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를 바꾼 위대한 과학 - 만유인력.원자 구조.상대성 이론.빅뱅.진화론.유전 법칙.DNA
아놀드 R.브로디.데이비드 엘리엇 브로디 지음, 김은영 옮김 / 글담출판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과학이란, 바른 방법론과 신중한 절차에 기댄 한 어떤 것도 위대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위대한 과학은 또한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모든 발걸음이 인류 역사를 앞으로 나가게 한 위대한 몸부림입니다. 해서, 정도의 차이가 다소 있을지야 모르나 저 장구한 과학 발전의 자취에서 가장 위대한 일곱 개의 이벤트, 이정표를 꼽는 작업은 무척이나 어려울 듯합니다. 이 지난한 과제에 누군가가 과감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듯 나서서 그 깔끔한 결과를 우리 평범한 독자들에게 추려 줄 수만 있다면, 그 역시 위대한 봉사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저자분들의 약력을 보십시오. 공저자 두 분은 형제 사이인데, 한 분은 병리학자, 세포 생물학자로 세계적 권위를 지닌 분이고, 다른 분은 이름난 변호사이자 과학 작가입니다. 주된 종사 분야는 크게 다른 듯 보이지만, 사실 이 두 분은 성장기를 함께하며 자연과학과 그 역사에 대해 열정과 탐구의식을 공유도 한, 드물게 보는 권위자들이자 멋진 호흡을 이루는 한 팀이기도 합니다. 특히 변호사는 청중에게 진실, 혹은 진실에 가까운 어떤 사항을 호소력 있게 공감시키는 게 직업상의 주된 사명입니다. 어려운 과학 내용을, 정확한 소양을 바탕으로 삼고 우리 무지한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납득시켜 준다면 민완 변호사보다 이에 더 적임자인 분도 또 없을 듯합니다.

이 책은 아마존닷컴이 갓 창립되었을 시절 일약 베스트셀러에 올라, 아직 도서 전문 쇼핑몰 정도에 머물었을 무렵 사이트의 인지도와 인기 흐름과 함께한 내역이 있기도 합니다. 모르긴 해도 몰의 관심도를 높이는 데 한몫 했을 이 책에 대해 아마존 측에서도 잊지 못할 듯하고요. 과학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힘든 과제이며, 아마존 역시 인터넷에서 책을 판다는 컨셉이나 BM이나 관행이 일반에 대단히 낯설게 느껴지던 장벽을 아직 뚫고 나가야 할 단계였습니다. 이 책은 그 한참 후 개정판이 나왔는데, 이번에서야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저자들의 유려한 설명과 정확한 비전이 우리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중심에서 끌여내려진 지구".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여겼음에도 그 우주의 중심에는 다름 아닌 지구가 놓였다고 여긴 걸 보면, 우리 인간은 말로야 섭리를 앞세워도 기실 지극히 자기 중심적 존재인가 봅니다. 이 책은 인류 역사를 바꿔 놓은 과학 업적 첫째 타자로, 비교적 근대로 내려와 뉴턴의 만유 인력 법칙 발견 등을 꼽습니다. 물론 이 첫째 장에는 아이작 뉴턴 경만 나오는 건 아니고, 뉴턴 경 자신이 겸허히 고백했듯 "자신에게 어깨를 빌려 준" 거인들에 대한 서술도 자세합니다.

저자들은 비단 과학사뿐 아니라, 인류사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합니다. 특히 1장은 몽골 킵차크 한국(영문 서적에서는 주로 Golden Horde라고 표현하죠)이 유럽을 휩쓸 때 함께 이곳을 짓밟은 공포의 질병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는데, 저자 형제분 중 한 명인 아널드 R 브로디 박사님의 기여가 더 크지 않았을까 짐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로 구태여 첫 챕터의 막을 연 건, 그만큼 유럽 문명의 기반이 매우 허약했던 시대상을 회고하며, 이런 시대를 떠받들던 게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얼기설기 점성술에 끼워맞추던 개탄스러운 수준을 짚기 위함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에 완고한 일부 기독교 세력의 패착도 끼는데, 용감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등의 혁신적 발상 전환은 그야말로 인류에게 단지 지성의 더 환한 축복을 내린 데 그치지 않고, 역사, 생활 양식에의 총체적 개혁까지를 유도했습니다.

뉴턴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명만 꼽아도 그가 선정되어 지나침이 없을 만한 천재입니다. 학설 체계를 인위적으로 구획하기란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지만, 만유인력도 그렇거니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고안해 낸 (물론 독일의 라이프니츠도 독립적 경로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만) 미적분법이야말로 이후 문명사에 무한한 응용의 도구를 안긴대 업적임에 틀림 없습니다. 바로 앞 부분에 케플러라는 천재의 기괴한 개성도 잠시 언급됩니다만, 뉴턴 역시 그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으로서는 약점이 많은 위인이었습니다. 책은 2012년의 위대한 광학상의 업적 중 하나인, 가시광선 입사시 굴절률이 0로 나온 최초의 성공례도 잠시 소개하는데(개정판 맞죠 ㅎㅎ), 이 쾌거에서 다시 확인되는 건 오히려 뉴턴의 위대성입니다.

2편은 원자 구조론의 소개입니다. 먼저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가 나오고, 돌턴 등의 고전 모델이 잠시 언급되지만, 독자의 흥미를 돋우는 "본편'은 양자 역학 세계입니다. 우리말로 "양자 도약"이라 옮겨지는 퀀텀리프는 사실 영미에서는 (사람들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일상에서 흔히 쓰는 표현 중 하나죠. 이 2편이야말로 "어려운 걸 쉽게 풀어주는" 저자분들만의 장기가 잘 증명되는, 책의 백미이자 압권이라 부를 파트입니다. 닐스 보어, 러더퍼드, 마리 퀴리 같은 시대의 거인들이 교차로 무대에 오르며, 그야말로 역사를 바꿔놓은 대발견과 이론의 구축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우리 독자들은 차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2009년의 LHC에 대한 언급도 있고, 이론 자체는 훨씬 전(지금으로부터 반 세기 전)에 나온 힉스 보손도 비교적 자세히 들여다 본 후,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한 회고를 통해 과학자 간 국제 연대가 깨어지고 만 아픔도 감성적으로 풀어 줍니다. 잠시 동안, 며칠 전 뉴스를 탔던 로봇 관련 외국 학자들의 카이스트 보이콧 선언(철회되었습니다만)도 생각이 나더군요.

