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 호명의 철학자 강남순 교수의 철학 에세이
강남순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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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잊고 있던 "행복"할 권리


강남순 저,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를 읽고


나를 알고 타자를 알고 세상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가꾸기 위해서 필요한 건 용기다. 그 용기가 발휘된 행복을 저자는, 자크 데리다의 방식을 따라, 인용부호 속에 넣은 "행복"이라 부른다. 행복과 "행복". 전자가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이 무감각해질 정도로 상투적이고 진부한 의미를 갖는다면, 후자는 그 상투성을 넘어 재개념화 되고 재해석된 진정성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삶에서 추구해야 할 건 행복이 아니라 "행복"이다. 우리 모두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저자가 전작들을 통해 줄곧 이야기해 온 철학을 그대로 반영하는 삶이다. 타자의 감옥에 갇혀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가는 삶이 아닌 비판적 성찰을 통해 삶의 의미를 묻고, 낮꿈을 꾸며, 한편으로는 (on the one hand) 한계 상황 앞에서 좌절과 절망에 사로잡히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on the other hand) 바로 그 한계로 인한 좌절과 절망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삶의 의미를 재인식하고 '나로 살아있음'의 소중함과 '지금, 여기'의 소중함,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이웃의 소중함을 깨닫는 실존적 자각과 그에 따른 실천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들을 나와 타자와 세상과 함께 마침내 치열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아내는 삶이다. 


오랜만에 저자의 글을 책으로 읽었다. 언제나 한결같지만 결코 똑같지 않고, 너무 당연하지만 결코 진부하지 않으며, 항상 도전이 되고 위로가 되며 희망이 생기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나는 잠시 행복한 회상에 잠길 수 있었다. 저자의 철학과 글쓰기에 매료되어 그의 전작 읽기를 시도했던 시절이 떠올랐고, 페이스북으로 저자의 포스팅을 기다리며 읽고 또 읽고 가슴속에 담아두던 시절도 떠올랐으며, 엘에이에서 오프라인 만남으로까지 이어져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포옹까지 하던 순간들도 함께 떠올랐다. 내 얼굴엔 미소가 아닌 "미소"가 지어졌다. 인용부호 속의 미소, 곧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의 참 미소였다. 


코로나 팬데믹은 내 삶에서도 많은 것들을 바꾸었다. 직장 일만이 아니라 가족 문제, 신분 문제 등이 겹치면서 나는 2022년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끊어진 수많은 소중한 것들 가운데 저자의 전작 읽기 중단도 있었다. 아쉬운 일이었다. 이번 책을 시작으로 그동안 끊어졌던 길을 재건해 볼 생각이다. 그 길은 한편으로는 다시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이전과 같은 길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달라진 나, 달라진 저자, 그리고 달라진 시대와 문화로 인해 분명 다른 길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으니 그건 진정성을 지켜내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정한 나, 진정한 너, 그리고 진정한 우리와 진정한 세상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고 성찰하며 인간다움을 지켜내는 것. 그것은 곧 나 자신과의 관계, 너와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의 정원을 늘 갱신된 마음으로 가꾸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삶일 것이다. 나는 그 삶을 살아내고 싶고, 반드시 살아낼 것이다.


여전히 삶은 물음표이고, 정답은 없고, 있다 해도 절대 일반화시킬 수도 강요할 수도 없으며, 세상은 여전히 혼란 가운데 있다. 내일을 보장할 수 없고, 그래서 두려움도 가득하지만, 오히려 그 두려움 때문에 담대하게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음을 나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다시 깨닫게 된다.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사유하는 비판적 성찰의 중요성도 다시 깨닫게 된다. 어느새 게을러졌던 내 안의 나를 깨우게 된다. 불안 가운데 평화를, 의기소침함 가운데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가져도 되는 이유는 저자처럼 주체가 되어 사유하는 동지들이 비록 소수이지만 나와 같은 길 위에 있다는 사실, 그것을 믿는 믿음과 신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행복"도 이 길 위에서만 누릴 수 있는 쓰고도 단 열매일 것이라 믿는다. 나는 그 "행복"을 추구하고 누릴 것이다. 용기를 다시 낼 것이다. 내일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말이다. 내게도 당당하게 "행복"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잠시 잊고 있던 이 권리를 상기시켜 준 저자에게 고마움의 미소를 보낸다. Smiling at you. 


