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위로 - 모국어는 나를 키웠고 외국어는 나를 해방시켰다
곽미성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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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뤼미에르 형제의 나라 프랑스로 건너가신 후 어언 20여 년 동안 거주해 오신 저자께서는 프랑스어의 달인이 되신 후에도 여전히 한국어로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고 말씀하십니다(p213). 한 사람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고 어른이 되게 만들며 희로애락의 감정을 오롯이 담아내어 온 네이티브 랭귀지라는 것의 힘이 그만큼이나 강한가 봅니다. 하지만 독자로서 저는, 성년이 된 후 배우기 시작한 언어인 프랑스어를 저자께서 저렇게 능숙하게 구사하게 된 비결이 솔직히 더 궁금했습니다. 심지어 저자는 고교에서 제2외국어로 (그당시 분들에게 프랑스어와 함께 유이한 선택지였던) 독어를 공부하셨다는 말씀도 책에서 하십니다. 성장기에 아무 연도 없던 외국어와 친해지고 마침내 그를 통해 해방의 쾌감까지 맛보는 과정이 흥미진진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33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지만 아무래도 제2언어는 컨디션에 따라 그 구사의 질이 달라지나 봅니다. "당신의 프랑스어, 오늘 무슨 일이지?" 저자는 이게 그 언어가 무의식까지 스며들지 않아서라고 말씀합니다. 달리 말하면, 외국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매일매순간 그 언어로 탄식하고 환호하고 신음할 줄도 알아야 어느 단계를 확 넘어서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저자님처럼 해당 국가의 문화를 너무도 사랑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습니다. 이란의 어느 젊은 여성이, 구조도 어휘도 한 구석 닮은 데 없는 한국어를 두고, 그저 문화 컨텐츠에 대한 사랑만으로 그처럼 실력을 늘릴 수 있었던 사례를 봐도 이 점 확인 가능합니다. 

p75에는 "외국어 공부 최고의 방법은 그 나라 연인을 사귀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어 R이란 분과의 오랜 교제 이야기기 나오는데 이 역시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꼭 이성연인이 아니라 그저 동성친구(들)이라 해도 언어 익히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는데, 이건 우리 나라에 와 있는 젊은 여성(주로 백인) 유학생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너무도 한국어를 그럴싸하게 해서, 불평하거나 푸념하거나 할 때 외국인의 육신 안에 한국인의 영혼이 그대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옆에서 보면서 저는 살짝 소름이 끼친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부작용이, 저자께서도 말씀하듯 나의 언어 나의 생각이 아니라 그(그녀)의 언어 그의 프레임 안에 갇혀 사는 것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긍정/부정을 넘어 이것이 언어의 힘 그 강력한 예증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두 언어 사이를 오가는 일은 마치 손으로 모래를 옮기는 것 같았다(p106)." 그래서 애초에 번역이라는 게, 이미 다리 하나를 건너며 많은 느낌이나 맥락이 희생되고 왜곡되는 작업입니다. 해당 언어에 익숙해지면 또 구태여 번역을 거칠 필요도 없이 편안한 두번째 집에 머물면 되는 것이고요. p111에 보면 윤진 번역가님의 센스에 대해 저자께서 감탄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 책의 중요 주제 중 하나가 번역이라는 작업의 본질 탐구이기도 합니다. 이 이슈는 AI가 또한 얼마나, 어떻게 진화할지에 대한 주요 기준이기도 합니다. AI가 아직 수학 문제 풀이라는 벽을 그리 쉽게 넘지 못한다고도 하는데 과연 오랜 난제인 번역하고 어떤 걸 먼저 완성도 있게 해 낼지 지켜볼 일입니다. 