아인슈타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철학자 에른스트 마흐입니다. 물론 뻬어난 "발상"을 과학으로 다듬은 업적이야 오롯이 아인슈타인의 것입니다만, 저자들도 그런 평가를 하고 있듯 그는 실제로 철학자와 과학자 사이의 경계를 끊임 없이 넘나들었고, 이 점이 바로 그를 동시대 과학자들보다 한층 위대하게 부각한 정신적 자질입니다. 누가 닐스 보어나 하이젠베르크를 들어 "철학자"라고는 잘 하지 않지 않습니까. (간혹 철학사 서적에서 하이젠베르크의 인문 유산에 대해 천착하긴 합니다만)

상대성 이론은 물론 아인슈타인 본인이 제안도 했고 본인 당대에 거의 남김 없이 해명도 이뤄졌습니다만(이 역시 흔한 사례가 아닙니다), 그 대중적 이해는 여전히 답보 상태이며, 근 백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일부 영리한 대중 작가들에 의해 "보다 나은 설명 방법"이 제시되곤 합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임은 우리 독자들이 바로 알아챌 수 있습니다. 특히 압권은 상대성 이론을 갈릴레오의 전통 프레임으로 변환했을 때 어떤 모습인지 친절히 풀어주는 대목입니다. 일상은 뉴턴 역학에 의해 거의 부족함 없이 커버된다고도 하지만, 그 일상의 많은 부분은 또한 미해명의 상태로 남았기에 이런 천재가 20세기에 출현이 가능하기도 했던 겁니다. 그의 해명이 워낙 매끄럽고 빈틈이 없던 터라 양식 있는 그 어떤 과학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책에서는 2011년 나사의 "증명"이 이 거대한 행보에 화료점정 구실을 했다며 특별히 기립니다. (역시 개정판의 흔적)

다음 파트는 빅뱅에 대한 설명입니다만 이보다 앞서 천체 물리학 일반의 지난 자취에 대해 간단한 조망이 나오네요. 허블, 배로, 조르주 르메트르 등 이 분야 대중서에서 자주 만나던 친숙한 인명들이 행진합니다. 앞서 아원자 단위의 세계를 다루는 "표준 모형"도 소개되었지만(우리가 이 이름으로 아는 가장 잘 알려진 이론 체계), 빅뱅 이론은 그보다 훨씬 앞서 "표준 모형"의 지위를 이미 얻었습니다. 이 책에는 (당연하지만) 노벨 상 수상자들의 면면이 자주 언급되는데, 1979년에 로리트가 된 스티븐 와인버그 같은 이의 업적 덕분에, 이미 빅뱅 이론은 정황 증거를 수북이 갖춘 가설이 아닌 정설에 가까운 지위입니다.

우연히 발견된 우주배경복사, 과연 광막한 우주에는 우리 인간 외에 어떤 지성적인 생명체가 살고 있을지요. 미치오 가쿠 같은 이들이 자신의 대중서에서 흥미롭게 설명해 준 대로, 우주에는 과연 종말이 닥칠지, 그간 팽창을 거듭해 온 추세와 중력 간의 숙명적 대결에서 결과는 과연 어떻게 나올지, 이 분야의 과제는 파고파도 끝이 없습니다.

우주와 생명에 대한 전통적 관점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는 이유에서 다윈의 업적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보다 앞서 저자들은 세균들과 고세균(古細菌)들이 따로 분류되는 입장(물론 현대의 다수설입니다)을 지지하며 칼 우즈(2012년 타계)의 탁월한 안목과 전위적인 세계관을 특별히 높이 평가합니다. 이런 태도는 앞선 시대 비슷한 행보로 일거에 패러다임 혁명을 몰고온 찰스 다윈과의 개성 유비를 끌어내려는 의도임을 우리 독자 누구나 눈치챌 수 있습니다.

앞서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통해 행한 "예언"도 이후 학자들에 의해 하나하나 "증명"되었듯, 책은 최근에 이뤄진 각종 화석상의 증거 발견과, 현생 종의 생태 속에서 관측되는 "자연 선택과 진화의 빠르고도 놀라운 양상"에 대해 언급, 소개합니다. 이 중 재미있는 건 인류의 기원을 400만 년 이전까지 끌어올린 아르디(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의 사연입니다. "아르디"는 에티오피아 말로 "바닥. 기본"이란 뜻이죠. 좀 특이한 건 판 구조론 등이 이 진화론 파트의 일부로서 같이 다뤄진다는 건데, 두 이론이 많은 증거를 구조적으로 공유할 뿐 아니라, 진화론만큼이나 유독 지독한 박해와 차별을 받은 지질학에 대한 이 저자들의 시선 때문이기도 합니다.

세포와 유전법칙, 그리고 DNA 토픽은 서로 한데 묶일 만도 하건만 저자들은 이를 각각 6장, 7장으로 나눠 놓았습니다. 이는 아널드 R 브로디 박사의 주전공 분야에 인접하기도 한 만큼 각별히 할 말이 많아서일 수도 있고, 실제 읽어 보면 타 대중서와는 전망의 방향과 컨셉이 다소 다르다는 점도 감지됩니다. 점균류의 경우 우리가 중등 과정에서 배운 대로 동물과 식물의 특징을 겸유하는데, 사실 이처럼 모든 학문 분야에서 배중률을 관철하려는 태도는 참 무모하기까지 합니다. 점균류의 경우 학자들이 놀라워는 하면서도 인식 과정의 모순은 거의 느끼지 않고 수용하는 반면, 양자역학이나 빛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얼마나 거부감이 컸습니까. 개선이나 폐기의 운명을 맞을 것은 현실을 더 이상 설명 못하는 패러다임이지 현실이 아닌데도 우리는 종래의 선입견에 완강히 매달리는 우를 범합니다. 반면 학창 시절 공부 못 한 한이 그렇게라도 풀릴 수 있다는 듯, 기존 이론체계가 무조건 붕괴 대체된다는 근거 없는 소리를 하는 바보도 종종 발견됩니다.

