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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탐정 -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집장의 37년 단어 추적기
존 심프슨 지음, 정지현 옮김 / 지식너머 / 2018년 7월
평점 :
"인류"라는 신비한 종(種)의 실체를 알아내려면 오직 지구상에서 이 동물만이 부지런히 생성하고 발화하며 소비하는 "언어"의 정체를 집요히 추적하는 게 그 지름길일 수 있습니다.
"단어
탐정"이란 말이 다소 생소할 수 있습니다만 영어로 word detective라고 부르면 비교적 그 뜻이 분명히 다가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한국어의 먼 어원이 궁금해질 때 국립국어원 등 여러 사이트를 들어가 보고, 관련 논문도 찾아보곤 합니다만 시원한
답을 얻을 수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예컨대 접미사 "~님"의 경우, 혹시 중국어 닌(您. 중국어에서 "[높임의] 당신"이란
뜻이며, 한국식 한자 발음으로는 니, 임 등으로 읽습니다)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 궁금했으나, 아무 답을 얻을 수 없었고 그런 쪽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해당 전공자, 종사자 중에서도 없는 듯했습니다. "누리집, 누리꾼" 같은 억지스러운 순화어 고안 같은
것보다, 우리말의 참된 뿌리, 기원을 캐고 들어가는 데 더 우선순위가 높은 과제일 듯한데도 말입니다. "며칠/몇일"의 논쟁 역시,
가장 오래된 표기 기록인 용비어천가의 태도가 분명치 않아 결국 이 사람은 이 말, 저 사람은 저 말 하는 식으로 흐지부지되고
마는 게 안타까운 실태이듯, 무엇보다 남아 있는 기록 자체가 미비하다는 우리 특유의 제약, 한계를 감안해도 학계의 이런
미온적인(혹은 무능한) 태도는 여전히 뭔가 아쉽습니다.
반면,
영미권의 현황을 두고 가장 부러운 건, 그 형태가 알쏭달쏭한 단어를 두고 어원을 캐고 들어가면, 일반인도 그 결론을 바로 편하게
열람할 수 있게 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일목요연히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논문 검색, 접근이 어려운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연구의 공백지대, 불모지대가 너무도 많습니다. 물론 영미권의 저작, 성과를 들춰 봐도 "정답"이 그대로 제시된 건
아닙니다. 여전히 학자들 간에 논쟁이 치열하고, 십 년 전에 정설로 여겨지던 것이 그 반대증거가 구성되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논파, 폐기처분되기도 합니다. 천박한 유행을 따르는 게 아니라, 살인적으로 치열한 논쟁과 갑론을박을 거쳐 "현 시점에서 가장
진리에 가까운 답"이 일반 대중에게 게시되는 겁니다. 물론 대안이 복수이면 그 모두가 공평하게 알려지는데, 학자 개인의 공명심이나
정치적 동기보다 진리에 다가서려는 한없이 공평하고 올곧은 마음이 우선하기에 이런 장관이 펼쳐지는 게 가능합니다.
이
책의 저자 존 심프슨은, 바로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집장을 역임한 분입니다. 개인적으로 그토록 궁금했던 사항들, 지적 호기심
해소의 상당 부분을 바로 이분께 빚지고 있었다는 점을 알면서 너무도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 나갔습니다. 기대치를 높이고 읽으면
필연적으로 많은 대목에서 실망할 수밖에 없는데, 이 책은 오히려 정반대로, "당신은 여태 더 많은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더
많은 의문을 품었어야 옳았다"고 깨우치기나 하듯, 공부가 덜 되고 사려가 부족한 독자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의 논의 중 상당한 대목은 영어, 혹은 언어학 자체에 그닥 관심이 없던 독자에게 좀 어렵게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런 독자를 배려한 듯, 저자께서는 근 몇 년 사이 뜨거운 이슈로 대두했던 "동성 결혼" 논쟁을 다분히 염두에 두고
marriage라는 영단어에 대한 사연을 자세히, 자상하게 풀어 줍니다. 이 이슈는 우리하고도 그리 먼 거리를 둔 사정이 아닌데,
2018년 1월 제7판을 발간한 이와나미서점(일본을 대표할 만한 출판사입니다)의 広辞苑 일본어사전이, LGBT라는 항목에서
다소의 편견이 비춰질 만한 설명을 하자, 사용자들 중 일각에서 이에 항의를 하고 들었으며, 출판사에서도 이의 정정을 적극
검토하겠다며 입장을 밝힌 일이 있었습니다. 교양 있는 일반인 중에서도 이런 사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은데, 여기
인터넷 서점에도 해당 사전의 제7판에 대해 자세한 리뷰를 올린 분이 있습니다. 링크는 하지 않겠으나 廣辭苑 7판 상품 페이지로 가
보시든지, "스오 오시마, 고지엔, 코지엔, 광사원" 등의 키워드로 검색해 보시면 그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전쟁이란
비극은 역설적이게도 많은 실용적, 혹은 실존적 통찰과 지혜를 이끌어내는 온상,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영어도 전쟁 관련한
신조어, 표현 등을 여럿 보유한 언어인데, 책에서는 "thin red line"을 그 한 예로 듭니다. 이 어구는 아마 테렌스
맬릭 감독, 조지 클루니, 존 쿠색, 닉 놀티, 우디 해럴슨, 존 트라볼타, 숀 펜, 에이드리언 브로디, (나중에 그리스도 역을
맡아 유명해진) 짐 카비젤 등 쟁쟁한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여 유명한, 1998년의 대형 흥행작 때문에 한국인들도 잘 알 듯합니다.
