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푸코의 진자 상.중.하 세트 - 전3권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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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비밀, 그리고 인간의 탐욕.

움베르트 에코 저, ‘푸코의 진자’를 읽고.

비밀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드러나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사람들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건다. 비밀은 그럴 만한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밀이 그런 힘을 갖기 위해 진실일 필요는 없다. 적어도 이 책에 따르면 그렇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비밀은 비밀스러운 힘을 가지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는 것, 아니 드러나지 않아야만 하는 것, 이를 위한 인간의 집요한 노력, 탐욕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는 열정이 어쩌면 비밀의 본질을 구성할지도 모르겠다. 비록 목숨을 바쳐 지켜낸 비밀이 텅 비어있을지라도 말이다.

‘장미의 이름’을 계기로 강한 매력을 느껴 두 번째로 읽게 된 에코의 작품 ‘푸코의 진자’는 이러한 비밀의 비밀스러운 속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거기에 숨은 인간의 심리, 은밀하면서도 경박한 탐욕, 그리고 숙명적이고도 무력한 인간의 한계를 극적으로 파헤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주인공 카소봉과 벨보, 디오탈레비가 착수한 비밀 작업 ‘계획’이 서서히 진행되어가는 과정에서 그 이면에 흐르는 그들의 심리 변화를 무의식적으로 공감할 수 있음은 물론, 비밀이란 것이 어떻게 인간에게 정신적, 육체적 힘을 행사하는지 그 섬뜩한 현장을 또렷이 보게 될 것이다.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그들은 이내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고, 그들이 창조해낸 세계에 스스로 노예가 되어버린다. 그들이 창조한 이야기의 재료는 ‘아무거나’였고, 사실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쿨하게 보이면서 말만 되면 되는 것이었다. 재미난 건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나중엔 그 바닥에서 비밀 중 비밀인 것처럼 자리매김하게 된다는 것이다.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 해프닝을 목도하며 그냥 웃고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거기에 바로 저자의 목소리와 시선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에코가 이 작품을 통해, 비밀의 비밀스러운 속성이 의외로 얼마나 가벼울 수 있고 얼마나 허무할 수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에 사로잡혀 비밀을 더 비밀스럽게 만들고자 안간힘을 쓰며, 그것이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켜내려고 발악을 하는 동시에, 그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되고자 혹은 극소수의 사람에 포함되고자 목숨까지 건다는, 이 웃지 못할 비극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실로 이 작품은 인간 탐욕의 폐부를 깊이 찔러 쪼개는 저자의 통찰이 번뜩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이를 공감하기 위해서는 천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텍스트의 향연에서, 그것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으로 가득찬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잘 살아남아야 한다. 역사와 신비, 의도되지 않은 거짓과 의도된 거짓이 마구잡이로 섞여있어 무엇이 사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내용, 이를테면 성전기사단, 장미십자단, 프리메이슨, 예수회, 연금술, 은비학, 악마 연구가들 등등의 음모론과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장난과 악의가 난잡하게 뒤섞인 숱한 이야기들, 과학의 영역까지 이야기가 확장되어 비밀을 가진 사람은 마치 푸코의 진자를 움직이게 하는 저 위의 부동점에 서서 지구 지자기류를 마음껏 조정하여 세계를 장악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황당무계한 음모론 같은 것들이 바로 이 텅 빈 비밀의 배경을 이루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지만, 이 작품을 읽을 땐 텍스트라는 나무 하나하나에 집중하기보다는 콘텍스트를 잡으려고, 즉 숲을 보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음모론 전공자 (?)가 아니라면 말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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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 소설가의 쓰는 일, 걷는 일, 사랑하는 일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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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에세이.