이 책은 매 꼭지마다 프랑스어 문장을 제목으로 뽑아 독자들에게 생각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p150에는"Ne vous inquiétez pas, c'est par gout."라는 말이 나옵니다. 약간 뜻이 통하는 말로 영어에는 "There's no accounting for taste."라는 것도 있죠. 취향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자기 나름대로 자리잡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 어떤 장점이 있는지는 아무도 시원하게 해명못하고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다는 뜻이겠습니다. 우리는 비밀스럽게, 또는 대놓고, 이게 내 취향이라며 지인들과 함께 공유, 음미하고 아무 근거도 없이 자부심을 갖기도 하지만 점잖은 사람이라면 다 모른척해주고 넘어갑니다. 이 대목에서 소개되는 <타인의 취향>은 2000년 세자르상(프랑스의 오스카 격) 작품상 수상작이었죠. 프랑스에 그처럼이나 몰입했던 사람도, 알고 보니 "그 프랑스는 사실 예전의 프랑스이며 지금 프랑스는 더 이상 그 프랑스가 아님"을 깨닫고 허탈해지기도 하는데, 어디 이런 게 프랑스뿐이겠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나만의 취향, 나만의 착각이라는 강고한 성채 안에 갇혀 살 권리가 있지 않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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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니까 불안해!
채은 지음 / 책고래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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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처럼 사교육이 극성스러운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저자 채은 작가님은 그 대강의 경력만 봐도 동연령대 어느 여성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 성공한 커리어우먼의 한 예라 할 만합니다. 마케팅과 홍보 분야의 전문가이며 한때 빅히트엔터테인먼트(현 하이브)에도 몸담아 (당시 아무도 예상 못했던) 방탄소년단의 성공에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분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다른 전선에 나서면 그 분야에서 더 잘나가는 다른 엄마를 만나 위축감 비슷한 걸 느끼기도 하신다니 한국의 사교육 현장이란 산업의 최전선보다도 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p25 이하에는 이른바 "돼지엄마"라는, 이런저런 사교육 정보에도 밝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성공적인 교육 업종 프리랜서이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의 아이도 영재로 잘 키우는(안 그러면, 동료 엄마들이 선망하거나 추종하지도 않죠, 애초에요) K라는 분의 이야기가 잠시 나옵니다. 사회에서 성공하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도 힘든데 이렇게 엄마 노릇에서까지 극심한 경쟁을 치러야 한다니 과연 한국은 예사 나라가 아니며 이런 물질적 풍요가 괜히 얻어진 게 아닙니다. 긍정적인 뜻에서건 시니컬하게건 모든 뜻에서 그러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52 이하를 보면 순전히 아이를 위해 제주도로 이주하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물론 현지에 소재한 그 국제학교 때문입니다. 채은 작가님만 커리어우먼이 아니라 그 남편분도 성공한 개업의로서 한국에서 전문직 최고 티어로 치는 선택받은 인생입니다. 이런 분들도 아이 교육 때문에 서울을 떠나 낯선 땅에서 새롭게 생을 시작해야 한다니(사실 제주 국제학교라는 곳이 좀 과장하면 본래부터 이런 분들을 유치하려고 설립된 시설이라고 해도 됩니다), 한국에서 애 하나 제대로 키우는 게 이처럼이나 힘들다는 점 새삼 확인하고 한숨이 나왔습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사정이 이런 판에 한국은행 총재께서 대치동 사교육 이상(異常) 열풍을 지적하며 특정 조치를 거론했으니 엄마들이 화가 나지 않았겠습니까. 본인은 학비가 수십억 한다는 외국 학교에 자녀를 보냈니 어쨌니 하며 말입니다. 아무튼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서, 제주도 국제학교에 애를 보내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책의 이 부분에 정리가 잘 되어 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들은 참조할 만합니다. 

