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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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기억과 집착이 만든 섬


모니카 마론 저, ‘슬픈 짐승’을 읽고.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 낮은 곳에서 용기 내어 나선 길. 그 길 위에서 좋은 길잡이를 만난다는 건 반가운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설 즈음, 마치 사춘기를 다시 시작하듯 발걸음을 뗀 독서 여정에서 나에게 신형철은 그런 존재가 되어 주었다. 약 2년에 걸쳐 그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추천한 작품 중 열 권을 읽어 오면서 어느새 내 안에선 조용히 그에 대한 신뢰가 생겨 버렸고, 급기야 나는 책 뒤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추천도서 이외에도 그가 각 꼭지에서 다룬 작품 중 마음에 와 닿았던 것부터 하나씩 기회가 되는 대로 읽어나가고 있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도 그 새로운 여정에서 만난 작품 중 하나다. 아마도 신형철이라는 길잡이를 못 만났다면 평생 내 손에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신형철은 1부 ‘그녀, 슬픔의 식민지’라는 꼭지에서 이 작품을 다루었다.

이 작품은 자기 나이도 잘 기억하지 못할 만큼 처절하게 섬이 되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다.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건 단순히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거나 기억상실에 걸렸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기억도 무한히 반복해서 되새기면 변형이 되는 법. 확실한 것은 점점 사라지고, 무엇이 사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혹은 무엇이 실제 일어났던 일인지 무엇이 일어나길 바랐던 것인지 시간이 갈수록 묘연해지게 되는 것이다. 기억이 집착을 만나면 환영이 되는 이유도 아마 이런 기작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과거에 경험했던 불꽃같던 사랑을 조금씩 기억해낸다. 부정확하고 불연속적인 기억들. 그리고 그 기억들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녀의 독백들. 기억의 파편 하나하나에는 슬픔이 진득하게 배어있고, 그 슬픔은 서서히 그녀를 점령해버리고 말았다. 수십 년 전 이야기 속에 집을 짓고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는 그녀. 집착이라는 소름 돋는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할 만큼 그녀는 오늘도 프란츠와의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그녀의 이야기가 처절한 슬픔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프란츠도 그녀도 각각 가정을 가진 상태에서 만나는 은밀한 관계였기 때문이고, 보다 거시적인 이유는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이 모두 ‘기이한 시대’를 거치며 일어났기 때문이다. 동독과 서독으로 나눠진 독일. 작가 모니카 마론은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성장했고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다시 통일된 독일. 그녀는 한때 서독으로 이주해 있다가 통일이 된 이후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작가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시대가 작가를 통과하면 작품이 되는 법. 그 ‘기이한 시대’를 모두 통과한 모니카 마론은 한 평범한 서독 출신의 남자와 한 평범한 동독 출신의 여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그 기이한 시대가 남긴 흔적과 상처를 평범한 사랑과 집착, 불안과 기다림, 그리고 슬픔이라는 단어로 응축해낸다. 마치 거대한 역사가 결국 스며드는 곳도 바로 우리네 평범한 일상임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작가는 소설 속의 ‘나’를 기이하지만 평범한, 그러나 처절한 슬픔 속에 잠기게 한다. 섬이 되게 한다. 신형철은 이를 ‘식민지’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사람이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 말은 소설 속 ‘나’가 프란츠를 만나고 그녀 안에 꿈틀거리던 사랑을 해방시킨 말이기도 하다. 그녀가 프란츠를 선택한 게 아니었다. 그녀 안에 있던 사랑이 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행동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기이한 시대’가 끝나던 무렵이었다. 분단으로 인한 상처가 사랑을 죄수로 만들었고, 통일이 그 종신형 죄수로 하여금 감옥을 부수고 나오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해방으로 인해 만난 사랑도 결국엔 헤어짐으로 끝나고, 그녀에게 남은 건 오로지 슬픔뿐이었다. 그녀는 책의 마지막에서 프란츠와 함께 누워있곤 했던 침대에 크고 작은 짐승들과 함께 눕는다. 그녀의 슬픔은 환영까지 불러온 것이다.