오가와 요코 저,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를 읽고.
(책의 부제: 소설가의 쓰는 일, 걷는 일, 사랑하는 일)

감상에 앞서 고백할 게 하나 있다. 이 책을 읽고 오가와 요코가 좋아졌다. 나는 오가와 요코의 글에 빠져들었고 매료되어 버렸다. 그녀의 글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의 글은 계속 읽고 싶은 글, 아끼면서 읽게 되는 글, 옆에 두고 싶은 글, 또 읽고 싶어 지는 글이다. 살면서 이런 글을 만난다는 건 평소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맞이할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이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 여러 작가가 쓴 수십 권의 산문집 (혹은 에세이집)을 읽었지만, 이 책만큼 내 마음에 담기는 산문집은 없었다. 아무렴, 에세이는 이렇게 쓰는 거지, 하며 글을 읽는 내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에세이라는 장르를 비로소 처음 접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틀간 책을 읽으며 나는 오가와 요코의 눈과 귀와 마음이 되어 내 주위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 따스한 시선은 책 밖으로 걸어 나와 숨을 쉬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와 내 주위에 먼지 쌓인 채 방치되어있던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잊혔던 것들이, 소멸하던 것들이 다시 살아나 조용히 빛을 발하게 되었다. 감사했다. 회복이었다. 나도 모르게 무뎌지고 타성에 젖어가던 나를 멈추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주는 묘약이었다. 책 한 권이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충만하게 만들고,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에까지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또 한 번 글의 힘을 실감하며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꼭지를 다 읽을 때마다 내 마음 한편은 잔잔한 감동으로 무릎을 치며 탄성을 지르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은 자괴감에 빠져 긴 한숨을 쉬고 있었다. 쉬이 지나칠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을 어찌 이리 따스하면서도 세밀한 시선으로 담아낼 수 있는지, 어찌 그것을 놓치지 않고 조용히 내면화하여 자기 객관화와 절제를 거치고 그 이면에 담긴 깊은 의미까지 통찰하여 누구라도 읽기 쉬운 언어로 고스란히 번역해낼 수 있는지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감탄은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을 가뿐히 뛰어넘는 정도였다. 이윽고 나의 모자란 글쓰기 역량에 대한 회의가 몰려왔다. 내가 도무지 써낼 수 없는 글이라는 생각이 점점 굳어졌고, 나는 좌절했다. 물론 이 좌절은 이내 나의 글쓰기에 대한 큰 자양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세 달 전 읽었던 그녀의 대표작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고 나는 그녀의 잔잔하고 편안한 문체에 적잖이 마음을 빼앗겼었다. 감상문에도 밝혔듯이 이미 그때 반드시 기억에 남을 작품임을 예감했었다. 그 여운이 남아 그녀의 이름으로 작품을 검색하던 중 지난달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신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렜다. 그런데 소설이 아닌 에세이였다. 오히려 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에세이는 소설과 달리 작가의 직접적인 입김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문체나 사상 등을 알고 싶다면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더 유용하다. 그래서 나는 별다른 조사 없이 보관함을 거치지 않고 그 책을 곧바로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이 책을 다 읽고 돌이켜볼 때 그때 나의 선택은 칭찬해주고 싶을 만큼 잘한 것이었다.

에세이는 시선이다. 작가의 시선을 중간 매개체 없이 느낄 수 있는 글이 바로 에세이다. 에세이를 읽고 감동을 받는다는 건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감동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 시선을 기꺼이 따라가며 사소한 일상을 함께 관찰하고 성찰하고 통찰하며 위로와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 글은 마음에 담기지 않은 채 버려지는 간판과도 같은 글이 된다. 독자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 휘황찬란한 글, 온갖 양념이 버무려져 첫맛은 강하나 계속 먹을 수 없는 글, 아아, 이런 글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자본주의의 논리가 글 속에도 깊숙이 침투하여 꽈리를 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오가와 요코와 같은 글을 만나고 먹고 하나가 되는 경험은 가뭄 가운데 내린 한 줄기 비처럼 귀하고 소중한 양식일 것이다. 이제 예순이 다 된 오가와 요코가 조금 더 많이 글을 써주면 좋겠다. 나는 오가와 요코의 팬이 되었다.

#티라미슈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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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책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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휑할 만큼 고적하고 아름다운 에세이.


