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유혹 - 상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2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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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으로 더 깊은 공감과 풍성한 신앙을.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최후의 유혹’을 읽고.

 

예수의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가톨릭에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에 대한 본격적인 감상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힌 집필 의도를 먼저 소개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행여 편협하게 기울어진 자신의 렌즈로 이 책과 이 감상문을 읽어 보지도 않고 함부로 판단하게 될까 하는 염려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다. 다음과 같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까닭은 투쟁하는 인간에게 숭고한 귀감을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나는 투쟁하는 인간에게 고통이나 유혹이나 죽음이란 정복이 가능하며 그 세 가지는 이미 정복이 되었으니 두려워하면 안 된다는 진실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고통에 시달렸고, 그때부터 고통은 신성하다고 여겨졌으며, 유혹은 그가 길을 잃게 하려고 마지막 한순간까지 애를 썼고, 유혹은 패배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 순간에 죽음은 영원히 정복되었다. 그가 걸어간 길에서는 모든 장애물이 하나의 이정표여서, 더 높은 승리를 위한 계기였다. 이제 우리 앞에는 본보기가 마련되었으니, 그리스도는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불을 밝히고, 우리에게 힘을 준다. 이 책은 전기가 아니라, 투쟁하는 모든 인간의 고백이다. 이 책을 펴냄으로 해서 나는 많은 투쟁을 했으며, 삶의 많은 아픔을 겪었던 한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셈이다. 이 책을 읽게 될 모든 자유인은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은 사랑이 마음에 넘쳐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리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한 가지 더, 이 책을 집필하면서 어떤 심정이었는지 저자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는 ‘최후의 유혹’을 쓰던 동안의 밤과 낮처럼 생생하게 그토록 무섭고도 참혹한 골고타에로의 길을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 본 적이 없었고, 그토록 강렬한 감정과 이해와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인류의 위대한 희망과 고뇌를 고해하는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나는 어찌나 감동했는지 눈에 눈물이 가득히 고이곤 했다. 나는 그토록 짙은 감미로움을, 그토록 깊은 고통을 불러일으키며 내 마음속으로 방울져 떨어지는 그리스도의 피를 일찍이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이 책은 소설이다. 기본적으로 작가의 상상력에 기반한 허구라는 말이다. 다만, 소재가 ‘예수의 생애’ 일뿐이다. 물론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1954년 당시 기독교에 몸 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겐 긴장을 조성했음이 틀림없다.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맹비난을 받았으며, 가톨릭으로부터는 공식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예수의 존재, 신성, 그리스도 되심을 전혀 부인하지 않는다. 복음서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는 이 작품 속에서도 구약의 예언대로 갈릴리가 아닌 베들레헴에서 성령으로 인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으며,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고, 우리가 익히 아는 이름의 제자들과 함께 하셨으며, 병자들을 치유하셨고, 비폭력과 사랑을 선포하셨으며, 비유를 들어 하나님나라를 설명하셨다. 또한, 자신은 깨끗하다며 손을 씻는 빌라도의 체제 하에서 고난을 당하셨으며, 나중엔 결국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셨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사건들은 이 책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 대해 신성 모독이라는 비난은 부당하다. 오히려 비난의 화살은 저자가 아니라 정치와 무지의 두 날개를 장착하여 저자에게 비난을 퍼부었던 세력에게 돌리는 편이 적합해 보인다. 언제든 권위를 가진 다수가 힘을 합쳐 힘없는 소수의 입을 틀어막는 일의 배후에는 냄새나는 무언가가 있는 법이다. 

 

참고로, 꽤 많은 시간을 들여 이 책을 읽어낸 나의 예수를 향한 믿음은, 그들이 우려했던 바와 정반대로, 얕아지거나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어졌다. 이 작품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예수의 인성에 해당하는 예수의 고뇌를 더 깊고 풍성하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카잔차키스에게 그래서 감사한다. 덕분에 2021년 사순절을 즈음하여 예수의 생애를 찬찬히 되짚어볼 수 있었으며,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동시에 가진 예수의 이원론적인 본질이자 불가사의한 신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고, 예수가 인간으로서 겪었을 법한 진정한 고뇌가 무엇이었을지 새롭게 상상해봄으로써 그가 통과한 고난과 죽음의 의미도 재고해 볼 수 있었다. 사순절 책으로 나는 주저함 없이 이 책을 추천한다. 다만, 예수가 인성도 가지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도 그동안 다분히 신성에만 치우쳐 예수를 이해해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소설이다. 복음서와 비슷하게 예수의 생애를 다룬다. 복음서를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야기나 사건들이 불연속적일 뿐 아니라 네 권밖에 안 되는 복음서끼리도 100% 일치하지 않는다. 실제로 복음서마다 사건의 순서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고, 모든 사건이 각 복음서에 다 소개되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복음서가 목격자들의 증언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복음서를 문학작품 정도로만 취급하기도 한다. ‘역사적 예수’, 혹은 ‘예수 세미나’에 대한 얘기까지 갈 필요는 없지만,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텍스트이자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의 생애가 유일하게 적힌 복음서에 대한 해석이 이렇게 중구난방인 가장 큰 이유는 원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납득이 될 만한 이야기라고 해도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믿음을 빼고 본다면, 모두가 가설이고, 모두가 해석일 뿐이다. 그저 유명했던 신학자들의 업적일 뿐인 셈이다. 요컨대, 복음서는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복음이자 답이 되지만, 그 외의 사람들까지 객관적으로 납득시킬 만한 논리적, 이성적 근거를 가지지는 못한다. 

