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떠난 이유, 내가 남은 이유
토니 캠폴로.바트 캠폴로 지음, 노종문 옮김 / 비아토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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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선?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하나님 나라?


바트 캠폴로, 토니 캠폴로 공저, '내가 떠난 이유, 내가 남은 이유'를 읽고


신앙생활을 함께 하다 보면 떠나는 사람도 있고 남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기를 택한 사람은 떠나는 이에게 왜 떠나는지 묻고, 떠나기를 택한 사람은 남은 이에게 왜 남아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런 일화를 한두 차례 이상 듣게 되면 자문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떠난 이는 자신이 왜 떠났는지를 묻게 되고, 남은 이는 자신이 왜 남았는지를 묻게 되지요. 문제는 이 질문이 양쪽 모두에게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계속 묻고 싶지요.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어느 선택이 선이고 악인지 말입니다. 글쎄요.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여전히 상대방을 배제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것을 예수의 가르침 중 하나라고 인정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결론을 내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한 편으로는 진부한 논리 전개로도 읽힐 수 있지만,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이 책 속의 대화는 지금, 여기에서도,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도 여전히 유효하고, 또 충분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을 비방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책 속의 대화 자체가 소중하다는 다소 맥 빠지는 평가를 내리는 데에 그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분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신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뭔가가 아쉬웠습니다. 


아쉬운 게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남은 자'로 나오는 아버지 토니 캠폴로의 입장은 그동안 익숙히 봐 왔던 기독교 변증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근본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답니다. 저는 토니의 입장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가 예수의 신성(하나님다움)과 인성(인간다움)을 설명하며 둘은 다른 게 아니라 동일한 것이며 하나라는 것, 그래서 우리가 인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라는 것을 풀어내는 부분, 그리고 성령의 열매가 사실은 인간다움의 자질들을 나타낸다고 하는 부분을 읽으면서는 감동까지 느꼈답니다. 그러나 나머지 변증들은 제가 바트였다고 가정해도 설득력이 크지 않아 보였습니다. 아마도 저 역시 복음주의 신학책들의 언어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들의 연속으로 느껴졌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토니의 입장을 이해할 뿐 아니라 거부할 마음도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때 잠시 '떠난 자'였지만, 이제 다시 '남은 자'가 된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들 바트 캠폴로의 입장은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가슴으로는 다 이해가 가진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저도 '남은 자' 측에 속해 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신념이 작동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트가 복음주의자였다가 세속주의자, 영적인 자연주의자(표현도 근사하지 않나요?), 세속적 인본주의자로 입지를 바꾼 계기는 이 책에 따르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자전거 사고였습니다. 사고 후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되면서 그는 세 가지 교훈을 얻었다고 합니다. 첫째,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결국 뇌 안에 있다는 것. 둘째,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 그리고 생각보다 일찍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셋째, 지금 이 삶이 내가 가진 전부라는 것, 즉 이번 생이 유일하다는 것, 다시 말해 내세는 없다는 것. 굉장히 진지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모습이 매력적이긴 했지만, 왠지 저에게는 일종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느껴졌습니다. 제가 아는 여러 지인들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하여 바트와 정반대의 길로 더욱 매진하고 있기도 하거든요. 바트는 또한 이런 변화가 자신의 의지적인 선택이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땐 바트는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을 계기로 그동안 쌓아왔던 의심을 비롯한 여러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의 뭉터기들이 한데 모여 세속적 인본주의의 길로 걷기를 선택한 것 같았습니다. 선택한 이후에 논리로 후속작업을 하며 빈틈을 채웠던 걸로 보였습니다. 또한 그가 거의 성경처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19세기 후반의 작가 로버트 잉거솔이라는 점 역시 그의 변증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도 바트의 선택이었겠지요.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의 글을 읽고 신봉하는 것처럼 돌변하는 것, 자기에게 일어난 상황들이 로버트 잉거솔의 책에 있는 논리로 다 설명이 되는 것 같이 느꼈던 것, 이런 걸 확증편향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 바트가 조금만 나중에 태어났다면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서 로버트 잉거솔 말고도 더 많은 지지자들을 만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렇게 되어도 그는 그걸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요. 아무튼 바트의 말들은 유려하게 보였지만 설득력은 모자란 것 같았습니다. 저에게는 말이지요.


