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눈먼 자들을 통해 본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주제 사라마구 저,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고.


‘산둥 수용소’에서 랭던 길키는 인간의 도덕성과 합리성을 충분히 넘어서며 그것들보다 더 깊이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이기심’을 보고한다. 그리고 그 ‘이기심’은 책에서 인간의 ‘죄’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그 책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비도덕적이고 비합리적인 방식도 취할 수 있으며 나중엔 그 행동까지도 합리화해버리는 존재였다. 인간의 관대함과 인격적 성숙이 한낱 껍데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그 껍데기 안에는 이기적이고도 위선적인 자아가 숨어있어 언제든 상황이 허락할 때면 즉시라도 고개를 쳐들고 큰 소리를 내어 단번에 인간의 몸과 마음을 장악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으면서 난 랭던 길키의 ‘산둥 수용소’가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두 책은 큰 차이가 있다. 하나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동일하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지만, 적어도 산둥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의 눈은 멀쩡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산둥 수용소에선 비록 강압적이었지만 외부세력이었던 일본군에 의한 질서가 적어도 존재하긴 했다는 것이다. 이 책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주무대로 나오는 수용소는 산둥 수용소에서 이 두 가지 차이를 제거하면 이해하기가 수월해진다. 외부의 개입이 없는, 눈먼 자들로만 이루어진 수용소. 생각해보라.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내부의 상황에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아주 기본적이라 할 수 있는, 먹는 것과 입는 것, 자는 것과 싸는 것이 어떻게 해결되어질지.


더욱 극한 상황의 연출은 더욱 깊은 내면에 위치한 인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다. 실제 역사로 자리잡고 있는 ‘산둥 수용소’와는 달리 ‘눈먼 자들의 도시’는 순전한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읽어나가며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거기엔 동일한 질문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진지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아주 기본적이고 철학적인, 어쩌면 신학적일 수도 있는 질문. “인간의 본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인간인가?”


어느 마을 사거리, 빨간 신호등 때문에 멈췄던 차들은 기다렸던 파란 불이 들어왔기 때문에 일제히 다시 가속페달을 밟아야 할 참이었다. 그런데 맨 앞의 차 한 대가 신호가 바뀐 것도 모른 채 계속 멈춰있다. 운전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럴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 멈춘 차 안의 운전자는 신호가 바뀐 것도 모를 정도로 딴짓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신호가 바뀐 것을 몰랐던 건 맞다. 그러나 알 수가 없었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싶지만, 그 남자가 갑자기 눈이 먼 것은 사실이었다.


이 책은 위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시작을 한다. 저자는 그저 한 남자에게 벌어진 기이한 일을 기록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 일은 재앙의 시작이었다. 그 남자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그 차를 도둑질한 남자, 눈먼 남자의 아내, 함께 안과를 찾아갔을 때 탔던 택시의 운전수, 안과 의사, 간호사, 안과에 온 환자 몇 명을 시작으로 점차 눈이 머는 현상은 결국 모든 사람에게까지 전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안과 의사의 아내는 눈이 멀지 않았다. 눈이 멀어버린 상황에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안과 의사였지만 아내는 남편을 돕기 위해 수용소로 함께 향했다. 자신도 눈이 멀었다고 모두를 속이면서 말이다.


전염성이 확인되자 국가가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눈먼 사람들과 그들과 가까이 있어 보균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어떤 낡고 버려진 정신병원 건물에 강제 수용되었다. 처음에는 군인들이 격리된 그들에게 먹을 것을 비롯한 생필품을 전달해주었지만, 군인들도 나중에 가선 모두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에 누구도 다른 누구를 감시하거나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라진 감시와 통제는 자유라고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모든 사람이 눈이 먼 세상에서 자유란 어떤 의미일까? 혹시 자유라는 것은 눈이 보여야만 가능하고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닐까?


