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세상
김양현 지음 / 한국NCD미디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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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 읽고 쓰기의 소중한 열매


김양현 저, '책으로 보는 세상'을 읽고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저자도 그렇다. 김양현 목사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위기를 맞이했다. 인생이 휘청거렸고, 그는 가족을 데리고 제주를 향했다. 곧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던 차에 코로나19가 터졌다. 이번엔 경제적인 환란까지 겹쳤다.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목사로서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쉽게 상상하기 힘들다. 제주는 그에게 유배지였던 것일까.


그는 코로나19 시기에 귀인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알 수 없는 신비로 예기치 못한 순간 만남의 축복을 허락하시는 분이다. 현재 과신대 이사장인 팽동국 교수를 만나게 되었고, 덕분에 읽고 쓰는 삶이 이미 일상이 되었던 그는 과신뷰에 연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한국 NCD 미디어 대표 김한수 목사와의 만남이 주어지고 과신뷰에 연재했던 글을 첫 책 '영화로 보는 세상'으로 펴낼 수 있게 되었다. 설상가상, 풍전등화, 누란지세의 위기로 다가왔던 코로나19 기간이 그에겐 다시 일어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축복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김양현 목사의 인생을 단 몇 줄로 요약하는 것 자체가 무례한 일이겠지만, 이 짧은 한 단락을 쓰면서도 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인도하심을 보며 그분을 더욱 신뢰하는 마음이 단단해짐을 느낀다. 김양현 목사는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다.


그의 지독한 읽고 쓰는 성실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달란트로 작용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는 최근 라디오 방송에서 '책소목 (책을 소개하는 목사)' 코너를 맡아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 방송에서 소개한 책들 중 일부를 정리하여 엮은 결과물은 그의 두 번째 저서 '책으로 보는 세상'이 되었다. 나는 그의 친필 사인이 담긴 두 저서를 모두 가지고 있다. 읽으면서 즐거웠고, 형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읽고 쓰는 유전자가 있다면 나 역시 그의 동생이라 하기에 부끄럽진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이 만남이 부디 선한 열매들을 맺고 사람을 살리는 데 귀하게 쓰임 받길 간절히 기도한다.


'책으로 보는 세상'은 크게 두 챕터로 이뤄진다. 1부는 '성경과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비신자와 새신자를 주 대상으로 하는 책들을 소개한다. 신학/신앙 서적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쉽게 접근하고 이해를 돕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자와 새신자가 읽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나 같은 헌(old)신자가 읽어도 충분히 좋았다. 읽고 싶었던, 혹은 읽으려고 사두었다가 미처 읽지 못했던 책들이 몇 권 있었고, 이미 읽은 책들도 몇 권 있었다. 저자의 신학과 철학, 그리고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해석한 책의 요점들을 읽으며 해석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었다. 책 한 권을 간결하고 명료하게 정리하는 데에 저자는 탁월한 능력을 소지한 것 같다. 


2부는 '청소년과 문학'이라는 제목으로 기독교 관련 문학(소설)들 위주로 소개한다. 우리가 잘 아는 엔도 슈사쿠나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가 절반을 차지하고, 청소년의 현장을 담은 책들과 제주 현지의 역사와 관련된 책들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고전과 현장을 고루 담은 것이다. 이 챕터 역시 1부와 마찬가지로 대화체로 되어 있어, 읽고 있노라면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부담 없이 읽어나가며 소개되는 책들에 관심을 가지고 읽고 싶어지는 글들이 가득하다. 


기독교인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책과 영화에 관심만 있다면 김양현 목사의 두 저서를 적극 추천한다. 


