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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털도사 박스세트 (3disc) - 머털도사 + 머털도사와 108요괴 + 머털도사와 또매
황선길 감독 / MBC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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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추억에 잠시 잠겨 어린시절에 보는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 작품은 바로 머털도사입니다. 머털도사가 처음 tv에 방영한 시기는 1989년 지금(2010년)으로부터 21년전입니다. 21년 전이라면 애니티운 회원 분들 중에서 대학생 이하인 고등학생 및 중학생, 초등학생 회원분들은 접하기 어려운 작품일겁니다. 그래도 한국에 살아 한국 애니메이션을 본다는 것은 조금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일본 애니메이션이 대부분 한국 애니메이션 향유자들로부터 사랑받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이든 미국 애니메이션이든 혹은 유럽 애니메이션이든 어느 것을 본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나 그것만 본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도 좋아하는 것도 좋으나 한국 애니메이션도 혹은 그 외의 작품들도 한번 보는 것이 좋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내 오타쿠라는 존재에 대해 편파적인 부분을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제가 소개할 머털도사도 한국 애니메이션도 재미난 작품이 있구나 생각하기 위해 한번 리뷰를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화면 처음에 기획 황선길이란 나옵니다. 황선길 교수는 홍익대학교 명예교수로 계시며, 예전에 애니메이션 영화사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한국 만화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나옵니다. 원작자 이두호 화백, 황선길 교수님이 홍익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신다면 이두호 화백은 현재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계십니다. 한국 만화애니메이션 석사학위논문이 가장 많은 곳이 세종대학교인데, 거기에는 이두호 화백말고 이현세 화백도 계십니다. 그래서 이 머털도사 시리즈에서는 한국 만화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거장이 만든 작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계기로 리뷰를 적어봅니다.

머털도사가 진행되는 공간은 대략 조선시대인듯 합니다. 옷을 보면 한복이 등장합니다. 머털도사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한국적인 요소가 상당히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한복이 등장하고 한옥과 초갓집이 보이며, 주변 경치와 배경 게다가 그림체도 조금 한국 전통의 맛이 느낄 수 있습니다. 게다가 ost 배경음악도 한국 농악이나 민속악기를 연출함으로서 한국 정서를 잘 표현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입니다. 누덕마을에 누덕봉에 사는 머털이와 누덕도사입니다. 누더기도사는 나이가 300살이 된 도인으로 상당한 도력을 가지고 있으며,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와 같이 바둑과 장기를 둘 정도로 매우 고귀한 도사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도력이 높고 자신의 신분이 옥황상제와 바둑둘 정도이나 가난한 누덕마을에서 제자 머털이를 데리고 안빈낙도를 즐기는 노인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머털이는 어린 시절 고아로 자라 10년동안 누더기 도사 아래 살아온 인물로 그렇게 머리가 영특하지 못하고 잘생기지 않고 또한 잔머리를 굴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말썽만 부리고 눈치보고 게으름과 엉뚱한 생각만 하는 바람에 항상 누더기도사에게 혼쭐이 납니다. 누더기도사는 도력이 상당하나 자신의 도력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머털이가 잘못하면 자신의 하얀 긴수염과 나무지팡이로 머털이의 머리를 여기저기 두드려 줍니다. 그래서 머털이는 스승인 누더기도사를 존경하기는 하나 한편으로 매우 원망합니다. 도력은 가르쳐주지 않고 맨날 자신을 부려먹기만 한다고요.

머털이는 누더기도사의 행동에 대해 언제나 불만을 느끼고 누더기도사를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누더기도사는 인간의 마음을 아는 독심술이 가능했습니다. 머털이가 그저 마음속으로 생각한 내용을 그대로 입으로 애기해주고 그리고 또 머털이는 혼쭐이 납니다.

