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에반게리온 1 - 사도의 습격
GAINAX 지음, 사다모토 요시유키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1997년 3월
평점 :
절판


보통 만화책을 발간하는 것에서 판권이 출판사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본사에 있는 경우가 아주 드문 느낌이다.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판권을 만화책을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출판사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출판에 대한 권리를 만화잡지사가 아니라 가이낙스에서 직접 판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안노 히데아키를 비롯하여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직접 그리고 만드는 사다모토 요시유키 작가의 경우를 생각하면, 판권이나 작가 모두 가이낙스 소속이란 점이 특이한 점이다.  

 

가이낙스 작품 중에 다른 만화책이나 라이트노벨을 토대로 만든 것은 있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가이낙스에서 만화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게임 각종 상품에서 판권을 지닌 것을 생각하면 가이낙스의 콘텐츠상품은 다른 것과 차원이 다르다. 그와 비슷한 판권을 행사하는 업체로는 스튜디오 지브리가 있을 것이다. 작가가 직접 애니메이션 회사에 소속되어 전반적으로 그 회사에서 중책을 만드는 일은 많지만, 사다모토 요시유키처럼 그렇게 만화, 애니메이션에 모두 관여하는 만화작가 및 애니메이터들은 흔하지 않다.

 

그래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만화로 보는 것과 TV애니메이션으로 보는 것과 심지어 신극장판으로 보는 것에서 각각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제1권에 소개되어 있는 것처럼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입장에서 작품을 전개한다. 본래의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이유는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와 사다모토 요시유키가 바라보는 작품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애니메이션을 보면, 신지가 제3도쿄시로 올 때 분명히 레이가 신기루처럼 보였으나, 만화책에선 그렇게 나오지 않고, 처음 에바에 탑승할 때도  TVA에서는 레이가 괴로워하는 것과 동일하나, 초호기가 아무런 이유 없이 작동하는 것이 나오지 않았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레이가 신기루처럼 나오는 것 대신하여 초호기에 레이가 탑승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레이가 초호기를 탑승해도 신지가 처음 탑승하는 것에 비하면 싱크로가 떨어지는 것이 에바 초호기가 역시 이카리 유이의 몸과 마음이 담겨진 것을 복선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신지가 처음 탑승하는 모습에서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다소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의 신지와 유사한 느낌이 든다. 물론 비슷한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으나, 신지가 레이의 모습을 보고 바로 탑승한 것과 TVA처럼 전혀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에바 초호기를 타고 제3사도를 격퇴하여 미사토가 신지를 데리고 언덕에 가서 저녁에 제3도쿄시의 전경을 보여줄 때, 신지는 미사토의 위로를 받는 것으로 나오나, 만화책에서는 눈물을 흘린다. 수고했어 내지 잘 했어 라는 칭찬을 미사토보단 아버지 이카리 사령관에게 받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이카리 사령관도 조금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본래 애니메이션에서는 이카리 사령관의 안경 너머의 눈빛이 잘 나오지 않으나, 생각보다 만화책에선 이카리 사령관의 눈모양이 자주 나온다.

 

사람과 사람 간의 단절된 세계는 만화책보단 애니메이션이 더욱 강조된 셈이고, 그것은 만화작가인 사다모토 요시유키와 애니메이터 안노 히데아키가 바라보는 작품을 통한 자기 주관이 다르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나리오가 TVA와 비슷해도 주인공이 보여주는 모습은 매우 다르고, 상황이나 대처 역시 다를 것이다. 물론 1권부터 초호기를 탄 레이에서 레이가 초호기와 이중적인 자아를 형성하는 것보다 차라리 동화할 수 있다는 것으로 추후에 나온 시리즈를 읽으면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레이의 존재, 그 레이를 있게 한 원초적인 존재인 이카리 유이가 초호기에 숨 쉬는 것을 너무 빨리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본래 애니메이션에서는 신지가 초호기를 타고 제3사도를 무찌르기 전에 사도의 공격으로 인해 의식을 잃었고, 그 덕분에 에바 초호기는 폭주를 일으켜 이길 수 있었다. 이때 불안해하던 신지에게 누가 안으려 하는데, 왠 이상한 가면을 쓴 사람이 신지를 안으려 했고, 신지는 그 두려움으로 비명을 지른다.

 

신지가 병원에 누워 일어났을 때 무의식적으로 기억하던 것을 떠올리기 시작하는데, 그때 에바 초호기가 눈을 떠서 신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인류 최후의 보류 인조인간 에반게리온 초호기, 신지를 태울 때부터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그 행동은 NERV 요원들을 모두 행운과 더불어 공포를 안겨준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1권을 다 읽은 후에 후기부분을 읽어보면 주인공 선택지를 신지만이 아니라 미사토로 추가한다.

