼랑 끝에 서있다가도 누군가의 한 마디에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아 속에 숨어 있던 어린아이가 드러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드미트리는 세 형제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그래서 가장 우리의 모습과 닮은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드미트리는 가장 카라마조프적인 인물이자, 가장 인간다운 인물인 것이다.

드미트리를 보고 라스꼴리니꼬프가 떠오른 이유 중 하나는 작품 마지막에 둘 다 시베리아로 떠나기 때문이다. 비록 라스꼴리니꼬프는 살인죄, 드미트리는 살인 누명이란 점이 다르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둘 다 그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의 과거 행동을 진심으로 늬우치고 (회개), 한 여인의 사랑 (라스꼴리니꼬프에게는 소냐, 드미트리에게는 그루셴카)을 매개로 새로운 삶을 시작 (회심과 구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적나라하게 까발린 인간의 본성,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심연으로 곤두박질치는 타락, 몸과 영혼의 파멸, 그러나 하나의 밀알과도 같은 한 사람으로 주어지는 사랑,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희망, 그리고 마침내 구원에 이르는 여정. 이런 플롯에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죄와 벌’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죽음은 각 등장인물 속에 숨겨졌던 사상들을 마침내 붉은 피처럼 선명하게 드러나게 만들어 저자의 메시지를 효과적이고 적나라하게 전달하는 통로가 되어 주었던 게 아닌가 한다. 또 한편으론, 결코 하나의 밀알이라고 할 수도 없는 표도르라는 인간의 죽음은 조시마 장로의 죽음 및 소년 일류샤의 죽음과 극적으로 대비됨으로써, 하나의 밀알이 맺게되는 열매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통로 역할도 담당했다고 해석 가능할 것이다. 표도르의 죽음은 이반으로 의인화된 무신론과 차가운 이성 및 논리를 그의 몸에서 분리시키는 동력이 되어줌으로써 (이반은 자기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진 않았으나, 표도르의 사생아이자 악이 의인화된 인물 스메르쟈코프에게 ‘모든 게 허용된다. 즉 살인도 허용된다’는 사상을 간접적으로 주입시켜 살인을 조장했다는 혐의를 스스로 부인할 수 없어 정신분열증에 걸리고 만다) 하나의 밀알과 대척점에 있는 인간의 사상은 죽어서도 오로지 파멸만을 낳을뿐, 그 어느 생명의 열매도 부재하다는 사실을 저자는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대신 조시마 장로와 일류샤의 죽음은 각각 이반과 대척점에 놓인 알료샤와 열 두명의 소년 친구들을 세상에 남김으로써 더 크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만약 도스토예프스키가 조금 더 살아 2부가 그의 초기 계획대로 만들어졌다면, 알료샤와 일류샤가 맺게 될 많은 열매에 대해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을까. 써지지 않은 도스토예프스키의 2부가 못내 아쉽다. 

표도르의 살인사건 덕분에 이 작품은 범죄소설, 혹은 추리소설의 플롯까지 취하게 되었고, 스릴과 긴장이 주는 흡입력은 이 방대한 작품 안에서 자칫 길을 잃은 채 중도포기의 기로로 접어든 돛단배와 같은 독자들에게 마침내 불어온 순풍과도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나 같은 경우만 해도, 이 작품이 앞선 네 편의 장편에 비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두께를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더 빠른 속도로 읽어낼 수 있었다. 몰입도에 있어선 다섯 장편 중 가장 압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중도포기했던, 구름처럼 허다하게 많을 잠정적 재독자들에게 이 감상문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정말 어마어마한 대작을 읽어냈다. 이 길고 긴 감상문까지 마치고 있는 나를 보니, 나에게 조용히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도 든다. 이토록 방대하고 심오한 문학작품을 만난 건 살면서 누릴 아주 드문 축복이라 생각한다. 진창 속에서도 진주를 발견하여, 온갖 추잡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사랑과 구원의 통로를 비추어, 읽는 독자의 마음을 결국엔 따스하게 만들 줄 아는 도스토예프스키. 그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자 축복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36636616381098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68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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