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싱글싱글 웃었다. 감독이 짜증을 냈는데도 그녀는 마냥 싱글벙글이었다.
왕립 연극단의 대부분들이 빈민 출신들이라 다들 소극장적인 분위기도 많이 남아 있어서 누군가가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얼굴이 좋으시군요. 무슨 좋은 일이 있었나요?”

“…아, 좋죠.”

아주머니는 살짝 비밀을 알려주듯 그 단원의 귀에 속삭였다.

“글쎄. 어제 저녁에 보니 바닥에 빛나는 돌이 떨어져 있지 않겠어요? 우리 아저씨가 금은방을 해서 내가 잘 아는데… 십중팔구는 큐빅이지만…그건 진짜같은 거에요.”

“오오…그거 진짜 다이아 같으면 좋겠네. 근데 누가 떨어뜨렸는지는 아세요?”

“주인을 찾아주려고 감독님한테 가려니까, 중간에 누가 길을 막는 거에요.”

“주인이었군요?그래서 돌려주고 대신 금일봉을 받으셨나요?”

“…아니, 그게…”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그건 다희의 것이었다고 했다. 다희가 도로 찾으러 왔다가 아주머니의 손에 있는 걸 보고 가지고 가버리라고. 자기도 이 빌어먹을 극단에 있기 싫다고 외치면서 나가버렸다고 했다.

“에! 그 히스테리가 사고 쳤군요! 진작 말씀해주시지!”

“감독님도 아신데요. 천재는 붙잡아 둘 수 없어서 천재다! 이런 말씀만 하시고…”

그리고 감독이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했다. 그녀가 떠나기 전 선물이라면서 천만원이 든 가방을 그에게 던졌다고…노구진 몫까지 넣었다는 말에 그제서야 감독은 그 정신머리 없는 커플이 사고를 톡톡히 쳤다는 걸 깨달았다. 
노구진은 결국 그녀를 설득한 것이다.

“천재는 무슨…”

그 배우는 연습실의 다른 배우에게도 재빠르게 전달하기는 자기 자리에 서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바닥에서는 무조건 오래 견디는 게 최고야.”

그리고 알게 모르게 멸시받은 그 커플들은 기차를 타고 구진의 고향에 도착했다.
구진의 모친이 창밖을 흘깃 보았을 때 다희와 구진은 그 시골에는 어울리지 않는 시커먼 정장차림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

조용히 모친이 그 둘을 들이자 그들에게서 검은 빛이 퍼져나가듯 집에는 어두움이 감돌았다.

“그래…신부가 될 아가씨를 데려왔구나.”

어머니의 말에 구진이 잠깐 얼굴을 붉히고 장광설로 다희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배우이고,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선량한…
그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어머니가 냉랭하게 말했다.

“나도 안다. 천만원짜리 수표를 태운 여자지. 도대체 어떻게 살길래…”

감독이 전화를 미리 한 모양이었다.

“어머니, 그건 다 오해…”

“아니, 후견인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니까 맞겠지. 너흰 상속은 받을 수 있을 진 몰라도, 이쪽으로 돌아올 생각은 아예 하질 말아라! 네 아버지 무덤도 안 가르쳐 줄 거니까 신경도 쓰지 말고. 너희같은 젊은이들이 어떻게 성실하게 살겠니!난 혼인신고서에 동의하지 않겠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공격에 구진은 혼미해졌다. 맞는 말이었다. 어머니에게 온 것은 혼인 신고서때문이었지 별 다른 것은 아니었다. 다희가 갑자기 혼인 신고에 미친 듯이 열광한 탓에…(수표를 불태운 이후부터 그녀는 좀 이상해진 것 같았다.)구진은 상속할 때 그녀도 같이 데리고 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젠 동의해줄 사람이 없었다.
동생이 해줄지도 만무하고, 구진의 난폭함 때문에 이 근방에서는 그와 친구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극단에 들고가기에는 구진의 얼굴이 너무 알려져 있어서 큰 일이었다.
구진은 그저 조용하게 일을 끝내고 싶었다.
아니, 잠깐! 동의서를 작성해 줄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아니, 어쩌면 두 사람일지도 몰랐다.
구진은 잠깐 낙망한 다희의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 다희는 잠시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그를 보고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그를 힘껏 껴안았다.

“좋아요. 어머니. 어머니가 저흴 싫어하시면 어쩔 수 없죠.”

다시 종달새처럼 명랑해진 다희가 말했다.

“원하시는대로 저흰 떠나겠어요. 구진씨는 가끔 보내드릴게요.”

“……”

“하지만 저희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재산 상속이야 그가 원하는대로 할 것이지만, 저도 제 돈은 있거든요. 그러니 가난하게 당신의 아들을 굶기진 않을테니 걱정도 마시고요. 전 호화사치를 즐기는 여자가 아니라는 걸 꼭 보여드리고 싶네요.”