그러던 어느날에 누더기도사에 왠 청년 하나가 찾아옵니다. 그의 이름은 꺼꿀이, 꺼꿀이는 머털이와 달리 키고 크고 인물도 비상하며 체력도 좋고 게다가 타고난 재주까지 겸비한 완벽한 사나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타고난 재주가 있음을 알고 자신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이 누덕마을로 찾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누덕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누더기도사에게 가서 자신을 제자로 삼아 도술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꺼꿀이를 앞에 나두고 누더기도사는 평소에 하지 않은 행동들을 합니다. 위옷을 벗어 효자손으로 자신의 등을 긁고, 게다가 방안은 지저분하여 쥐와 고양이가 서로 내쫓는 장면까지 나올 정도로 지저분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영락없는 노인으로 묘사하합니다. 여기에 꺼꿀이는 자신이 찾아올 곳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누덕마을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꺼꿀이가 찾아간 곳은 누덕마을 건녀편의 지락마을이었습니다. 지락마을에는 누덕마을의 누더기도사 못지 않은 강력한 도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인물은 왕지락도사였습니다. 그는 지락마을의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상당한 능력을 가진 도사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락도사는 욕심이 강하고 매우 잔인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누덕마을에서 나온 꺼꿀이를 자신의 제자를 삼은 이유도 꺼굴이가 남들보다 잔인함과 욕심이 많은 점이었습니다.

물론 꺼꿀이가 능력을 타고난 인재라는 점에서 지락도사는 처음부터 그가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 것을 알았습니다. 지락도사는 꺼꿀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서 수제자로 삼아 약 3달 동안 자신이 가진 비기를 전수해 줍니다. 이에 꺼꿀이는 지락도사의 강력한 도력과 교육으로 인해 상당한 실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수련기간이 어느정도 되어갈 무렵 지락도사는 자신의 제자 꺼꿀이에게 누더기도사 제자인 머털이와 대련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락도사는 누더기도사를 만난 후에 머털이와 꺼꿀이의 도술대회를 열자고 합니다. 그리고 날을 잡아 두 스승의 제자는 누덕마을과 지락마을 중간에 있는 공터에서 대결을 펼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지락마을과 누덕마을의 관계는 사실 좋지 않습니다. 누덕마을 가난한 마을이나 모두 다정하게 오순도순하게 살아가는 마을이라면 지락마을은 모두 욕심많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은 동네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합에서는 두 마을의 대표가 나감으로써 서로 간의 자존심 대결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긴장감이 팽팽한 대결에서 만약 패배한다면 그 사람은 상당한 모욕과 조롱을 받아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대결을 펼치고 처음에는 머털이가 지는 듯한 상황이었으나 사실 머털이는 깊은 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단지 그 사용법을 이때까지 몰랐던 것입니다. 머털이가 도술을 부릴줄은 아나 사실 스승의 부탁에 의해 참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락도사는 상당한 도술을 갖춘 도인일 뿐만 아니라 상당히 높은 수완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머털이에게 최면을 걸어 머털이의 도력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고 그를 함정에 내몹니다. 그리고 함정에 걸린 머털이는 자신의 도력이 숨어있는 머리털이 모두 잃어버리고 흉칙한 얼굴을 가지게 됩니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머털이를 그동안 돌보던 누더기 도사가 지락도사의 공격으로부터 머털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합니다.

이에 머털이는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과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자신은 흉칙한 모습이 되어버리고 스승님이 눈앞에서 죽은 것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누덕마을 주민들은 지락도사에 의해 모두 지락마을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지락마을 사람들은 누덕마을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해 갖은 폭력에 모자라 누덕마을을 불살려 버립니다.

그리고 이런 마당에 머털이의 행방이 문제였습니다. 비록 누더기도사는 죽어버리고 머털이는 도력을 잃었으나 사실 알고 보면 상당한 도력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누더기도사가 눈에 사라져도 머털이의 목숨을 나둔다면 차후 화끈이 될 것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락도사와 꺼꿀이는 머털이를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이때 지락도사의 하나뿐인 외동딸인 묘선이가 앞에 가로막아 머털이를 죽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묘선이는 아버지 지락도사와 달리 그렇게 마음이 모질거나 오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묘선이가 평소 아버지를 잘 따르는 딸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날 이때까지 아버지인 지락도사에게 반항조차 하지 않은 묘선이가 눈앞에서 불쌍하게 되버린 머털이가 죽게 되자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반항을 한겁니다. 누더기도사도 죽었는데 가엾을 머털이까지 죽인다면 너무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서이죠.

이렇게 머털이는 묘선이에 의해 무사하게 목숨을 부지하지만 머털이는 자신이 흉칙한 모습이 되었다는 사실과 자신의 실수로 인해 누더기도사가 죽은 사실과 게다가 자신의 패배로 인해 누더기마을 주민들 지락마을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 매일매일 힘든 노역에 시달린 것을 보고 매우 괴로워 합니다.