 

내가 이렇게 복음서에 대한, 알면 좀 불편할지도 모르는 사실을 적는 이유는 복음서 자체도 시공간에 제한되어 그 시대, 문화, 사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 의해 기록된 책이라는 사실, 예수가 살아계실 때 실시간으로 누군가가 적은 르포르타주가 아닌 후대에 쓰이고 편집된 책이라는 사실, 게다가 원본이 아닌 사본이라는 사실 (복사기나 사진기가 없던 시대에 사본이라 함은 누군가의 필사를 뜻하고, 여기서 누군가라 함은 명령에 의지하여 움직이는 기계가 아닌 자기 생각과 감정이 있고 의지와 상관없이 실수도 곧잘 하는 인간을 뜻함)을 강조하여 복음서가 역사적 기술이라든지 성령이 불러주는 것을 받아 쓴 책이 아님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기 위해서다. 즉, 복음서를 읽을 때조차도 독자들은 얼마든지 복음서가 말하지 않는 빈 공간을 상상하면서 읽고 묵상할 수 있는 문이 열려있다는 얘기다.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지 복음서를 우상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순전한’ (혹은 근본적인) 기독교를 이루는 굵직굵직한 사건과 이야기에 기반을 둔 교의나 교리에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이를테면, 삼위일체, 성육신, 부활 등 인정하지 않으면 굳이 기독교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사항들), 개인의 풍부한 상상력은 복음서에 대한, 나아가 예수에 대한 보다 풍성하고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 이 글에서 다룰 ‘최후의 유혹’ 역시 그런 선상에 놓여 있는 작품으로 이해하면 된다. 

 

복음서가 영화라면, 이 작품은 영화가 배제한 일상까지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카잔차키스는 이 책에서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빈 공간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는 작업을 충실하게 진행한다.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할 법한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복음서를, 그리고 예수를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 책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예수의 신성보다는 인성이다. 저자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 책은 신과의 결합을 위한 영혼과 육체의 투쟁에 대한 오름길을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의 투쟁은 같은 육체를 가진 우리로 하여금 깊은 공감을 하게 만들고 신앙의 깊이까지 확장시키는 효과를 내어 예수의 고난이 우리의 고난이요,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요, 예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임을 좀 더 사실적으로 깨닫도록 도와준다. 결과적으로 우린 이 책을 통해 예수의 사상과 복음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의 투쟁. 이것은 내게 비친 카잔차키스의 삶과 그 삶을 살아낸 그의 의지를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다. 그는 노년에 접어들어서야 방랑으로 이루어진 그의 모든 삶을 뒤돌아보고 종합하며 자유와 투쟁에 대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 듯하다. 그에게 있어 자유는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여가’와도 같은 단순히 무언가를 더 할 수 있는 기회나 시간의 증가를 뜻하지 않는다. 그의 자유는 무언가로부터의 해방이다. 여기서 무언가는 육체와 영혼 둘 다를 포함할 뿐 아니라 욕망이나 희망까지도 포함한다. 카잔차키스는 무언가를 욕망하거나 희망하는 마음 역시 어딘가에 매어있음을 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유로부터 자유가 되는 것이라고. 어떤 것을 원하지 않아도 자족할 수 있는 상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상태, 즉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가 그가 말하는 자유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도 있겠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 충만이라는 개념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런 자유가 육체화되어 그의 앞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조르바였다. 조르바는 베르그송과 니체와 붓다과 레닌을 넘어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를 부분적으로나마 눈 앞에서 보여준, 그가 평생 찾던 답에 근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자유는 곧 ‘카르페 디엠’, ‘메멘토 모리’, 그리고 니체가 말한 ‘아모르 파티’까지 이어지는 ‘지금, 여기’를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자세에 담겨 있다.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론적 신앙관’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음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논란이 될 만한 소재로 ‘예수의 생애’를 선택한 이유는, 앞서 인용한 그의 집필 의도에서도 보이듯, 역사상 그가 평생 고뇌했던 영혼과 육체의 투쟁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르바는 해방과 자유의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는 아니었다. 그는 신성을 가지지 않은 인간으로서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아낸 사람일 뿐이었다. 그는 죽어 흙으로 돌아갔고 부활하지 않았다. 그는 인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 아닌 철저하게 개인적인 자유를 만끽하며 인생을 살아낸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는 달랐다. 조르바와는 달리 그리스도는 만인에 대한 보편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의 삶은 개인적 삶이 아닌 인류의 삶이었고, 그의 투쟁은 한 인간의 투쟁에 국한되지 않고 인류의 투쟁을 대변했다. 

 

자세한 내용은 그의 마지막 저서 ‘영혼의 자서전’에 풍부하게 담겨있다. ‘영혼의 자서전’을 몇 달 전에 읽은 나로서는 이 책 ‘최후의 유혹’도 그 선상에서 읽힐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71세가 되던 해인 1954년 ‘최후의 유혹’은 가톨릭 금서로 지정되었고, 그다음 해에 그의 고향인 그리스에서 출판이 가능해졌는데, ‘영혼의 자서전’은 그때 막 써지고 있었다. 그리고 1957년, 향년 74세의 나이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인생의 후반전 중에서도 말미에 이 두 작품이 모두 쓰였던 것이다. 이는 카잔차키스 전 생애에 걸쳐 농축된 그의 철학과 신학에 대한 성숙하고 깊은 조예가 진득하게 반영된 작품이라는 뜻이다. 

 