애를 조기 유학 보내고, 엄마가 양육, 보호, 학습 지도를 위해 따라가는 패턴은 이미 십수년 전부터 있었고 TV 드라마 소재로까지 자주 쓰입니다(상당수가, 공교롭게도 그 부친이 의사라는 설정이기도 하죠). 이 경우 애가 외국행을 간절히 원하면(특히 p117 참조) 부모님들로서는 들어 주는 것말고는 방법이 따로 없는 듯하며 이해도 충분히 됩니다. 제가 올해 6월에 <캐나다 캘거리에서...>라는 책을 읽고 서평을 썼었는데 한국에서 예나 지금이나 유학지로 인기 높은 곳이 캐나다이며 책에 나온 설명을 보면 과연 그럴 만한 환경입니다. 미국처럼 치안이 위태롭거나(물론 미국도 미국 나름이지만) 물가가 살인적으로 비싸거나 풍속이 난잡하지도 않고(요즘은 한국이 더합니다만) 차분한 사회적 분위기에 깨끗한 환경, 게다가 저자님 경력상 영주권 취득에 유리한 부분도 있어(이게 결정적이었겠죠) 책을 읽다 보면 처음에 고개가 갸웃했던 부분도 서서히 수긍이 갔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저자는 아들을 캐나다 보딩스쿨에 진학시키게 됩니다. 맹모삼천(三遷)지교, 아니 아예 다른 하늘 아래로 이주했다는 점에서 맹모삼천(三天)지교라 할 만합니다. 

"쉽지 않지만 아이보다 엄마가 더 노력해야 한다(p169)." 이 말만 보면 뭐 그러려니 하며 예사로 넘길 분들이 많겠으나, 이 책을 읽어나가다 여기에서 일단 숨 한 번 돌리는 독자로서는, 과장 좀 보태서 정신이 아찔해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정성껏 부모 노릇 한번 한다는 게 이렇게도 힘들단 말인지! 물론 금전적인 뒷받침도 따라줘야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온갖 정보 채널을 다 가동하고 이를 취사선택하여 전략을 짜고 칼 같은 실행력으로 아이를 밀착 마크하며 바른 성장을 돕는 엄마의 매일매일의 고된 여정과 도전입니다. 흡사 기업 하나를 설립, 운영하는 노고와 열의, 재능에 견줄 만합니다. 잠시 과거를 회고하시는 p179에 보면 (저는 처음 들어보는) 전자간증(前子癇症. pre-eclampsia) 증상까지 생기셨다고 하는데 그러실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고대 그리스어 동사 ἐκλάμπω가 그 어원이며 등잔(lamp)하고도 먼 어원으로 관걔가 있는 단어이고, 쉽게 말해 (책에도 설명이 나오지만) 고혈압성 임신중독증입니다. 이렇게 힘들게 가지시고 출생한 자녀분인 만큼 더군다나 각별한 열의로 양육하시려던 그 마음에 공감이 되고도 남으며, 아울러 대한민국의 모든 어머니들께 경의를 표하게도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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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력도 공부하면 늡니다 - 크리에이티브 씽킹의 기술
정병익 지음 / 미래의창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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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안도 다다오나 혁신의 아이콘 잡스 같은 인물을 보면 저렇게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思考)의 바다를 누빌 수 있다는 자체가 하늘로부터 받은 축복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한국 최고의 경영자문역이라 할 저자 정병익 학장은 저들 창의력의 천재들과 평범한 우리 사이를 어떤 근본적인 경계가 가로막는 건 아니라고 조언합니다. 누구나 훈련하면 기발한 발상을 일상에서 업무에서 떠올릴 수 있으며, 이는 철없는 어린이들이 마치 어떤 계시나 영감을 받은 양 놀랍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기해서 어른들을 놀라게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랬던 어린이들도 사회의 틀 안에서 정해진 방식대로만 훈련받다 그 소중한 활기가 질식당하는 건데, 저자께서는 로지컬 씽킹, 디자인 씽킹, 그리고 이를 결합한 크리에이티브 씽킹 기법을 통해 누구나 글로벌 인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반가운 말씀을 전합니다. 삶과 사고가 크리에이티브로 물들면 조직에서 공동체에서 요긴히 쓰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본인의 삶 자체가 행복해집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63을 보면 성냥개비 옯기기 퍼즐이 나옵니다. 다들 알듯 최소한의(혹은 횟수 제한이 특정 숫자로만 부과되기도 합니다) 움직임으로만 문제의 지시사항을 만족시키는 게 포인트인데, 이 책에서는 특정 문제를 주고서는 별의별 기발한 해법들을 다 보여 줍니다. 심지어, 아예 성냥개비를 움직이지도 않고 보는 관점만 달리하여 목적을 달성하기도 합니다. "최소한"이라 했으니 0회 역시도 문제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치 근처 철물점에서 변기 하나를 사들고 와서 "분수"라 이름만 붙여 예술품 하나를 만들어낸 마르셀 뒤샹의 대담한 시도를 보는 듯합니다. 현재 AI 혁명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나 기존의 일자리가 모두 없어진다고들 난리이며, 오늘 일론 머스크는 "의사의 일도 AI가 모두 대체하며 사람은 그저 최소한의 안전보장을 위해 그 자리에 있게 될 뿐"이라는 미래상을 제시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로봇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을 만한 인재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바로, 남들이 생각지도 못하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성냥개비의 이동 없이도 문제의 요구사항을 달성하는 저런 발상의 전환을 이뤄내는 인재가 아닐지요. 

