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프레 - 분장 속의 아이들
이종헌 글.사진 / 지성사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한국에서 코스프레 문화는 대략 15년 정도 되어  가는듯 하다. 그 시초가  A.C.A 라는 전구 아마추어 만화 동아리 연합이로부터다. 특히 1990년대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 같은 초기 모뎀형 인터넷 문화가 보급되면서 처음에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 그리고 오오토모 카츠히로의 아키라와 같이 이른바 사이버펑크 장르의 저패니메이션(일본 애니메이션)이 국내로 유입되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통해 한국 만화 애니메이션 향유자 문화가 발달되었다.

그런 만화애니메이션 문화 중에서 발달되면서 같이 흘러온 것이 코스프레이다. 한국 코스프레문화를 살펴보면 만화애니메이션 동아리나 동호회에 안에서 같이 지내다가 최근 5~6년 사이에 만화애니메이션 문화와 별도로 분리되어 독자적인 문화형성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코스프레라는 대상 캐릭터가 현실이 아닌 가상이라는 이미지로 통해 받아지므로 가상적인 존재가 강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현실부재의 인물들이 주로 그 코스프레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코스프레가 조금씩 발달되면서 현실부재의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뿐만 아니라 파싱실재인 영화, 드라마, 가수, 정치인들까지 같이 코스프레 대상으로 올라갔다. 물론 단순히 코스프레라는 누구를 따라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일본인들이 테러리스트에게 강압적으로 납치된 적이 있을 때 당시 테러리스트들이 일본인에게 칼을 겨누고 협박하는 장면을 일본으로 유출시켰다.

이때 테러리스트들의 행위를 보았던 일본 시민단체는 자발적인 코스튬을 입고 정부기관에서 항의했다. 그러면 코스프레가 단지 누구를 따라하기만 해서 코스프레라고 말하기는 사실 어렵다. 어째거나 그렇게 코스프레는 일반 대중문화나 사회와 별개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일반 대중문화와 사회와 아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단지 사람들은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코스프레라는 것은 현실에 존재된 인물을 복제된 영상으로 접해 따라하는 것보다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창조된 인물을 따라하는 것이 많으므로 여기에 대해 사람들은 하이퍼리얼리티 즉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조차 못하는 극현실로 인해 과연 비현실의 존재감을 상실한 채 잣대를 들이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코스프레라는 것이 가상의 존재를 따라하는 것에서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가상의 세계를 따라하는 사람에 대해 어떻게 보여주고 어떻게 표현하는지 대해 조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코스프레-분장 속의 아이들을 그런 코스프레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조금 추천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 중에서 일부 극히 한정된 코스프레만 소개되고 있지만, 그 소개한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일반 사람들에게 그렇게 위화감을 줄만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단한 코스프레이어 프로필과 그 코스프레이어에 대한 이미지, 그리고 그 코스프레에 대한 저자의 평들은 쉽게 이해하기는 좋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 서적을 그렇게까지 추천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는 않는다. 이 서적의 한계는 대중문화로 인해 소외되는 대중들이 선도하는 코스프레 문화를 올바르게 적어내리지 못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코스프레는 복장이 기성화된 상품이 아니므로 대부분 자신이 직접 만들거나 혹은 수주샵에 맡기는 게 대부분이다. 물론 최근 대량생산 대량판매 경로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옷이 그렇게 많이 나와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코스프레는 획일화 관료화 통일화만 강조하는 기존 사회에 대한 반발로 보여줄 수 있다. 인간이 획일화에 의해 조화성만 추구하면 모든 같은 생각만 하고 같은 것만 보게 되어 결국 수동적인 존재로 변해버린다. 그런 점에서 코스프레는 그런 수동적인 문화산업에 익숙해진 대중들에게 새로운 가치관과 대중중심문화를 만들게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는 그런 면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다. 물론 이 서적 다음에 다른 시리즈에서 다른 코스프레이어들을 다루어 주었다면 좋겠으나 단지 여기서 머문 것으로 인해 좋은 평을 나는 줄 수 있다. 그 이유는 코스프레가 잘 어울리는 것이 그 코스프레이어가 어떤 노력과 성과에 의해 보여지기 보다는 단지 이쁜 여자가 많이 나왔다는 생각을 버리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외모도 출중하며 의상제작과 분장능력도 뛰어날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여성보다 외모가 다 기본적으로 우월한 사람들만 나왔다는 점이 아쉽다는 것이다. 만약 이 책이 다음 편이 나와 다양한 코스프레이어를 소개했더라면 조금 다른 면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최근 코스프레 문화의 문제점으로 외모지상주의라는 것이 등장한다. 물론 전부 그렇지는 않으나 이런 외모지상주의에서 빚어지는 문제는 코스프레 문화만 아니라 기존 국내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버린 것이다.