볼복스처럼 개체들이 서로 달라붙어 살아가는 다세포 유기체 패턴이, 과연 생존에는 얼마나 더 유리한 효과를 볼까요? 저자 본연의 전공 영역인 만큼 특히 대식 세포 파트에 가면 저자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도 나오는 등 서술은 한층 활기를 띠고, 세포론은 이어 멘델의 초기 유전 연구에 바톤을 넘깁니다. 이런 유전자의 "본체"가 DNA임을 알게 되는 데까지는 다시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어느 학문이건 종전과는 다른 차원에의 도약을 위해 넘어야 할 "문턱"이 있는데, 저자(들)의 솔직한 견해는 바로 이 DNA의 존재 규명, A, G, T, C 4대 분자의 발견이야말로 과학사 최대의 대사건으로 보는 게 아닐까 싶게 아주 서술이 자세합니다. 이에는 유전학 뿐 아니라, 물리학과 화학의 위대한 콜라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도 합니다만 말이죠. 왓슨과 크릭 두 익히 알려진 전설, 젊은(젊었던) 천재들 외에도, X선과 양자역학을 방법론으로 도입한 모리스 윌킨스의 업적 역시 자세히 다뤄집니다.

인류의 여정은 불과 400만 년 레벨을 넘지 못할지 모르나, 그 지적 탐색의 스케일은 140억년에 달한다고 저자들은 단언합니다. 책은 따라서 이 7대 업적이 향후 어떤 추이로 과감한 도약(퀀텀 리프?)를 이룰지 그 특유의 폭 넓은 시야로 담대하게 짚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신생 이스라엘로부터 제의 받은 대통령 취임을 정중히 거절하며, 정치는 수 년의 단위지만 방정식은 영원의 문제라고 한 건 참으로 명언입니다. 따라서 과학은 인류의 역사를 바꿔 놓은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본체일 수 있고,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류의 이 같은 담대함이야말로 유한한 개체의 의의를 영원에 가깝게 만드는 거룩한 몸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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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캐니언 정말 노아 홍수 때 생겼을까? FIELD TRIP SERIES 1
양승훈 지음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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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캐니언에 다녀오신 적 있습니까? 이름 그대로 장쾌한 스케일과 기괴한 형상에, 진정 "그랜드"란 형용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누구에게도 들죠. 본디 그랜드캐니언은 신대륙에 소재한지라 당연히 기독교도들을 몰랐을 테고, 기독교도들 역시 그랜드캐니언을 몰랐겠으며, 성경에 "감자"가 나오지 않듯 그랜드캐니언 역시 "홀리 스크립트"에 등장할 리 없습니다. 즉 그랜드캐니언은 애초에 "비블리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심 깊은 청교도들이 북미 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하고, 그때로부터 다시 한참이 지나 미국 중서부의 이 절경에 도달하고선, 그 신묘한 경관에 자연 신의 섭리를 덩달아 떠올리는 게 당연했지 싶습니다(말은 이렇게 했으나 유럽인으로서 최초로 이를 "발견"한 사람은 스페인 제국 신민이었던 켑틴 카데나스라고 책에 나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할 생각이 없고, 반대는커녕 흔연히 동참까지 하고 싶어집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보면 말라키아 수도사가 이런 말을 인용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늘은 위에, 땅은 아래에.
기적 중에 기적이로다."

하물며 이런 절경을 두고 어찌 섭리의 신통함을 연상치 않기가 쉽겠습니까(물론, 냉철한 지성으로 엔트로피의 랜덤 워크를 먼저 염두에 둔다면 그 역시 멋진 일입니다). 또, 미국 기독교인들은 그야말로 구절양장의 교리와 입장들을 지녔으며, 프로테스탄트라고 한들 결코 신앙 고백과 신조가 세세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유독, 극히 일부 근본주의자들만이 이 아름답고 웅장한 지형에 대해 왜곡된 의미를 부여하며,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이 협곡의 역사가 불과 몇 천 년 전"이라는 반지성적 결론을 강변합니다. 그 몇 년 전이라 함은 노아의 홍수 시절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축자주의 입장을 취한다고 해서 모두 반지성적이라거나 극단, 편협의 비난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은총 중 하나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 지성의 작동 결과, 우리는 현재 우리가 발 디디고 선 지구의 나이, 우주의 이력이 대략 어느 정도인지 상당한 논거를 가지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미래에 또 어떤 과학적 천재가 나와 인류에 새로운 눈을 띄워 줄지야 아무도 모르긴 하겠으나, 현 단계에서 가장 뻬어난 지성들이 합의를 어느 정도 이룬 이상 단번에 뒤집힐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이만큼이나 인식의 지평을 넓힌 것 역시, 신앙인이라면 그에 대해서도 "전지전능한 신의 은혜"라 못 새길 바 없습니다. 이 역시 넓은 의미에서 신이 인간에게 계시한 바인데, 어찌 가볍게 기각,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현재 자연과학의 성과가 이처럼이나 힘들여 일궈 놓은 바를, 문자 그대로 자연과학 지식을 가르치는 게 주 목적이 아닐 성경 구절의 포괄적 문언 몇 마디를 들어 배척한다면, 이는 상당히 우려스럽고 개탄스럽기까지 한 현상입니다. 이른바 창조과학이 한국에서 일정 반향을 일으킨 건 대략 삼십여 년 전입니다. 여기 가담하신 분들이 한국(그 교육 열풍 극성스럽기로 유명한)에서 단연 몇 손가락 안에 들만한 지성인들이 많았기에, 그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지금 이 책의 저자께서도 (유감스럽게도) 그 그룹에 열성으로 참여하신 분이었죠.

