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자기 여행 : 에도 산책 - 일본 열도로 퍼진 조선 사기장의 숨결 일본 도자기 여행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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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려한 문장과 청신한 사진으로 세계 각 지역의 도자기 문화를 소개해 온 조용준 선생의 기행과 수상이 벌써 여러 권째 일본 열도에 머물며 예리한 시선으로 세부를 관찰하는 중입니다. 규슈, 교토에 이어 드디어 덕천막부 삼백년의 도읍지인 에도에 도착했습니다.

"조선 도자기가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도예 공부는 끝난 것이다." 책 띠지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대륙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 조선에 비해서도 중앙 집권의 역사가 한참 뒤떨어졌던 일본 역사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예컨대 이 책 중 "... 규슈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가 뒤떨어졌던 혼슈의 각 영주들은...." 같은 문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대륙 혹은 반도를 향해 거대한 침략, 약탈의 기세가 뻗쳤던 시기는 크게 잡으면 두 번 정도입니다. 한 번은 남북조의 혼란기에서 열세를 극복 못 하고 그 좌절의 출구를 침략에서 찾으려 들었던 고무라카미 덴노 진영의 잔당들이 벌인 작태였고, 다른 한 번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임진란 7년 전쟁이었습니다. 이 사이에도 크고 작은 왜침은 부지기수였으나, 큰 구간으로 나눠 고찰하자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두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침략이 대체로 영토 확보의 관점에선 무위로 돌아간 듯해도, 초특급 공예인의 유출, 문화 이식과 유입이란 점에선 왜인들에게 대성공이었습니다. 단지 고급 문화의 향유에 그치지 않고, 이의 체계적 생산을 통해 경제적 발전까지 도모할 수 있었다는 게 그들로서는 큰 수확이고 보람이었습니다.

중등 교육 한국사에서 반드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넘어가는 게 "가야 문화가 열도에 끼친 영향"이며, 그 대표적인 예가 스에키(須恵器) 문화입니다. 이 "스에키"의 어원에 대해 저자께서는 "쇳소리를 낼 정도로 얇고 강한", 즉 쇠(鐵)에서 직접 연원했다는 설을 취하고 있습니다.

책은 도자기 탐구 그 머나먼 여정의 중요 기착점(이자, 책 서문에 의하면 아마도 "종착점")으로 에도, 즉 도쿄를 다루지만 유독 그 전사(前史)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이는 아마도 반도사가 열도의 문화에 끼친 직간접 영향의 중요 결론을 (다소 감개어린 어조로) 이 책에서 일단 큰 틀에서 마무리짓고 싶었던 저자의 의욕이 다분히 반영되어서가 아닌가 추측합니다.

p131 같은 곳을 보면 이런 서술이 있습니다. "... 옛날에는 코마이누(狛犬. 앞의 글자는 '짐승이름 박 자'입니다)라고 쓰지 않고, 고려견(高麗犬)으로 썼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고려라는 글자를 모두 지우고.. 일종의 역사 날조라고 할 수 있다." 일본 특유의, 그저 언중의 입에서 소리나는 대로 적기보다, 훈독(訓讀)까지를 모두 고려하여 텍스트를 꾸미는 어문학적 관행을 고려해야 문맥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으로, 명백한 역사적 교류와 영향의 흔적을 인정하지 않고 멋대로 우월감을 과시하려는 이런 억지스러운 행태는 기실 풍신수길의 더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 구축 과정에서 얻은 민족적, 문화적 자신감(비뚤어진)의 발로인데, 이는 도쿠가와 막부의 보다 정교한 봉건 지배 체제의 구축과 더불어 다소 완화되어가는 추세였습니다. 에도 삼백년의 평화와 안정은 곧 조일 관계의 소강 상태로도 이어졌으니 말입니다.

챕터 1에서는 고쿠타니 유적과 이에 관련한 명가들의 찬연한 예술품들이, 눈부시게 화사한 도판 속 자태와 함께 소개, 요약됩니다. 우리가 중등 교육 과정에서 배우기로, 조선 백자의 전형적 특징은 "소박하고 진솔하며 꾸밈 없는 아름다움"입니다. 도공들의 예술가 기질 역시 그들의 후원자인 귀족, 지배층의 취향에 따라 그 발현의 수위가 결정되는 게 당연했는데, 비슷한 시기 일본에선 이처럼이나 대조적인  색채와 형상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외적인 화사함만으로 작품의 성취와 완성도를 평가할 것은 물론 아닙니다(물론 겉모습의 추함과 속마음의 일그러짐이 함께 가는 경우도 많습니다만). 허나 에도 막부의 전적인 후원, 또 이후 전개된 명치 정부에서의 여전한 호의 등에 힘입어 에도의 도자 제조 기법이 이처럼이나 휘황찬란한 경로를 밟은 데 대해서는 뭔가 부러운 마음이 생기는 게 솔직한 느낌입니다. (이는 독자인 제 생각일 뿐이고, 저술의 취지나 맥락과는 무관함을 강조해 두겠습니다)