카잔차키스의 인생은 오름길이었다. 투쟁이었다. 터키의 핍박을 받던 그리스의 시대적 정황에 그대로 노출된 채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평생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방랑의 삶을 살았지만, 크레타에 대한 그의 뿌리만은 잊지 않았다. 크레타는 그의 육체와 영혼의 뿌리였다. 그는 젊은 시절 이후 그의 가장 큰 고뇌와 모든 기쁨과 슬픔의 원천은 영혼과 육체의 무자비하고도 끊임없는 투쟁에서 연유했다고 썼다.  모든 인간은 영혼과 육체에 있어서 신적인 본질의 한 부분을 이룬다고도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비는 단순히 기독교만의 신비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해 보편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유한한 육체에 갇힌 영혼이 인간을 표현한다면, 영혼과 육체 사이의 모순됨에서 발생하는 투쟁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완전한 인성을 가지셨던 예수도 이것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주력한 예수의 투쟁도 이러한 전제에 바탕을 둔다.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멜 깁슨이 감독을 맡았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기억할 것이다. 예수의 생애 중에서도 마지막 며칠만을 다룬 영화인데, 제목에서부터 강조되듯 이 영화는 특히 예수의 수난에 초점을 맞춘다. 그 고난이 어른이 봐도 잔인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그려져 아이들은 혼자서 못 보는 등급으로 상영되기도 했었다. 이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펑펑 흘렸을 테고, 자신의 피 같이 붉은 죄를 떠올리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깊은 생각을 다시금 했을 것이다. 나 역시 중간중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영화 얘기를 갑자기 꺼내는 이유는 이 책 ‘최후의 유혹’이 초점을 맞추는 부분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는 이 책만이 가진 고유한 장점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면서 눈을 찔끔 감고 눈물도 흘리며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의 수난이 너무나도 잔인하고 끔찍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가 왜 저렇게 극심한 고난을 받으셔야 했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아마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순히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유월절 어린양 이자 대속 제물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설명은 그 질문을 던진 사람 앞에서는 순간 초라하게 느껴질 수 있고 그다지 설득력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잔인함과 끔찍함은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느낄 수 있지만, 왜 그래야 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 대해선 이 영화가 답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과 역사를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 이 영화는 그저 컴퓨터 그래픽과 분장,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력에 박수를 보내는 것 이외엔 달리 전할 메시지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는 죄가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만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았나 싶은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다. 아무리 강렬하다 하더라도 시각, 청각적인 효과만으로는 예수가 받으셨던 고난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내게도 이 영화는 ‘강한 충격의 가벼움 혹은 허무함’ 정도의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반면,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에서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시간 순으로 보자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초점을 맞추는 부분 이전이다. 즉, 예수가 유다의 배반으로 잡히시고 고난 받으시고 골고다로 오르시기 이전, 그러니까 예수가 육체를 가진 완전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점점 인지해 가면서, 동시에 인간이면 누구나 경험할법한 유혹들에 노출되고 그 유혹들을 극복해내는 과정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이를테면, 한 여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 마음, 땀 흘리며 성실히 일한 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휴식을 취하며 평화롭게 하루 해가 지는 장관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기본적이고 소박한 바람들 말이다. 그러나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또 죽음으로부터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예수는 반드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했다. 이러한 고유한 사명 앞에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욕망은 한낱 사탄의 유혹에 불과했던 것이다. 어쩌면 예수가 공생애 기간 동안 겪어야 했던 가장 큰 고난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부각했던 며칠 간의 수난이 아니라, ‘최후의 유혹’이 강조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들 (다시 말해, 유혹들) 앞에서 투쟁하셨던 수년 혹은 수십 년의 일상 안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인이라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인정한다 (극좌와 극우는 제외하기로 한다. 그들을 굳이 기독교인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공생애 기간 중 인간으로서 느꼈던 여러 욕망들 (혹은 유혹들) 앞에서 예수가 어떻게 대응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복음서에 기록된 바가 없다. 그저 막연하게 우린 예수는 그런 유혹들 앞에서 당연히 초연하셨을 거라고 생각하고 만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인성은 그저 육체를 입고 있다는 사실에만 국한되어 버리며,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모든 유혹은 유혹으로 작동조차 하지 못했을 거라고 넘겨짚고 마는 것이다 (만약 이런 논리라면, 예수는 수난 중에서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어야 맞다).

 

그러나 예수가 인간, 특별히 남자의 몸을 입으셨다면, 정상적인 인간 남자가 이차성징을 거치는 사춘기 시절 혹은 피가 펄펄 끓어 넘칠 이십 대 시절에 이성에 대한 환상이나 유혹에 단 한 번도 사로잡히지 않으셨을까?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불안의 이유가 죽음이라고 할 때, 과연 예수는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아무런 마음, 감정의 동요 없이 그 운명을 그대로 덤덤히 받아들이셨을까? 거부하고 싶지 않으셨을까? 그게 아니라면 미루고 싶지 않으셨을까? 죽음이 두렵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남들 다 하는 것처럼 맘에 드는 여자와 연애도 하고 싶고 결혼하여 가정도 갖고 싶어 하지 않으셨을까? 

 

우린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상상 자체를 불경하게 느낀 나머지 스스로 쉬쉬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카잔차키스가 이 작품에서 우릴 대신해서 상상한 대로, 이러한 질문들을 용감하게 던져 보고 스스로 답을 해 본다면, 우린 인간으로서 인간 예수의 비장한 마음을 좀 더 가깝게 느끼고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책을 통해 복음서 행간에 녹아있는 일상 속 예수의 투쟁이 존재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면, 예수를 더 이해하고 나아가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예수 닮은 삶’의 의미를 다시 새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잔인한 장면들 이면에 숨어있는 예수의 마음을 감지할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여기에 카잔차키스의 숨은 의도가 녹아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는 제자들의 캐릭터가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는 데에 있다. 가장 특이한 설정은 단연 유다와 도마의 캐릭터에서 찾을 수 있다. 복음서에는 제자들의 일상적 모습이 그들의 직업 정도의 묘사 이외엔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복음서 전체의 흐름과 중심사상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린 그들의 모습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그린 유다의 이미지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이 책에서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를 판 인물 정도로 간단하게 그려지지 않고,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이전부터 예수를 잘 알고 있는 나이 많은 열혈 당원으로 그려진다. 유다는 유다 한 사람만을 대변한다기보다 당시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의 독립이나 구약의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기 원하는 열혈 당원을 포함한 민중들의 심리를 대변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다음의 대사는 유다의 캐릭터를 단박에 알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말 따위는 상관하지 않아요. 그리고 난 베드로처럼 잔소리가 많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도끼를 들고 있는 한 나는 언제까지나 당신 곁에 머물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도끼를 버리면, 나는 당신을 버릴 겁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나는 당신을 따르는 게 아니에요. 나는 도끼를 따릅니다.”

 

또한 유다의 배반은 복음서에서 그려진 것처럼 최후의 만찬 중 일어나 갑자기 어두운 곳을 향해 뛰쳐나가는 시적인 모습 대신, 예수와 충분히 대화를 거친 뒤 배반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는 다음의 대화에서 쉽게 눈치챌 수 있다. 

 

- 예수: “당신은 인내해요, 유다. 내 형제여.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하고 당신이 나를 배반하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모자라는 힘은 하느님께서 주셔요. 우리 두 사람은 세상을 구원해야만 합니다. 나를 도와줘요.”

- 유다: “만일 당신이 스승을 배반해야만 하는 입장이라면, 그를 배반하겠습니까?”

- 예수: “아뇨, 내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이 나를 가엾게 여겨 그보다 쉬운 일을 맡겨 십자가에 매달리도록 하셨어요.”

