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1
김성동 지음 / 솔출판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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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 선생님은 1970년대에 발표한 불교 소설 <만다라>로 동시대에 큰 충격을 안긴 문제적 작가요 현대한국문학의 거장 중 한 분입니다. <여명의 눈동자> 등 주로 대중적 기호와 트렌드에 절묘히 호응한 김성종 작가님과는 전혀 다른 분이니 오해는 혹 없어야 하겠습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대하소설의 주된 테마는 "바둑"입니다. 중국에서는 군자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솜씨로 琴棋書畵(금기서화)를 꼽았는데, 보시다시피 두번째 덕목 중 하나가 바둑 잘 두는 재주입니다. 이처럼 중요시되어 온 바둑이건만, 한국에서는 "주색잡기" 중 하나 정도로 격하되기가 일쑤였습니다. 승부를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주의 테크닉에 집착할 게 아니라, 똑같은 군자의 품성을 갖춘 이와 대국(對局)하며 점잖은 소통도 이루고, 자신의 인격 도야 정도도 정직히 드러내 보이는 등 바둑을 통한 학습과 수련의 효과는 의외로 다방면에 걸쳐 있습니다. 요즘도 "미생"이라는 제목의 웹툰과 드라마가 창작, 제작되어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는데, 온라인 게임에 많이 밀리기는 했으나 바둑은 여전히 두뇌 스포츠를 즐기는 우리 민족에게 매우 친숙한 오락이자 문화라고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그 시발점이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물론 지난시절의 대작가님들이 남긴 화제작, 걸작이 요즘 자주 재간되는 추세이므로, 또 불과 4년 전쯤 타 출판사에서 김 작가님의 <만다라>가 복간되기도 했으므로 이 대작 역시 그러려니 정도로 여기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조금 경우가 다른 게 이 작품은 총 5권의 대하 소설 분량이며, 후반부는 최근에서야 비로소 완성되어 우리 독자들과 최후의 호흡을 나누는 감격을 맛보았다는 점입니다. 마치 괴테가 그의 대작 <파우스트>를 평생에 걸쳐 빚어내었듯, 김 작가님도 그의 작가 이력을 이 <국수>와 함께 장엄한 마무리를 시도하시는 셈입니다. (물론 우리 독자들이야 선생님께서 오래오래 붓을 잡고 작품을 창작하시길 고대하는 마음입니다만)

이 작품이 연재를 시작한 1991년의 문화일보 지면이라 하면, 당시만 해도 아직 신생 언론이었던 해당 신문사에서, 독자들에게 그 제호에 걸맞을 만큼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싶은 거장을 모셔와서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게재하고 싶었던 야심찬 의도가 있었습니다. 과연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무지 스케일이 큽니다. 정말로 <미생>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가는 큰코 다칠 만큼 말입니다.

최근에 저는 김홍정의 <금강> 이라든가, 송은일의 <반야>와 같은, 조선 후기 민초들의 삶을 적나라하면서도 구성지게 다룬 대하소설에 푹 몰입해 가며 읽어낸 적이 있습니다. 이 <국수> 역시 구한말의 격동시를 소설 초입의 배경으로 삼는데, 최근 일부 대하사극에서 한국사를 편의대로 왜곡해 다뤘다는 불만도 크게 일기도 했었고, 사심이나 편견 없이 한국 근대사를 연구한 문학의 거장 눈에는 어떻게 투영되었을지 궁금한 분들은 한 번 정도 꼭 읽어 볼 만합니다. 혹시,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셨고 1년 전쯤에 타계하신 박상륭 작가님을 아는 독자라면, 박 작가님처럼 따로 특정 작품을 놓고 "사전"이 출간되었을 만큼 구수한 순우리말이 가득한 이 대하소설에 역시 흠뻑 빠져들 수 있겠네요. (전질 구성 중에 <국수> 사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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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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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권에는 "~맨"으로 끝나는 공포의 범죄 아이콘들이 많습니다. 이 중에는 실존의 범죄자들도 있고, 설화나 와전된 과거의 모티브만을 가질 뿐인 가상의 캐릭터들도 있죠. 헛된 보물의 망상에 젖어 자신과 타인의 장래를 끔찍하게 망치고 든 어느 낙오자도 언젠가는 어떤 "맨"의 칭호를 자랑스레 얻어 유취만년의 훈장을 이마에 새기고 다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운 여름에 몰입감 최고이기 마련인 이런 장르소설을 놓고 리뷰를 쓸 때는 항상 내용 누설 때문에 여러 모로 신경이 쓰입니다. 이 작은 워낙 흥미롭게 사연을 끌고 가는 터라 사실 어느 정도 줄거리를 알고 읽어도 본전은 충분히 뽑을 듯합니다만, 그래도 철저한 블라인디드 상태에서 읽어 나가는 스릴러를 능가하는 호사, 재미란 다시 비길 게 없습니다. 해서, 이 글 중에서는 최대한(최소한?) 알듯 모를 듯 지나가는 표현으로만 소개할까 합니다.

