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가의 열두 달
카렐 차페크 지음, 요제프 차페크 그림, 배경린 옮김, 조혜령 감수 / 펜연필독약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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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과 정원, 일상과 그리움




카렐 차페크 저, ‘정원가의 열두 달’을 읽고




저는 과학자입니다,라고 소개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과학자냐고 되묻는다. 그래서 생물학자입니다,라고 대답하면, 소수의 사람들만이 무슨 연구를 하냐고 물어온다. 정확한 질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물학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는 듯 엉뚱한 질문을 해오곤 한다. 경험상 그들은 크게 네 부류로 나뉜다. 첫째, 내가 의사와 비슷한 일을 하는 줄 알고 질병이나 암 치료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 (전 사람이 아니라 생쥐로 실험한답니다! 수술하다가 실수해도 고소당하는 일은 없어용). 둘째, 내가 수의사와 비슷한 일을 하는 줄 알고 자신이 기르는 애완동물의 건강관리에 대해 묻는 사람들 (개 품종과 이름에 대해서 내가 당연히 다 안다는 전제 하에 질문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저는 그쪽에 대해선 하나도 몰라용). 셋째, 내가 곤충채집가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고는 이 곤충 저 곤충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 (그래도 해충에 대해서 묻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마지막으로, 내가 정원가와 비슷한 일을 하는 줄 알고 여러 식물에 대해 묻는 사람들 (어려운 학명에 대해 묻는 사람도 있었다! 저는 식물학자도 분류학자도 식물채집가도 아니랍니다!). 분명하게 하기 위해 나는 그들에게 다시 대답한다. “저는 동물모델로 생쥐를 이용하고 유전자 조작 기법을 동원해서 기초 생물학을 연구하는 실험 생물학자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아, 그러시군요, 라며 말꼬리를 흐리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과의 대화는 여전히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밝혀지지 않은 채로 끝나곤 했다.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생물학자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였다. 지인들과 함께 길거리를 지나가다 여러 나무와 꽃들이 즐비할 상황이 주어지면 꼭 나에게 그것들의 이름을 묻는 이가 한 명 정도 있다. 그들은 마치 내가 당연히 모든 식물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이런 상황을 접할 때마다 나는 조금 피곤해지기도 하는데, 이번에 그들에게 권할 좋은 추천 자료를 알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다. 바로 이 작품이다. 그런 질문들은 생물학자가 아니라 정원가에게 해야 정확한 답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식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던 이유는 오로지 저자 때문이었다. 몇 달 전,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이라는 소설을 읽으며 인상이 깊었고 그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보관함에 넣어두었는데, 한 달 전 즈음 중고책으로 구입이 가능했던 것이다. 특별한 사건을 겪어내는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보다 나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차렐 차페크는 바로 그런 삶을 노래하는 작가다. 




나는 텃밭 철학자를 한 명 알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의 6년 동안 항상 곁에 있었던, 이제는 가족 같은 분이다. 캘리포니아를 떠나며 가장 아쉬웠던 부분 중 하나도 그분과의 이별이었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며 그분을 떠올린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토양의 중요성이 강조된 부분을 읽을 때, 그리고 가끔 아침 점심 저녁 남아도는 채소만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정원가의 일상을 읽을 때도 나는 그분으로부터 수차례 들었던 비슷한 맥락의 얘기가 떠올라 문득 그리운 마음이 일었다. 그 텃밭에서 난 온갖 신선한 채소들과 함께 고기를 구워 먹던 그때가 그립다. 생각보다 수확량이 많아 가족들이 다 못 먹으니 나눠먹자며 직접 상자와 비닐봉지에 넣어 그 채소들을 갖다 주시던 그분이 그립다. 텃밭을 일구며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시고 그것을 승화시켜 이웃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주신 그분이 그립다.




제목이 말해주듯 이 작품에서는 정원가의 열두 달이 1월부터 12월 순으로 소개된다. 저자인 카렐 차페크는 정원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빠져들어가게 할 만큼 필력이 뛰어난 작가임이 틀림없다. 유머가 깃든 문장은 익살스러운 삽화와 함께  책을 읽는 내내 입가에 웃음을 짓게 만든다. 또한 이 작품은 정원 에세이라기보다는 인문 에세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분류가 아닐까 싶다. 단순한 정원가의 삶만이 아닌 그 가운데 스며든 인문학적 혹은 철학적 관점이 작품의 곳곳에 빛나는 문장으로 박혀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는다면 나처럼 평범한 정원가의 일상을 읽으며 소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정원가의 일상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보편적인 속성을 많이 띠는 것 같다. 20세기 초 체코의 정원가와 한 세기 뒤인 현재 캘리포니아의 텃밭 철학자가 상당히 많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나는 캘리포니아 텃밭 철학자에게 이 체코의 정원가이자 소설가의 백 년 전 작품을 선물하고 싶다. 몇 달 전이었다면 당장 차를 몰고 가 읽어보라고 이 책을 덥석 주고 왔을 텐데… 아쉽다. 지나온 모든 순간들이 아쉽고 그리운 오늘이다.