 

아마 이 글이나 책을 읽는 누군가는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충격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유다의 입장을 고려해 보는 건 내게 의미가 있었다. 유다 역시 사람이었고, 예수의 제자였으며, 배반하기로 작정했을 때 어떤 심각한 갈등을 겪지 않았겠는가? 복음서에는 전혀 나와있지 않지만, 유다의 배반이 없었다면 예수의 죽음은 없었든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단순히 갑작스러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다가 나중에 정신 차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정도의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는 것이다.

 

의심 많은 도마는 다음의 대사로 그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예수가 어떤 기적을 행하거나 무력을 동원하여 로마로부터 해방을 선포하고 이스라엘의 위대함을 드러내 보이는 구세주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나머지 제자들에게 외치는 소리다. 약삭빠르고 사리를 잘 분별하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아마도 여러 제자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목소리로 저자가 이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왜 살기등등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나요? 자그마한 거래, 우린 그걸 했어요. 내가 하나 주면 당신도 하나 내놓고요. 나는 빗과 실타래와 손거울 따위 내가 파는 물건들을 주고 하늘나라와 바꿨어요. 여러분도 모두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누구는 고기잡이배를 내놓고, 누구는 양 떼를 내놓고, 누구는 마음의 평화를 내놓았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모두 마귀한테만 좋은 일을 한 셈이죠. 우린 파산했고, 재산을 날려 버렸습니다.”

 

상상력으로 제자들의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어 예수와 대화한 장면이나 그들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결연히 영혼과 육체의 투쟁을 극복해나가고 있는 예수의 마음이 어땠을지 좀 더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스스로도 충분히 감당하기 어려운 투쟁을 하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예수는 오합지졸의 제자들과도 함께 하셔야 했다는 사실을 상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최후의 유혹’이라는 제목은 33장으로 (예수의 나이를 의도한 게 아닌가 싶다) 이뤄진 이 책의 마지막 네 장에서 예수의 꿈으로 나타난다. 천사를 가장한 사탄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코 앞에 둔 예수에게 꿈을 보여주는데, 그 꿈속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리기 이전에 일상에서 오랜 기간 동안 겪고 극복해온 영혼과 육체의 투쟁의 반대편 결과를 살아간다. 즉, 투쟁에서 실패했고 유혹에 넘어가버린 비겁한 인간으로 전락한 예수의 모습이 꿈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꿈속에서 예수에게는 자신의 죄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인류의 죄를 짊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인류를 구원한다는 건 교만한 태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예수는 꿈에서, 야곱이 라헬과 레아를 모두 아내로 삼았던 것처럼 나자로의 동생 마리아와 마르다를 아내로 맞이하고 아이를 많이 낳아 수십 년을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한낱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원래 감당해야 했을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아버지의 뜻대로 완수했음을 기뻐하고 감사한다. 

 

만약 꿈과 생시가 뒤바뀌었다면 이 책은 신성모독이라는 판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투쟁에 실패하고 유혹에 넘어간 모습은 꿈이었다. 그래서 ‘최후의 유혹’은 엄밀히 따지면 유혹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십자가에 이미 못이 박혀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태에서 꾼 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예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유다가 원했고 열혈 당원들이 원했으며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했을 이스라엘의 독립을 무력과 기적을 동원하여 감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지 않았고 아버지의 뜻에 죽음으로 순종했다. 이런 의미에서 해석해 보자면, 예수는 마지막 숨이 꺼질 그 순간까지 투쟁을 감행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비록 꿈으로 나타났지만, ‘최후의 유혹’은 정말 최후의 유혹이었던 것이고, 이는 곧 카잔차키스가 예수의 신성을 결코 부인한 게 아니라 오히려 강조했었다는 증거 중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허락된 상상력은 카잔차키스 말고도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C. S. 루이스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나니아 연대기’만 봐도 예수를 사자에 비유하는데, 만약 카잔차키스가 신성모독을 했다면 루이스는 예수를 짐승 따위에 비유한 셈이므로 신성모독을 훨씬 넘어서는 중죄를 지은 셈이 된다. 즉, 이런 식의 논리와 판단은 본질을 보지 못한 껍데기 신앙을 붙잡는 것이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우린 조금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물론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이루는 공인된 교의, 교리들에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상상력은 우리의 신앙을 훨씬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카잔차키스 읽기

1. 그리스인 조르바: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07692099275561

2. 영혼의 자서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624480797596676

3. 최후의 유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009839715727447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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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일요일 오후 햇살의 아련함처럼.

 

오가와 요코 저,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고.

 

읽고 나면 벌써부터 여운을 남기기 시작하는 작품이 있다. 보슬비에 옷이 젖듯 가슴 한편에 조용히 의미 있는 파문을 일으켜 오래 기억될 작품이 보통 그렇다. 몇 페이지 읽지 않았을 때 이미 난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도 그중 하나가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이 작품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걸린 시간만큼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적한 일요일 오후의 햇살이 가져다주는 그 특유한 아쉬움 같기도 했고, 어릴 적 아빠와 함께 간 공중목욕탕에서 집에 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뜨거운 물에 몸을 반쯤 담그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열어 들어온 차가운 공기를 감지하며 닭살이 돋으면서 느꼈던 기분과도 비슷했다. 두 시간을 넘도록 적당한 표현을 생각했지만, 내가 느낀 감상을 막상 문자로 표현하려니 당황스럽게도 이 두 가지 상황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먹먹해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듯했고, ‘따뜻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성에 차진 않지만 한 단어를 골라 본다. 아련함. 그렇다. 내게 이 책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척이나 아련함을 남기는 작품이다. 작가가 만든 세상 속으로 시나브로 스며들어간 상태에서 헤어 나오기 싫어 한동안 그대로 남고 싶은 기분이 드는 작품인 것이다. 마치 이제 곧 사그라들 일요일 오후의 햇살처럼, 마치 이제 곧 집으로 돌아가야 할 아이가 느끼는 따뜻한 탕의 온기처럼,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참을 책 속에 머물렀다.