수용소 안에서라면 동병상련이란 이유로 서로를 더 공감하고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남을 희생해서라도 자신의 유익을 먼저 챙기게 되는 파렴치한 존재, 우리 인간 말이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신 눈이 보일 때 마음껏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할 수 있는 자유는 주어졌다. 그러나 그 자유라는 것은 대부분 인간됨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도덕성과 합리성에 반하는 것들이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한 은밀하고도 수치스러운 행위들이 난잡하게 행해졌다. 무정부상태. 그것도 서로 보지 못하는 세상.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이미 정상적인 눈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도 예전의 사고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들은 동물, 아니 어쩌면 동물보다 더 못한 존재처럼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고통의 의미를 묻고 수치심을 느낄 수 있으며, 누군가 인간 내면에 입력해 둔 도덕성을 인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백 명이 넘는 인원이 수용된 곳이라 아무런 질서도 없는 상황에서는 힘있는 자가 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총을 가진 어떤 깡패가 그곳에 조달되는 음식을 중간에서 가로채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는 폭력을 무기로 돈과 여자를 요구했고, 유일한 먹을 것을 포기하고 죽느니 그들의 요구에 따르며 살아내는 것을 선택했던 눈먼 자들은 그 굴욕적인 요구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차피 싸게 될 것들을 먹고 하루를 더 살아내기 위해 아내를 강간의 제물로 바치는 남편들을 보면서 난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분노가 일었으나, 나를 그 상황에 투영시키자 그 분노는 연민과 애절함으로 바뀌었다. 나는 달랐겠는가 묻는다.


의사의 아내는 유일하게 전염되지 않아 눈이 정상이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그 사실을 일부러 숨겨오고 있었지만, 비참하고 굴욕적인 상황을 맞이한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그 깡패를 죽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깡패는 총이 있었고 그녀에겐 달랑 가위 한 자루가 있었다. 그러나 그 깡패는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볼 수 있었다. 가위는 총을 이겼다. 다른 동료 여성이 그 깡패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이 잠입하여 그의 목을 따버렸던 것이다. 첫 번째 살인이었다. 그녀에겐.


군인들도 다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에 수용소는 더이상 수용소가 아니었다. 이를 나중에 알게된 눈먼 자들은 누군가에 의한 방화 때문에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밖으로 나와도 달라질 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이다. 밖은 커다란 수용소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길거리는 배설물로 가득했고, 죽은 시체들이 여기저기에 뒹굴고, 그 시체를 뜯어먹는 개들이 가득했다.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볼 수 있는 것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그녀가 본 세상은 처참했다.


내가 감동받은 부분은 의사의 아내의 이타적인 행동 때문이다. 그녀조차 차라리 자신도 눈이 멀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여러 번 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일행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애썼다. 일행을 모두 집으로 데려가서 남은 물을 함께 마시는 장면에서 난 경건해지기까지 했다. 저자는 눈먼 자들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고, 그녀를 통해서는 어떤 희망과 인간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모르지만 인간에겐 희생과 헌신을 양날개로 하는 이타심과 사랑이 이기심 말고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9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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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 (양장) 믿음의 글들 185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외 옮김 / 홍성사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Mere Human에서 Mere Christianity를 추출하다.

C. S. 루이스 저,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를 읽고.

유쾌하진 않겠지만, 누군가 비난할 때를 한 번 떠올려 봅시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누군가를 비난할 때면 상대방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여기는 어떤 기준에 호소하게 됩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수치심이나 굴욕감을 느끼게 하거나 자신의 그름을 스스로 시인하길 원할 때, 우린 보통 '비난'이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곤 하지요. 이렇게 비난 받아 마땅하다거나 혹은 칭찬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개인 및 집단의 행동, 그리고 인간 및 사회 전체가 불의하다거나 악하다고 여기게 되는 이유까지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어떤 법칙 혹은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옳고 그름에 대한 일정한 방식이 경험이나 교육에 선행하여, 그리고 본능의 차원도 훌쩍 넘어서는 단계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둡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어두움에만 있을 때에는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그것이 어떻게 혹은 언제부터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도덕적 판단도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법칙을 '자연법' 혹은 '도덕률'이라고 하는데요. 이 책에서 루이스는 이를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법칙을 어쨌거나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지요.

