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함의 용기 - 나는 수용자 자녀입니다
성민 외 지음 / 비비투(VIVI2)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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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를 보면 "나는 수용자 자녀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어는 1인칭 단수이지만 모두 열 분의 젊은이들이 책에서 자신의 사연을 들려 주며,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지 1년이 되는 시점에서 책이 나왔습니다. 그러니 아직 아픈 체험이 남긴 마음의 상처를 완전히 어루만지기 부족한 시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추스려 이런 수기를 기록하여 독자들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히고 책을 읽으면, 책의 제목인 "기억함의 용기"가 무슨 뜻인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수용자"가 무슨 뜻입니까? 사실 이 단어는 생각보다 뜻이 모호합니다. 고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보면 미감아(未感兒)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감염(感染)되지 않은 아이라는 뜻인데, 감염아도 아니고 미감아라니 당사자에게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게 말만으로도 증명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당시 사회에서 차별의 낙인 중 하나로 통용되었습니다. 병이 있는(주로 한센병)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본인은 안전하다는 뜻인데, 애초에 부모에게건 누구로부터건 아무 문제가 없었다면 "미감"이라는 확인 절차도 필요 없었을 테니 그것 자체가 하나의 낙인이 됩니다. 한센병은 개인의 특이체질 문제이며 유전되는 게 아니고 특별히 장기간 고밀도 접촉(상처에다 일부러 한센균을 대량 주입한다거나)이 아닌 이상 전염도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 사회는 워낙 미개했던 탓에 (다들 똑같은 못난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못하다 싶은 이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구획하고 차별하기 바빴습니다.

영어에도 inmate라는 말이 있는데 이게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혀 복역하는 사람, 구속되어 구치소에 들어간 미결수(법적으로 아직 무죄 추정), 정신병원에 수용된 환자 등 다양합니다. 일단 자유를 제한당하고 시설에 들어간 이상 그 사람은 문제 있는 사람이다, 이런 선입견은 아직도 어디에나 만연하며 미국의 inmate나 한국어 "수용자"나 여전히 그 불편한 함의는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수용자 본인을 향한 편견도 바람직하지 못한데, 별개의 인격체인 그 자녀에 대한 것이라면 더할 나위도 없습니다. 

어린이에게는 그 부모가 싸우기만 해도 불안감이 엄습해 옵니다. 연주(필명. 현재 물리치료학과 재학 중)씨는 아직 대학생이던 때 양친이 크게 싸웠습니다. 외숙모가 사망했다는 말을 경찰에게서 들었는데, 그럼 어머니의 상황은 현재 어떻다는 건지 당연히 궁금해지겠죠. 경찰 입에서 나온 말은 "사망하셨습니다"였습니다. 여기까지만으로도 아직 어린 여학생이 얼마니 당황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잠시 후에 알게 된 진상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리뷰에서는 공연히 다른 분의 불행한 가정사를 자세히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아직 나이가 어린데, 더 어린 여동생의 일까지 함께 돌봐야 하는 연주님이 앞으로 더 용기를 갖고 자신의 일을 처리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두번째 사연인 연주님 이야기에서도 나오지만 사실 그 양친이 특별히 문제 있는 분들도 아니었습니다. 세번째 기복님의 사연에서도, 원래 그 부친은 무난한 직장을 건실하게 다니던,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업에 실패하고, 거듭된 불운을 거치며 성격이나 정신 건강 상태가 영 이상해져 버린 것입니다. 필자 기복님은 부친이 평소부터 조울증 증세가 있었다고 하지만, 독자인 제 생각에 그 정도는 누구한테나 갑자기 닥칠 수 있는 불운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업에 크게 실패하고도 평상심을 에써 유지하며 가족들을 (위장 이혼 상태이건 아니건) 잘 돌보는 다른 분들이 정말 대단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가장이 무너졌을 때 자녀들에게 얼마나 큰 재양이 닥치는지 잘 알 수 있는 사연이기도 했습니다.