 

신지는 인간관계가 싫어서 모두를 거부하고, 미사토는 인간관계의 깊이 있는 것을 싫어하여 여러 사람들을 이래저래 넓혀가는 타입이다. 모두 외로움을 가지면서 그 외로움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세상과의 벽을 처음부터 쌓은 신지, 세상과의 벽을 쌓았으면서도 쌓지 않은 척하는 미사토, 2사람을 보면 왜 그런가 하나 사실 우리의 모습이다. 아무 이유 없이 에바에 타라고 하는 신지, 그곳에서 제대로 말도 하지 않고 두려움만 떤 채 괴로워하던 신지, 그 나약한 소년은 바로 우리의 주인공이란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하지도 강하지도 혹은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현실에서 나약하고 무능하고 때로는 절망에 흔들리기도 한다. 영웅을 기대하는 심리에서 오히려 영웅이 아닌 나약한 인간들을 두고 처음에 신지에 대해 많은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지만, 그 누구라도 그 자리에 앉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서적인 시학(詩學, poetics)을 읽으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말이다. 역사는 어느 한 개인에게 일어난 하나의 선택지로 끝이 나나, 시라는 어느 가정의 이야기는 결국 나에게도 일어날 수도 있다는 하나의 개연성 내지 필연성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세컨드 임팩트를 맞아 인조병기를 타고 미지의 생물과 싸우는 일들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지처럼 어려운 인간과 사회생활은 말 그대로 일어나는 일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사도를 대항하여 인류가 사투를 벌이나 사투를 벌인 후에나 그 중간에도 인간과 인간은 갈등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나약하다. 그 나약함을 부정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나약한 인간임을 누가 알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스쿨 DxD 10 - 학교축제의 라이언 하트, Novel Engine
이시부미 이치에이 지음, 곽형준 옮김, 미야마 제로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하이스쿨 DXD에서 10권은 매우 결정적으로 전환기를 맞이한다. 그것은 이때까지 항상 방황만 하다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한 효도가 결심하게 된 것이다. 리아스, 효도는 1권부터 리아스에 대한 절대적 갈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진짜 그 시적이고 아름다운 단어는 너무 생생하다. 그리고 그 생생한은 10권에서도 나온다.

 

“붉은 스트로베리 블로드보다 더욱 선명하게 붉은 머리카락, 그래, 그 사람의 아름답고 붉은 머리카락은, 언제나 내 곁에 있던.”

 

인간에게 죽음의 순간이 오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이 있다. 출혈로 인해 의식이 사라져가 눈앞이 컴컴하여 더 이상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끼지도 못해도 인간의 상상은 느끼는 것일까? 하이스쿨 1권에서 타천사 레이나레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효도는 최초로 생긴 여자 친구가 자신을 배신한 것에서 깊은 배신감과 더불어 공포에 시달린다. 죽어가는 와중에 자신이 흘린 새빨간 피를 보면서 자기가 항상 동경하던 리아스 선배를 연상한다. 죽음 앞에 있는 인간의 소원이란 너무나 강렬했을까? 애니메이션 하이스쿨 DXD를 볼 때 효도의 죽음과 더불어 소환된 리아스의 모습은 매우 강렬했다.

 

부장 리아스, 그녀를 위해서라면 왼쪽 팔만 아니라 몸 전체가 적룡제에게 바쳐져도 아무렇지 않게 보는 효도를 보면서 매우 인상 깊었다. 하지만 악마이든 혹은 인간사회이든 어느 무리에서 최고 지휘체계와 더불어 하위체계가 분류된다. 리아스는 멸살공주로 불리는 귀족 가문의 영애이자 차기당주이고, 효도는 이제 막 환생한 악마이다. 환생악마로도 능력이 부족한 효도가 리아스만 바라보고 온 몸에 상처투성이가 되고, 피를 토하고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효도는 리아스만 지키려 했다.

 

그런다고 리아스는 가시덩굴로 이루어진 성에 있는 아련한 공주처럼 있지 않는다. 강한 의지와 타인을 불허하는 노력, 그 모든 것이 효도에게 큰 힘이 되고, 존경을 받으며 지내온다. 효도는 그래서 리아스를 여자로서 좋아하나, 그런 벽이 있기에 좋아하는 표현을 할 수 없었다. 효도에게 그런 벽은 레이나레라는 타천사가 유마라는 소녀로 활동할 때의 그 배신감과 충격과 두려움이었다. 아케노 선배, 친구 아시아, 코네코 후배에게 위로 받을 때 효도의 트라우마가 떠올랐다.

 

“죽어주지 않으래? 더러운 하급악마가 함부로 내게 말을 걸어주지 말아주겠어? 아하하하! 그래! 너무나도 정석적인 데이트였지! 덕분에 굉장히 시시했어!, 빌어먹을 꼬맹이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잇세군! 제발 살려줘! 이 악마가 날 죽이려고 해! 나 널 정말 좋아해! 사랑해! 그러니까 함께 이 악마를 쓰러뜨리자!”

