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진은 늦게나마 여소장이 잠시 있는 호텔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소장은 기분 좋게 취해 있었고, 그가 부르던 나다희의 후견인은 도착하지 않았다.

“어서 오게. 연출가 선생.”

여소장은 다소 어색한 미소를 띄우면서 그에게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지. 우린 구면 아닌가? 안 그래?”

다희의 후견인이 잠시 마음이 다희에게서 떠났을 때 한번 만난 적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구진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 날 위스키를 코가 삐뚤어졌다 마셨던 탓도 있고, 다희 문제로 아버지와 절연한 날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 내가 부르긴 했지만 자네가 온 이유는 잘 모르겠군.”

소장의 말에 구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사모님이나 곧 오실 분의 의도가 좀 더 많을…”

그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벨이 울렸다.

“자네가 기다리는 그 사람이 온 모양이군. 사내들끼리 사내들 다운 결론을 내도록 하세.”

문이 열리고 준수하지만, 예전의 예리한 수려함은 한결 가신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약간 탈모가 된 앞머리에 붉은 콧대, 부드러운 눈동자를 한 남자.
나다희의 후견인이던 간지용이었다.

“어서오게.”

여소장의 말에 지용은 어깨를 으쓱했다.

“담판짓자고 부른 건가. 자네.”

그 말에 여소장이 피식 웃었다.

“아니. 뭐 그렇게 심각할 거 까지야 있나…우리 경인이가 자네랑 나이 차도…그리고 그 여자도 그렇잖은가…”

“날 따돌리고 그 앨 차지할 생각인가. 여소장. 자네 부인도 눈치는…”

지용은 그 말을 하고 난 후에야 노구진을 보았다.

“아하! 요즘 다희한테 열을 올린다는 사람이 저 친구군! 아니, 바보라는 소문이 도는 그 배우인가? 이거 술을 좀 미리 먹어서 시야가 잘 보이는군.”

지용은 그러면서 신발을 벗고 주머니에서 여송연을 꺼내서 피웠다.

“아무래도 맨정신으로 그 이야기를 듣긴 그래서 말이야…”

“다희는 제 여자입니다.”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구진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그저 그 여자를 건드려 볼 생각이시라면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다희는 제 여자입니다.”

“…뭔 소지나가는 소리를.”

욕지거리를 하면서 지용은 타구에 침을 뱉었다.

“애초에 내가 후견인인데 자네가 뭔 권리로…더더군다나 다희는 자네가 아니라 민시길을 더 좋아하지 않나. 소문이 그렇게 나있던데? 전하께서도 내게 두 배우의 열애설을 물어보실 정도이니.”

구진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다희는 후견설정이 끝나는 성인식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때 구진이 그녀를 납치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 민시길이 길에 쓰러진 것을 본 다희가 그에게 부탁해 그때부터 세 사람이 함께 했던 것이다.

납치였지만 정작 납치당한 것은 구진이었다. 
그때 이후로 그의 영혼은 다희에게 걸려 있었다. 납치당할 여자도 아니었고, 납치할 수 있는 여자도 아니었다.

“당신은 그 여자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구진이 차갑게 말했다.

“예전에는 당신하고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가 없어지면 당신은 그때 그녀를 버렸듯이 또 버리시겠죠.”

“……”

“저는 그녀를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겁니다. 뼈가 드러나서 흉하더라도, 어느 누군가에게 죽음당해 시체만이 제게 돌아와도 전 절대로 그녀를 버리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 여자의 전부입니다.”

“민시길과 대결해도 말인가?”

“그 친구는…”

노구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독기 어린 눈을 지용에게 한번, 소장에게 한번 보냈다.

“제 상대가 못 됩니다. 설마 덤빈다면 얼마든지 상대해주죠. 죽여버릴 겁니다. 그 여자 앞으로 가는 길을 막는 모든 남자들은 제 손에 죽을 겁니다. 절대로 어느 누구에게도 다희를 제 허락 없이 데려갈 수 없을 겁니다. 그녀는 제 모든 것입니다.”

“하지만…그 친구를 재활시킨 건 자네라던데…그런 배우로 키워놓고도 아깝지 않나?”

“…더 이상 할말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왔으니 전 가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지용과 더 이상 대화 나눌 필요도 없다는 듯이 구진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그때 여소장이 그를 불렀다.

“여보게.”

“……”

노구진은 다시 한번 그들에게 시선을 주었으나, 더 이상 그 눈빛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안개같이 흐릿한 그 시선은 그가 나다희라는 마약에 얼마나 중독되어 있는지는 알려주었다.