학문적 성취 높은 정통파 물리교육자이며 동시에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는 젊은 시절 정말로 신앙과 학식의 조화로운 지점을 한때 발견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창조과학이나 근본주의는 그시절이나 지금이나 결코 기독교의 주류였던 적이 없습니다. 계몽주의와 이성의 재발견 역시 처음에는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주도했고, 교회의 주류는 처음에야 마음이 불편했겠어도 인류 문명의 도도한 발전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이들 상당수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론의 학습에 대해 별 갈등을 못 느낍니다. 교단의 주류가 이를 승인하고, 그 이전에 상당수 신도들이 넉넉히 세속화된 이유도 한몫 합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저자께서 통렬한 반성과 회심의 계기로 이 책을 저술하셨기에, 독자로서 공감하며 그 취지에 대해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고요.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자연과학, 그 중에서도 지구과학 부교재로 아주 유익하게 읽었다는 점 고백하고 싶네요. "부교재"라기보다, 외려 표준적 교과서보다 더 설명이 자세하고 도판이 미려하여, 그간 긴가민가했던 지식 사항이 말끔히 정리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랜드캐니언의 사진, 연구 결과가 세심히 반영된 도판, 그래픽 등은 어디서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그래픽은 텍스트만큼이나 작성자의 학식과 명철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라, 막힘 없이 훤히 진상을 뚫는 대가의 명강의를 청취한 느낌이었습니다.

최고 수준 과학자이기도 한 저자이시니만치 명칭 배경에 대해 어떤 정서적 거부감(이교풍이라는 등)을 느끼진 않으시겠으나, 너무도 이질적인(서유럽인 기준으로) 힌두의 신들 이름(이들 중 상당수는 근래 들어 부쩍 컨택이 잦은 인도 문화 유입 때문에 친숙하기도 합니다), 북미 원거주인 토착어 등을 딴 지층 명 때문에 당혹감이 적지 않다는 솔직한 느낌도 실려 있어 독자로서 웃음을 머금게도 되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무슨 잘 알지도 못하는 브리튼 섬, 스위스나 독일의 산맥 이름을 딴 학술명칭이 처음에야 생경한 건 당연하죠.

Know the Canyon's history, Study rocks made by time.

무슨 소리냐 하면, KTCHSRMBT란 두문자를 순서대로 외우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열풍인 공시(공무원 선발 시험)에서 주목을 받곤하는 두문자 암기법이 떠오르기도 하죠(사실 본질이 같아요). 카이바브, 토르웹, 코코비노 사암(sandtone. 沙岩), ... 하는 식의 9대 주요 지층(그랜드 캐니언의)을 일단 암기하고 있어야 연구의 프레임이 잡힐 텐데, 전문가들도 정작 이게 쉽지 않은가 봅니다.

상식적으로도, 대홍수가 났다고 하면 넓고 얕은 하상(河床. 강바닥)이 형성되지 싶습니다. 반면, 콜로라도 강과 그 아래 캐니언은 전형적인 구불구불 사행천입니다. 사행천이 무엇인지는 중학교 2학년만 되어도 다 배우는 내용이죠. 우리들 인간 개체의 평균 수명이 워낙 짧다 보니, 수백만 수억년은 고사하고 몇 천 년 단위의 변화마저도 이해가 어렵고, 모르면 진리 앞에서 겸손해지긴커녕 오히려 짧은 지식을 들이대며 당치도 않은 만용을 부리기 일쑤입니다. 근본주의자이건, 그 반대로 무지하기 짝이 없는 안티 기독교 분자들이건 이런 어리석음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랜드 캐니언은 지질학과 지구과학에 많은 연구 과제와 영감을 던져 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독립된 연구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간 5, 6백만년 전 형성설이 확고한 주류설이었으나, 대략 십 년 전에 1700만년 전이라는 입장이 새로 대두했다고 합니다. 왜 방사성 연대 측정법으로 명확하게 못 가리는가 하면, 이런 계곡의 경우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에 어느 대목에서 연구자들이 함정에 빠지거나 오도될지 장담을 못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방법론이 발전하거나, 새로운 법칙이 정립되기도 합니다. 자연 과학 어느 분야라도 흔히 패턴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진지한 과학자들 사이에선 "몇 천 년 전" 설이 더이상 고려대상이 아닙니다만, 여전히 한국의 "창조과학자들" 중에서는 끈덕진 반론을 펴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튼 상대가 논리로 반격해 오면 정당한 논리를 동원하여 논파, 혹은 설득할 필요가 있고, 무작정 권위만을 앞세워 묵살하거나 과학 외적 논변으로 뭉개고 드는 건 안될 일입니다. p202에서 일단 저자는 반대측 선교사분의 입장을 예거하며 그에 대한 반대논리를 전개합니다. 사실 독자야 이미 진부를 마음 속에 확신합니다만, 그래도 무작정 대세에 기대는 건 비겁한 태도 아니겠습니까? 천에 하나 상대측에 일말의 타당성이 있을 수 있다 가정하고(귀무가설?), 일단은 경청하고 듣는 게, 이 저자분의 결론(학계 주류설)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양측에서 동시에 인용하는 R G 셰퍼드 박사의 논문 내용도 <사이언스>에 등재되었던 것이라 우리 독자들에게는 그 구체적인 전개에 대해 큰 흥미가 생깁니다. 셰퍼드 박사의 결론은 유속(流速)이 증가함에 따라, 측방침식뿐 아니라 하방 침식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건데(p204), 홍수가 얼마든지 깊은 강도 만들 수 있다는 게 이를 인용한 선교사분의 요지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실험은 사전에 인위적으로 수로를 만들어 두고 실시한 실험이므로, 애초에 홍수의 효과를 시뮬레이션하는 논지와 무관하다고 재반박합니다. 여튼 논쟁 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자연과학 지식은 많다고 헤야겠습니다. 또, 제아무리 한쪽 입장이 진리라는 쪽으로 심증이 기울어도, 그 과정 하나하나에 절대적 타당성이 부여된다는 게 역시 쉬운 일은 아니라는 점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정직한 느낌으로는 저쪽 반박(창조과학 측)도 만만치 않았다는 편이었거든요. 이겨도 뭔가 많이 맞고 이긴 기분이랄지요. 하긴 일부 맹목적 기독교 안티들처럼 뭘 모르면 그저 목소리만 높이고 악다구니만 써도 창피한 줄을 모르므로 편하긴 합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말입니다.