#펜열필독약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83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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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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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시간과 공간을 만남으로 채우는

마쓰시에 마사시 저,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을 읽고

혼자 사는 삶이 우아하다고 말하는 사람 중 십중팔구는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니지 않을까. 아무리 많이 가져도 언제나 갖지 못한 것을 욕망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혼자일 때의 자유를 잘 알고 그것을 동경하는 마음을 여전히 가슴 한 편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과 함께 하는 행복한 삶 가운데서도 혼자 있는 시간을 반드시 찾아내고 또 사수하려고 애쓴다. 물론 혼자 사는 삶과 혼자 있는 시간은 엄연히 질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혼자 사는 삶은 내게 있어 더 이상 고려 대상이 아니기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 나는 이 시간이 좋고, 이 시간이 주는 유익을 사랑한다. 읽고 쓰는 일도 모두 이 시간에 이뤄진다. 그러나 이런 내 삶이 우아한지 어떤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 작품 제목처럼 말이다.

주인공 오카다 다다시는 사십 대 남성이다. 최근에 이혼했고 대학생 아들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며 산다. 요컨대 오카다는 돌싱이다. 이 작품은 갑자기 비어버린 시간, 턱 하니 주어진, 그래서 감당하기 벅찬 자유 앞에서 주인공이 어떤 삶을 개척해 나가는지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겠다.

시간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은 항상 함께 고려해야 한다. 각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둘로 나누었을 뿐, 어쩌면 둘은 원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기억 속에 있는 어떤 특정한 시간을 떠올려보라. 머릿속에 그려지는 게 시간인가, 공간인가. 공간일 것이다. 공간이지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자신만의 특정한 시간에 구속된 공간일 것이다. 

이 자명한 이치는 이 작품 속에서도 그대로 투영된다.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카다가 혼자 살 집을 구하게 되는 과정, 그 집을 리모델링하는 과정, 그리고 다시 그 집을 나가야 하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집 짓는 계획을 세우는 과정 순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주인공 오카다의 돌싱 1년차 삶을 이 작품은 공간의 변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 공간의 이동 가운데 ‘가나’라는 옛 애인과의 재회가 주어지고, 그녀와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하는 과정이 독자의 시선을 가로채지만, 그 과정 또한 공간 이동의 플롯을 충실히 따른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오카다가 얻은 집에서 자전거로 십 분 거리에 우연찮게 가나가 살고 있었고, 작품의 마지막에서 오카다가 새로 지을 집 위치도 가나의 집 바로 옆에 위치한다. 새로운 시간의 흐름이 새로운 공간의 이동으로, 그리고 그 시공간은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가 볼 땐 우아하게 보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의 눈에는 그렇지 않게 보일 수 있는 삶.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가. 시간과 공간의 흐름 속에 만남을 채워넣는 우리네 삶은 본래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삶이지 않겠는가.

저자인 마쓰이에 마사시의 작품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고 단번에 매혹되었던 나는 그의 모든 작품이 읽고 싶어졌고 곧장 실행으로 옮겼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내가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의 마쓰이에 마사시를 기대했던 건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그러나 보기 좋게 나는 같지만 다른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상대적인 분량이 짧아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작품에서 만난 마쓰이에 마사시는 조금 더 간결했고, 조금 더 절제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 조금 더 유머스러웠다. 굳이 두 작품 사이의 공통점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여전히 식상한 주제, 혹은 뻔한 일상 이야기로 독자를 사로잡아 마지막 책장까지 끌고 가는 그의 힘이라고 나는 대답할 것이다. 전작 읽기 작가로 마쓰이에 마사시를 정한 건 아무래도 잘한 선택 같다. 꼭 배우고 싶은 글쓰기를 그로부터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비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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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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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과 감사