#행성B

#김영웅의책과일상 


* 강남순 읽기

1. 용서에 대하여: https://rtmodel.tistory.com/223

2. 페미니즘과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585

3. 배움에 관하여: https://rtmodel.tistory.com/814

4. 정의를 위하여: https://rtmodel.tistory.com/819

5. 매니큐어 하는 남자: https://rtmodel.tistory.com/854

6. 젠더와 종교: https://rtmodel.tistory.com/924

7. 안녕, 내 이름은 페미니즘이야: https://rtmodel.tistory.com/931

8.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https://rtmodel.tistory.com/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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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늑대 헤르만 헤세 선집 4
헤르만 헤세 지음, 안장혁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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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아우르는 유머


헤르만 헤세 저, '황야의 늑대'를 다시 읽고 


언젠가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위기에 봉착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문제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문제를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게 대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문장을 쓰면서 나는 튼튼한 나무와 부드러운 갈대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거센 바람에 온몸으로 저항하던 나무는 툭 부러지고 말지만, 온몸을 낮추고 바람을 타는 갈대는 끝내 살아남는 장면이었다. 재미있게도 7년 만에 '황야의 늑대'를 다시 읽고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가 바로 이 장면이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재독 후 ‘유머’라는 단어가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유머’는 ‘유연함’을 연상시켰고, ‘유연함’은 ‘갈대’의 이미지를 소환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선 헤세가 ‘황야의 늑대’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내가 해석한 유머의 관점에서 조금 풀어볼까 한다.


헤세를 읽으면 자아의 발견과 성찰, 성장과 성숙, 그리고 실현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에서 적잖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헤세를 읽는, 나아가 헤세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일 것이다. 헤세의 작품에서는 자아의 분열과 대립마저도 점진적인 합일로 나아간다. 무언가 흩어져 있던 것들이 모이고 정리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절제되고 우아한 길을 걷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다. 많은 청소년들이나 뒤늦게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모든 이들이 헤세를 사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중 유독 ‘황야의 늑대’는 이런 우아함으로부터 조금은 동떨어진 듯한 인상을 준다. 그래서 읽는 이를 당황스럽게 한다. 헤세의 다른 작품을 읽은 독자들에게도 예상치 못한 묵직한 한 방을 제대로 맞은 듯한 느낌을 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황야의 늑대’는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 작품의 초독과 재독 사이의 7년이란 세월은 단순한 7년이 아니었다. 도스토옙스키의 거의 모든 작품을 두 번씩 읽고 감상문도 쓰고 독서모임까지 경험한 시간들은 물론, 신학과 철학과 인문학 서적까지 수십 권씩 읽고 사유한 시간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네 권의 책을 저술하고 한 권의 번역서를 출간한 시간들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난해하기만 했던 ‘황야의 늑대’가 이번엔 술술 읽혔을 뿐만 아니라 조금은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헤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 유별나다고 여겼던 이 작품도 결국 헤세의 중심 사상, 즉 분열된 자아를 발견하고 성찰한 뒤 합일로 이끌며 성장과 성숙을 이뤄내는 구조적 패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유머'는 헤세가 지향하는 궁극의 종착지에 다다른 자의 모습을 상징한다. 인간은 여러 개의 자아로 이뤄진다. 그 자아들은 성격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며 수명도 다르다.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동일한 한 인간이 가지는 자아의 수도 다르다. 어떤 이는 이런 자아들의 존재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 평생을 살다가 죽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특정한 한 자아에 천착하여 다른 자아들을 모두 제거하며 살아가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늘 두 개 이상의 자아 사이를 오가며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이보다 더 많은 여러 유형이 존재하겠지만, 존재론적으로 인간은 늘 이러한 내적 변화를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내적 성장 혹은 성숙이라고 부르는 여정과도 일치하는데, 보통 혼란, 괴리, 무질서, 분열 등의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갈등의 연속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연륜이랄까 지혜랄까 하는 속성을 마침내 가지게 되는 인간들도 비록 적은 수이긴 하지만 늘 생겨나는데,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이, 헤세의 관점에서 볼 땐, 바로 '유머'라고 할 수 있다. 즉, 헤세에게 유머란 연륜과 지혜를 갖춘 자의 얼굴인 것이다. 


