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 기대는 시간 - 삶을 견디고 나를 마주하는 고전 읽기
정지우 지음 / 을유문화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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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외로움, 고독이라는 깊은 우물에서 길어낸 내면의 성장

정지우 저, ‘고전에 기대는 시간’을 읽고

페이스북을 통해 정지우 작가를 알게 된 지 5년이 되었지만, 이제야 그의 저서를 손에 들었다. 왜 이렇게 늦어버린 것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나는 그가 페이스북 친구 중 가장 성실하게, 그것도 시선을 끌 만한 사진이나 단 몇 문장만으로 끝나는 글이 아닌, 몇 단락으로 이루어진, 완성도가 높은 데다 진정성까지 깃든 글을 포스팅하는 사람 중 하나라는 점에서 답을 찾는다.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될 만큼 나는 이미 페이스북 포스팅을 통해 그의 글을 충분히 읽고 있다고 판단했었나 보다. 지난 5년간 그는 책을 여러 권 펴냈다. 그러는 동안 변호사라는 직업도 가졌다. 갓난아기였던 그의 아이도 제법 자랐을 것이다.

그의 저서 중 무엇을 읽어볼까 하다가 바로 이 책 ’고전에 기대는 시간‘을 고르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 역시 서양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하고, 언젠가 그의 포스팅에서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이라고 썼던 게 불현듯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난 나흘 간 나는 저녁 시간에 실내 자전거를 타면서 동태눈으로 세월아 네월아 숫자가 올라가는 계기판을 쳐다보지 않고 즐겁게 정신을 팔 수 있었다. 

이 책은 열두 편의 서양 고전 문학 작품을 읽고 독자로서 그가 남긴 흔적, 그리고 불안하기만 했던, 그래서 외롭기도 하고 고독하기도 했던, 예비 작가 정지우의 이십 대 시절이 남긴 잔상을 담고 있다. 여기서 잔상이라 함은 과거 회상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책이 쓰인 시점은 그가 서른을 넘긴 이후다.

열두 편의 작품 중 내가 아직 읽지 못한 작품은 세 편밖에 없었다. 그가 읽은 양에 비해 내가 읽은 건 십 분의 일도 되지 않을 터인데, 전체의 사 분의 삼이나 읽은 작품이 겹치는 까닭은 아마도 그가 고른 작품이 상대적으로 한국인에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역시 헤세를 읽었고, 그르니에를 읽었으며, 카뮈를 읽었다. 릴케와 지브란에 빠지기도 했고, 내가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를 섭렵하기도 했다. 그가 책들과 보낸 이십대 시절은 책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이런 멋진 책을 써냄으로써 그는 뭇사람들이 거치는 과정에 ‘의미’라는 옷을 입혀 기념하고 기억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 책의 어느 부분을 펴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는 정서는 불안, 외로움, 고독이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조그만 그의 자취방. 세상과 단절된 듯한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자기 자신과의 깊은 만남을 가졌던 듯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한 가지 권하고 싶은 점은 외톨이로도 충분히 보일 수 있을 만한 상황의 표면이 아닌 그 이면에 초점을 맞춰보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을 등진 듯한 모습으로 외롭고 불안했지만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가지 않을 수 있는 깊은 심지를 영혼에 견고히 내렸으며 그러면서 내면의 성장, 성숙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작가 지망생이라면 이 책을 통해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읽고 쓰는 삶’의 불안하기 짝이 없는 시작과 젊은 날의 정신적 방황, 그리고 그런 것들을 꿋꿋이 견디며 주관과 객관에 균형을 이루어나가는 현실적인 모습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전을 읽어나가며 그가 얻었던 위로와 평안과 만족을 느낄 수 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겠다. 

이미 마흔을 훌쩍 넘겨버린 나에겐 서른을 넘기며 이런 내면의 성장을 이뤄낸 정지우 작가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마흔을 넘기면서 느끼고 깨달았던 많은 것들을 그는 서른을 넘기면서 모두 체험한 듯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포스팅에서 느꼈던 그의 내공은 뿌리가 깊었던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도 살펴볼까 한다. 

