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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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


미야모토 테루 저, ‘환상의 빛’을 읽고.

강렬한 잔상에 의지하여 급하게 써 내려가는 글도 나름대로의 매력을 지니지만, 그 거친 글을 묵히고 묵히면서 실 같은 잔상만이 남을 때까지 계속해서 수정을 가하며 만들어지는 글은 한층 더 깊이를 가지는 법이다. 원석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발견된 뒤 거치는 숱한 정제 과정을 초고에서 퇴고로 진행되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과정을 거쳐 탄생한 글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 독자의 마음을 보다 깊숙이, 정확하게, 그리고 단번에 찌르기 때문이다. 살면서 그런 글들을 만난다는 건 값지고 멋진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좀처럼 당해내지 못하는 글은 한결같이 놀라운 절제력을 가진 글들이다. 절제의 미학이랄까. 급하게 찾아왔던 예기치 않은 기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한꺼번에 몰아닥친 슬픔도 모두 정제 과정을 거치는 동안 거품이 빠지기 마련이다. 인간이란 기억하는 존재이고 또 무언가에 집착하거나 의지하는 존재이기에, 거품이 빠지는 지난한 과정은 다분히 견디는 시간으로 이뤄진다. 다행히 그 시간의 끝에 어떤 목적지가 있는 경우라면, 견뎌온 모든 시간을 기다림이라는 단어로 함축하여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견딤이 우리를 항상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는 않는 법. 오래 참고 견디다가 그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우리 주위에는 엄연히 산재한다. 이는 우리가 언제나 인고의 쓴 시간이 아름답고 단 열매를 맺을 거라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생 전체를 잠식시키는 슬픔은, 그리고 별안간 찾아와 우리가 그동안 힘들게 견뎌온 시간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슬픔은 바로 그 견딤의 과정을 이루고 있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흩어진 아주 작은 기억의 조각들, 그 기억과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어떤 뜻밖의 순간들을 만날 때 우리를 불청객처럼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신형철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1부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이라는 꼭지에서 다룬 작품이다. 100 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중편 소설이지만, 이 작품은 인간의 내면을 깊숙이 침투하여 꽈리를 튼 지독한 슬픔을 이야기한다. 결혼하고 아기가 태어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았을 무렵, 작품 속 화자의 남편은 버럭 자살로 생을 마감해 버린다. 그렇다. 이 책은 남겨진 한 여자의 슬픈 독백이다. 

놀랍도록 절제된 화자의 목소리는 이미 죽은 남편에게 쏟아내는 독백 형태로 그려져 있다. 그녀는 이런 독백을 그동안 얼마나 많이 해왔는지 모른다. 다소곳한 말투, 깊은 슬픔의 바다에서 이미 어떤 선을 넘어서버린 한 사람의 이야기. 폭풍 같은 감정은 모두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은 상실과 슬픔의 잔물결이 영원한 삶의 친구가 되어버린 한 사람의 이야기. 힘을 뺄 대로 뺀 작가의 글은 문장 하나하나가 독자에게 의미 있는 생채기를 내는 듯하다. 마치 보슬비가 어느새 옷을 다 적시듯. 나는 평범하고 단조로워 보이는 문장들을 읽어나가다가도 문득 어떤 한 문장에 다다를 때면 무너졌다. 그러면 책을 잠시 덮고 심호흡을 하고 다시 읽어나가곤 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새로운 남편과 그럭저럭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으면서, 죽어버린 전 남편에게 이렇게 열심히 말을 걸고 있는 자신을 참 불쾌한 여자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습관 같은 것이 되어버리면 어느새 죽은 당신에게가 아니라.. 중략... 당신은 왜 그날 밤 치일 줄 뻔히 알면서 한신 전차 철로 위를 터벅터벅 걸어갔을까요…”

“저는 와지마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바깥에 시선을 둔 채 죽어버린 당신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만, 그 무렵에는 저 혼자가 되면 무의식적으로 당신에게 말을 거는 버릇이 생겨버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을 거는 당신은, 선로를 걸어가는 뒷모습의 당신이었습니다.”

“결혼하고 첫아이를 낳은 지 세 달이 되었을 때 저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당신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 후 허물처럼 살아왔습니다. 당신은 왜 자살을 했을까, 그 이유는 대체 뭐였을까…”

“그것은 아무리 힘껏 껴안아도 돌아다봐 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뭘 물어도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아아, 당신은 그냥 죽고 싶었을 뿐이었구나, 이유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당신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야…”

신형철이 정확하게 짚은 대로, 작가가 이 작품에서 은연중 힘을 주고 있는 키워드 중 하나는 ‘뒷모습’이다. 그녀에게 계속해서 떠오르는 모습도 철로 위를 걸어가고 있는 남편의 뒷모습이다.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 그녀는 죽은 남편의 뒷모습을, 보지도 못했던 그 뒷모습을 떠올리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그 뒷모습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녀는 죽은 남편과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가난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채 그들은 결혼까지 했고 아이도 낳았다. 남편이 자살했던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었다. 심지어 남편은 그날 밤 일을 마치고 집 근처까지 와서 카페에 들러 커피까지 마셨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된다. 그런데 다시 철로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왜, 도대체 왜 남편은 자살을 감행했던 것일까. 

혹시 그녀는 답이 없는 이 질문의 연쇄 속에서 남편이 아닌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건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올해 여름 일주일 차이로 있는 나와 아내의 생일을 지나면서 혼자 이런 말을 떠올리며 블로그에 끄적거린 적이 있다. 

‘서로의 앞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을 읽고, 서로의 뒷모습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읽어낸다.’ 

부부는 보통 언제나 함께 있어, 서로가 나이 들어간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경우가 많지만, 어느 날 문득 배우자의 얼굴에서 그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러면 마음이 잠시 무너지면서 한없이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사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등을 돌리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면 나는 종종 나의 부족함을 느낀다. ‘아, 이것밖에 해줄 수 없었던가. 더 잘해줄 수 없었던가’ 하며 나는 나의 미련함과 옹졸함과 가소로움 때문에 이내 부끄러워진다. 치장되지 않은 나의 민낯은 아내의 뒷모습에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짐하곤 했다. ‘좀 더 사랑하며 살아야지! 소중함을 알아채며 살아야지.’ 나는 아내의 뒷모습에서 아내를 본 게 아니라 나를 보았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고 부족한 내 모습을… 하물며 자살로 멋대로 죽어버린 남편의 뒷모습이 살아남은 그녀에게는 얼마나 많은 말을 걸어왔을까, 하는 생각까지 이어지면 나는 할 말을 잃고 만다. 문득 두려워지기도 한다. 부부 중 누군가는 먼저 죽는 법인데, 나의 뒷모습이나 아내의 뒷모습이 언제나 남을 한 사람에게 슬픈 형상으로 남게 될까 봐. 그 뒷모습 때문에 이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슬픔에 잠겨 살까 봐.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들에 지금은 저항하고 싶다. 아직은 사랑하는 사람이 뒷모습을 보이며 바라보았을지도 모를 환상의 빛을 떠올리고 싶진 않다. 대신 나에게 남은 인생을 좀 더 사랑하며 살기로 다시 다짐한다. 아내가 안고 싶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6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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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진화 - 성경은 인류 기원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가?
피터 엔즈 지음, 장가람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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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재해석된 아담의 신학적 의미.