#한국NCD미디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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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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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질감과 이질감


권여선 저, ‘각각의 계절‘을 읽고


수년 전에 출간되었고 이미 다른 지면에 실렸던 일곱 편의 단편소설의 모음집이지만, 내겐 권여선 작가의 첫 책이다. 대표작으로 보이는 첫 소설 '사슴벌레식 문답'은 단편만의 매력을 느끼기에 완벽한 작품이었다. 첫 권여선의 글이었음에도 나는 단번에 저자가 탁월한 스토리텔러이자 치밀한 설계자라는 사실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어디로 들어와?'라는 질문에 '어디로든 들어와'라는 답으로 이어지는 대화의 삽입은 화자와 저자의 의도를 넘어 인간 일반의 심리와 감정을 다층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열쇠 혹은 저자의 영리함이 돋보이는 치트키로 보였다. 또한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장편에 비해 단편이 갖는 특유의 어정쩡한 미완성성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완성도가 탁월한 소설이었다. 권여선 작가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첫 작품을 포함하여 나머지 여섯 단편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노년에 접어든 여성이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 서치를 해 보니 권여선 작가는 1965년생, 현재 예순을 갓 넘긴 나이다 (나랑 띠동갑 누님이시다ㅋ). 어떤 작품을 쓰더라도 작가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들, 이를테면 시대와 문화라는 키워드로 압축할 수 있는 정서, 사상, 유행 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이 책에 실린 일곱 단편 모두에서도 저자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이 주요한 목소리를 낸다. 이 점은 한 편으로 내게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게 해 주는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론 1977년생 남성인 내게 약간의 이질감도 선사해 주었다. 특히 586 세대 특유의 정서와 여성이라는 점은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인지적인 방법 이상으로 공감할 수 없었으므로 권여선의 작품들을 온전히 음미하기에는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서 노년의 여성이 주로 상대하는 사람 역시 주로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여성들끼리만 느낄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감정 혹은 정서들이 작품 전반에 진하게 배어 있어서 남성 독자인 나는 일종의 소외감이랄까 하는 벽을 느껴야만 했다.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이 책을 단숨에 다 읽고 이렇게 감상문까지 남기게 된 까닭은 저자가 충분히 깊고 세밀하게 보여준 인간과 인생의 보편성 때문이다. 누군가의 죽음, 그 죽음 배후에 연루된 사람과 이해하기 힘든 상황들, 분노와 체념, 여전히 기억 저편에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들, 알다가도 모르겠는 인간관계의 신비, 그리고 나이 들면서 자연스레 나타나는 여러 징후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그것을 받아들이고 들여야만 하는 덤덤함까지, 저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면서 맞닥뜨리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러나 말이나 글로 쉽게 담아내기 어려운 인생의 조각들을 미세하고 예리한 관찰자의 눈으로 포착하여 텍스트로 변환시킨다. 권여선 작가의 소설가로서의 관찰력과 그것을 내면적으로 소화하는 성찰력, 그리고 그것들을 기반으로 하여 이끌어낸 탁월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 바로 이 단편집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점에서 저자의 글은 후자에 무게를 둔 것처럼 느껴진다. 아니, 특수성으로부터 충분히 보편성을 끌어내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할까, 보편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특수성의 사례를 조금 과하게 사용했다고나 할까, 책을 다 읽고도 내게 남은 이질감이 여전히 걸리적거린다. 그의 다른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도 읽어 봐야겠다.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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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책방은 커피를 팔지 않는다
이지민 지음 / 정은문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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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승부를 보는 책방이 많아지기를


이지민 저, ‘브루클린 책방은 커피를 팔지 않는다’를 읽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책방에 대한 로망이 있을 것이고, 책방에 대한 좋은 기억들도 하나둘씩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온라인으로 책을 손쉽게 구매하고, 읽고, 팔기까지 하는 이 시대에 오프라인 책방이 갖는 존재감은 비단 소중한 향수를 넘어 지켜야 할 사회적 자산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미국에서 11년을 살았고, 한 아이를 키워본 한 명의 아빠로서 나는 책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미국과 한국의 차이를 조금 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아이의 손을 잡고 꼬박꼬박 동네 도서관에 들려 여러 권의 책을 빌려서 매일 밤 베드타임 스토리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가슴 한 편이 아련해진다. 내 아들은 킨더에 들어가기 일 년 전에 프리킨더에 다니며 단체생활을 시작했다. 만으로 네 살 무렵이었다. 태어난 직후부터 베드타임 스토리를 일종의 의식처럼 해왔기 때문인지 아들은 책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없었다. 