물론 나도 남성이기 때문에 내 눈 앞에 외모가 출중하고 몸매가 좋은 여성이 있다면 당연히 남성이라는 무의식적인 면에 의해 상당히 만족할 것이다. 애초부터 그런 무의식적인 면으로 인해 좋다고 여기는 것을 비난하는 것은 나쁠 수가 없다. 단지 그런 사람들에게 시선만 가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모든 사람이 완벽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주목을 받을 수 없다는 박탈감을 안겨주는 것은 바르지 않다. 하지만 외모가 출중한 사람이 있다면 스포트라이트로 통해 좋은 인식을 심어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거기에 치중하게 되버리면 코스프레의 본질적인 문화정신은 아마 변질되지 않을까라는 우려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오늘의 사상신서 157
마빈 해리스 지음 / 한길사 / 199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학자 중에서는 마빈 해리스 교수가 있다. 비록 몇년 전에 작고하신 분이지만, 그 분의 도서를 읽을 때마다 내 머릿속은 왜 우리는 항상 서로를 대해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편파적인 사고를 가지게 될까에 대해 아주 분석적으로 나열해 주고 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신이 자라난 곳에서 살아오면서 거기에 적응하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 자라온 인간은 그 사회에서 배운 모든 가치관이나 생활습관 그 자체가 하나의 인생관으로 잡혀 버린다.

그래서 인간이란 각 나라나 인종, 지역, 지형에 따라 각각 다른 모습으로 오늘 날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각각 가지고 있는 속성이나 환경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다른 인간이 보는 느낌은 매우 신기하고 이상하고 낯설고 한편으로 증오스럽고 미우며 괴로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같을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가 어디 멀리 여행을 가거나 이동할 경우 가장 먼저 이야기하는 내용이 있다. 그 나라나 지역에 있는 음식이나 물맛이 안맞는다라고, 아마 우리 인간이 다른 지역이나 나라에 갈때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은 그 나라와 지역의 문화적인 현상들이며, 그 다음으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필수적인 음식물들일 것이다.