피터 엔즈 저, ‘아담의 진화’를 읽고.

이 책은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아담의 진화’라니! 게다가 저자가 피터 엔즈다. 예상컨대, 그동안 한국의 많은 신학자, 목회자들에겐 이 두 가지 (제목과 저자)가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조금만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둘 다 합리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아담의 진화’는, 저자가 서론에서 명확하게 밝히듯, ‘아담이 진화했다’라는 말이 아니라 ‘아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진화했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제목만 보고 불경함을 느낀 나머지 이 책을 포기한 사람은 십중팔구 진화라는 단어에 대해 반지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잘못된 확신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이런 ‘묻지 마’ 확신은 건강하게 뿌리내린 믿음이 아닌 맹신에 바탕을 둔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피터 엔즈는 생물학자가 아니라 성경해석학자이고, 그는 진화론을 옹호하거나 대변하려고 이 책을 쓰지도 않았다. 둘째, 피터 엔즈가 그의 2005년 저서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의 영감설’의 후폭풍으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퇴출당한 이유는 그의 신학적 해석이 기독교 정통신학에 위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떠나게 만든 학교의 한계 혹은 잘못된 확신 (당시 학교의 주류를 이룬 입장과 관점)때문이라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정직 이전에 개최되었던 교수회의에서도 엔즈의 책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확정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정직을 결정했던 이사회 삼분의 일은 여전히 그를 강력하게 지지하며 그의 정직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엔즈가 학교를 떠난 이유는 그가 이단이어서가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 희생이었다고 해석하는 게 적합해 보인다.

피터 엔즈는 그의 2016년 저서 ‘확신의 죄’에서, 그리스도인에게 팽배한 잘못된 확신을 죄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확신’, 이 두 가지를 동일시하는 행위가 신앙생활에서 장애가 될 때가 많은데,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죄’와 같은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잘못된 확신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우리 자신의 믿음을 더 신뢰하게 만든다. ‘의심’ 대신 그리스도인으로서 꼭 가져야만 할 것 같은 ‘확신’이 오히려 진리를 가리고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의 길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질문하고 의심하기를 두려워하는 건 결코 하나님을 변호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지켜내는 행위가 될 수 없다. 엔즈가 간파한 대로,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낼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아닌, 여태껏 올바르다고 여겨왔던 자신의 믿음이나 신앙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게 되는, 웃지 못할 역설을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신뢰는 우리를 합리적인 의심의 어두운 숲 가운데서도 빛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 책은 2012년 출판된 것으로 앞에 소개한 두  책 사이에 만들어졌다. 피터 엔즈의 인생에 있어선 중간 단계의 책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이 책에서 말하는 톤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탁월한 성경해석학자답게 창세기와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두 가지 관점에 대해서 언급한다. 하나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관점 (1부), 또 다른 하나는 바울 시대와 바울의 관점 (2부)이다. 여기서 독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뭔가 의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제목에서부터 ‘아담’을 언급해 놓고서 왜 뜬금없이 창세기와 구약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관점을 논하냐고 충분히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엔즈는 이러한 질문을 미리 예상한 듯하다. 아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진화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아담에게 곧바로 직행하는 방법보다는 먼저 좀 더 거시적인 배경, 즉 아담 기사가 적힌 창세기를 포함한 구약성경이 쓰이고 그것을 해석했던 당대의 콘텍스트를 읽어내고 이해하는 것이 필수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1부에서 저자는 창세기를 ‘이스라엘의 자기 정의로서의 고대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는 역사적인 부분도 과학적인 부분도 일부 포함하고 있지만, 그런 것들보다는 어떤 특별한 신학적인 목적을 가지고 써진 책이다. 창세기를 포함한 모세오경을 전적으로 모세가 광야 생활 가운데 기록했다고 덮어놓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 존재하는 게 사실이지만, 보수진보 교단교파를 떠나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오경이 포로기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단독 저자에 의해서 써진 책이 아니라 이름 모를 여러 저자들을 거치며 쓰였고 나중에 편집된 책이라는 사실에 무게를 둔다. 바벨론 유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재앙 이상의 현실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빼앗겼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으며, 선택받은 민족이라 믿었던 그들 자신이 포로로 잡혀간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포로기가 끝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할 국가적 필요가 생겼던 것이고, 이러한 목적 하에 이루어진 중요한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창세기를 포함한 오경을 완성하는 일이었다고 저자를 포함한 많은 성경학자들이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히브리 성경의 탄생은 바벨론 유수에 대한 응답으로 국가적인 자기인식의 실천이며, 교회가 신학적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문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스스로를 정의한 문서를 가지고 지금 이 시대를 바로 읽기 위해 필요한 작업은 과학과의 조화를 찾는 게 아니라 신학적 연관성을 찾는 것이다. 특히 창조와 아담 기사가 적힌 창세기가 포로기 이후에 편집된 책이라면 그 목적은 신학적인 것이지 결코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진화론을 가지고 들어와 6일 창조나 아담의 역사성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창세기에서 찾아내려고 하거나 둘을 어떻게든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으며 창세기가 의도한 목적에서 한참 벗어나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과학과 신학은 그런 식으로는 결코 같이 갈 수 없다. 둘은 일치가 아니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뿐이다. 일치를 위해서는 과학이나 신학 쪽에서 무언가를 반지성적이고 비합리적으로 거부하거나 왜곡시키는 일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화를 위해서는 과학이 과학다운 모습으로, 신학이 신학다운 모습으로 같이 갈 수 있다. 결국 해석의 문제라는 말이다.