읽고 나면 어떤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비록 강하진 않지만 오래 남는 작품이다. 저자의 글쓰기에서 나는 저자가 처한 시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그녀가 느꼈던 감정들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나를 통과하면서 과연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고 책을 덮으며 조용히 생각하게 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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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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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프리모 레비 저,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2차 세계대전’ 하면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아우슈비츠’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지는 단어는 반지성적인 우생학에 기반하여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신봉했던 ‘히틀러’나 ‘나치’가 아닌, 그들에 의해 실행된 유대인 대학살, 이른바 ‘홀로 코스트’이다. 악의 발현, 아니 악 그 자체라고 표현해도 여전히 충분하지 못한 것 같은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아닌, 그들에 의해 아무런 이유 없이 희생당한 유대인들이 왜 나에겐 먼저 떠오르는 것일까. 유럽 각지에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은 하루아침에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짐승보다 못한 고깃덩어리로 전락했고, 엄청난 수가 도살되듯 강제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나에게 아우슈비츠는 세상에서 가장 깊고 어두운 피의 심연이다. 또한, 그곳은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가장 명징하게 보여준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그 아유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저자는 이를 ‘운이 좋아서’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이 책의 첫 문장 첫 단어로 등장한다) 소수의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책의 저자 ‘프리모 레비’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의 귀중한 수기인 셈이다. 허구는 하나도 없다. 모두가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다. 역사책으로 배우는 아유슈비츠 수용소의 역사적 존재와 기능을 거뜬히 넘어서 우린 죽음의 집, 비인간화의 집, 즉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부의 실상을 이 책을 통해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저자의 절제된 필체는 애써 참았던 울분과 끝이 보이지 않는 허망함과 먹먹함에 끝내 불을 지르고야 만다.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을 때에도 느끼지 못했던 깊은 절망이 덤덤하게 기술되어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될 때 느껴지는 초탈함일까. 아니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문자화 되면서 감정이 소진되어 버린 것일까. 아우슈비츠가 어떤 곳인지 이미 알고 있는 독자에겐 그 끔찍한 실상을 무신경한 것처럼 써 내려간 부분이 오히려 날카로운 비수보다 더 아프게 다가온다. 도스토옙스키 역시 자신이 경험했던 실제 감옥 생활을 기반으로 하여 ‘죽음의 집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지만, 그 시베리아 옴스끄 지방의 감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곳이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이다. 비록 도스토옙스키는 억울한 이유로 감옥 생활을 해야만 했으나, 감옥은 어디까지나 감옥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감옥은 범죄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새 터전이다. 그러나 수용소는 범죄자이든 아니든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 철저히 그 수용소를 짓고 사람들을 가두고 인간 이하의 존재로 다루는 인간 말종들의 적이라면 누구나 (특히 유대인들) 강제로 수용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혐오와 차별과 배제가 권력이라는 갑옷을 입고 그 힘을 마음껏 휘두르는 장소가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산둥 수용소’의 저자이자 저 유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제자였던 랭던 길키도 2차 세계대전 중 중국에서 거주할 때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수용소로 보내졌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산둥 수용소’ 작품 역시 그의 수용소 생활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수기인 셈이다. 그 작품에서도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살펴볼 수 있다. 책의 부제가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라는 것은 이를 잘 드러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모 레비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기인 이 책 ‘이것이 인간인가’와 비교하면 그 타격이 약화되는 감이 없지 않다. 철학과 신학에 기반한 엘리트 학자의 눈에 비친 수용소 사람들에 대한 분석이 위주가 되었다는 건 저자 랭던 길키에게 충분히 사유할 수 있는 정신이 남아있었다는 반증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리모 레비의 경험은 보다 직설적이고 일상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쩌면 그에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비록 책의 제목이 ‘이것이 인간인가’이지만, 이성과 논리보다는 훨씬 더 깊고 인간의 중심에 가까운 그 무언가를 건드리며 독자 눈과 마음을 집중하게 만든다. 

인간이 어떤 좁은 장소에 밀집되고 격리되었을 때, 그래서 장기간 외부와 차단되었을 때, 너무나 당연하던 의식주 문제가 죽고 사는 문제가 되었을 때, 과연 인간이 어떤 존재로 바뀔 수 있는지는 실화를 기반한 위의 세 작품 말고도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록 100% 허구이지만 인간의 본성을 깊게 파고들어 그 민낯을 생생하게 까발린 역할은 위의 세 작품과 비슷한 정도로 톡톡히 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구는 허구일 뿐이다. 