#을유문화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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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까닭을 묻다 -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서 만난 하나님
김기현 지음 / 두란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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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따지기, 그리고 답이 되기

김기현 저, ‘욥, 까닭을 묻다’를 읽고

작가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글쓰기 선생이자 철학과 인문학에 능통한 목사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 김기현은 2016년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를 쓰며 자신이 통과했던 고난을 자발적으로 재방문하고 그로 인해 다시 아파하다가 끝내 치유를 경험했다. 하박국서를 읽고 묵상하고 해석하고 개별적인 자신의 삶에 적용하면서 자기 객관화를 이루고 초월적인 하나님 관점으로 자기 삶을 관찰, 성찰한 뒤 고난 받은 경험이 있는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고 그 고난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의 열매를 따먹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통찰을 이끌어냈다. 그는 그 시기를 죽음을 경험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때로 고백한다. 아마 그의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 역시 비슷한 고백으로 화답했으리라.

그랬던 그가 6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또다시 고난을 다루는 책을 펴냈다. 왜일까. 왜 또 고난일까. 하박국으로 충분하지 못했던 것일까. 하지 못한 말이 남아서였을까. 아닐 것이다. 고난과 인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인생 자체가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어쩌면 둘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것을 지칭하는 단어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번이 하박국서였다면, 이번에는 욥기다. 하박국처럼 고통을 노래할 수 있게 되었던 그가 이번에는 욥처럼 까닭을 묻는다. 

하박국과 욥은 공통점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맞이하고 저항하고 항거하다가 결국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고난마저도 노래하며 축복의 통로임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 역시 또 하나의 하박국이자 욥으로서 자신의 경험담을 매개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견디며 통과한 뒤 그 고난이 벌이나 저주라고 여기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믿음이 감사와 찬송으로 변화되어 거듭난 인생을 비로소 살아내기 시작한 이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은혜가 되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아름다운 증거가 된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이러한 결론으로만 압축된다면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와 그리 다르지 않은 작품이 되어버린다. 이번 책의 주안점을 나는 제목에서 찾는다. 특히 동사에 주목한다. ’노래하다‘가 아닌 ’묻다‘에서 말이다. 욥의 항변과 무수한 질문을 쏟아내는 모습, 그러니까 알 수 없는 고난을 통과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복을 받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론적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고난을 통과하는 과정 중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이 책을 읽어야 전작과 다른 의미를 찾아내지 않을까 한다. 요컨대 노래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전,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묻고 따지는 행위. 유교와 무속신앙이 교묘하게 배합되어 무엇이 예수님의 사상이고 가르침인지조차 묘연해진 한국 기독교에서 이런 행위는 오만방자하다거나 교만하다는 말을 듣기 십상일 것이다. 욥의 세 친구 역할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일 거라고 말한다면 과장이 심한 걸까. 

묻고 따지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생 자체가 고난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다 고난은 인간의 능력 너머에 있는 해결불가능한 영역의 일이기에 모든 인간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묻고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묻고 따질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묻고 따지면 안 되는 것처럼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그들이 범한 우는 단지 묻고 따지기를 금하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행위 이면에는 자기들만 하나님을 잘 안다는 선민사상과 교만이 내재되어 있다. 욥의 세 친구는 묻지 않았다. 오히려 묻고 따지는 욥을 나무라고 저주하고 가르치려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편을 들어주신다. 묻는 자에게 응답이 주어지는 법이다. 욥의 세 친구가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무시당한 이유는 그들은 묻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신 그들은 자칭 하나님 자리에 앉아 하나님 노릇을 했다. 묻고 따진다는 건 어쩌면 지극히 인간적이고 지극히 겸손한 땅의 존재가 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하고도 자연스러운 믿음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저자도 말하듯, 예수님의 가르침도 많은 부분이 질문으로 이루어진다. 비유와 상징에 능한 예수님의 많은 가르침은 무수한 질문을 낳는다. 욥기의 말미에 등장하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도 질문으로 일관하신다. 그러나 그 질문들이 곧 답이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답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나아가 욥기를 읽는, 아니 모든 하나님 말씀을 읽는 독자들은 이 점을 절대 간과하면 안 되겠다. 

또한, 역시 저자가 간파했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묻고 따지는 데에 있어 욥처럼 담대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를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비그리스도인들 앞에서는 답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민족으로 부르신 이유와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열방에 제사장 역할,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떻게 된다는 답으로 서기 위해 우리가 먼저 행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께 묻고 따지는 행위일 것이다. 하나님께 묻고 따지기, 그리고 열방에게 답이 되기. 전자는 후자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열방에게 답이 되지 못할까. 혹시 하나님께 묻고 따지지 않아서이진 않을까. 하나님 말씀을 읽어나갈 때 좀 더 묻고 따지는 자세로 하나님과 대화해야겠다고 나는 마음 먹게 된다.