한정원 저, ‘시와 산책’을 읽고.


아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이 조용히 압도되는 느낌.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이 휑한 아름다움. 이내 그친 눈처럼 아쉬우면서도 고독함과 애잔함을 잔뜩 머금고 있어, 언제든 꺼내 읽을 수 있도록 항상 옆에 두고 싶은 글. 이런 예기치 못한 순간을 맞이할 때면 나는 경건한 자가 되어 입을 봉하고 눈과 귀만 열어 작가가 그려놓은 세계로 다소곳이 나아간다. 이 책의 감상을 적기에 나는 차라리 벙어리가 되는 편을 택하고 싶다. 그냥 느끼고 받아들이고, 또 젖어보기를 택하고 싶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몇 자 적어본들 하얀 눈에 섞인 까만 먼지가 될까 봐, 그래서 부서질까 봐 염려가 된다. 부디 이 짧은 감상문이 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오가와 요코의 산문집,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를 읽고 곧장 분위기를 이어 표지부터 파랗고 하얀 눈을 연상케 하는 책을 골랐다. 특별한 이유 없이 마음이 무너질 땐, 오케스트라의 거창한 연주나 화려하고 높은음을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독주보다는 단순하면서도 잔잔한 멜로디를 연주하는 적당히 느린 피아노 곡에 손이 간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수십 권의 책 중 이 책을 손에 들었다. 제목부터 와 닿았다. ‘시와 산책’이라… 처음 보는 작가, 처음 보는 출판사. 모든 게 낯설었다. 그러나 그 낯섦이 나를 묘하게 끌어당겼다. 하얗고 깊은 숲에서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책 양 날개에는 아무런 소개도 없다. 텍스트로 승부하는 간소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첫 꼭지를 읽고 할 말을 잃었다. 가슴이 휑하면서도 여전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밤은 지새워도 충분히 용서가 될 것 같았다.


오가와 요코의 에세이를 읽고 에세이의 정수를 맛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정원의 에세이를 읽고 그 생각을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정수’라기보다는 ‘정수 중 하나’로 말이다. 두 에세이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느낌이다. 한 가지만 예로 들면, 오가와 요코의 글에서 사람이 느껴진다면, 한정원의 글에선 혼자가 느껴진다. 그래서 더 적막하고 외롭다. 그 이유 중 한 가지는 아마도 두 작가의 삶의 배경 때문일 것이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워본,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해내고 예순의 나이를 바라보는 오가와 요코와 수도자가 되기로 작정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중년의 나이로 사람이 아닌 반려묘와 함께 살아가는 한정원. 에세이는 그 사람의 숨결과 시선이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책 전반에 배어 있는 이 서로 다른 느낌은 아마도 두 작가의 삶의 흔적과 현재를 반영하는 것일 테다. 두 에세이를 연달아 읽으며 나는 서로 다른 두 인생과 두 사람과의 조우를 통해 한층 더 깊고 풍성해진다.


글의 간결성과 절제미, 간접적인 표현 안에 숨은 도발적인 직접성. 시 같은 에세이. 에세이 같은 시. 마침 오가와 요코와 한정원의 책이 ‘산책’이라는 단어를 공유한다. 오가와 요코의 정겨운 산책이 있는가 하면, 한정원의 고적한 산책도 있다. 우리 인생도 그럴 것이다. 다만, 그 인생을 그렇게 두 가지의 산책처럼 살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두 책 모두 손이 닿기 쉬운 곳에 놓아두었다. 종종 꺼내 읽게 될 것 같다. 아니, 그럴 것이다. 따스한 시선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휑한 가운데 아름다움을 맛보기 위해서.


#시간의흐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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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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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는 삶, 그리고 타자를 알아가는 애씀에 대하여.

서보 머그더 저, ‘도어’를 읽고.