성경비평이라는 학문이 종종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마치 무신론을 대변하는 학문인 것처럼 오해되곤 했었지만, 21세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성경 지식들은 19세기에 무수하게 쏟아져 나온 성경 내부의 집중적인 연구, 정경, 외경, 위경을 포함한 다양한 고대 문헌들과의 비교연구, 고고학적인 자료들을 기반으로 한 성경의 역사적 연구, 그리고 자연과학적인 증거들을 통한 성경의 재해석과 그로 인해 빚어진 숱한 논쟁들을 거쳐오면서 얻어진 열매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저자는 무엇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진화해온 다양한 창세기 해석 중에서도 다음을 강조한다. 

“진화론과 기독교 간의 의미 있는 대화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고대의 모습 그대로 창세기를 바라봐야만 한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나 짊어질 수 없는 짐을 그 책에 요구해서는 안 된다. 창세기를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로 갖고 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선 창세기의 배경이 되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 안에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현대 과학의 관심에서가 아닌 신학적 진술로서 창세기를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창세기 초반부에 있는 장들은 역사적인 사건을 문자적 혹은 과학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이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관해 고대의 표현방식대로 선포한 신학적 진술이라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진화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쉽게 생기는 갈등, 이를테면 “당신은 과학을 성경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라는 거친 반응이 야기되는 것도 이미 창세기가 과학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잘못된 가정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진화와 기독교에 대해 제대로 토론하기 위해서 우린 창세기가 어떤 장르이며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예상을 재조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저자는 그 재조정의 첫 번째 단계로 고대의 정황 안에서 창조 기사가 기록되었다는 점을 숙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아담 기사의 일부 요소는 보편적 관점에서 인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한 것임을 시사한다면서 이런저런 성경해석학적인 자료들을 들면서 주장한다. 말하자면, 아담은 고대 근동의 이스라엘 역할을 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이 해석대로라면, 아담의 육체적 죽음은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은유적 죽음으로 해석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고, 아담이 첫 번째 인간이라거나 인류의 대표라는 의미에서 모두 해방받게 되는 셈이므로 진화론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기회조차 제거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아직 한국 기독교 정서 안에서는 자칫 불경하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성경과 고대 근동 역사를 공부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있었다는 것과 더불어 출애굽 및 가나안 정복 등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아담 기사에 대한 해석도 여러 다양한 해석 중 하나로써 일리를 가질 것이라 생각한다.

2부에서 저자는 바울이 생각한 아담을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사실 아담은 구약성경에서 역대상 1:1을 제외하면, 창세기 5장 이후에 명확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아담의 불순종이 보편적 죄와 죽음의 근거가 된다면, 어째서 구약은 단 한 번도 아담을 이와 연관해서 언급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의 질문은 예리한 칼날과도 같다. 바울에게 있어 아담은 신학적으로 필요한 역사적 인물이라는 전제를 배제할 수 없으며, 사실 이것이 아담의 역사성 논쟁을 첨예하게 이끈 주원인이었다. 또한, 창세기에는 가인의 불순종의 원인으로서 아담의 불순종이 제시되지 않는다. 노아가 당대의 유일한 의인이었다고 적힌 창세기 6장의 내용도 아담이 보편적 죄악의 원인이라면 해석하기 곤란한 문제가 된다. 이는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불순종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이 죄에 빠졌다면 노아라는 의인은 존재할 수 없고 이스라엘의 실패는 이미 예견된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그러한 죄악의 원인을 아담에게서 찾지 않는다. 이렇게 저자는 아담 기사를 무조건적으로 모든 인간의 타락, 죽음, 죄악의 원인으로 해석하는 것에도 허점이 있음을 성경 자체의 모순을 들면서 보여주고, 보편적 죄와 사망의 원인을 아담에게 모두 전가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를 역사적으로 완전히 해결하셨다는 복음에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주장한다. 

바울이 아담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저자는 명확한 사실은 바울이 아담을 단순히 역사적으로 받아들였다기보다 다소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이라고 해석한다. 시간 순으로 보자면 아담이 그리스도보다 먼저라고 할 수 있지만, 바울이 이해하는 아담은 그리스도로 인해 형성된 존재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바울은 당대의 유대 해석가들과 마찬가지로 아담을 자신의 복음 메시지를 정교하게 설명하게 해주는 수단으로 사용, 해석했다는 것이며, 다른 구약성경을 창의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방식으로 인용하였듯 바울은 아담 기사를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로마서를 예로 들며 바울이 특히 ‘하나님의 하나의 백성’을 강조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죄와 죽음이라는 동일한 문제로 특징지어지는 보편적 인류에 속해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누구에게나 허락된 구속이 그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고, 바울의 아담이 바로 이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바울이 감히 창세기의 아담 기사를 창의적으로 해석한 근본적인 이유를 그가 간접적으로 경험한 그리스도의 부활로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예상할 수 없었던 급진적인 구원 행위의 절정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라운 해결책을 제공하셨어야 했을 만큼 이에 상응하는 문제점이 있었을 것이고, 이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인류의 본질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바울은 이 해결책의 본질 때문에 인간이 겪는 문제가 그의 유대 세계관보다 더 폭넓고 깊어야 한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정말 문제가 된 것은 유대인의 율법 준수 실패가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유대인도 이방인처럼 죄를 짓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모든 인류가 겪는 문제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 문제에 빛을 비추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대단한 결말에 비추어 이제 이스라엘 국가의 이야기를 다시 이해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고, 이는 그가 구약성경을 해석한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저자가 말한 대로, 바울은 창세기가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아담의 탓으로 돌린 것일지도 모른다. 창세기는 단순히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로써 보편적인 죽음에 초점을 두는 반면, 바울은 아담의 범죄가 그를 포함한 우리의 죽음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죄의 권세 아래 머물게 된 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이 이렇게 아담을 창의적으로 해석하고 창세기 저자보다도 더 큰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창세기 자체의 객관적 해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든 인류가 빠져있던 죽음과 죄 문제가 해결되고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울에게 있어 아담은 역사적, 생물학적인 개체라기보다는 신학적인 존재로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진화론이 맞냐 아니냐에 대한 답을 원했거나, 어떻게 창세기 아담 기사를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혹은 진화론을 어떻게 창세기를 동원하여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원했다면 반드시 실망했을 것이다. 이 책은 저자도 서론에서 밝히듯 창조과학 쪽으로 편향된 부류나 진화론을 마치 무신론을 대변하는 주 무기 다루듯 여기는 부류를 상대로 쓰인 책이 아니라 자연과학과 성경의 대화에 이미 마음을 연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진화는 관찰 가능한 현상이자 객관적 사실이며, 진화론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과학적인 증거가 계속 쌓여가고 있고 그로 인해 합리적인 추론이 점점 사실화되어가고 있는 이론이다. 더 많은 증거들은 앞으로도 계속 쏟아질 것이다. 그동안 여러 독립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발견된 많은 점들 (생물학적, 고고학적, 인류학적 증거)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하나의 굵은 선 (진화론)을 그려가고 있다. 자정기능이 그 어느 영역보다도 잘 작동하는 과학을 하나님을 순전하게 믿는다는 명목 하에 무시하거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밀한 두려움에 이끌려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합리적 이성을 사용하길 거부한다면, 그 믿음은 더 이상 하나님이나 기독교를, 나아가 자기 자신의 신앙까지도 지켜낼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다면 어렵지 않게 창세기가 적힌 목적과 더불어 당대의 콘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누군가에겐 하나의 답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 답은 모든 의문을 다 풀어주는 만능열쇠는 아니다.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인 피터 엔즈 역시 이 책에서 하나의 해석을 친절하게 풀어나갔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해석도 해석일 뿐이라는 점은 누군가에겐 여전히 불편한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결국 해석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열린 마음으로 끊임없이 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에 참여하고 귀 기울이며 잘못 각인된 맹신과 반지성의 뿌리를 계속해서 뽑아나가는 것에 방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 대열에 기꺼이 참여하길 원한다. 가장 과학다운 과학, 가장 신학다운 신학,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충분히 이룰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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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12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계동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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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 심연에 있는 쾌락.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고.