저자의 어투나 주제의식 표현은 그래서 역설적이게 다가오는 면이 있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이처럼이나 도도한 빛깔을 뽐낼 수 있던 게, 알고보면 모두 한류의 영향이다." 에도 도자의 성취와 (해외 만국 박람회 출품이나 호평 등) 높은 인기가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면 낼수록, 마치 전자제품 판매고가 향상될 때마다 원천 기술에 지급되는 로열티도 덩달아 볼륨이 커지듯이, 우리 조상들이 열도에 끼친 업적과 위대성도 함께 현창되는 것 아니냐는 뜻입니다. 사회 지도층의 완고하고 편협한 인식 탓에, 이처럼이나 뛰어난 기술과 안목이 우리 영토 안의 번영과 풍요, 자긍의 구체적 현시로 이어지지 못한 역사가 못내 안타까울 뿐입니다.

조용준 선생의 이 시리즈가 언제나 그랬지만, 특히나 이 에도편에서는 화보와 도판이 많아 독자의 상상력을 더욱 활기차게 돋우는 구실을 해 줍니다. p226에 보면 "이웃집 토토로와 노리다케"라는 짧은 글이 실렸는데, 저는 꽤 의외로 받아들였습니다만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 작품을 놓고 저자께서는 언제나 힐링의 도구로 삼는다시는군요. 제목의 "노리다케"에서도 알 수 있듯, 에도 도자를 주제로 논함에 있어 결코 빠질 수 없는 주제가 바로 노리다케입니다.

전직 베테랑 언론인인 저자를 다만 "도자기 여행 저자"로 처음 접한 독자로서는, 가뜩이나 심취하신 주제가, 필생의 애정 애니메이션과 이런 부분에서 접점을 마련하는 게 신기하게 여겨졌습니다. 하긴 다양한 방면에서 가식과 허위 아닌 진정한 애정을 쏟을 부분을 마련한 인생은 이래서 더 행복한 것 아니겠습니까. 인성이 비뚤어지고 거짓으로 모든 추한 에고를 감추려 드는 썩은 영혼은, 뭘 봐도 가당치도 않은 흠집과 생트집 드러내기에서 변태적 쾌감을 느끼는 것이겠고 말입니다.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 "도쿄"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비로소) 개관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 재미있는 건, 일본 (헌법이나) 법률 어디에도 도쿄가 수도라며 성문화한 대목이 없다는 사실이다... "(p378) 그도 그럴 것이 덕천 막부 통치 기간 내내 이곳은 그저 소박하게 "강호(江戶.에도)로 불렸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명치 연간 초기에 교토를 일러 "서경(西京. 사이쿄)"라 일컬은 사실을 지적함도 체계상 아주 적절합니다. 꼭 우리네 고려 중기 역사에서 북진 정책의 거점으로 기대되었던 평양이 "서경"으로 불린 것처럼 말입니다.

조 선생의 전작들을 유심히 읽은 독자라면 "러스터 웨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아직 귓가에 생생히 맴돌 터입니다. p270 이하에는 가토 다쿠오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이어지는데, 이분 역시 다지미 코우베이 가마의 장손 출신이라는 점 등은 역시 전작 <교토>편에서 우리가 접한 적 있습니다. 어떤 시리즈를 읽을 때 매권마다 전혀 새로운 사실과 정보, 독특한 감상이 전개되는 것도 좋지만, 이처럼 저자께서 전작들의 포인트를 적정 시점에서 환기시킨다거나, 연계점을 다시 짚어 주는 태도도 독자 입장에서는 꽤 반갑습니다.

"... 앞선 선배들처럼 모모야마 시노와 세토 구로를 원점으로 전통을 계승하면서도(p280)" 새로움을 추구했다는 저자의 한 줄 요약은 정곡을 찌른 통찰입니다. 작가와 예술품의 핵심 특질이 이처럼 쉽고도 명쾌하게 요약되는 건, 그만큼 관찰자가 건조한 기술적 프레임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정직한 감성을 대상에 효과적으로 이입, 투영했다는 뜻입니다. 당치도 않은 생트집 잡기에나 열을 올리며 보는 이의 실소, 조소를 자아내는 노출증 사이비 괴수하고는 적나라한 대조를 이루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이 주제에서도 언급 안 될 수가 없습니다. 20세기에 활동(아무래도 에도의 문화사가 근세사, 현대사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책에서 우리와 인접한 시대의 인물들이 다뤄지죠)한 하마다 쇼지 이야기가 나오면서 언급되는데, 아마도 독자들이 단연 주목할 만한 이름은 영국인 버나드 리치일 것입니다. 이쪽 사람들은 왜 이토록 부모나 집안의 간곡한(또 안전한) 충고와 지침을 따르지 않고 구태여 먼 이국으로 건너와 모험을 하는지 이해가 잘 안 갈 때가 왕왕 있습니다. 아무튼 금기의 사랑을 이루고 일본으로 도피(?)하여 아예 도자기 제조의 달인이 된 그는, 20세기 후반에는 드디어 한국과도 잦은 왕래를 통해 뜻있는 예인, 전문가들과 교분늘 쌓죠.

