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러비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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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일 것인가, 나아갈 것인가.

토니 모리슨 저, ‘빌러비드’를 읽고

지울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는 어떻게 다뤄야 할까? 애를 많이 쓰면 끝내 치료할 수 있을까? 마침내 지워버릴 수 있을까? 아니면, 일찌감치 지우길 포기하고 안고 가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그 상처로부터 해방받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 상처가 ‘과거’라면 ‘현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미래’는? 끝까지 칼을 갈고 눈에 불을 켠 채 지울 수 없는 과거와 싸우면서 복수하듯 살아가야 할까? 아니면, 아무리 처절했다 하더라도 과거 따윈 잊어버리고 현재를 새롭게 살아내야 할까? 과거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현재는 무슨 의미를 지닐까? 과거가 없는 사람처럼 현재를 살아내는 건 가능한 일일까? 설사 의도적인 기억상실증 환자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현재는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렇게 과거를 잊은 현재는 과연 해방받고 자유로운 삶일까? 혹시 그 현재야말로 과거에 묶여있다는 직접적인 증거 아닐까? 어떻게 해야 아픈 과거에서 해방받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지울 수 없는 과거는 단지 잊고 안 잊고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깊은 상처를 남긴 과거는 망각으로 지울 수 없다. 극복해내야 하는 과제인 것이다. 지우는 건 잊는 게 아니라 이겨내는 것이다. 이겨내는 것은 과거에 묶이는 게 아니라 현재를 살아내며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흑인들이 백인들로부터 받은 지울 수 없는 과거의 깊은 상처도 마찬가지다. 결코 망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잊으려는 온갖 노력, 혹은 잊지 않고 어떻게든 분노를 간직한 채 복수를 위해 백인들을 응징하려는 노력으로는 어쩌면 그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일처럼 여기며 넘어가서도, 혹은 마치 그 일들이 지금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며 매여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이는 비단 흑인들의 뿌리 깊은 차별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확장되어 적용될 수 있다. 과거의 깊은 상처를 다루는 문제는 곧 미래로 이어질 현재를 살아내는 시작점과 동기와 방향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토니 모리슨의 대표작, ‘빌러비드 (Beloved)’를 읽었다. 450 페이지에 달하는 묵직한 분량은 수년간 많은 장편소설과 고전문학으로 맷집이 다져진 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인 토니 모리슨조차 직접 경험하지 못한 19세기 미국에서 자행되었던 ‘공식적인’ 노예제도, 그리고 그로 인해 흑인들이 일방적으로 당한 ‘합법적인’ 차별을 21세기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한국인인 내가 깊이 공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얕은 공감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힘들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혹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등 개인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도 이겨낼 수도 없는 거대한 폭력을 다루는 작품을 읽을 때마다 동일하게 겪는 난항이었다. 시간과 공간과 문화가 전혀 다른 독자인 내가 이 정도였으니, 이 작품을 직접 읽은 흑인들이나 미국인들, 혹은 여러 소수자들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니 마음이 무너졌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흑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가 생채기를 내며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허투루 읽어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급한 마음이 들어도 예의를 갖춰 소중한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시종일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묵묵부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이것이 르포르타주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사실에 깊이 안도하면서 말이다.

