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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늑대 ㅣ 헤르만 헤세 선집 4
헤르만 헤세 지음, 안장혁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평점 :
모든 것을 아우르는 유머
헤르만 헤세 저, '황야의 늑대'를 다시 읽고
언젠가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위기에 봉착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문제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문제를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게 대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문장을 쓰면서 나는 튼튼한 나무와 부드러운 갈대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거센 바람에 온몸으로 저항하던 나무는 툭 부러지고 말지만, 온몸을 낮추고 바람을 타는 갈대는 끝내 살아남는 장면이었다. 재미있게도 7년 만에 '황야의 늑대'를 다시 읽고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가 바로 이 장면이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재독 후 ‘유머’라는 단어가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유머’는 ‘유연함’을 연상시켰고, ‘유연함’은 ‘갈대’의 이미지를 소환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선 헤세가 ‘황야의 늑대’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내가 해석한 유머의 관점에서 조금 풀어볼까 한다.
헤세를 읽으면 자아의 발견과 성찰, 성장과 성숙, 그리고 실현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에서 적잖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헤세를 읽는, 나아가 헤세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일 것이다. 헤세의 작품에서는 자아의 분열과 대립마저도 점진적인 합일로 나아간다. 무언가 흩어져 있던 것들이 모이고 정리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절제되고 우아한 길을 걷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다. 많은 청소년들이나 뒤늦게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모든 이들이 헤세를 사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중 유독 ‘황야의 늑대’는 이런 우아함으로부터 조금은 동떨어진 듯한 인상을 준다. 그래서 읽는 이를 당황스럽게 한다. 헤세의 다른 작품을 읽은 독자들에게도 예상치 못한 묵직한 한 방을 제대로 맞은 듯한 느낌을 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황야의 늑대’는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 작품의 초독과 재독 사이의 7년이란 세월은 단순한 7년이 아니었다. 도스토옙스키의 거의 모든 작품을 두 번씩 읽고 감상문도 쓰고 독서모임까지 경험한 시간들은 물론, 신학과 철학과 인문학 서적까지 수십 권씩 읽고 사유한 시간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네 권의 책을 저술하고 한 권의 번역서를 출간한 시간들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난해하기만 했던 ‘황야의 늑대’가 이번엔 술술 읽혔을 뿐만 아니라 조금은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헤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 유별나다고 여겼던 이 작품도 결국 헤세의 중심 사상, 즉 분열된 자아를 발견하고 성찰한 뒤 합일로 이끌며 성장과 성숙을 이뤄내는 구조적 패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유머'는 헤세가 지향하는 궁극의 종착지에 다다른 자의 모습을 상징한다. 인간은 여러 개의 자아로 이뤄진다. 그 자아들은 성격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며 수명도 다르다.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동일한 한 인간이 가지는 자아의 수도 다르다. 어떤 이는 이런 자아들의 존재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 평생을 살다가 죽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특정한 한 자아에 천착하여 다른 자아들을 모두 제거하며 살아가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늘 두 개 이상의 자아 사이를 오가며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이보다 더 많은 여러 유형이 존재하겠지만, 존재론적으로 인간은 늘 이러한 내적 변화를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내적 성장 혹은 성숙이라고 부르는 여정과도 일치하는데, 보통 혼란, 괴리, 무질서, 분열 등의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갈등의 연속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연륜이랄까 지혜랄까 하는 속성을 마침내 가지게 되는 인간들도 비록 적은 수이긴 하지만 늘 생겨나는데,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이, 헤세의 관점에서 볼 땐, 바로 '유머'라고 할 수 있다. 즉, 헤세에게 유머란 연륜과 지혜를 갖춘 자의 얼굴인 것이다.
그렇다면 연륜과 지혜란 어떻게 갖출 수 있는 것일까? 나이 든다고 해서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은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즉 연륜과 지혜는 적어도 나이 듦의 수동적인 열매는 아니다. 여러 철학들이 다양한 답을 내놓을 테지만, 헤세가 '황야의 늑대'에서 말하고 있는 답은 '합일'이다. 하리 할러 안에 존재하는 시민 자아와 늑대 자아뿐만이 아닌 다양한 이름을 가진 여러 자아들이 모두 한데 모여 그 어느 자아도 소홀히 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서로의 고유한 개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결코 한 자아가 우세해지지 않도록 균형을 이루면서 조화롭고 건강한 한 인간을 이루는 것, 합일. 합일에 이르기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끌어안음'이다. 못난 내 모습도 나를 구성하는 요소임을 인정하는 것, 나아가 그 요소가 바로 지금의 나를 만든 소중한 재료임을 알고 감사하는 것, 그리고 잘난 내 모습도 한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고 교만에 이르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며 끌어안는 행위를 상징하는 표현이 바로 유머일 것이다. 하리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괴테와 모차르트도 꿈에 나타나 던져주었던 메시지, 유머. 하리가 인간 일반을 대변한다고 해석할 때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도 바로 유머라는 것을 헤세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시민도 늑대도 모두 나라는 것. 넉넉이 끌어안으라는 것. 분열과 합일은 성장과 성숙의 일환이라는 것. 이쯤에서 다시 내가 예전에 썼던 문장을 소환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톤을 조금 높여서 말이다. "우리가 위기에 봉착하는 이유는 문제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너무 진지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지함이 아닌 유머다!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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