 

열등감과 자기 비하의 심연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울과 절망? 수치와 모욕? 소외와 단절? 모두 아니다. 그런 것들은 얕은 곳에 위치해 있어 겉으로 쉽게 드러나는 모습일 뿐이다. 적어도 이 책에 따르면, 열등감과 자기 비하의 가장 깊은 곳엔 ‘쾌락’이 있다. 그 쾌락의 맛을 본 작품 속 주인공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어떤 은밀한, 비정상적인 비열함에서 오는 쾌감을 느꼈고, 어떤 기분 나쁜 뻬쩨르부르그의 밤에 방구석으로 돌아와서는 오늘 또다시 추잡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그리고 저지른 일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의식했으며, 이것으로 인해 내면적으로 은밀하게 자신을 갉아먹고, 갉아먹으며 괴롭히고 고통을 주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쓰라린 비애는 어떤 치욕스럽고 저주받을 달콤함으로 바뀌었고, 드디어는 결정적이고 진지한 쾌락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렇다. 쾌락으로, 쾌락으로 말이다! 당신에게 설명하겠다. 이 경우의 쾌락이란 바로 자신의 비하를 너무나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는 데서 오는 것이다. 즉 당신 스스로 마지막 벽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끼며, 이것이 추잡한 일이지만 달리 방도가 없고, 이미 당신에게는 출구가 없다는 것, 그리고 결코 당신은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제목에 등장하는 ‘지하’는 지상 아래의 공간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은유로 읽어야 한다.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주무대인 ‘지상’에 대비되는 의미로써, 소외되고 단절된 자들에게 비정상적인 안정을 제공하는 어두운 은닉처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은 스스로를 소외시켰다. 안타깝게도 책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스스로 깊은 몽상에 빠진 나머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못한 채 혼자 섬을 이루며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회 부적응자다. 그리고 그는 하급관리로서 가난은 그의 필연적인 친구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으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본성은 이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 ‘분신’의 주인공이 떠오르고, ‘죽음의 집의 기록’, ‘미성년’의 주인공도 떠오르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드미트리도 생각나게 하는 인간의 심리 묘사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서사가 거의 없고 거의 주인공의 철학적, 심리학적인 독백으로, 그것도 자신의 이율배반성을 스스로 감지하고 있어 괴로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비뚤어지고야 마는, 그래서 나름대로의 ‘쾌락’을 느끼곤 하는 독백으로 가득 차 있는 작품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후기 작품이라 할 수 있는 5대 장편소설이 탄생하기 직전에 써진 그의 중기 말의 작품이기도 하다.

 

자존감 없는 사람이 자존심에 집착하듯, 도스토예프스키는 작품 속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열등감’ 이면에 흐르는 ‘비뚤어진 우월감’을, 유리 거울 깨지듯 ‘약한 정신성’ 이면에 흐르는 ‘잘못 강화된 의식’을, 늘 모욕받는 듯한 ‘약자 혹은 패배자의 모습’ 이면에 흐르는 ‘추악한 허영심과 비열한 지배욕과 탐욕’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읽고 있노라면 씁쓸한 기분을 가뿐히 넘어서게 되고 곧 어두움과 불쾌감마저도 느끼게 된다. 인간의 공감 능력에도 역치가 있어서 그 이상의 자극이 가해지게 되면 더 이상 공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한 상황이 되고, 급기야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는 행동을 통해 그 상황을 피하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이런 면에서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탁월함을 보여주는 작가가 틀림없다. 보통 사람 같으면 감정의 곡선을 어느 정도 따라가다가 적당한 선에서 멈추게 되는데, 도스토예프스키에겐 그런 건 통하지 않는다. 그는 기어이 끝까지 가고야 만다. 그리고 마침내 그 누구도 가 보지 못한 길의 끝에서 인간 본성의 민낯을 낱낱이 발려 내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기 위해서는 예리한 검에 깊이 찔린 상처를 맛 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처럼, 5대 장편으로 그가 나중에 만발하기 이전의 작품들을 읽어나갈 땐 특히 각오를 하고 읽으면 좋겠다. 함부로 덤비다간 도스토예프스키를 오해할 여지가 충분히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것처럼, 인간 본성의 민낯을 맨눈으로 구경하고 싶다면 나는 그 어느 작가보다도 도스토예프스키를 권하고 싶다. 그래도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신뢰가 생긴 이후에 읽으면 좋을 듯하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36636616381098

6. 죽음의 집의 기록: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311510975560328

7. 가난한 사람들: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633890636655692

8. 분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717746821603406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17986684912752

10.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72627856115307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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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세트 - 전2권 열린책들 세계문학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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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논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합리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움베르토 에코 저, ‘장미의 이름’을 읽고.