다시 책 띠지로 돌아가 볼까요?

"조선 도자기가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도예 공부는 끝난 것이다."

이 말이 바로 버나드 리치의 "명언"입니다. 그저 평면적인 도자기 소개, 화사한 사진의 행렬에 그치지 않고 조용준 저자의 기획이 "인문"의 반열에 들 이유가 생기는 건, 바로 이런 촘촘하게 연결된 주제의식의 치밀한 "플롯화"입니다. 앞서 저자는 감정의 힐링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어느 작품 감상에 의존, 해결한다고 했는데, 독자로서 저는 문화나 예술에 대해 그저 기예의 정교함이 빚은 미학적 착시의 효과라는 오해, 회의가 생길 때마다 앞으로는 이 책을 펼쳐들까 생각해 봅니다. 모든 존재는 그만의 필연을 내포했으며, 따라서 우리네 생도 다 그 나름의 절실한 이유를 갖춘 것이라는 점, 재확인이 가능하다는 언질을 얻게 되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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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예술교육법 - 아이의 두뇌의 숨은 힘을 깨우는
박선민 지음 / 별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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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 그 어느때보다 예술인의 감성이 중요해지고 높은 빈도로 요구되는 요즘입니다. 중근세에도 천재적인 예술가들은 도처에서 출현하여 동시대인들의 미학 수요를 충족시키고 영혼을 정화해 주었습니다만, 그들의 본분은 실업(實業)이 아니었기에 benefactor들의 환심을 사지 않으면 마음 놓고 창작에 전념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아무 재능도 없이 태어나, 입에는 거짓말과 자기 기만만 달고 사는 늙고 추한 도시 빈민이 짬뽕 같은 망상과 명예 훼손에 전념할 자유(가 아니라 민폐이자 범죄)와는 크게 구별되어 마땅한 이슈이긴 했습니다만.

세계 최고의 명문인 하버드대에서도 법률가, 의사, 과학자, 정치인 들만 배출되는 게 아니라, 명 연주자, 작곡가, 화가, 조각가, 그 외 특정 범주에 한정할 수 없는 창의력 넘치는 "크리에이터"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수련 받고, 길러지며, 탄생합니다. 하버드의 진짜 저력은 이처럼 분야를 가리지 않고 세계 문화에 두루 영향력을 미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진정 부러워해야 할 것은, 상법이나 회사법에 달통하여 고가의 수트를 입고 법정에서 현하의 달변으로 배심원을 매료시키는 일류 변호사들보다, 이 영원한 인류 배움의 전당에서 creative를 갈고 다듬어 인류 자산의 감성과 미학 분야에 기여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이뿐 아니라, 예술가적 감성과 자질이 이제 사회 전방위에 두루 요구되는 게 4차 산업혁명 시대임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

이미 몇 세기 전 현대 교육학의 아버지인 존 듀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p31) "예술 교육의 목적이란, 그를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전인격체로서 인간의 성장을 도와 주기 위한 것" 사이비를 과학이라고 믿고 세뇌당한 사이비의 정신에는, 망상과 허위 날조 외에 어떤 인간적 자질이 자리할 여지가 없음은 이런 명언을 통해서도 자명해집니다. 책은 다시, ".. 화가나 음악가가 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예술을 경험하면서 인격의 자발적인 계발을 이루는 것"에 중점이 놓인다고 강조합니다(그런데 이 말은, 존 듀이뿐 아니라 허버트 리드 역시 약간 다른 맥락에서 거의 같은 표현으로 주장했다고 책에 역시 언급되는군요). 이런 예술 교육에서, 예술은 따분한 공부나 학습이라기보다 "놀이"이며, "다양성지각, 감각, 직관, 사유" 등 네 가지 기능이 서로 상응하면서 통합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2011년 누리과정에의 통합을 통해, 우리 한국에서도 "창의적 표현, 심미적 태도, 풍부한 감성" 등이 주요 목표로 설정되어, 의무 교육 과정뿐 아니라 그 이전 유치원 커리큘럼에서부터 이 예술 교육이 점차 독자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한국에도 그의 고전이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독자들에게 부쩍 친숙해진 호이징가(하위징어)는 일찍부터 "호모 루덴스"의 개념을 제시하며, 인격의 참다운 발현과 발전은 일과 놀이의 밀접한 상호 부조와 통합에 의해 가능함을 말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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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맑스 - 엥겔스가 그린 칼 맑스의 수염 없는 초상
손석춘 지음 / 시대의창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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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포지교라든가 지음(知音)의 고사에서 잘 보듯, 서로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아껴 주며 존중하는 친구 간의 우정은 동서고금을 초월하여 우리의 심금을 울리곤 합니다.