그렇다. 프리모 레비의 이 책 ‘이것이 인간인가’는 실화이며, 운 좋게 죽다 살아남은 자의 생생한 수기이며, 무엇보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간의 잔인함이 극대화된 장소로부터의 회고록이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비록 살아남아 이 책을 쓰고 40년에 걸쳐 증언을 해왔지만, 그의 불안과 절망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깊어졌던 것 같다. 1919년생인 그가 68세가 되던 1987년 4월 11일, 프리모 레비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이 위에 언급한,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그 어떤 책들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까닭은. 살아남은 자의 자살. 한참 생각에 잠겼던 나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다. 그가 말하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이 비단 히틀러와 나치 세력들만을 향하지 않게 된다. 그가 자살을 선택했던 이유. 비인간화의 극치에서 인간다움을 지켜냈던 생존자가 최후로 선택한 행동이 스스로 소중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니! 그리고 나는 히틀러와 나치를 넘어 프리모 레비까지 포함하여, 오늘 접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더 큰 범주에서 묻게 된다. ‘이것이 인간인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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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세계문학의 천재들 1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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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인 일탈: 지금 나는 어디에.

파스칼 메르시어 저,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필연은 없다고, 모든 게 우연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언젠간 운명 같은 만남을 갖기 마련이다. 지난주 목요일,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온 이 책은 그렇게 운명처럼 내게 다가왔다. 오프라인 서점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스릴 넘치는 현장감은 사전에 아무런 계획 없이 손에 붙잡히는 대로 책을 고르고 훑어보다가 마음에 꽂히는 문장이나 작가의 문체 등에 이끌려 즉흥적으로 구매할 때 최고조에 달한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작가, 평소에 즐겨 읽지 않는 현대문학. 이 두 가지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지난 일주일 남짓 나와 매일 동행하며 나를 매혹시켰다. 나는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온 사건을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 믿기로 한다. 책을 다 읽고도 여전히 책을 도로 책장에 꽂아놓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여전히 무언가를 알고 싶은 것처럼, 이제 막 다시 읽기 시작할 것처럼 망설이는 모습이다. 나는 이 책을 손에서 놓기가 못내 아쉽다. 책 표지 그림을 가만히 쳐다본다. 내가 기차역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인생이라는 기찻길의 한 정류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만 같다. 어딘가로 떠나려는 것인지, 어딘가로부터 도착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나는 그저 떠나가는지 다가오는지 모를 기차를 바라보며 서 있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리스본. 이 책을 읽고 이곳에 대한 이상한 동경이 생겨 버렸다. 세계지도를 꺼내 리스본의 위치를 찾아본다. 대륙의 끝,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의 서쪽,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해안에 위치해 있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캘리포니아는 서쪽으로 태평양을 끼고 있지만, 리스본은 서쪽으로 대서양을 끼고 있다. 언젠가 보스턴에서 바라봤던 동쪽 대서양의 이국적인 모습이 떠오른다. 그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은 어떤 느낌일까. 한국에서 바라본 태평양과 캘리포니아에서 바라보는 태평양의 차이만큼일까. 땅끝의 나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사막의 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대서양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문득 나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스위스 베른에서 포르투갈 리스본, 편도 1,250마일을 가려면 비행기나 기차를 타야 한다. 작품 속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5주 간의 포르투갈 여행의 시작과 끝을 기차로 장식했다. 의미심장한 일탈의 시작과 끝이 되어 주었던,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이 된 리스본행 야간열차. 그의 인생에서 가장 깊고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안내한 마법의 기차.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장거리 기차 여행의 낭만을 떠올려본다. 즉흥적인 이끌림에 몸을 맡긴 채 홀로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하고 상상해본다. 그 외국어들은 과연 노랫소리로 들릴까.