 

유마가 하던 말과 더불어 효도가 그동안 자기 마음에 새겨진 깊은 상처를 감정으로 드러낸다. 사실 리아스는 효도에게 이름으로 불러주길 원했다. 부장이나 선배라는 것은 결국 사회적인 존재, 남녀로서 존재로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효도를 향해 리아스가 적극적으로 대쉬해도 겁먹은 효도의 눈빛과 리아스를 향해 부장! 이라고 부르던 것은 결국 리아스가 여자로서 모욕감을 맛보게 했다. 아마 10권에서 효도의 결심이 중요한 이유는 리아스란 악마는 효도에게 결코 닿을 수 없는 영원한 저 공간 너머의 존재라고 여긴 것을 스스로 극복한 것이다.

 

그 동기는 리아스의 사촌인 사이라오그의 싸움이었다. 사자와 적룡제, 누가 더 강하고 끈기가 있는가? 이때까지 투쟁의식이 강하지 않은 효도는 사이라오그의 진정한 남자다운에 자신의 마초적인 의식을 일깨운다. 사이라오그의 폰인 사자갑옷을 착용하지 않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데도 온 힘을 다해 그 강적을 맞선다. 사이라오그와 싸우면서 효도는 이때까지 사이라오그와 그 팀원에 의해 무참히 쓰러져간 동료를 보면서 더욱 더 투쟁의식을 일깨운다. 여자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음흉한 생각하던 효도가 키바와 아케노 선배 등이 퇴장하자 상대방의 퀸을 정말로 죽이려 했다.

 

그 퀸이 효도의 공격을 당하기 전에 미리 사이라오그의 퇴장 명령으로 생명을 건졌으나 효도의 분노는 이미 하늘을 무너뜨릴 정도였다. 인간이란 자신의 이익이 손해 봐서 분노하는 것보단 진짜 좋아하는 친구나 동료들의 고통을 보는 순간 분노하는 것이 더 무섭다. 타인의 고통에 의해 폭발하는 분노란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광기와 폭력의 질주로 몰아넣는다. 자기의 목숨을 갉아먹는 저그노트 드라이브, 무한한 생명인 악마에게 그것은 100분의 1정도의 생명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위험하다. 이때까지 적룡제는 모두 저그노트 드라이브로 몸과 영혼이 파괴되었다.

 

게다가 육체는 소멸해도 영혼이라 불릴 그 사념들은 영원히 적룡제의 수갑에 깊이 잠들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자신마저 죽음으로 향하는 절대적 타나토스였다. 그런 타나토스의 세계를 효도가 무의식적으로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유는 리아스에 대한 효도의 갈등이었다. 효도의 삶은 모든 것이 리아스로부터 시작된 것이기에 음흉하고 변태 같아도 찌찌드레곤이란 이름으로 아이들의 영웅이 된 효도에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고민하게 만드는 그 큰 벽 아래 있었다.

 

찌찌드레곤에서 어떻게 새롭게 리아스와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리아스에 대한 포기로 죽음과 공포의 광기에 취해 몸과 마음을 파편처럼 흩날리는 것인가? 자신의 인생 앞에서 효도가 사이라오그의 주먹에 의식을 잃고, 그 와중에 스스로 포효하며 리아스를 좋아한다고 선언할 때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주먹을 사이라오그에게 휘두른다. 서로 주먹을 주고받고 하면서 사이라오그는 기절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진정으로 마음으로 주고받을 남자가 생긴 것이다. 효도의 그 솔직함, 그 솔직함은 결국 리아스와 같이 있고 싶다는 강렬한 자기에 대한 권력의지다.

 

작가인 이시부미 이치에이는 니체의 서적을 많이 읽었을까? 그의 이야기를 보면 마치 에로스로 가득한 효도가 미친 듯이 광기에 취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간다. 선악의 피안에 누가 나쁜지 착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인간이 서로 싸우는 이유는 그 상대방과 친해질 수 있는지 없는지 알기 위해서다. 사이라오그와의 싸움에서 효도는 진정 사이라오그가 친구가 될 수 있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단순히 효도는 리아스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리아스로 통해 무엇을 하는가이다. 친구인 사지는 회장 시트리와 더불어 악마사회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는 정치적 자유주의를 원한다.

 

물론 군주가 여러 가지라는 점에서 귀족정이 강한 악마사회이나, 마음만 먹고 열심히 하면 출세할 수 있는 입헌민주주의를 원하는 것이었다. 효도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리아스와 같이 하는 것이다. 리아스는 레이팅게임 1위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것은 목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리아스만 바라보는 효도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된다는 사실을 각인하고, 그 꿈을 위해 싸움에 뛰어든다. 목표의식이 생기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인간이든 그 무엇이든 삶의 목표가 없다는 것은 슬픈 것이다.