다원(현 미술학원 원장)님은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여 장기간 수감되었습니다. 재벌기업에게는 삼백억이런 돈이 크지 않지만, 중소기업 대표에게는 회사 직원 모두의 생계와 법인의 향후 존속 여부가 달린 문제이기고 합니다. 그녀는 미대생이었고 한참 돈이 많이 소요될 때 최악의 상황에 처한 부친이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글에서 그녀는 렘브란트의 자화상, 반 고흐의 자화상을 거론하며 어려운 시련이 닥칠수록 자신을 돌아보는 차분한 성찰을 강조하는 어른스러움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열 편의 수기들은 모호한 표현이 없고, 독자가 읽으면 한눈에 이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지 바로 이해가 될 만큼 술술 읽힙니다. 이는 해당 프로젝트에 참여하신 필자들이 (아직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지를 빠르게 객관화하고 힘차게 그를 극복하려 든 보람이 아닐따 추측합니다. 또 출판사 샘솟는기쁨에서 공감 가득한 시선으로 문장을 잘 다듬고 더 많은 독자들과 사연을 공유하려는 배려에도 기인했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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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은 방 둘이서 2
서윤후.최다정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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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덩그러니 남겨 두고 떠나온 방 중에는 문을 잘 닫고 오지 않은 방도 있는 것 같았다(p10)." 여기서 방이라 함은, 자주 이사를 다녔던 한문학자인 저자분이 몸담았던 물리적 공간을 뜻하는 게 일차적이겠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물리적 거주를 옮긴다는 건 정서적 안정의 거점 역시도 동요되는 사건입니다. 아무리 이사를 마쳐도 내 정신 극히 일부는 그곳에 머물러 다소의 미련을 남깁니다. 문을 열고 나온 듯하다는 건, 나의 흔적이 곳곳에 묻은 그 방을 혹시 언젠가는 다시 찾을 여지가 있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살아온 시절의 우리를 닮은 방에서 우리는 제일 안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공저자인 시인과 함께 방에 대해 나지막히 들려 주는 이야기들이 독자의 마음을 따듯이 덥힙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의자는 가구 중에 가장 보행 수가 많다.(p38)"  의자도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이 문장이 아니면 지금 어떤 의자를 두고 이르시는지 잘 모를 수 있었겠네요. 특히 바로 뒤에서 다리마다 테니스공을 끼웠다고 하셔서 아 그럼 그럼 상황이겠구나 짐작되었습니다. 주인의 기분에 따라 배치된 장소를 옮겨가며 언제는 햇볕을 가득 받기도 하겠고, 언제는 다소 어두운 구석에 놓이겠지만, 사람의 감정을 오롯이 받아내며 독서나 사색 활동을 지지해 주던 의자. "내 편이 되어 나를 돕고... 모든 일을 마치고 안으로 집어넣어지며" 개운한 성취감까지 낳아 주는 의자. 이런 문장을 읽고 나면 방에 놓인 흔한 의자도 달리 보이는 듯합니다.

"열지 못하는 유리창은 투명한 벽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p54)." 어렸을 때에는 왜 기차나 비행기의 창은 열 수 없게 한 건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크게 봐선 안전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정책적 선택의 여지가 없고 물리적 한계 때문이니 이야말로 "벽(壁)"의 전형적 예입니다. 저자가 제주에 갈 때마다 방문하는 어느 술집은 정말로 통유리창이 열리지 않으니 창(窓)이 아니라 벽이겠는데, 그 역시도 상업적 고려뿐 아니라 방문자의 묘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장님의 창의(創意)입니다. 벽이 없으면 바로 밖으로 훨훨 날아오르려는(사실, 날개 없는 사람은 연직으로 떨어져 처박힐 뿐이지만) 인간의 만용에다 목줄을 채워 두는 배려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각이 깊으니 장사가 잘 될 밖에요.   