칼 마르크스(이하, 책의 표기에 맞춰, 또 저자 손석춘 선생과 같은 연배이신 모든 80년대 학번 어르신들의 공감대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써 "맑스"라고 쓰겠습니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우정과 교분도 또한 이와 같았는데, 관포를 놓고 볼 때 관중 쪽으로 아무래도 능력의 추가 많이 기울고, 뛰어난 감상자, 평론가인 종자기보다는 연주자 백아가 더 중요한 인물이었던 사실과 달리, 맑스와 엥겔스(이 팩션의 공동 주인공이자 1인칭 내러티브)는 사회학(뿐 아니라 인접 모든 학문에 두루)사상 엥겔스의 비중을 결코 가벼이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일각에서 맑스의 학문적 업적은 그간 사회상이 격변한 까닭에 그저 "역사적" 가치만을 고려할 뿐이라고 낮춰 말하기도 하나, 엥겔스의 노작과 자취에 대해서는 (워낙 이분이 방대한 영역에 걸쳐 연구를 남긴 까닭에) 그리 말할 여지도 없습니다.

2008년 이후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큰 약점을 노출하고, 누구나 열심히만 일하면 넉넉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과 지표에 큰 상처가 남겨질 만큼 양극화가 많이 진행된 작금에, 뜻밖에도 칼 맑스의 사상과 학문 체계에 다시 주목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끈 피케티의 저작은 (본격 경제학 서적인데도) 그 자체가 맑스의 대작에 대한 오마쥬 구실을 겸했으며, 현재 극장가에는 <청년 마르크스>라는 영화가 상영관에서 뜻있는 관객들과 소통하는 중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 운동가, 우국지사였던 심산 김창숙을 기려 특정 대학교 학생들이 "청년 심산"을 현창하듯, 혹은 철학도들이 (서양인 중에서도 천수를 다 누렸다 할 만한) 헤겔을 두고 "청년 헤겔"을 기리듯(이 책 p29, p30, p46 등에도 나옵니다), 맑스 역시 그 짧다 못할 수명(1818-81이라서 외우기가 편합니다. 또 보시다시피 올해가 탄생 200주년입니다)에도 불구하고 "청년 맑스"란 호칭이 참 익숙합니다. 80년대 학번 어르신들 사이에선 동아리, 토론회 명칭으로도 눈에 선한 구절이기도 하죠.

반면 마땅히 배워야 할 걸 못 배운 밑바닥 노파의 비천한 라면사리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 어쩌구를 떠들다가 뒤늦게서야 현재의 모든 진보 동향이 이에 아득한 기원을 두고 있다는 걸 눈치 챈 후 재빨리 "폭력이 문제였다느니 뭐니"를 떠들고 얼버무리지만 말입니다. 하긴 이런 극단의 밑바닥 근성과 저능이 가장 심각한 폭력의 변이 형태이기도 합니다. 아마 노동 계급이 주도하는 혁명 운운하는 게, 자신이 가상으로 속했다고 착각하는 부유층 타령(1000퍼센트 헛소리입니다)과 잘 안 맞고, 다음으로는 워낙 어리석고 저능해서 웬만하면 한 번 정도는 공부했던 사회과학 트렌드에 단 한 번도 끼지 못한 한심한 처지였기 때문이죠. 남들 마땅히 거칠 걸 못 거친 인생은 이래서 불행하고 비참하며, 마침내는 가정까지 파탄이 나게 마련입니다.

칼 맑스의 저작은 날카롭고 정확한 통찰로도 물론 유명하지만, 그 표현하는 문장 하나하나가 중의적 구조를 지니고 서양의 고전을 일일이 오마쥬하는 듯한 절묘한 풍취가 또한 일품입니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사장과 경전에 두루 능한 진정한 문사라고 할 수 있었겠죠. 이책 p46을 보면, 학생 시절 귀족과 결투를 벌이다 눈 위의 작은 상처 정도로 마무리된 "사고"를 두고, 작중 화자 엥겔스(물론 진짜 엥겔스가 아니라 손 선생의 페르소나입니다)가 하는 말이 일품입니다.

"자네를 살려 준 신께 감사할 뿐이네. 자네가 그때 죽었더라면, '종교는 아편'이라는 명구절이 아마도 탄생하지 못할 뻔하지 않았는가?"