두 사람의 차이를 비교 대조 하면서 토론 거리를 찾아내고 곱씹어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이유가 되겠지만, 그것보다 저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신 없이도 선하게 살 수 있는가?",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수 있는가?"입니다. 두 질문은 겹치는 부분도 있겠네요. 책에서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사실 이 질문들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수만 번 생각해 봤던 질문이랍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성적으로 조금 따지면서 대답을 해 보자면, 저 두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네요. 먼저 '선함'의 정의를 짚어야 하고, 다음으론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짚어야 하며,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하위 질문에 대답이 갖춰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 하나하나가 모두 커다란 신학적인 주제들이라 저의 미천한 지식으로는 당연히 뭐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지만 저의 일반론적인 입장은 신 없이도 인간이 보는 관점에서는 선하게 살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보는 관점에서는 선하게 살 수 없는 경우가 존재할 것 같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이 모두 다 이해되지는 않잖아요. 선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고백하면서도 우리 눈에는 때때로 하나님이 선하게 느껴지지 않기도 하니까요. 이런 면에서 바트는 어쩌면 영리하게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마련해 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배제시켜 버리면 선하다는 것의 정의를 그저 인간들의 눈에 맞추면 되는 문제이니까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저의 입장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잖아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인데, 그 통치자를 믿지도 않고 없다고 하는 사람이 그곳에 살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트의 경우는 사랑을 실천하면 마치 신 없이도 선을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지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제가 연재하는 글에 썼던 부분을 발췌해서 아래에 옮겨 봅니다.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 율법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했다. 이웃 사랑이 없는 하나님 사랑은 자기를 쪼개어 산 제물로 드리지 않는, 내용이 없고 형식만 남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가증한 제사와 같다. 이는 종교생활에 다름 아니다. 반면 하나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은 조건적일뿐더러 궁극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에 지속할 수 없고 기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변덕스러울 수밖에 없고 유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발현되어야만 한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다르지 않은 마음가짐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웃에게 어떤 존재일까. 이웃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서 신앙과 일상의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 |


그렇습니다. 바트가 믿는 건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선 인간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바트는 인간의 악함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악함의 희생자들로부터 어찌 하나님이 존재하면 이럴 수 있냐고 따지기는 하지만, 인간이 힘을 합치면 마치 선을 행할 수 있고 사랑도 실천할 수 있는 것처럼 철저하게 인간의 힘을 믿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면서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극명히 보았답니다. 구원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 구원은 외부에서 주어진다는 것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답니다. 


특히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문장은 도스토옙스키 후기 작품 속에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로 다뤄져요.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가 그랬고, '악령'의 스따브로긴과 표뜨르를 위시한 5인조가 그랬으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이반과 스메르쟈꼬프가 그랬지요. 도스토옙스키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신의 부재 속에서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은 곧 혼돈과 파국으로 치닫는 것과 같다고요. 누군가는 혼돈을 자유로 착각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어떤 제한 속에서도 자유를 만끽하기도 하죠. 저는 인간은 후자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만드신 건 하나님이라고 믿고요.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으면서 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이런 면에서 바트는 인간을 너무 맹신하고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하나님 사랑 없이 이웃 사랑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셈이니까요. 바트가 사역하는 세속주의 인본주의 채플에서 행해지는 이웃 사랑이 과연 얼마나 지속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해지네요. 변죽만 울리지는 않을지 염려도 됩니다.


토니와 바트의 합의점은 사랑입니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렇게 정리되고 있어요. 그러나 방법론에서 합의를 본다고 해서 합의가 될까요? 저는 의문이랍니다. 다행스럽게도 바트는 어떤 기적적인 일이 생겨 다시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주저하지 않겠다고 말해요. 이런 점에서 저는 이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토니 캠폴로의 마음에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바트를 무신론자가 아니라 여전히 유신론자 경계에 있는 불가지론자로 보게 됩니다. 그의 행보가 궁금해집니다.