이런 불쌍한 머털이에게 꺼꿀이는 계속 장난치면서 머털이에게 마음의 상처를 안겨주고 머털이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에서 매우 슬퍼합니다. 이때 유일하게 머털이를 챙겨준 것은 자비로운 묘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상처받은 인간은 남에게도 상처를 주듯 머털이도 묘선이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의 상처를 받는 머털이와 묘선을 보는 꺼굴이는 매우 즐거워 합니다.

인간의 잔인함과 오만 그리고 욕심은 드디어 최후에 화를 부르게 됩니다. 꺼꿀이는 머털이와 누더기도사를 물리친 후에 더 이상 자신 앞을 가로 막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꺼꿀이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라 배운 것이 하나면 여러가지를 배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천재적인 능력을 가졌기에 어느 순간 꺼꿀이는 자신의 스승인 지락도사를 앞서게 되었습니다.

꺼꿀이는 지락도사가 가르쳐준 모든 도술과 거기에 몰래 어깨너머 배운 도술까지 익혀 어느 순간 스승을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스승을 능가한 꺼꿀이는 자신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욕에 가득하여 먼저 스승인 지락도사에게 도전합니다. 꺼굴이는 지락도사에게 배운 그 도술로 그대로 지락도사에게 공격합니다.

그리고 꺼꿀이는 결국 스승인 지락도사을 무찌르고 지락도사는 결국 제자의 손에 의해 은혜를 원수로써 받아 죽기에 이르게 됩니다. 지락도사는 죽어가기 전에 주마등화처럼 누더기도사의 얼굴을 떠오르게 됩니다. 자신의 눈에 그렇게도 거슬리던 누더기도사가 이제는 자신이 가장 이해하게 된 인물로 변했습니다. 지락도사의 마지막 절규처럼 왜 누더기도사가 똑똑한 꺼꿀이보단 멍청한 머털이를 제자를 들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제일 중요한 것은 능력이나 재능이 아니라 그 인간 됨됨이란 점이었습니다. 아마 이게 머털도사 작품에서 가장 교훈이 있었던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지락도사의 입처럼 우리는 인간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 사람의 능력, 재능, 성적만 보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공부를 잘하거나 돈을 잘번다고 해도 결국 그 사람이 인간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지락도사를 죽여버린 꺼꿀이는 자신이 지락도사가 되어 마을주민과 묘선이를 속입니다. 그렇게 속이던 꺼꿀이에 대해 머털이는 처음에는 잘 따르는 것처럼 굴다가 마을공사가 끝나자 말자 자신의 본심을 밝혀 꺼굴이에게 도전합니다. 머털이는 아직 도술이 완벽하지 않았지만 이제 자신의 도술을 드디어 각성하게 됩니다. 자신의 머리털을 뽑아 주문을 외우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머털이의 도술은 그 시대 최고의 도인인 누더기도사에게 그대로 전수받은 것이라 도력 자체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머털이는 자신의 도술을 이용하여 자신과 묘선, 그리고 누덕마을주민을 억압하는 꺼꿀이에게 대항하게 됩니다.

꺼꿀이는 최후의 공격으로 독수리로 변하여 머털이를 공격했으나 머털이는 자신의 도술로 이용하여 독수리의 털을 그대로 뽑아버립니다. 머털이의 도술에 걸리면 당분간 걸린 존재는 꼼짝하지 못하게 되어 꺼꿀이는 맨살이 들어난 통닭같은 독수리가 되어 결국 지면 아래 떨어져 죽게 됩니다. 사실 머털이와 승부하던 꺼꿀이는 아무리 머털이에게 공격하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머털이의 도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상당한 경지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머털이가 꺼꿀이에게 이기자 이제 더 이상 누덕마을 주민들은 지락마을 주민들에게 억압당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머털이는 지락마을과 누덕마을 주민들이 서로 경쟁하지 않고 같이 돕고 잘 지내기를 바라면서 마을을 떠납니다. 이게 사실 머털도사에서 밝히는 다른 교훈 중에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작품 초반에 보면 누덕마을 주민들은 가난하지만 모두 사이좋게 지내는 반면 지락마을 주민들은 모두 시기가 많아 사이좋지 못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지락도사가 누더기도사를 공격하여 죽게했을 때에 지락마을 주민들은 누덕마을 주민들을 억압했는데, 사실 지락마을 주민들은 상당히 부유하고 잘 사는 동네 주민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지락도사의 회유에 의해 누덕마을 주민들을 괴롭게 합니다. 자신들이 부귀영화를 즐기기 위해서 말이죠. 어떻게 보면 지락마을 주민들은 돈많은 부자들이고 누덕마을 주민들은 가난한 소시민일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소시민을 억압하는 부자들에 대한 애기들은 자주 한국전설동화에서 나옵니다. 머털도사에서 주장하는 것은 인간은 능력과 재능보단 인간성이 중요한 점과 인간은 인간의 존엄성을 받아야 한다는 평등의식도 있습니다.