p43에 나오듯이 요즘 엠지들은 디지털네이티브라 할 만합니다. 그 앞선 세대들은 아날로그 세상에 태어났으나 공부를 통해 디지털 세상에 적응했었다면, 이들은 태어나 보니 이미 세상이 디지털이었던 거죠. 다만 저자께서는 아날로그 감성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기발하고 재미있는 발상의 미덕도 환기하며, 지나친 디지털 방식에의 종속이 끼친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이른바 디지털 디톡스도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세계를 넘나들며 가장 좋은 알곡만 영리하게 골라 취하는 다람쥐 같은 재치가 있어야 인공지능 시대에 살아남지 않겠습니까. 

p36에 나오는 마르셀 비크(Marcel Bich)는 유명한 필기구 제조 전문 기업을 만든 인물이었습니다. 이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니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한때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직원들과의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다음 목표를 물색하는 저런 노마드 정신부터가 벌써 승리자, 개척자들의 자격을 증명합니다. 이들은 다음 목표를 1회용 면도기, 라이터로 정하고 그 분야에서도 대성공을 거둡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일을 하던 사람들인데 업종을 바꿔 과연 살아남겠어요?" 같은 회의론자, 신중론자들은 어디에나 있고 안타깝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고작 이런 소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병철씨가 언제까지나 설탕, 조미료, 내수전용 가전, 보험 영업 등으로 국내 1인자에만 안주했었다면, 그런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모든 걸 걸고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그 아들 이건희씨가 던지지 않았더라면, 과연 오늘날 글로벌 거인 삼성이 존재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한순간도 두뇌가 쉬지 않고 돌아가는 창의력 인재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 저자가 제시하는 체계적인 방법론이 p128에 제시됩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라고 해도, 아예 중간부분인 저 페이지의 도표부터 펼친 후 머리에 개념을 잡고서 다시 처음부터 읽어도 될 만큼, 이 책의 핵심이 압축된 대목입니다. 창의력을 키우는 데에는 드라이버와 레버가 있는데, 우선 창의력을 구동시키는 드라이버는 OFFES로 요약되는 5요소로 구성됩니다. 독창성, 유창성, 융통성, 정교함, 민감성 등이 그것이며 OFFES는 이들의 머리글자를 딴 약자입니다. 또 이들을 증폭시키는 도구가 있는데 이를 레버라고 부르며 전문지식, 동기부여, 창의적 사고능력 등 세 가지입니다. 사람은 머리 안에 지식이 쌓일수록 그 지식이 머리 안에서 자체 화학 반응이라도 일으키는지 각종 활력을 만들어내는데 안 겪어본 사람은 모릅니다. 인터넷에 온갖 지식이 쌓였는데 뭐하러 그러느냐고도 하는데 지식이 없으면 애초에 영감이 찾아오질 않고 인터넷에서 찾는 능력도 떨어집니다. 챗GPT가 있다고 하나 이를 이용하는 건 사람이며 사람이 부실하면 가공된 깔끔한 정보만 주인공으로 남을 뿐 그 사람은 그냥 뒷전으로 밀립니다.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창의력으로 무장한 사람이야말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 동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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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의 일기 - 무삭제 완전판 문학사상 세계문학