당시 거의 모든 영화 잡지에서, 이 기묘한 어구가 무슨 뜻이며 어떤 어원(사연)을 지녔는지 열심히 설명했었거든요. 이제 저는
"그 모든 궁금했던 의문을 처음에 풀어 주신 분"이 누구였는지 이 책을 읽고서 알게 되었습니다.
언어학은
결코 가치 중립적인 학문이 아닙니다. 모든 학문은 그렇게 되고 싶어하거나, 적어도 대외적으로 그런 태도를 표방하여 권위를 얻길
원합니다. 하지만 저 위의 "marriage" 항목에서 보았듯, 어떤 개념, 어떤 단어도 그 안에 중화, 무미건조, 중립,
공평함, 보편 타당성을 온전히 구현할 수 없습니다. 온화하고 자상하며 가능한 한 많은 이들에게 동의와 수긍을 얻고 싶어하는
저자(책을 읽으면서 그런 자상한 성품, 인품이 느껴졌습니다)께서는 자신이 몸 담은 분야의 이런 난점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아마도 이 책(아니면, 이보다 훨씬 전, 자신이 큰 공헌을 남긴 옥스퍼드 사전)을 읽으며(이용하며) 뜻하지 않은 당혹감이나
불편함을 느꼈을(느끼고 있을) 이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는 듯, 조곤조곤 "단어 탐정의 때로는 유쾌하지 못할 직분"에 대해 들려
주고 있습니다.
영어에는 이상하게도,
무슨 말인지 감을 잡기 어렵거나(non native의 관점으로 - 따라서 이건 이미 이상한 게 아니며 정상입니다), 더 나아가
영어의 감각, 관점에서 이상한 말들이 꽤 됩니다. 이 책에서는 p193에서 word of mouth를 그 예로 드는데, 이 표현이
영어 원어민, 아니 세계 최고의 영어 전문가의 관점에서도 "확실히 이상하다"는 걸 (고맙게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라틴어 성구 verbum oris를 직역해서 그렇다는군요. 라틴어 verbum은 영어의 word, 혹은 (동사라는 뜻의)
verb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주로 문서에 적어 넣는 격식 있는 단어, 구절을 뜻하는데, 한국어의 "시쳇말" 정도와 대조하면 좋을
듯합니다. 다시 말해 verbum이란 본디 os(소유격인 oris의 원형입니다)와 연이 좀 멀다는 점잖은(혹은 젠체하는)
뉘앙스입니다. os는 명사 중에서도 제3유형 변화를 하는 명사이므로 소유격이 저런 꼴입니다.
p304에
보면, 우리(영어 원어민뿐 아니라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우리 한국인들도 포함해야 한다고 봅니다)에게 아주 익숙한 모양이면서도
그 뜻이 전혀 이상하게 정해진 예를 듭니다. bugbear은 누구라도 그 뜻을 알지만, 왜 그런 뜻이 되었는지는 또 아무도
모르는 묘한 단어입니다. 벌레와 곰은 근심과 골칫거리를 우리에게 안겨다 주는 존재라서일까요? 우리말도 그렇지만, 어휘는 세월이
지나면서 원 모습을 잃고 기존에 있던 다른 단어와 혼동되어 형태를 바꾸기도 합니다. 이때 이른바 "민간어원설"이 끼어들기도
하는데, 우리말에서는 "황소, 소나기" 같은 게 그 좋은 예입니다. 이 책에는 안 나옵니다만 독자로서 제가 다른 예를 들자면,
blue moon이 왜 한 달(양력 기준)에 두 번 뜨는 보름달인지 저 모습만 봐선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유럽의 천년 고도
이스탄불은 원래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등으로 불렸으나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후 "이슬람"을 수용하며(?) 그리 이름이
바뀌었다고 잘못 여기는 이들도 많은데, 실제로 현지인들 중에서도 이런 오해가 꽤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사정을 알고 보면 철저한
그리스어 어원(이슬람이란 종교가 창시되기 수백 년도 전에 자리잡힌)일 뿐입니다.
옥스퍼드와
맹렬한 경쟁을 펼치는 여러 유수의 다른 사전 메이커 중 하나인 맥밀란社에서 2001년경에 그 실무자들을 방한시킨 적
있습니다(판촉 등 여러 이유). 이때 어느 기자가 "박사님은 그 사전에 나온 단어 중 얼마 정도나 암기하고 계신가요?" 라는
질문을 던졌다던데, 사실 이런 태도는 톰 크루즈 방한시 "실제로 보니 키가 참 작네요?" 같은 언사만큼이나 부적절하고 무례합니다.
이 책의 저자 존 심프슨 역시, 혹 TEPS 같은 공인 어학 시험이라도 치면 아마 한국인 고수보다도 점수가 낮을지 모릅니다(라고
말은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고 아마 최상위권에 드실 겁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런 분의 위대함(혹은 이분이 제작에
기여한 그 사전의 위대함)은, 그런 기술적인 잔재주에 좌우되는 게 아닙니다. 탐정(지저분한 사생활 추적자가 아니라 고전에
나오는 진짜 탐정)이 꼬이고 꼬인 진상을 마침내 발견해 내어 정의(justice)를 회복하듯, 이런 언어학자들도 오리무중인 어휘의
지난 내력을 바르게 추적하여 그 정의(definition)을 우리 언중에게, 기술적(descriptive)으로, 또
규범적(normative)으로 표준적인 화법, 문법을 가르쳐 주는 겁니다. 스승 중의 스승은 이런 분을 두고 이름이
아닐지요.우리가 우리 존재의 먼 근원을 알려면, 무엇보다 인간 고유의 특질을 강하게 구성하는(노엄 촘스키의 주장입니다) 언어에의
이해가 필수라는 이유에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