그렇게 머털도사 이야기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훈적으로 보여준 뒤에 이야기를 마치게 됩니다. 본래 지락마을은 지락도사가 지도자로 군림했으나 이제 지락도사도 꺼굴이도 없고 게다가 지락도사의 외동딸인 묘선이도 마을을 떠납니다. 앞으로 마을은 누군가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 의해 살아가겠지요? 머털이는 그렇게 마을에 평화를 준 뒤에 누덕마을로 올라갑니다. 이때 묘선이는 머털이를 따라 같이 가는 것으로 애기는 끝이 나고, 1990년도에 머털도사와 108요괴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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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 리뉴얼판 박스세트 (8disc) - TV판 26부작
Various / 뉴타입DVD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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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
아직도 말이 많고 많아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 중에서 가장 담론이 많은 작품 중의 하나이다. 이른바 오타쿠라고 하는 서브컬쳐 매니아들 중의 매니아들이 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하나의 새로운 가치관을 일어낸 것이다.

애초부터 이 작품의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는 일본 오타쿠 제1세대인 건담, 우주전함야마토를 즐겨보던 SF애니메이션 오타쿠이었다. 그런 그가 오타쿠로서 살아오면서 자신이 처한 오타쿠적인 현황을 이 작품으로 새롭게 바꾸어 놓았다.

그런다고 해서 오타쿠가 모두 긍정적이고 좋다는 것만은 아니다. 단지 오타쿠란 존재를 다르게 볼 수 있게 하나의 계기였다. 그럼 이 작품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이 작품에서 보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암울한 오늘날의 어른과 아이들이여 이것을 보고 각성하고 거기서 헤어 나와라이다. 그리고 그 암울함은 어른이란 당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이며, 그 어두운 세계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어두운 세계를 만들 수밖에 없는 당신의 지난 과거라고 말이다.

실제 이 작품의 주인공인 이카리 신지는 그런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현실에서 억지로 자신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야 한다. 선택권은 딱히 주어지지 않으며, 선택하지 않을 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고통받는다. 그것을 방관하기에는 어린 청소년인 이카리 신지에게 과도한 상처였다.

인간은 왜 인간 스스로 또는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가? 왜 인간은 서로에게 교감과 대화로 통해 풀어가기 보다는 자신의 관념만으로 보고 해결하려고 할까?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과거 전쟁이후 아버지란 존재가 사라져간 일본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부모가 부모로서 역할하지 못함에 대한 일종의 오류현상을 보여 준 것이라고 본다.

그런 오류적인 현상을 그저 방관하고 받아들이고 머물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꾸며갈 것인가? 기존에 만들어진 세계에 모든 것을 뒤엎고 만들기란 사실 무리다. 그러면 방법은 무엇인가? 이 작품에서는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에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슬픈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란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보단 자신만의 혹은 그들만의 도그마에 젖어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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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라 (2disc)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 / Pioneer Entertainment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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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토모 카츠히로 감독이 제작한 아키라는 1988년에 제작된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다. 이 작품은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와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더불어 일본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 3대 명작으로 뽑힌다.

사이버펑크(Cyber Punk)의 단어를 줄이면 SF라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어인 공상과학영화(science fiction film)가 아니라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펑크(Punk)의 합성어이다. 사이버네틱스란 생물 및 기계를 포함하는 계(系)에서 제어와 통신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고, 펑크는 1970년대 락뮤직 흐름에서 이른바 펑크락이 등장했는데, 이 펑크는 젊은이들이 기존의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정신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이버로 통한 인간 및 생물과 기계의 조합에서 반항의식을 표출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사이버네틱스가 나오는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펑크라는 저항의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작품들을 이른바 사이비펑크라고 명명한다.