그랜드 캐니언은 협곡 지형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 협곡을 흐르는 물줄기를 가리키기도 하는 맥락으로 이 책에서는 쓰입니다. 지류, 지지류, 지지지류 등 다양햔 층위의 흐름에 대해서도 독자는 유의하며 책을 읽어나가야겠습니다. 저자가 거론하시는 핵심 논거 중 하나가 지류와 지지류(혹은 그 하위 레벨)가 만나는 "각도"인데(라디안 단위가 아니라 우리가 흔히 쓰는 "도[度]"입니다), 표본으로 대표성을 잘 갖춘 케이납 크릭의 예를 듭니다. 왜 이들은 90도 이상의 둔각으로 만나는가? 오랜 세월에 걸친 느린 침식 과정이 결정적 형성 요인이었음을 증명한다는 저자의 논변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저자의 태도는 마치 존 스튜어트 밀의 리캔테이션이나 파스칼의 겸허한 고백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책 말미에는 도널드 트럼프 같은 성향의 정치인을 지지하는 일부 근본주의 진영에 대한 거듭된 우려, 복음주의와의 차별성 등에 대한 소신 개진이 있는데, 이 역시 진지하게 읽고 독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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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흉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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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편은 이미 1992년에 발표되었고, 한국에서도 같은 출판사에서 몇 번 출간된 적 있습니다. 이분이 워낙 다작을 하시는 분이라 어지간한 팬의 입장에서 챙겨 읽는다고 하는데도, 전에 읽었던 작인지 여부가 간혹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10페이지를 넘길 즈음에서는, 아스라이 십수 년, 혹은 수십 년 전의 감흥(개인화된)이 그 줄거리에 앞서 먼저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최소한 이분의 작품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세계 스펙트럼은, 한 축에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놓여 있고, 다른 반대편 축에 <질풍론도>가 자리했다고 봐도 됩니다. 잔잔하고 소박한 톨스토이풍 우화에서 시드니 셸던 스타일의 정신없는 스릴러까지, 어찌보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중에게 가장 손쉽게 어필할 통속 문학의 빤한 경로를, 욕심 가득히 만물상 좌판처럼 벌인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는 팬이건 무덤덤한 축이건 간에, 이분에게 애써 그런 부당한 곡해 프레임을 씌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게 봅니다(어지간히 속이 배배 꼬인 못난 늙은이의 나잇값이 아니고서야 말이죠).

이유가 뭘까요? 그는 어떤 얘기를 늘어놓아도 장르에서 지키는 최소한의 규칙을 "모범적으로(참 모범적입니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 점인데)" 준수하며, 말미에는 언제나 따스한 주제의식을 집어 넣습니다. 이게 당치도 않은 가식이어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작가, 작품도 따로 있습니다만, 이분의 시도는 그리 요란, 유난을 떨지 않고 어찌보면 좀 진부한 테마인데도, (우리 독자들이 평범, 범속해서인지) 끝에 가선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져 옵니다.

저는 그 이유를 단 한 마디로 요약하고 싶은데요. 그건 "이분이 본래 마음이 착한 사람이어서다."입니다. 세상을 따스하게 보고 싶고, 품고 싶고, 가능하면 낙관하고 싶으며, 결국은 좋은 사람이 이기고 잘 되는 걸 보고 싶은 작가의 착한 마음은 거의 어떤 작품에서건 표현됩니다. 또 그 진정성은 독자에게 거의 언제나 소통에 성공합니다. 소통 성공의 필요충분조건은 진정성이겠으므로 결국 그말이 그말이긴 합니다만.

그냥 착하기만 하고 재미는 좀 떨어지느냐, 그건 뭐 누구라도 동의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히가시노 상 하면 첫째가 재미인데 뭔 소리냐"며 대뜸 반박이 날아올 겁니다. 이 작품은 제가 초회독 할 때도 참 정신없이, 말 그대로 페이지터너에다 몰입할 수 있던 그런 장편이었고, 세월이 좀 지나다보니 플롯이 발전할 때마다 느끼던 흥분, 기대는 다시 재생되어도 줄거리가 좀 가물가물해서 더욱 즐거웠던 재독이었습니다.

일단 이 장편은, 아마도 한국 독자(혹은 영화 팬이라고 해도)들이, 이런 식의 스릴러 공식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을 무렵에 (작가분의 본국에서) 발표되었고, 한국에 번역되었을 터입니다. 이 정도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와 사람을 이처럼 미치게 몰입시키는 명작"이라며 대중 문화에 아직 세련된 길이 덜 든 이들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시작부터 대체 뭔 상황인지 독자가 감도 채 잡기 전에 화들짝 장면을 바꾸고 충격적인 진상을 드러내며, 이 테크닉이 효과적으로 남긴 서스펜스가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스테이지의 강약 세팅이 바뀝니다. 시작이 이리 현란하니, 앞으로 독자는 뭘 기대했건 그 이상의 플롯 롤러코스터를 탑승할 수 있으며, 이 게임에서 무슨 수를 두건 지레 돌을 던질 각오에 오히려 쾌감을 느낍니다.

미국 장르물에서 영향을 받았건 안 받았건, 그 구조와 상상이 과연 얼마나 독창적인 잎맥과 물관을 지녔건 간에, 재미있게, 슬프게, 오싹하게 책 한 권 잘 읽은 독자는 개운해진 제 감정을 뿌듯해하며 아무것도 묻거나 따질 마음이 안 듭니다. 여튼 확실히 정화된 내 마음이니 구태여 잡된 생각을 서둘러 들일 이유가 없겠는데, 위대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작가로서의 선의와 도덕성, 천진한 창작자의 무구한 심성만큼은 어느 문호가 부럽지 않은 그이기에, 작품의 완성도 따위보다는 (문학 본연의 기능인) 소통과 감동을 언제나 우리는 쌍수 들며 환영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확신합니다. 이보다 더 공공연한 비밀, 단단한 컨센서스도 없고, 이것이야말로 히가시노 상이 보유한 "아름다운 흉기"입니다. 부디 아껴서들 읽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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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도쿄 - 여행을 기록하는 아주 특별한 방법 YOLO Project 두근두근 여행 다이어리 북 시리즈 7
21세기북스 편집부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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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또 어디를 향한 것이건 가슴이 설레는 체험입니다. "가깝고도 먼 나라"란 표현을 흔히 쓰지만, 사실 뱃길로건 항공편으로건 오가는 데에 불과 몇 시간이 채 안 걸리는 일본이야말로 물리적으로는 그보다 더 가까울 수 없는 행선지입니다. 근래 정부와 지자체 차원의 대대적인 홍보라든가, 민간에서 발 벗고 나선 산업 전체 레벨의 "혁신"이 있었기에, 일본에 대해 "마음으로 먼 감정"을 느끼는 이들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참으로 많은 분들이 다녀오신다는 생각이 부쩍 자주 듭니다.