루이스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비록 모든 인간이 옳고 그름에 대한 우주적인 행동 법칙을 안다고는 하지만, 그 어떤 인간도 그런 기준이 옳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는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가 가지는 근원적인 숙명 (이 책의 제목을 흉내 내어, 'Mere Human'이라고나 할까요. 어쩌면 이 책은 루이스가 이러한 'Mere Human'에서 'Mere Christianity'를 이끌어내는 변증을 시도하는 책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을 이보다 더 날카롭게 간파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루이스는 바로 이 두 가지 (도덕률을 알지만, 행하지 못하는 인간)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 대해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 법칙의 배후에는 인간의 문제를 넘어 인간뿐 아니라 우주를 지휘하고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합리적인 추론을 기독교적인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명쾌하게 이끌어냅니다. 루이스의 탁월함이 돋보이는 부분이죠. 여기서 독자인 저는 기독교의 도움 없이 우리 개개인의 힘으로 이 배후의 존재에 대해 숙고해보도록 유도하고 있는 루이스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섣불리 그 배후의 존재가 기독교의 하나님이라고 단정짓지 않습니다. 그 결론에 다다르기 위해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는데요. 루이스는 그 배후의 존재가 그름이 아닌 옳음을 원하고 명령하는 존재라는 사실로부터 그 존재가 선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내며, 인간들이 그러한 법칙을 알면서도 자꾸만 그름을 선택하고 행하는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로부터 그 존재가 인격적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용서는 인격을 가진 존재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루이스는 말합니다. 바로 그 선하고 인격적인 존재가 우주를 만들고 앞서 말한 도덕률의 배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기 전에는 기독교가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힘 주어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먼저 도덕률이라는 사실이 정말로 존재하며, 그 법칙의 배후에 어떤 힘이 있고, 여러분이 그 법을 어김으로써 그 힘과 잘못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닫기 전에는, 정말이지 이 모든 것을 깨닫는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기독교는 여러분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이지 루이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천국티켓을 확보하는 안전한 보험과도 같은 용도로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는, 달라스 윌라드가 그의 책 '하나님의 모략'에서 언급했던 '바코드 신앙'에 사로잡힌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맹목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무속신앙과 자본주의와 나르시시즘의 교묘한 결합이 기독교의 옷을 입고 있는 21세기에 우리는 루이스의 이러한 날카로운 변증을 눈 여겨 봐야 할 것입니다. 믿음과 이성은 대립하는 상대가 아닌 조화를 이루며 더 풍성한 열매를 얻기 위한 기독교인의 필수 요소일 테니까요.

이 책, '순전한 기독교'는 본래 2차 세계대전 중 방송되었던 라디오 강연 원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짧은 제한 시간 내에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지엽적인 설명은 다 삭제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런 걸까요? 비유와 상징에 능한 루이스의 필체가 다른 책에서보다 이 책에서 더욱 간결하고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 같은 인상을 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제목만 봐선 이 책의 내용을 짐작하기가 쉽진 않을 것입니다. 제목에서 등장한 '순전한'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머리말에 써진 루이스의 친절한 설명을 읽은 후에야 그 뜻을 알게 되었답니다. 루이스는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래, 믿지 않는 이웃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상의 봉사는 모든 시대에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믿어 온 바를 설명하고 수호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나의 종교'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한' 기독교, 즉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기독교의 '공통적인', 또는 '중심적인', 또는 '순전한' 기독교를 제시하는 작업이 바로 이 책을 통해 루이스가 시도하고 있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교단이나 교파, 역사와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기독교를 바로 '순전한 기독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담백하면서도 날카로운 변증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용어로 써있기 때문에 루이스가 시도하고 있는 작업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Mere Human에서 Mere Christianity를 이끌어내는 변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이 책에서의 루이스의 시도가 정말 탁월하다는 것을 저는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하고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의 필연적 존재를 성경이나 교회의 도움 없이 인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로 추론해낼 수 있다는 점은 정말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책의 1부를 다뤘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엔 이 부분이 바로 이 책을 기독교인 비기독교인을 막론하고 지속적인 사랑을 받도록 만드는 핵심적인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책의 2부는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범신론과 기독교를 비교하며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하여, 이원론과 기독교를 비교하며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와 이를 잘못 사용한 반역에 대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력에 대하여 하나씩 짚어가면서 말이지요.