그렇다면 연륜과 지혜란 어떻게 갖출 수 있는 것일까? 나이 든다고 해서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은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즉 연륜과 지혜는 적어도 나이 듦의 수동적인 열매는 아니다. 여러 철학들이 다양한 답을 내놓을 테지만, 헤세가 '황야의 늑대'에서 말하고 있는 답은 '합일'이다. 하리 할러 안에 존재하는 시민 자아와 늑대 자아뿐만이 아닌 다양한 이름을 가진 여러 자아들이 모두 한데 모여 그 어느 자아도 소홀히 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서로의 고유한 개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결코 한 자아가 우세해지지 않도록 균형을 이루면서 조화롭고 건강한 한 인간을 이루는 것, 합일. 합일에 이르기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끌어안음'이다. 못난 내 모습도 나를 구성하는 요소임을 인정하는 것, 나아가 그 요소가 바로 지금의 나를 만든 소중한 재료임을 알고 감사하는 것, 그리고 잘난 내 모습도 한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고 교만에 이르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며 끌어안는 행위를 상징하는 표현이 바로 유머일 것이다. 하리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괴테와 모차르트도 꿈에 나타나 던져주었던 메시지, 유머. 하리가 인간 일반을 대변한다고 해석할 때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도 바로 유머라는 것을 헤세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시민도 늑대도 모두 나라는 것. 넉넉이 끌어안으라는 것. 분열과 합일은 성장과 성숙의 일환이라는 것. 이쯤에서 다시 내가 예전에 썼던 문장을 소환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톤을 조금 높여서 말이다. "우리가 위기에 봉착하는 이유는 문제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너무 진지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지함이 아닌 유머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2.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1912

3.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1924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1946

5.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1951

6.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1991

7.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2014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9. 싯다르타:

10. 유리알 유희: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14. 헤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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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가 되는 법 - 읽고 쓰는 사람으로 책 세계를 만끽하기 위하여 땅콩문고
김성신 지음 / 유유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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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으로 읽고 쓰는 사람이 되어 책 세계를 만끽하기


김성신 저, ‘서평가 되는 법‘을 읽고


전문 서평가 김성신이 쓴 이 책의 부제는 ’읽고 쓰는 사람으로 책 세계를 만끽하기 위하여‘이다. 제목인 ‘서평가 되는 법‘과 연결시키면, 부제에서 말하는 읽고 쓰는 사람이란 곧 서평가를 뜻한다. 이 책을 통한 저자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서평가가 되어 책 세계를 만끽하라.‘ 정도가 될 것이다. 분량도 적고 쉬운 문체로 써졌기 때문인지 수영 강습받는 아들을 한 시간 동안 기다리며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저자의 메시지에 대체적으로 공감을 하면서도 서평 혹은 서평가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 전적인 동의는 할 수 없었다. 


저자처럼 나 역시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동영상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독서문화가 사라지거나 사그라들지 않고 오히려 확산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시대의 흐름은 딱히 긍정적이진 않으나 대세가 어떻게 되든 나는 죽는 날까지 독서운동가로서 살아갈 운명을 느끼고 있으며 그렇게 살다 가고 싶다. 어떻게든 책의 유용성과 독서의 묘미를 주위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싶다. 그래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동영상 시청을 자제하고 책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날 수 있도록 애써볼 요량이다. 그 한 가지 방법으로 나는 독서모임을 권하곤 하는데, 그것과 곁들여서 꼭 권하는 게 있으니, 그건 독후감상문을 짧게라도 써보라는 것이다. 이는 이미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 독서모임을 일 년 반 동안 함께 하며 실제로 검증된 방식이기도 하다. 


눈치 빠른 독자는 금세 알아챘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저자의 메시지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서평과 감상문의 차이 때문이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부터 감상문이 아닌 서평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사용한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서평과 감상문을 구분하고 둘 중 감상문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서평이라는 단어가 가진 위압감 아닌 위압감이 불편하다. 또한 책 세계를 만끽하기 위해 굳이 서평가가 될 필요까지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서평이 아닌 감상문을 쓰는 정도로도, 아니 서평이 아닌 감상문을 쓰는 방법이 오히려 더 책 세계를 만끽하기 쉽다고 생각하고, 이 방법이 더 대중적으로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언젠가부터 나도 읽고 쓰는 사람이 되어버렸는데 서평이 아닌 감상문 쓰기가 나의 첫걸음이었다. 지금도 나는 서평은 모든 사람이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감상문을 쓰면서 독서를 마무리하는 습관만 가져도 충분히 독서의 맛과 힘을 체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 그렇다면 서평과 감상문의 차이는 무엇일까?


