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 시인선 201
한여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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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아련한 것들에 대해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불안한 현실에 오소소한 소름이 돋다가, 왠지 안도하며 덮게된 시집이다.

-허름한 작은 방으로 돌아온 우리들은
먹고 자고 계속 살았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
미선 언니도 언젠간 다 그랬을 것이다
얇은 벽에 기척을 들키지 않으려고
자꾸만 이불 안으로 움츠러들었겠지
몸은 자꾸만 넘치려 하고 터지려 하고
그러니 뭐라도 막으면 좀더 살 만하지 않겠냐며
어떤 날은 귀를 막고 어떤 날은 입을 막고
사람 사는 꼴이 뭔지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걸까 - 미선 언니 중

-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가령,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 같은 것 - 영동고속도로 끝에는 미래가 중

- 어제와 엊그제와 모든 삶이
거대한 기록이라는 게
참 이상하지 - 겨울 소설 중

2023. oct.

#두부를구우면겨울이온다 #한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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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진하는 밤 문학과지성 시인선 589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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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촉진하는 밤> ..
특별히 좋았던 시를 골라 제목을 쓰려다 플래그를 붙여놓은 부분들을 다시 읽어보니
고를것 없이 모든 시들이 아름다웠다.

나의 최애 시인...

- 어제와 오늘
사이에 유격이 클 때
꿈에 깃들지 못한 채로 내 주변을 맴돌던 그림자가
눈뜬 아침을 가엾게 내려다볼 때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
참 좋구나
우리의
허약함을 아둔함을 지칠 줄 모름을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더딘 시간을
이 드넓은 햇빛이
말없이 한없이
북돋는다 - 촉진하는 밤 중

- 충분하다는 건 기쁘다는 것과 좀 달랐다
그녀는 완전하게 기뻐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일에서 분노를 잔향처럼 느꼈다
그녀는 단 하루도
죽음을 떠올리지 않은 적 없었다
평생 동안 사랑해온 단 한 명을 대하듯 했다
그녀의 방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아닌 그녀가 조용히 슬리퍼를 끌고
먹을 것을 챙겨 먹으며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해 시를 썼다 - 이 느린 물 중

- 질문에 대해 답을 하지 않아도 돼
질문에 대해 답을 해보려 노력하다가 다른 진심을 전달해도 돼
그럴듯함과
그러지 못함과
그럴 수밖에 없음에 대하여 - 2층 관객 라운지 중

-수평선이 눈앞에 있고
여기까지 왔고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햇살에도 파도가 있다
소리는 없지만 철썩대고 있다
삭아갈 것들이 조용하게 삭아가고 있었다
이제 막 사람들과 헤어져 혼자가 되었다 - 가장자리 중

- 누군가의 응원이 미행하듯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압니다
고마우나 달갑지 않은, 달지만 뱉고 싶은, 소중하되 떨치고 싶은
그런 인사말 같은 것들이
나를 추월해서 앞서가버릴 때까지
속도를 늦춥니다 - 꽃을 두고 오기 중

- 지금 쓰고 있는 이 시의 첫 연이 되었으면 한다
내가 쓰고 있는 이 시를 읽는 한 사람은
이 페이지를 쉽게 덮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더 궁금한 것 없이 다음 세계로 가뿐히 가버린다면
나는 그 시를 이어서 쓸 수 있으리라 - 올가미 중

-어둠에 대해 말했다면
어둠을 끝까지 노려보며 쓰기를 바라면서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 없어서는 아니다 - 식량을 거래하기에 앞서 중

2023. oct.

#촉진하는밤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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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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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이 지나도록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짐작하기 어려웠고, 캐릭터들의 이미지도 선명하지 않고 다들 내면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을것만 같은 혼돈이 있었다.

정보라 작가의 이야기 답게 불편하고 어두운 느낌이 끝까지 전해져왔다.
누구에게도 해피엔딩이 아닌 것처럼.

-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엽은 생각했다. 잘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혹은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그다지 능숙하게 감당하지 못했다. - 125

- 그래서 태는 질문했다.
“내 고통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태는 간절하게 물었다.
“어째서 나입니까? 어째서 내가 이 모든 일을 겪어야 했습니까?”
고통에 의미 같은 건 없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 282

- 의미 없는 고통은 거부해야 한다. 힘들고 괴로운 일이 모두 다 가치 있는 일은 아니다. 충분히 잘 먹고 충분히 잘 쉬고 내 몸을 잘 돌보았을 때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괴로운 상황을 탈출할 길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 작가의 말 중

2023. oct.

#고통에관하여 #정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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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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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우아한 이야기를 그려내는 작가. 에이모 토울스.

이번에도 역시 우아하게 한시대의 캐릭터들을 그려냈다.
이야기 전체에 ‘위대한 개츠비’의 느낌이 드리워져 있다. 그런 감성으로 읽기를 원한것 처럼.
물론 그보다는 조금 덜 파멸적인 느낌.

주인공의 월든에 대한 감상에 대해서만은 동의하지 못했지만.