#비아토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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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세상 보이는 하나님
양진철 지음 / 선율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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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장애인들의 교회


양진철 저, '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세상 보이는 하나님'을 읽고


탁, 탁탁, 탁, 탁탁탁… 땅을 두드리는 소리다. 흰지팡이가 내는 구별된 소리. 우리나라에는 주일 아침마다 분주한 주차 안내 대신 이 소리로 가득해지는 교회가 있다. 시각장애인이 전체의 약 칠십 퍼센트를 차지하는 교회, 주일날 지휘자도 지휘봉도 없는 찬양대가 그 어떤 찬양대보다 아름다운 화음으로 찬양하는 교회,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 보이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교회. 이곳은 1981년 시각장애인의 복음화를 위해 세워진 애능중앙교회다.


이 교회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이 책의 저자 양진철 목사다. 그가 처음부터 목사였던 건 아니다. 그 역시 한때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자 탕자였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인 어려움을 어린 시절부터 겪었다. 가정폭력과 부모님의 이혼만 해도 충분히 버겁게 느껴지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파괴된 가정환경 속에서 선천적 발달장애를 가진 채 태어난 남동생을 거의 혼자서 돌보아야 했다.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다. 게다가 고등학생이 되자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았다.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큰맘 먹고 병원에 가서 황반변성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오른쪽 눈은 이미 실명이었고, 왼쪽 눈도 진행 중이라 했다. 앞이 캄캄했다. 이미 충분히 불행했고, 그래도 그 삶을 꾸역꾸역 버티려고 했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떨어졌던 것이다. 차마 나는 공감한다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아마 마지막 안간힘마저도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지 않았을까. 육체적인 눈도 정신적인 눈도 모두 닫히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생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생을 끊는 결단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저자는 살아냈다. 버티고 버텼다. 책에 따르면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는 불교에 의지했다고 한다. 백팔 배는 수도 없이 했고, 장장 아홉 시간이나 걸리는 삼천 배를 하기도 했다. 불교학생회 임원이었고, 고등학생 땐 동국대학교 총장상도 받았으며, 불교재단 스님 장학금도 받았다. 그는 반야심경을 외워야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대학생이 되고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만남이 주어졌다. 친구들 덕분에 CCC 수련회에도 참석하게 되었고, 급기야 시각장애인 교회라고 알려진 애능중앙교회로 인도받게 된다. 그는 애능중앙교회에서 처음 예배 하던 날의 소회를 평생 잊지 못할 날이라고 쓴다. 운명을 믿지 않아도 운명적인 일은 벌어지는 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계획 혹은 섭리라고 읽는다. 그랬을 것이다. 청년 양진철이 애능중앙교회로 인도받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 내지는 운명으로 치부할 수 없어 보인다. 하나님의 계획, 섭리라는 표현 없이는 설명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그날 이후 저자는 교회의 품에 안겨 한 가족이 되어 자라나게 된다. 그러다가 신학을 공부하게 되고 목사까지 된 것이다. 그는 2025년 12월부터 이 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실로 애능중앙교회는 양진철 목사의 어머니였다. 