이어지는 3부에서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이야기하면서 도덕을 강조합니다. 개인도덕은 물론이며 그것을 넘어 사회도덕까지 확장되는 흐름을 이야기하는데요. 복음의 공공성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으로 저에게는 읽혀졌습니다. 루이스는 이러한 도덕에는 7가지 덕목 (4가지 기본 덕목: 분별력, 절제, 정의, 꿋꿋함 / 3가지 신학적 덕목: 사랑, 소망,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이것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해나갑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일정한 인격적 특질을 갖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 말의 핵심은, 이러한 특질이 그 내면에서 싹조차 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외부 조건이 좋은 곳도 천국이 될 수 없다는 것, 즉 그들은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그 깊고도 강하며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행복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3부에는 기본 덕목 말고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가장 큰 죄', 즉 가장 핵심적이자 궁극적인 악이 바로 '교만'이라고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교만은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 없는 악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의 의미를 교만에서 찾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마지막 4부에서는 다분히 신학적인 내용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이 읽기에는 부담스러운 부분이지요. 그러나 루이스는 일반 독자들도 만약 하나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자 한다면, 가능한 한 가장 명확하고 정확한 개념들을 알고 싶을 거라면서, 지도와도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신학을 일부러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넣었다고 4부의 서두에 밝히고 있습니다. 주로 삼위일체에 대한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데요. 루이스의 의도는 아직 그 누구도 명확하고 정확하게 설명한 적이 없는 삼위일체를 비그리스도인에게 처음으로 자기가 설명해보겠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루이스의 강조점은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기독교의 핵심, 즉 새 사람으로 되는 신비한 과정,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거듭남과 성숙함에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기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신 사건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 '창조된 존재에서 태어난 존재로 변화되는 일', '일시적인 생물학적 생명에서 시간을 초월한 영적 생명으로 바뀌는 일'로 해석합니다. 루이스가 지적한 대로, 그리스도는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나셨다'는 말의 뜻을 숙고해보며 루이스의 해석을 받아들일 때, 저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책의 마지막에서 루이스는 새 사람이 되는 일은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변형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이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린 비로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고도 역설합니다. 자아를 포기할 때 발견할 것이고, 생명을 버릴 때 얻을 것이며, 죽음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생명을 발견할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육신의 죽음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새롭고 온전하게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저는 이 책을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상관없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해나갈 준비가 된 모든 사람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 책을 사심 없이 진지하게 읽게 된다면, 아마도 루이스의 자연스럽고도 강력한 논리에 이끌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거나,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기독교를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되리라 저는 감히 예상합니다. 또한 이미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이 책을 겸손한 마음으로 찬찬히 읽게 된다면, 아마도 이성과 믿음의 균형에 대한 관점에서 기독교를 더욱 진지하게 이해하고 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한 가지 조언하고 싶은 것은, 루이스의 비유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큰 흐름을 놓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언제나 먼저 큰 맥락을 견지한 상태에서 루이스의 탁월한 비유를 즐기며 도움을 받으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루이스는 여러분의 더할 나위 없는 벗이자 스승이 기꺼이 되어줄 것입니다.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098756400169131
2. 고통의 문제: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26994814011956
3. 헤아려 본 슬픔: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38735802837857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471812539530180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59914580719975
6. 순전한 기독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47418798636218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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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려 본 슬픔 믿음의 글들 208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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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공감고통의 정서적 문제에 대한 .

 

C. S. 루이스 , ‘헤아려  슬픔 읽고.

 

어쩌면 우린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 철이 들고 어른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슬픔은 고통스럽고고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빙빙 도는 원과도 같다그러나  갇히지 않고 나를 넘어 남에게로 향하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슬픔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공감하지 못한다면나의 고통과 슬픔은  안의 나를 더욱 키울 뿐이다그리고 그때 비로소 고통과 슬픔은 우리가  두려워했던  자멸의 무기   있다고통과 슬픔을 이해하는 과정이 우리네 인생이라면타인을 공감하고 소통하는 것은 목적일 것이다철부지 어린아이들의 눈에 비춰진 세상과는 너무도 다른 현실을 살아내는 어른들의 진정한 어른스러움은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과 소통능력그리고 이를 위한 고통과 슬픔에 대한 이해일지도 모른다.

