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날 사랑해?”
어느새 분장실로 들어온 노구진이었다. 단지 그녀의 상태를 보러 온 것이었지만 다희는 끈질겼다.
다희는 어느 순간 구진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노구진은 조금 초조해졌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다희는 일부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태도로 그가 나가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당연히 사랑하지. 그러니까 팔 좀 풀어봐.”
다희에게 여러번 사랑을 고백했었지만 다희는 콧바람만 불 뿐이었다. 시길이 등장한 이후부터는 조금 마음이 풀어지긴 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는 뺨도 맞을 뻔 했다.
‘내가 그렇게 쉬운 여자로 보여! 너도 다른 사람들이랑 다를 게 없잖아! 내가 패물이나 좋아하는 여자로 보여!’
“어머, 기회가 여러번 있는 줄 아는가 봐. 자기는…”
“저기, 다희야…”
민시길과 같이 나가려고 했지만, 그 멍청한 놈은 이럴 때는 머리가 돌아가는지 그를 내버려두고 가버렸다.
다희는 원래 좀 불안증이 심했다.
어린 시절 배우로 키워지면서 후견인에게 심한 꼴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 일 이후로 후견인은 그녀에게 꼼짝도 못했고, 그녀는 한때 후견인과 결혼을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얼마 안 가 그녀측에서 후견인에게 파혼을 선언했었다.
때때로 그녀는 자신의 연기력에 자신감을 보이기도 하고, 자만하곤 했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자신의 연기력이라던가 외모에 심한 자괴감을 느끼면서 방에 혼자 틀어박혔다.
그걸 이때껏 조율하면서 함께 성장한 게 노구진이었다.
“여러 번 오는 기회가 아니야. 노구진씨.”
그 달콤한 말이 귀에 들어오자 구진은 정신을 잃을 뻔 했다.
“당연하겠지…물론 나도 그건 잘 알아…”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슬쩍 다희의 손을 풀었다.
왕립극장은 국내용이다. 더더군다나 왕립으로 되어 있으니 앞으로 먹고 살 길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구진의 꿈은 컸다.
국내용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 그의 뮤즈 다희는 더더군다나 보기 드문 하늘이 내려준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배우에게 외모만으로 다 해결되는 무대는 없지만, 타고난 몸매는 어느 정도 큰 무기라고 할 수 있었다.
발성, 연기력에서 다희가 문제가 된다고 해도, 발성은 타고난 소리통이 있으니 어느 정도 해결이 될 것이고…
연기력이야 계속 쌓아나가면 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가에 어느 정도 지지기반이 있는 장성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날 버려두고 가려고!”
다희가 은근슬쩍 벗어나려는 구진의 팔을 세게 붙들었다.
“안돼!”
여소장은 급수되는 그다지 높은 지위는 아니었지만 다른 장성급들과 귀족들과 만나는데 큰 도움이 될 인물이었다.
그는 더더군다나 아직까지 다희에게 맘이 있는 그녀의 후견인과 친했다.
그가 다희를 여전히 자기 여자로 하고 싶어한다는 걸 아는 노구진은 이번 기회가 그 후견인과 결판을 낼 중요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의 손 자국이 구진의 팔뚝에 엄청난 생채기를 냈다. 길게 기른 손톱으로 그의 팔을 긁은 것이었다.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구진이라고 그건 참기 힘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다희야. 놔! 놔줘!”
“안돼! 그 남자랑 만날 거잖아! 안돼! 못 놔줘!”
다희의 히스테리에 구진은 정신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럴 때는 직진이 우선이다.
“그래. 만날 거야.”
냉정을 찾은 그의 말에 다희가 잠시 멈췄다. 고장난 테엽인형처럼.
“방…금…뭐라고 했어?”
그녀의 의외의 반응에 구진이 당황했다.
“만난다고.”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세게 나가야 했다. 마음이 갇힌 다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 후견인이랑 만난다고.”
“미쳤어! 자기야?”
다희는 정신을 차리고 난 다음에 구진의 뺨을 주머니에 구깃구깃 넣어놨던 긴 장갑으로 세게 후려쳤다.
“안 미쳤으니 내 말 잘 들어.”
엄청나게 풀 스윙으로 갈긴 거라, 뺨이 욱신거리긴 했지만 구진은 할 말은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네가 민시길을 좋아한다는 거 알아.”
“…뻔한 말 하지 말고 본론 이야기해.”
“그 후견인. 여소장의 친구인 거 알지.”
“…잘은 모르지만 그렇겠지.”
“그 남자가 사실은 여소장의 딸하고 결혼하려고 했어.”
“……”
“아까 전에 왔다 갔던 그 아가씨. 바로 그 여자랑.”
흥! 하고 그녀가 다시 콧바람 소리를 냈다.
“근데 고모 할머니라는 분이 위독하신데. 그 고모할머니가 시길이가 옛날에 스위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부터 시실이랑 여소장의 딸을 이어주고 싶어했대.”
“귀족이란 참 편리하고 좋네.”
비아냥거리는 말에 구진은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희가 서서히 진정한 것이다.
“근데 그 당시에 시길이 상태가 안 좋아서…놔두고 있다가 배우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생각한 거야. 재산도 증여하고, 둘이 결혼을 시켜줘야겠다고…이렇게 되면 그 후견인이 뭐가 되겠어.”
“…근데?”
“어쨌든 그 남자가 너하고 멀리 떨어지게 된 건 확실하잖아. 그래서 오늘은 찾아가서 결판을 지으려고 했지. 앞으로 잘 나갈 배우 인생에 초치지 말라고.”
“…씁쓸한 결말인데.”
어느샌가 구진의 팔을 놓은 다희가 말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아니, 모를 수 밖에 없었지. 잘 했어. 다희야.”
“아니, 바보야.”
다희는 그에게서 떨어져나갔다.
“넌 바보야. 노구진.”
“……”
그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구진은 안도했다. 자, 그녀를 떼어놨으니 얼른 정장으로 갈아입고 그 집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다희가 말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여경인씨한테 시길이랑 결혼하라고 편지를 보냈잖아…”
“…너, 아직도 시길이를 포기 못 한 거야?”
구진의 말에 다희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포기하고 말고도 없어. 당신도 알잖아. 우리 동거했던 거.”
“…알지.”
싸늘한 어조로 구진이 대답했다.
“너하고 그 놈하고 떼놓으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지. 기억나지?”
다희가 분장실을 뒤지는 소리가 났지만 구진은 이미 초대고 뭐고 머리에 담지도 못한 채 주저앉았다.
“처음에 시길이는 발음도 하나 제대로 못 했잖아. 그래서 내가 걜 인간으로 만들었지.”
쿰쿰한 술냄새가 풍겼다.
그제서야 구진은 그녀가 분장실에 술을 숨겨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여자가 정말!
“술마시지마.”
그의 포기한 어조에 다희가 대꾸했다.
“조금 정도는 괜찮아. 줄까? 내 후견인하고 이야기하려면 웬만한 정신으로는 안될 테니까.”
“사양하지.”
구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녀와 그는 오랜 세월 함께 해왔기에 한 공간에서 누가 옷을 갈아입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잘 갔다와…돌아오면 입맞춰줄게.”
“그거 고마운데 이왕이면 선불로 해줘.”
그러면서 그는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갔다올게.”
그녀의 입술에선 살짝 쉰 와인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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