“다음 자네 연출작은 수도에서 하는가? 이번 마지막 공연이 내일이지?”

“…한동안은 연출 없을 겁니다.”

구진이 말했다.

“다음 작품도 아직 정해진 거 없습니다. 왕립 극단에 연출가가 저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다음 연출때는 수도에서 한번 보도록 하지. 잘 가게.”

구진이 나간 후 지용이 투덜거렸다.

“저 천한 놈이 나한테 하는 말 들었나? 아무리 잘 나가는거라지만…”

“…자넨 너무 서둘러.”

소장은 느긋하게 호텔 미니바의 맥주를 꺼내면서 말했다.

“급할 거 없지 않나. 더더군다나 그 여자가 지금 와서 자네에게 들러붙으면 오히려 자네만 손해…”

“그 앤 내 재산이야! 내가 키웠네!”

“그 재산, 저 친구가 돌려줄 걸세…얼핏 듣자니 돈 많다더군. 더더군다나 전하의 총애도 받고 있다고…그리고 설사 저 친구 아니래도 저기 저 방에 있는 시길이도 고모 할머니가 따로 챙겨줄 증여재산이 있다고 하니…자넨 손해는 안 볼거야.”

지용은 소장을 쳐다보았다.

“자넨 내 놓을 거 없고?”

“…흐.”

소장이 다희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걸 안 지용의 예리한 반응이었다.

“포기가 빠른 건 내 재산이라네.”

“흥!”

#배우의옆얼굴 #소설 #창작 #유랑극단 #유랑배우 #불펌금지 #도스토옙스키모사 #백치오마쥬 #백치 #오마쥬 #팜므파탈 #옴므파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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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날 사랑해?”

어느새 분장실로 들어온 노구진이었다. 단지 그녀의 상태를 보러 온 것이었지만 다희는 끈질겼다.
다희는 어느 순간 구진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노구진은 조금 초조해졌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다희는 일부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태도로 그가 나가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당연히 사랑하지. 그러니까 팔 좀 풀어봐.”

다희에게 여러번 사랑을 고백했었지만 다희는 콧바람만 불 뿐이었다. 시길이 등장한 이후부터는 조금 마음이 풀어지긴 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는 뺨도 맞을 뻔 했다.

‘내가 그렇게 쉬운 여자로 보여! 너도 다른 사람들이랑 다를 게 없잖아! 내가 패물이나 좋아하는 여자로 보여!’

“어머, 기회가 여러번 있는 줄 아는가 봐. 자기는…”

“저기, 다희야…”

민시길과 같이 나가려고 했지만, 그 멍청한 놈은 이럴 때는 머리가 돌아가는지 그를 내버려두고 가버렸다.

다희는 원래 좀 불안증이 심했다.
어린 시절 배우로 키워지면서 후견인에게 심한 꼴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 일 이후로 후견인은 그녀에게 꼼짝도 못했고, 그녀는 한때 후견인과 결혼을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얼마 안 가 그녀측에서 후견인에게 파혼을 선언했었다.
때때로 그녀는 자신의 연기력에 자신감을 보이기도 하고, 자만하곤 했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자신의 연기력이라던가 외모에 심한 자괴감을 느끼면서 방에 혼자 틀어박혔다.
그걸 이때껏 조율하면서 함께 성장한 게 노구진이었다.

“여러 번 오는 기회가 아니야. 노구진씨.”

그 달콤한 말이 귀에 들어오자 구진은 정신을 잃을 뻔 했다.

“당연하겠지…물론 나도 그건 잘 알아…”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슬쩍 다희의 손을 풀었다.

왕립극장은 국내용이다. 더더군다나 왕립으로 되어 있으니 앞으로 먹고 살 길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구진의 꿈은 컸다.
국내용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 그의 뮤즈 다희는 더더군다나 보기 드문 하늘이 내려준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배우에게 외모만으로 다 해결되는 무대는 없지만, 타고난 몸매는 어느 정도 큰 무기라고 할 수 있었다.
발성, 연기력에서 다희가 문제가 된다고 해도, 발성은 타고난 소리통이 있으니 어느 정도 해결이 될 것이고…
연기력이야 계속 쌓아나가면 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가에 어느 정도 지지기반이 있는 장성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날 버려두고 가려고!”

다희가 은근슬쩍 벗어나려는 구진의 팔을 세게 붙들었다.

“안돼!”