신이 혹시 세상을 다채롭게 가꾸는 게 진짜 목적(그렇다면, 좀 이상한 분이군요)이라면, 1838년에 혹시 실수로 그를 살려 둔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누가 알겠습니까. 근데, 비슷한 해에(지리적으로도 가깝네요) 수학 천재 에바리스트 갈루아를 (역시 결투의 현장에서) 냉큼 어린 나이에 데려가신 걸 보면, 아마 이 천재는 수학사상 큰 업적을 더 이상 못 남기리라(할 일 다 마치고 천재성이 조로함) 여기시고 그리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갈루아가 몇 살 형이고 급진 공화파였음을 감안하면 실제 둘이 못 만난 게 아쉽기도 한데, 역시 모두가 신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에바리스트 갈루아보다는 좀 험악하게 생긴 맑스는, 엥겔스에게 평생의 지기였을 뿐 아니라, 마치 김승옥을 김현이 경탄했듯 일종의 우상으로 군림했던 면이 있습니다. 출신 성분에서 앞서고 그 자신 역시 일세의 지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 면에서 "신으로부터 받았다고밖에는 말 못할" 천재성을 보면 과연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1장을 보면 "악마가 된 랍비"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칼 맑스는 유대인이었고(물론 유대교와는 거의 아무 상관도 없는, 그 이상 세속적일 수도 없을 철저한 반종교주의자였습니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유독 사상의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결벽증, 혹은 교주적 카리스마 같은 게 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프로동의 <빈곤의 철학>을 신랄하게 비꼬며, <철학의 빈곤>을 통해 자신의 사상 일단을 나타낸 데뷔가 대단히 인상적이었죠. 이 과정에서 그는 이른바 "공상적 사회주의"를 극복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로 무장하여 "역사의 필연"을 대비하자고 역설합니다. 이 책에서 화자 엥겔스(사실은 저자 손 선생)는 "그전까지만 해도 사회주의는 오히려 기독교적 박애주의와 한 손을 잡는 게 보통이었는데, 맑스 이후 사회주의가 '과학적 사회주의, 나아가 과격 혁명 노선'으로만 인식되며 기독교와는 영영 절연하게 된 사정을 잠시 언급합니다.

예전에 누가 케인즈에게 "혹시 <자본론>을 읽어 본 적 있냐"고 묻자,  "아니다. 물론 나는 <코란>도 읽은 적 없는 사람이다."라고 대꾸했다는 일화가 있죠(이 이야기는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에도 소개될 정도입니다). 사실 맑스를 보면 저 이란의 故 호메이니라든가(특히 덥수록하게 기른 수염이라든가 형형한 안광 등), 현재까지도 그를 추종하는 여러 아야툴라들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습니다. 셈 족 특유의 옹고집, 외골수 기질 등이 긴 세월의 침식에도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다는 점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p107에 보면 아내 예니 폰 베스트팔렌(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녀는 귀족 출신입니다)을 가리켜 "예니헨"이라 불렀다는 맑스의 버릇이 소개되죠. -chen은 독일어에서 흔히 쓰는 지소사(指小辭), diminutive이죠. 박식한 손석춘 선생께서 본문엔 일일이 설명도 달아 주십니다. Mädchen(소녀), Hündchen(강아지) 같은 중성명사에서 저런 예를 잘 볼 수 있죠.

p207을 보면 손 선생의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 세계 자본주의의 수도로 들어갈 때 우리가 신사의 나라에서 악마로 살리라곤 전혀 예상 할 수 없었지. 물론 앞 문장에서 "악마"와 "신사"가 들어갈 자리가 살짝 바뀌었지만 말이야." 세련되고 빈틈없는 신사의 매너 속에, 타인과 약자를 사정 없이 갈취하여 눈부신 세계 제국을 이룬 당대 영국의 거대한 위선과 음모를 빗댄 구절이기도 합니다. 악마와 싸우다 보면 오히려 천사가 검댕과 오물을 뒤집어쓸 때도 있으니 말입니다.

메리와 칼도 금슬이 참 좋아 여러 아이를 둔 사실이 유명한데, 음악의 아버지 바흐도 빈민굴에서 살며 아이를 여럿 두어 고생을 자초하기도 했죠(사실 바흐는 좀 경우가 다른, 무책임하고 잡스러운 가장의 일면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책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실제로 부유한 자본가의 아들이었던 엥겔스가 이런 그의 가정에 자주 원조를 했기 때문입니다.