 

찌찌드레곤 특별쇼에서 악마세계의 어린애들이 모두 참석했는데, 어느 아이가 표를 구하지 못하여 울고 있을 때 효도는 특별히 그 아이에 대해 배려를 해준다. 물론 이것은 공평하지 않은 처사이나 한편으로 합당한 처사였다. 누구에게 꿈을 가질 권리와 그 꿈을 지킬 권리를 효도는 주었다. 리아스는 그런 효도의 친절함과 강함이 좋아했다. 니체가 말한 그 강한 인간이란 상대방에게 동정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서 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내뱉는 효도는 그 자신을 모두 내던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악마가 주변 테러리스트에게 공격당할 때 학교만 아니라 마을이 모두 없어진다는 이유로 필사적으로 싸운다.

 

그에게 악마라는 것은 이기적이고 타인에게 배려할 이유가 없으나 오히려 배려를 하게 된다. 효도는 그렇게 남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언제나 의지만 하던 그가 이제는 동료들이 그에게 의지하고, 아이들도 의지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만이나 교만으로 가기보단 그들과 함께 나아가기를 바란다. 어쩌면 효도의 꿈은 리아스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그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한 발판일지 모른다. 그레모리가문은 하급악마에게 매우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준다. 마치 가족처럼, 가족처럼 하급악마라도 서로 잘 대해주려는 리아스의 이상적인 세계를 위해 효도를 불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싸워서 죽이고 없애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 삶에 대한 절대적 신념이 결국 그를 강하게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대소년 공주님 1 - Novel Engine
모베 지음, 모브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이야기가 무척 막장으로 가는듯한 작품이나 나름 이 라이트노벨도 1권으로 끝내기 정말 아까운 작품이었다. <절대소년 공주님>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엉성한 이야기보단 너무 엉성한 인물이 가득했다. 그런데도 나름 읽을 만한 이유는 이 라이트노벨을 정말 끝까지 읽고 후기까지 참고해야 하는 것이다. 라이트노벨이란 장르가 한국에 거의 10년 정도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아직 일본에 비하면 발간 부수나 종류가 매우 열악한 현실이다. 그런 와중에 라이트노벨이 계속 개인적 번뇌나 망상으로 가득하여 읽어도 거기서 거기인 것도 역시 아쉽다.

 

물론 개인의 자유로운 창작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런 이야기만 가득하면 결국 돌고 도는 이야기 속에 라이트노벨이란 경소설이 그저 하나의 유치한 이야기로 전략하기 때문이다. 문화콘텐츠 면에서 스토리텔링이 중시되는 점을 고려하면 라이트노벨이란 콘텐츠의 무한한 보고이다. 일본에서 나오는 라이트노벨에서 만화, 영화, 드라마, 게임 등이 파생되어 상품화된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를 보면 그 인기도 상당하다. 한국에서 라이트노벨에 대한 작품성을 논하기에 아직 부족한 게 많다.

 

그 최대 이유는 작가가 얼마나 자신 스스로 수련 하였는가 이다. 라이트노벨이 만화와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로 택하기에는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 스토리라도 나름 규칙과 정해진 패턴이 있다. 물론 지나친 규칙과 패턴에 얽매이면 작품은 그저 붕어빵 공장에서 찍혀 나오는 레디 메이드에 불과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절대소년 공주님>을 적기 앞서서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큼에 대한 이유가 있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를 보다가 나츠메 소세키라는 작가가 나오는 부분이 있다.

 

조금 아쉬운 점은 내가 읽을 시점이 라이트노벨이 아니라 만화책으로 읽었기에 원작과 대조함에 있어서 얼마나 잘 분석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만화책에 주인공 스즈미야 하루히가 일본 근대문학의 최고선구자인 나츠메 소세키와 만난 것에 대한 에피소드다. 현대 일본 문화평론가 및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나츠메 소세키의 그 역량은 이루어 말할 수 없으며, 그가 내놓은 소설이나 각종 문학이론도서 역시 일본문학만 아니라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사실 나츠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마음>이란 소설을 읽어보면서 그의 치밀하고도 높은 글에 놀라움을 느낄 뿐이다. 바로 이런 문학에 대한 요소들은 라이트노벨에 직접적으로 차용했다는 점은 나름 작품에 대해 의미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는 전형적으로 포스트모던한 작품이다. 시공간의 비일치와 더불어 신이라고 여기는 스즈미야 하루히가 신적인 소양이란 없다. 절대적인 요소를 부정한 것이다. 그래도 작가는 그런 점을 생각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나, 그 상상력에는 그만큼 문학에 대한 기본적 소양이 있다는 사실이다.

 

<절대소년 공주님>을 읽으면서 먼저 후기부터 살펴보았다. 거기에 그가 읽은 도서로 유명 작가가 있었다. 나츠메 소세키,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일본 근현대 작가만 아니라 그 외 다수의 유명한 작가들의 서적들을 읽었던 것이다. 책의 본문을 보면 왕국의 공주를 납치한 마왕국의 한 신하가 마왕국의 경제와 내부 살림을 걱정하는 모습이 나온다. 물론 본래의 작가이름은 다르게 표시했으나, 암만 봐도 경제학을 생각하면 유명한 이름과 서적이 나온다.