비 내리던 어느 날, 수십 년 간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릴 정도로 익숙했던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그레고리우스는 낯선 한 여자를 운명처럼 만난다. 그는 고전문헌학 교수다. 여느 때처럼 수업을 하기 위해 학교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다리 중간에서 난간 위로 팔을 뻗치며 미끄러지던 순간 그레고리우스는 그녀가 뛰어내릴 거라는 본능적인 생각을 했다. 놀란 심정으로 그는 들고 있던 우산을 순간적으로 내던졌고 덕분에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책은 이미 빗물에 젖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왔다. 주머니에서 사인펜을 꺼내어 그레고리우스 이마에 숫자를 몇 개 적었다. 전화번호를 잊어버리지 않아야 하는데 마침 종이가 없기 때문이랬다. 그녀는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걸어서 그가 강의하는 교실까지 들어와 잠시 앉아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 조용히 빠져나가 떠나 버렸다. 그레고리우스는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 그녀에게 모국어가 무엇인지 물었었다. “포르투게스.” 그녀의 답변이었다. 그레고리우스에게는 지상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멜로디였다. 하루 종일이라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마에 전화번호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버린 그녀는 그레고리우스의 인생에 깊은 창을 찔러 넣은 셈이었다. 아니, 그녀가 아니라 포르투갈어의 그 묘하고도 신비한 노랫소리 같은 발음이 그의 인생에 새로운 길을 낸 것이었다. 수업을 마치지도 않고 그는 책과 가방을 그대로 교탁 위에 두고 유유히 학교를 빠져나왔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용기가 생겼다. 그레고리우스는  57년 간 안정적이었던 학자로서의 삶을 이제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불안과 해방감이 묘하게 섞인 기분을 느꼈다. 모든 게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인생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세상도 모두 새로운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찾은 에스파냐 책방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운명의 책을 만난다. 포르투갈어로 쓰인 책이었다. 제목은 ‘언어의 연금술사’. 마침 책방 주인은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알았다. 주인이 그를 위해 몇 문장을 읽어주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순간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글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모든 것이 달라진 그날 오전을 위해 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확신에 차서 책을 구입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책의 안 표지에 나온 저자의 사진을 보며, 이 포르투갈 사람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었고 움직이는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포르투갈에 꼭 가야 할 것 같은 운명을 느꼈다. 책방에 가서 포르투갈 어학 교재를 사고 공부를 했다. 책 일부분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은 빠르게 진동했다. 교장 선생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메일을 써서 우체통에 넣었다. 현금을 찾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고 모든 게 운명에 이끌리는 것 같았다. 일탈의 시작이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그레고리우스가 운명처럼 갖게 된 책의 저자 아마데우의 일생을 톺아보며 그 흔적을 좇는 여정이다. 아마데우는 이미 뇌출혈로 죽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아마데우의 글은 그레고리우스가 가진 책 이외에도 이곳저곳에 많이 산재해있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의 일생을 좇는 여정은 그의 글을 좇는 여정이라 할 수 있고, 그 여정 가운데 등장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등장하는 장소를 직접 찾아가 보며 텍스트 이면에 있는 콘텍스트까지 읽어나가면서 글을 깊고 풍성하게 이해해나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아마데우의 가족과 친구, 연인 등의, 이제는 모두 죽었거나 노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차례대로 만나가면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을 포르투갈이라는 낯선 땅으로 이끌었던 그 운명 같은 만남의 주인공 아마데우의 삶을 추적해 나간다.