아직도 눈을 감으면 나는 낯선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거리에 서있다. 그 거리에 자리잡은 공동주택과, 당장이라도 음식 냄새, 커피향, 여러 꽃향기가 뒤섞여서 날 것 같은 넓은 앞마당, 그리고 그 뒤로 마치 세상과 담을 쌓은 것처럼 언제나 견고하게 닫혀있는 에메렌츠 집의 문이 보인다. 이어서 이 모든 것을 관망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로 조곤조곤 그 세상을 내게 보여주는 ‘나’, 그리고 에메렌츠와 ‘나’를 이어주는 끈이자, 때론 에메렌츠로, 때론 ‘나’의 내밀한 자아로, 때론 인간의 영역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의 뜻을 전해주는 매개자로 역할하는 것 같은, ‘비올라’라는 이름을 가진 개 한 마리도 보인다. 

이 작품은 공간적으로 꽤나 정적인 구도를 가진다. 앞서 언급한 공간이 소설 대부분의 사건이 벌어지고 시간이 흘러가는 장소다. 에메렌츠와 ‘나’, 그리고 비올라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조연에 불과하며, 나머지 공간과 시간도 부차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처음 만나는 이 책의 저자, 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는 이 작품 속에서 누구보다 훌륭한 여행 길잡이가 되어준다. 독자를 어느새 단 한 사람 에메렌츠의 내면에 집중하게 만들고, 그녀를 알아가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에메렌츠를 떠나보낸 ‘나’의 복잡한 심정을 주목하게 만든다. 

역사의 흔적이 겹겹이 쌓인, 어떤 오래되고 두꺼운 책 한 권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경이감에 찬 채 그 안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는 것처럼, 이 책은 신비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렇다. 이 책이 제공하는 여행은 지리적인 의미가 아닌, 비로소 한 사람을 알아가는 끝없이 신비한 여정에 비유할 수 있으며, 이는 곧 나와 타자를 이해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 여정과 겹쳐진다. 

주제 넘을지 모르겠지만, 책을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이 책에 한 번 빨려들어가기 시작하면 아마 나처럼 어지간해선 헤어나기 어려울 거라는 점이다. 이 책이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정적인 이미지 안에는 아주 깊은 우물이 있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건 그 우물의 깊이와 그 깊은 우물 속에서 천천히 물을 길어내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좁은 공간에 흐르는 시간의 깊이와 그것이 한곳으로 모여 마침내 한 사람을 이루고 있다는 신비도 이 책을 통해 보게 될 것이다.

저자 서보 머그더의 분신인듯한 일인칭 화자 ‘나’는 작품 속에서 잘 나가는 전업작가다. 그녀는 결혼 후 아이도 가지지 않고 남편과 단 둘이서만 산다. 오로지 할 줄 아는 건 책상 앞에 앉아 타자기를 두드리는 것이다. 청소며 요리며 할 것 없이 모든 집안일이 그녀에게는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은 인생의 부수적인 일일 뿐이다. 집중해서 글을 쓰기 위해선 그런 귀찮고 하찮은 일들을 대신 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수소문을 해서 그 일을 담당해줄 사람을 구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에메렌츠다.