건강에도 좋지 않고 도시(demonstration) 기능도 그닥 시원찮게 발휘할 뿐인 분필, 즉 초크를 아직도 여러 교육 현장에서 쓴다는 사실은 의외입니다. 얼굴을 아예 하얗게 덮는 화장법은, 마치 핏기가 싹 가신 불건강한, 혹은 이미 죽은 얼굴을 연상시키기에 극히 일부 문화권을 제외하고는 그리 권장되지 않는 게 보통입니다. 여튼 이 "초크"에 특별한 집착을 지닌, 기분 나쁠 만큼 얼굴이 하얀 어느 남자는, 한적한 고장에서 끔찍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어떤 전조(前兆. herald) 노릇을 합니다. 전반부에서 우리 독자들은 비교적 명징한 어조로 사건의 추이를 전달 받습니다만, 이게 철없는 아이들의 그저 perception인지, 아니면 팩트 자체인지 살짝은 당혹하는 느낌으로 읽어 나가게 됩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순수하지만은 않다." 이 씁쓸한 진리는 아주 오래 전 솔직한 에세이류로 큰 인기를 끈 김동길 연대 부총장이 자신의 어느 책에서 특유의 톡 쏘는 어투로 독자들에게 역설한 적 있습니다. 당시 저는 "그래도 어른이라면 아이들을 최대한 이해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세태가 이렇다 보니 오히려 어른이야말로 아이들보다 몇 배는 더 순수해지고, 거기에 연륜이 안긴 성숙한 깨달음까지 더해서 소통에 임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긴 진짜 어른 노릇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나이 육십이 되어도 어이 없는 롤플레잉에만 몰두하며 모든 관계에 실패한 인생은 그저 감옥행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이 말은 1970년대 베스트셀러 작가로 큰 유명세를 떨친 에릭 시걸의 한 작품(새삼 제목 소개가 필요없을)의 첫문장입니다(또한, 스탠다드 팝의 황제 앤디 윌리엄스의 히트곡 가사 첫소절이기도 하죠). 한 사람의 기억과 추억으로도 "사연과 이야기"의 실체와 서두, 구조가 어떠해야 하는지 일관된 판단이 불가능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끔찍한 트라우마를 공유한 친구들(과연 친구였는지도 의문이지만)이라 해도 판단과 가치 평가에 어떤 합의가 못 이뤄졌다면(이게 중요합니다), 무엇이 그 사건의 발단이었는지 도저히 확정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며, "초크맨"이 문제가 아니라, 그 초크맨을 받아들이는 단일대오 공동전선 내부의 혼란과 갈등이 더 큰 공포를 야기할 수 있음을 소름끼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 내부에 있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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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대화 - JPI PeaceNet 시리즈 제주평화연구원 연구총서 37
제주평화연구원 엮음 / 두일디자인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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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독자들이 그저 추상적인 미래, 막연히 잘되려니 하고 터무니없는 기대를 품게끔, 그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한 요행을 바라는 미지의 장래에 대해 달콤한 말이나 하는 여타의 저서들과 달리, 급    변하는 미래에 자신의 직업과 진로를 구체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요긴한 정보를 가득 실어 놓았습니다. 제목을 아예 "4차 산업 혁명에 대비...." 같은 컨셉으로 달아도 어색할 게 조금도 없을 정도네요. 그저 정보만 나열했다면 또하나의 그런 책 정도로 여겼을 건데, 저자의 다양한 상담 체험이 담겨 있을 "미래 디자인하기 방법"이라든가, "질문, 상상, 공유, 실천"의 4단계 이론까지 저자 고유의 "총론"도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책 제목으로 돌아와, 미래를 그저 맞이하기, 남들따라 대세에 잘 휩쓸려가기, 막연하게 기대나 품기 따위가 아닌, 대체 왜 "미래 디자인하기"라야 하는지 다시 확인하고 동의하게 됩니다.