처음에 처음보는 사람들과 모습들은 어느 정도 우리는 마음속으로 준비된 자세로 임하므로 지나친 혐오감이나 적대감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음식에 들어가서부터 시작이다. 음식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주변환경과 문화역사적인 흐름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는 소고기를 먹지 못하는데 반해 이슬람국가에서는 돼지를 먹지 않는다. 또한 미국이나 유럽국가에서는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까지도 한국이나 중국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서구사회에서는 미개인 취급하지만, 그것에 대해 항의하는 서구사회의 사람들이나 혹은 거기에 동의하는 한국사람이나 둘 다 편파적인 문화오류에 빠진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개가 인간의 친구임은 분명하나 그 친구가 때에 따라서는 식량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 한국은 육식생활습관이 많이 형성되어 있으나 과거에 육식을 제대로 사람들이 섭취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육식을 섭취하지 못하면 인간의 생명에 필요한 단백질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 한국 근대사까지 복날이나 혹은 특별한 날에 개를 때려 잡아 죽여 그 개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단지 너무 잔인하게 구타하여 한번에 죽이지 않은 것이 비인도적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과거 한국사회에는 공업이 우선되는 국가가 아니라 농업을 중심으로 하던 국가였다. 농업국가에서는 토지당 비율적으로 쌀이나 보리 등과 같은 곡식이 많이 생산되지만, 이에 반해 단백질들은 한계가 있었다. 물론 콩과 같은 식물들은 단백질을 공급해주었으나 그 단백질들 성분들 중에서 많은 한계점에 봉착되어 있었다. 콩에서만 흡수되는 단백질은 한계가 있었고 나머지 단백질들은 동물의 고기로만 통해 얻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 방법이 개고기였다. 특히 복날과 같은 경우 아주 날이 더운 여름철에 개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여름철에 개고기를 먹은 이유는 아마 단백질의 효과적인 흡수였을 것이다. 그 이유는 여름철에 아주 더운 햇살과 햇빛에 인간이 노출되면 인간세포가 파괴되기 쉬운데, 이 세포파괴를 방지하기 위해 인간은 멜라닌 색소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러나 멜라닌 색소를 생성하려면 단백질이 필요하다. 그래서 개고기를 먹어 단백질을 충분히 공급하여 더운 여름철에도 농사를 무사하게 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한국인들은 농사가 주요 생산수단이므로 개가 아닌 야생 멧돼지, 산토끼, 꿩을 잡아 먹었으나 그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상대 국가나 민족, 인종에 대해 그 먹는 것이 나쁘다고 보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관점이란 것이다. 물론 인간이 인간을 먹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윤리가치나 고대 아즈텍 국가에서는 인구수는 아주 많으나 주변에 잡을 수 있는 단백질 공급원인 동물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단백질 공급을 위해 인간의 살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현대문명국가에서는 미개인 내지 잔혹한 인간으로 보겠지만, 그들은 그들이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그런 먹는 것에 대한 혐오감과 편식성에 대해 이 음식문화의 수수께기는 상세하게 거론하고 그 이유를 밝혀낸다. 심지어 종교교리에 언급된 식사까지도 왜 그렇게 터부시 되었는지도 나온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이념이나 관념조차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역사와 현상이 따랐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음식으로 통해 배타적인 모습으로 나오지만, 그 뒤면에 감추어진 각 인간들의 생활과 자연환경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볼 일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화의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 문화 인류학 3부작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요새 필자는 몇년 전에 작고하신 마빈 해리스 교수님에게 동경심을 가지게 시작하였다. 비록 서적은 총 3권(작은인간, 식인과 제왕, 문화의 수수께끼)만 읽었으나 이 3권의 책으로만 필자에겐 크나큰 감동과 의미를 주었기 때문이다. 문화의 수수께기, 책 제목처럼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곳에는 문화가 존재한다. 문화란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장소와 시간이며 또한 미지와 자연과 다른 안정화된 공간이다.

물론 문화가 안정화되어 있다고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안정화되어 그 안정된 요소로 인해 많은 인간들이 스스로나 혹은 타인들에 대해 큰 죄악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얼마나 스스로 대해 잘 알고 있는지 얼마나 상대방을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정말 난해하고도 답을 내리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나와 남을 제대로 알아간다는 것은 모든 갈등과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왜 인간은 아직까지 서로 대립하고 싸우고 죽여야 하는가?

아마 그것은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본다. 자신에 대해 조금 성찰하기 보다는 그저 자신의 생각만 표출하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들을 서로 알고 고치면 우리 세상은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 글을 적고 있는 나 역시도 많은 편파적인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에 차여있다. 그렇게 고정관념으로 쌓여진 본인이지만 결국 조금씩 고쳐 나가지 않으면 계속 이런 광기에 어린 피비린내 나는 역사 속의 한토막 무리로 살아지 않을까 라고 걱정된다.