p384에 보면 헨리 하인드먼의 말을 빌려 "엥겔스는 런던의 달라이 라마"라고 한 평가가 나옵니다. 20세기 초라고 해도, 티벳 불교의 달라이 라마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교황" 처럼 성직자(를 넘어 생불)의 직분명(을 넘어 生佛)이므로 작중 화자 엥겔스는 "내가 만약 달라이 라마라면, 자네는 붓다가 아닌가!"를 외칩니다. 사실 생전에 그토록 종교를 혐오한 그들이었지만(경쟁상대라서?), 세월이 지나도록 그의 추종자, 혹은 객관적 관찰자들도 어느 정도 종교 지도자를 바라보는 외경감과 신비감으로 그들을 대하게 되는 건 그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맑스나 엥겔스 못지 않게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시는 손 선생의 깐깐한 스타일과 재치는 책 여러 곳에서 묻어납니다. 예컨대 "노동자"는 "노동인"으로 바꿔 써야 한다거나, "독불연보"는 "독프연보"로 달리 불러야 한다는 대목 등이 그것입니다. 촛불 혁명의 먼 기원은 누가 뭐래도 한국에서는 1980년대 학생 운동이며, 이것이 2016년에 이르러 드디어 최종적 복권을 이룬 셈입니다. 탄생 200주년을 맞아 새로운 마음으로, 차라리 "우리들의 1980년대'를 회상하고 채색하는 이 책은, 그래서 더욱 한국적 현실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닌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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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테라
소현수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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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SF 읽으면서 가장 이해가 안 되었던 게, 왜 우주를 "스페이스"라고 표현하는지였습니다. "스페이스"는 그냥 "공간"인데, 그게 우주를 뜻하려면 앞에 다른 한정어가 붙어야 하는 것 아닌가 같은 생각. 이는 우리 한자 문화권이 한 음절 단어를 단어로서가 아니라(예: 물을 그냥 "수'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물질로서는 "수분, 마시는 물이라면 "음용수" 등으로 꼭 앞뒤에 말을 덧붙이죠) 형태소로 교묘히 활용하여 의미 분화를 이루는 관행과 저쪽 사정이 꽤 대조적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저쪽 사정을 폄하할 건 아니고, 저쪽은 저쪽대로 pragmatic에 기대어, 혹은 일종의 "제유법"으로 사상의 분기를 표현하는 겁니다. 이런 경향은 독일어에서는 좀 덜하고, 프랑스어가 아주 심한 편이죠. 영어는 후자의 영향을 받은 거고.

아무튼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쓴 SF를 읽으면, 적어도 이런 번역상의 오해, 미숙 때문에 괜한 착오를 할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번역은 아무리 잘 해도, 그 최상의 포맷 속에서도 벌써 독자를 착오로 이끄는 겁니다. 의역을 통해 말을 길게 늘이면 원문의 간결한 함축미가 확 줄어듭니다. 그렇다고, 일일이 역주를 단다 한들, 대체 원문만의 그윽한 맛이 전달될 길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솜씨와 센스, 상상력, 과학적 지식 등의 기반이 탄탄한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많이 활약해야 할 필요가 따로 있다는 거죠. 한국어만의 감각과 풍미, 우리 동시대인이 공감하는 박자 속에 표현된 sf의 세계가 과연 어떨지 아직 우리 독자들은 본때를 보지 못했다고 해야 합니다.

밀리터리 sf 장르에 대해 잘 모르실 법한 분들도, 유사 내용 게임 탄생의 모태가 된 폴 버호벤 감독의 <스타십 트루퍼스>는 익숙할 것입니다. 이를 지루해하는 이들은 내내 얼떨떨한 기분으로 관람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이런 명작, 볼거리가 다 있냐면서 정줄을 놓고 빨려들더군요. 씬과 시퀀스가 액션으로만 채워질 때, 이에 특별한 선호나 공감대가 없는 관객은 이를 쏜다, 부순다, 죽인다 같은 텍스트로 만 바로 해석, 정리하기 때문에 아주 지루해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 <프린테라>처럼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a가 품에서 총(혹은 무슨 중화기라도)을 꺼내 b를 쏜다, 파괴한다, 내장을 조각낸다(...) 같은 단순한 동작 묘사의 반복이 아니라(불가능하죠. 누가 그런 걸 읽겠습니까?), 작가만의 찰진 감각으로 영리한 묘사가 이어지면 사정이 또 다릅니다. 기본적으로 장르 문학이란, 그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층에게도 어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여태 좋아하지 않았기에) 이번의 소비가 처음으로 뜨는 한 술인 독자에게는 말입니다. 이후, 이걸로 충분하다며 다시는 같은 장르를 안 접할 이들도 있겠으나, 심지어 이 경우에도 이 작품만은 성공을 제한적이나마 거둔 셈입니다.

어떤 사람은 패기 있고 가능성 창창한 작품에 대해서도 천박한 정치적 계산 끝에 생각없는 폄하를 하며, "까다로운 독자" 티를 남들 앞에(그래봤자 지극히 미미한, 똑같이 무지한 거짓말 수다쟁이들에 불과하지만) 꾸미려는 목적으로 온갖 희한한 거짓 감상을 다 지어내는 걸 다 봤습니다. 이런 사람은 작품을 읽고 내실을 가꾸려는 게 아니라, 있지도 않은 허상을 꾸미고 가당치 않은 자기 만족을 위해 혼자 연극을 벌이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자꾸 반복해 봐야 그 속에서 파묻혀 즐거운 건 자신뿐인데도 이 정도면 남들도 같이 속겠거니 어리석은 착각에 빠지는 거죠.

군더더기 없고 클리셰(장르소설이니까요)의 깔끔한 활용으로 독자에게 최소한의 노력으로 경제적인 감흥을 안기는 진행이 참 좋았습니다. 우리가 데이빗 카퍼필드의 쇼에 찾아가는 건 정말로 바보 같이 속고 싶어서가 아니라(속는 게 기분 좋은 사람도 있을까요?), 익숙한 경로 속에 매번 맛보아도 묘한 쾌감이 느껴지는 체험을 반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반전도 알고 줄거리도 훤히 꿰는 명작을 두 번 세 번 읽는 이유도 대체로는 같습니다. 이걸 모르고 엉뚱한 데서 잘난척(도 아닌 못난 척)을 늘어 놓는, 중화요리 맛집에서 캐비어 안 나온다고 헛소리나 늘어놓는 건 참.