저도 4년 전에 <기적의 토킹스틱>이란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남긴 적이 있는데요. 본래 토킹스틱이라는 게 아메리카 원거주민의 소통 수단으로 쓰이던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미국인들 사이에서 재발견되고, 사람들(조직내 구성원이든, 혹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든 원칙적으로는 무방합니다)의 숨은 속내와 민감한 감정의 교류에 효과적이라는 점이 널리 동의를 얻으면서, "월드카페" 방식의 대화법, 담화 양식의 발전에까지 널리 응용되었던 거죠. 영어에서 "디자인"이란 말은 꽤 많은 뜻을 지니는데, 저자께서도 사실 책 전체에 걸쳐 디자이닝을 그런 광범위한 의미 스펙트럼에 다 걸친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1) 전후 관계, 의제의 범위를 설정하라
2) 대화를 나누기에 화기애애하고, 쾌적한 분위기를 먼저 조성하라

일단 "나는 어떤 주제를 A란 상황을 전제로 깔고 말하는데, 상대방은 전혀 다른 B에서의 토픽(주제어가 동일해도)을 꺼내면, 이 대화나 토의, 토론은 이미 생산적인 결론을 맺을 가망성이 없습니다. 두 당사자가 열심히 머리를 짜내고 가장 효과적인 발화, 표현 수단을 궁구해서 발언을 해도(또 아무리 사전 준비를 열심히 해 왔어도) 그 노력이 다 소용 없는 겁니다. 일단 어의(語義. definition)의 합의가 이뤄져야만 합니다. 월드카페 토의 방식에서는 이를 "컨텍스트 세팅"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내실 있고 정보와 논거로 가득한 대화면 충분하지, 무슨 그윽하고 안온하고 (심지어) 럭셔리한 분위기가 뭐가 중요한가?"라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뭐 럭셔리할 필요까진 없어도, 일단 품격 있는 대화를 나누려면 그에 알맞은 환경이 좀 뒷받침될 필요가 있습니다. 월드카페에서는 몇 개의 테이블을 공통 무대로 배치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게 필수라고까지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참여자들의 건전한 양식과 태도, 현재의 맥락을 지닌 지식과 담론적 배경이 더 중요하며, 텅빈 머리에 거짓으로 가득한 혓바닥이 고작이라면 아무리 럭셔리한 세팅이라 해도 결국 뻔한 결론 근방에서만 맴돌다 끝날 것입니다.

백캐스팅이란 결과(미래)를 먼저 상정하고, 그런 결과에 이르려면 역으로 현재 시점으로 소급하기까지 어떤 (역순의) 시나리오가 있겠으며, 이를 위해 어떻게 머리를 맞대어 현재를 구성할지를 놓고 지혜를 모으는 대화 방식입니다. 월드 카페처럼 생산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집단 지성"이 어떤 절차를 잘 꾸며 모두가 만족하고 현실 적용 과정에서도 높은 효율을 보장할 수 있을지, 그 방법론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일환으로 고안된 tool로 보면 되겠습니다. 저자는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의 활동과 그 토의 과정을 특히 모범으로 들고 있습니다.