애능중앙교회에는 수많은 양진철이 있다. 몸과 마음이 무너져 앞길이 막힌 것 같았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길로 인도받게 된 이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시각장애인이다. 한 감각이 소실되면 다른 감각이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그 다른 감각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 영적인 눈도 포함한다는 걸 애능중앙교회의 많은 양진철들은 증거 하는 것 같다. 비시각장애인들은 보이는 세상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잘 보지 못하는데 반하여, 이들 시각장애인들은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도 보이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어차피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어쩌면 육신의 눈은 하나님을 마주할 때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폭풍 같은 환란 속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이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세상 속에서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 이들의 예배와 찬양과 기도가 어떨지 나는 생각만 해도 은혜가 된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이 따위 멀쩡한 두 눈이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 책은 양진철 목사의 성장과정과 함께 애능중앙교회의 소개만 담고 있진 않다. 시각장애인들을 향한 목소리, 시각장애인들을 향한 비시각장애인들의 시각에 대한 목소리들도 담고 있다. 그는 말한다. 시각장애인에게 잘해주려는 마음이 오히려 불편하고 불쾌한 일이 되고 말 때가 많다고. 그러므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사역의 첫 단추는 잘해주려는 마음 이전에 시각장애인과 눈높이를 맞추는 거라고. 그것은 시각장애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묻고 대화하는 거라고. 또한 그들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는 거라고. 불쌍한 사람이라는, 평생 힘들게 살아야 한다는, 마치 격이 낮은 존재인 것처럼 여기는 낙인찍기는 시각장애인들의 가슴에 평생 주홍 글씨는 새기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주위에 시각장애인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 이 글 읽는 독자들은 이런 점들을 꼭 염두에 두면 좋겠다.


저자는 교회공동체에 대한 비전도 제시한다. 교회는 ‘인정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하는’ 곳이어야 하고, ‘인정받는’ 곳이 아니라 ‘사랑받는’ 곳이어야 한다고. 지체의 허물을 판단하기 전에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 허물에 손가락질하기 전에 사랑으로 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덧붙여 산상수훈을 빗대어 이렇게 말한다. 돈이 많은 사람이 복이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이들이 복이 있는 공동체, 권력 있는 사람이 복이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애통하는 이들이 복 있는 공동체, 인맥이 빵빵하고 학벌 좋은 사람이 복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이 복 있는 공동체, 이런 공동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라고. 한 자도 거부할 수 없는 아멘의 말들이다.


저자는 여전히 공부 중이다.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목회와 설교/예전’ 파트에서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할 수 있는 성찬식을 위한 ‘보는 성찬의 예식서’를 기획 중이다. 정말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나도 눈가리개를 하고 성찬식에 참여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그러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시각장애인들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타자를 향한 공감을 하나님 나라의 공의로 여겨왔던 내게 장애인은 그 타자에 구체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나에게 다시 영점을 재조정하게 해 주었다.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은 약 이십오만 명이고, 복음화율은 약 일 퍼센트 정도에 그친다고 한다. 애능중앙교회와 양진철 목사와 수많은 양진철들의 존재 자체가 감사하다. 두 눈을 뜨고도 하나님을 잘 보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런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라 생각한다. 강추한다.


#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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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믿어주는 일
미야모토 테루 지음, 이지수 옮김 / 프시케의숲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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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함의 깊이

미야모토 테루 저, '그냥 믿어주는 일'을 읽고

'환상의 빛'을 읽고 한동안 먹먹했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과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이 같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생각하게 했던 작품이었다. 짧은 중편소설이었지만 단편소설이 미처 주지 못하는 완성감과 무게감, 그리고 장편소설이 해내지 못하는 압축감이 묘하게 어우러져 잔상을 오래 남기는 작품이기도 했다. 작품 하나로 작가가 좋아지는 일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전작을 읽고 싶어질 정도라면 더욱더.

5년 전 이 무렵 '생의 실루엣'이라는 에세이집이 출간되었다. 나는 미국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즉각 구매하여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가 혹은 시인이 쓴 에세이는 나에겐 반드시 읽어야 하는 최상위 목록에 오른다. 언제나 읽을 것들이 밀려 있지만 자발적으로 새치기를 허용하는 몇 안 되는 예외에 해당된다. 에세에서는 소설이나 시에서 듣지 못한 작가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를 알 수 있고 알게 되기 때문이다. 좋아하면 알고 싶어지는 마음 같은 거랄까.