이런 인간의 광적인 어리석음과 욕심은 참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보여준 수수께끼란 결국 우리 인간이 만들어온 문화가 과연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 대해 고찰하는 서적이다. 그 내용 안에는 우리가 광기로 미쳐 서로를 죽이고 원망하고 그것이 하나의 진리로 추앙되는 과정까지 보여준다. 최근에 관심을 두고 있는 프랑스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에서 이런 인간의 역사 중에서 광적인 부분을 비판한 학자들이 있다. 인간이 이렇게 광적으로 미쳤음에도 오히려 미치지 않은 인간들에게 손을 뻗어 억압하는 것은 인간 그 자체의 도덕성 결여와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틀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주장하여 그것이 하나의 사회적인 인식현상으로 만들게 되어 그렇게 주장하거나 혹은 그렇게 만들게 하는 부류에게 크나큰 이익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조장된 사회현상이 자주 등장한다. 사실은 그렇지 아니하지만 어느 기점으로 인해 이런 허구적인 일들이 마치 진리나 사실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런 미친 사상이 얼룩진 역사의 단편은 왜 이렇게도 이어지는 것일까?

그런 현상을 알려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 판단하고 생각하기 보단 그 자체에 의해 말려들기만을 바란다. 왜냐하면 인간이 근원적으로 들어가서 그 오류를 찾아내려면 많은 시간적 노력과 정성 그리고 공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진실된 것을 찾기보다는 자신들이 믿기 편한 것들만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의 사고적인 오류를 계속된 광기어린 역사를 만들어 온다. 왜냐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편한 사상이나 진실이 다가오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중심리라는 무서운 사고는 하나의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여 인간 그 자체의 본성마저 잡아먹어 버린다.

마빈 해리스 교수님의 문화의 수수께끼는 바로 그런 인간의 광기와 이기심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책으로 내용 자체로 보자면 문화의 수수께끼라고 생각하지만 그 수수께기를 제공한 인간들로 통해 오늘날 현대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도 그 수수께끼적인 현상에 말려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거기에 반항하는 피지배계급층과 소외된 사람, 그리고 자신들의 권익과 틀을 지키기 위해 권력으로 세상을 조장하는 지배계층과 권력가들, 어떻게 보면 지금 오늘날의 우리도 이런 계급과 권력, 그리고 경제적 사회적 대립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지러운 세상에 언제나 등장하는 메시아, 그리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만드는 마녀사냥, 역사는 언제나 되풀이 되어 우리 인간을 광기어린 짐승으로 변하게 한다. 이 책을 보면서 내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우리도 이렇게 메시아와 마녀사냥이 고대부터 시작해서 현대까지 일어나고 있다. 신화란 결국 과거의 일을 기록하는 게 아니라 현세에도 계속 일어나는 하나의 인간의 표상처럼 말이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메시아는 미륵사상이다. 미륵과 석가가 인간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내기를 했으나 본래 미륵이 강하고 정직했으나 석가가 속임수로 미륵을 속여 인간세계를 지배했다. 석가가 부정한 방법으로 문명세계가 존재하는 인간사회를 지배하자 모든 악적인 근원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어지러우면 항상 미륵이 등장한다고 한다. 메시아적인 요소는 물론 미륵만이 아니라 건국신화 주인공인 단군신화, 주몽신화도 별반 차이없다. 모든 건국신화의 주인공들은 어지러운 당시 국가나 부족사람들에겐 하나의 신들의 사자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섹스와 돈 - 페미니즘과 정치경제학 그리고 미디어
아일린 미핸 외 엮음, 김선남 외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대사회에서 들어와서 여전히 자본의 위력은 대단하다. 하지만 자본의 힘이 하나의 권력으로서 등장한 것은 프랑스 시민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에 비롯되었다. 이 2가지의 혁명으로 통해 절대 왕권과 봉건귀족들이 누리던 화려한 봉건사회는 문을 닫고 근대 유럽의 시작은 자본력이 사회를 좌우하는 구조가 되었다.

사회가 자본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면서 대부분 상인이나 혹은 은행가, 재산가처럼 금전적인 여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권력이 향하게 되었다. 자본을 가지고 있는 수준과 범위 그리고 그 자본을 돌릴 수 있는 한계에 따라 다시 자본은 자본가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럽사회에서 노동자, 어린이, 노인, 여성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사회적인 약자로 대두되면서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불평등한 사회구조에서 자본력을 가지고 있는 유럽 자본가들은 대부분 백인남성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나타났으며, 여기에 자본력을 가지지 못한 여성, 흑인, 노동자들은 자본이 없다는 이유로 상당한 노동과 차별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게다가 자본가들은 자본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것을 노동에 알맞게 분배하기 보단 오히려 그 노동력을 착취하여 자신의 이익만 쌓게 되었다.