이 작품은 흑인 노예제로 인한 깊은 상처를 저자의 유려한 필체로 그려내고 있지만, 그게 이 작품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저 사라진 과거와 그 상처 받은 영혼들을 위한 묵념을 하게 만드는 수준을 훌쩍 초월하기 때문이다. 토니 모리슨은 흑인들의 아픔을 말하지만 그것을 미화하지도 낭만화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대우받으며 살아왔던 흑인들 역시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차별받고 억압받고 노예로 사는 삶의 일상을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그렇게 드러내는 이유가 흑인들의 서러움과 아픔을 강조하는 데에 있기보다 그들 역시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에 있는 것이다. 사건이 아닌 사람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 역시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고 백인들을 향한 분노를 느끼기보다 그들로부터 억압받던 흑인들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월한 인간이 열등한 인간을 억압한 게 아니라 동등한 사람이 동등한 사람을 차별했던 역사가 곧 흑인들이 겪어냈던 과거라고. 과거의 상처로 인해 아파하고 분노하기 전에 그 과거의 실체를 정확하게 봐야 한다고. 그래야 그 과거를 이겨내고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살아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목숨 건 도망에 기적적으로 성공한 세서. 그 도망의 길 위에서 태어난 아이 덴버. 간신히 도착한 124번지. 어느 날 세서를 잡으러 124번지를 찾은 백인 노예 주인, 학교 선생. 세서는 자기 자신은 매질과 강간을 당하고 더럽혀져도 자신이 낳은 네 아이만은 그렇게 살도록 놓아둘 수 없었다. 사랑했기 때문에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빠른 판단을 내리고 즉시 행동에 옮긴다. 직접 아이를 죽이는 일이었다. 세서는 아이들이 길러진 후 비인간적으로 사느니 차라리 자기 손에 죽는 게 낫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녀는 톱으로 여자 아이의 목을 썰었다. 아이는 죽었다. 나머지 아이들도 죽이려 하던 찰나, 주위 사람들에 의해 차단되고 세서는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녀가 행한 일은 과연 살인이었을까? 살인이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사건은 실화를 바탕으로 작가가 재구성한 이야기다. 실제로 유아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재산, 곧 사물이었으므로 그 사건을 살인으로 인정하게 된다면 그 일을 행한 노예 (마거릿 가너)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딜레마인 것이다. 실제로 이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재판은 이 논쟁 때문에 이례적으로 길어졌다고 한다.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고도 한다. 실제 사건에서 결국 마거릿 가너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노예로, 즉 재산 혹은 사물로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명백한 살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이 아닌 일이 되어버린, 이 기막힌 사건. 그러나 작품 속에서 토니 모리슨은 세서를 사람으로 인정받게 만든다. 감옥살이를 하다가 나중에 풀려나게 만든다. 대신, 출옥 후 세서의 상태와 행동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그녀뿐만이 아닌 다른 여러 흑인들의 삶도 보여주지만, 작가는 세서의 삶에 가장 관심을 기울인다. 소설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세서이기도 하지만, 소설에 흐르는 전체 서사가 세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세서는 곧 우리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세서에게 ‘스위트홈’에서 같이 노예로 살았던 폴 디가 찾아온다. 딱딱하게 굳어졌던 마음을 다시 놓아도 되나, 하는 마음까지 들던 찰나, 서커스 구경을 하고 124번지로 돌아오던 날, 집 앞에 한 흑인 여자 아이가 자고 있었다. 빌러비드였다. 덴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알았다. 그녀는 엄마가 톱으로 죽였던, 이제는 살아 돌아온 언니라는 것을. ‘빌러비드’는 사실 돈이 없던 세서가 자기가 죽인 딸의 비석에 새긴 유일한 문구였다. 세서는 그 짧은 단어를 새기기 위해 돈이 없어 반강제적인 강간을 선택했다. 그 짓을 한 번 하게 해 주면 돈을 받지 않고 비문을 새겨준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무덤 속에 있던 아이가 버젓이, 비록 모르는 사람의 몸을 입었지만, 환생한 것이었다. 세서도 나중에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서가 그녀에게 가진 건 오로지 죄책감이었다. 사랑했기 때문에 저지른 살인이었지만 죄책감을 떨칠 순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빌러비드는 그 죄책감을 이용해 세서를 옥죄기 시작한다. 마치 죄인의 죄를 잡고 협박하여 꼼짝없이 자기의 졸개로 부리는 불의한 인간처럼. 이때 작가는 마치 제삼자로 여겨지고 있었던 덴버를 이용해 이런 지옥과도 같은 상황에 끝을 맺게 만든다. 덴버에게는 도약이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난날 자기 아이를 죽였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면서 빌러비드는 사라진다. 124번지에 쥐도 새도 모르게 찾아왔던 것처럼 124번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떠나 있었던 폴 디가 돌아오고 세서와의 새로운 삶을 기약하는 모습으로 작품은 마무리가 된다.

빌러비드가 어떻게 환생한 아이일 수 있느냐, 그게 가능한 얘기냐, 진짜 사람 맞냐, 환각 아니냐, 등의 질문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빌러비드가 실제 사람이었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폴 디는 의심 없이 진짜 사람이었지만 그가 진짜 사람이었는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토니 모리슨은 폴 디를 세서의 미래로, 빌러비드는 세서의 과거로 설정한 듯하다. 세서는 과거의 깊은 상처를 지우고 싶었다. 적어도 자녀에게 전달되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빌러비드와 함께 하는 삶은 과거에 묶인 채 죄책감에 쌓여 남은 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대변한다. 반면, 폴 디와 함께 하는 삶은 과거의 상처를 이겨내고 그것을 시작점으로 하여 새로운 현재를 살아내는 방법을 말한다. 빌러비드가 사라지고 세서가 폴 디와 함께 하는 삶으로 작품이 마무리되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덕분에 세서를 끝까지 응원하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마칠 수 있었다. 