 

다음은 C. S. 루이스가   헤아려  슬픔 초반부에 토로하는 고백이다. “슬픔이 마치 두려움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무섭지는 않으나 감정은 무서울 때와 흡사하다똑같이 속이 울렁거리고 안절부절못하며 입이 벌어진다나는 연신 침을 삼킨다어떤 때는 은근히 취하거나 뇌진탕이 일어난  같은 느낌이 든다세상과  사이에는 뭔가 보이지 않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다른 사람이 뭐라 말하든 받아들이기 힘들다아니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게다만사가 너무 재미없다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집이   때가 무섭다사람들이 있어 주되 저희들끼리만 이야기하고 나는 가만 내버려 두면 좋겠다……. 슬픔은 게으른 것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질문한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그분은 우리가 번성할 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 주시는  인색한 것인가?”

 

놀라웠다알다시피 그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을 썼던 바로  사람이다동일 인물이란 말이다그는 고통의 문제 출판한 이후 뒤늦게 결혼을 했고  년만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헤아려  슬픔 탄생된 배경이다자칫하면 고통의 문제에서와는 상반된다고 느껴질 정도로  책에서는 그의 솔직담백한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의심의 고백들이 수두룩하다그러나 나는  책을 읽고나서 오히려 루이스가  와닿았고, ‘고통의 문제 남겨놓은 여백이 마침내 채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고통의 문제 고통이 야기하는 지적인 문제에 대한 루이스의 답변이라면  헤아려  슬픔 정서적인 측면에서의 그의 답이라   있다루이스가 고통의 문제에서 확신의 옷을 입고 탁월한 논리의 기독교 변증을 선보였다면, ‘헤아려  슬픔에서는 그의 확신은 사라지고대신 정서적으로 풍부한 솔직함과 진솔한 고백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루이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피터 엔즈는 옳았다. ‘확신의 에서 그가 말한 것처럼의심을 손님으로 맞아들인 이후 두려움과 원망과 슬픔의 단계를 넘어서서 벼려진 칼처럼 루이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답변은  책에서 더욱 풍성해졌다저기 높이 있던 루이스가 낮은  머물고 있는 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이미  환자였던 아내와 결혼한 루이스였지만치료 과정과 병행한 그의 사랑은 아내의 완치를 바랐을 것이다도중에 호전되는  같은 검사 결과에 희망으로 가득  때도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아내는 예정된 죽음을 맞이했고루이스는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뒤늦게 찾아온 사랑이어서 상실의 고통과 슬픔이  크게 느껴졌던 것일까책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비록  이해할  없을지라도 커다란 상실로 인해 그가 빠져버린 슬픔과 고통의 늪이 날카로운 논리로 단련되었던 그를 얼만큼 옥죄었을지 상상해보면내게도 이루 말할  없는 처절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책은 루이스가 아내를 잃고 나서 힘들어하던 기간에 끄적거린 노트를   합친 작품이다책을 쓰려고 작정하지 않고 출판된 책이어서 그런지 그의 정돈되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진 생각의 파편들을 읽어볼 수가 있었고어쨌거나 맞닥뜨린 믿을  없는 현실 앞에서 용솟음치는 그의 내면의 격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정서적인 충격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루이스는 자신을 찾아온 의심을 환대한  같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동안 갈고 닦은 논리의 힘으로 이렇게 저렇게 싸워도 본다하나님의 존재를 묻고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한다하나님이 수의사인지 아니면 그저 인간에게 고통과 슬픔을 줌으로써 생체실험을 하고 있는지를 묻기까지 한다이미 그는 고통의 문제에서고통은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스스로 저지른 죄의 결과에서 빠져나올  있도록 치료하시는 과정  발생하는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고통은 하나님의 메가폰으로써 고통이 혹독한 도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고통은 반역한 인간에게 개심할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해주는 역할도 합니다라고도 했다 책에서 그는 이런 사실 뒤집지는 않는다그는 결국 하나님을 수의사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는 어쨌거나 진실로 고통스럽고 슬펐다.