저자는 책을 치우치지 않게 객관적으로 소개하여 미래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돕는 글을 서평이라 정의하는 것 같다. 이 책에서는 어떤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해 쓰면 서평이다,라고 쉽게 말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저자 스스로도 동의하지 않는 정의일 것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저자 역시 서평다운 서평은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서평이 가져야 할 중요한 조건으로써 공공성을 꼽는다. 단지 책이 잘 팔리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쓰는 서평은 서평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말이다. 서평과 광고를 엄격하게 구분하면서, 공공성이 결여된 서평은 서평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저자의 말에 완전 공감했다. 생각보다 많은 서평들이 현실에서는 객관성을 잃은 채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편파적이고 정치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공공성이란 객관성, 공정성, 정확성 등을 지칭하는 용어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즉, 저자가 정의하는 서평이란 책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정확하게 소개하고 평가하는 글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내가 정의하는 감상문은 독자의 고유한 생각과 느낌을 담아내는 글이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다른 사람이 읽었을 땐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글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객관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글일 가능성이 농후한 글이 바로 감상문이라는 말이다. 나는 서평이 아닌 감상문을 쓰는 것이 오히려 책을 더 사랑하게 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말하는 공공성이 없어도 충분히 책 세계를 만끽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공성은 서평의 요체이긴 하지만, 책 세계를 만끽하기 위해 독자들이 꼭 가져야만 하는 요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현실에서도 누군가가 읽은 책이 읽고 싶어질 때는 그 사람의 주관적인 반응과 개인적인 변화 때문이지, 그 책이 가진 객관적이고 정확한 가치가 파악되었기 때문이 아니지 않은가.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쓰인 서평을 읽으면 그 책의 정체성을 공정하게 파악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읽고 싶어지는 마음이 항상 따라오는 건 아니지 않은가. 누가 운동하는 습관과 건강한 식습관을 몰라서 안 하는가? 정확한 지식이 과연 우리를 행동으로 이끄는가? 나는 아니라는 데 한 표를 던진다. 인간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고 살아온 대로, 습관을 좇아 사는 존재이며, 이성보단 감정에 의해 행동으로 더 자주 옮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공공성을 띠고 잘 쓰인 서평이 아닌, 주관적이고 개인적일지라도 어떤 내 안의 정서를 자극하거나 어떤 은밀한 감정과 접점을 이루는 감상문이 그 책을 손에 들게 만들 확률이 나는 더 높다고 생각한다. 


정리하자면, 나는 저자와 같은 지향점을 가지지만, 저자와 다른 방식, 즉 서평이 아닌 감상문을 씀으로써 책 세계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서평은 필요하다. 그러나 서평을 쓰는 사람은 소수여도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독자가 서평가가 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대신 독서의 마지막 단계로 감상문을 짧게라도 쓰는 습관을 들인다면 누가 뭐라고 하든 책과 사랑에 빠질 확률이 더 높을 것이고, 책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기록할 수 있으며, 그러다 보면 어느덧 읽고 쓰는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고 믿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서평가도 감상문을 쓰는 것을 먼저 시작해서 진화하는 게 정석이지 않을까 싶다. 개인의 고유한 생각을 글로 풀어내지 못하면서 공공성을 띤 글을 쓴다는 건 AI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즉 감상문을 쓰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중에서 몇몇이 서평가로 활동하면 이상적이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이 책은 주로 저자가 만난 여러 사람들을 서평가로 살게끔 했던 여러 사례들을 소개하는 꼭지들로 이뤄져 있다.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과연 저자의 방법이 대중화될 수 있을진 의문이 들었다. 저자가 방송 출연을 하는 유명인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 방법이 먹혔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유명인이 아니라 단지 좋은 취지만 가진 일반인이었다면, 과연 한때 유명했던 코미디언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30년 넘게 요리사로 일한 중년의 셰프가, KBS 방송국에서나 만날 수 있을 북한 작가가 서평가로 활동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들이 저자의 권유를 받아들인 건 단지 저자의 공공성을 띤 취지 때문만이 아니라 저자가 방송계와 언론계와 출판계에서 가진 영향력이 한몫을 담당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게 그 꼭지들은 평범한 대중들과는 상관이 없는 소수의 유명인이 서평을 쓰게 된 사례로 읽혔을 뿐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시작했던 '비평연대'는 응원하게 된다. 특정 유명인이 아니라 젊은 일반인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유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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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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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골 기질이 쓴 '평생 단 한 번 쓸 수 있는 책'