"테라포밍"은 우주 식민지 개척의 하위 장르로서, 지구와 똑같은 환경 여건을 갖춘(우리 어렸을 때는 이런 뉴스가 참 자주 전파를 탔죠. 찾았다는 소식부터 여전히 어렵다는 '현황"만을 전문가의 입을 통해 재확인하는 허탈한 "교양 뉴스"까지) 행성 알아내기가 그야말로 하늘에 별따기란 걸 알게 된 후, 자연스럽게 작가(만화가, 웹툰 작가들 포함 - 이제는 당연하지만)나 독자들 머리에 떠오를 법한 생각입니다. "어려우면, 황무지 개척하듯 아무데나 들어가서 하나 개척하면 되지 않을까?"

물론 개척에도 한계가 있어서 최소한 중력 조건이나 행성 표면에 도달하고 복사되는 에너지 준위는 일맞게 충족되어야죠. 문제는, 이런 장르에서 테라 포밍 "과정"이 꽤 잔인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기에, 어린 독자들에게 특히 주의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저희 어렸을 때와 달리 지금은 정보를 얻는 원천이 너무 많고, 자극을 왕성히 받아 머리가 활발히 작동하는 것도 좋지만 그 과정에서 불건전한 쪽으로 자꾸 자극을 원하는 것도 위험천만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 역시 "내장"이 종종 목격(?)되는 등 고어 풍이 도처에서 나오고, 투쟁 과정도 잔혹하고 살벌한 면이 있습니다만, 이는 장르 경향을 생각할 때 뭐 다른 방법이 없었을 듯도 합니다. "야후"라는 종족명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에는 고전, 신화에서 영향을 받은 작명이 많이 눈에 띄며, "대충 거머리탄으로 부르기로 했다(p205)"는 등 한국적인 단순화 센스, 소탈한 구어의 매력도 웃음을 부릅니다. (꼭 SF가 아니라도) 밀리터리 장르에서 이런 구어(막말?)의 털털한 매력이야말로 독자(나 관객)를 사로잡는 요소 중 하나죠.

여전사의 역할이란, 아무리 장르물을 많이 봐서 머리에 인이 박인 독자라고 해도 또 볼때마다 눈이 갑니다. 여기서는 엘리가 나오는데.. 예전에 만화가 박무직은 영화 <컨택트>를 보고 조디 포스터의 "우는 연기"를 그렇게나 맹렬히 질타하더군요. 울지 말라는 게 아니라(안 우는 것도 물론 중요 옵션이 됩니다) 아무리 장르 속이라고 해도 뭔가 개연성이 있어야 하는데, 저 영화에서 여배우는 물론 감독까지 함깨 욕을 먹을 상황이었고, 저 역시 그 사정없는 혹평에 속이 다 후련해졌더랬습니다. 엘리를 꼬옥 안아주는 그, 왜 우는지 알겠다는 그이지만 글쎄요. 제가 구태여 불만이 있다면 (다른 클리셰 말고) 바로 여기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두고 반전이 상쾌하다고들 많이 하십니다. 반전은 잘 맞히면 맞히는 재미가 있고, 아무래도 너무 내가 잘 아는 반전이 나올 것 같아 예측은 최대한 자제하고 작가가 세팅한 대로 착하게 스토리만 따라가든지, 캐릭터에만 푹 빠지겠다고 결심하며 나중에 가서야 (독자로서의 능력, 관록을 푹 죽인 후) 다른 평범한 독자들과 함께 화들짝 놀라 "주는" 그런 독자도 있습니다. 본디 장르물은 정말 신기하고 놀라워서 읽는 게 아니라, 공감대 맞는 이들끼리 막 놀란 척하며 같이 노는 맛에 읽는 겁니다. 그런 이유에서 이 작품, 참 재미있습니다. 박카스 마신다고 정말 몸이 좋아지거나 자양강장 효과가 팍팍 나는 게 아니라, 시원하게 목을 축였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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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그녀의 꽃들
루피 카우르 지음, 신현림 옮김 / 박하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다큐멘터리를 보며 자연계에서 "성폭력"이란 게 과연 어떤 양상으로 존재할까 같은 게 궁금해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후 젠더 담론에 대한 여러 교양서적을 읽으며 인간은 확실히 이런 이유에서도 대단히 폭력적이고 파괴적 본성을 지닌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고, 비뚤어진 개체의 생존 욕구와 자연의 공존, 조화가 어디까지 가능할지에 대해서도 깊은 의문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요즘 특히나 미투 움직임 때문에 사회 곳곳이 심상찮은 분위기이기도 하고, 이처럼 상황이 (그나마) 호조건으로 개선되는 속에서도 여전히 피해자로서 그늘에 갇혀 밖으로 과감히 못 나오시는 안타까운 분들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가해자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낯뜨겁고 추악하며 비틀린 추태를 떨기도 합니다. 어떤 자는 이 와중에 비천한 부화뇌동 심리를 발동하여 신나게 범죄 행각에 가담하다가, 일이 심상치 않게 풀린다 싶자 나쁜 머리를 최대한 활용하여 싸~악 잊고는 관전자 모드로 돌변하여 특유의 어색한 연극을 혼자서 요란하게 펼치기도 합니다. 세상사 참으로 요지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 루피 카우르는 시인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실제로 성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지닌 이런 깊은 상처가 개인 차원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속한 문화권 전체가 안은 원죄라든가, 제도에 깊이 스민 비뚤어진 우월 의식, 편견 따위가 최상위의 범죄 교사자로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하긴 이런 말을 하면, 마치 피해자에 깊이 공감하는 듯 위선을 떨다가 "빈곤한 후진국에서 입에 풀칠이나 간신히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같은, 차라리 비하나 조소에 가까운 표현 속에 희한한 우월감, 병적 쾌감을 담는 자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컨대 한진그룹의 모 전무처럼 진짜 금수저 출신이기나 하다면 그러려니 포기하고 그나마 말도 안 하겠는데. 진짜 간신히 차상위나 모면한 인간이 말도 안 되는 허세 속에 환각의 신분 상승 의식을 혼자 치르고 있으니 그저 아연할 밖에요.