어머니가 말을 하지 않자 구진은 다희의 어깨를 감쌌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상속일자 알려주시면 곧 돌아오죠. 어머니가 다희를 좋아하지 않으시니 유감이지만…어쩔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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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길은 경인과 헤어진 후 극단으로 돌아왔다. 다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장실의 문은 북문과 서문 동문과 남문으로 되어 있어서 어느쪽으로든 들어올 수 있었다.

“왜 너 혼자 돌아와? 형은 어쩌고 너혼자 와?”

“…갈때도 저 혼자 갔어요. 노형은 한참 뒤에 왔다가 갔다고 하던데요.”

다희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내 본색을 알고 도망간 거야.”

“누나.”

“네가 날 버린 것처럼 그치도 날 버린 거라고!”

안정감을 잃은 다희의 손이 벌벌 떨렸다.

“너도 그 이야기를 들은 거지.”

“…누나.”

“간선생이라는 작자가 얼마나 비열하고, 얼마나 치사하고…”

그 말이 이어지고 있는데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다희가 있는 쪽의 문으로 구진이 들어왔다.
다희가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구진이 뒤에서 그녀를 안아올렸다.

“앗?”

그녀는 눈물을 채 닦지도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다. 눈물 그만 그쳐.”

“나 안 울었어! 어서 놔줘!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남들이 보면 어때서요. 여왕님?”

구진은 그렇게 말한 후 그녀를 내려놓았다.

“무식하게 힘만 세서는…”

그녀의 말에 구진은 웃었다.

“울기만 하는 너는 어떻고.”

“……”

걱정 안되게 생겼어!라는 그녀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구진이 말했다.

“우리 고향으로 가자.”

“연극은 어쩌고.”

그녀의 말에 구진이 대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

“…그래서?”

“내가 장자라 상속권이 있지. 우리 재산 물려받은 다음 편하게 살자.”

“…우린 이미 먹고 살 직업이 있잖아. 그리고 거긴 안 가. 극단이 없잖아.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는데…”
“……”

구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난 누구누구 때문에 내 사랑이 방해받는 게 싫어.”

“…누구?”

다희는 잠시 그렇게 물어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 별 것도 아닌 걸로 속상해하다니…”

“재산은 꼭 저놈보다 많이 받을 거야. 돈이 많아지면 너도 그 간지용이라는 놈한테서 받은 피해의식이 사라질 거야.”

“…뭐든지 왜 돈으로 따지는 거야.”

다희는 그렇게 말한 후 자기 가방에서 천만원짜리 수표를 꺼내들었다.

“다들 그렇게들 생각하니까 여자한테 치근거리지.”

“…야, 그거 진짜 수표 아니지?”

구진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제 내가 어떻게 할 지 알겠어? 노구진. 난 네 돈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그녀가 가방에 들어있던 라이터로 수표에 불을 붙였다.

“착각하지마. 나한테 필요한 건 돈 따위가 절대로 아니야!”

그녀의 외침에 아직 퇴근하지 않은 배우들과 분장 담당이 달려왔다. 조연출들은 타들어가는 게 뭔지도 모르고 히스테리가 또 히스테리 부린다면서 다시 가버렸다.
그녀가 수표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드는 순간, 노구진은 다리가 풀러서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나 한동안 찾지마. 네가 본가로 갔다오는 것도 너 혼자 갔다와. 너네 집 돈 나한테는 한푼도 필요없어!”

“…누나. 모레 공연있는데…”

“어차피 그거 안하고 상속받으러 가기로 했잖아. 거기 나도 가는 걸로 해놔. 이 답답한 남자야.”

그녀는 구진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분장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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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됐나?”

간지용의 물음에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되었지. 고모할머님이 돌아가셨네.”

“…상속조건은?”

“경인이가 시길이하고 결혼할 경우 재산의 3분의 1이 그 부부에게 떨어지네.”

“호화롭군.”

지용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자네가 물려받을 뻔한 재산이지. 비밀리에 만들어진 상속서류에는 자네와 다희가 결혼할 경우에는 재산의 2분의 1이 떨어지니까.”

“흥.”

지용은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미미하게 떨리는 손은 그의 탐욕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적어도 할머님이 내가 그 사실을 안다는 걸 모르셨더라면…”

“아니, 자넨…”

지용은 다희에게 환심을 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극도의 증오까지 불러 일으켰다.

 자신에게 주어진 장난감처럼 다희를 멋대로 조종했다.

[다희,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아라.]