p66에 인용된 진은영 시인은 세월호를 12년째 노래하고 기리며 환기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특히 진 시인의 <가족>에 대해 특별한 느낌을 표현합니다. 어렸을 때는 교과서에 나온 작품들을 선생님들이 외우게 시키기도 하는데, 저자는 진 시인의 저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외운 적 없이 외우게 되었다." 공감이 깊으면 그렇게 되기도 하(겠)는데,  독자인 저한테는 윤동주의 <새로운 길>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은 외형률이 어느 정도 드러나서 입으로 읊다 보면 그리될 수도 있는데, 진 시인의 저 작품은 순전히 메시지와 심상이라서, 비록 길이가 짧다곤 하지만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사실 방은 방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애착이 한때 생겨도 이미 떠나온 방에 대해 그렇게 깊은 애착이 남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방 이야기로 이렇게 한 권 분량의 책까지 쓰신 걸 보면 살짝 짐작은 되었는데, 아니나다를까 p83에 "세상에서 가장 약한 것에 가깝고, 잘 우는" 분이라고 자기 소개가 나옵니다.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깊어야 방에 대해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나오겠죠. 또 책을 찬찬히 읽어 보면 알 수 있지만 젊었을 적 넉넉지 못한 경제적 형편의 투영도 "집"이 아니라 "방"을 향하는 거죠. 저자는 또 여성치고 키가 큰 편(p151)이시라 누우면 딱 차는 작은 방에 대한 기억이 남다를 수 있습니다. 臥遊(와유)라는 조선시대 문인들의 용어도 언급됩니다.

저자는 지금 무우헌(p169)이라는 연구실에 주로 거합니다. 연구실도 실(室)인 만큼 일종의 방입니다. 과연 사람은 지금 어떤 크기, 어떤 구조, 어떤 입지의 방에 머무냐에 따라 역량과 의기와 기상과 감정, 또는 걱정 유무가 결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도 사람을 근본적으로 프레임할 수 없고, 오히려 방의 의미와 성격을 만드는 건 그에 머물렀던 사람의 그릇과 영혼일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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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본색 - 가려진 진실, 드러난 욕망
양상우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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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양상우 전 한겨레 대표이사는 기자 시절에도 묵직한 공익을 실현하는 특종 보도를 많이 하신 분입니다. 또 처음으로 주주배당을 하신 대표이사이기도 한데... 일단 배당이 가능하려면 이익이 얼마라도 나야 합니다. 그런데 창간 이래 수십 년 동안 한겨레는 무슨 이익을 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고, 주주총회 자체를 유효하게 소집하기도 힘들어서 매번 신문에다 "위임장(이라도) 보내 주세요" 같은 절박한 광고를 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아무튼 최초의 한국 독립 언론인 한겨레를 이만큼 오게 한, 큰 공적이 있는 분이라는 점에서 존경심이 생기네요.

(*북뉴스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일본의 문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쓴 소설 <나생문(羅生門)>이 원래 있었고,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가 이를 바탕으로 연출한 영화가 따로 있습니다. 무엇이 사실이고, 사람마다 다르게 파악하고 내세우며 간직할 수 있는 "진실"은 별개일 수 있다, 영화 <라쇼몽>은 이 점을 우리 관객들에게 절실히 인식시켰다는 점에서도 명작이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p39).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언론의 사명과 기능이 과연 무엇이며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추출하여 독자들에게 들려 줍니다. 그 무엇보다 "라쇼몽 효과"를 절감하는 게 언론인들이라고도 하십니다.

작년(2024)에도 트럼프와 해리스가 대선에서 붙었지만, NYT 같은 친(親) 민주당 매체는 이러이러하게 보도하고, 팍스뉴스 같은 공화당 성향 미디어는 또 다르게 말합니다. 과연 무엇이 팩트이며 또 진실입니까? 어차피 진실은 사람마다 진영마다 개별화하는 게 정상이니(?) 언론은 그냥 스스로 진실이라 여기는 바만 주구장창 보도하면 그걸로 끝일까요? 저자는 이 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또 스스로 회의하시는 듯도 보입니다. p45에서 언급되는 알자지라는 우리가 911 이후 부쩍 자주 접하게도 된 중동쪽 언론입니다. NYT나 알자지라는 22년 전 미군과 교전한 세력을 insurgents라 불렀지만(알자지라는 그들이 "민간인"이었음도 강조), 팍스는 그저 "이라크인들"이라 보도한 것처럼, 사소해 보이는 명칭 하나에도 가치관이나 프레임이 일일이 담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공격할 때 어떤 매체는 병원에 하마스가 잠복해 있었음을 강조하고, 어떤 매체는 무기력하고 무고한 민간인, 환자, 어린이의 피해를 부각합니다.