일본은 여튼 고유의 문화색, 개성이 꽤 강하고, 우리처럼 외세의 침략을 자주 받지 않았기에 전통 유산이 많이도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도쿄는 번화한 도회, 현대 산업의 중추, 막부 소재지의 삼백 년 역사가 남긴 매력이 두루 겹쳐, 우리 한국인들뿐 아니라 세계 도처로부터 여행객을 많이도 끌어모으는 곳입니다. 어느 여행인들 "두근두근거리지" 않을 곳이 없지만, 동경 같이 살뜰한 멋을 두루 갖춘 곳은, 각별히 마음설레하며 1) 치밀한 계획을 짜고, 2) 여정을 꼼꼼히도 메모하여 두고두고 추억으로 간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이 책은 여행 다이어리입니다. 이 시리즈 "두근두근 여행 다이어리" 중에서는 일곱째 권인데, 일본 도시를 다룬 것으로는 "오사카&교토"편에 이어 두번째이며, 아시아 여행지를 주제로 한 다이어리 중에서는 홍콩 편도 앞세운 세번째입니다. 표지는 보시다시피 진분홍의 원 톤인데, 오사카&교토 편이 초록이었던 것과 대조됩니다.

첫장에는 모눈종이 같은 형식 위에, "이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리"해 볼 것을 독자들에게 권합니다. 저 역시 넉 달 뒤 여행을 앞두고, 어차피 아무도 안 볼 나만의 기록이란 전제 하에 몇 마디를 적어 보았습니다. 가서 어딜 둘러보며, 경로를 정할 때는 뭘 기준으로 삼을지 같은 계획을 짜기 전, 이미 현지에서의 내 마음가짐이 어떤 감상과 기분에 젖을지 미리 상상하거나 미래의 자신에 감정 이입도 하게 되었습니다. 본디 여행의 설렘이란 그런 거죠. 비장하게 순서를 매겨가며 감개어린 투로 털어놓는 "목적 선포"와는 그래서 여행의 경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뭘 상상해도 신 나니까요.



한국과 달리 교통비가 많이 비싼 편인 일본이기에, 선불 충전식 카드 하나 정도는 구비해 둬야 하겠습니다. 책에는 "하루 일정에 이동이 많기보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경우라면 1회권 구매가 더 유리하다"고 알려 줍니다. 또, 여행 계획이 완전치 않은 여행자에게는 도쿄 프리 승차권을 권해 주는데, 기왕 이런 예쁜 다이어리까지 입수한 이상 계획 하나는 원 없이 세울 생각입니다. 두번째 여행은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흥 따라 발걸음 따라 다녀올 요량이라도 말이죠.



철도역이건 공항이건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찾는 게 기본 자세이며, 꼭 있게 마련인 마감시각을 몇 분 앞두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분들에 대고 혀를 차기 일쑤이지만, 어디 그분들이라고 매번 지각대장이었겠습니까. 일생을 두고 작은 약속 한 번 어겨본 적 없는 성실한 분들이 하필 그날따라 책임 못 질 사정이 생겼을 수도 있죠. 여튼 이런 운 없는 경우가 내 머리 위에 혹여 떨어진다면, 그때를 대비해, 나리타 공항의 세 군데 터미널을 각각 어느 항공사가 자주 이용하는지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합니다. 이런 세심함이 마음에 참 들었습니다. (물론, 우선 기억할 곳은 1터미널이라는 게 결론입니다)



아키하바라를 두고 덕후들의 성지라고 합니다. 사실 저는 덕후 소리를 듣기 싫어 그러는 게 아니라, 그리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또 자기 취향은 생각 않고 남들 따라 명소 위주로 일정 짜는 것도 좀 어리석은 선택이긴 합니다. 허나 첫번째 여행이니만치, 가급적이면 이런 책에서 권하는 표준적 코스를 "무난하게" 고를 생각입니다. 일본과 가까운 부산도 플라모델이 큰 유행인 고장이지만, 어디 해당 문화의 본거지에서 구매하는 상품은 뭐가 다를지도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부산에서 자란 사람이면 어린시절 친구따라 잔뜩 컬렉션 마련했던 추억 없는 이가 아마 없을 듯합니다. (하지만 이 취미를 졸업한지 너무도 오래고, 심지어 취미 가진 사람 만나본지도 꽤 된 터라....)



얼마전 일본의 평범한 중년 회사원이 쓴 트위터 소설을 읽었습니다만 그 책에도 배경으로 또 등장하는 롯폰기 역시 들러볼 필요가 있겠죠. 새로운 부촌으로 작정하고 개발된 "롯폰기 힐스"는, 그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 미국 서부에서 모두의 선망 대상인 "베벌리 힐스"에서 따왔음이 분명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체 어떤 감각, 재능, 매력을 지녔기에 이처럼 화려한 인생을 즐길 수 있는지, 가볍건 심각하건 간에 자극 좀 받아보는 것도 유익할 터입니다. 이런 자극은 같은 국내인들에게서 받는 것보다 이처럼 타국에서 치르는 게 정신건강상 유익하겠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죠 ㅎㅎ


"일본의 과거부터 현재를 모두 볼 수 있는 매력적인 곳." 도쿄 여행 다이어리인 이 책이 도쿄를 규정하는 말입니다. 아사쿠사와 하라주쿠를 고, 금 대표 구역으로 나란히 두는가 하면, 야경의 장관으로는 도쿄 타워와 레인보우 브리지를 듭니다. 아마 이 책이 진분홍 표지를 예쁘게 걸친 이유와도 관계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합니다. "와규, 스시, 라멘은 물론이고 커피나 맥주까지 모두 맛이 좋다." ㅎㅎ 정말 그럴까요? 객(客)을 반가이 맞아주는 주인의 마음이 넉넉하니 손의 입맛도 절로 돋우는 게 아닐지 추측합니다. 뭐 맥주 맛 좋은 거야 한국에서도 일찍부터 인정, 승복한 사실이지만요.