폴 디와 함께 하는 삶에도 자주 과거의 상처가 되살아나 (빌러비드가 나타나) 힘든 나날들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겨냈다고 생각할 때 즈음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날도 종종 생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과거를 하나의 사건으로 여기고 그 사건 때문에 가지게 된 분노와 원망, 죄책감 등에 사로잡혀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는 것보단 건강한 삶이라 믿는다. 우리 대부분의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 잊으려는 노력도 간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겨내는 방법은 잊는 노력도 포함할 테니까. 그러나 잊으려는 노력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과거의 망령은 언제든 되살아나 우리를 습격할 테고, 그것들과 맞서 싸우는 과정은 망각이라는 효과적인 방법도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세서는 곧 우리 자신이 된다. 우리 역시 저마다 다른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 과거에 묶일 것인지, 그 상처를 이겨내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우린 선택해야 한다. 부디 모든 사람이 세서처럼 후자를 선택할 수 있길 바라본다. 해방과 자유는 과거를 잊는 행위가 아닌 이겨내는 행위에서 시작될 테니까.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45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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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11-07 11: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Youngwoong Kim 2021-11-07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딩 감사합니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선집 1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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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의 충돌


헤르만 헤세 저, '데미안'을 읽고


나에게도 두 세계가 있었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많은 것들이 버려졌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눈에 보이는 주변 환경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나의 내면의 변화가 컸다. 심이 깊게 박힌 티눈처럼 내 안에 깊이 각인되어 있던 성공지향적 가치관이 비로소 그 뿌리를 드러내고 참혹히 잘리면서 피를 철철 흘리고 죽어 버렸다. 그 죽음이 끝일 것 같아 온 힘을 다해 버텼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유아적 생명은 죽어야만 했던 세계였다. 죽지 않았다면 나는 끝내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견고한 알에 갇힌 채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내 모습을 본다. 예전보다 편안해진 모습이다. 조그만 우물과도 같았던 알 속에서 마냥 조급하기만 했던 내가 부끄럽다. 그렇다. 새가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오듯,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이 가능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낼 수 있다. 새의 탄생은 알의 파괴를 전제한다. 그러나 그 파괴는 파괴로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삶을 보장한다. 파괴는 창조의 전신이다. 
 
인간은 어쨌거나 성장하는 법이고, 그 성장은 언제나 두 세계의 만남을 기반으로 한다. 성장은 변태이자 진화이다. 같은 것 같으나 다른, 다른 것 같으나 같은 모습으로의 탈바꿈이다. 단지 수평적인 세계로의 이동이 아닌, 기울기가 있어 보다 높은 차원을 가진 세계로의 상승 진입이다. 그 과정은 치열한 투쟁의 연속이기도 하다. 그래 봤자 좀 더 죽음에 가까워질 뿐이라고 누군가는 조롱할 수도 있겠지만, 흐르는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켜켜이 쌓이는 법이기에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자신을 이루는 내면세계는 점점 그 깊이를 더해간다. 어찌 보면 무한급수로 이루어진 카오스의 프랙털 모습과도 비슷할, 그래서 부분이 전체의 작은 닮은꼴인 동시에 전체가 그 작은 부분의 모습과도 같은, 그러면서도 어떤 규칙과 패턴을 가지는, 그러나 끝내 완성되지 않을 무한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그렇다, 인간의 성장은 신비인 것이다. 그 자체로 신비한 존재인 인간이 ego를 넘어 self의 단계로 진화하는, 처음에는 의식세계가 다인 줄 알았지만 곧 무의식의 세계를 인식하게 되고, 그 인식된 무의식은 해석과정을 거치며 의식세계로 넘어와 의식이 되고, 이는 또다시 하나의 무의식 세계를 넓히는 역할을 하게 되는, 이 신비한 일련의 과정이 우리 인간의 숙명이자 바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소설 ‘데미안’은 그저 싱클레어라는 한 사람이 자신의 유년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의 성장 과정을 시간 순으로 그린 청소년 드라마라든지 회고록이 아니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철학적이고도 심층심리학적인, 그러면서도 굉장히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걸작이다. ‘데미안’을 중학생 때 읽었던 과거의 나는 이를 알아채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가치관의 큰 변화를 겪어내고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선 현재의 나는 달랐다. 이 책의 심층구조가 보였다. 작가의 의도를, 완전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30년 전보다는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세계라는 개념은 물론, 이 책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보이는, 투쟁하며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싱클레어가 데미안이 되어가는 과정과도 같다는 것, 아프라삭스라는 신이나 에바 부인이라는 살아있는 인격체로 표현되는 것이 삶의 전체성이라는 사실까지도 이해가 되었다.
 
