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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엑시트 - 불평등의 미래, 케이지에서 빠져나오기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5월
평점 :
어느 사회건 그 나름의 모순은 존재하며 모든 공동체는 그러한 구조적 결함을 인지하고 성원들의 지혜를 모아 조금씩 개선해 다가려 듭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 사회에 세 가지 불펑등의 축이 강고하게 형성되었으며, 이것이 비로소 동아시아 사회 특유의 소셜 케이지와 충돌할 때(p34) 지금까지의 경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혼란이 빚어질 것을 과감하게 예언합니다.
(*북뉴스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누군가의 존엄, 자유, 권리 등이 심각하게 침해받았다고 느낄 때 경제학자 허시먼은 그에게 세 가지 옵션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p8). 탈출(exit), 저항, 충성. 저자는 둘째 옵션인 저항에 대해서는 여태 많은 이들이 논의했으며, 자신은 이제 사회혁명에 대해 새삼 기대하지 않기에 첫째 옵션인 "탈출", 즉 엑시트에 대해 분석하겠다며 책의 서두를 잡습니다. 어쩌면 모세의 이집트 탈출(출애굽), 1948년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건국(유럽으로부터 벗어남), 17세기 영국 퓨리턴들의 북미 이주 등이 그런 예일지 모릅니다.
저자는 1910년 경술국치 후 조선인들에게도 세 옵션이 있었다고 합니다. 민중들은 왜 탈출(엑시트)하지 않았나? 순응의 비용이 훨씬 낮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주나 하와이 등으로 이주한 이들은 일견 엑시트인 듯 보여도 이들 중 상당수는 저항을 겸한 이주였겠습니다. 여튼 엑시트를 택한 이들에게는 낯선 사회와 환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겠는데, 그 사회는 자신만의 소셜 케이지(social cage)가 이미 형성된 상태입니다. 이주자가 가장 먼저 직면하는 도전은 저 케이지를 어떻게 뚫고 들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기업은 비교적 폐쇄적이고 배타적입니다.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다고 하나 타 조직에 몸을 담다가 이직해 온 이들에 대해 온전히 마음을 열고 화학적 결합을 기꺼이 이룰 의향이, 미국이나 서유럽에 비해 매우 부족하다고 할 수 있죠. A는 내가 아주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인데, 이제 가입한 C를 똑같이 우대할 수는 없지 않겠어? 이렇게 말하는 B는, 속으로 A 역시 자신을 C와는 전혀 다른 특별한 존재로 대접할 것을 반대급부로 요구하는 것입니다. p46에서 저자는 회사원 A씨의 예를 들며, 그는 타 직장 H로 이직할 수는 있어도 지금까지 이뤄 온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 때문에 "엑시트"가 쉽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손흥민이나 추신수, 류현진 등에게 가능했던 엑시트 옵션이 A씨에게는 사실상 없는 것입니다.
p65 이하에서 저자는 사회 A(미국 같은), 사회 B(한국 같은) 둘을 대별하며, 특히 B에 대해 학벌, 내부 노동시장, 연공제 등으로 제도적 상보성(institutional complementarity)이 유지되며 작동하는 점을 가장 큰 특징으로 꼽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왜 엑시트 옵션이 특별히 제한되느냐면, 예를 들어 자신의 노동을 팔고 싶어도 그걸 사 줄 고용주가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듭니다(p87). p126을 보면 한국의 청년들이 그토록 정규직 직장에 목을 매는 이유가, 이처럼 엑시트 옵션이 지극히 제한된 환경에서 그나마 청년기의 초입에 사회적 기반을 잡을 채널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정년까지 어떻게든 이런저런 보호망으로 자신을 지킬 유력한 케이지를 마련할 방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AI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AI는 갑자기 출현했다기보다, EDPS, ERP(전사적[全社的] 업무관리) 등 20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기업을 잠식하던 자동화 트렌드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합니다. 1980년대만 해도 기업과 회사원은 세력의 힘이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지 않았으며 기업도 인재의 중용을 사시(社是)의 하나로 표방할 만큼 겸손했습니다. 지금은 사람이 없어도 어지간히 시스템이 돌아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을 뽑아 일을 가르쳐 내보낸다는 마인드에 가깝습니다. 이제 AI가 이제 조직의 핵심에서 기능하니 조직원의 위상은 전보다 더욱 위축되어 행여 조직 안에서 배제, 소외되면 어쩌나 하고 전전긍긍할 뿐입니다.
조직 내에서 50대, 60대 중심의 공고한 네트워크가 구축되면 첫째 이들만의 폐쇄적 이익이 옹호되고 둘째 조직이 위기에 처했을 때 과감한 혁신의 아이디어를 낼 만한 젊은 인력의 풀(pool)이 실종되어 결국 타성에 젖어 도태되게 됩니다. 저자는 일부 대기업에서 엔지니어나 엑스퍼트가 아니라 이른바 재무통(p345)이 득세하여 결국 조직이 활기를 잃고 고사해 가는 게 이 때문이라고 일침을 놓습니다. 과연 한국 사회는 이 위기를 타개할 만한 역량을 갖출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