그렇게 자본을 수용하고 있는 자본가들은 자본을 소요할 수 없는 노동자, 여성, 흑인들에 비해 생활여건이 우월하므로 교육의 기회가 증대되었고, 교육의 기회가 늘면 늘수록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는 사회적인 지위권이 보장되었다. 자본을 가진 부르주아가 자신의 자본을 후손에게 넘겨주거나 자본가의 자식들을 고등교육을 실시함으로 정치가 내지 사회실세세력으로 독점하게 되었다.

다시 이런 세력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제도와 정책을 만들었고, 결국 근대사회는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초고처럼 남성들은 언제나 모진 노동으로 얼룩진 하루를 보내야 하고, 여성들은 남편이 노동하고 있을 시간에 유흥업소나 윤락업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노동력이 아닌 기계력에 의해 상품을 만들면 남녀 모두 고루게 일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남성과 여성이 일을 할 수 있는 분야가 차별화 되었다.

남성이 일을 하는 분야는 근무조건이 매우 고되고 어려우며, 육체적인 소모가 매우 심한 것들로만 채워졌다. 이에 반해 여성들은 노동력이나 전문성이 그렇게 요구되지 않은 업무만을 하게 되었다. 일을 할 수 있는 범위와 수준이 남녀 불평등으로 이어지자 사회적 주도권은 남성들에 의해 가지게 되었으며, 여성들은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를 지니게 되었다. 이런 근대사회의 업무형태는 곧바로 20세기에도 연관되어 여성의 직업군이 전문화가 되었다고 하나 전문직종이나 혹은 사회적지위는 여전히 남성이 높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여성의 인권이 상승한 만큼 여성도 자신의 경제력을 소유하게 되면서 남녀 불평등에 대해 어느 정도 조금씩 개선되어 가는듯 하였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사항은 자본은 아직까지 남성에게 있는 것과 남성이 가지고 있는 이 자본력이 다양한 사회현상에서 하나의 이념으로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미디어 즉 우리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체에서 백인남성우월주의적인 면들이 고스란히 우리 정보에 녹아 들어가있다. 미디어라는 것은 정보력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체계이며, 이 정보력으로 통해 우리 인간은 정보를 수용한다. 만약 정보가 올바르고 정당한 주장만 나오는 것이 아닌 어느 특정세력을 위해 조장되거나, 혹은 어느 대상으로 하여금 거기에 속박되게금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가장 기억나는 것은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여성들의 결혼나이가 너무 어리게 된 점이 신기하게 보여졌다.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키워 당당한 사회인으로서 남성과 결혼하기 보다는 여성은 그저 남성의 아내로만 충실하면 그만이다는 관념이 그렇게 심각한지는 꿈에도 몰랐다.  TV에서는 하이틴과 갓 20대인 여성이 이쁘게 꾸미도록 하는 것이 정당한 것과 그렇게 꾸며서 돈이 많은 남성에게 시집가는 것을 최고의 미학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TV 드라마, 영화, 광고에서 온통 여성들에 대한 태도는 자율적이고 책임성이 있는 여성보단 타율적이고 책임을 전가시키는 인간이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서구의 잘못된 관점을 보면서 한편으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대한민국 여성들이 가지는 올바르지 않은 인식에 대해서다. 겉으로 여권신장을 외치면서 왜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는가이다. 여서들이 인권이나 권리만 주장한 뒤에 책임을 회피하면 결과론적으로 여성은 남성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외면하여 남성들에게 그저 하길 바라면서 자신은 경제적 사회적 보장을 바라는 것은 결국 억지에 불과한 일이다. 그리고 겉으로는 권리를 운운하면서 결국은 경제적으로 보장된 남성을 찾아 자신의 편익을 도모하려고 한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맞다고 생각하는 페미니즘인가? 이건 오히려 자신을 스스로 깍아내리는 안티페미니즘이다. 이 챡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성의 몸에 대해서 말이다. 매릴린 옐름 교수의 "유방의 역사"를 보면 여성의 몸이 가면 갈수록 얇아지고 있다고 한다. 물론 남성의 입장에서 뚱뚱한 여성보단 날씬한 여성이 좋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들이 거기에 불만을 가지면 여성들보고 뚱뚱한 남성과 날씬한 남성 중에 누구를 선택할 것이냐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결국 서로 같지 않은가? 