‘데미안’을 깊게 이해하지 못했던 30년 전에도 이 문구만은 강렬하게 기억이 남아있다. 아마 내가 읽었던 책의 표지에도 투박한 새 그림과 함께 적혀 있었던 것 같다. 너무나도 유명한 문구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참고: 아프락사스는 신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한,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는 총체적 존재다.*
 
김나지움에 입학하고 싱클레어는 크로머 사건 이후 잠시 동안이지만 두 번째로 어두운 세계로의 방황을 하게 된다. 그러나 카인의 표를 지니고 있었던 탓인지, 근간이 흔들리지 않은 채 연극 아닌 연극으로써 방황을 곧 종료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아트리체를 만나고, 이를 계기로 탄성처럼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기 때문이다. 같지만 다른, 좀 더 통합되고 성숙해진 자리로 돌아오는 길은 아주 힘겨운 투쟁으로 그려져 있다. 그 투쟁의 상징적인 길잡이는 꿈과 기억이고, 목적지는 데미안이었다. 그리고 길잡이가 자극이었다면, 그에 대한 싱클레어의 반응은 그리기였다. 한때 데미안이 스케치를 해갔던, 자기 집 문장에 새겨진 새를 그려나갔다. 이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 새는 싱클레어가 자신의 그림을 데미안에게 우편으로 부치고 난 이후, 데미안으로부터의 답장이라 여기는 종이쪽지에 적혀 있었던 문구 덕분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그 새는 다름 아닌, 변태와 진화를 거치며 또 다른 한 세계로부터 빠져나오려 홀로 투쟁하며 성장하고 있는 싱클레어 자신이 투영된 실체였던 것이다.
 