미국 학교 시스템의 기본은 듣기, 읽기, 말하기, 쓰기다 (어려운 수학 문재 풀기가 아니다). 프리킨더부터 시작되는 이 일련의 활동들은 대학에 가서도 지속되고 강화된다. 한국에서 교육받은 아이들과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근본적인 차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나는 이 차이가 늘 아쉽다. 단답형, 정답만을 요구하는 교육, 토론과 대화가 부재한 자리에 떡 하니 들어앉은 암기식 교육 문화는 시대착오적이며 개선해야 할 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책은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저자가 일곱 살 딸과 함께 동네 책방들을 다니며 쓴 책방 소개서이자 책방에 대한 러브레터다 (저자의 일상과 책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레 소개된다). 위에서 내가 언급한 미국의 읽기 문화를 고려하면 미국 동네책방이 한국 동네책방보다 힘이 있고 생존에 유리할 거라는 점은 아마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도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말하자면 브루클린 책방은 커피를 팔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이미 미국 사람들의 오래된 읽기 문화와 책을 대하는 정서가 우리와는 현저히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커피를 팔지 않았기 때문에 브루클린 책방이 살아남은 것처럼 이 책을 읽어서는 곤란하다. 인과관계를 반대로 생각해야 옳다. 


이 논리는 커피나 빙수, 과자나 캔디, 그리고 여러 굿즈를 판매하면서 책방을 운영하는 한국 책방의 생태계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도 된다. 요컨대 한국 책방은 커피를 팔아도 생존 확률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브루클린 책방은 커피 따윈 팔지 않아도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단순히 커피를 팔고 안 팔고에 대한 상업적 전략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과 미국 사람들의 읽기와 책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한국 책방에서도 커피 같은 부수적인 것들이 아닌 책만으로 승부를 보는 모습을 보길 원한다. 브루클린 책방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동시에 브루클린 책방들도 생존 여부를 늘 고려하고 있다는 현실을 언급하는데, 이는 미국 역시 동영상과 쇼츠, 스마트폰과 온라인 매체 등으로 소급되는 이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보다 느릴 뿐 미국도 서서히 오프라인 책방의 존재감이 이전과 달리 소멸 중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곧 커피를 팔고 굿즈를 팔며 손님을 유인하는 브루클린 책방도 속속들이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책과 독서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 다르다고 해도 그들 역시 시대의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역시 저자와 동일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 먼저는 오프라인 책방에 대한 향수와 좋은 기억들 때문이다. 그리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으며 가방 속에 들어가 어디든 나와 함께 하는 책이라는 실체의 존재감을, 결코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 고유한 가치를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사랑하고, 지켜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간절히 바란다. 브루클린 책방들이 앞으로도 커피를 팔지 않아도 유지될 수 있기를, 또한 한국 책방들도 기적처럼 부활하여 같은 길에 설 수 있기를. 


#정은문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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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유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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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중한 자유: 자아를 찾고 지켜내기