켄트 하루프 저, ‘밤에 우리 영혼은’을 읽고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지도 이미 오래된 두 남녀의 교감. 너무 늦은 것일까, 아니면 이제라도 용기 내어 남의 눈치 보지 않는 행복을 찾아나선 것일까. 어느날, 배우자를 잃은 지 한참 지난 칠십 대의 애디 무어는 같은 상황에 있는 이웃 루이스 워터스를 찾아가 뜻밖의 제안을 한다. “가끔 나하고 자러 우리 집에 올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요.” 루이스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섹스 이야기인가 싶어 말문이 막혔다. 애디는 그런 루이스를 눈치채고 말한다. “섹스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렇잖아도 궁금했어요.” “아니, 섹스는 아니에요. 그런 생각은 아니고요. 나야 성욕을 잃은 지도 한참일 텐데요. 밤을 견뎌내는 걸,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말하는 거에요.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거요.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그렇죠?” 에디의 제안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루이스도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낸 후 혼자 밤을 지새우는 경험을, 그 외로운 나날들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둘은 금지된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처럼 칠십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결단을 행동에 옮긴다. 루이스는 가끔, 혹은 매일 밤마다 애디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던가. 애디와 루이스의 잦은 동침은 금세 동네 소문거리가 되었다. 내막을 알지 못한 채 표면적으로 드러난 둘 사이의 행동만을 보고 섣불리 내린 판단은 좋을 리가 없었다. 꼴사납다, 남사스럽다, 추태다, 등의 반응을 일으켰다. 급기야 루이스의 딸 홀리도 소문을 듣고 찾아와 아버지를 나무랐고, 애디의 아들 진 역시 가정 문제를 빌미로 도움을 요청하러 왔다가 어머니를 비난하고 면책했다. 유일하게 그들을 정죄하지 않는 존재는 손주 제이미와 애완견 보니였다. 주위의 좋지 않은 평판에도 불구하고 애디와 루이스는 이제는 더 이상 남의 눈치를 보며 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받아주고 만족한다면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고 맘먹었다. 이웃들이 그들을 좋지 않게 보는 이유는 늙은 남녀가 배우자가 죽었다고 해서 바람난 것처럼 밤마다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진실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이웃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보편적인 선입견을 개별적인 상황에 무분별하게 적용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암묵적인 폭력이었던 것이다. 

소설의 결말에선 끝내 둘의 관계는 예전처럼 유지되지는 못하게 되지만, 애디와 루이스에게 그 짧았던 기간은 서로에게 많은 치유와 위로를 안겨준 선물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밤에 이루어진 영혼의 교감은 나이와 시대를 뛰어넘어 인간 본성에 다다르는 그 무엇이지 않을까. 낮과 달리 밤이 가져다주는 고요는 적막과 외로움으로 이어지기 쉽고, 종종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벼랑 끝으로 개인을 몰아가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긴긴밤을 그 사람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 축복일 것이다. 나도 이젠 그런 사람이 매일 밤 곁에 있다는 사실, 또 내가 그 사람에게도 그런 존재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감사한다.

#뮤진트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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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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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또 다른 세상을 맛보게 해 준 작품


마쓰이에 마사시 저,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고


평생 잊히지 않을 작품. 반드시 소장해야 할 책. 곁에 두고 자주 읽으며 필사하고 또 외우고 싶은 책. 그 어디로 이사를 가더라도, 혹은 무인도에 가게 되더라도 가장 먼저 챙길 열 편의 작품 리스트에 당당히 오른 책. 아, 이런 축복이 또 나에게 주어지다니!


기발한 발상도, 놀랄 만한 사건도, 특별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 작품. 그러나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고 내 눈과 마음을 완벽히 사로잡아버린 글의 전개는 작품을 읽는 내내, 그것도 장장 400 페이지에 걸쳐 지속되었다. 나에게 이 작품은 어퍼컷처럼 체중을 실은 큰 한 방은 없지만, 무수히 많고 작은 잽들로 독자를 압도시키고, 나아가 중독까지 시켜버리는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말하자면 문체다. 탄탄한 문장력과 필력은 아름답고 고유한 문체로 인해 더욱 빛이 났다. 책을 덮고 내 마음은 보슬비에 흠뻑 젖은 옷처럼 마쓰이에 마사시의 문장들로 흥건하다. 그의 문체를 몽땅 흡수해버리고 싶은 강한 욕망이 부러움과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함께 지금도 내 안에서 들끓는다. 나는 문학이라는 거대한 숲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이다.