 

교통사고 때문에 머리를 다쳐 한창 젊었던 시절 이후의 장기 기억은 모두 사라져 버린 채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남자. 그에게 단기 기억이라곤 고작 80분이 전부다. 정확히 80분 전까지만 그는 기억할 수 있다. 하루도, 한 달도, 일 년도 그에겐 모두 의미가 없다. 그에게 시간은 모두 80분으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게 새롭다. 동시에 그 때문에 그에겐 모든 게 낯설다. 매일 마주치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도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리 깊은 대화를 나누고 친분을 쌓아도 다음 날 아침이면 또다시 처음 보는 사람일 뿐이다.

 

그는 수학 박사다. 케임브리지까지 유학을 다녀올 정도였으니 한때 전도유망한 학자였던 것이다. 사고 후 그는 많은 걸 잃었다. 그러나 다행히 사고 이전에 그가 쌓았던 수학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잃지 않았다. 그의 하루 일과는 꽤 규칙적이다. 잠자고 밥 먹는 등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가사도우미의 도움으로 해결하는 일을 제외하면 그는 하루 종일 수학 문제를 풀고 생각에 잠긴다. 아주 적은 활동을 하며 허름한 집 안에서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80분밖에 안 된다면, 나 역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많은 일을 결코 벌이지 못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사고가 그에게서 수학이라는 평생지기 친구까지 빼앗아 가지 않아서 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수학 문제를 풀고 생각하는 행위는 직업도 여가생활도 아니다. 숙명이다. 그리고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까지 들라치면 사뭇 비장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이 소설의 화자는 노 박사를 돕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녀의 회고록이다. 박사가 죽고 나서 쓴 그녀의 기억이다. 24시간을 살며 기억이 온전한 사람이 80분으로 이뤄진 세상에 사는 늙은 수학 박사를 보조하는 상황, 특히 그녀가 느낄 심적인 고뇌를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얼마나 당황스러운 순간이 많을까! 많은 시간을 함께 해도 친분을 쌓을 수 없을뿐더러, 상대방의 기억 속에 전혀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무척 당황스럽고 또 허무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다행히 화자는 어려운 가정에서 자란 배경을 가지고 남을 헤아리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다. 박사 역시 다행스럽게도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다. 기억을 하지 못할 뿐 그는 아이 같이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이고, 따뜻한 가슴과 친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수학이라는 언어가 있다. 수와 수학이 그들 사이를 서먹하지 않게 만들어줬고, 그것들 덕분에 화자는 박사를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박사가 유일하게 가진 수와 수학은 화자와 연결되는 훌륭한 언어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이런 장면들이 연출되는 일상을 따라가고 있노라면 어느새 입가엔 잔잔한 웃음이 돌면서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 소설을 많아야 열 권 남짓 읽었지만, 이 작품만큼 가슴이 아련해지는 작품은 없었다. 일본 소설 특유의 염세적인 뉘앙스 (이를테면, 자살, 죽음, 사별, 트라우마 등등)에 익숙해져 있는 나로선 이 작품 속에 그런 것들이 없어서 반가웠다. 비록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과 각자의 사연이 얽히고설켜서 하나의 따스한 세상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를 오래도록 붙잡아둘 만큼의 힘으로 말이다.

 

다만,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다 읽고 나서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만큼 또 슬픈 게 있을까 생각했다. 누군가는 망각이 신이 준 선물이라는 말도 했지만, 이 소설 속 세상에서는 맞지 않는 얘기다. 소설이 끝나가면서 박사의 시간이 80분에서 점점 줄어들며 죽음으로 서서히 걸어가는 과정을 불연속적으로 지켜보면서 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또한 박사는 자기가 80분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기 때문에 여러 중요한 사실들을 80분이 지난 후에도 기억하기 위해 간단하게 사건, 사실들을 적은 여러 쪽지들을 옷에 덕지덕지 클립으로 고정해두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그 장면에서도 애잔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박사의 삶의 방식을 받아주고 맞춰주는 화자의 배려와 사랑이 너무 고마웠다. 

 

제목은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지만, 내게 남은 잔상에는 박사보다는 가사도우미가 더 크다. 물론 저자 오가와 요코의 필력이겠지만, 내겐 박사의 기막힌 사연보다는 가사도우미가 박사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상황을 감지하고 반응하는 부분들이 더 크게 와 닿았다. 그녀가 행한 일상적 배려와 사랑이 만들어내는 잔잔한 감동이 나에게 애잔함과 따스함을 잔상으로 남긴 실체가 아닐까 한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누군가가 살아나는 장면은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준다. 그런 장면을 목도할 때마다 나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다. 공감과 이해와 사랑은 사람을 살린다.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말이다. 문득 나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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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예술을 찾아서
이병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이해가 현장을 만날 때.

이병훈 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를 읽고.
-책의 부제: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예술을 찾아서.

이 책은 노어노문학과 출신의 저자 이병훈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그의 작품이 남긴 자취를 따라 러시아 곳곳을 여행하며 쓴 기행문 성격의 에세이다. 내가 지난 2년 간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 소설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그의 초중기 작품 5권 (‘가난한 사람들’, ‘분신’, ‘죽음의 집의 기록’, ‘지하로부터의 수기’, ‘노름꾼’)을 읽어온 이유도 어쩌면 이 책을 깊고 풍성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문학에 대한 조금 더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이해의 깊이는 아무래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보다는 읽은 사람에게 더 진하게 느껴질 것이다. 누군가의 감상문이나 서평을 읽을 때 얻을 수 있는 감동의 깊이가 작품을 읽기 전의 사람보다는 읽은 후의 사람에게 더 진하게 전달되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작품을 깊이 읽고 갖게 되는 공감대는 글쓴이가 쓴 “아…”라는 짧은 감탄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텍스트 이면에 숨어있는 의미까지도 헤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법이다. 하물며 평소에 존경하는 대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숨결이 묻어있는 공간을 사진으로 보며 느끼게 되는 감동과 울림은 오죽하겠는가.

책은 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일대기를 시간 순으로 따라가며 진행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태어난 집에서부터 시작해서 그가 임종을 맞이한 집까지 이 책의 저자는 거의 모든 현장을 방문했다. 심지어 그는 이 책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문장까지 썼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살았다.” 나에겐 이 문장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나 역시 열 권의 작품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그 삶이 펼쳐졌던 시공간이 늘 궁금했다. 그런데 언제나 상상만으로 끝나고 말던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살았다니! 남모를 부러움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감쌌다. 