미래를 구체적으로 개선하고, 나아가 각자가 꿈꾸는 이상이 제대로 현실화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뜻을 같이하는 여러 인재들이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게 중요합니다. 저자의 방법론은 이런 인식에 기초를 둔 것이겠구요. 책에는 그 외에도 미래의 도구, 동반자로서의 로봇, 인문의 역할, 혹은 (아까도 뉴스 시간에 큰 문제로 보도된) "스몸비(=스마트폰 좀비)" 이슈에 대해서도 다룹니다. 꿈꾸기만 해선 미래가 보장 안 되고,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구체적이고 생생한 정보를 자꾸 접해서 이를 귀납한 후, 보다 실용적인 미래관을 세우는 게 중요합니다. 저자의 "디자인론(論)"은 그런 이유에서 더 깊은 울림을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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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사업을 하는가 - 2천만 원으로 세계시장을 개척한 젊은 사업가의 생각 기술
이상수 지음 / 다산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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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발상이란 특별한 지능을 갖춘 이에게만 떠오르거나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고, 이미 많은 학자나 전문가들이 주장한 바 있고, 우리의 경험으로 이를 때때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구글 등의 기업에서 직원들에게 최대한의 자유와 재량을 부여하는 이유는, 고급의 아이디어와 착상은 인재를 닦달한다고 나오는 성짏이 아님을 이미 기업 수뇌부 차원에서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디어는 가장 평범한 사람에게도, 예컨대 집에서 쾌적한 여가를 즐기는 그 한 순간에 "도적처럼" 찾아오는 게 보통입니다. 정형화한 문제를 정해진 알고리즘에 의해 해결하거나, 처음 접하는 문제를 기존의 절차를 교묘히 응용한 (새로운) 방법에 의해 해결하는 건, 연산 능력이 뛰어나거나 훈련이 잘 된 정신에 의해서만 가능하죠. 하지만 "착상"자체는 언제 어디서나, 또 누구에게나 공평히 찾아옵니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주영 현대 창업주의 소위 "유조선 공법"은, 숙련된 엔지니어들은 오히려 죽어라 노력해도 떠올리지 못할 아이디어였습니다. 문제는, 작금의 화두인 "혁신"은 세부 기술적 인자가 좌우하는 게 아닌, 이런 순간의 아이디어와 영감에 의해 촉발되는 점에 있습니다. "혁신"이 필요한 것은 아는데, 그 "혁신"의 단초를 제공할 섬광 같은 아이디어를, 어떤 조건 하에 두뇌를 놓아 두어야 그나마 편하게 얻을 수 있을지,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고민이라고 하겠고, 이 책의 기획 의도 역시 거기에 있습니다.

 

자, 그런데, 이 책 공저자인 두 분의 면면을 보십시오. 얼핏 보아서는 그런 책의 애초 목표에 전혀 부합하지 않을 것만 같은 인사들입니다. 

마스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는 이 책이 나오기 2년 전, 이미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원로였습니다. 도시히데의 한자는 敏英인데, 우리 나라에서도 이 분 나이 또래(1940년대 초반 生) 중에 이런 이름(민영)을 가진 어르신들은 이 한자 구성대로 많이 쓰는 모습입니다. 이분이 노벨상을 받은 사유는, 이른바 CP 대칭성의 깨짐(violation of the postulated CP-symmetry)이라는 혁혁한 이론상의 개척이었습니다.