그러나 문제는 너무 뚱뚱할 경우 성인병, 당뇨, 각종 질환으로 건강에 위협을 받을 수 있지만 너무 날씬해도 신체적인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지나친 골격성형, 유방확대수술, 각종 다이어트는 여성이 여성 스스로 건강을 위해서 몸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미적 감각에 맞도록 자체적으로 설계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몸을 망치는 것 자체가 미디어로 통해 정당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그런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기 보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트렌드로 받아들여 자신이 그렇게 트렌드에 맞추는 것이 시대를 앞서 나가는 사람인양 착각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뒤에 감추어진 이면에는 남성의 입맛에 길들어진 여성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남성이므로 여성의 매력이 한껏 내보이는 스타일이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너무 당연해버리면 결론적으로 사회적인 남녀 불평등은 해결되지 않으며 오히려 왜곡된 형태로 유지될 뿐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이 sex and money에서는 다양한 페미니스트 인문사회학자들이 오랜 연구결과를 토대로 만든 논문을 묶은 서적이다. 이 도서에는 남녀 불평등부터 시작해 인종차별, 게인, 레즈비언과 같은 비주류적인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다. 페미니즘이라고 해서 모든 여성들에게 혜택이 가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백인여성에게 권리를 주장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자유는 여성만의 자유가 아니라 노인, 어린이, 장애인, 유색인종과 같은 모든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이들을 위한 하나의 인간차별 철폐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펙타클의 사회 - 문화교양 7
기 드보르 지음, 이경숙 옮김 / 현실문화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카페활동이나 사이트 활동하면서 제일 말안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상과 현실의 경계점에 대한 논의다. 어차피 TV, PC, PMP, i-pon, PSP 등 영상매체로 보고 있는 세계는 현실이 아니다. 물론 거기 원본의 이미지가 촬영된 곳이 현실이라 하지만, 그 현실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는 그 것이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는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TV 뉴스에서 어느 박사가 특수한 연구결과를 내놓아도 얼마 기간 후에 위조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해프닝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래서 TV라는 가상세계 매체에 통해 우리는 얼마나 현실성을 잊혀가는가?



애초부터 TV 드라마보면서 이것은 리얼리티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이 내 옆에 일어나고 있어라고 하는 것은 틀렸다. 드라마속의 아름답고 멋진 광경이 내 주변에 일어나는가? 아직도 TV속의 이쁜 바비인형처럼 꾸며진 세계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가? 현실의 좌절감을 가상세계로 통해 보상심리를 채울 수 있을 망정 왜곡된 사람들의 현실을 바꿀 수가 없다. 사랑이라는 판타지도 어째보면 인간은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드라마에선 사랑을 외치지만 그렇게 사랑하고 있는 인간들은 얼마나 있는가? 마치 드라마를 보면서 그 가상적인 사랑이 이루어진 것에 동의하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은 낭만적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는가?



어이없는 농담따먹기도 아닌 그저 바보도 아닌 바보들이 헛소리를 하는 꼴과 같다. 본인들은 현실에서 모든 것을 가려가면서 왜 드라마에서는 그런 것을 따지는 인간을 욕할까? 자신들은 마치 안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드라마 세계의 못된 인물을 욕해봤자 무엇이 달라진다고 그럴까? 드라마 속에 감추어진 작가와 시대의 흐름따위는 눈꼽만치 관심없다. 단지 흥행이나 신드룸이 될만한 요소만 귀를 기울린다. 드마라의 재미를 재미로 보는 것에 대해 나쁘지 않다. 물론 재미있으라고 만든 것이 드라마가 아닌가? 그런데 드라마 세계의 하이퍼리얼리티 세계는 대중들로 하여금 이상한 이념으로 가득차게 한다.