- 벨과 내가 사귀기 시작한 여름에 우리는 아직 30대였고, 서로 성인이 된 뒤 10여 년의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잘 모르는 상태였다. 10년이면 충분했다. 인생 전체의 방향이 좋은 쪽, 또는 나쁜 쪽으로 바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살인을 하거나 창작을 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니, 하다못해 누군가의 앞에 의문을 하나 떨어뜨려놓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 16

- 하지만 돌아가시기 얼마 전의 어느 날 밤, 내가 아버지의 침대 옆에 앉아서 기운을 좀 북돋아드리려고 멍청한 직장 동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느닷없이 옛날 이야기를 꺼냈다. 너무나 맥락에서 벗어난 이야기라서 나는 아버지가 헛것을 보시는 줄 알았다. 아버지는 살면서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아무리 풀이 죽고 기운이 빠져도, 자신이 언제나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 처음 커피를 마시는 순간을 고대하는 한은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해준 조언이었음을 깨달았다. - 209

- 바람이 아무리 괴로워도 지금 이 자리에서 보는 맨해튼은 정말이지 현실 같지 않을 만큼 너무나 찬란하고, 밝은 약속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서 평생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실제로 그곳이 손에 닿지는 않을지라도. - 500

- 백열째 양심이라 불리는 천상의 불꽃이 가슴 속에 항상 살아 있게 노력하라 - 536, 젊은 조지 워싱턴의 ‘사교와 토론에서 갖추어야 할 예의 및 품위 있는 행동 규칙’ 중

2023. oct.

#우아한연인 #에이모토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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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물질적인 밤 - 이장욱 산문집 문지 에크리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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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글들, 그러나 단절되어있지 않은 흐름이 있다.

- 신성은 인간의 영혼이 궁극에 이르러 대면해야 할 무엇이지만, 현실 정치 안에서 그것은 반드시 오염된 ‘인간적’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에게 현실 정치란 ‘경쟁’과 ‘적대성’을 통해서만 그 건전함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는 나약한 인간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신성은 신의 것이어서 인간들이 저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 12

- 이것은 아마도 ‘밤‘과 ‘낮’이라는 언어 바깥에 있는 세계일 것이다. 관습적 언어 너머의 세계에서, 비는 내리고 있다. 저렇게 내리는 비에 가장 가까운 것이 시의 언어일지도 모른다. 만상의 바깥에 처연히 내려 모든 것에 스며드는 그것. - 17

- 상트페테르부르크 서쪽 연안, 핀란드만이라고 불리는 해변에 갔다. 글이 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은 씌어지지 않아도 좋았다. 쓰지 않는 시간이 쌓이지 않으면 쓰는 시간이 오지 않는다. - 19

- 나는 며칠 후 이곳을 떠날 것이다. 츠베타예바는 이렇게 썼다. 언제 어디서든 떠난다는 것은 하나의 죽음과 같네, 라고. - 27

- 소설을 쓰는 일 자체보다는, 아직 소설이 아닌 무엇을 떠올리는 일을 나는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가령 하루오라는 인물에 대해 쓰는 시간이 아니라, 하루오라는 사람이 머릿속에서 문득 눈을 뜨는 순간을. 눈을 뜬 하루오가 미소를 짓거나 걸어 다니는 순간을. 그러다가 문득 사라져 버려서 나를 외롭게 만드는, 그런 순간을.
무슨 생각을 갖고 소설을 시작했는데, 끝나고 보면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세계가 거기 있다. 무슨 질문을 갖고 소설을 시작했는데, 끝나고 보면 내가 던지지 않았던 질문이 거기 있다. - 35

- 확실히 인생은 소위 ’내러티브‘와 다르다. 삶은 기승전결의 플롯을 지니지 않는다. 의미와 목적과 대단원을 전제로 인생을 서사화하여 설명하는 것은 우리가 품고 있는 욕망의 구조를 반영하고, 나아가 현실의 논리를 드러낼 뿐이다. 삶 자체는 그것을 훨씬 초과하거나, 또는 그것을 무시한다. - 39

- 그녀는 장차 어떻게 될까요? 내가 물었다. 누구 말이죠? 그가 말했다. 폴린, 내가 말했다. 늙겠죠, 굳게 확신하며, 그가 말했다.
그렇다. 폴린은 늙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일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폴린과 함께 늙어가는 것. - 59

- 그렇게 메모를 해둔 적이 있지만 나의 일상과 현실에서 평상심은 그냥 다음과 같은 뜻에 가깝다 ;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냥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 좋아하던 것을 계속 좋아하는 것. 그러다가 조금씩 천천히 마모되는 것. 시간이 지나 희미해지는 것. 그리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 - 78

- ‘약자의 편’에서 ‘약자의 것’으로
하지만 문학은 궁극적으로 ’약자의 편‘이 아니라 ’약자의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경제적 계급 문제만이 아니라 인종, 젠더, 장애 등 수많은 정체성 이슈에 연루되었을 때 더더욱 중요하고 불가결한 문제가 된다. - 134

- 종교적 인간은 될 수 없어도 기도하는 인간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 모순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래서 마음을 다해 기도한다. 주기도문을 외우고 성모송을 암송한다. 일신의 안위가 아니라 모종의 보편성을 위한 기도. 기도란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 184

2023. oct.

#영혼의물질적인밤 #이장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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