이분보다 20년 연하인 다른 공저자(즉 대담자) 야마나카 신야는, 이 책이 나온 지 2년 후에, 노벨 셍리학상을 받은, 신진 무명 학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묘하게도, 이 책은 그런 점에서, "혁신적 발상"의 본질을 제대로 짚은 (두 명 중) 다른 한 저자에 대해 그 상서로운 운명을 예견이나 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큰 방향을 제대로 짚은 이들이라면, 큰 성과와 영예가 따르기 마련이라는, 평범하나 실생활에서의 실례를 접하기 어려운 진리를 다소 불가사의할 만큼 가르쳐 주는 책이라고 해도 큰 과장이 아닙니다. 이 책을 읽으시는 분들은 (출판사 소개글과는 무관하게) 이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훌륭한 저자 두 분이 나눈 대담집인 이 책이 왜 "혁신적 착안의 본질"을 배우기 위한 좋은 책이 못 될 수도 있다는 것인가? 아 인슈타인처럼 그 사상 천착의 분야가 철학, 인문 전 분야에 걸쳐 안 미치는 분야가 없다시피한 천재라면 모를까. 해당 분야의 기술지식에 도통한 이들에게 "경영 분야의 신 착상" 비결을 배우는 일은 대부분의 경우 연목구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아니나다를까, 책의 도입부는 두 분의 전공 분야에 대한 회고와 현안 진단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런 화제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책을 읽어나가는 데에 피로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자기 본래의 기획 의도를 배신하지 않고, 독자와의 공감을 이어나갑니다(바로 이 점이 이 책만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1) 이들이 이룬 업적(그래서 이미 받았거나, 앞으로 받을 노벨상의 시상 이유가 되기도 하는)에 대해, 과연 달인다운 능숙한 솜씨로, 문외한에게 최대한 쉬운 언어로 설명해 주고 있다는 점  그래서 이 부분만 읽으면 훌륭한 교양 지식을 쌓을 수 있습니다. (본래 독서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2) 이 책의 본래 취지인 "어떻게 하면 유용하고 창의적인 발상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알려 주고도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2인의 대담자는 가장 편안한 어조로 하드한 주제에 대해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 이런 하드한 자연과학. 혹은 응용공학상의 주제를 놓고 세상에 자랑할 만한 업적을 내놓으려면, 까다롭고 번잡한 실험 절차를 최소한으로 간이화하는 OR상의 수월성을 발휘해야겠고, 그 이전에 남들이 하지 않는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스카와 박사는 그런 회고를 합니다. "내가 주제를 연구할 때만 해도, 자연계에는 쿼크가 4종만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고정된 사고의 틀로 아무리 방정식을 도출하려 해도, 답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따뜻한 욕조에서 처음으로, 기존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왜 6개이면 안되겠는가?" 홀수개의 기본 입자가 존재할 수는 없으므로, 4개가 곤란하다면 6개에서 답을 찾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였으나, 당시 물리학자들이란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게 상황적 제약이라면 제약이었습니다. 아무도 하지 않으려 드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면 바보 취급 당하기나 딱 좋다는 생각, 그 경계 너머로 과감히 이행하려는 노력이 혁신의 첫 발짝이라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이 책에 명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CP 대칭성의 깨짐(우리 학계에서는 CP위반이라는 용어를 더 일반적으로 씁니다) 역시 발상의 전환에서 나온 업적이었습니다. 물질과 반물질이 같은 수로만 존재한다면, 물리계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서로 만나 소멸되므로). 물질이 반물질보다 조금이라도 더 존재하는, 소위 대칭성이 깨어져야만 무가 비로소 유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일견 까다롭기 짝이 없어 보이는 물리학의 이론들도, 우리 일상에서 피부로 깨달을 수 있는 자명의 이치와 그리 멀리 떨어져서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마스카와 박사는 쉽고 명쾌하며 가식 없는 소탈한 언어를 통해, 초보 물리학 강의를 하면서 놀랍게도 혁신 이론의 기초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시사적인 관점에서 더 주목할 쪽은 야 마나카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앞으로 자신이 2년 후에 받게 될 노벨 생리학상 분야의 혁명적 업적인 인간 iPS세포에 대한 재미있는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이분이 이런 혁신적인 성취를 이뤄 낸 것도, 결국은 남들이 하지 않는 생각을 과감히 시도한 데에 그 비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바로 일주일 전, 30살의 여성 과학자가 이 iPS세포보다 한 걸음 더 진보한, 만능 세포를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이른 STAP cell 방법이라는 걸 개발해 내어 전 세계에 충격을 준 바 있습니다. 그녀의 발견 역시, 어이없을 만큼 간단한 절차로 이뤄 낸 (거의 우연이나 행운에 가까운) 방법이라서, 그녀의 동종 영역에 종사하는 이들보다 오히려 다른 분야의 전문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성질이었습니다. 이 책을 찬찬히 읽어 보신 분들은, 인터넷에서 "만능 세포"라는 키워드로 해당 뉴스 기사를 검색해 읽어 보시면, 이 책의 내용이 보다 심화한 의미로 다가 올 수도 있겠습니다.