여소장은 급수되는 그다지 높은 지위는 아니었지만 다른 장성급들과 귀족들과 만나는데 큰 도움이 될 인물이었다.
그는 더더군다나 아직까지 다희에게 맘이 있는 그녀의 후견인과 친했다.
그가 다희를 여전히 자기 여자로 하고 싶어한다는 걸 아는 노구진은 이번 기회가 그 후견인과 결판을 낼 중요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의 손 자국이 구진의 팔뚝에 엄청난 생채기를 냈다. 길게 기른 손톱으로 그의 팔을 긁은 것이었다.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구진이라고 그건 참기 힘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다희야. 놔! 놔줘!”

“안돼! 그 남자랑 만날 거잖아! 안돼! 못 놔줘!”

다희의 히스테리에 구진은 정신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럴 때는 직진이 우선이다.

“그래. 만날 거야.”

냉정을 찾은 그의 말에 다희가 잠시 멈췄다. 고장난 테엽인형처럼.

“방…금…뭐라고 했어?”

그녀의 의외의 반응에 구진이 당황했다.

“만난다고.”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세게 나가야 했다. 마음이 갇힌 다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 후견인이랑 만난다고.”

“미쳤어! 자기야?”

다희는 정신을 차리고 난 다음에 구진의 뺨을 주머니에 구깃구깃 넣어놨던 긴 장갑으로 세게 후려쳤다.

“안 미쳤으니 내 말 잘 들어.”

엄청나게 풀 스윙으로 갈긴 거라, 뺨이 욱신거리긴 했지만 구진은 할 말은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네가 민시길을 좋아한다는 거 알아.”

“…뻔한 말 하지 말고 본론 이야기해.”

“그 후견인. 여소장의 친구인 거 알지.”

“…잘은 모르지만 그렇겠지.”

“그 남자가 사실은 여소장의 딸하고 결혼하려고 했어.”

“……”

“아까 전에 왔다 갔던 그 아가씨. 바로 그 여자랑.”

흥! 하고 그녀가 다시 콧바람 소리를 냈다.

“근데 고모 할머니라는 분이 위독하신데. 그 고모할머니가 시길이가 옛날에 스위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부터 시실이랑 여소장의 딸을 이어주고 싶어했대.”

“귀족이란 참 편리하고 좋네.”

비아냥거리는 말에 구진은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희가 서서히 진정한 것이다.

“근데 그 당시에 시길이 상태가 안 좋아서…놔두고 있다가 배우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생각한 거야. 재산도 증여하고, 둘이 결혼을 시켜줘야겠다고…이렇게 되면 그 후견인이 뭐가 되겠어.”

“…근데?”

“어쨌든 그 남자가 너하고 멀리 떨어지게 된 건 확실하잖아. 그래서 오늘은 찾아가서 결판을 지으려고 했지. 앞으로 잘 나갈 배우 인생에 초치지 말라고.”

“…씁쓸한 결말인데.”

어느샌가 구진의 팔을 놓은 다희가 말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아니, 모를 수 밖에 없었지. 잘 했어. 다희야.”

“아니, 바보야.”

다희는 그에게서 떨어져나갔다.

“넌 바보야. 노구진.”

“……”


그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구진은 안도했다. 자, 그녀를 떼어놨으니 얼른 정장으로 갈아입고 그 집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다희가 말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여경인씨한테 시길이랑 결혼하라고 편지를 보냈잖아…”

 “…너, 아직도 시길이를 포기 못 한 거야?”

구진의 말에 다희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포기하고 말고도 없어. 당신도 알잖아. 우리 동거했던 거.”

“…알지.”

싸늘한 어조로 구진이 대답했다.

“너하고 그 놈하고 떼놓으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지. 기억나지?”

다희가 분장실을 뒤지는 소리가 났지만 구진은 이미 초대고 뭐고 머리에 담지도 못한 채 주저앉았다.

“처음에 시길이는 발음도 하나 제대로 못 했잖아. 그래서 내가 걜 인간으로 만들었지.”

쿰쿰한 술냄새가 풍겼다.
그제서야 구진은 그녀가 분장실에 술을 숨겨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여자가 정말!

“술마시지마.”

그의 포기한 어조에 다희가 대꾸했다.

“조금 정도는 괜찮아. 줄까? 내 후견인하고 이야기하려면 웬만한 정신으로는 안될 테니까.”

“사양하지.”

구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녀와 그는 오랜 세월 함께 해왔기에 한 공간에서 누가 옷을 갈아입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잘 갔다와…돌아오면 입맞춰줄게.”