'생의 실루엣'이 일본에서 2014년에, '그냥 믿어주는 일'은 1983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두 에세이집 사이에는 약 30년이란 세월이 존재한다. 1947년생인 미야모토 테루는, 그러니까 36세 때 '그냥 믿어주는 일'을, 67세에 '생의 실루엣'을 출간한 것이다. 작가에게 30년은 300년이 될 수도 있는 세월이기에 상대적으로 여물지 않은 미야모토 테루의 문장들을 읽게 될 것 같아 나는 이 책을 바로 읽을지 말지 잠시 망설였다. 기우였다. 살짝 제목에 낚인 면도 없진 않지만, 내가 알고 느꼈던 그의 문장들은 여기에도 그대로 담겨 있었다. 

흔하고 사사로워 보이는 것들로 직조한 그의 문장들은 결코 흔하지도 사사로워 보이지도 않는다. 내가 느낀 미야모토 테루의 문장들은 정갈하면서도 우아하다. 사실 나는 '환상의 빛‘을 읽고 난 직후에는 그가 여성인 줄 알 정도였다. 물론 나의 선입견 혹은 고정관념의 산물이겠지만, 내가 알던 남성의 문체라고 할 수 없을 만큼이었다. 출판사의 책 소개에서처럼 서정성을 품고 있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미야모토 테루가 서른 중반에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쓴 회고록 같은 역할도 한다. 소설가의 길을 걷기 전의 인생 (어린 시절 이야기, 어머니와 아버지 이야기 등), 결코 합리적이라 할 수 없을 무모한 선택으로, 마치 운명을 받아들이듯, 소설가의 길로 접어들었던 사연, 그리고 꽤 이른 나이에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 된 사연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이 담겨 있다. 보통 인생을 관조하면서 본인만의 어떤 철학이랄까 지혜랄까 하는 것들을 문장 속에 담아내어 독자들에게 울림을 주게 되는 건 작가가 지긋이 나이 든 경우가 많은데, 놀랍게도 미야모토 테루는 서른 중반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적어도 오륙십은 된 사람이 쓴 것 같은 문장을 구사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문체와 문장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소설가로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일본에서 작가로서 가장 영예로운 상을 받았다. 1977년에 ‘흙탕물 강’으로 다자이 오사무 상을, 이듬해인 1978년에 먼저 쓰기 시작했던 ‘반딧불 강’으로 아쿠타가와 상이었다. 그의 불우했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약한 몸으로 병치례를 하며 살아왔던 그의 인생에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이 책이 1983년에 출간되었으니 그가 소설가로서 사회적 명성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라 그런지 두 개의 상을 받기까지와 받고 난 이후의 이야기들도 여러 번 중복되어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에피소드들에 천착하지 않는다. 그는 인생의 중심을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그의 과거와 현재를 음미하며 관조하고 독자로 하여금 운명을 생각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게 한다. 평범한 일상을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것 같으나 읽고 나면 무언가 아련함이 남고 책을 덮고 잠시 멈춰 생각에 잠기게 하는 문장들을 구사하면서 말이다. 

’흙탕물 강’과 ’반딧불 강’을 주문했다. 아무래도 읽어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말겠다는 어떤 절박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 나이 이제 오십이 다 되었는데 서른 중반의 미야모토 테루의 깊이도 가지지 못한 것 같은 내 모습이 부끄러운 밤이다. 나도 아련함의 깊이를 체득하고 싶다.

#프시케의숲
#김영웅의책과일상 

* 미야모토 테루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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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
김정아 지음 / 샘터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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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한 전도사


김정아 저,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를 읽고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 출간 수개월 전 보도된 한 신문기사를 기억한다.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독자, 아니 덕후로서 내게 그 신문기사는 충격, 아니 경이로 다가왔다. 한 사람이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을 모두 완역하다니! 그것도 10년이나 걸려서! 입이 벌어졌다. 잠시 가짜 뉴스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잠시 후 사실인 걸 확인하고 한동안 멍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번역된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은 여러 출판사 버전이 존재한다. 번역가는 제2의 저자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한 사람의 목소리로 통일성이 부여된 김정아 박사의 번역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또한 4대 장편은 각각 독립된 작품이기도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철학과 신학, 경험과 깨달음이 출간 순으로 깊고 풍성해지면서 발전해 나간다는 점, 그리고 앞의 작품이 뒤의 작품의 배경이 되고 영감을 부여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10년간 4대 장편을 출간 순으로, 그것도 출판사의 다른 제안을 거절하면서까지, 도스토옙스키가 걸어간 그 새벽에 오롯이 녹아들어 번역을 감행하고 완성해 냈다는 것은 감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전문 번역가 혹은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면 불가능한 과업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말할 수 있다. 김정아 박사는 진짜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구나! 나보다 백 배 천 배 찐 덕후구나! 