다희는 그의 훈련 하에서 완벽한 인형처럼 자라났다. 팔을 꺾고 과장된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지용의 팔을 잡고 춤을 배우기도 했다.
완벽한 발성을 위해서 가정교사가 초빙되었고, 다희가 성인이 되었을 때. 지용은 그녀를 취했다.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렸지.”

다희는 어릴 때부터 지용에게 속해 있었다. 그녀가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땐 가혹한 지용의 조련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치 야생의 사자나 호랑이가 훈련을 받듯, 그녀는 지용에게 모든 것을 훈련받았다.

“다희가 자넬 그렇게 증오하는 지 알아차리셨기 때문이지. 할머님 성격을 알지 않나. 일부러 확인까지 하러 불편한몸을 끌고 극장까지 가셨으니…”

[아범아.]

할머니는 여장군과 간지용을 불렀다.
주름진 상아같은 손가락으로 그녀는 팜플렛을 지용앞으로 던졌다.

[이게 무엇인지 내게 말해보거라.]

[뭐 말씀입니까?]

지용의 말에 노기어린 대답이 돌아왔다.

[왜 다희가 여기 나오는 거냐?]

[……]

[네가 후견인이니 틀림없이 알 거 아니냐.왜 그동안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 왕립극단의 배우라는 사실을 왜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말이다.]

[어머님…거기에는 복잡한 사연이…]

[내가 뒤풀이에 따라갔었다는 건 모르는구나. 그 아이가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해주었다. 그 아이는 내가 연극을 무척 좋아하는 할머니인줄 알고 줄줄이 다 말하더구나.  자기는 후견인을 피해 도망치면서 연극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너 상속서류를 미리 보았던 것이지?]



간지용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너는 복잡한 가계사를 잘 알고 이용까지 하려고 했구나.]

고모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너에겐 이 상속서류가 이제 필요없겠지.]

가느다란 손가락이 종이를 갈갈이 찢었다. 눈보라같이 그 서류가 지용의 뺨을 때렸다.

[넌 내가 미울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반항하고 싶었겠지. 돈때문에 결혼해야 하는 것과 즐거움을 주는 그 아름다운 몸을 취하는 것, 그 두가지를 다 하면서 너는 즐기고 있었던 거야. 넌 이미 다 가지고 있는데도…더 더 가지고 싶어서…어떨 땐 돈만 갖고 이미 단물을 다 빨아버린 그 아이는 네 조수에게 넘기려고도 하고…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걸 거부하니까 평판을 땅에 떨어뜨리고…]

[어머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좋은 아이가 아닙니다.]

간지용은 절박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이 세계가 그저 평판을 만든다고 만들어진다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건 그 아이 본래의 모습인 겁니다. 제가 만든 게 아니에요.]

[변덕스럽고, 돈을 밝히고, 남자들을 많이 데리고 있고, 얼마 전에는 시길이와 동거까지 했다는 말 말이냐?]

[사실입니다! 시길이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얼마 전엔 노구진이라는 연출가와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그 남자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고모할머니가 대답했다.

[진실한 사랑을 원한다고. 그걸 위해서는 뭐든지 하겠다고. 그 남자는 그렇게 말했지.]

그녀는 마치 생을 마치기 전, 페이지가 나달나달한 로맨스 소설을 읽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다희는 그 남자와 행복할 게다. 네 옆에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결론은 나버렸다. 간지용은 한마디도 더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죽을 정도로 행복하겠지.]

간지용의 뒷머리를 향해 그녀가 말했다.

[죽을 정도로…혹은 죽임을 당할 정도로…]

그리고 갑자기 고모할머니는 잠에 빠져들었다.

#배우의옆얼굴 #창작 #불펌금지 #팜므파탈 #도스토옙스키모사 #백치오마쥬 #백치 #재산상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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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진은 돌아오는 길에서 애꿎은 돌멩이를 발로 차서 멀리 날려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간지용이라는 사람이 기분이 나빴다. 그가 물론 단련해줘서 다희의 연기력은 발군이었다. 그러나…

‘기분 나쁜 놈.’

구진은 사실 다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전체가 기분이 나빴다.
걔중 가장 심한 게 시길이었고, 그 다음은 간지용이었다.

‘그 앤 내거야.’

만나기 전에 전화를 걸었을 때 그가 휴대폰에 대고 한 말은 단 한마디였다.

‘누가 그놈 거라고 정해놨나.’

다시 자잘한 돌이 보였고, 구진은 다시 발로 차서 멀리 보냈다.

‘다희는 내 여자라고.’

처음 발로 찬 건 지용이었고, 두번째 발로 찬 건 시길이었다.

‘누나는 우아하고 선량한 아가씨죠.’

스토커로 부터 목숨을 구해줬으니 다희는 또 얼마나 시길을 생각하며 마음 아파할까.
시길이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고보니 그녀석 입원한 병원이 이 부근에 있었지.’