“그거 고마운데 이왕이면 선불로 해줘.”

그러면서 그는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갔다올게.”

그녀의 입술에선 살짝 쉰 와인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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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진 ->노구진.
나스타샤->나다희
아글라야->여경인
미쉬낀 공작->민시길

#유랑배우 #백치오마쥬 #백치 #도스토옙스키모사 #오마쥬 #창작 #불펌금지 #배우의옆얼굴 #팜므파탈 #유랑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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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경인은 부드럽게 시길의 팔짱을 꼈다. 시길의 잠시 얼굴을 붉혔지만 가만히 있었다. 그는 원래 수줍음을 좀 타는 성격이어서였다. 배우생활을 하면서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오랜 고아생활로 인해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면 마음이 약해지고 했다.

“아버지가 당신을 만나면 정말 좋아하실 거에요. 근데 왜 유랑 배우 생활을 하는 거죠?”

“…유랑 배우는 아니에요.”

그가 수줍게 대답했다.

“어머. 아무리 일류 배우라도 지방까지 돌면 그게 유랑 배우에요. 몰랐어요?”

“……”

그는 그녀가 아무 말이나 하게 내버려두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그랬던 것 같았다.

“당신이 연기하는 걸 봤는데.”

“물론 봤겠죠. 자리에 있었을테니까.”

그가 대꾸했다.

“난 설마하니 당신이 그렇게 연기를 잘 하는지 몰랐어요. 하긴 당신 성격대로 연기했을테니 오죽했겠어요? 죽어도 당신은 햄릿은 연기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 심하군요.”

그러면서도 그는 웃었다. 그는 이 작은 아가씨가 예전에 만났을 때부터 좋았다.

“근데 당신이 어째서 여기 있는 거죠? 난 유랑 배우니 그렇다치지만.”

“…아, 유산 상속때문에 와 있었어요. 우리 고모할머니가 여기 사시거든요.어머니 만나고 싶지 않아요? 아, 맞다. 어머니가 당신을 꼭 만나고 싶어해요!”

여경인은 호들갑을 떨면서 극장 거리 지나서 큰길 까지 그를 데리고 갔다. 훌륭하신 했지만 멋있다고는 할 수 없는 씨그램 형태의 호텔이었다.

“아까 전에 본 그 얼굴에 흉터 있는 남자는 배우인가요?”

“…아. 노구진 형을 말하는 거군요.”

경인의 말에 시길이 천천히 말했다.

“노구진? 노구진이라면 왕립 극장의 연출가 아닌가요?그 사람이 여기까지 내려왔다고요? 단순히 지방 공연 연출에?”

“음…실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면서 시길이 천천히 말을 끌었다.

“노형은 다희 누나를 좋아해요.”

“어머!”

경인이 깜짝 놀래는 시늉을 했다.

“나다희! 그 여자를 말하는 건가요?”

“네.”

“그 여자 질이 굉장히 안 좋다고 소문 났던데. 얌전한 아가씨가 아니어서 배우 생활에 뛰어든 거라고 들었어요. 연기도 그다지 잘 하진…”

“…좀 다혈질이긴 하지만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에요. 엄…사실 내가 배우를 하는…건 다희..누나 덕분이에요.”

“그 여자가 우리 아버지 친구한테 어떤 망신을 줬는지 모르죠!”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여경인은 열을 냈다.

“글쎄. 그 친구분의 오셔서 하는 말이 어릴 적부터 그렇게 애지중지 키워놨더니, 집을 나가버렸다고! 그리고 청혼하려고 갔더니 개망신을 주더라는거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리고 당신은 왜 내가 여기 있는데 그 여자 편을 들고!”

경인의 말에 시길의 당혹감은 느꼈다. 경인의 집안 사람들이 거의 그렇듯, 그들은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 듣는 버릇이 있었다. 이미 경인은 그 여자를 핀셋으로 꼭 집어서 비커 밖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왜냐하면…”

시길은 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직 나와 당신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앞으로도 아닐테니까 그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순간적으로 그는 통증을 느꼈다. 경인이 뾰족한 하이힐로 그의 발을 찍은 탓이었다. 그는 좀 억울했다.
시길이 그녀에게 뭔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그녀의 행동은 부당했다.

“어째서 당신하고 내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왜 그런 여자를 내 앞에서 옹호할 수가 있어!”

그녀는 펄펄 뛰면서 그에게 항의했다.