평범한 추리소설의 경계를 가뿐히 허물어버리는 듯한 이 범상치 않은 작품은 역사는 물론 기호학, 과학, 철학, 신학까지 모두 한상에 올려 성찬을 베푼다. 탄탄한 플롯은 스릴감 넘치는 전개와 더불어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는다. 약 900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소비되는 물리적 시간마저도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느새 꿈만 같은 추억으로, 그래서 다시 꾸고 싶은 꿈처럼 기억되는 작품이다. 소장 가치, 재독 가치가 충분하다. 단, 중세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만약 다시 읽게 될 경우, 당대 주요 철학과 신학의 흐름을 미리 간단하게라도 공부해 놓거나, 이 책에 대한 해제가 담긴 ‘장미의 이름 작가노트’, 혹은 ‘장미의 이름 읽기’와 병행한다면, 보다 깊은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이미 마니아 층이 형성된 이 작품을 읽은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 중 상당수는 아마도 벌써 이런 비슷한 과정을 밟지 않았을까 싶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액자 형식을 따른다. 서문에 등장하는 ‘나’라는 화자는 1968년 8월 16일, 한 권의 책을 손에 넣게 되고 이탈리아어로 번역한다. 1842년 라 수르스 수도원장 ‘발레’가 프랑스어로 번역 및 펴낸 책이었다. 발레가 번역한 책도 원본은 아니었다. 18세기 석학 ‘마비용’ 수도사가 편집한 사본이었다. 원본은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 14세기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 멜크 수도원 출신의 수도사 ‘아드소’의 수기이다. 아드소가 백발의 노인이 된 뒤, 수십 년 전 당시 자신이 작성했던 노트와 기억에 의지하여 라틴어로 양피지 위에 작성한 사건의 기록이다.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고 (사실 나는 이 부분에서 길을 잃고 2년 전 읽기를 관둔 적도 있다) 본론을 이해하는 데에 그다지 큰 영향을 안 준다고 볼 수 있는, 이러한 두 번의 번역 과정과 ‘나’의 손에 우연히 들어오게 된 배경을 굳이 설명하면서 저자가 이 작품의 문을 여는 까닭은, 아마도 6세기가 지난 20세기 현재, 라틴어로 쓰였던 원본 ‘아드소의 수기’에 대한 역사성 및 사실성, 그리고 희귀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은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탓일 것이다. 

작품의 액자 역할을 하는 서문을 통과하면, 본격적으로 아드소 수도사의 수기가 펼쳐지는데, 이는 1327년 11월 말, 정확히 7일 동안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어느 수도원 (아드소는 의도적으로 이 수도원의 위치와 이름을 함구한다. 그래서 이는 ‘서문’에서 ‘나’라는 화자가 수기를 통해 추측한 것이다)에서 아드소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일을 베네딕트 수도회의 성무 공과 시간에 따라 시간 순으로 기록한 회고담이다. 즉 아드소는 모든 사건의 직접 관찰자였고 증인이었으며, 그 충격적인 내막과 엄청난 결론까지도 세밀하게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내고 이성과 감성이 충분히 숙성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있는 기억을 쏟아내며 이 수기를 작성한 것이다. 그는 수기 마지막에 나로선 의미를 좀처럼 파악할 수 없는 고백을 다음과 같이 남긴다.

“나는 이제 이 원고를 남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남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이렇듯 제목 ‘장미의 이름’은 작품 마지막 문장에서 탄생했다. 소설을 한 번 읽은 나로선 (아마 두 번 읽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작품 속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장미’의 의미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여러 상상이 가능하겠지만, 장미라는 단어에 주목하지 않고 문장 전체의 의미를 짐작해 볼 때, 아마도 ‘세월이 흐르면서 장미의 붉은빛과 향이 사라지듯 지난날 기억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했다 할지라도 오감을 통과하는 생생함을 잃기 마련이고,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덧없는 이름뿐이듯 우리들의 기억도 그것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 (이를테면 정체성 같은)만이 남을 뿐이다’라는 뜻이 아닐까, 하고 나는 얕은 추측을 해볼 뿐이다. 

수기의 주인공은 물론 아드소이다. 그러나 7일 간 일어났던 엄청난 사건의 해결을 위해 아드소를 조수 (필사 서기 겸 시자)로 부리면서 스토리를 이끌고 나가는 인물은 프렌체스코 수도회의 박식한 수도사, 배스커빌 사람 ‘윌리엄’이다. 윌리엄과 아드소 수도사의 관계는 아서 코난 도일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셜록 홈즈’와 ‘존 왓슨’, 혹은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에르퀼 푸아로’와 ‘아서 헤이스팅스’ 정도로 이해하면 될듯하다. 세 작품 모두 전자는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으로, 후자는 전자를 보조하며 모든 사건을 기록하는 화자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저자 움베르토 에코가 그의 첫 추리소설인 이 작품에서 이러한 인물 구도를 가져온 것은 아주 적절했고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이런 구도는 자칫 ‘슈퍼맨 이야기’로 흐를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작품을 보호할 수 있으며, 스토리 전개와 작품 전체의 객관성을 좀 더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성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이 작품의 특성상, 나는 이 방법을 선택한 저자가 아주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7일 동안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연쇄 살인이다. 윌리엄 수도사는 아드소와 함께 4명의 수도사가 시체로 발견된 이후에 비로소 사건 진상의 결정적인 단서 (즉 장서관의 미궁 속 숨겨진 방을 찾는 단서)를 찾아내고 범인을 마주한다. 신학에도 철학에도 능통한 윌리엄 수도사는 자연과학에도 탁월한 지식을 갖고 있다. 시대가 14세기 초인만큼 자연과학은 기독교를 대적하는 악마의 발명품이나 장난감으로 오인되던 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윌리엄 수도사는 시대를 앞서간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돋보기안경을 가지고 원시를 극복하는 장면, 자성을 가진 돌을 이용해 나침반을 고안하는 장면, 거울의 착시를 알아채는 장면, 약초의 독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모습 등 윌리엄 수도사는 당대 수도사들과는 달리 자연과학을 이단시하지 않고 친구로서, 그리고 진리를 발견하는 도구로써 여기고 사용할 줄 아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사실은 윌리엄 수도사로 하여금 여러 무속적이고 이교도적인 잘못된 기독교 신앙과 확신에 빠지지 않고 이성과 논리를 이용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도록 도와주는 배경이 된다. 아마도 저자는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가지고 있던 여러 미신적이고 반지성적인 믿음을 꼬집고 풍자하고 싶었을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과거에 이단 조사관으로 일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진해서 그만두었다. 그 이유가 기막힌데, 다음과 같다. 작품 속에서 여러 번 다른 표현으로 등장하지만 여기선 122페이지에 나온 짧은 문장을 인용한다. 

“조사관 시절에 나를 괴롭혀 온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어요. 그래서 조사관 노릇을 그만두고 만 것이랍니다. 내게는 사악한 자들의 약점을 조사해낼 용기가 없었던 거예요. 알고 보니 사악한 자들의 약점은 도덕 높은 분들의 약점과 같더란 말입니다.” 