스펙타클이란 말은 그런 현실세계가 아닌 가상의 이미지가 현실로 들어나는 현상이다. 태풍불어와 집들이 무너지고 길고 긴 장맛비가 내린 후에 하늘은 참 스펙타클하게 푸렇구나 하는 소리는 정말 스펙타클을 알고 하는 소리인가? 아닌가?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는 1967년 출판된 도서이다. 어느날 우연히 기 드보르를 검색하던 도중에 기 드보르의 영화를 볼 수 있는 사이트를 찾았다. 정말 횡재하였다. 1994년 자살을 한 영화감독 기 드보르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그가 주장하던 스펙터클의 사회라는 책을 영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좋으나 문제는 나는 불어를 알아 듣지 못한다. 불어대사와 함께 영어자막가 나오지만 나는 영어실력이 좋지 않아 언어적인 구조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영어단어 몇개와 영상이미지로 통해 뭔가 말하고 싶은가만 생각하고 있다. 다행히도 스펙타클이 사회란 책을 1번 읽어보아 대략적으로 감만 잡았다. 2번 3번 이상 봐야하겠지만, 한번 봤다는 것이 이 작품에 대한 관점을 준 계기다. 먼저 기 드보르의 society of the spectacle를 보기 전에 Critique de la séparation (1961)를 보았다. 불어 글자철자도 모르겠는데, 불어로 말하는 나레이션은 더욱 더 미궁이다. 단지 눈에 가는 것은 이 영화도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나온 내용과 뭔가 중첩이 된다는 점이다.



평범한 어느 한 여성, 시위와 진압, 전쟁, 정치인들의 상황연출은 뭔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 수 없는 곳에서 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리는 듯 싶다. 실제는 존재하나 실제는 허구로 대중 눈앞을 가리는 느낌처럼 말이다. 위에 society of the spectacle 서적의 한 표지에 실린 그림이다. 눈앞에 선글라스를 끼고 앞을 보는 사람들 이게 진정한 스펙타클이라고 말하고픈 기 드보르다. society of the spectacle 영화는 1973년에 나왔다. 도서가 나온지 5년 뒤다. 1968년 5월 프랑스 68혁명 후에 나온 영화다. 그가 이 영화로 전달하고자는 의미는 뭘까? 불어가 안통하는 나로서는 고민이 막중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을 본 직후의 이야기는 이데올로기 통한 국가대립이라는 것과 여성이 성적인 소비대상, 시위와 진압에서 보이는 불합리성, 세계 정치지도자들의 정치활동,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흑백영상의 글자들의 나열은 도저히 개연성의 연계성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전위예술적인 요소일까? society of the spectacle 영화에서 흑백으로 된 영상에 어느 한 남자의 나레이션이 계속된다. 이 남성의 음성 아래 하단에 찍히 영어로 읽어보면 스펙타클이 그래 좋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장된 세계의 이미지로 대중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으니깐.  제일 기억나는 장면은 파시즘과 나치즘이다. 광기에 가득찬 이 이념들은 인간을 하나로 만들지만 그런 하나가 타국에 대해서는 전쟁을 불러 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전쟁이란 상황이 그야말로 스펙타클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실이다. 문제는 이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들은 뒤에서 가만히 앉아 구경하면서 막상 그 스펙타클한 세계에 휘말리는 것은 대중이란 점이다. 스펙타클은 대중들을 현혹하여 이념적 조장자로 하여금 꼭두각시처럼 행동하게금 한다. 전쟁에서 목숨걸고 싸우는 젊은이들이 전쟁을 만들었는가? 그들은 국가적인 이념아래 간다고 하지만, 자신의 목숨마져 날릴 수 있을 정도로 이념이란 것은 강력한 무기다.