이 작품이 지금으로부터 고작 10년 전인 2012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작가 마쓰이에 마사시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은 나를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고전 문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현대 소설이라니! 내가 지향하는 소설의 방향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하나의 실례를 본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나는 전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마음속으로 그렇게나 바라던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시공간에서 턱 하고 마주치게 되었을 때의 마음이랄까. 그 당황스럽고 황당한 기분, 그러나 한 편으론 놀랍고도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복에 겨운 이 감정을 어떻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뻔한 내용을 뻔하지 않게 풀어낼 줄 아는 것도 능력이지만, 뻔한 내용을 뻔하게 풀어내면서도 독자들이 빨려 들어가며 읽을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은 더욱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 마음을 충분히 읽고 공감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다 표현하지 않고 충분히 절제한 뒤,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방식. 그리고 화자의 독백을 이용하면서도 독자의 개입을 자유로이 허락하여 이야기를 함께 느끼고 즐기고 전개해나가는 방식. 이런 방식이야말로 이런 작품을 가능하게 만드는 주요 팁이지 않을까 싶다. 진심으로 모방하고 싶고 내 것으로 만들어내고 싶은 문장들이 실로 넘쳐나는 작품이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모든 작품을 보관함에 담았다. 연구할 가치가 차고도 넘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이 작품이 가지는 위상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이 책을 읽고 한국 번역본의 제목이 참 잘 지어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니. 내가 작가로서 읽은 감상이 아니라 독자로서 읽은 감상은 정확히 그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마음 한 구석에 여름 별장에서 현대 도서관 건축을 위해 보내던 주인공을 비롯한 무라이 슌스케, 또한 그의 사무소 가족들의 일상이 아련하게 남는다. 그리고 제목처럼 이 아련함은 아무래도 나에게도 오래오래 지속될 듯하다.


#비채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68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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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턴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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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햇살에 비친 일상의 긴 그림자

가즈오 이시구로 저, ‘녹턴’을 읽고
비록 나지막하지만, 다섯 편으로 구성된 이 작은 단편집에서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단 하나다. 다섯 내러티브, 다섯 내레이터, 그리고 한 명의 작가. 이 엄연한 사실을 주지하기라도 하듯, 다섯 편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음색과 같은 톤으로 채색되어 있다. 바로 내가 사랑하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목소리다. 묻히기 쉬운, 마치 읊조리는 듯한 그의 작은 목소리를 알아챈다는 것은 곧 이 작품을 제대로 읽어낸다는 말과 같은 의미라 생각한다. 그렇다. 가즈오 이시구로를 읽는다는 건 평범한 일상에 녹아든, 그러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우수가 깃든,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일 줄 안다는 것이다.
나의 가즈오 이시구로 전집 읽기의 마지막 정거장인 이 작품은 부제에서도 밝히고 있듯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이다. 때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통해, 때론 노래하는 사람, 때론 음악 감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다섯 가지 이야기는 모두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비춘다.
특히 내레이터가 음악가인 경우, 이야기는 무대 위가 아닌 무대 아래의 삶을 조명한다. 여기서 무대 아래의 삶이란 쉬는 시간이라든지 휴일의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대 위에 오를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음악인들, 다시 말해 유명인의 대열에 끼지 못한, 성공하지 못했거나 이미 그 시기를 놓쳐버린 음악인들의 일상을 통칭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이름을 알린 음악인보다는 그렇지 않은 음악인들이 현실에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이 작품은 대부분의 음악인의 현실적인 일상을 조명한다고 볼 수 있다. 무명 음악인의 평범한 일상의 단면을 정오의 강한 햇빛이 아닌, 비스듬히 비치는 늦은 오후의 햇살로 조명한다고나 할까. 그로 인해 생기는 긴 그림자는 작품을 읽고 난 이후에 남는 여운이 된다.
각 단편은 이렇다 할 위기나 사건의 부재 위에서 잔잔하게 진행된다. 비루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훌륭하다거나 특별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삶.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하고는 있어 특별한 어려움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정적이라거나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삶. 충만함이나 성취감보다는 결핍과 공허가 일상을 가득 메우는 삶. 차라리 형편없는 실력의 음악인이었더라면 그들의 빈자리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으리라. 차라리 그들에게 여전히 젊음이 허락되었더라면 그들의 여백엔 적어도 우수가 깃들진 않았으리라.
절반도 남지 않은 인생을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 음악인들. 한때 꿈이었던 삶을 뒤로하고, 여전히 미련을 가슴 한 편에 간직한 채 그 삶 근처에서 맴돌며 살아가고 있는 음악인들. 왜 나는 그들의 삶에서 내 인생을 읽어내고 아파하며 가슴 깊이 공감하게 되는 걸까. 왜 나는 어느덧 마흔 중반에 접어든 내 나이를 곱씹으며 텅 빈 공간을 응시하게 되는 걸까.
밋밋하지만 그게 바로 내 삶의 현주소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나는 조금은 우수에 차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묵묵히 일상을 살아내는 그들을 향해 마음 담아 응원하게 된다. 무대 아래야말로 일상을 이루는 베이스캠프이며, 내가 나와 동지와 세상과 연대하는 곳 또한 다름 아닌 바로 이곳, 나의 허름한 일상임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견딤의 미학 가운데 성실히 오늘을 살아내는 모든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동지들아, 화이팅.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57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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