 

어쩌면 고통의 문제 답하지 못한고통과 슬픔이 야기하는 정서적인 문제에 대한 답변은 공감일지도 모르겠다우리는 아무리 지적인 답변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도충분히 개운하지 않은 기분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를 답을 찾고 싶어한다그러나 과연 그게 가능할까정서적인 문제에 지적인 답변이란  애당초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책을 읽고 내가 내린 작은 결론의 키워드는 공감이다루이스가  책에서 고통의 문제에서 말하지 않은 명징한 논리의 답을 선사하는 것도 아니지만나에게 있어선  선명하게 이해가 되었던 이유는 아마도 논리를 갖춘 지적인 차원의  때문이 아닐 것이다오히려 논리에 날선 그도 슬퍼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사랑을 곱씹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한 의심을 하면서 고군분투를 해나가는 모습이 여과없이 노출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다시 말해 루이스가 그가 직접 설파한 논리를 완벽히 몸소 공감하는 모습 자체가 내게 일종의 답이 되었던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우리가 질문하고 답을 원하는 것들이그리고 우리가 이해한다고 하는 것들이 어떤 합리적인 논리의 답을 넘어서 공감받는 행위 자체에서도 얻을  있다는 것이!

 

슬픔과 고통을 분석하는 차원을 넘어 그것들을 직접 체험하고 헤아려 보며 얻게 되는 지혜의 산물 책을 읽고  조금  어른이   같은 느낌이다고통과 슬픔으로  안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서 남을 향해 쭉쭉 뻗어나갈 수만 있다면서로 위로받고 공감받으며 사랑을 만들어갈 수만 있다면슬픔과 고통의 답은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주어지지 않을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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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문제 믿음의 글들 189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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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의 고통 이면에 계시는 사랑의 치료자 하나님의 손길.


C. S. 루이스 저, '고통의 문제'를 읽고.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왜 피조물들의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이 물음은 하나님의 선함과 전능하심에 대한 의심을 유도하며, 신정론과 함께 아주 오래된 질문입니다. 루이스는 고통이 야기하는 이러한 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책, '고통의 문제'를 썼다고 합니다. 그의 날카로운 변증이 잘 드러나있는 이 책은 고통의 문제를 바로 다루기 위해 먼저 기독교의 기원을 살펴보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는 설명에 이어 인간의 악함과 타락에 대하여 고찰한 후, 마지막으로 고통의 의미를 풀어주고 있습니다. 비록 술술 읽히진 않지만, 텍스트 속에 담겨있는 그의 명징한 논리는 이를 이해한 독자의 마음을 시원케 해줄 것입니다.


루이스는 서론에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로부터 창조자의 선함과 지혜를 유추해 낸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불합리한 일이었을 것이며, 실제로 그런 일이 시도된 적 또한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하면서 피조물인 인간의 이해도에 한계를 설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가 지혜롭고 선한 창조자의 작품"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어쩌면 이성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주와 생명의 기원이 창조라고 믿는 믿음을 가진 인간, 즉 실제로는 날마다 고통스러운 세상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실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의로운 존재'라고 믿는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비로소 '문제'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전능의 의미는 '아무말잔치'에서처럼 무의미한 단어들을 조합해 놓고 그 앞에 'God can'이라는 말을 붙인다고 해서 탄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루이스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내재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지,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하며,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지 말이 안 되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며, 이것은 그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불변하는 법칙과 인과적 필연성에 따른 결과 및 전체 자연질서는 일상의 삶을 제한하는 한계인 동시에 그런 삶을 가능케 해 주는 유일한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에, "자연질서 및 자유의지와 맞물려 있는 고통을 배제한다는 것은 삶 그 자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덧붙여, 피조물들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 때마다 매번 하나님이 개입해서 바로잡아 준다면, 자유의지를 피조물들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과 다를 게 없다는 논리도 가능해집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박탈하시면서까지 고통을 제거시켜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하나님의 선함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함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이 오해되어져 왔습니다. 루이스는 이 부분에서 "오늘날 하나님의 선함은 거의 예외 없이 사랑이 많다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문제를 하나 제기하는데, 그것은 "우리 대부분이 이 문맥의 사랑을 친절로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은 단순한 친절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말은 우리에게 무관심한 나머지 사심 없이 우리의 복지에 신경 쓰신다는 뜻이 아니라, 두렵고도 놀라우며 참된 의미에서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꾸벅꾸벅 졸면서 여러분이 그 나름대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연로한 할아버지의 인자함이나 양심적인 치안판사의 냉담한 박애주의, 손님 대접에 책임감을 느끼는 집주인의 배려로서가 아니라, 소멸하는 불로서, 세상을 창조해 낸 사랑으로서, 작품을 향한 화가의 사랑처럼 집요하고 개를 향한 인간의 사랑처럼 전제적이며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처럼 신중하고 숭고하며 남녀의 사랑처럼 질투할 뿐 아니라 꺾일 줄 모르는 철두철미한 사랑으로서 여기 계십니다."