이런 강력한 무기인 이념은 반드시 국가만이 아니다. 문화, 단체, 심지어는 개인들의 일상에서도 존재한다. 우리가 축구를 볼때 토탈사커라고 들어봤는가? 이 집단축구는 오렌지군단인 네덜란드에서 만든 축구전략이다. 물론 스펙타클한 전법이지만, 그렇게 해롭지는 않다. 문제는 이런 스펙타클한 전법을 보는 대중들이 걱정이다. 훌리건이라는 광적인 축구팬들은 자신들의 팀이나 국가가 지면 상대방에게 집단적인 행동으로 들어간다. 각 개인마다 독특한 개성과 인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축구팬 단체란 틀에서 그들은 집단적행위를 시작한다. 누구 하나의 생각도 아닌데, 이렇게 적게는 수백, 많게는 수만까지 가는 사람들이 스펙타클한 축구전략이지만, 그 축구경기가 스펙타클하지 않은데도 자신들의 그 경기에 따라 스펙타클한 연출을 하기 시작한다. 



각본도 감독도 없는 없는 훌리건에서 스펙타클이란 반드시 국가적인 이념만 아니라 이런 사소한 일상생활에서도 목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중들의 비일상적인 공간의 스펙타클은 이런 집단에서 나오지 않아도 얼마든지 집단을 대상으로 이념적인 행동들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만들게 하는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쟁, 시위와 진압, 정치인들 활동, 일상생활, 시민들의 선동, 전쟁포로에 대한 억압, 여성의 가슴노출, 글자만 나오는 장면들을 어지렇게 나열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는 점은 여자의 가슴노출에서 처음에 자본주의에서는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되는 수동적 존재로 만든 점에서 그런 의도인가 싶었다. 그런데 나중에 영화 후반에 어느 해변에 모든 여성들이 상의를 다 벗고 있었다. 누드해변인가? 소문으로 있다고 들어보았지만, 남자나 여자나 모두 상의를 탈의한 채 재밌게 놀고 있다.



최근에 매릴린 옐롬 교수의 서적을 구입하여 초반을 읽고 있다. 패미니스트 인문학자인 그녀는 여자의 가슴에 대해 서양철학 역사 2,500년을 이야기하고 있다. 남성이 보는 여성의 몸이란 섹시한 아이돌스타처럼 그저 보기 좋게 하려는 시각적인 소유물인가? 아니면 당당하게 권리를 누리는 자유인가? 영화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 듯하다. 처음에 마치 누드모델처럼 나오는 여자들의 영상이 어느순간 자유로운 누드해변가로 나온다. 영화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가장 많이던 장면은 인간과 인간의 투쟁이다. 전쟁터에서 서로 총을 쏘우는 군인들, 시위자와 그 시위자를 진압하는 공권력, 투쟁의 역사는 좀 더 과학기술적으로 변모하여 항공모항 위로 이착륙하는 전투기들, 스펙타클한 사회란 그런 국가 내에서도 국가 외적으로도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현상이다.

 

 그의 작품 마지막에 1968년 이야기가 나온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68혁명이 일어나고 1969년 드골정부에서 다른 정부로 교체된다. 어째든 그가 보며준 영화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는 전혀 맞지도 않은 서사구조에 전혀 맞지도 않은 이미지에 나레이션을 입혀 놓는다. 전위예술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나로서는 전위예술적인 영화란 과연 대중들이 쉽게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기 드보르의 영화가 상영될 때 이상한 편집과 해괴한 연출에서 영화를 위한 영화가 아니라 도구를 위한 영화라는 말처럼 상영객들의 평가가 희비를 달리했다. society of the spectacle,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눈에 보이지도 않은 이미지가 매개로 하여 대중들이 그저 조장된 이미지로 탄생된 미디어 안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인간 그 자체로 능동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언제나 우리 주변은 스펙타클한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대중들이 말하고 있는 스펙타클하다는 그것들. 분명히 스펙타클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스펙타클한 것은 본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망각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