이것만 봐도 윌리엄 수도사가 어떤 인물인지는 대충 감이 올 것이다. 그는 기독교 고위 성직자와 그들이 이단으로 규정하고 살인까지도 허용하는 인물들, 즉 양극단에 위치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간파할 정도로 그 당시 썩어버린 기독교 내의 정치와 이권 다툼 등의 타락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식의 언변은 작품이 진행되면서 종종 등장하게 되는데, 근본주의에 천착하지 않은 기독교인 독자라면 아마도 나처럼 이 작품을 읽으면서 여러 번 윌리엄 수도사의 대사로 인해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을 느꼈을 것 같다. 가령 다음과 같다. 내가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었던 부분이다. 

“악마라고 하는 것은 물질로 되어 있는 권능이 아니야.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야!”

“가짜 그리스도는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 이방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잘 들어 두어라.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성자 중에서 이단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XXX (스포일 하지 않기 위해 이름 숨김)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안에 내재하고 있는 이러한 오래된 문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부분적으로 존속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강력한 숨은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이성과 논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합리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아, 기가 막히지 않은가. 한낱 심심풀이로 읽을 수 있는 이런 추리소설 같은 픽션에서 여러 신학/신앙 서적에서 느끼지 못하던 깨달음을 얻게 되다니! 기독교 신앙의 유무를 떠나 나는 이 작품을 모든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재미와 교훈, 통쾌함과 깊은 성찰에 이르기까지 일석이조의 효과를 수차례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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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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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과 개인의 행복: 그 조건과 이유, 갈등과 균형에 대하여.


레프 톨스토이 저,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한참을 망설였다. 아직도 책상 위에는 쌓으면 하나의 큰 벽돌이 될 만큼 두꺼운 책 세 권이 층층이 놓여 있고, 눈 앞에 펼쳐진 흰 바탕의 워드 파일은 세 시간째 커서만 깜빡이고 있다. 무언가를 써야만 한다는 기분 좋은 의무감에 취해 있으면서도, 나는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컴퓨터 스크린만 바라보고 있다. 

마흔 언저리, 절박한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 여정에서 나는 꽤 많은 문학작품을 만났다. 그중 나를 꼼짝 못 하게 매료시킨 작품을 꼽아보면 그리 많진 않다. 모든 문학작품은 저마다 고유한 사상과 정서를 담고 있지만, 보편적인 인간의 그 무언가를 깊숙이 건드려 독자를 읽는 내내 압도하는 작품은 결코 흔하지 않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장르 자체가 가지는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 그리고 제한된 시공간 및 언어에 필연적으로 갇힌, 그러나 탁월한 통찰력과 필체를 가진 작가 간의 운명적인 만남은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을 탄생시키기 마련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나는 나를 압도한 소수의 문학작품 리스트에 하나를 더 추가하게 되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이다.

문학고전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이름만 들어본 작품도 많다. 그 존재와 가치를 안다 하더라도 본인은 정작 읽어보지 않은 작품이 많다는 얘기다. 보통 이런 작품은 난이도보다는 분량에 의해서 결정된다. 읽고 싶은 충동과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만드는 상승효과도 책의 분량에 의해 쉽게 제압되고 마는 것이다. 분량은 곧 시간이고, 시간은 곧 여유이며, 여유는 현대인의 바쁜 일상 속에서 좀처럼 만들어내기 어려운 물리적 투자로 이어지기에,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늘 희생당하며 산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언가 스스로 희생하기는 두려워하는 현대인들은 이런 작품을 읽기 위해 자신의 며칠 안 되는 소중한 휴가를 사용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이런 작품은 또다시 책장의 한 구석을 묵직하게 차지한 채 마치 오래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처럼 마음의 부담거리로 남게 되는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현대인의 서글픈 일상의 단면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이 작품을 읽기 위해 몇 년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같은 이유였다. 시간이 없어서, 여유가 없어서, 그럴 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 하지만 올해 내가 처한 특수한 상황은 이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아내와 반강제적으로 떨어진 상황, 아들의 2주 겨울방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된 휴가, 그리고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한 락다운. 손발이 묶인 것처럼 답답한 상황이 오히려 이런 대작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덕분에 1,600 페이지의 책을 5일에 걸쳐 읽어냈다. 시원하게 숙변이 제거된 듯한 해방감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다 읽고 나서야 고백하는 말이지만, 이 대작을 완독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위에 언급한 특수한 외적 환경이기보다는 이 책에 내재된 고유하고 압도적인 아우라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이 작품에 압도되지 않으면 다 읽어내기가 결코 만만찮은 작품이라는 의미도 되고, 누구든지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압도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라는 의미도 된다. 대작을 맛보고 경건한 마음이 되어 답례로 무언가를 써야 한다고 느끼는 이 신성한 의무감을 나는 사랑한다. 이 기분을 허투루 날려 보내고 싶지 않다. 살면서 아주 드물게 마주치는, 예기치 않은 기쁨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조그만 감상문으로 이를 기념하기로 한다.

줄거리를 요약해 볼까, 인물 분석을 시도해 볼까, 아니면 작품 속에서 크게 대비되는 두 가정을 비교해 볼까… 하는 생각으로 한동안 머릿속이 가득 차기도 했었다. 그러나 책 뒤에 붙어있는 해설에서 “이 작품은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그에 대해 연구된 저서와 논문만을 모아도 도서관을 만들 수 있을 정도”라는 부분을 읽고 나자마자 나는 어설픈 분석적인 접근은 그만 두기로 했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건 그저 내가 느낀 바를 담백하게 적어 나가는 것밖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두 가지 관점으로 내 감상을 간략하게 풀어볼까 한다. 하나는 ‘가정의 행복’, 또 하나는 ‘인간 (개인)의 행복’에 대한 관점이다.

1. 가정의 행복.