구진은 입을 모아서 중얼거렸다.

“주연으로 올려준다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 되고…열심히도 하니까, 뭐…병문안 정도는 괜찮겠지…”

그는 병원 간호사에게 시길의 병실 번호를 받고, 시길의 병실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본 건.

“어…여기 민시길 환자자리 아닌가..요?”

다희가 아닌 머리를 쫑쫑 땋은 아름다운 아가씨 하나가 시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네. 맞습니다. 노구진 선생님이시죠?”

“…아, 네…”

“초면에 실례가 많습니다. 여장군님댁의 여경인이라고 합니다. 시길씨하고는 어릴 적에 인연이 있어서…”

“아, 네.”

요즘 사교계를 달구고 있는 미모의 여인. 소문으로만 들었었다.
시길의 옆에 서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

“늘 저는 이분이 잘 때만 와요.오늘도 깨지 않네요.”

경인은 답답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내려놓았다.그리고 구진에게 말했다.

“전 이만…”

구진은 답답한 표정으로 시길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감이 잡히는 게 있었다.
하지만 입밖으로 내지 않는게 그의 장점이었다.
구진은 계속 시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되돌아서려고 할 때

“다희 누나?”

시길이 깨어났다.
아니다. 이 시키야. 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으면서 구진은 고개를 돌렸다.
막 문간 앞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다희가 있었다.
노구진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더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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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의옆얼굴 #백치오마쥬 #백치 #도스토옙스키모사 #옴므파탈 #팜므파탈 #창작 #불펌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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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다만 다희가 주연을 맡게 되면서 상대역으로 시길을 고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뺴고는. 거의 공식적인 왕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시길이 아직까지 연기력을 인정받지 못한 건 사실이었지만 다희는 망가지는 역에도, 엑스트라에서도 그를 빼달라고 주문했다.

“오늘도 참 멋졌어.”

구진이 칭찬하면서 다희의 목에 두른 여우목도리를 그녀를 쓰다듬듯 쓰다듬었다.

“그래. 조금만 더 해봐.”

다희가 구진에게 요구했다.

“응?”

“그 정도가지고는 내 연기를 찬탄한다고 할 수 없어. 더해.”

“다희, 연출도 자기 몫이 있다고.”

“흥! 못하겠어? 다이아몬드는 줄 수 있어도 이건 못 준다고? 뭐가 그래. 연출이라는 사람이…”

다희가 흥!하고 목을 뻣뻣이 세웠다.

“참 좋았어요.”

시길이 다희가 안 보이는 구석에서 조용히 말했다.

“…어머, 방금 누군가가 내 칭찬을 한 것 같은데…”

“이제 슬슬 밖으로 나가보자고.”

구진이 되도록이면 두 사람이 마주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그녀를 대기실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엄청난 환호성이 울리면서 두 사람을 향한 군중의 뜨거운 박수가 연이었다.
그리고 그때 총성이 울렸다.


탕!

그때 본능적으로 시길은 일어섰다.


탕!


그것은 그가 정신을 잃었을 때 길을 다니는 사람들이 그를 밟고 지나가는 소리이기도 했으며 전철이 그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간 철로에서 내는 소리와도 같았다.
시길은 와들와들 떨었다.

시작되었다.시작되었다. 시작되었다. 시작되었다. 시작되었다.시작되었다. 시작되었다.시작되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총성이 울린 밖을 향해서 미친 듯이 달렸다. 아니 몸을 날렸다.

마치 슬로 모션처럼 구진이 다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경찰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시길은 자신도 모르게 범인을 향해서 달려갔다. 그 총구! 총구는 그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길만큼이나 그 범인도 흥분해 있어서 겨냥이 잘 맞지 않았다. 아까 전에 쏜 총탄도 다희와 구진을 벗어나 벽에 박혀 있었다.

“안돼!!!!”

다희의 외침과 동시에 시길은 다시 한번 바닥에 크게 쓰러지고 말았다. 총은 시길의 손에 주어진 채였다.
언제 빼앗았는지는 그들 셋 중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탕!

마차가 그의 몸을 밟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탕!

여기가 천국인가, 지옥인가…

탕!

“시길아! 길아! 정신이 들어? 죽지마. 죽지마, 죽지마…내가 잘못…했어. 내가 널 너무 좋아해서…그래서…”

“야! 야! 정신 차려. 나. 노구진이다. 너 다음에 주연으로 올려줄거야. 임마. 그러니까 정신 차려.”

그는 흐릿한 시선을 두 사람과 극단원들에게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까무러치고 말았다.

시길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뇌전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한동안 두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도스토옙스키모사 #백치오마쥬 #백치 #옴므파탈 #광팬살인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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