아마데우는 언어의 연금술사였다. 아니, 언어 그 자체였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글쓰기로 자신의 사상과 감정, 속마음 등을 모두 털어놓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탁월한 지력을 가졌던 아마데우도 어쩔 수 없이 시대의 한계에 속한 유한한 인간이었다. 문학자가 아닌 아버지의 뜻에 맞추기 위해 의사가 된 아마데우는 어느 날 독재 정부의 하수인 격인 멩지스를 죽을 고비에서 살려준다. 독재에 대항하는 포르투갈 국민으로서가 아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던 한 의사로서의 숭고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아마데우의 인생을 크게 한 번 뒤트는 사건으로 자리매김한다. 사람들의 비난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멩지스로 인해 고통받는 포르투갈 국민들의 설움과 고통을 외면하고, 오히려 독재 정권을 옹호한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아마데우는 속죄라도 하듯 독재 정부에 저항하는 운동에 발을 담그게 되고, 인생의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한다. 그러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또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이 발생하며 아마데우의 삶은 점점 그를 내면으로 침잠케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침잠이 그의 글로 번역되어 나오게 된 것이었다. 아무나 쓸 수 없는 글, 아마데우가 아니면 도저히 쓸 수 없는 글을 그는 그의 뜻밖의 인생의 심연에서 퍼올리게 된 것이었다. 결국 그는 의사가 아닌 문학가의 삶을 뜻하지 않게 살아낸 사람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왜 아마데우라는 사람에게 그토록 집착하게 되었을까? 이방인에 불과한 아마데우라는 한 사람의 과거 흔적을 샅샅이 좇으며 그레고리우스는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단순한 운명의 이끌림으로만 설명이 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바람처럼 왔다 가는 전율의 순간은 지속력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그런 자리로 내몰았을까? 모든 시간과 모든 돈과 모든 건강을 다 소진하면서까지 낯선 이의 삶의 흔적을 좇을 필요가 있었을까? 그레고리우스와 아마데우의 공통점이 언어와 글쓰기에 기반한다는 점이 실마리가 될 수는 있을진 몰라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무언가가 남는다.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의 흔적을 좇아가는 과정에 일개 과학자에 불과한 나조차도 몰입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의문은 더욱 진하게 남는다. 그저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와 운명을 목격하고 그것에 저항하거나 순응하는 여정에서 나의 공감을 샀나 보다, 하며 나는 석연치 않은 결론을 내릴 뿐이다. 어쩌면 그것을 알기 위해 나는 여전히 이 책을 책장에 꽂아 놓지 못한 채 이렇게 답례라고 하듯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기차역에 서 있는 것 같다. 답을 모른 채로 덩그러니 그렇게.

#들녘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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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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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해도, 보지 못해도

한강 저, ‘희랍어 시간’을 읽고

불연속성, 불친절함,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의식 저 아래에서 퍼 올린 조각난 단상들,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드는 상처의 깊은 흔적과 그 기억의 파편들, 그것들을 활자로 대면하면서 생경하게 느껴지는 강한 이질감,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거부할 수 없는 불편함.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이다. 때론 숨이 막혀서, 때론 내 심장이 귓가에서 하도 쿵쾅대서 잠시라도 책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녀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어둡고 무겁다. 공간으로 말하자면 인적이 드문 시골, 시간으로 말하자면, 곧 해가 뜰 새벽 다섯 시 정도가 아니라 가장 어둡고 가장 적막한 새벽 두세 시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간 동이 트겠지만 당분간은 도저히 아무런 희망의 씨앗도 발견할 수 없는 시간. 밤이지만 최은영이 표현한 ‘밝은 밤’이 아닌 칠흑같이 어두운 밤.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면 나는 감싸 지지 않을 슬픔과 치유되지 않을 상처로 어두운 절망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또한, 그녀의 작품들은 툭툭 끊어지는 불친절한 묘사들이 저마다 깊은 우물을 머금고서 활자화되어 있다. 정유정의 휘몰아치는 압도적인 서사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서사보다는 묘사에 중점을 두고, 말보다는 의식의 흐름에 목소리를 부여하여 말하게 하는 정적인 작품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들이 머금고 있는 그 어둡고 무거운 것들을 우리가 쉽게 내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런 것들은 한낱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고 말 법한 장치나 기법 정도의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나를 포함한 모든 독자들의 내면에,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내면 깊은 곳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인간 본성과 심리를 정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여주는 효과를 내며, 마치 분절된 꿈의 조각처럼, 그래서 날 것 그대로의 섬뜩한 느낌을 자아내는 데 탁월하다. 모든 사람들 안에 내재되어 있지만 한결같이 꺼내 보려 하지 않는 그 무엇. 어쩌면 한강 작가의 작품이 그 유명세와는 달리 읽기 어려운 건 '나'이지만 내가 아니고 싶은 혹은 '나'이면 안 되는 모습들, 그 부서지고 의도적으로 잊힌 모습들이 문득 우리들에게 말을 건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희랍어 시간’을 읽는 동안 차라리 급박한 이야기의 전개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말을 잃은 한 여자와 서서히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기척이 만나는 이야기. 깊은 상처가 낸 치유되지 않은 두 과거와 그것들을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는 두 현재가 희랍어 강좌를 매개로 우연히, 그러나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야기. 생명과도 같은 안경을 떨어뜨린 밤, 말을 잃은 여자의 도움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따라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남자. 말을 잃었기에 몸을 움직여 기척을 내야 했고 남자의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의사소통을 해야 했던 여자. 그날 밤 이 두 사람 사이엔 어떤 전류가 흐르고 있었을까. 남자의 작은 방 안에 흐르는 공기 속엔 서로에 대한 공감과 치유의 냄새가 섞여있지 않았을까.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시간은 어느덧 새벽 다섯 시가 되어 곧 동이 터오를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한강 작가는 둘 사이의 결말에 대해선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작품을 끝내버리지만, 나는 자연스레 바라게 된다. 서로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아가 서로의 상처로 말미암아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치유가 되어줄 수 있기를. 여자는 말을 되찾고, 남자는 유전적인 시력 상실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빛을 볼 수 있게 되길.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설사 여자가 다시 말을 찾지 못해도, 남자가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되어도 서로의 존재로 말미암아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 현재의 삶에서 작은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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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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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이 아닌 밝은 밤