이런 작품 내의 저항적인 정신을 반영하여 아키라는 기존 관념과 그 관념으로 인해 미래가 암울한 초상이 될 것이라는 다소 비관적인 요소를 담재하고 있다. 물론 아키라가 나올 때의  일본 경제는 그렇게 밝지 못한 상황이었다.

가속되는 경기불황과 젊은 계층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투명성, 그리고 사회적으로 나오는 모순 등 이 모든 것이 아키라에서 비추어지는 하나의 불안요소였다. 그래서인지 아키라의 주된 배경인 2018년 도쿄는 그저 암울하고 폭력적이고 반정부적인 시위가 끊임없이 이루어져 있었다.

학교에 다니는 청소년들은 착실하게 수업 받는 것이 아니라 패거리를 몰려다니며 서로 패싸움을 일삼고, 오토바이로 경기하며, 학교라는 곳은 배움의 터가 아닌 그저 불량배들의 소굴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의 압력과 언론통제는 현실의 근본적인 원인을 풀어가기 보단 뭐든 공권력으로 행사했고, 거기서 주인공인 테츠오는 정부의 실험체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군연구소로 끌려 간다.

군에 가서 테츠오는 생체실험을 당하여 그는 이른바 아키라라고 불리는 하나의 새로운 객체로 등장했다. 당시 일본 사회는 매우 혼란스럽고 암울했다. 사회적인 불안감이 군중심리를 자극하여 반정부 테러와 시위, 게다가 불명확한 아키라에 대한 메시아적 신념으로 마치 성난 이리들처럼 군중들은 들고 일어섰다.

이때 테츠오는 군연구소에서 실험당한 결과로 자신의 몸을 아주 강력하게 되자 자신 안에 움트고 있던 반항의식을 물리적으로 표출했다. 그런데 테츠오는 그저 자신의 불만을 돌출했지 자신의 이성적인 가치관에서 표출한 것이 아니었다. 테츠오의 불만은 기존 사회고 그 사회는 군부대가 주도한 정부기관이었다. 자신을 강제로 실험한 것과 그저 목표 없는 불만을 정부 군부대에 도전하자, 방향 잃은 군중들은 테츠오를 하나의 영웅으로 섬기게 되었다.

사회의 불안이 어느 한 불량배를 영웅으로 신격화 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 영웅은 진정한 영웅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불만과 폭력욕구를 겉으로 폭발시킨 것이다. 자신의 폭력욕구가 지나치다 못해 테츠오는 그 욕구 안에 잡혀 버려 결국 자신마저 버리게 된 것이다.

몸은 너무 비대해져서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갉아먹고,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다. 게다가 자신을 아키라라며 테츠오를 신격화하던 미치광이 광신도마저 죽음의 세계로 삼켜 버린다. 이것이 인간의 광기라는 것일까? 아니면 억지로 억압하여 분출된 인간 자체의 어둠일까? 끝에 보면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본래 아키라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사실 아키라의 정체는 어린 아이들의 뇌척수가 어느 표본 통에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어린 생명들을 억지로 개조하여 그들을 하나로 도구로 삼은 정부조직 즉 기존 사회의 비인간화를 그렇게 비극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인간의 가치가 그렇게 도구화되어 혹은 광기화 되어 자신의 존재마저 삼키는 그런 사회상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가를 보여주었다. 그런다고 아키라에서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테츠오는 자신의 친구면서 라이벌인 가네다를 애증의 대상으로 여겼지만, 최후에 테츠오는 자신의 소멸과 더불어 가네다의 우정을 다시금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테츠오는 가네다와 고아원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로 테츠오가 어려울 때마다 가네다가 옆에서 도와주었고, 사실 가네다는 테츠오가 속한 폭주족의 리더였다. 그에게 언제나 도움을 받아 고마움을 알았지만, 가네다의 그늘 아래 있던 울분이 하나의 모순적인 감정으로 이어졌다. 물론 사회적으로 버려진 존재라는 것과 암울한 청춘, 그리고 정부의 강압이 테츠오라는 한 청소년을 괴물로 만든 것이다.