김정아 박사는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출신이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추천사를 흔쾌히 써주셨던 로쟈, 이현우 서평가의 동창이기도 하다. 박사 학위는 시카고 어바나 샴페인에서 ‘죄와 벌‘에 관한 논문으로 받았다. 귀국하여 강사로 활동하다가, 놀랍게도, 패션계 CEO가 된다. 그녀는 지금도 이 어울릴 법하지 않은 두 정체성을 모두 온전히 소화하고 있다. 아니,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니 적어도 세 정체성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화려하고 독특하며 아주 드문 경력을 보유하고 있는 번역가인 셈이다. 


그러나 내가 마음 깊이 존경을 담아 감동한 건 그녀의 경력이 아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서도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갔고,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와 고통을 극복해 가며, 돈이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변치 않는 마음으로 그의 글을 읽고 번역했으며, 마침내 4대 장편을 완역하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경이롭다는 표현 말고 달리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10년의 기록이다. 제목은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라고 되어 있지만, 이 책은 일기를 넘어선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사랑 고백으로 읽었다.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녀의 사랑은 더욱 깊이 느껴졌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그가 남긴 글을 사랑하는 것이다. 김정아 박사는 러시아 문학 전공자로서 도스토옙스키가 사용한 단어 하나하나를 우리말로 옮기며 그의 의도를 왜곡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것이 그녀만이 할 수 있었던 도스토옙스키 사랑 방법이다. 그녀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가장 성실하고 충실한 번역은 '원문의 숨결은 해치지 않으면서, 언어의 깊이는 끝까지 따라가는 번역'이라고. 그리고 그녀는 이 과업을 달성했다.


인생은 누구를 만나는지에 따라 방향이 결정되기도 하고 흐름이 바뀌기도 한다. 김정아 박사 역시 4대 장편 번역 의뢰를 지만지 출판사 대표로부터 제안받게 되면서 이 과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에피소드와 김정아 박사가 처음엔 단칼에 거절했다가 승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이 책에 잘 쓰여 있다. 또한 4대 장편을 번역하기 이전, 그러니까 그녀가 IMF 어려운 시절에 미국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소화할 때 겪었던 이야기들, 어떻게 패션계 CEO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번역을 모두 마치고 독자들의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대한 소회에 대해서도 잘 소개되어 있다. 러시아에서도 관심을 기울일 만큼 이 번역 작업은 역사적인 기록이기에 도스토옙스키를 잘 모르는 독자라도 이 에피소드들은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또한 4대 장편을 번역하면서 각 작품과 함께했던 나날들에 대한 소회와 수십 번 읽었을지도 모를 그 본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도스토옙스키를 더욱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 이야기들은 한 작가를 사랑하여 인생을 바쳐 번역한 한 사람의 치열한 인생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을 이미 읽어본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의미가 있다. 각 작품에 대한 짤막한 해제라고 할 수 있을 법한 글이 제법 담겨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은 단지 번역가의 개인적인 일기에 그치지 않고 작품의 부분적 해설서를 겸비하고 있는 것이다. 