 

번역은 대체로 잘 되어 있으나, "공액" 같은 일본식 용어보다 "켤레"같은 이미 정착한 우리말을 써 주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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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용도 3 (반양장) -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세계는 잔물견을 일으키며 당신을 통과하고, 당신은 잠시 물색깔을 띄게 된다 세상의 용도 3
니콜라 부비에 지음, 이재형 옮김 / 소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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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아름다운 체험이며 각성일 뿐 아니라, 그 여행에 몸담는 이들까지 아름답게 보이게 돕는 묘한 수정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활동하던 트렌드 그룹 버즈(요즘도 그 리더만은 예능에 자주 나오지만)의 노래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의 가사 한 구절은, 여행이란 게 얼마나 설레고 부푼 꿈을 주입하는 "미지와의 조우"인지 잘 가르쳐 줍니다("낡은 하모니카 손에 익은 기타♫유아 멜로디, 어린 왕자 유아 멜로디♬"). 비록 그 여행이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라고 해도 그러하며, 또 세상의 모든 여행이란 결국 "몰랐던" 나 자신과의 만남을 위한 발버둥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1년쯤 전에 단권으로 된 포맷으로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물론 지금도 소장하고 있고요). 사실 제목만 보고서도 아 그때 그책이었군 하고 기억이 났었으나, 워낙 인상과 느낌이 좋았고 이처럼 세 권으로 분책된 꼴로 다시 만나는 텍스트(와 그림)이 또 어떤 감상일지 무척 궁금했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이른바 오리엔트 특급 열차라는 게 개통되어, 여태 오랜 시간에 걸친 계획과 단단한 각오를 품어야만 가능했던 남동 유럽, 소아시아로의 여행이 비교적 저렴한 비용과 가벼운 마음가짐만으로도 가능해졌습니다. 이 책, 니콜라 부비에 등의 동양 탐사기는 시기적으로도 그보다 훨씬 뒤의 체험 기록이며, 지역적으로도 엄청나게 동진을 해 온 결과물이지만, 저는 왠지 "오리엔트 특급의 연장"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첫째 이런 식의 여행(자동차 횡단)은 앞으로는 불가능하겠으며, 둘째 서양인들을 이런 식으로 현지에서 맞고 반겨주는 분위기 자체가 역시 앞으로는 형성되기 어렵겠다는 전망 때문입니다.

이 기행문의 한 스테이지를 이루기도 하는 터키의 경우, 오늘 이 시각에도 서방에 대해 적대적인 기류가 (인위적이든 아니든 간에) 짙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며, 이란의 경우 미국 현 행정부와의 확고한 적대를 표명했고, 파키스탄이니 아프가니스탄이니 하는 거대한 늪과도 같은 나라들이야 그 사정을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과거는 한 번 발을 담근 강물처럼, 다시 회귀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만, 특히나 이 책에서 다뤄지는 체험과 기억은 결코, 누구에게도, 다시 맞아질 수 없습니다.

영어에서 ripple은 먼 사건이 끼치는 예측지 못한 파장을 일컫습니다. 불어의 ondulation도 대체로는 같은데, 그는 다음과 같은 몽환적인 문장으로 여행의 감흥을 표현합니다. "... 세계는 잔물결를 일으키며 당신을 통과하고, 당신은 잠시 물 색깔을 띠게 된다." 색은 곧 공이며, 입자는 곧 파장일지 모르겠으나, 이 심오한 이치를 몸으로 체감하기에는 우리 필멸의 인간들에게 너무 어려운 과제일지 모릅니다. 언제나 한없이 낯선 타향인 나 자신을, 이처럼이나 먼 동방의 땅까지 찾아와서 발견하게 되는 두 젊은이의 사연이란, 하나의 구도기와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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