안네 프랑크 지음, 홍경호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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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은 자신들이 군사적으로 점령한 영토 안에서 대중 사이에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세뇌하고,시스템적인 제노사이드를 시행하여 문명사회의 휴머니티를 말살하려 든 악랄한 집단입니다. 네덜란드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이 득세할 때에도 약소한 국력 때문에 병탄당했고, 독일이 야욕을 드러내면 곧바로 희생양이 되는 등 아픈 역사를 지닌 나라입니다. 네덜란드 자체가 독일에게는 쉬운 먹잇감이었는데, 그 네덜란드 안에서도 소수자로 살아야 했던 유대인들이 1940년대 전반에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을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당시를 살았던 사춘기 소녀 안네 프랑크가 남긴 일기는 기적적으로 종전 후에도 전해져 일정 시간 경과 후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 p7에도 나오듯 당시 네덜란드 총리가 라디오 방송 연설에서, 나치 점령지 하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기록으로 남겨달라는 호소를 했었습니다. 소녀 안네 프랑크는 이 연설을 듣고 기존의 개인적 기록을 더 정성들여 이어가고, 후세에 공개될 것을 대비해 등장인물 상당수의 실명을 숨기는 각색까지 했다는 거죠. 어린 소녀의 생각치고 정말 어른스럽고 사려깊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일기는 그저 나치 독일의 만행을 고발한 역사적 기록일 뿐 아니라, 성장기 청소년의 다양한 고민과 갈등 등을 솔직하게 담은 수상록 문학으로서의 가치도 높습니다. 한국인들도 발췌역본으로 어렸을 때 한 번 정도는 읽어 봤음직한 고전 명작인데 지금 이 문학사상사본은 안네 프랑크 재단과 유일하게 정식 계약한 한국판이라고 합니다. 완전판은 이른바 A본(本)이며, 1990년대에 출판되었습니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처하면 평소에 나오지 않던 모습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 책 p78을 보면 안네 프랑크가 판 단 아주머니(가명. 본명은 판 펠스)에 대해 심각하게 불평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아주머니가 안네의 부친에게, 말과 헹동으로 지나치게 친밀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친은 판 단 씨에게 그렇게 선을 넘는 듯한 경솔함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우리 독자 입장에서야 사태의 진상이 무엇이었을지 알 방법은 없습니다. 아니, 판 단 부인과 오토 프랑크 씨의 사정을 지금 눈 앞에서 보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다들 생존에의 위협이 워낙 긴급히 다가오니 서로가 서로에게 더 밀접하게 기대려고들 했었겠고, 판 단 부인처럼 저런 부적절하고 정숙지 못한 행동도 나오곤 했겠죠. 대개 딸은 어머니를 닮는다고, 엄마가 점잖은 분이면 딸도(사실은 아들도) 가치관이 건전합니다. 책 표지에 나온 안네의 사진만 봐도 애가 고등학생답지 않게 뭔가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입니다. 

어쨌든 이런 극한 상황에서 다들 이웃과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판 단(van Daan) 씨가 늘어놓는 너스레, 넌센스 퀴즈는 현대 독자들이 읽어도 헛웃음이 나옵니다. 대체로 이 판 단 씨에 대한 평가는 (안네의 일기 독자들 사이에서) 좋지 못합니다. 그러나 비평적 시선을 더 입체화하면, 같은 문장이라고 해도 그로부터 여러 해석이 가능한 법이니 우리 독자들은 괜한 선입견을 갖기보다 자신만의 자유로운 관점에서 읽어 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오토 프랑크 씨처럼 평범한 이름도 아니고, 이 양반은 왜 유대계 독일인이면서 성씨에 전치사 "판"이 붙었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먼 조상이 네덜란드에서 기원했기에 성씨에 판이 붙는 건 독일인들 사이에서 드물지는 않았는데 (유대계는 아니지만) 베토벤의 경우도 이와 비슷합니다. 독일어 von과는 달리, 귀족 출신이거나 한 건 아닙니다. 이름이 판 단인 것과, 이들이 네덜란드에 은신처를 마련하게 된 경위는 서로 아무 관계 없고 그저 우연입니다. 