참고.
1.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https://rtmodel.tistory.com/379
2. 욥, 까닭을 묻다: https://rtmodel.tistory.com/1557

#두란노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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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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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그림이 남는 작품


나쓰메 소세키 저, ‘풀베개’를 읽고

한 작가의 작품을 짧은 기간 다섯 편이나 읽게 되면 문체랄까 사상이랄까 하는 그 작가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충분히 감지하게 되고 익숙해지는 게 보통이다. 심지어 도스토옙스키도 이 일반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전집 읽기를 시도했던 헤세, 이시구로, 루이스도 내겐 마찬가지였다. 

처음 예외를 만났다. 바로 나쓰메 소세키다. ‘풀베개’로 그를 다섯 번째 만났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다섯 번째 동명이인을 만난 듯한 기분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쓰메 소세키 전집 읽기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 다섯의 동명이인 중에 나는 다섯 번째 나쓰메 소세키를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지만 새로 구입할 작정이다. 문학작품을 수백 권 읽으니 이젠 어떤 책을 소장해야 할지 나만의 기준이 생기는 것 같다. 참고로 이 기준은 단순한 독자이기보단 작가라는 정체성을 가진 독자로서의 기준이다.  

뭐랄까. 한 편의 시화 혹은 그림 속으로 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이다. 언뜻 마루야마 겐지의 ‘달에 울다’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것보단 동적이고 스케일이 크다. 헤르만 헤세의 ‘뉘른베르크 여행’ 느낌도 나지만, 그것보단 시적이고 풍류가 넘친다. 또한 이 작품보다 사십여 년 이후에 나온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정취도 물씬 풍긴다. 주인공이 일본의 한 시골 온천에 들른다는 점과 거기서 한 여자와 만나게 된다는 점이 닮았다. 이렇다 할 줄거리 없이 서사보단 묘사 위주로 된 뛰어난 작품이라는 점도 닮았다. 특히 자연에 대한 묘사와 그것에 반영된 작가 내면의 투영, 그리고 관조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잘 유지되는 객관적 거리는 내가 이 책을 소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주었다.

‘풀베개’란 제목은 이 작품을 단적으로 대변한다는 생각이다. 태평하다는 인상도 풍기지만, 그것보다는 풍류의 정취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주인공은 도회지인 도쿄에서 속세를 벗어나고픈 충동에 이끌려 비인간적인 결단을 내린 뒤 ‘나코이’라는 해변에 위치한 온천장으로 발걸음을 실제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는 문명의 발달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기차에 ‘타는’ 게 아니라 ‘실려가는’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여자의 얼굴에서 찾던 마지막 퍼즐조각 '연민'을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문명 속으로 들어와서야 발견하게 된다는 점에서 아마도 작가는 문명과 비문명의 이분법이 아닌 둘 다를 아우르는 조화를 추구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도 하게 된다. 또한 그는 서양에 대해서도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양화를 그리는 화공이다 (주인공이 가진 내적 모순이라 할 수 있겠다). 일본인으로서 서양을 절대 우월하다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옹졸한 국수주의자의 모습도 간간이 보인다. 그는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듯하다. 사물과 사람, 그리고 자연이 만들어내는 예기치 못한 순간들을 예민하게 알아채고 그때마다 즉흥적으로 하이쿠를 짓거나 그림을 그린다. 과연 시와 그림에 능한 인물인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기승전결의 구도를 갖는 일반적인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한 편의 이야기가 남는 게 아니라 한 편의 이미지가 남는다. 정유정보다는 한강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이미지가 썩 마음에 든다. 한 편의 책을 읽고 나면 한 편의 그림이 그려지고 그것이 오랫동안 은은한 잔상으로 남게 되는 작품. 나도 언젠간 이런 느낌의 작품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과연 나는 독자에게 어떤 그림을 그리게 하고 싶은 걸까.