p85에 나오듯 20세기는 그야말로 매스미디어의 시대였습니다. 1990년의 걸프전도 신생 방송사 CNN이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보도함으로써 전쟁조차도 일종의 리얼리티 쇼가 되었는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매스미디어가 얼마나 큰 영향을 세상에 끼칠 수 있는지 여실히 증명해 보였습니다. p86을 보면 이런 대형 신문의 언론인은 진실에 대한 실질적 공인자(authenticator)로 자리잡았다는 저자의 말씀이 나옵니다. 과거에는 군주나 그의 신임을 받은 고위 관료가 하던 일을 이제 거대 언론 자본이 대신하게 되었던 거죠. 1998년작 <007 네버다이>를 보면 (아마도 루퍼트 머독을 모델로 삼은) 언론재벌이 세계 정세를 배후에서 조작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물론 과장이지만 그시절 거대 미디어의 무서운 힘을 잘 풍자했죠.

p145에 보면 그 유명한 clear and present danger의 원칙이 나옵니다. 이 책 p280의 후주에서 저자가 다시 설명하듯 1919년 美 대법관 올리버 웬델 홈즈가 처음으로 도그마화한 유명한 표현이죠. 본문과 후주에서 모두 저자가 친절히 밝히듯이 존 스튜어트 밀의 harm principle에 기초하여 만들어졌기에 더 연원이 깊은 이 원칙은 (책에는 미처 나오지 않지만) Schenck vs United States 사건 중에 확립된 판례이기도 합니다. 1994년 해리슨 포드의 히트작 <긴급 명령>(동시에, 토머스 해리스 원작 소설)의 원제목이기도 해서 더 흥미롭습니다. 아 물론 요지는, 미국에서 언론의 자유를 제한할 때 이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지난 정부에서 언론 관련 정부부처의 인사(人事)에 문제가 많았음을 p234에서 지적합니다. 또 21세기는 유튜브나 블로그형 포맷의 뉴미디어가 (그 총합으로 볼 때) 레거시 미디어보다 더 큰 영향을 행사하는 중이기도 한데, 실제로 김어준씨 방송이나 우파 채널들이 각자의 진영에 끼치는 힘이 훨씬 큽니다. 저자는 이들을 "신흥 언론인"이라 규정하는데, 이들을 포함하여 레거시 미디어에 새로운 통제(사실상)를 가하는 플랫폼(페북이라든가)의 기능에도 진지한 성찰이 이뤄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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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힐링 컬러링북 : 음식에 물들다 (스프링) - 마음에 색을 입히는 명상의 시간 시니어 힐링 컬러링북
김현경 그림, 베이직콘텐츠랩 기획 / 베이직북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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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시니어 힐링 컬러링북 시리즈를 리뷰하며, 만다라에 물들다, 추억에 물들다, 길운이 깃들다 등 세 권을 읽었습니다. 어려웠던 시절 국가 경제 건설에 참여하며, 자녀들도 훌륭히 키워 내신 시니어들께는 당연히 사회적 차원에서 경의를 표해야 마땅합니다. 그분들이 노년을 보내며 이렇게 큼직하고 아름다운 책의 빈 면에 채색을 하고, 당신들의 의미 깊었던 삶을 반추하는 모습이란, 생각만 해도 흐뭇합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어머님들께서 즐겨 만드시는 요리 중 하나가 잡채입니다. 잡채는 사실 당면이 메인인데도 이름이 雜菜라고 붙어서 외국인들 입장에서는 오해하기 좋습니다. 책을 보면, 소반 위에 당면, 미역국, 불그스레한 콩밥, 썰어 놓은 통김치가 놓여서 보기만 해도 군침이 꿀꺽 넘어가네요. 와, 맛있겠습니다. 그런데 색깔의 그라데이션이 좀 다채로워서 이걸 원본대로 완성하는 데에는 좀 정성이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은 스쳐갑니다.