저자는 이 책에서 동시대인들이 묘사한 현장에 직접 가보고, 역사적 기록들을 확인하면서 거기에 현대적인 감각과 의식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고 적고 있다. 세상에는 이미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이 많지만 거기서 다루지 않은 자료를 처음 우리말로 소개한 점도 이 책의 새로움이라고도 밝힌다. 모스크바, 빼제르부르그, 옴스크, 스따라야 루사 등, 도스토예프스키가 거주했던 거의 모든 장소를 탐방하며 저자가 온몸으로 느꼈을 가슴 벅찬 울림을 떠올릴 때마다 내 가슴도 같이 뛰었다. 잠시나마 나도 러시아를 다녀온 기분이었다.

특히, ‘죄와 벌’에 등장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집, 첫 장면을 이루는 그가 걷던 거리, 그가 도끼 살인을 저질렀던 전당포 노파의 집, 소냐의 집, 등에 대한 실제 공간을 보여주며 설명하는 장면에서 나는 잠시 숨이 멎는 듯했다. 우리가 소설이 아니라면 어찌 도끼로 사람을 죽이려는 사람의 심리를 이해하겠으며, 어찌 라스꼴리니꼬프가 가졌던 잘못된 사상이 발전하고 실행에 옮겨질 수 있는지 이해하겠는가. 그런데 저자는 내가 텍스트로 간신히 이해했던 정도를 훌쩍 넘어 실제 현장에서 ‘죄와 벌’을 보고 듣고 냄새 맡으며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과연 그 맛은 어떨지 생각하며 내 심장은 이 장면에서 유난히 쿵쾅거렸다.

저자 덕분에 알게 된 여러 사실도 흥미롭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빼쩨르부르그에 살면서 스무 번에 걸쳐 거처를 옮겼는데, 그 주소지들의 묘한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그가 살았던 집들이 대부분 길모퉁이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여기에 대한 해석을 내놓는데, 다음과 같다. 나는 읽고 머리가 끄덕여졌다. 

“그에게 모퉁이 방은 급변하는 러시아 사회를 관찰할 수 있는 확대경이었다. 그는 모퉁이 방에 앉아 러시아 사회의 불행한 참상, 즉 민중들의 가난하고 미래가 없는 삶을 목격했고, 이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교차점을 찾기 시작했다.”

이 해석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이 통속적이고 너무나 적나라한 리얼리즘이면서도 언제나 저 너머로부터 비치는 구원의 빛줄기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해석 역시 나는 공감이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으면서 기독교 사상을 절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의 참혹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으며, 길거리에서 고통받고 있는 민중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것을 현실 너머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푸른 하늘 아래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교차로의 끄레스뜨, 즉 교회 십자가였다. 이런 사실을 반증하듯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았던 집 근처에는 예외 없이 러시아 정교회 사원이나 교회가 있다.”

이런 발견은 책만 읽어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사실이다. 텍스트에 적혀 있지 않는 콘텍스트이며 아무리 그의 작품을 책상에서 연구했다고 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현장에 직접 가서 관찰해야만 얻을 수 있는 사실이다. 이것이 이 책을 읽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사실을 발견하고 저자는 얼마나 전율이 돋았을까 생각하면 나도 흥분이 된다. 아마도 다시 텍스트를 읽으면 분명히 다르게 읽힐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 ‘백치’에 등장하는 문구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어이없는 사건에 휘말려 감옥살이를 경험했는데, 그때 러시아 정교가 그의 사상과 예술의 근원적 힘이 되었다고 저자는 해석하고 있다. 실제로 감옥에서 유일하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 성서였다는 점은 이 해석을 충분히 지지하고도 남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더 나아가 설령 누가 내게 그리스도가 진리 밖에 있으며, 실제로 진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할지라도, 나는 진리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남는 쪽을 택할 겁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리스도를 가장 아름답고 용감한 존재라고 했다. 이것은 ‘백치’에서 재현된다. 그는 ‘백치’의 주요 사상은 완전히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자 ‘백치’의 주인공 미쉬낀 공작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작품 속에서 아름다움의 형상으로 두 사람이 소개되는데, 하나는 나스따시야, 다른 하나는 미쉬낀 공작이다. 이 두 아름다움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일부러 대비시키고자 만들어낸 인물이라는 해석에 나는 수긍이 갔다. 그는 주인공 미쉬낀을 내면과 외면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춘 아름다운 인간의 형상으로, 나스따시야를 외면의 아름다움만 갖춘 미인으로 설정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작품 속에서 내면이 아닌 외면만 아름다웠던 나스따시야는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파멸시킨다. 

저자는 이 ‘아름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19세기 중후반기를 살아내며 겪었던 시대적 정황 속에서 생각했던 ‘구원’의 통로는 ‘아름다움’이었고, 그 아름다움은 외면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이며, 이는 진창 같이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그 구원이 임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탁월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상의 아름다움을 선과 악의 경계선 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 무정형의 아름다움은 선한 정신에 의해 평정을 되찾을 때만 세상에 구원의 빛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삶은 아름다움이 실현된 세계가 아니라 그것을 끊임없이 실험하는 가운데에 있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적 천재성이 결실을 맺은 1860-1870년대는 19세기 러시아 역사에서 대규모 사회개혁과 대중적인 계몽운동이 발생했던 시기였다. 다윈의 종의 기원의 러시아판이 1865년에 출간되었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러시아판은 1872년에 출간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에 태어나 1881년에 죽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5대 장편소설은 1866년부터 1881년에 모두 써졌다. 러시아의 봉건제가 무너지면서 급변하는 세계 정황 한가운데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개인적인 경험과 맞물려 대작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그 당시 대문호 톨스토이도 동시대 인물이었다는 점도 도스토예프스키 같이 괴물 같은 작가가 탄생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대작가는 개인의 노력과 열심 이외에 시대가 만들어내는 열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또다시 하게 된다.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신학과 철학과 문학에서 걸출한 작가들이 등장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결혼을 두 번 했다. 알다시피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 작품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두 번째 아내 안나에게 바쳐진다. 저자는 첫 번째 부인과 두 번째 부인의 차이를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평생 간질을 앓았던 도스토예프스키는 두 번의 결혼식날 발작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런데 두 여인의 반응이 달랐다. 다음과 같다. 나는 안나에게 다시 고마움을 느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이런 상황에서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두 번째 부인은 떨고 있는 남편의 몸을 끌어안고 그의 영혼을 어루만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81년 예순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쓰고 임종을 맞이한 집을 묘사하는 장면으로 이 감상문을 마무리지을까 한다. 애잔한 감정이 인다.