*나쓰메 소세키 읽기
1.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453
2.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https://rtmodel.tistory.com/1538
3. 산시로: https://rtmodel.tistory.com/1547
4. 태풍: https://rtmodel.tistory.com/1549
5. 풀베개: https://rtmodel.tistory.com/1555 

#현암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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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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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 우리의 길

정여울 저, ‘헤세로 가는 길’을 읽고


개별적인 모든 상황 속에는 보편성이 숨어 있다. 우리가 낯선 타자의 이야기에도 공감할 수 있는 이유다.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그 무엇. 같은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여울이 걸은 헤세로 가는 길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정여울이라는 고유한 개별자가 걸은 길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이 걸은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관찰, 성찰, 통찰이 작가를 통과하면 글을 남긴다. 그 글은 가끔 독자를 관통하며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아주 가끔 그 생채기는 독자의 생각과 마음에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기어이 독자를 움직이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독자가 작가일 경우엔 또 하나의 글이 탄생하게 된다.

이 책은 독자 정여울이 읽은 헤세의 글들이 작가 정여울의 고유한 삶의 맥락을 통과하며 낳은 감상과 해석이다. 그녀는 헤세가 살았던 공간, 독일과 스위스,를 답사하며 헤세의 흔적을 좇는다. 문자만이 아닌 그 문자들이 작가 헤세를 관통하며 재배열하여 한 편의 글로 재탄생되었던 바로 그 공간에서 그녀는 그녀만의 감상과 해석을 이 책에 담아냈다. 의미야 부여하기 나름일 수 있지만, 헤세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에서, 게다가 그의 작품이 탄생된 바로 공간에서 그의 글을 다시 읽고 해석하며 나름의 글을 써냈다는 것. 헤세로 가는 나름대로의 길을 걸었던 나에겐 이 사실은 이 책을 읽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와 3부는 독일과 스위스에서 헤세의 발자취를 좇으며 남긴 정여울의 단편적인 감상을 담고 있다.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은 그녀의 감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1, 3부가 상대적으로 가벼운 감성적인 에세이 형식을 따르고 있다면, 2부는 전문가적인 서평 형식을 따르고 있다. 독일문학 전공자다운 정여울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교적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헤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네 작품, ’수레바퀴 아래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데미안‘, 그리고 ’싯다르타‘에 대한 정여울만의 해석을 엿볼 수 있다. 참고로, 네 작품에 대한 해석의 공통적인 열쇠는 융의 정신분석학이다. 융을 읽어본 독자라면 공감과 이해에 훨씬 수월할 것이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차 자료를 석영중을 통해 접하고 도스토옙스키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는 정여울을 통해 헤세를 재방문할 수 있었고 그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양한 해석의 만남은 언제나 독자를 더 넓은 지경으로 이끈다. 이 글을 포함한 나의 감상문이나 여러 단편적인 글들도 누군가에겐 도우미이자 길잡이가 되길 소망해 본다. 나의 길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길로 확장될 수 있길 소망해 본다.


* 헤세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https://rtmodel.tistory.com/1552

#아르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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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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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앞에서 미적대는 인생


나쓰메 소세키 저, ‘태풍’을 읽고

태풍은 아무래도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고,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그래서 그것이 한 장편소설의 제목으로 선정된 경우라면 독자는 그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나쓰메 소세키는 왜 이 작품 제목을 태풍이라고 했을까.

거센 태풍의 이미지와는 달리 이 작품엔 충격적인 사건이나 상황이 전무하다. 소설이라는 특별한 세계에선 꽤 흔해 빠진 살인, 자살, 치정, 불치병, 혹은 출생의 비밀도 없다. 뚜렷한 위기, 절정, 해소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전체를 꿰뚫는 스토리텔링도 없다. 작품 평을 하자면 밋밋하다 못해 고요하다고 평할 수밖에 없을 정도다 (한 마디로 재미가 없는 소설이라는 말이다). 단, 이러한 결론은 소설 표면에 드러난 정황으로만 볼 때 그렇다.

그러므로 이 작품 속 태풍의 의미는 등장인물의 외부보다는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등장인물의 내적 갈등은 그들의 인생을 대변할 정도로 깊고 치열하게 그려져 있다. 나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눈도 바로 여기에 머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은 세 명이다. 시라이 도야, 나카노 슌타이, 그리고 다카야나기 슈샤쿠. 모두 문과 출신이다. 시라이는 다카야나기가 학생일 때 이미 교사였던 적이 있을 만큼 연배가 많이 차이 난다. 나카노는 다카야나기와 동기다. 