출간된 직후 구입해서 하루 만에 다 읽었다.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하며 김정아 박사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샘터 

#김영웅의책과일상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2. 백치: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3. 악령: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4. 미성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6. 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7. 가난한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8. 분신: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9. 지하로부터의 수기: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10. 노름꾼: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18. 상처받은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19. 악몽 같은 이야기: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20. 악어: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35. 온순한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1723

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37. 영원한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823

38.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https://rtmodel.tistory.com/1825

39. 쁘로하르친 씨: https://rtmodel.tistory.com/1827

40. 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867

41. 여주인: https://rtmodel.tistory.com/1917

42. 뻬쩨르부르그 연대기: https://rtmodel.tistory.com/1930

43.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by 안나 도스토옙스카야): https://rtmodel.tistory.com/1995

44.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 (by 김정아): https://rtmodel.tistory.com/2175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2. 분신: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4. 상처받은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5. 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6. 지하로부터의 수기: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7.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8. 노름꾼: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9. 백치: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10. 악령: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11. 미성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12.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에 수록


* 도스토옙스키 관련 저서

1. 닮은 듯 다른 우리: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4551437

2.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1616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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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서머스 1~2 세트 - 전2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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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독자, 모든 작가의 필독서


스티븐 킹 저, ‘빌리 서머스’를 읽고


글쓰기를 시작한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읽는 책, 그중 누군가에겐 글쓰기 교본으로 자리 잡게 되는 책, 만약 글쓰기 책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아마도 가장 많은 표를 받게 될 것 같은 책, 출간된 지 26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글쓰기 책 탑 쓰리 (누군가에겐 부동의 넘버 원) 안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는 책, 바로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다. 


1947년생, 올해 79세를 맞이한 스티븐 킹은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린다. 한국에서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공포소설의 거장 정도로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소설은 열 편이 훌쩍 넘을 정도로 영화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아니, 이것도 스티븐 킹이었어?"라면서 놀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를테면, '쇼생크 탈출', '미저리', '그린 마일', '스탠 바이 미', '돌로레스 클레이븐' 등이다. 대부분 흥행과 비평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아마도 현대소설 작가로 스티븐 킹만큼 문학적 성공과 사회적 성공을 모두 거둔 사례는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싶다. 읽기와 쓰기에 관심 있는 한 사람으로서 스티븐 킹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건 행운이다.


고전문학을 좋아하는 내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게 되면 어떨지 궁금했다. 그의 숱한 작품들 중 여러 권을 도서관에서 훑어보기만 했을 뿐 한 번도 진지하게 완독 한 적이 없었다. 그의 첫 작품으로 '빌리 서머스'를 고른 건 우연한 기회에 전혀 상관없는 다른 세 사람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던 탓이다. 연휴 마지막날 집어 들었지만 이틀 만에 다 읽어 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빨려 들어가며 읽었다는 말이다. 동시에 감탄을 연발하면서 읽었다는 사실을 꼭 언급해야 한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나 장면들을 처리해 가는 방식, 긴 내러티브를 지루하지 않게 빌드업해 가는 방식, 그런 서사를 끌고 가면서도 인물 내면을 독자들이 공감하고 느낄 수 있도록 묘사하는 방식,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을 선보이는 방식까지, 글 쓰는 사람 눈에는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글쓰기 교본의 예문 혹은 실전 편으로 보일 만큼 탁월한 작품이었다. 독자로서 읽어도, 작가로서 읽어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작품이라 자부한다.


빌리 서머스는 청부살인업자다. 저격수다. 암살자다. 킬러다. 그러니까 어둠 속에서 일하는 존재다. 작품 안에서도 그의 본업에서 완벽한 기술을 선보인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도 그로부터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고 그의 내면의 고뇌와 따뜻한 가슴에 공감을 하게 될 것이고, 어느덧 그의 편에 서서 그를 응원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의 돈벌이 방식이 그를 정의하지 못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입고 손이 근질근질하지만, 이 작품 역시 아무래도 현대소설이라 스토리 스포일러는 치명타일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진 않겠다. 서사와 묘사, 둘 다 탁월하면서도 감동까지 주고, 동시에 글쓰기에 관심 있는 독자들, 작가들에게 훌륭한 소설 쓰기의 실례를 보여준 스티븐 킹에게 박수를 보낸다. 아… 앨리스의 결말이 진짜 결말이었다면… 잔상이 오래 남을 것 같다.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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