에메렌츠가 죽기까지 20여년을 함께 살게 된 ‘나’는 에메렌츠와 티격태격하며 그녀에게 미운정 고운정이 들다가도 도무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감을 끝내 극복할 수 없었다. 에메렌츠는 완전무결하며 무오하기까지 할 정도로 독립적인 삶을 스스로 완벽하게 통제하며 사는 아주 강한 개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완벽주의자 기질까지 보이는 그녀는 거의 모든 제도와 거의 모든 사람들의 관습이나 사상 등에 대해서 언제나 저항하며 반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반사회적이라거나 이기적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면 곤란하다. 그녀는 그런 단어와 삶에서 정반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에메렌츠는 그 누구보다도 헌신적, 열정적이었으며, 그 누구보다도 이웃에게 관대했고, 기꺼이 나누며 흔쾌히 돕는 일에 앞장선 사람이었다. 그녀는 실로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가서 자신의 신앙을 깊게 만드는 동안그들이 교회에 앉아서 소망하고 기도하고 다짐하던 이웃사랑을 길거리로 나와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말과 수사로 화려하게 도배하는 것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뭇사람들과는 달리 그녀는 존중과 배려, 희생과 환대를 삶으로 조용히 살아내는 사람이었다. 이런 그녀에게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세상은 한낱 인공적으로 조작된 비극 영화처럼 충분히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비록 비관론자, 반엘리트주의자를 자처했고, 뭇사람들의 오해를 쉽게 살 정도로 단순하고 직설적인 삶을 살았지만, 에메렌츠에게 삶은 단순히 허황된 소망으로 치장한 뒤 아무것도 실천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자위하며 제자리 걸음이나 후퇴를 하는 시공간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삶이란 실제로 살아내는 일상이었다. 이런 면에선, 평론가 신형철도 간파한 것처럼 에메렌츠는 여성 조르바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에메렌츠를 의지하고 사랑하게 된다. 저자가 작품 속 화자 ‘나’를 전업작가로 등장시킨 이유는 저자의 분신이라는 의미도 가능하겠지만, 아마도 에메렌츠가 살아내는 삶의 모습을 더욱 조명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머리로 대표되는 글만 쓰는 사람이 여기에 있고, 몸으로 대표되는 일만 하는 사람이 또 저기에 있다. 이 강력한 대비를 알아챈 독자라면, 아무래도 에메렌츠의 삶의 방식에 대한 매력 앞에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다분히 ‘나’의 입장에 천착한 삶의 방식으로부터 부조리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이 작품은 단지 그 대비를 보여주기 위해 쓰여지지는 않았다. 더욱 중요한 부분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이다. 비록 마치 닫힌 문처럼, 여느 사람들과는 너무도 다른 비범한 삶의 방식을 고수하던 에메렌츠를 궁극적으로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에메렌츠의 죽음에 대해 과도한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비록 영원히 뛸 것만 같던 에메렌츠의 심장이 어느날 멈추는 날이 왔었지만, ‘나’는 에메렌츠를 삶으로 사랑했고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나는 책의 후반부를 가득 메우는 그녀의 내면의 독백에서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영원한 숙제이며, 머리에서 몸으로 전환되는, 마치 기독교의 성육신 개념과도 흡사한, 과정은 인간에게 있어선 완료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인 우린 그저 오늘도 애쓸 뿐이다. 타자를 안다는 것의 무게중심은 애씀에 있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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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소중한 삶은 없다 - 방황하는 영혼들을 치유하는 끝없는 사랑과 연민의 힘
그레고리 보일 지음, 이미선 옮김 / 공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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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서기.

그레고리 보일 저, ‘덜 소중한 삶은 없다’를 읽고.

머리말에서 저자 그레고리 보일 신부는 혹시라도 있을 이 책에 대한 오해를 예방하고자 두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이 책은 회고록이 아니라는 점. 둘째, 이 책은 ‘갱단에 대처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저자의 바람은 다음과 같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공유하는 유대감의 범위가 확대되면 좋겠다. 이 책은 조직폭력배들에게 인간의 얼굴을 찾아주고,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겪은 무시무시한 고난과 깨진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의 상처를 찾아내고자 한다.”

저자가 밝힌대로 이 책은 수많은 짧은 에피소드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는 실제 갱단에 소속되어 있던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임을 주의하라) 사람들의 실화다. 그만큼 하나의 이야기는 큰 임팩트가 있으며, 살아있는 메시지를 가진다. 특히 이야기들의 주인공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기에 더욱 그렇다. 