블루 보틀 커피의 원산이 미 서부인 줄은 알았으나, 아시아에서 이를 최초 수입한 나라가 일본인 줄은 몰랐습니다. 책에서는 "최초일 뿐 아니라 유일하다"고까지 말하는데, 일본은 본디 타 문화의 근사한 구석을 앞장서 수용하되, 묘하게 자기 식대로 변용한 후에야 직성이 풀리는 묘한 기질을 가지기도 했죠. 책에서는 "(라인업이) 조금은 상이하나 메뉴와 맛은 거의 같다"고 전합니다. 특히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좋아 대대적으로 오픈했다는 사장님 말씀인데, 좀 색안경을 끼고 보자면 바로 이런 게 일인들의 기발하고 은근하며 민첩한 상술입니다. 진재를 겪고도 오히려 근래 더 관광 진흥에 열을 올리고 재미도 톡톡히 보는 그들에게서, "혁신 의지와 창의성"까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전에는 "전철에서 망가든 뭐든 일단 책을 보고 앉은 일본인들이 놀랍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한국인들도 워낙 자기계발에 열심이라 두세 사람 건너선 꼭 한 명쯤이 책을 보는 게 흔한 풍경이며, 우리가 어느 나라에게건 뒤처질 바 별로 없습니다. 허나 책사랑의 문화가 어디서 닮았고 어디서 갈라지는지 확인하는 것도 "책 덕후"에게는 적지 않은 기쁨이겠는데요. 이런 이들을 위해 책에서는 pp. 48~55에 걸쳐 책 명소를 자세히 소개해 놓았습니다. 계획을 어떻게 짜건, 예산의 한계가 어디이건 여기는 꼭 들를 생각입니다. (근데 이러면 앞에 했던 장담과 살짝 대의가 어긋나기는 한데... 에휴 뭐 예비군 훈련 가는 것도 아니고 내 돈 들여 내 여행 다니는 건데 말 좀 어긋난들 뭐 그리 큰 흉이겠습니까)

"당신은 참 좋은 사람 같군요."

이 글귀는 영화 <동경 가족> 중에 나오는 대사라고 하네요. 미유키도리를 알리는 표지판 위에 눈 지긋이 감고 터줏대감마냥, 혹은 초자연적 능력을 지닌 가고일마냥 폼 잡고 앉은 고양이 사진이 배경이라 무척 인상적입니다. 아니면, 나쓰메 소세키의 그 유명한 고전 <나는 .....>도 생각나고 말입니다. 나는 혹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진정으로, 어떤 계산이 개입하지 않을 순간에 들어본 적 있습니까? 물론 정 많은 한국 사회에서 친구들 간에 흔히 오가는 말이기도 하지만, 어떤 상황, 어떤 맥락에서 문득 별 일 아닌 양 귀에 꽂힌 적 있다면, 새삼 행복감에 젖을 만도 합니다. 내가 스치듯 방문한 처음의 도쿄가 "참 좋은 도시 같았으면" 좋겠고, 도쿄도 나를 "그래도 괜찮은 것 같은 길손"으로 기억해 줬으면 훈훈할 듯합니다. 이 예쁜 다이어리가 증인 노릇 해 줄 겁니다.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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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새롭게 믿는다면 - 다시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교회와 크리스천이 가져야 하는 새로운 생각
박광리 지음 / 패스오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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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라면 육신을 갖고 사는 생(生)에도 "거듭남"이 필요하고(p253), "믿음'에도 역시 "새로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실 믿는다는 행위가, 그냥 시간만 오래 끈다고 믿음이 깊어지는 게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반성 없고 타성에만 젖어 끌고 가는 신앙은, 초심이 사라지고 형식과 건성만 남아서는 믿음의 순도를 더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집과 편견 역시 갱신, 혁신의 계기를 가지지 못해, 자칫 잘못하면 오도된 믿음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행위나 신념도 그렇지만, 신앙 역시 "새롭게 믿으려는 의지와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겠습니다.

어떤 신앙 서적이든 그 무게가 가벼울 수야 없습니다만, 이 책은 본문에 담긴 권고와 단어와 문장의 무게가 상당해서, 페이지를 넘기는 데에 시간이 꽤 오래 걸렸습니다. "이렇게나 심각한 책이었던가?" 책 중에는 그저 달콤한 말로 독자에게 값싼 위안을 시도하는 게 있고, "찔려서" 함부로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 중 후자에 속합니다. 독자들이 믿어 왔던 건 그 중 상당수가 그릇되었었구나, 그건 믿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을 모독하는 짓이었구나, 그만큼이나 오랜 시간 동안 믿어왔음에도 방향이 잘못되었더랬구나, 이런 생각 때문에 아마 이 책이 쉬이 넘겨지지 않는 게 많은 분들의 공통된 체험이지 싶습니다. 어떤 말씀은 폐부를 찌르는 듯 아프고, 어떤 말씀은 감긴 눈이 뜨이는 듯 시원하고, 어떤 말씀은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독자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하긴 없는 시간을 내어 책 한 권을 읽고, 독서 전과 후가 이 정도는 달라지고 감흥이 느껴져야 마땅한데, 우리 주변에선 그런 책을 접하기가 참 힘듭니다.

목사님은 특히 자유의지에 대해 따끔히 한 말씀 하십니다. "지나치게 강조된 자유의지는 오히려 성경적이지 못하다." 많은 분들이 그런 말을 하죠. "어째서 하루 종일 일한 일꾼과, 나중에서야 도착하여 일을 조금만 한 사람의 몫이 서로 같은가?" 저자는 아무도 손해를 보거나, 부당히 여길 만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일한 사람은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았고,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늦게 와서 배를 주리게 된 사람조차 배를 주리지 않게 은혜를 받았으니, 오히려 모두를 차별 없이 사랑하는 신의 섭리가 증명된 셈입니다.

"평생 동안 아버지 곁에서 일한 나와, 타락한 생활로 인생을 허비한 저 몹쓸 녀석이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러나 아버지가 하는 말은, "너는 너라서 귀한 아들이며 나와 함께 그 모든 은혜의 시간을 함께하지 않았느냐. 저 녀석은 이제서야 제 잘못이 부끄러운 줄 알며 헛되이 보낸 인생을 한탄하니, 알차게 잘 산 네가 왜 네 동생을 미워하느냐." 신의 사랑과 이치는 결코 마구잡이가 아니라는 점을 저자는 특히 강조합니다. 인간들이 이해 못 할 방식으로 다만 세상을 다스리고 인간을 사랑하실 뿐이라는 거죠.