“그의 집은 건물 2층에 있었는데, 방 여섯 개와 책을 쌓아두는 큰 창고, 현관 그리고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창문 일곱 개가 꾸즈네치니 거리를 향해 나 있고, 현재 대리석 현판이 붙어 있는 곳에 그의 서재가 있었다. 지금은 막혀 있는 건물의 정문 출입구는 서재 옆에 있는 거실 밑이었다. 이 집은 현재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집에서 그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썼고, 임종을 맞이했다.”

 

*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36636616381098

6. 죽음의 집의 기록: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311510975560328

7. 가난한 사람들: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633890636655692

8. 분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717746821603406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17986684912752

10. 노름꾼: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7547675916374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7262785611530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석영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94599463918140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이병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024470600931025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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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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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완성도와 깊이: 보도를 넘어 근원적인 철학적 질문으로.

황정은 저, ‘연년세세’를 읽고.

이틀 전,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함께 느리지만 행복하게 보낸 열흘을 뒤로하고, 내가 집어 든 책은 황정은의 신작 ‘연년세세’였다. 신형철의 소개 덕분에 재작년에 ‘백의 그림자’를 읽고 단번에 나는 황정은의 문체에 반했다. 묵직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나 상황을 평이한 단어와 친숙한 단문으로 덤덤하게 기술하는 그녀의 글은 한강 작가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해 출간되었던  ‘디디의 우산’을 읽고 나서는 내 기대가 조금 과장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고, 나는 그 책에 대한 감상문을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내가 매혹되었던 황정은의 문체는 그대로였는데,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과 전개가 나의 공감을 사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이상했다. 나는 그것이 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내 공감능력이 부족한 걸까, 이해력이 부족한 걸까, 하는 답이 없는 고민들). 그 생각은 잊히지 않고 일종의 짐처럼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마침 중고서점에 방문한 날, 작년에 출간된 황정은의 최신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숙제를 해결하는 심정으로 나는 책을 구입했다.

‘백의 그림자’, ‘디디의 우산’에 이어 세 번째로 읽은 황정은의 작품 ‘연년세세’. 농숙해진 그녀의 문체와 적확한 문장의 선별은 작품의 간결성과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었고, 한국 정서에 잘 부합하는 내용과 이야기 전개는 가독성을 높여주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가 머릿속에서 겹쳐졌고, 이 책을 쓴 황정은의 숨은 의도가 한국의 역사적 정황과 맞물린 서민들의 모습을 반영하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백의 그림자’도, ‘디디의 우산’도 모두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시대상을 그리고 있으며, 그 안에서 일상을 겨우 살아내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덤덤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연년세세’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 읽히는 작품이었다. 

고전 문학이나 현대 소설이나 가릴 것 없이, 내가 읽은 대작의 대부분은 시대 정황을 잘 반영한다. 진공 속의 이야기나 관념만으로 이뤄진 작품은 없었다. 역사성과 현실성이 독자들의 공감을 사며 작품의 가치를 배가시키는 것이다. 황정은의 작품도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땐, 황정은만의 개성 있는 문체와 더불어 시대 정황과 맞물린, 그러나 자칫 잊히기 쉬운 서민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그 시대에 그 시대를 기록하는 작가가 존재하여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질 이야기들을 남길 수 있다는 건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소중한 자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작품 같은 경우엔 너무나 한국적이어서 한국 사람이 아니면 읽고 깊은 공감을 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에 대한 우려다.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잊히는 작은 목소리들을 담아낸다는 의미는 충분히 크다고 할 수 있지만, 황정은이 담아낸 그 작은 목소리들이 인간의 보편적인 무언가를 그리 묵직하게 건드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옆집 할머니와 옆집 아주머니가 들려주는 사연 깊은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은 정도의 효과만이 내게 남아 있다는 점이 나는 못내 아쉽다. 다음 작품에선 한국인만이 아닌 모든 인간에게 호소할 수 있는 주제를 다뤄준다면 황정은만의 매력적인 문체가 더욱 빛을 더 발하지 않을까 싶다. 완성도 높은 보도 형식의 이야기만이 아닌, 좀 더 깊고 보편적인 이야기 (이를테면, 좀 더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다루는 이야기들)를 기대해본다.

#창비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0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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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쫓는 모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문학사상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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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지만 쫓기지 않고, 지배당하지 않는 인생.

무라카미 하루키 저, ‘양을 쫓는 모험’을 읽고.

머리가 복잡할 땐 책을 든다. 그런데 이게 언제나 쉬운 건 아니다. 평소보다 예민한 상태라 아무 책이나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 선정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에도 그랬다. 네 권의 책을 폈고 모두 열 페이지 이상 앞부분을 읽었다. 그러나 다시 덮고 책장에 꽂았다. 마음에 담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손에 들고 이번 주말에 끝까지 읽게 된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 책이었다. ‘양을 쫓는 모험’.

하루키 책은 묘한 힘이 있다. 어렵지 않고 무심하게까지 느껴지는 그만의 독특한 문체로 통속적인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를 매개로 하여 이야기를 술술 풀어나간다. 일필휘지로 써진 글이 아니라 다듬고 다듬어서 기나긴 퇴고의 과정을 거친 글답게 문장이 간결하고 정제되어 있다. 궁금증을 유발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한 번 읽게 되면 지루하다는 느낌 없이 계속 읽게 된다. 문장력과 글의 전개에 있어서는 정말 배울 게 많은 작가임이 틀림없다.