이 작품의 문학동네 번역본은 총 세 권으로 나눠져 있다. 1권은 1-2부, 2권은 3-5부, 3권은 6-8부로 각각 구성된다. 1권을 읽으면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연애, 불륜, 갈등, 이혼, 파멸 등, 천박한 3류 소설에 어울릴법한 이야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막장 드라마로 유명한 한국 사람 아닌가. 셀 수 없이 많은 드라마에서 이미 써먹을 대로 써먹은, 그래서 이젠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는, 너덜너덜한 싸구리 연애소설에 나는 전혀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그 따위 책을 읽느라고 나의 귀중한 휴가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나 이 작품이 단지 톨스토이라는 거장의 이름값과 ‘안나 카레니나’라는 대작의 유명세만을 등에 업고 있는 ‘빈 강정’은 아닐까, 하는 의혹까지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기우였다. 2권에 들어서자마자 속도가 붙었다. 가장 많은 분량 (약 600페이지)을 차지하는 2권을 가장 빨리 읽어버렸다. 그리고 3권 앞부분에서 잠깐 속도가 늦춰졌다가 중간부터 끝까지 다시 내리 달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7부에서 느껴졌던 여러 불길한 조짐, 마치 도스토예프스키를 연상케 하는, 안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신분열적인 독백을 읽고 있을 땐 나는 심장이 바싹 조여드는 기분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쾅” 하고 실현되어버린 안나의 악몽, 안나의 죽음을 목도했을 땐 한동안 책을 덮고 숨을 고르지 않을 수 없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어떤 거대담론을 논하지 않는다. 물론 역사와 1870년대 러시아 시대 정황을 숨김없이 드러내지만, 저자는 한층 눈을 낮추어 지극히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주제를 다룬다. 주제도 한 가지가 아니다. 오히려 백과사전식이랄까. 여러 가지 주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히고설켜서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심 된 주제를 하나 꼽으라면, ‘가정’, 혹은 ‘가정의 행복’, 좀 더 풀면 ‘가정의 행복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대답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소설을 여는 첫 문장이 이 주제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소설 전체가 이 한 문장에 압축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추측건대, 이 작품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 유명한 첫 문장을 들어본 사람은 꽤 많을 것이다. 문학동네 버전은 다음과 같다. 이어지는 문장은 출판된 여러 영문 번역 중 하나다. 개인적으로는 영문 번역 덕분에 이 문장의 의미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All happy families are alike;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첫 문장의 해제라고 볼 수 있는 1,600 페이지의 방대한 드라마는 주로 두 가정을 비교하며 전개된다. 한 가정은 안나와 브론스키, 또 한 가정은 키티와 레빈이 주축을 이룬다. 전자는 공식적인 부부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공식적인 결혼이 불가능하다. 알다시피 안나는 알렉세이라는 남편과 세료쥐아라는 아들이 있는 가정을 뒤로하고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져있는 상태이다. 브론스키와 결혼을 하려면 알렉세이와 먼저 이혼해야 한다. 그러나 끝내 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안나에겐 죽음이 이혼보다 먼저 찾아왔다) 후자와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지만, 톨스토이는 이 두 가정, 조금 더 범위를 좁히자면, 전자의 안나와 후자의 레빈에게 초점을 맞춘다. 

일견에 안나와 레빈의 삶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치닫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부와 명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재력가이자 전도유망한 정치인 남편과 어린 나이에 결혼한 안나는 소설 처음부터 외적인 모든 걸 다 갖춘 채로 등장한다.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 남자들을 손쉽게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남자는 결혼 유무를 떠나 고개를 돌려 다시 쳐다보지 않을 수 없는 미모를 가진 여자로 그려진다. 반면, 레빈은 상류 사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 속에 만연한 허영과 허식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경계하고 있으며, 사교계 안에서 판에 찍은 듯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혼자 철학적으로 깊게 사유하길 좋아하고, 도시에서 흥청망청 불필요한 돈을 쓰며 시간을 축내는 생활보다는 시골에서 정직하게 땀 흘리며 노동하는 편을 선호하는 순진하고 우직한 남자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두 사람의 상황은 점점 변해간다. 안나는 우연히 기차에서 브론스키를 처음 만나고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자신에게 모든 걸 다 제공해주고 안전한 요새가 되어주었던 가정을 등지고 도덕, 윤리, 그리고 당시 사회문화와 사교계 풍습의 따가운 시선을 과감하게 물리친 채 브론스키와 함께 떠나 단 둘만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가 추구했던 사랑은 점차 집착이 되었고, 그녀가 추구했던 자유는 그녀를 더욱 구속하고 말았으며, 그녀가 남들 앞에서 자랑했던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은 불행의 전초전일 뿐이었고 이는 곧 파멸을 가져왔다. 한편, 레빈은 용기 내어 키티에게 했던 청혼이 거절되자 잠시 좌절에 빠진 채 묵묵히 사유와 노동 위주의 생활에 침잠했지만, 곧 키티의 진심을 알게 되어 겸허한 자세로 결혼에 성공하게 되며 시골에서 이웃과 가족, 친지를 진심으로 도우며 소박하지만 단란하고 칭찬받는 가정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안나와 레빈의 대비는 가정의 행복이 결코 초기 조건만으로 단정 짓거나 예측할 수 없으며, 오히려 모든 과정 속에 나타나는 역동적인 움직임의 총합임을 우리에게 조용히 일깨워준다. 

그러나 아무리 예측할 수 없는 역동적인 움직임이 관건이라 하더라도, 소설의 결말까지 이어지는 전체 흐름에 기반할 때 아마도 저자 톨스토이는 자신의 첫 문장의 의미를 뒤집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불륜의 행각이 궁극적으로 안나와 안나 가정의 불행을 가져왔으며, 유혹에 빠질 수도 있었으나 그것을 이겨내고 정직함과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던 사랑이 레빈과 레빈 가정의 행복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첫 문장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불행한 가정이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 한 게 아니라, 불행으로 치닫는 가정은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공식에 의거한 일정한 (고만고만한) 수순을 밟는 것처럼 소설의 결말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의 첫 문장 뒷부분은 “불행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한 이유로 불행하다”라고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 인간 (개인)의 행복.