인간이 선하다면 위와 같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에 대해 별다른 이해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자기 유익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이용해버릴 만큼 악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를 동의하지 않는 루이스에게조차 인간의 악함은 그의 변증의 기본 전제로 깔려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적 타락 교리를 받아들이건 말건 간에 인간은 악함은 기정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악함의 이유는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교리에 들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의지를 오용하여 스스로 이런 모습을 초래했다는 교리입니다. 이 부분에서 루이스는 "인간의 타락은 단지 죄라는 획득형질을 얻은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코 만드신 바 없는 새로운 종이 죄로 인해 탄생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인간은 하나의 종으로서 스스로 부패했으며, 따라서 지금 이런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선이란 본질적으로 우리를 치료하며 바로잡아 주는 선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우리를 치료하고 바로잡는 부분에서 고통이 실제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 고뇌, 시련, 역경, 곤란과 같은 의미인 고통은 하나님의 치료의 손길에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선해지고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은 피조물에게 합당한 선이며, 그것은 곧 자신을 창조자에게 양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악함은 죄를 낳았고 그 상태는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즘입니다. "하나님의 치료가 우리에게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 것으로 주장해온 의지를 되돌려 드리는 일이 본질적으로 가혹한 고통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즉 "하나님의 메가폰으로써 고통이 혹독한 도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고통은 반역한 인간에게 개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해주는 역할도 합니다." "고통은 반항하는 영혼의 요새 안에 진실의 깃발을 꽂습니다."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라는 기독교의 교리는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유효한 진리입니다.


"고통의 유익은, 고난 받는 당사자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되며 그의 고난을 목격한 사람들은 동정심을 품고 자비로운 행동을 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의 선한 열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이용해 자신의 반역을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구속되지 못할 이들에겐 응보적 결과로 지옥이라는 장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저주받은 자들로서 최후까지 반역에 성공한 자들이며, 영혼이 선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자기 포기의 영역에서 첫 단계조차 밟으려 하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요구한 무서운 자유를 영원히 누린 결과 자아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축복받은 자들은 영원히 순종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영원무궁토록 자유롭고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됩니다." 끊임없이 자기 드림을 실행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곳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타락으로 악해진 인간을 치료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스치는 곳에 인간의 고통이 발생합니다. 루이스에 의하면, "고통은 모든 악 중에 유일하게 살균 소독된 악입니다. 고통에는 그 본성상 증식하는 성향이 없으므로 고통이 끝났다면 자연스럽게 기쁨이 뒤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신뢰하고 그가 치료하시는 사랑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가 부수거나 파괴하는 것은 우리를 부수거나 파괴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연합을 원하신다면, 고통 이면에 거하시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아멘.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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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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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낸다는 것.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신성모독과 음담패설 등이 취미인 것 같은 망나니, 육욕에 충만하여 정신적 세계를 단박에 우스개거리로 만들어버리는 방탕한 이단, 말초적 쾌락이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이 된듯한 그에게서 왜 난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사건을 떠올렸던 것일까. 성육신이야말로 그가 말로 주장하고 삶으로 보여주었던 것들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거룩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혹시 바로 여기에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숨은 역설이 담겨있는 건 아닐까?


'나'라는 화자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쓰여진 이 책의 주인공 이름은 '조르바'이다. 이 책은 화자가 조르바를 만나면서부터 그가 죽기까지의 기간 동안 있었던 일들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짜여져 있다.


정신을 함께 나누었던 친구와의 이별은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친구는 동포를 구하기 위하여 책을 버리고 삶을 택한다.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떠안고 친구는 카프카스로 기꺼이 몸을 던진다 (결국 그 친구는 동포를 구하고 나중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비겁했던 것일까? 이별 장면에서 기억하는 친구와의 마지막 대화 속에서 ‘나’를 송곳처럼 찔러 내면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시작했던 말은 ‘책벌레’였다. ‘나’는 그 말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깊은 상처를 받았다.