최은영 저, ‘밝은 밤’을 읽고

서양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이자, 대한민국 국민이며, 한국어로 소설 쓰길 갈망하고 또 실제로 준비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한국 현대 소설의 지형과 흐름을 대략적이라도 파악하는 일은 꼭 거쳐야 할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 작업을 2년째 틈나는 대로 해오고 있다. 그래 봤자 지금처럼 여러 가지가 제한된 환경에서는 대표적인 작가들의 작품 몇 개씩 읽어나가는 일에 불과하지만, 그런 책을 한 권 한 권 읽어낼 때마다 저마다 다른 개성과 주제의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항상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남는데, 그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고전을 좋아하고 그 깊은 맛을 사랑하는 내 취향 때문이리라, 하고 추측할 뿐이다. 

단편보다는 장편을 선호하는 나의 또 다른 취향 역시 그 시작이 무엇인지 언제부터인지 묘연하다. 아마도 번뜩이는 기발함과 빠른 속도보다는 뻔함 속에서 느리게 심오함을 이끌어내고,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나 알아채지 못하는 진리를 상기시키며,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특정한 서사를 통해 드러내어 넌지시 깊은 곳을 짚어내는 건 오로지 장편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최은영의 최신작 ‘밝은 밤’을 고른 이유 역시 이런 나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한다.

고전의 반열에 올릴 정도의 무게는 아쉽게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처음 만난 최은영 작가의 스토리텔링과 필체는 다시 읽고 싶어질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일상에 녹아든 잔잔한 감성을 유지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편안한 톤으로 3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작년에 이 작품이 큰 상을 받았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역사적 배경으로 묵직한 주제까지도 건드리고 있었고, 시대를 뛰어넘어 21세기 현재 우리들의 공감까지 이끌어낸다. 이를테면, 한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제강점기에서 6.25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기간을 다루는 동시에, 무려 4대 (증조할머니까지)를 넘나드는 두 가족 여성들의 상실과 아픔을 과하지도 않고 얄팍하지도 않게 세련된 필체로 조곤조곤 이야기해준다. 중간중간 멋진 문장들이 알알이 박혀있음도 이 작품을 챙겨봐야 할 이유 중 하나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는 소수자의 무력함, 함부로 표출할 수 없이 속으로 묵혀야만 했던 그들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참고 견디며 살아낸 눈물 젖은 수많은 나날들이 여성의 시선에 무게중심을 두고 이야기가 펼쳐진다. 남성 독자임에도 나는 그 시선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으며, 시대적 한과 고질적인 인식론적 제도적 폭력의 힘을 재고해볼 수 있었다.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화자 지연 역시 여성이자 이혼녀이자 우울증 환자로서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일종의 미안함도 느꼈다. 그리고 전체 내용이 정적이고 우울한 편에 속하지만 그 분위기에 억눌리지 않고 삶을 개척해나가고 극복해나가는 등장인물들을 가슴 깊이 응원했다. 슬프지만 감싸지는 슬픔, 상처이지만 치유되는 상처, 밤이지만 어두운 밤이 아닌 밝은 밤. 제목의 의미를 알 듯하다. 상실을 바라보는 최은영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진다.

남성보다는 여성 독자들에게, 그리고 한국 역사를 잘 아는 한국인들에게 훨씬 더 큰 공감을 자아낼 작품이지만, 나는 남성 독자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독을 권한다. 최은영 작가의 다음 작품이 장편이라면 꼭 챙겨볼 작정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08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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