청년이 되어 재회하게 된 데미안과의 만남은 유년 시절의 그것과는 달랐다. 데미안은 늘 그랬듯, 어른인지 아이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신비한 존재로, 하지만 더 완전해진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싱클레어는 예전과는 달리 한층 성장하여 그의 카인의 표가 더욱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재회 이전에 싱클레어는 또 다른 내적 성장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 역시 꿈과 기억을 재료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종합해가며 자신의 개성화를 이루어갔다. 그때 역시 싱클레어는 그림을 그렸는데, 대상은 새가 아니라 사람 얼굴이었다. 베아트리체 같기도 하고, 데미안 같기도 하고, 자신의 모습과 닮은 것 같기도 한, 알 수 없지만 뭔가 종합적이고 성숙한, 마치 아프라삭스의 얼굴과도 같은 그림을 그려나갔다. 데미안과의 재회 후 싱클레어는 그 그림 속 주인공이 실제로 살아있는 인격체로도 존재함을 발견하고 경탄한다. 그 주인공은 바로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이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아프라삭스는 눈에 보이는 에바 부인과 같은 의미로써 총체적인 삶과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고유한 특징을 인지하고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과정. 자신도 몰랐던 진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고독한 과정. 그 힘겨운 투쟁과도 같은 과정. 카인의 표는 아마도 한 사람의 고유하고도 순수한 특징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그리고 데미안은 한 발 앞선, 그러니까 그 과정을 이제 막 시작하거나 시작할 조짐이 보이는 싱클레어와 같은 자에겐 목표이자 길잡이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어린 시절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나타난 시점은 아주 적절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크로머 사건 때문에 처음으로 다른 세계로 넘어가게 되어 방황하고 좌절하고 있던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구원자와도 같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데미안도 어떤 신이나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 그저 그 길을 먼저 앞서간, 카인의 표를 가진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싱클레어는 청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모습 속에 데미안이 있다는 걸 발견하며 깨닫게 된다. 즉 이 작품은 싱클레어와 데미안이라는 특정 두 사람의 시시콜콜한 성장 과정이라기 보단, 우리 인간의 보편적이고 숙명적인 성장 과정인 것이다. 싱클레어나 데미안은 모두 인생이라는 곡선의 순간 기울기 값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싱클레어는 용케도 빗나가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를 다른 세계의 그것들과 잘 분별하면서 결국은 더욱 강한 모습으로, 마치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그래서 데미안이나 에바 부인이나 아프라삭스와도 같은 얼굴을 가지게 되지만, 과연 이 ‘긍정적인 결과’도 일반화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말했듯이, 그 과정은 힘겨운 투쟁이다. 어둡고 무섭고 강력한 자극, 압도적인 분위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본인의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그것과 상관없이 그 과정 중 길을 잃거나 무너져버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부분 역시 이미 헤르만 헤세도 알고 언제나 카인의 표를 가진 사람들은 다수가 아닌 소수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는지도 모르지만, 분명 이 책에서는 그 성장 과정을 ‘어떻게 해야 바르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그저 스스로의 내면적 의지에만 호소할 뿐, 그 이외엔 일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마치 뉴에이지 사상이나 한낱 정신 승리의 장난처럼, "당신도 할 수 있다. 당신 안에는 무한한 힘이 잠재되어 있다. 그것을 끄집어내어 스스로 신이 돼라."라고 말하는 것 같은 인상마저 풍긴다. 그리고 이런 해석과 결론에 다다르게 되면 갑자기 소설 ‘데미안’이 너무 허무해져 버리기까지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게 있다. 과연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개성화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자아를 발견, 성찰, 성장, 성숙시킬 수 있을까? 원래 갖고 태어나는 것도 아닌, 철저하게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해서 인간 내면에 형성되는 가치관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어쩌면 이 작품에서 말하는 개성화 과정에 대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두 세계의 만남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절차를 거쳐 보다 종합적이고 보다 깊고 보다 넓은 가치관으로 진화하는, 두 가치관의 만남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만남의 긍정적인 결과는 반드시 이전 세계의 파괴를 수반한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즉,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는 개성화 과정은 그저 두 세계의 혼합이 아닌 새로운 화합을 약속하는 인생의 여정과도 같으며, 그것은 한 세계의 파괴로 인한 아픔과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는 조건 역시 자연스레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알이 파괴되지 않으면 새는 태어나지 못한다. 새의 탄생은 알의 파괴를 반드시 동반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하는 건 알이 아닌 새다. 알의 파괴를 슬퍼할 게 아니라 새의 탄생을 기뻐해야 한다. 파괴가 창조의 전신이라 했다. 어쩌면 파괴로 인한 아픔과 고통은 파괴되어 사라져야 할 이전 세계에 여전히 몸을 담고 있어 성장과 성숙으로의 진입을 꺼려하는 유아적인 반응을 상징할지도 모른다.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이유는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알은 완전히 파괴되어야 한다. 완전한 죽음은 완전한 삶의 시작인 것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관계를 우리 일상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관계로 확장할 수 있다면, 완전한 죽음 가운데 견디며 살아남는 한 가지 힌트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바로 타자다. 싱클레어에겐 데미안만 있었던 게 아니다. 에바 부인도, 피스토리우스도, 크나우어도, 그리고 크로머마저도 싱클레어의 성장에 모두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성장하고픈 의지를 갖는다 하더라도 혼자선 불가능하다. 물론 타자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의지가 없으면 역시 성장은 불가능하다. 답은 조화에 있다. 타자를 스승으로 여기기, 타자 앞에서 언제나 겸손해지기. 데미안이라는 목적지는 저기 저 높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한 점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누구나 성실하고 겸손하면 닿을 수 있는 곳일 테다. 그래야만 한다. 파괴되는 알 때문에 아픔과 고통에 처할 때에도,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날갯짓을 하며 창공을 날아갈 때에도 우린 기억해야만 한다. 자신의 의지와 타자의 도움. 이 둘 간의 조화를 이루는 성실함과 겸손함. 데미안으로부터 싱클레어로, 싱클레어로부터 크나우어로 이어지는 흐름이 우리 모두의 흐름이면 좋겠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46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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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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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의미