 

시장경제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덤 스미스의 <국부론>, 아덤 스미스가 발견하지 못한 공황과 자본주의 구조를 제일 잘 분석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그리고 미국 대공황시기에 루즈벨트가 차용한 존 케인즈의 <일반론>이란 도서가 나왔다. 아무리 웃기려고 한 라이트노벨이라고 하나 적어도 이런 도서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작가 본인은 어느 정도 문학적 혹은 사상적 배경이 있었다는 증거다. 따라서 작품을 보면 그 나름대로 교훈이 보인다. 라이트노벨에서 무슨 교훈을 찾을 수 있는가에서 분명 찾을 수 있다.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에서 그 어떤 이야기라도 분명 철학적 담론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아주 못난 일본 극우적 만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저런 극우적 성향이 강한 만화에 교훈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판단하여 문제가 있다고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적인 부분이 그 이야기에 없을지라도 우리는 스스로 철학적인 부분을 찾아낸다. 생각해보면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만든 대화록이 그런 게 아닌가? 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기를 말이다.

 

<절대소년 공주님>의 답은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서 혹은 정말 엉망인 생활에서 마지막에 나온다. 억지로 납치당해 공주 행세를 해야 하는 레빈 루안에서 그가 최후의 행동이 그런 것이다. 남장으로 통해 용사 하는 실제 공주는 사실 절대적 힘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공주 대역인 레빈은 아주 힘이 약하고 소심한 남자아이다. 문제는 그 진짜 공주와 가짜 공주를 보위하는 메이드의 이야기다. 그 메이드가 어린 시절 인신매매를 당해 가혹한 생활을 했을 때 어떤 남자아이에 대한 기억이다.

 

그 남자아이는 다정했기도 했으나, 나중에 구출단이 와서 정의라는 이름의 폭력이 난행할 때 정의의 응징을 당해야하던 인신매매 조직까지 보호하려 했다. 칼을 가진 구출단이 잔인하게 인신매매 간부를 다리를 조금씩 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반대하자, 용사는 그 어린 남자를 구타한 것이 나온다. 메이드로서 보위하는 기사 넬의 어린 기억에서 레빈 루안의 행동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다. 조금 아쉬운 부분은 이 라이트노벨이 가이낙스 애니메이션인 <마호로매틱>과 많은 유사점을 보인다.

 

<마호로매틱>에서 마호로의 의상이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1기에서 마호로가 세인트의 전사 류가와 싸울 때 스구루가 나타나 그 연약한 몸으로 싸움을 말리는 부분에서 말이다. 단지 스구루는 연약한 신체인데도 세인트의 전사 류가에게 정면으로 막았다면, <절대소년 공주님>의 레빈 루안은 다른 식이다. 그는 여자아이처럼 작은 몸집의 남자아이고 게다가 매우 귀엽게 생겼다. 자신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대해선 모두 여자라는 점이다. 그는 용사로 나타난 공주 앞에서 만약 마왕성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자신의 팬티를 내리고 그 팬티를 내린 모습을 공개하겠다고 한다.

 

용사군이나 마왕군이나 모두 강력한 전사나 마법사다. 오로지 자신만 무기 하나 잡지도 못하고 마법조차 모른다. 하지만 레빈 루안은 그런 식으로 용자군을 스스로 물러나게 한다. 넬이 왜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이 레빈 루안에 의해 회복되는 것이다. 사실 마왕국에 납치당한 것은 사실이나 막상 마왕국의 일상은 두려움보다 재미라는 것이 있었다. 본래 왕국의 시녀였으나 알고 보니 마왕국의 신하였던 자도 아주 친절한 사람이고, 마왕은 세계정복이니 왕국타도가 아니라 그저 은둔형 폐인이고, 그 마왕의 여동생은 이름을 줄여 빈유라고 하고, 그 빈유를 지닌 몸인 만큼 키도 정신연령도 낮다.

 

남에게 도저히 위험을 끼치지 않을 것만 같은 마왕국이다. 당초 공주납치도 부당한 채무부담을 해소하기 위한 점에서 어떻게 본다면 우리는 그 본질을 모르고, 그저 알고 있는 것만으로 대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마왕과 마왕의 주변 인물을 모두 제거하고, 얼마든지 왕국으로 갈 수 있었던 레빈 루안이나 그는 선택하지 않았다. 그저 마왕국에 포로로 잡힌 공주로서 남는다. 서사적으로 완료설정은 공주가 구출되어 다시 복귀하여 레빈 루안은 일반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이나, 이 작품의 완결은 그저 레빈 루안과 넬이 마왕국에 남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보는 집단보단 그 집단이 적대시 하는 공간에 막상 가보니 사실과 다른 공간임을 알고 자신이 편한 위치에 있기를 거부한 것이다. 물론 왕국에 가도 공주 행세는 계속 해야만 한다. 그래도 마왕국의 포로보단 왕국의 공주대우가 훨씬 좋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진정한 용기와 정의는 무엇인가? 강한 힘을 가진 용사군단일까? 아니라면 용사단이 마왕국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것을 막으려고 약골인 자신을 날리는 레빈 루안인가? 물론 본질을 모른다면 결국 용사들의 손을 들겠지만, 본질적으로 본다면 무엇이 옳은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ㅏㅏ 2015-04-01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해조차 못한 주제에 그 경향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떠드는 모순이 같잖이 그지없다