결혼을 경험해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결혼 전과 후는 엄연히 다르다. 외적인 부분은 물론이거니와 내적인 부분 역시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중 이 작품과 관련해서 ‘행복’이라는 관점으로 결혼 전후를 비교해보면 부인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함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 차이는 어떤 면에서는 단순히 ‘정도의 차이’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전혀 상반되는 입장으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가령, 불륜과 같은 사건이 개입될 때이다. 불륜이라는 단어는 결혼 전이 아닌 결혼 후에만 적용된다. 마음에 드는 매력적인 상대와 사랑에 빠지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일 만큼 아주 근본적인 욕망 중 하나다. 그러나 그 똑같은 행위가 결혼 후에 발생한다면 전혀 다른 해석이 내려진다. 윤리, 도덕의 문제와 신뢰, 책임감의 문제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안나가 선택한 사랑과 행복이 궁극적인 파멸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그러나 저자가 안나를 죄인이나 악인으로 단정 짓고 벌하기 위해 이야기를 전개 해나가지는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이 작품은 진짜 3류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안나의 괴로움과 내면의 갈등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유도한다. 결국 불행이 되어버린 행복(?)을 선택하고 그것을 지키려 하는 안나의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우리는 가없는 연민을 느끼며 자연스레 그녀의 내면에 젖어들게 된다. 안나 역시 인간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갈등과 혼란에 빠져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그랬지만, 이 책의 독자들은 아마도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신을 안나의 자리에 위치시키며, ‘나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불륜인 줄 뻔히 알면서도 이와 같이 안나의 내면에 우리가 깊이 공감하게 되는 이유는 아무래도 작가 톨스토이의 전적인 힘일 것이다. 거장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소설 읽는 재미 또한 이럴 때 극대화된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만약 알렉세이가 안나와 이혼을 하고 아들의 양육권까지 안나에게 넘겼다면 끝나는 문제 아니냐고. 그랬다면 안나는 이혼녀라는 타이틀로 인해 잠깐 동안의 수치만 견뎌내면 자신이 원하던 모든 것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 톨스토이는 이런 면에서 명확히 선을 그을뿐더러 (생각해 보라. 불륜을 행한 아내에게 순순히 이혼을 허락하고 위자료도 주면서 아들 양육권까지 넘겨주는 남편이 이 세상에 존재할 것 같은가), 남편 알렉세이를 기독교인으로 그리면서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자비와 긍휼을 안나에게 베풀며 그녀를 용서하고 그녀에게 돌아올 기회를 허락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이 설정은 안나가 그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내렸던 그 불행한 선택이 도를 넘어서는 것이며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영역의 그릇된 선택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 마찬가지로, 안나를 결국 자살이라는 끔찍한 행위로 몰고 가는 구도에서도 저자는 안나의 선택을 결코 옹호하지 않으며 오히려 죄와 같이 무겁고 어두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우린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안나와 대비되는 레빈이라는 인물은 아무 여자에게나 집적거리는 사교계의 흔한 남자들과는 남다른 생각을 가진 보기 드문 스타일의 소유자인데 (누군가는 촌스럽다고 표현할지도), 사랑과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레빈은 안나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을 취한다. 저자가 소설 시작부터 안나는 모든 것을 가진 유부녀로 등장시키는 반면 레빈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미혼남으로 등장시키는 구도 역시 이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가정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행복을 선택한 안나는 점점 모든 걸 잃게 되고, 함부로 인간관계를 맺지 않고 한 여자만을 조심스럽게 사랑하는 레빈은 시간이 갈수록 의심 없는 사랑을 얻고 행복을 누리게 된다. 도덕, 윤리적인 문제가 안나로 인해 도드라졌다면, 신뢰, 책임감의 문제는 레빈으로 인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무신론자였던 레빈은 소설 뒷부분에서 어릴 적부터 각인된 기독교적인 믿음이 자신의 이성을 넘어서는 영역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는 이유가 외적인 어떤 것, 이를테면 돈이나 명예를 위한 게 아니라, 내적인 어떤 것, 즉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영적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한때 인간의 삶은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허무한 상념에 빠져 있기도 하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여러 철학책과 신학 책을 읽어오던 그였지만, 소설의 마지막에서 레빈은 결국 죽음으로 끝을 맺는 인간의 삶이라도 삶의 모든 순간은 무의미하지 않으며 의심할 나위 없이 선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레빈의 깨달음을 통해 톨스토이는 아마도 ‘가정의 행복’이라는 관점보다는 ‘개인의 행복’, 아니 ‘모든 인간의 행복’, 즉 모든 인간이 진지하게 스스로 질문해서 얻어야 하는 답은 남녀 간의 사랑과 같은 인간적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존재와 선의 의미를 발견하며 인생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과 같은 인간 너머의 영역에서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해석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필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에서 톨스토이의 작품 세계로 제대로 들어와 보니, 마치 외경을 읽다가 정경을 뒤늦게 접한 경우와 비슷한 기분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직구를 먼저 배운 이후에 변화구를 배우는 게 순서이고, 정석을 먼저 배운 이후에 지름길이라든지 응용 버전을 접하는 게 상식일 텐데, 나는 톨스토이 이전에 도스토예프스키를 먼저 접했으니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접근으로 말미암아 나는 톨스토이의 작품 안에서 인간의 본성을 다루는 부분에 조금은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고, 텍스트 이면에 흐르는 콘텍스트와 저자의 의도를 가늠할 수 있는 주관적인 해석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도스토예프스키에 익숙한 독자인 내 눈에 읽힌 톨스토이 고유의 필체가 유감없이 드러나는 문장 몇 개를 소개해볼까 한다. 소설의 첫 문장이 소설 전체를 압축하듯, 이 문장들은 모두 각 꼭지를 여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작은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인간이 길들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없다. 특히 자기의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마찬가지로 살고 있는 것을 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307페이지)

“가정생활에서 무엇인가를 꾀하기 위해서는 부부 사이에 완전한 분열이나 혹은 사랑의 일치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부부관계가 애매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우에는 어떠한 계획도 실행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싫증이 난 생활을 그대로 몇 해째 계속하고 있는 부부가 꽤 있지만, 그것은 모두 완전한 분열도 일치도 없기 때문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369페이지)

다음은 레빈이 스스로 중요한 무언가를 깨닫는 장면을 묘사한 문장이다. 톨스토이 자신의 깨달음이 반영된 게 아닐까 한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데까지 다다른 것은 과연 이성에 의해서였을까?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곧잘 들었던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나의 마음에도 꼭 맞았으므로 기꺼이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일깨운 것은 누구였을까? 이성은 아니다. 이성은 생존을 위한 투쟁과, 자기 욕망의 만족을 방해하는 일체의 것을 압도할 것을 요구하는 법칙을 일깨울 뿐이다. 이것이 이성의 결론이다.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성이 일깨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합리하니까.” (485페이지)

이렇듯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가정의 행복과 인간 (개인)의 행복 사이의 갈등과 균형, 그리고 각각의 참 의미, 목적, 이유 등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21세기 현재 우리들도 충분히 공감하고 또 실제로 겪고 있는 일들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대작은 모두 개별적인 어떤 평범한 사건을 통해 보편적인 무언가를 깊이 건드려서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것 같다. 한 해의 마지막 날과 새로운 한 해의 첫날, 나는 이렇게 평생의 숙원 하나를 푼다. 방대한 작품을 대할 때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이 감상문이 대작의 명성에 흠집 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7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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