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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라 일지
김금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평점 :
애정하는 작가 김금희의 남극 기지 단기 거주? 에세이.
좀 더 어렸을 때는 여기저기 여행 다니고 새로운 곳을 경험하는 일이 흥미로운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여행은 그저 고단하고 번거롭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세계 일주까지는 아니어도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는데 언제부터 그게 다 부질없다고 느끼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새로운 곳에 굳이 가지 않아도 대리 경험해 주는 매체가 많아서일까?
어쨌든 많은 이들이 북극, 남극, 정글, 사막 등등의 극한의 환경인 장소를 가보고 싶어 하는데...
나에겐 그런 욕구가 없기에 이해를 완전히 하기도 어렵지만,
그들이 목격하는 것들을 간접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안락한 몸으로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환영. ㅋ
책에 꽂혀있던 엽서에서 밝혔듯 '자연 속에서 하나의 종으로 살면서 작고 단순하고 환해졌던 날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안에서 관찰자로서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그대로 드러난 글이다.
작가가 돌아와 결심한 대로 등산하는 삶을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자연이 만든 지리적 경계 이외에 다른 인위적인 경계가 없다는 사실도 매혹적이었다. 누구도 남극의 주인이 아니며 국경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의 빙원은, 빙산은, 유빙은 '국가'라는 제도 안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마치 우주의 행성처럼. 지구상에 그런 '없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숨이 좀 트였다. - 14
미보고 종을 처음으로 발견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이야기를 들으면서 궁금했다. 창조에 가까운 일 같으니까. 옆새우에 대한 분류학적 연구가 시급한 건 옆새우 또한 기후변화로 멸종위기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빨리 알아차리지 않으면 아예 없었던 존재가 된다는 말에 안타까웠다. 남극에 있는 동안 안을 통해 옆새우 세계에 발 좀 담가봐야지 다짐했다. - 118
촬영을 못 하게 되나 불안했지만 정작 다른 사람들은 느긋해 보였다. 날씨가 허락하지 않으면 남극에서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 그 조용한 순응을 다들 잘 아는 듯했다. - 137
정작 나는 추워 덜덜 떨고 있었지만 마음은 녹듯이 포근해졌다. 일면 슬퍼지기도 했는데 너무 순정한 것, 아름다운 것, 들끓는 자아 따위와는 무관한 자연 자체의 풍경과 맞닥뜨릴 때 느끼는 기이한 상실감 같은 것이었다. 남극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나는 실제 내 삶은 이곳과 얼마나 다른가를 동시에 감각했다. 적어도 지금의 내게는 남극이 인간이 인간처럼 살 수 있고 해표가 해표처럼 살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공간이었다. - 138
남극 하면 우리와 먼 곳처럼 들리지만 막상 여기 와보니 남극의 모든 것이 삶을 관장하고 있었다. 지구의 양 끝인 남극과 북극은 세상의 대기와 해류를 이동시키는 아주 거대한 손이었다. 이곳의 변화들이 지구를 휘저었고 우리 일상이 조형되었다. '기후'라는 말 뒤에 붙는 변화, 위기, 때론 전쟁과 습격이라는 수많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매일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같은 시각에 풍선을 올려 하늘을 살핀다는 것이 작은 낙관처럼 느껴졌다. - 200
"아주 많은 것이 날려 오고 있어요, 지금, 남극에." 홍 선생이 손짓을 할 때마다 이편으로 건너오고 있을 많은 것이 떠올랐다. 사람, 동물, 식물과 곤충, 씨앗 균류, 바이러스, 강처럼 흐르는 대기, 중금속과 블랙 카본, 미세 플라스틱, 지구의 현 상태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출구를 찾으려는 노력과 연대, 그리고 상상. - 258
펭마 해변에는 펭귄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있었다. 얼음덩어리와 뒤섞인 검은 자갈, 반들반들한 검은 등과 멋진 붉은 부리. 바위에 올라 파도의 세기를 가늠하며 어느 타이밍에 뛰어들지 고민하는 성체들도 보였다. 어려울 것이다, 바다로 뛰어드는 일은. 우리가 세상으로 나가는 일이 두렵고 주저되는 것처럼.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삶이 되고 만다. 이윽고 한 마리가 용기를 냈고 그 뒤에 서 있던 녀석들도 툭툭 뛰어내렸다. - 280
나는 잘 있으라고, 겨울을 잘 견디라고 말하며 아쉽게 돌아섰다. 언덕을 내려오는데 남극에 오고 싶어 한 정확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어서였다. - 281
2025. feb.
#나의폴라일지 #김금희 #남극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