만화애니비평 2015-04-01 09:09   좋아요 0 | URL
그런 네가 네 아이디 걸고 네가 적어봐
 
절규신데렐라 3
눈미 유 글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남성인 나로서는 여성의 심리적 변화를 아는 것은 무리다. 평소 눈치 없는 점도 기여하겠으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성이 기르고 있는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는 것은 아주 큰 변화가 있을 때란 점이다. 이번에 읽은 <절규 신데렐라> 마지막 3권에서 해인의 시작은 짧게 자른 단발머리다. 자신이 오랫동안 기르던 머리카락을 자른 것은 이때까지 살아온 인생관을 바꾼다는 의미와 같다. 그 의미를 부여하게 된 동기는 케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우연히 집 앞에서 노래연습하려고 아버지 차안에 있던 해인은 케빈과 공주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본다. 케빈의 입술에 공주의 입술이 닿는 순간, 해인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왠지 모를 아픔과 절망,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해인이 이때가지 제대로 알지 못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 해인의 마음에는 하나의 한()이 맺히기 시작한다. 때마침 라디오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반주음악, 해인은 우연히 그 음악과 자신의 상황이 일치하는 것을 느낀다.

 

음악이란 것은 감정의 표현이고,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달래기 위해 읊조리는 경우 책을 읽듯이 읽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듯이 읊는다. 그것은 죽은 자를 부르고 대답하는 것을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실제 죽은 자가 강림하는 것은 아니나, 그 노래의 의미는 옆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한 하나의 레퀴엠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자이든 살아있는 자이든 의식을 하는 것은 살아있는 자, 그리고 그것을 직접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위한 곡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마음 속 깊이 우러러 나오는 감정의 기복이란 당연히 큰 파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인의 성장은 바로 그 아픔에서 나오는 진정한 감정의 발견이다. 자신의 솔직함을 보여주고 싶은 해인은 그 각오를 다지기 위해 단발머리로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공주에게 케빈이 있다고 해도, 해인 본인 자신이 케빈이 좋아하는 것만큼은 사실이고, 그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는 자신만의 자신감이다. 케빈이 옆에 있어도 노래하는 자리가 긴장해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기에 해인의 노래는 매우 솔직하고, 또한 감정을 매우 깊이 자극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이끌게 하는 그 음색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거짓 없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해인의 재능을 알아본 작곡가 동호로서는 해인 그 자체가 보물이었다. 전에 해인이 녹화를 하지 못한 이유로 동호는 자신의 차에 해인을 태우고 집으로 향한다. 물론 동호는 해인에게 직접적으로 나쁜 마음을 가지지 않았으나, 연예계 뒷소문으로 동호는 좋은 평판이 아니기에 그것을 안 케빈이 해인에게 고백을 하고, 신데렐라의 가장 큰 절규 중에 하나가 해결된다.

 

하지만 절규 하나가 끝이 나도 다른 절규가 남아있다. 그것은 해인과 해인의 아버지에 대한 관계다. 어머니를 잃고 오로지 아버지에게 자란 3남매에게 아버지란 존재란 유별날 수밖에 없다. 케빈이 해인에게 돌아서고, 게다가 작곡가 동호에게 선택된 이유로 공주는 해인에 대해 앙심을 품고, 결국 해인의 아버지에게 해인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동안 자기가 믿고 노력한 해인이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최후 오디션에선 부녀의 인연까지 끊으려 한다.

 

해인이 이때까지 한 번도 아버지를 거슬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만든 성과가 아버지와 나누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해인은 자신을 뒤로 한 채 쓸쓸하고 작은 어깨를 보인 아버지에 향해 노래를 부른다. 아마 노래는 <절규 신데렐라> 1권에서 해인이가 예선 오디션에서 아는 노래가 없어서 어릴 적에 부른 동요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노래를 부르던 장면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와 추억이 나오기 때문이다. 해인에게 우리 해인이 노래 잘 한다고 박수치며 좋아하던 어머니 옆에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남편에 향하여 해인이 노래 소리 정말 예쁘죠?”라고 묻자, 남편은 ~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정말 예쁘구나.” 라고 대답해준다. 아내와 아이를 유독하게 사랑하던 한 가장은 해인이가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아내의 죽음을 정말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동안 아내와 해인이랑 보낸 시간을 잊어 버렸는지 모른다. 아니 잊기보단 생각하지 않으려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해인이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그에게 아픈 추억이 떠오른 것이다.