그 훌륭한 문장력과 전개 방식으로 전달하는 메시지 역시 그냥 지나쳐버릴 만큼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다. 거기엔 무겁고 암울하고 허무하기까지 한 하루키만의 감성이 진하게 배어있다. 이는 어쩌면 하루키와 같은 시공간을 향유한 일본 작가들의 공통된 시대적 감성일지도 모르겠다. 이 감성은 주로 등장인물들의 상실과 죽음 (특히 자살) 등으로 표현된다. 아마 이 두 가지 단어를 빼놓고는 하루키 문학을 설명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물론 하루키 작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는 섹스와 같은 성적인 상상과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도 남자 위주의 관점에서 말이다. 그래서 여자는 대상화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조금은 저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자주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이 하루키 문학의 본질인 것처럼 매도하고 하루키를 폄하하는 데엔 반대한다. 성적인 행위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심심찮게 등장하여 삼류소설처럼 경박하게 느껴질 때도 종종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해한 하루키 문학의 정수는 성적인 것이 단지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상실과 죽음의 깊은 강이 하루키 문학 저변에 흐르고 있다고 봐야 하고, 성적인 표현들은 그 강에서 저항하거나 물살에 휩쓸려가거나 무심한 시선으로 자기 자신의 삶조차 관조하는 인물들의 평범함, 즉 그들도 우리와 별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도구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이런 면에서 하루키 문학은 철학적이고 감성적이며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적이다). 

‘양을 쫓는 모험’은 하루키가 치밀하게 계획한 구도에 따라 읽게 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독자는 완전히 작가의 작전에 말려들게 된다. 지루한 부분 없이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연속해서 긴장과 스릴을 느끼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다르게 된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 부분이 나에겐 물음표였다. 몰입까지 되며 페이지를 넘겨왔는데 갑자기 덜컥하며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결코 짧지 않은 작품이지만, 관념적인 서술보다는 상황 묘사와 대화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도중에 읽어나가는 속도는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도 도통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었다. 아직 뭔가가 더 설명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도중에서 끝나버린 느낌이 들어 당황스럽기도 했다. 사실 제목부터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결말에 다다르면 알게 되겠거니 했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나는 끝내 오리무중이었다. 철학 책처럼 어렵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랬더라면 이틀 만에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웠다. 아니, 어려웠다는 표현보다는 아리송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이 작품은 특히나 비유와 상징이 핵심 주제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제목에서 등장하는 ‘양’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또한, 언뜻 일상적인 사건을 전개해나가는 것처럼 읽힐지 모르겠지만 꽤나 환상적인 요소가 군데군데 깊이 침투해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을 환상소설이라고 분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환상을 빼고는 이 책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묘한 작품인 셈이다. 하루키의 문체와 그의 사상과 감성, 이런 것들이 잘 뭉쳐져서 하나의 독특한 문학이 탄생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만났던 하루키와는 조금 달랐다. 작품이 써진 시기를 보니 그의 초기 작품이다. 순간 아하! 싶었다. 아직 농숙해지기 전의 하루키의 천재성이 이곳저곳에서 번쩍이다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이 ‘양을 쫓는 모험’이었던 것이다.

책 뒤에 붙어있는 해석을 읽고도 나는 아직도 이 작품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책을 두 번 읽는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그저 ‘양’의 의미를 ‘인간의 탐욕’,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 농축된 이데올로기의 근원’, 혹은 ‘관념뿐인, 그래서 형체가 필요한 악의 실체’ 등으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미숙한 생각만 들뿐이다. 양이 사람에게 들어가 사람을 조종하고, 그 사람이 필요 없으면 다시 나와 다른 숙주를 찾고… 여기에 기독교적인 관점만 살짝 집어넣으면 양은 곧 ‘악마’ 혹은 ‘악령’ 정도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양과 악마라... 반대되는 듯한 이 이미지는 기독교적인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면에서 주인공의 친구, 결국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친구 ‘쥐’는 양이 자기 안으로 들어갔을 때 자살을 감행했기 때문에 양에 의해 조종되지 않은 채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던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죽었지만 살았던 사람인 것이다. 악에 물들지 않은, 나약하지만 인간적인 모습을 끝까지 유지한 사람이 바로 ‘쥐’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화자인 ‘나’는 ‘쥐’로부터 양을 전달받아 강력한 힘을 얻고자 처음부터 은밀하고 치밀한 계획으로 일관했던 '비서'에게 끝까지 이용당한 꼴이었지만, 양에 이용되지 않고 자살로 미리 생을 마감하여 끝까지 인간으로 남은 친구 ‘쥐’의 폭파 계획에 동조한 끝에 얼떨결에 탐욕스러운 '비서'를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죽음으로 모는 실행자가 된다. 가만히 보면, ‘나’는 자기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끝까지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누군가의 의지에 끌려가거나 동조하는 등 다소 수동적인 인간으로 그려졌던 것 같다. 그는 '비서'의 말을 듣고 그의 명령 같은 부탁에 의지하여 양을 찾아 나섰지만, 양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의 힘에 의지하여 '비서'처럼 무언가를 도모해보려는 욕심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양을 찾아냈고, 양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나아가, 그는 양에 지배되지 않았고, 양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의 힘을 노린 탐욕의 인간인 '비서'를 궁지로 모는 역할을 해냈다. 나는 이러한 ‘나’가 왜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채택되었는지, 그가 마지막에 펑펑 울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언뜻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 모두는 살면서 무언가를 쫓는다. 그런데 그것들이 숭고한 목적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은밀한 탐욕과 이기심 등이 물들어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우리들은 ‘비서’와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나’와 같은 사람으로 머문다. 뭐가 뭔지 잘 모른 채 그 무엇을 쫓다가 지치기도 하고, 누군가의 말에 따라 다소 수동적으로 살아가기도 하고, 어쩌다가 ‘쥐’와 같이 드문 (‘비서’와 정반대의 캐릭터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친구와의 교감으로 ‘악’에 물들지 않고 ‘악’을 폭파시킬 수도 있다.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인간이 ‘비서’로 그려졌다면, 주인공 ‘나’는 의지대로 살지 못하는 나약하고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의지대로 살지 못한다고 해서 실패한 삶을 사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의지대로 완벽하게 살게 되면 '비서'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비서’의 양을 쫓는 모험과 ‘나’의 양을 쫓는 모험을 대비시키며 이 책을 감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과 결과는 다르지만, ‘비서’나 ‘나’의 인생은 '양을 쫓는 모험'이다. 우리 인간의 인생이란 어쨌거나 '양을 쫓는 모험'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나는 '비서'처럼 양에 지배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문학사상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1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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