“아니…실제로…”

“고모할머니가 재산을 분할하신다 해서...그런데 그 재산을 내가 받으려면 당신하고 내가 결혼해야 된다고!”

“에?”

“그리고 요즘 익명의 편지가 나한테 자주 와요. 나다희가 노구진과 결혼하려면 당신과 내가 결혼해야 한다고. 나는 순백의 천사라 순진한 당신을 잘 거둬들여 줄 수 있다는 그런 편지가! 이런 괴편지를 받고도 내가 당신을 데리러가야 한다니!”

“경찰에게는 물어봤나요?”

“물어볼 것도 없어요. 보나마나 그 여자랑 결혼하려고 애가 탄 노구진씨가 나한테 보낸 것일테니까!”

“……”

“의문이 이제 풀렸어요. 그 여자를 좋아한다면 그 여자를 갖기 위해서 무슨 짓인지 못하겠어요.”

여경인은 엘리베이터가 12층에 이르자 그를 데리고 1204호로 갔다. 그녀는 문을 두드렸고 이내 안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왕립 사관학교를 나와 지금 소장의 위치에 있었다.

“어서오게. 이 사람아. 그동안 뭘 하고 지냈나.”

여소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시길의 등을 두드렸다. 아무래도 막대한 재산이니만큼 이미 안정된 소장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아, 예.”

“배우를 한다고.”

“네.”

“아, 집사람하고 이야기 해보겠나?자네하고는 먼 친척이니…그리고 말은 이 아이가 안했겠지만 우린 자네가 연기하는 연극을 꽤 여러번 보았다네. 아내는 자네의 팬이야!”
시길은 귀까지 벌겋게 붉어졌다. 이내 거실에서 사락사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소장 부인이 의류에 있어서는 사치를 조금 부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가 비단옷을 입고 그 자락을 끌고 오는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경인이가 누굴 데려왔지?”

알면서도 그런 다는 것을 알았지만 시길은 이내 시침을 뚝 떼고 연기하듯 그녀에게 말했다.

“소장님 사모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민시길입니다.”

“어머.”

시길을 향한 그녀의 은근한 눈빛에는 귀족적이고 또한 서투르게 보이지 않으려는 상인의 기질이 엿보였다.

“오래간만이네. 시길씨. 잘 있었나요?”

“이거보라니까. 연극을 여러 번 보고도.”

눈치없는 여소장의 말에 민지란은 짜증을 냈다.

“여보!”

“아, 그래그래.”
 
그제서야 아내의 진심을 알아챈 그는 담배를 피우겠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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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은 환호성을 받으며 관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하얀 얼굴에 입가에 붙은 점으로 인해서 홍일점이라는 별명을 다시 얻게 된 여배우 나다희는 관객들 중 눈을 빛내는 한 귀족 아가씨를 보았다.
그녀는 옆에서 아직 인사 중이던 민시길을 꾹 찔렀다.

“아직 막 내려가지 않았어요. 누님.”

민시길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서 나다희에게 말했다.

“어머, 더 이상 홍일점이 아니어도 된다는 뜻이었어. 너, 내게 그렇게 정열적인 눈으로 쳐다보지 않아도 된다고.”

“…하하, 누님도. 그건 다 옛날 일이죠.”

귀족의 아들인 민시길은 약간 맹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연기에 탁월한 천재였다.
메소드 연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의 투명한 마음이 마치 역을 비추는 것 같았다.
다만 흠이 있다면 얼굴이 지나치게 해사해서 악역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어머, 그거 정말 믿어도 되는 이야기야?”

나다희는 관객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 있는 노구진을 가리켰다.

“그럼 나, 안심하고 구진 네 집에 가서 살아도 되는 거지?”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연출, 각본가. 노구진.
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집안의 아들로서 시골 무대에서 나다희는 본 이후로 집안의 패물이란 패물은 다 훔쳐 달아난 인물이었다. 그는 걔중 가장 좋은 물건만 남기고 다 팔아먹고 그 좋은 물건을 미끼로 나다희는 사려고 했다.

“근데 그 집에서 누님을 받아줄 까요?”

아무리 해사한 얼굴이라도 독설은 독설이다. 민시길은 그녀에게 그렇게 말한 후 자신을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여씨 집안의 장녀, 여경인을 바라보았다.

“저 귀족 아가씨네 집에서도 절 안받아 줄 것 같은데요?”

“응? 아는 사이야?”