파트릭 모디아노 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에게 현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무슨 효과가 있을까? 기억할 과거가 없는 사람에게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면 과연 그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보편적인 가치를 개별적인 상황에 일괄적으로 적용할 땐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자칫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를 여전히 과거로 사는 사람에게나 적합할 말을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하게 된다면, 그건 자신의 뿌리를 잊으라는 말과 같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 기억을 찾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그건 집착이 아니라 본능이다. 철이 들고 고독을 알게 되고 고개 숙여 저 아래 놓인 인생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될 즈음이면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것들의 기원을 알고 싶어 하는 것처럼.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에게 있어서의 현재는 곧 과거를 되찾는 일이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일이다. 연결되지 않으면 현재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미래 역시 현재의 연장일 뿐일지도 모른다. 과거는 곧 현재가 되고 미래를 살아낼 수 있는 근거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은 과거를 잃지 않은 자들의 한낱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다. 과거 없는 현재는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시작할 근거가 없을 때 우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소설은 서사와 묘사의 균형도 중요하지만 작가의 고유한 필체, 말하자면 그 작가만의 색채가 더 중요하다. 저마다 다른 작가의 색채가 풍성한 작품의 향연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이번에 처음 만난 파트릭 모디아노의 색채는 내게 은근하면서도 묵직한 인상을 남겼다. 낙엽마저도 사라져 버린 황량한 거리 위에 서서 혼자 추운 겨울을 기다리는 심정이랄까. 지독하게 파고드는 고독과 쓸쓸함. 그 아래에 깔린 불안과 두려움. 파트릭 모디아노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를 통해 조용히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는 소설. 작가의 의도된 불친절함과 그것 때문에 뜻 모를 당황스러움을 안고 한 페이지씩 읽어나가다 보면 불완전한 과거의 조각들이 조금씩, 마치 퍼즐이 맞춰지듯 하나의 그림을 그려나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땐 이미 내가 작품을 읽고 있는지 작품이 나를 읽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짧은 문장들과 짧은 장들이 던져주는 삭막한 고요함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의 내면세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는 어느새 페드로가 되고 나 자신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진실이었는지조차 망연해지는 순간도 찾아오고, 이 끝을 알 수 없는 시간이 나의 과거인지 현재인지 분별할 수 없게 된다. 분명한 단서를 손에 쥐어도 그것과 연결된 사람이나 장소는 사라졌거나 바뀌었다. 시간은 모든 걸 퇴색시키는 법이다. 나를 나로 증명해줄 존재는 내가 아닌 나를 기억하고 있을 타자일 수밖에 없는데, 그 유일한 희망의 끈이 허망하게 종적을 감추어 버린다. 과연 나는 나를 기억할 수 있을까. 나를 나로 알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일까. 작품은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자신이 과거에 거주했을지도 모르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 위치한 장소로 가게 될 것을 다짐하곤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저녁 속으로 빨리 지워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기억할 수 없는 과거. 그 잃어버린 시간의 의미가 이처럼 묵직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과거의 무게가 이리 무겁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자연스레 나는 내가 잃어버린 시간들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시간의 조각들. 나 역시 어떤 면에선 부분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 그렇다. 다행히 기억하려고 하면 불완전할지라도 무엇인가가 떠올라 그 시간 그 공간으로 방문할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놀랍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여기, 이 순간도 시시각각 과거로 물들고 있다. 지금도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마구잡이로 떠오른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을 또 한 번 아쉬워한다. 조바심이 난다. 그럴수록 오늘을 더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43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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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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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으로 이르는 ‘완전한’ 행복

정유정 저, ‘완전한 행복’을 읽고

오랜만에 악몽을 꿨다. 그렇잖아도 어젯밤부터 가랑비 젖듯 불안이 시나브로 스며들어 몸과 마음이 무거웠는데, 급기야 잠든 동안 그것이 꿈의 한 장면으로 발현한 것이었다. 새벽에 큰 소리를 지르며 잠을 깼다. 쿵쾅대며 요동치는 내 심장 소리는 밤의 적막을 갈랐다. 꿈이구나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잠든 뒤 아침에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났더니 머리가 지끈댔다. 아뿔싸. 편두통이었다. 잊힐만하면 간간이 찾아오는 불청객.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하루 병가를 내고 약을 먹고 다시 잠을 청했다. 오후 1시. 그나마 머리가 개운하다. 날씨는 캘리포니아 답지 않게 비라도 내릴 것처럼 우중충하다. 회색 하늘, 서늘한 대기. 음산함마저 느껴진다. 텅 빈 집. 이 시간에 집에서 혼자 잠에서 깬 적이 있었던가. 다시 꿈에서 본 그 도둑이 떠오른다. 어젯밤 읽은 책에서 본 ‘도둑년’이라는 단어 때문일까. 그 단어 이면에 놓인 신유나의 섬뜩한 본성이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기 때문일까. 심장이 귀에 달린 듯 다시 요동하기 시작한다. 지유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되강오리의 울음소리도 혹시 이와 같지 않았을까.

정유정의 작품은 음산한 매력이 있다. 독자를 여유 있게 휘어잡는다. 점점 코너에 몰린 채 어지간한 독자는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압도적인 서사, 치밀하게 인간의 악한 본성을 하나씩 하나씩, 마치 뼈를 발라내듯 끄집어내는 탁월한 필체.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에 이은 그 정유정이 이 작품 ‘완전한 행복’으로 돌아왔다. 조금 더 진화한 모습으로. 진화한 건 그녀만이 아니다. ‘작가의 말’에서 정유정이 직접 밝히듯 이 작품엔 지독하게 악한 인간은 존재해도 주인공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 인물 저 인물에 맞춘 초점이 빈번이 이동하면서 현장의 입체감과 객관성을 살려낸다. 한 대의 카메라가 아닌 여러 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같은 현장을 찍는 것처럼. 역사과 기억은 주관적인 해석의 산물이기 마련인데, 아마도 정유정은 이에 대한 저항이자 반격으로 이런 소설적 장치를 고안해낸 게 아닌가 싶다. 덕분에, 비록 허구이지만, 현장감은 갑절이 되어 살아 숨 쉬게 되었다. 지금도 벌렁대는 내 심장은 바로 그 증거다.