 

해인이 변했다고 생각한 아버지나, 알고 보니 해인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변한 것은 아버지 자신이 아닌가 싶다. 해인은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했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 당시 맺어진 유대감을 다시 찾기 위해 해인은 노래를 부른 것이다. 그 어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맨발로 달려가 거리에서 큰 소리로 애절하게 부른 해인의 모습은 이 작품은 절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본래 신데렐라 신화는 신데렐라가 왕자와 결혼한 것으로 끝이 나나, 여기서는 아버지의 관계까지 회복한 것이야 가능했다.

 

, 여자가 기존 가정에서 다른 가정으로 이동하면서 신분적 상승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기존 가정을 고수하고 다른 가정과의 관계성을 갖는 것이다. 신분상승도 단순히 케빈의 도움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이 있었다. 신데렐라 신화적으로 이 작품은 약간 뒤틀어 버린 작품이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우위에 있는 남성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움이 있더라도 자기의 능력으로 그 위치를 찾아갔기 때문에 기존의 신데렐라 콤플렉스와 많은 차이점을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규신데렐라 2
눈미 유 글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절규 신데렐라 2권에서는 갈등의 전조가 보인다. 일단 무대 위의 주인공들은 1권에서 다 모여 있으며, 그 인물들이 앞으로 내보일 갈등과 위기의 순간은 다가온다. 서사 속에 인물들의 관계에서 이른바 동기 즉 모티브라는 것이 중요하다. 왜 그렇게 하게 되었는가? 점에서 말이다. 해인의 경우 왜 작곡가 동호에게 강한 관심이 있었을까 이다. 작품을 보면서 느낀 것은 서로 간의 공감이란 것이다. 작품 내에서 극적인 플롯으로 해인의 어머니의 죽음이다. 해인의 아버지가 평소에 아이들에게 유유하게 대하다가 갑자기 엄격해진 것은 어머니의 부재를 대신 처리하기 위해서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저녁까지 먹이는 해인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꼰대로 나온다. 가족의 죽음은 그만큼 인간의 인격이나 성격에 큰 변화를 주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해인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실어증에 걸리는 것이 나온다. 물론 위에 오빠와 언니가 있으나 그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겪어도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으나, 해인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감정에서 그 감정은 관념적인 영역도 포함되나, 그 관념적인 부분을 지나 육체적인 감각까지 앗아버렸다.

 

집 마당에서 나비를 쫓아가던 중에 넘어서 이마에서 피가 흘려도 아프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한 채 그저 입만 뻐금뻐금 거리는 해인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은 그야말로 커다한 충격이었다. 그 덕분인가? 해인의 감수성은 정상적인 15세라기보다는 차라리 아직 초등학교 학생에 가깝다. 2차적 성적 변화가 육체적으로 이미 왔으나, 정신적으로 오지 않았던 것이다. 사춘기 소녀의 모습에서 그녀는 동호에 대해 남성이란 영역보단 아직 7세 시절의 자신의 느낌은 반영한다.

 

그 이유는 바로 공감이란 것이다. 공감이란 서로 뜻이 통하기도 하나, 그 통하는 정신적 유대감이 결국 일직선이란 공간적 한계가 있는 것이다. 동호가 우연히 해인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해인이가 자신의 변칙적인 피아노곡에 맞추어 노래를 할 수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새겨진 지독한 그리움이란 슬픔이다. 단지 동호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들여다보면 사랑한 마음만큼 미움과 절망이 가득하고, 해인은 어머니를 사랑한 마음만큼 추억과 애한이 스며있다.

 

2사람이 가지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공통적이나, 동호의 경우는 잊고 싶은 과거라면 해인은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인 것이다. 2사람의 접점은 바로 동호가 15세 피아노 연주에서 드러난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동시에 자신을 버리고 먼저 가버린 배신감에서 슬픈 마음을 피아노 선율로 흐르는 것이다. 그 선율을 해인은 듣고, 자기 자아의 내부 깊숙하게 박힌 어머니의 죽음은 각인하고, 비로소 울음을 터뜨리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슬픈 것은 해인이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우는 장면이 아니다. 해인이 우는 장면을 보고 그리고 해인이 말을 하는 것을 보고 해인의 아버지가 웃었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도 마음이 괴롭고 힘들 것이다. 해인이가 어머니와 딸이 지니는 가족애는 7년이나, 아버지는 그 이상으로 가족애를 가졌을 것이다. 그것을 받아 들이야 하는 해인의 아버지야 말로 어떻게 보면 비극이야기 속의 희극적인 인물일 것이다. 슬픔마저도 웃을 수밖에 없다는 그 아이러니한 모습을 말이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작품 내에서 꼼꼼하고 전형적인 소시민 인간상으로 보이는 하나의 조건이라고 본다. 해인이 왜 연애감정이 없는가에서 아버지의 교육관이 강하게 작용한다. 오로지 의대에 가야한다 성공해야 한다라고 하는 목표만 주었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그것이 아니면 자신의 마음이 쓰러질지도 모른다.