손들을 다 붙잡고 만세!를 외친 후 배우들은 사라졌다.
아직까지 후진 지역이라 이런 일류 극단이 오면 쉽게 놓아주질 않는다.
다섯, 여섯 번이나 앙코르를 외쳐댄 통에 배우들은 차례차례 다시 나와 대사를 읊어야 했다.

“예전에 저 집에서 쫓겨난 적이 있어요.”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민시길은 말했다.

“사실 경인이하고는 사돈에 팔촌 정도로 인연이 있거든요. 그것도 경인이 어머님이랑.”

“역시 귀족 자제분이셔.”

능글능글 거리면서 막 뒤에서 지켜보던 구진이 다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거 놔~ 아직 네 사람 아니야.”

다희가 부드럽게 말하는 척 하면서 노구진의 손을 밀쳤다.

“이거 왜 이러시나…시길이가 결혼하면 우리도 결혼한다고…그러지 않았어? 오늘 여씨 집안에서 배우 민시길을 데려가겠다는데…”

“어머, 정말?”

눈을 동그랗게 뜬 다희가 다시 구진의 손을 홱 밀쳤다.

“알고 있었지? 둘다?”

“어…엄.”

구진이 약간 꿀린 데가 있는지 신음소리를 냈다.

“아…네.”

길이의 대답에 다희가 화를 냈다.

“미리 이야기를 했어야지.”

“아니, 그게 누님은 빼고 오라고 해서.”

“야!”

구진이 시길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그 말은 하면 안되는 거 몰라?”

“…음…몰랐어요.”

“쳇. 바보 멍청이. 연기는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구진의 말에 다희가 울먹였다.

“역시. 내 소문이 너무 멀리 퍼졌어…”

“아니야.”

주연 배우가 풀이 죽으면 연출가는 죽을 맛이다. 구진이 지금 그 상황이었다.
어찌어찌 이번 무대는 넘어갔지만, 이렇게 풀이 죽어버리면 다음 무대가 큰일이었다. 특히나 나다희는 시길처럼 발성이 탁 트인 것도 아니고, 기분파로 연기를 하기 때문에 기분이 나쁠 때 세워놓을 수가 없었다.
원래부터 다희를 사랑하기도 했고, 연출가로서의 그도 배우인 다희를 아꼈다. 그러므로 다희의 사소한 걱정거리는 그의 것이기도 했다.

“그 영감이 설마 여기까지 왔겠어?”

“시길이 아는 사람이 있다잖아. 그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해!”

“있긴 뭐가 있어. 당신을 나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 그러니까 우리끼리 가더라도 당신은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돼!”

구진의 말에 살금살금 빠져나가던 시길이 말했다.

“네! 누님. 기다리고 계시면 저희가 올게요…”

“야! 너 혼자 어딜 가는 거야?”

“…부르는 데로 가야죠. 형님도 준비하세요.”

“멍청이.”

분첩으로 얼굴을 두드리면서 다희가 썡하게 말했다.

“저러니 여자들이 안 미치고 배겨?얼마나 멍청한지 저 백치미가 매력이라니까.”

“…부탁이니 다른 놈하고 스캔들은 내도 저 놈이랑은 내지 마라.”

구진은 겨우겨우 다희를 달래서 분장실로 보냈다.
 
“왜 스캔들 내면 안돼?”

분장실로 떠밀려 들어간 다희가 언성을 높였다.

“넌 내 배우니까!”

구진이 말했다.

"그러니까 한방 터질 때까지 참아! 내가 뭣 때문에 네 뒷바라지를 하는데! 그리고 저놈하고 스캔들 나면 니들 다 내 손에 죽어!"

"깔깔. 소심도 하긴.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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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래간만이에요...
알라딘 책장이 알파벳님처럼 로그인 안 하는 동안에 싹 밀릴까 싶어서 로그인은 여러 번 했었는데...
아직도 찾아오시는 분이 있고,  추천 달아주시는 분도 있고...
6월에는 잘 안 들러서 못 봤는데 오늘 봤습니다.
그렇다고 돌아오자니 이미 올리던 글들은 다 완료시켜버려서...;;;;;;;
요즘은 생각나는 것도 별로 없고...
음, 포털에서는 그냥 읽은 책 기록이나 합니다...하루에 몇 페이지 이렇게...
근데 소설이나 소소한 잡글은 여기서 써 버릇해서 그런가.
아직까지 그 포털에서 잘 쓰지를 못해요.
그렇다고 여기 오자니, 계속 조회수가 바뀌는 바람에 마음에 안 들고 그러네요...
이웃님들, 친구 목록에서 빼주지 않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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