저자는 이 에피소드들을 읽는 독자들에게 바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쓴다. 이 책의 중요한 축이자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 속에 근본적인 과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어떤 삶은 다른 삶보다 덜 소중하다’고 여기는 우리 마음속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책을 먼저 읽은 독자로서 제안하고 싶은 것 한 가지가 있다. 각 에피소드를 읽어나갈 때 갱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의 이야기로 읽어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단순히 죽은 이들을 통해 교훈이나 뽑아내는 목적으로는 이 책의 무게가 너무 크다. 만약 이 책을 읽는 이유가 교훈을 얻거나 감동을 받기 위함이라면 당장 이 책을 내려 놓으라. 그건 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감히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믿음의 선진들을 우상시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일궈놓은, 누구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마주할 때면 나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나 세상의 빛나는 저 높은 곳에서 벌어지는 변화가 아닌, 감히 ‘바닥’, ‘절망’, 심지어 ‘지옥’과 같은 단어가 어울릴법한, 어둡고 낮은 곳에서의 변화를 맨눈으로 목도하게 될 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진 나로선 그저 할 말을 잃고야 만다. 동시에 내 안에선 소요가 인다. 잊고 있었던, 혹은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두 세상의 차이, 즉 예수를 닮는다는 것과 실제 현장에서 그렇게 살아낸다는 것의 괴리가 걷잡을 수 없이 명징해져버리기 때문이다. 나름 평온했던 내 마음에서 거짓과 기만의 역겨운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는 한없이 작아짐과 동시에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무래도 이 책의 큰 축은 저자인 그레고리 보일 신부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존재감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소개를 이 짧은 감상문에 굳이 옮겨다 놓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잠깐의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거기에 10 여분 정도만 더 검색에 시간을 투자한다면,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했는지 비교적 상세하게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레고리 보일 신부는 엘에이 갱단 한복판에 자진해서 들어가 그들과 함께 했으며, 그들과 함께 변화를 일궈냈다. 마치 갈릴리 주민과 같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나라를 살고 보여주신 예수처럼 말이다. 

물론 그레고리 신부는 예수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와 너무 닮았다. 그의 캐릭터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가 행한 일에 대해서다. 그의 과거를 보면 아마 누구라도 예수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확성기에 대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열렬히 외치는 억지스런 행위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삶의 열매를 그레고리 신부는 조용히 자신의 인생을 바쳐 얻어낸 것이다. 그는 떠들지 않고 예수를 보여주었다. 예수라는 단어를 남발하지 않고도, 혹은 고급스러운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누구나 머리 속 어딘가에 파편처럼 떨어져있던 예수에 대한 기억과 정보를 스스로 찾아내고 주워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각 개인으로 하여금 남들과 동등하게 사랑받을 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게 만들었다. 그의 삶은 대형교회에서 자본의 힘으로 밀어부치는 선교라는 단어로도 감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선교 현장이었다. 

이 책은 여느 책과는 달리, 읽으면 읽을수록 집중을 해야 한다거나, 저자의 어떤 숨어 있는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전혀 없다. 이미 모든 메시지는 머리말과 프롤로그에 다 써져 있다. 1장부터 9장까지의 2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모두 실제 저자와 함께 했으며 저자의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은 이들의 이야기로 빼곡히 들어차있다. 각 장들은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아마도 많고 많은 에피소드들을 저자가 나름 분류하면서 공통된 메시지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각 장들을 하나하나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총 아홉 장의 제목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책의 중심된 축을 이루는 단어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연민’, ‘관심’, ‘유대감’이다.

이 책을 덮으며 나에게는 아직 이 책을 읽어낼 만한 충분한 공감력이 터무니 없이 부족함을 깨닫는다. 연민과 관심과 유대감을 말하면서도 나는 그 단어들의 사용 범위의 경계를 나름대로 ‘안전하게’ 그어두고 살고 있음을 여실히 보게 된다. 물론 내가 지금 당장 그레고리 신부처럼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난 이상 뭔가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싶다. 비슷한 일을 해내겠다거나 더 큰 일을 해내겠다는 어설프고 유치한 결단보다는, 난 예전의 나보다는 조금 더 나은 공감능력의 소유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이런 책을 통해서 그러한 목적을 위한 점진적인 변화가 내 안에서 진행되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가져본다. 언젠가 한 번 엘에이 다운타운에 들를 기회가 있다면, 홈보이 인더스트리에 들려 커피와 빵을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1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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