슈테판 츠바이크 저, ‘위로하는 정신‘을 읽고


이 책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미완성 유작 중 하나이며, 머나먼 타국 브라질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그가 어떤 상념들에 잠겨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츠바이크는 유럽의 16세기를 자신이 처한 20세기와 데칼코마니로 보았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자라나기 시작한 개신교는 중세 천 년을 지배해 온 가톨릭과 맞섰다. 같은 그리스도교이지만 서로 믿음과 관습이 다른 두 집단은 서로를 배척했고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낭자한 전쟁을 오랜 기간 치렀다. 16세기 후반의 잉글랜드의 격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대립, 프랑스를 피로 물들인 위그노 전쟁, 그리고 스페인 절대주의에 맞서 일어난 네덜란드의 전쟁과 독립 등이 모두 종교전쟁의 성격을 띤다. 종교전쟁은 신앙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지닌 집단적 광증의 표현이라는 이 책 번역가의 문장은 츠바이크가 바라본 16세기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사랑과 평화를 설파하는 그리스도교를 위해 서로를 죽이고 전쟁까지 치렀다는 역사적 사실은 시대와 인간과 종교의 모순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츠바이크는 이러한 16세기와 20세기의 공통점을 관용의 부재, 그리고 나와 다른 신앙이나 신념을 가진 상대방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키워드로 해석한다. 집단광증의 시대라고 볼 수 있는 그 시대에도 그러나 관용과 타협과 온건함을 옹호하고 끝까지 실천하려 노력했던 인문주의자가 있었다. 바로 에라스무스, 카스텔리오, 몽테뉴 같은 인물이다. 츠바이크는 16세기에 활동했던 이들로부터 자신이 처한 20세기의 문제 (인종이념에 바탕을 둔 제2차 세계대전)를 해결하는 실마리 혹은 희망을 찾으려 했던 것 같다. 그는 이들을 자신의 스승이자 동지로 여겼다고 한다. 신념이 만들어낸 전쟁을 종식시키고 싶었던 츠바이크의 절박한 심정이 느껴진다.


이 책은 츠바이크가 쓴 몽테뉴의 미니 평전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몽테뉴의 탄생 이전부터 그의 가문이 어떻게 평민에서 귀족으로 승격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책을 여는데, 츠바이크의 설명에 따르면 몽테뉴는 그야말로 모든 게 다 갖춰진 상황에서 시의적절하게 태어난 운을 거머쥔 인물 같았다. 즉 몽테뉴의 고유하고 탁월한 능력과 자질만이 아니라 시대를 잘 타고난 그의 운명을 그가 이룬 업적과 행보들을 평가하고 해석할 때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책의 부제는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이다. 원제에는 없는 표현 같은데 아마도 한국 번역본에서 출판사가 붙인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부제의 적절성에 동의가 되었다. 그렇다면 신념이 만들어낸 전쟁이 종식되길 그토록 원했던 츠바이크가 몽테뉴로부터 얻은 힌트로써 그의 체념과 물러섬을 꼽았다는 것인데, 이게 무슨 말일까?


머리말을 제외한 총 일곱 꼭지로 이뤄진 이 책에서 츠바이크의 초점은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그리고 여섯 번째 꼭지에 있다고 보인다. 각각의 제목은 '자아를 찾아서', '자신만의 보루 지키기', '여행'이다. 이 세 꼭지를 '자아를 찾아 지켜내기'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는 츠바이크가 몽테뉴로부터 얻은 힌트인 체념과 물러섬의 자세와 직결되는 것으로써 집단광증의 시대에 맞서서 관용과 타협과 온건함과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한 방법이 바로 나를 찾아내고 제대로 알고 또 지켜내는 것과 같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아마도 츠바이크는 인간 본성에 깃든 선함이랄까 하는 인간다움은 시대의 조류에 생각 없이 휩쓸려가는 광기가 아닌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여 각 개인의 고유하고 고귀한 개성을 발현하는 동시에 그렇게 생겨난 풍성한 하모니 안에 내재해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자아를 찾아 지켜내는 것을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자유로 보았던 것 같다. 다음 문장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단 한 가지만이 잘못이고 범죄다. 이 다양한 세상을 학설이나 체계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것, 다른 사람을 자유로운 판단과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 자기 안에 있지 않은 것을 강요하려 하는 것이야말로 잘못이고 범죄다. 이런 사람들이 자유에 대한 경외심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정신적 독재에 미친 자들, 자기들이 얻은 새로운 것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옳은 진리라고 우기면서 자기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십만 명의 피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사람들보다 몽테뉴가 더 미워한 것은 없었다."