영화 <미션>에 보면 그런 대목이 있습니다. 노예 상인이었던 로버트 드 니로가 자신의 죄악을 모두 뉘우치고 자발적으로 무기 등을 싸짊어진 채 과라니 족의 거주지(높은 벼랑)까지 오르며 고행을 합니다. 고행이라기보다 잘못하면 미끄러져 죽는, 목숨 걸고 벌이는 모험인데, 그가 다 올라오자 과라니 족은 한때 짐승이나 포획하듯 동족, 형제, 부모, 자식, 가족을 잡아가 노예로 팔아먹은 이 인간 말종을 둘러싸고 알아듣지 못할 말로 한 마디씩 합니다. 노예 상인은 맞아 죽거나 찢겨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참담함, 한편으로는 공포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는데, 이 사람의 진심을 안 주민들은 천진하게 웃으며 마치 어린이들이 지난 원한을 싹 잊듯 그를 토닥입니다. "너희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자에게 행한 게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게 바로 신이 대신해서 행하는 용서인 줄 알고, 노예 상인은 웃음과 회개가 교차하는 극한의 체험 속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사람에게 구원에 대한 책임이 있다면, 사람의 공로도 있긴 하다는 뜻 아닙니까?" "신의 은혜로 이미 구원 받고 안 받고가 결정되었다면, 우리 인간은 가만 있기만 하면 될 것이 아닌가? 모든 게 팔자소관이란 동양식 미신과 아무 차이가 없지 않은가?" 여기 대해서도 저자는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명쾌한 답을 내어 놓습니다. "하나님은 본디 인간에게 죄를 선택할 자유까지 주었으며, 그래서 완전한 자유인 것이다." 앗수르(아시리아)는 신의 도구가 되어 북이스라엘을 파괴합니다만, 그들이 무엇을 알아서 이스라엘을 단죄하는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심판은 신이 행하며, 앗수르의 서슬 퍼런 창날과 무자비한 전차는 그의 도구일 뿐이죠.

왜 우리는, 우리보다 적게 일하고 삯은 똑같이 받는 이웃에 대해 불편해하고, 그런 신의 섭리에 대해 부당하다고 여길까요? 저자는 "이는 부조리나 불평등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 느끼는 이의 탐욕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아수르는 저들의 탐욕 때문에 이스라엘로 쳐들어와 문명을 말살했을 뿐, 어떤 우월한 깨달음이나 자격이 주어져서 그리한 게 아닙니다. 무엇의 도구처럼 쓰이는 신세만큼 처량한 게 없습니다. 도구에게는 아무 의지도 축복도 존엄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웅리가 우리 자신의 섣부른 기준으로 누구를 재단한다면, 이는 신의 주권에 도전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의 행복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고 든다면, 신의 선물로 주어진 자유의지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소중한 자녀가 아니라, 탐욕으로 가득한 도구 신세로 떨어지겠다고 차청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의 자녀라면 그 주권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요셉은 이런 이치를 일찍부터 깨달았기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형제들의 무도함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구원 받은 이는 이처럼 매사에 초연하며, 누구도 감히 그의 내적 평화나 지혜를 침노할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긴 게 잘났다고, 더 똑똑하다고, 아버지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다고, 온갖 모함과 저주와 질시를 그 동생에게 퍼붓고는, 급기야 노예 상인에게 신병을 팔아먹은 자들이 어디 사람입니까? 율법 시대라면 어떤 잔혹한 형벌을 받아도 마땅할 패륜아들입니다. 그러나 만약 요셉이 이런 이들에게, 사람의 판단으로 정당한 "복수"를 꿈꿨다면, 그는 용모도 지혜도 똑같이 그의 형제들처럼 추하고 어리석고 저열한 단계로 떨어졌을 겁니다. 짐승과 같이 놀면 같은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대신 그는 지상에서 가장 부유한 왕국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심판이고 섭리입니다. 그 형제들도 각각 (먼 훗날)12지파의 수장이 되었을 뿐, 어떤 참혹한 죄과를 치르지는 않고, 눈물로 회개한 후 새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신의 섭리란 이처럼 인간의 협소한 정의감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저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와 비교해 보십시오. 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빅 픽처가 있다." (p263)

칼뱅은 인간의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오로지 신의 선택과 구원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정"이란 말로 표현됩니다. 이미 칼뱅 이전에 "왜 유대인은 구원 받지 못하는가?'"를 두고 사도들의 고민이 이미 있었습니다. 이때 그 결과로 도출된 유명한 말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입니다. 사실 이 점은 장 칼뱅이 로마 가톨릭을 공박할 때, "구원에는 선행, 행위가 필요하다"는 상대측의 교리 허점을 지적하려는 역사적 의도도 있었지요. 그런 태도는 유대인들(당신네 구교도들이 그렇게 미워하는)의 입장과 뭐가 다를 바 있냐는 겁니다. "예정, 구원"은 분석 대상이 아니라, 그저 "선포"될 뿐이라는 말씀을 다시 새겨봐야겠습니다.

저자는 본디 메디컬 엔지니어링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 재직하다 "새로 믿고 새로 태어남"의 체험을 통해, 2012년 목사님으로 완전히 다른 경력을 시작한 분입니다. 분당은 신도시 설립 당시부터 교회 많기로 유명한 동네였고, 그 중에서도 이름난 분당우리교회에서 오래 사역자로 봉사해 왔습니다. 2016년 이 교회로부터 분립하여 "우리는교회'를 개척하여 지금에 이릅니다. 성경 본문이 매우 자주 인용되며 그 깊은 의미에 대한 해박한 고찰, 무엇보다 오랜 세월 갈등과 번민의 산물일 듯한 깊이 있는 깨달음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신앙 서적은 본디 독자를 다독이기보다는, 독자의 부족한 면을 호되게 깨우치는 책, 부끄럽게 만드는 책이 좋다는 생각이며, 그런 이유에서 이 책은 간만에 만난 "만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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