굽힐 줄 모르는 지조를 문학이라는 학문에 온전히 적용하며 살아온 시라이 도야에게 문학은 곧 삶 그 자체다. 삶은 인간 세상이기에 인간 세상 한가운데에서 치열하게 살아내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자라고 그는 믿는다. 한적한 곳에 여유 있게 앉아 붓이나 놀리는 자를 그는 감히 문학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믿는 대로 생각, 말, 행동에 모순 없이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모순 없이 살아가는 그조차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탓일까. 가난은 그의 평생 동반자였다. 가난은 그의 모순 없는 문학에 대한 지조와 같은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근원적이라 할 수 있는 모순을 불러일으켰다. 먹고사는 문제 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문학자는 가난해야만 하는 걸까. 둘 다 취할 순 없는 걸까.

자발적인 선택으로 흙수저의 길을 당당히 걷는 시라이 도야와는 달리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금수저의 길을 받아들이고 여유 있게 걸어가는 인물은 나카노 슌타이다. 그렇다고 나카노가 철저히 물질적이진 않다. 전형적인 재벌 2세의 모습과도 거리가 멀다. 작품 속에서 나카노는 셋 중 가장 세련되고 사리 분별을 잘하는 청년으로 그려진다. 그는 대학생 때 수재이기도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자발적인 비관주의자이자 스스로 외톨이가 된 다카야나기를 끝까지 챙기는 유일무이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비록 문학에 있어서는 별 열정이 없는 듯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열정 없음의 배경은 곧 그의 재력이라는 것을 독자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아마도 시라이 도야의 세계관으로 바라볼 때 나카노는 진정한 문학자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돈에 의지하여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는 기득권 세력이자 문학을 그 하위에 두고 취미 정도로 삼는 사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정신적으론 시라이 도야와 같은 선상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나카노 슌타이의 여유 있는 삶을 동경하며 둘 사이의 경계에 선 채 스스로를 세상에서 고립시켜 외톨이가 된 인물이 바로 다카야나기 슈사쿠다. 작품은 시라이 도야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다카야나기를 전체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작품을 이해하는 편이 이 작품을 그나마 잘 감상하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시라이 도야를 중심인물로 삼기에 그는 너무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자고로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왼쪽 어깨엔 검은 악마가, 오른쪽 어깨엔 하얀 천사가 앉아 있는 인물의 갈등이 필수인 법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비록 나카노는 시라이 도야의 정반대에 위치한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다카야나기의 눈에는 충분히 그랬을 법하다. 그의 눈에 시라이는 고고한 문학자, 나카노는 여유 있고 멋진 삶을 살아가는 재력가로 비쳤을 테니까. 비판하면서도 부러워하는 존재가 다카야나기에겐 나카노였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여전히 젊어서 시라이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기회가 있었을 테니까.

이 작품은 문학을 넘어서 모든 학문에 적용 가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하다. 학자의 길과 재력가의 길은 결코 정비례 관계에 있지 않다. 물론 훌륭한 학자가 경제적으로 풍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풍족이 학자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아마 모든 학자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태풍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아마도 태풍은 순수한 학자의 자세를 견지한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시대적 흐름, 그중에서도 자본주의 혹은 물질주의를 대표하는, 다시 말해 학문의 순수성을 오염시키고 마치 자본이 학문 위에 군림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하는 시대의 조류를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소설의 말미 시라이가 연설하는 장면에서 이는 도드라진다. 돈을 좇는 사람과 진정한 문학가를 대비시키며 그는 강조했다. 두 영역은 서로 다른 것이며, 절대 돈이 학문 위에 설 수 없다고. 태풍처럼 밀려드는 시대의 조류에 저항해야 한다고. 언젠가는 진정한 문학가의 존재가 돈보다 더 가치 있게 다루어질 날이 도래할 거라고. 

시라이는 과연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진정한 학문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고 나는 조용히 묻게 된다. 시라이의 진정한 문학자를 위한 극단적인 삶의 태도는 자신의 아내에게까지 가난과 궁핍에 시달리게 만들었다는 점은 내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는다. 아내는 문학자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주부인데 말이다. 진정한 학문을 위해서는 아내와 가족이 모두 희생이라고 해야 한다는 말인가. 사실 오늘날 현실을 봐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학자들의 등잔 밑은 상대적으로 밝지 않다. 가족들의 희생 없이 그들의 성공은 불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과학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러한 질문에 대해 늘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적대며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 태풍을 감지했지만 이젠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일까.

*나쓰메 소세키 읽기

1.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453
2.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https://rtmodel.tistory.com/1538
3. 산시로: https://rtmodel.tistory.com/1547
4. 태풍: https://rtmodel.tistory.com/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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