 

동호의 예정신곡인 Please don't change 것을 생각해도 제발 변하지 말아주세요. ,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계속 자신에게 변하지 말아야 대상이고, 그 대상은 어머니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늘 변해가는 존재이다. 자신이 살아있음은 곧 죽어가고 있음이다. 어제와 오늘은 같아 보여도 다르게 조금씩 변해간다. 변화의 모습이 자신조차 찾아보지 못할 정도로 늘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해인은 변해가기 시작한다. 그 변화의 중심은 케빈이 있었다. 삼각관계의 구조가 <케빈-해인-동호>에서 이제 새롭게 <해인-케빈-공주>라는 다른 구조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공주가 해인이의 비밀을 알았고, 강한 자존심과 독점욕을 가진 공주는 잘생기고, 명랑한 케빈을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런 조건이 있었으나 한편으로 해인이라는 존재가 눈에 가시처럼 보였고, 해인이의 모든 것을 빼앗고 방해하고 망치고 싶은 질투심이 작용한 것이다. 결국 해인의 비밀을 담보삼아 공주는 케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때까지 그냥 친구처럼 보이던 케빈이 공주 옆에서 인형처럼 있는 것을 보고 해인은 이때까지 느끼지 못한 감정을 느낀다. 동호는 동경하는 사람으로 우러러 봤으나 케빈은 그저 친한 친구처럼 느꼈다.

 

어려울 때 도움을 주던 친구, 하지만 막상 그 친구가 태도가 변할 때에는 해인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어릴 적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시기와 비교하면 미치지 못하나 이때까지 전혀 알 수 없었던 감정이다. 해인이 오디션을 봐야할 다른 후보들의 노래를 듣고 나서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 차마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음악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감정의 표현이다. 기교나 기술과 같은 전문적인 요소도 중요하나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에 나오는 깊은 마음이다. 그 깊은 마음에서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케빈이란 존재가 무의식적으로 매우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집에 오면서 계속 울던 해인이 여태까지 아버지에게 늘 착한 딸이었으나, 처음으로 반항을 하게 된다. 매일 공부하라고 하고 모의고사 일정만 챙기던 아버지에게 해인은 매일 공부공부, 그만 좀 해!! 아빠는 공부 말고는 아무 것도 관심 없지?!”라고 한다. 그 말을 듣자 아버지뿐만 아니라 언니와 오빠 역시 충격에 빠진다. 해인이의 노래에 감수성이 풍부하게 된 이유는 어머니와의 추억이다. 그러나 이제 어머니와의 추억으로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케빈에 대한 마음이 이제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켰고, 그 케빈이 공주와 같이 연인행세를 하는 것을 보고 해인의 감정을 흔들리게 만든 것이다.

 

케빈이란 존재가 결국 해인에게 제2차 성징기의 정신적 영역을 열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적 요소는 케빈 역시 마찬가지다. 해인은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집착에 의해 이성에 대한 감정이 없다면, 케빈은 이와 달리 어머니와 같이 있어서 이성에 대해 감정이 없었을 것이다. 케빈은 자신의 친구인 태희에게 해인을 부탁하는 모습에서 다른 이성친구들에 대해 이성적 감정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그 동기는 패션디자이너인 어머니의 영역이 크다. 케빈의 가족구조를 보면 아버지는 나오지 않고, 오로지 어머니만 나온다.

 

게다가 한국남자이면서 화장이나 메이크업과 같은 일에 관심을 가진다. 케빈의 성격이나 인격은 어머니에 의해 많이 조성된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요소에서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잘 지내는 아들에서 모자의 유대관계는 매우 단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와중에 해인과의 관계에서 케빈은 어머니보다 해인에 대한 감정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방에 혼자 들어와 눈물 흘리는 케빈에게 서로의 감정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채로 아파하고 있다는 뜻이다. 만화책 이름이 절규 신데렐라인 이유는 정해진 시간이 넘으면 아버지의 통제로 인해 그 자체가 가수지망생이란 환상에서 현실로 변모한다.

 

그런 와중에 신데렐라가 절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때까지 몰랐던 신데렐라가 자신을 프린세스로 만들어준 대상이 결국 진짜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도움을 주는 케빈 역시 명랑하고 성격 좋으며 미남인 청년이다. 그러나 그런 소중함을 알아채지 못하다가 그런 존재가 옆에서 멀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인간의 관계에서 그런 요소들은 많이 나타난다. 케빈은 처음부터 해인에게 관심이 있었고, 동호의 접근에 질투심을 내비추었다. 그렇기에 차가운 모습으로 해인을 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케빈의 모습에서 해인은 자신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슬픔으로 절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