김영하 저, '단 한 번의 삶'을 읽고


반골 기질 때문일까? 천성적인 아웃사이더 성향 때문일까? 내로라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책을 무의식적으로 피하는 유치한 경향을 가진 나는 지금까지 김영하 작가의 작품을 두 권밖에 읽지 않았다. 그것도 소설 한 권 (살인자의 기억법), 에세이 한 권 (여행의 이유)이었다. 그랬던 내가 잔뜩 밀려있는 책을 제쳐두고 출간된 지 석 달 채 되지 않은 그의 신간을 구입해서 먼저 읽었다. 예상 밖의 행동에 스스로 놀라면서도 나는 즐거움을 느꼈는데, 이것 역시 반골 기질, 천성적인 아웃사이더 성향 탓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부한 제목인데도 진리를 담고 있어 이목을 끈 이 책은 내 손에 들어온 지 두 시간 만에 읽혀버렸다. 책을 덮고 한 사람의 생을 단 두 시간 만에 읽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던 것도 잠시, 70억이 넘는 지구인 중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두 시간 집중해서 읽었다는 사실에 금세 우쭐함을 느끼며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나아가, 내가 평소에 궁금해하는 사람도 아닌,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의 인생에 집중했다는 건 실로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까지 하면서 나는 마치 누군가의 고백을 두 시간 동안이나 조용히 경청한 착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도 느꼈다. 어느덧 나는, 재미있게도, 물론 나만의 상상 속에서, 일개 독자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고해성사를 들어준 성당 신부로 격상했던 것이다. 


저자가 후기에 쓴 대로, 내게도 이 책은 김영하 작가가 평생 단 한 번 쓸 수 있는 책으로 읽혔다. 그리고 저자가 바로 뒷문장에 이어서 쓴 대로, 그가 그런 책을 너무 이른 나이에 쓴 게 아닌가 하고 느꼈던 두려움에 공감이 되었다. 그가 68년생이니 나와는 9년 차이밖에 나지 않고, 아직 환갑도 지나지 않았는데 인생을 회고하는 책을 냈다는 것이 긍정적으로만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평균 기대수명이 82세를 넘기고 있는 시대이고, 평생 단 한 번 쓸 수 있는 책이라면, 그것도 인생을 회고하며 쓰는 책이라면 적어도 70세는 넘기고 써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덮고도 뜻밖의 아쉬움이 남는다. 필력만이 아닌 인생의 무게가 더해지면 책 속의 문장들 또한 더 큰 무게를 갖게 되고 책의 무게 또한 가중될 텐데 말이다. 그러나 김영하 작가 역시 스스로가 밝히듯 그가 가진 반골 기질 때문에 이런 일도 어쩌다가 툭 질러버린 게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것 역시 책 속에서 그가 밝힌 그의 인생의 결정들과 그에 따른 예상치 못했던 인생 항로의 연장선에 놓인 일이지 않나 싶다. 한 마디로 김영하다운 판단과 행동의 결과일 수 있겠다 싶다. 그래서일까. 나와 비슷한 반골 성향을 가진 그가 이 책을 내고 기다린다는 '미래의 운'이 부디 그에게 가 닿길 진심으로 기원하게 된다. 


#복복서가

#김영웅의책과일상 


* 김영하 읽기

1. 살인자의 기억법: https://rtmodel.tistory.com/1315

2. 여행의 이유: https://rtmodel.tistory.com/1110

3. 번의 : https://rtmodel.tistory.com/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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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나의 30년 친구, 독서회
무카이 가즈미 지음, 한정림 옮김 / 정은문고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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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독서모임에 대한 사랑


무카이 가즈미 저, '다정한 나의 30년 친구, 독서회'를 읽고


저자 무카이 가즈미는 번역가와 사서로 살아오며 평생 책을 가까이했다. 학생 시절 번역 선생님의 권유로 독서회에 참석하게 된 이후 어느덧 선생님은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저자는 30년이란 세월을 넘기며 독서회를 지속하고 있다. 하나의 일을 10년 넘게 한 사람을 소위 전문가라고 부른다면, 저자는 번역가라는 직업만이 아닌 독서회 리더로서도 베테랑 중 베테랑에 해당되는 경험과 노하우를 습득했음이 틀림없다. 이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독서모임에 참석하고 있거나 기획하고 있는 독자들은 이 책의 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할 것이다. 나 역시 그랬고 책이 출간되자마자 구입해서 읽었다. 