보통 억압적인 부친, 성격이 괴팍한 모친 밑에서 자라 저 페터 판 단 군이 괜히 위축되고 소심한 성격이 되었다고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p135에서도 알 수 있듯 필요할 때는 바로 행동이 나오는 아이였으며, 안네를 향한 행동에서도 딱히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단, p60 같은 데 보면 저 헤르만 판 단 씨가 아들인 페터를 때리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당시 독일 가정의 훈육 관습을 감안하면 아주 이례적이거나 하진 않습니다(물론 그 시절이라고 아빠가 아들을 다 때리진 않았겠고,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다음 페이지에 나오는 "베프(Bep)"는 물론 p79 같은 곳에 나오는, 전에 오토 프랑크 씨 회사에 다니던 직원이며 베스트프렌드라는 뜻이 아닙니다^^ 저하고 같이 책을 읽은 누가 그런 질문을 해서 여기 적어 둡니다. p410에서 베르튀스라는 여자와 약혼하는데 안네는 남자가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안네는 어린데도 애가 아주 유머러스한 데가 있습니다. p146 같은 데를 보면 판 단 부인한테 아름답다고 평하지만 그게 반어법이라고 곧 밝힙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만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는 게 취미인지, 오토 프랑크 씨에게 어이없는 플러팅도 했던 게 다 이런 유치하고 바보스러운 심리의 발로입니다. 그런데도 딴에 아들을 위한다고 음식을 남겨 두는데 이때 "귀여운 아들"이라고 칭한 건 관찰자 안네의 감정이입이겠습니다. 아이들은 현란한 공중전에 쉽게 매료되곤 하는데 1987년 영화 <태양의 제국>에도 이런 장면이 있죠. 그 공중전이 (보는 사람에게도) 얼마나 위험하고 그 전투의 당사자들이 생사를 건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했는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p251 같은 데를 보면 배를 타고 은신처를 탈출하는 문제(네덜란드는 잘 알려진 대로 저지대이니까요)와 조리도구인 국자를 젓는 동작을 연결시키는데 저런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는 걸 보면 안타까우면서도 흐뭇합니다. 위기에 웃는 사람이 일류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p348을 보면 당장 우리가 잡혀가는 판에 라디오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냐면서 오토 씨가 딸 안네의 일기를 태워 버리자는 (누군가의) 말을 듣는 장면이 있고, 안네가 강력 반발하자 부친이 일단 묵살하는 대목에서 역시 과거에 큰 사업체를 운영했던 양반답게 판단이 신중하고 언행이 묵직함을 알 수 있죠. p370 같은 데를 보면 이런 상황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저 앞에서도 페터가 영어 문제를 안네한테 자세히 물어 보는 장면이 나왔죠. 유대인 가정 특유의 기풍이라는 게 있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스실로 기어이 끌려가 비참하게 처형당하고 수용소의 열악한 시설 때문에 병에 걸려 죽거나 하는 게 참으로 비극적입니다. 휴... 다시는 인류사에 이 비슷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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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계단 학습 일력 : 어휘편 (스프링) 무한의 계단 학습 일력 (스프링)
아르누보 편집부 지음 / 아르누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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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고 귀여운 일력 형식으로 된 무한의계단 어휘편 교재입니다. 모바일 게임 무한의계단이 어린이들에게 워낙 인기 있다 보니 그를 테마 삼아 이처럼 학습 교재도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 교재의 머리말에는 "우리의 생각을 더 깊게, 우리의 말을 더 현명하게 만들어 주는 게 바로 어휘이며 이 실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휘는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학습되어야 그 지식이 오래 가고 응용력도 높아지는데, 그런 이유에서 이 교재는 그 일력 포맷이 더욱 학습 효율을 끌어올려 주는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1월 9일자에는 "손사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어른들 중에는 이 단어를 "손사레"라고 아는 경우도 있던데 발음을 정확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단순히 단어 뜻만 소개하는 게 아니라 이 말(나아가 그 동작)을 쓰는 상황까지도 설명하는데, 거절하고 싶을 때, 반박하고 싶을 때, 심지어 부끄러울 때에도 쓴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과연 그런데요. 대체 우리는 언어나 동작의 활용법을 인생의 어떤 단계에서 배웠기에 이런 설명에 수긍하거나 더 깊은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는 걸까요? 아무튼, 어린이들에게 그 나이 때부터 정확한 지식을 가르쳐 주면, 그 아이는 커서 훨씬 정밀하고 풍요로운 언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겠습니다. 