요즘 병사이다를 어디에서 팔까요? 시골의 슈퍼나 모텔이나 가야 구경할 수 있을 듯한데 과거에는 페트병이 없었으므로 유리병에 탄산음료를 넣어 유통, 판매했습니다. 책을 보면 <김밥과 사이다>라는 작품이 있어 정겨운 색감으로 독자를 맞이하는데, 도시락 뚜껑도 참 예스럽고 소박합니다. 5×3 규격의 김밥 배열을 보니 저도 어머니가 싸 주던 도시락이 생각나고, 아버지와 함께 맛있게 먹던 추억이 새롭습니다.

짜장면은 예전부터 있던 음식이고 탕수육은 그에 비하면 대중화가 약간 늦었습니다. 탕수육은 현재 파는 게 소스맛이 크게 변한 것이고, 저는 예전 어렸을 때부터 먹던 그 맛이 그리운데 요즘은 어디에서도 그런 맛을 못 냅니다. 책에 나온 비주얼, 얇게 썬 양파와 오이, 레몬, 당근 등이 곁들여진 모습을 보니 진짜 예전 탕수육이다 싶습니다. 완두콩이 토핑으로 송송 놓인 게 짜장면도 참 예전식입니다.

빈대떡과 동동주라는 작품도 있습니다. 저는 사실 막걸리를 좋아하지 않고 그 특유의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어지러운데, 그림을 보니 아예 작은 동이에 재어 놓고 표주박으로 떠먹게 해 놓았습니다. 이런 비주얼은 대체 어느 시대일까요? 전설의 고향에서나 볼 법한... 오른쪽 상단에서는 맷돌로 갈아 빈대떡 반죽을 만드는 듯한데 어떻게 저렇게 액체처럼 줄줄 흘러내리는지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풋고추, 푸른고추 조각이 박힌 빈대떡이 먹음직스럽습니다. 빈대떡은 (기름기를 받아내려는 의도겠지만) 저렇게 꼭 소쿠리에 담아 먹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잔치국수보다 막국수를 좋아하는 편인데 책에는 담백하게 오이, 당근, 계란말이 등의 고명이 얹힌 잔치국수를 그린 작품이 나옵니다. 면에 비해 국물이 엄청 많아 보이는데 위에는 싱싱한 김장김치, 양념장 등이 놓여 입맛을 돋웁니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는 아니나다를까 김장김치가 나옵니다. 김장하고 나서 삼개월 정도 지나면 설날인데 다음 페이지에는 설날 떡국이 나오고 이 역시 맛있어 보입니다. 전 요리와 동치미 종지가 풍미를 더하는 듯합니다.

양은도시락이라는 건 전 한번도 못봤는데 예전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나 봤을까... 시대를 반영하는 듯 완전 꽁보리밥에 계란 후라이에 콩자반, 분홍 소세지 등 뭔가 가난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지금은 웰빙을 추구한다며 오히려 보리 등 잡곡을 섞어먹는 게 트렌드이니 참 세상 일은 알 수 없습니다. 예전 분들은 저렇게 정제백미를 덜 섭취하고 양도 저렇게 적으니 성인병 걸릴 일이 없죠.