미성숙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 그 미성숙함은 나르시시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중엔 자기중심적인 사람, 자기애에 빠진 사람, 이기적인 사람, 등등의 표현을 들을 때 부정적인 감정은 물론 분노까지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렇게 남의 일처럼 여길 수만은 없는 이유는 그런 것들이 우리 자신 안에도 고스란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의 신유나는 어떤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선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녀의 내면은 고요한 살인자의 광기로 충만하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고 타자의 인격을, 아니 타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내면을 가진 사람은 이미 살인을 행한 것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신유나는 이에 한 걸음, 아니 몇 걸음 더 나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계획에 걸리적거리면 제거한다. 그것도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더욱 무서운 건 그녀는 사람을 죽일 때도 떨지 않는다는 점이다. 숨이 가빠지지도 않는다. 내가 그녀의 광기를 고요하다고 표현한 이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등장하는 라스꼴리니꼬프조차 도끼로 살인을 저지르기 전의 인간적인 망설임, 저지른 뒤의 갈등과 후회를 경험했다. 그러나 신유나는 달랐다. 신유나는 ‘종의 기원’에 등장한 악의 화신 한유진과 같은 선천적인 장애가 있는 사이코패스는 아니다. 대신, 그녀는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후천적으로 겪게 된 일반인이다. 정유정은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이보다 더 잘 쓸 수 없어서 그대로 아래에 옮겨본다.

“이 소설은 행복에 대한 이야기다. 완전한 행복에 이르고자 불행의 요소를 제거하려 노력한 어느 나르시시스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흔히 자아도취형 인간을 나르시시스트라 부르지만, 병리적인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의미가 좀 다르다. 통념적인 자기애나 자존감과도 거리가 있다. 덧붙이자면 모든 나르시시스트가 사이코패스는 아니지만 모든 사이코패스들은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스트다. 그들은 사이코패스보다 흔하다는 점에서 두렵고,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지만 정작 자아는 텅 비어 있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며, 매우 매혹적이라는 점에서 위험한 존재다. 그들에게 매혹된 이는 가스라이팅에 의해 길들여지고, 조종되고, 황폐화된다. 때로는 삶이 통째로 흔들린다.”

위의 언급은 모두 작품 속 신유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극단적인 나르시시스트라고도 할 수 있는 자기애성 성격장애 환자. 그녀의 외모는 매혹적일 만큼 훌륭하다. 남성을 쥐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 매력은 그녀의 장점이 아니라 그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쓰인다. 자기를 공주 혹은 여왕의 자리에 앉혀놓고 자기와 관계된 모든 사람은 자기를 떠받들어야 하는 상황으로 몰아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즉 가스라이팅으로 타자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여 그 사람의 개성과 인격과 자존감을 무참히 짓밟게 하는 수단이 된다. 신유나와 잠자리를 같이 했던 세 명의 남자 (전 남자친구, 전 남편, 남편)는 모두 이 수단의 희생자가 되었다. 비록 현재 남편은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그의 삶은 무너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다. 신유나는 자신의 아버지와 재혼한 남편의 아들마저도 망설임 없이 죽인다. 어릴 적부터 그녀가 ‘도둑년’이라고 부른 자신의 친언니마저도 거의 죽여놓는다. 완전한 자신의 소유라고 믿는 자신의 딸, 지유마저도 그녀는 쌍욕을 해가며 죽이려고 했다. 한 마디로 그녀와 가까이 있던 사람은 모두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죽임을 당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상황에 일방적으로 놓여야 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유나가 진심으로 원한 건 행복이었다. 완전한 행복. 그녀는 행복은 뺄셈이라고 말한다.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하나씩 빼나가는 것. 그래야 닿을 수 있는 곳이 행복이라 믿었다. 바로 여기에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기지 않았을까 싶다. 완전함이라는 단어의 정의부터 시작해야 옳겠지만, 아마도 신유나의 완전함이란 그녀가 중심에 있는 우주를 말하는 것이었을 테다. 그녀가 신이 되어 보기에 좋은, 그 완전한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의 선은 그녀가 중심이 된 관점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일 것이다. 반면, 악은 그녀가 중심에서 빠진 그 무엇일 것이다. 선과 악을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게 된 인간. 마치 원죄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신유나는 인간의 본성의 원시적인 상태를 떠올리게 만든다. 죄와 악의 기원까지도 생각하게 만든다. 과연 그럴까. 아닐 것이다. 행복이란 무결점을 지칭하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부족한 것들이 산재해 있어도 그것들을 인정하고 안고 품는 것에 행복이 있지 않을까. 내가 아닌 타자의 동등함을 다양성으로 인정하고 함께 나누는 세상에 행복이 머물지 않을까. 그러므로 행복이란 뺄셈이 결코 될 수 없다. 다양성과 풍성함을 다 쳐내고 마지막에 남을 그 무엇은 행복이 아닌 오로지 나로 가득한 죄가 아닐까. 아무래도 신유나는 틀렸다. 행복은 뺄셈이 아닌 덧셈일 것이다. 나 혼자선 결코 이를 수 없는 영역으로의 타자와 함께 함. 존중과 배려와 사랑이 더하여질 때 비로소 인간은 행복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정유정 역시 인간이 행복엔 타자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나 혼자만 남은 세상은 천국이 아닌 지옥일 테니까.