4월 11일에는 "통제하다"라는 단어를 배웁니다. 이 단어는 5-1 과정에서 배우는 것 같습니다. 이 일력 교재에 실린 모든 단어들은 그 소속 범주가 오른쪽 상단에 따로 나오는데, 이 단어는 "행동"이라는 카테고리 소속인 것 같습니다. 5월 16일의 부리나케 같은 단어는 "상태" 범주에 속합니다. 부리나케의 어원에 대해 책에서는 "불이 나게"에서 온 말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설명도 덧븥이는데, "신발 밑창에서 불이 일어날 만큼 빠르고 급하게 움직인다면 지각은 하지 않겠지요?"라고 합니다. 7월 23일의 단어 "상기되다"의 범주는 "감정"입니다. 이 단어에 대해 제시된 비슷한 말로는 "붉어지다, 들뜨다"입니다. 이렇게 유의어들을 함께 제시해 주는 게 이 교재의 강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9월 27일의 동경(憧憬)이라는 단어는 해당 교과과정은 따로 표시가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움을 다소 세련되게 표현하는 단어로서 우리들이 꼭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소속 범주는 "감정"입니다. 사실 저 동경이라는 단어는 그 한자도 우리가 자주 보던 것들이 아닙니다. 이 페이지에서는 비슷한 말로 "선망, 흠모"라는 단어들도 가르치는데 이 역시도 꼭 알아둘 필요가 있는, 수준 있는 어휘들이라고 하겠네요. 11월 26일의 "신념"은 5-1 과정에서 배우는 단어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소속 범주는 "가치"입니다. 교재에서는 이 신념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예문을 제시하는데 "우리 할머니의 신념은, 사람은 모쪼록 잠을 잘 자야 마음이 건강하다"입니다. 당사자가 이렇게 확고하게 믿고 있으면 그 역시 신념이겠습니다. 캐릭터들의 대화(말풍선) 안에 문장을 담았으므로 내용이 쏙쏙 잘 들어옵니다. 

3월 29일에 배우는 단어는 "역량"입니다. 이 단어는 6-1에 배우는데, 과연 이 교재 안에서는 제법 어려운 단어일 수 있겠습니다. 이 페이지에 나온 두 캐릭터는 기획사에 들어간 연습생인데, 둘 다 자신의 역량이 충분하다고 믿으며 언젠가는 꼭 무대에 오르리라고 희망을 품습니다. 그 비슷한 말들로는 "그릇, 능력, 실력"이 나오는데 다들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뉘앙스가 다른 말들이죠. 이 단어도 소속 범주는 "가치"인데, 이 교재가 나눈 범주는 이처럼 행동, 상태, 감정, 가치 등 네 개인 것 같습니다. 

10월 19일자에는 유사어 퀴즈가 나오는데 덤터기와 가장 유사한 단어를 고르라고 합니다. 답은 ①바가지인데, 이 퀴즈도 무한의계단 캐릭터가 말해 주는 형식이므로 아이들이 일단 호기심을 더 가지게 됩니다. 반대로 12월 14일자에는 헐값이라는 단어가 제시되는데 답은 ④싼값입니다. 이 말을 하는 캐릭터가 한숨을 쉬는 걸 보니 그닥 상황이 만족스럽진 않았나 봅니다. 지루하지 않게 학습자를 요리조리 잘 이끄는 형식이라서 아이들이 집중하며 공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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