자기만의 고유한 개성, 생각을 가지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체감하게 된다. 지금 내가 사는 21세기는 몽테뉴의 16세기나 츠바이크의 20세기와는 사뭇 다른 시대이지만, 집단의 광기는 크기와 정도가 다를 뿐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타자의 개성을 묵살하고 파워 게임으로 사람들을 조종하며 자신의 세력을 부풀리는 인간들 역시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그런 시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츠바이크가 몽테뉴로부터 찾아낸 체념과 물러섬, 즉 자아를 찾고 지켜내는 것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알고 지켜내야 할 자유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또한 내가 먼저 그 자유를 알고 누리지 못하면 타자의 자유 역시 똑같이 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유유 

#김영웅의책과일상 


*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615 

3.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625 

4. 과거로의 여행: https://rtmodel.tistory.com/1652

5. 체스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797

6.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https://rtmodel.tistory.com/1923

7. 위로하는 정신: https://rtmodel.tistory.com/2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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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질문이 있었다
송민원 지음 / 복있는사람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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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아닌 질문으로 깊고 풍성한 해석을


송민원 저,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를 읽고


이 책은 답을 얻기 위한 책이 아니라 질문을 하는 책이다.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의 패러디인 이 책의 제목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는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저자 송민원의 낯설게 읽기, 혹은 다르게 읽기, 혹은 풍성하게 읽기, 혹은 삐딱하게 읽기의 관점이 잘 드러난 것이다. 신학교에 발을 디딘 적도 없는 아마추어 평신도 신학도인 나는 지난 10년간 성경신학 관점에서 써진 수십 권의 신학책들을 읽었다. 또한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정회원이자 한 명의 그리스도인 생물학자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특별히 창세기 해석에 관한 책들은 더 많이 접했다. 과학과 신학 모두의 명예를 심각하게 실추시킨 창조과학자들의 주놀이터가 창세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이 보여주는 창세기 해석 중 일부는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성경을 정답기록지로 읽고 또 읽기를 원하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신념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창세기 해석이 늘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이 이전보다 좀 더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지 않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의외로 빈틈이 많을뿐더러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성경에 대한 이해는 성경 원문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주류 신학자들의 전통적인 (어쩌면 보수적인) 해석에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나에게는 굉장히 신선하고 흥미로웠으며, 더욱더 깊고 풍성한 창세기 읽기를 할 수 있게 되어 반가웠다. 


이 책에서는 창세기 여러 본문들에 질문을 던지면서 전통적인 수직적 읽기와 비교하여 많은 독자들이 접해보지 못했을 수평적 읽기를 소개한다. 수직적 읽기는 하나님과 땅과 인간의 수직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이 하나님 명령을 잘 지켰는지 그러지 못했는지에 대한 주제들이 포함된다.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의 교만은 죄로 규정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간의 겸손은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 덕목으로 규정된다. 반면, 수평적 읽기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창조세계의 관계에 더 주목한다. 우리가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겐 어떤 책임과 역할이 있는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두 가지 읽기 중 어느 것 하나가 옳고 틀린 건 아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둘 다 병행하여 성경을 읽어나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신앙인의 자세일 것이다. 


저자 송민원은 이러한 두 가지 읽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창세기 본문 6군데를 대표적으로 소개한다. 창세기 1-3장으로부터 '인간은 왜 창조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창세기 3-5장으로부터 '죄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소개하고, 창세기 6-9장으로부터 '홍수는 왜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을, 창세기 10-11장으로부터는 '바벨탑은 왜 무너졌는가'라는 질문을, 창세기 18-19장으로부터는 '소돔과 고모라는 왜 멸망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수평적 읽기의 필요성과 적법성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수직적 읽기의 사각지대를 비추며 그동안 모호하거나 모른 체 덮어두었던, 혹은 질문조차 하지 않았던 부분까지 발굴하여 기존의 창세기 해석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한다. 그리고 모든 본문을 대할 때 텍스트뿐 아니라 콘텍스트, 그리고 그것들을 읽는 능동적 주체인 나 자신까지 돌아보며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평면적이 아닌 입체적으로 읽도록 요구하며 또 그렇게 시전을 해 보인다. 우리는 모두 다 성경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빈틈 속으로 파고들어 상상력을 발휘하고 앞뒤 문맥과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의도 등을 파악하여 많은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저자가 알려준 세 가지 잣대, 즉 텍스트, 콘텍스트, 나 자신을 살펴보며 성경을 읽어나간다면 바르고 건강한 성경 읽기를 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복있는사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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