시니어분들의 추억과 감흥을 불러일으킬 만한 멋진 작품이 많아서, 구태여 채색을 손수 하지 않고 구경만 해도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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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관저의 담장 너머 - 30년 외교관 부인의 7개국 오디세이
홍나미 지음 / 렛츠북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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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외교관 부인으로서, 작곡가이자 파티 플래너로서 30년 넘는 생활 동안 느낀 애환을 이 책 안에 담았다고 스스로 밝힙니다. 저는 예전에 KBS 제1라디오를 심야에 듣다가, 월남전의 영웅 채명신 장군이 출연하여 군 전역 후 세계 각국을 돌며 외교관 생활을 하던 이야기를 풀어 놓던 방송을 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방송을 진행하던 여성 아나운서는 "파티는요? 파티는요?"를 연발해서, 외교관 하면 날마다 이어지는 화려한 파티를 대뜸 떠올리는 게 선입견이구나 같은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외교관이라고 하면 그 어렵다는 외시를 패스하여, (예전에는) 특권층에게만 허용되었던 해외 여행(?)도 자유롭게 다니는 화려한 인생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책에 잘 나오듯 외교관 (가족)으로서만 겪는 애환이라는 게 있나 봅니다. 심지어 저자는 떠돌이라는 표현까지 쓰시는데, 직업군인, 외교관은 근무지를 자주 옮겨야 한다는 직업적 고충이 분명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확실히 교육 수준이 높아서, 베토벤 하면 누구라도 독일 작곡가를 떠올릴 텐데, p26을 보면 "(기질이) 드센 아랍의 여중생들"은 대뜸 한다는 소리가 "강아지가 어떻게 작곡을 해요?"였다고 합니다. 1990년대 유니버설에서 만든 가족물 중 베토벤 시리즈가 있었는데, 그걸 보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영화를 봤으면 베토벤이 원래 유명한 고전 음악가임을 모를 리 없는데 그 여학생들은 좀 이상하긴 합니다. p183에도 베토벤이 한 분 나오는데 이분은 진짜 베토벤(?)입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한국의 서울이 거꾸로 세계의 유행을 앞서 나갑니다. 재미있는 건, 선배 대사 부인들이 저자에게 충고하길, 여기서 유행인 건 서울에 사갖고 들어가지 마라, 벌써 한물 갔을 가능성이 높다(p76)라는 대목이었습니다. 한국이 확실히 잘사는 나라이기는 한가 봅니다. 브루나이도 산유국이라서 부국인데, 그 대사 부인이 아랍 여러 나라들처럼 지나치게 사치하지는 않더라는 말씀에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김치가 참 세계화한 음식이긴 한지, 앙카라 주재 태국 대사 부인은 저자가 토산 기념품을 선물로 주자 김치가 아니라며 살짝 실망하는 기색도 비쳤다고 합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누구한테 김치를 선물로 주면 욕먹을 것 같아서 엄두가 안 나는데 말입니다.

터키(현 튀르키예)는 다민족 국가라서 소수 민족 분리독립 운동이 예전부터 거세게 일었습니다. 또 그것과는 별개로, 201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ISIS라는 테러 단체가 세계적으로 문제를 일으켰었는데, 저자도 그때 터키에 머무신 터라 책에는 테러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p119에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미국 미스터리 소설이 배달된 걸 보고 남편분의 취향이 전혀 이쪽이 아니라는 걸 알았던 저자는 "이건 반드시 테러 시도다!"라고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알고보니 호주 대사가 고고학 관련 서적을 남편분께 선물한 것이었는데, 특별한 호의가 깃든 선물이니 페덱스로 배송되었겠고 말입니다. 제 생각에 테러리스트라고 해도 페덱스로 폭탄(혹은 탄저 가루라든가)을 보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쿠웨이트는 석유가 그 좁은 지역에 엄청 많이 나고 바다에까지 면해 있어 정말로 축복받은 땅입니다. 그런데 한국만큼 밤에 여성이 안심하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도 (상대적으로) 드뭅니다. 여기서 저자는 자신이 겪은 일을 들려 주는데(p177), 참으로 잘하신 일 같습니다. 절대 차는 함부로 타는 게 아니니 말입니다.

솔직하고 유쾌하게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 주셔서 외교관 가족의 고충도 보람도 엿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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