"오늘 폭탄들은
모든 도시들을 무릎 꿇렸다.
난민들은 보트에 올라탔다.

지난달 방문한 고아원은
쓰레기처럼 버려진 아기를 위한 곳이었다.

어찌 내 삶이
기적에 못 미친다 하겠는가
이 모든 혼란 속에서
이 삶을 얻었는데"

(책 p134 <상황>에서 일부 발췌)

보트피플이라고 하면 1970년대 후반 월남 패망 후 동남아에 속출했던 난민들을 주로 가리켰으나, 현재는 지중해 일대에서 떠도는 난민들이 대뜸 떠오르죠. 루피 카우르는 자신도 피해자였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으면서, 자신보다 훨씬 못한 어린 고아들을 동정하며 자신의 삶을 "기적"으로 에스컬레이트합니다. 가장 불행한 인간은 일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터무니없는 환각을 지어내어야만 버틸 수 있는 자이고, 이 SNS 시인 카우르처럼 스스로의 삶이 "기적"임을 알아볼 수 있는 영혼이야말로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낄 자격이 있다 하겠습니다.

"당신은
이전에도
내 삶에
다녀갔어."

(책 p192 <또다른 생애> 全文)

시인이 본디 인도 분이다 보니 우리처럼 윤회 사상에 매우 익숙한 발상을 갖고 있습니다. 하긴 "우리처럼"이 아니라 우리가 저들 문화권에서 수입한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생의 유한함에 절망하고, 고통스러울망정 윤회, 재생(reincarnation)을 통해 존재가 한번 죽음으로 사멸하고 끝이 아님을 상정하고 싶은 마음은, 인류 통성이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영으로 육으로 깊은 교감을 나눈 이성이라면, 당연 전생에서의 기시감이 그 정(情)에 투영될 만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먹여 준 사람들의
접시를 채우지 않고
낯선 이들의 접시만 채우고 있다면
나는 무슨 소용인가"

(p220 <가족> 전문)

가장 잘못된 인간은 배우자와 불화하며, 자신에게 비뚤어진 가치관만 심어 준 범죄 형질의 DNA만 퇴행적 추억 안에 간직한 부류입니다. 이런 자는 가족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신 속의 병든 형질을 애무하며 비뚤어진 망상에 취하는 거죠. 시인은 그간 여러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위 시 <상황>에서 보았듯) 절망적 처지에 놓인 고아, 난민들에 대한 진정성 가득한 봉사에도 몸 담았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도, 나를 보듬어 주고 수렁에서 건져 주고 외부의 상처에서 보호해 준 가족들에 대한 "보은(報恩)"이 후순위라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아주 소박하면서도 솔직한 고백이 독자의 마음을 훈훈하게 채웁니다.

너무 어두운 쪽으로만 선입견을 갖지 마시고, 미국 SNS를 뜨겁게 달군 스타 네티즌이었던 그녀의 다양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시집이니 그저 시를 만난다고 여기고 부담 없이 책을 펼쳤으면 합니다. 물론 자신의 상처가 있는 분들이야 직접 공감대를 지닌 시인의 표백이니 특별한 기대를 품어도 되겠지만 말입니다. 박하의 책이라서 여전히 예쁜 장정 덕분에 독자는 더 행복합니다. 원문이 힌디어가 아니라 영어이므로 관심 있는 분들은 그녀의 인스타나 페북에 가서 직접 감상, 교감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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