사실 비행을 하고 잘못을 뉘우치지 않은 현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왜 그들이 그렇게 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 우리는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면 단지 그들이 잘못하면 그들에게 책임을 떠맡기면 편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책임의식을 만약 알고 있다면 기성세대들이 가진 어긋난 가치관을 바꾸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이 맞다고 하며, 다시 기성세대로 접어드는 젊은 계층에게 강요하고 그들 역시 그렇게 자신들로 만든다. 그래서 이런 모순들은 버리기가 어려운 것일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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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 - [할인행사]
오시이 마모루 감독 / SRE (새롬 엔터테인먼트)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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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는 2가지 버전이 있다. 한가지는 카미야마 켄지가 만든 TV판 공각기동대와 다른 하나는 오시이 마모루가 만든 극장용 공각기동대가 있다. 공각기동대는 다른 애니메이션과 달리 2감독의 프로듀싱으로 통하여 각기 다른 소재와 스토리전개로 재미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2가지의 공각기동대 중에서 한가지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이다. 그의 공각기동대는  TV판처럼 1쿨당 26편이나 되는 중장편이 아니나 스크린 위의 80분으로 통해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만큼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를 본다는 것은  TV판 공각기동대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느낌이 있다는 뜻이다. 우선 이 공각기동대의 주요 스토리는 공안9과의 현장 작전지휘를 맡는 쿠사나기 모토코 소령으로 통해  숨막히는 첩보공작활동과 그리고 거기서 등장하는 인형사로 먼 미래의 인간과 기계 그리고 영혼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인 쿠사니가 모토코는 기존 현대사회로 본다면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다. 왜냐하면 소령은 우선 여성이란 점과, 신체가 세포로 구성된 것이 아닌 기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생각하고 사고하는 능력이 인간의 생뇌가 아닌 전뇌로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간-기계, 남성-여성이라는 이원화된 구조에서 탈피한 존재이다. 사실 쿠사나기 모토코는 여성 사이보그로 나오나 그녀의 작전 중에는 남자로도 혹은 계속 여자로도 활동했다는 것처럼 보통인간과 다른 새로운 존재이다.

쿠사나기 모토코는 본래 인간이었으나 어느 계기로 인해 기계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기계인간은 인간의 기억을 지닌 뇌를 이식하여 전뇌화하여 그 전뇌로 통해 모든 것을 판단하고 느낀다. 분명히 기계의 몸에 전뇌까지 가지고 있으니 쿠사나기 모토코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기계에 가깝다.

자신의 기계적인 신체를 보며 인간으로 살아가는 쿠사나기 모토코는 뭔가 조금 이질적인 존재로 비추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고민은 조금 다른 곳에서 전환되어 버린다. 국가 스파이로 지명수배된 인형사가 공안9과 사무실로 들어오자 인간과 기계의 차이점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공안9과로 잡혀온 인형사는 자신이 기계임은 맞고 인간이 만들어준 전뇌로서 판단하나 자신도 생명을 가진 하나의 생명이란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영혼을 지닌 인간조차도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는 점에서 인형사 자신과 무엇과 다르냐고 말한다. 그런 인형사의 도발적인 말에 쿠사나기 모토코는 인형사에 상당한 관심을 가진다.

그런 와중에 공안6과의 첩보작전으로 인형사는 납치당하고 폐기처분당하려 한다. 사실 인형사는 공안6과에서 만들어낸 프로그램인데, 그 프로그램 자신이 기계신체를 가진 후에 하나의 생명체로 자각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프로그램으로 되버린 인형사 역시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받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그것은 바로 쿠사나기 모토코와 결합하여 새로운 전자생명으로 태어나어 자신도 인간과 같이 죽음을 맞이하여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를 바꾸어 진화하는 생명이 되고자 했다. 그런 의지를 가진 인형사와 인형사의 의지를 받은 쿠사나기 모토코는 결국 데이타결합으로 통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하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은 공안6과는 두 사이보그를 무참하게 박살내 버리고, 겨우 쿠사나기 모토코의 전뇌만이 무사했다. 다행히 쿠사나기 모토코는 같은 공안9과 동료인 바트에 의해 구출되고 의수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 어린 소녀의 의수에 자신의 정신을 담게 된다. 비록 육체는 성인여성에서 어린 소녀로 변해도 그녀의 정신은 그녀였다.

육체적인 겁데기가 어느 것이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쿠사나기 모토코는 인형사와 새롭게 결합하여 네트라는 넓고 넓은 세계로 들어가며 작품은 막을 내린다. 이런 공각기동대는 기존 인간과 기계의 이원화적인 것을 함열시킴으로써 수동적인 기계와 여성을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만들려 했다. 물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자신을 가두고 있는 육체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의 영혼이 끝없이 진화함은 매우 신선한 작품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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