‘나’는 결심했다. 새로운 삶을 살아보기로.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남겨준, 크레타 섬에 위치한 갈탄광으로 향한다. 그러나 책과 집필도구는 챙겨서 간다. 그래도 ‘나’에게는 그것도 일생일대의 큰 결단이었다.


조르바를 만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던 그 레스토랑에서 조르바는 운명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조르바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나’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호탕한 기인이었다. 조르바와 함께 크레타 섬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기로 작정했다. 마침 그는 탄광에서 광부로서의 경험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고 표현해도 조르바를 모두 담아내기엔 역부족이다. 그는 언제나 그 이상이었다. 이별했던 친구가 ‘나’에게 어떤 자극제 역할을 했다면, 조르바는 이미 그 길의 목적지에 도달해있는 사람이자 그 길의 완성인 것 같았다. ‘나’의 구원을 찾아나선 여정에서 그는 그 자체로서 답이었다.


400 페이지가 넘어가는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크레타 섬에서 조르바와 함께 했던 시기에 대한 회고다. 책의 말미에서도 언급되지만, ‘나’는 조르바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다 기억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의 조르바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조르바로부터 뿜어져나오는 자유를 통해 성숙해지고 풍성해진, 어쩌면 그 많고 많은 책으로부터도 얻지 못했던 해방과 일종의 구원 과정에서부터 얻은 절절한 내면의 변화가 고스란히 이 책에 담겨있다.


내가 이 광기어린 기인, 조르바와 화자인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생각났던 건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소설을 읽어나가는 중 나는 나도 모르게 나를 ‘나’에게 대입했다. 그리고 ‘나’의 눈으로 조르바를 보고 느꼈다 (저자가 ‘나’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건 아마 이 때문은 아닐까? 독자들이 그가 직접 겪은 조르바를 느껴보라고). 조르바는 슬플 때 소처럼 울 줄 알았고, 기쁠 땐 미친 놈처럼 춤을 출 줄도 알았으며, 영혼의 깊숙한 곳이 터치될 땐 산투르를 연주하여 온몸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크레타 섬의 주민들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씌워 죽여버린 과부를 보호하려 몸을 던졌던 유일한 인간이었으며, 그의 부불리나였던 오르탕스 부인의 죽음 앞에서 유일하게 애도를 표하며 슬퍼했던 인간이었으며,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수도승들의 치부를 여과없이 드러내어 조롱했던 대담하고 예리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밤하늘의 별과 포말로 부서지는 바다와 지저귀는 새소리와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더운 바람에도 예민하게, 마치 처음 그 창조물들을 대하는듯한 자세로 반응했던 인간이었다. 인생의 허다한 경험들을 뒤로 하고 그것을 내던져버리지 않고 그 속에서 진주를 찾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철학을 만들어내었던 인물이었다. 실로 그는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지식과 지혜를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체득하여 실제 삶을 살아내는 자였던 것이다.


내가 가진 신앙을 바라본다. 말과 글로 도배된 많은 부분들이 보이고, 거기로부터 깨닫고 기뻐하는 작은 몸부림조차 손과 발로 전달되지 않고 머리과 가슴에 갇혀버린 처량한 내 꼴이 보인다. 난 과연 왜 책을 읽어나가고 있는 것일까. 많은 깨달음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일상을 하나님나라로 살아내려는 결단으로 새로이 시작한 나의 삶과 신앙의 여정은 책 속의 화자와 마찬가지로, 내가 가졌고 유일하게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라고 여겼던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시작되었다.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이 여정 가운데 이 책을 만나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매일 새롭게 도약하는 것이다. 신학책에서 세상을 보고, 세상에서 신학을 본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인간을 알게되고, 인간을 알게되면서 하나님을 본다. 살아낸다는 것, 머리와 가슴을 찔러 깊은 깨달음을 얻고 눈물을 쏟아낸다해도 일상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와 억눌린 자들을 돌보지 못한 채 고상한 교회 은어들을 사용해대며 까불어대고, 고작 한다는 신앙의 행위가 개인의 번영과 안녕만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과 악마가 하나라고 함부로 지껄였지만 일상적 삶에선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삶을 살아낸 (어쩌면 예수의 삶을 살아낸) 조르바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낸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8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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