제목에서도 강조하고 있듯 30년이라는 세월은 누군가에겐 전부일만큼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다. 책을 사랑하고 독서모임을 사랑하는 나로선 그 기간 동안 같은 독서회를 지속했다는 그것 하나만이라도 상을 받아 마땅한 이유라 생각한다. 독서모임은 직업과는 달리 수익이 창출되기는커녕 오히려 돈이 드는 일이다. 적어도 책을 사고 모이는 장소를 마련하고 다과를 함께 하기 위해선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독서모임은 시간을 잡아먹는 하마이기도 하다. 한 달에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따져보면, 250페이지 분량의 소설을 한 시간에 50페이지 읽을 수 있다고 가정할 때, 총 5시간이 소요된다. 대부분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5시간을 내리 집중하며 책을 읽으라는 건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그 5시간은 10시간으로 늘어나기도 하고, 그것마저도 며칠, 혹은 몇 주일에 걸쳐 조각나는 게 보통이다. 독서 시간이 늘어지고 조각날수록 책의 내용은 점점 더 망각의 세계로 넘어가게 되고 급기야 강박이 생기기도 하며 스트레스가 되어 독서모임의 무용성을 주장하게 되기도 한다. 일에 치여 쉼을 얻고자 독서모임을 시작했는데, 독서모임에 치이게 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지게 되는 경우도 왕왕 생긴다. 누군가에겐 아름다운 일로 여겨지는 독서모임이 또 누군가에겐 시간 낭비, 돈 낭비, 에너지 낭비로 여겨지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알고 싶었던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어떻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같은 독서회를 지속할 수 있었는지, 즉 지속 노하우에 대해서였다. 나머지 하나는 독서회에 대한 저자의 태도였는데, 번역자와 사서라는, 책과 떨어질 수 없는 직업이라는 이유가 독서회를 지속하는데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 직업이 아니더라도 저자는 과연 독서회를 지속할 수 있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에 대한 답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지속 노하우에 대한 특별한 비법은 없었다. 누구든지 이 방법대로만 하면 30년 독서모임 지속할 수 있습니다,라는 노하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환상일지 모른다. 독서모임 가족들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는지, 그들의 독서모임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지, 그들 하나하나가 독서를 얼마나 일상 속에서 누리고 있는지, 독서모임에 나와서 다른 구성원들과 얼마나 적절한 거리를 두고 소통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책을 선정해서 함께 읽어나갈 것인지, 어려운 책이라도 함께 읽으면 완독은 물론 깊고 풍성한 이해로 인해 삶도 깊고 풍성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등등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독서모임이라도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진 않지만, 어떤 비법 같은 노하우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서 나는 오히려 그게 더 현실적이고 또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독서모임의 지속은 리더의 열정이 중요하긴 하지만 결코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사람과의 만남은 성취하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는 내게 이 결론은 내가 몸담고 있는 독서모임에서도 역시 감사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나의 열정을 묻어나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길 수 있게 해 주었다. 


저자가 번역자와 사서라는 일을 평생 해 왔다는 사실이 독서회를 지속하는 비결이 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늘 참석하는 독서모임 구성원들은 리더의 직업이나 성향, 이력 등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저자가 몸담고 있는 독서회도 저자 이외의 번역자가 두세 명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인 것 같다. 다른 구성원들은 저마다 다른 직업과 삶의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독서회의 지속은 직업적인 부분이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오히려 더 중요한 키는 책에 대한 사랑이 아닌가 싶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책을 읽으며 저마다 가진 풍성한 삶을 나누는 모임이 바로 독서모임이고, 그것이 가능하게 만드는 요체는 아무래도 책에 대한, 강요할 수 없는, 애정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독서모임 구성원들이 가져야 할 적당한 거리에 대해서도 쓴다. 책을 나누다 보면 삶을 나누게 되어 있는데, 그 나눔이 잡담으로 이어지거나 책과 상관없는 곁길로 가는 경우를 주의해야 한다고도 쓴다. 책을 함께 읽고 만남을 계속 가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서로 가까워지지만, 독서모임 시간에는 회포를 푸는 게 아니라 책을 중점적으로 나눠야 한다고도 쓴다. 독서모임을 거의 십 년간 지속하고 있는 나는 이런 저자의 말들에 연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나에게 이 책은 여러 위로와 도움이 되었다. 한 번도 독서모임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보다는 적어도 책을 사랑하고 독서모임을 참석한 경험이 있거나 독서모임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책은 더 크게 울려 퍼질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책을 읽지 않는 시대이기도 하거니와, 문화가 다른 일본에서의 이야기라 여기 한국이라는 맥락에서 얼마나 작동할지에 대해 우려도 되지만, 책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가치를 지니고, 그 가치를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므로, 나는 그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정은문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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