#은행나무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4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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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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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의미


코맥 매카시 저, ‘로드’를 읽고

종말의 잔상이라고 해야 할까, 종말 이후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여전히 종말이 진행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종말은 무한한 시간으로 확장된다고 말해야 할까.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작품 속 지구는 대재앙을 맞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다. 거의 모든 것은 불에 탔거나 불탄 흔적인 재로 덮였다. 동물이나 식물은, 즉 살아있는 생명체는 거의 다 자취를 감추었으며, 사람마저도 오직 소수만이 남았다. 그들은 모두 방랑자 (‘방랑자’라 쓰고 ‘부랑자’라 읽는다)가 되어 간신히 생명만을 부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 아니, 이 표현은 잘못된 듯하다. 살아남은 자들이 마치 선택받은 것처럼, 혹은 무언가 축복이라도 받은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살아남은 자’라는 표현보다는 ‘뒤늦게 죽어가고 있는 자’ 혹은 ‘미처 죽지 못한 자’라고 표현해야 더 적당해 보인다. 저자가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까지 어쨌거나 살아남은 자들의 미래에 대한 일말의 희망조차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동식물이 멸종한 듯한 지구. 과연 인간은 무엇을 먹으며 연명할 수 있을까. 작품 속 생존자들은 대재앙과 약탈자들이 미처 건드리지 못한 통조림이나 바닥에 더럽게 떨어진 곡식의 낱알 따위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다. 그런데 그건 약과다. 아이를 잡아먹는 어른들도 있다. 힘없는 타자를 가두고 죽여서 잡아먹는 인간들도 있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본능에 충실한 삶. 아니, 짐승보다 못한 추악한 존재자의 삶. 어쩌면 유일한 현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삶. 과연 이를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있을까. 힘없는 생존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써야만 한다. 죽임을 당하여 얼마 없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빼앗기게 되거나 잡혀 먹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 곳에 정착하여 지낼 수도 없다. 버려진 집 안에서 편하게 지낼 수도 없다. 아무리 추워도 함부로 불을 피울 수도 없다. 무기를 가지거나 힘센 자들에게 ‘나 여기 있어’, 하는 표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계속 이동하는 것뿐이다. 목적지는 없다. 대재앙은 모든 곳을 덮쳤다. 서로가 서로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춥고 배고프고 아파도 계속 움직여야 한다. 하루 종일 그들이 하는 것이라곤 먹을 것을 찾아내는 일과 들키지 않고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다. 즉 생존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누군가로부터의 공격에도 늘 경계하고 있어야 한다. 살아남은 누군가는 아군이 아니다. 일단 적군으로 간주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을 가장 두려운 존재로 확정해버린 상황. 마지막에 남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일까. 야만인이 되어버린 인간들. 짐승이 되어버린 인간들. 조금만 버티면 된다는 암시조차 없는 완전한 절망의 세상. 먹고 입고 숨 쉬는 생존이란 행위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살아남았다는 건 다행인 걸까 불행인 걸까. 종말은 자연재해로 닥쳐온 대재앙이 아니라 어쩌면 이러한 인간들의 인간성 상실에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곱씹어보게 된다. 의미 중독자인 인간들의 살아남은 상실감.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41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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