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 2
막스 갈로 지음, 박상준 옮김 / 민음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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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권은 프랑스 국민 공회의 출범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국민의회와 입법 의회 시기까지만 해도, 왕정과의 연결 고리가 완전히 부정되거나 끊어진 건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프랑스에는 왕정이 부여할 수 있는 사회 안정, 질서, 권위에 대한 향수, 향수를 넘어선 현실적 요구가 엄연히 존재했기에, 루이 왕정은 곧바로 붕괴 소멸되기보다 일종의 상징으로서 존속할 가능성이 더 많았습니다. 프랑스 대혁명보다 무려 100년을 앞서 크롬웰의 공화정을 겪기도 한 영국은, 이미 그런 식으로 역사의 성장통을 다소 타협적인 방법으로 넘기고 있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개성과 자부심, 그리고 섬나라에 대한 우월 의식이 강한 프랑스인들이라고는 하나, 수백 년 간 모셔 오던 왕가를 하루 아침에, 백정이 가축 도살하듯 폐기하기엔 물리적인 문제마저 따르는 형편이었습니다. 국가의 위신, 문명국의 체면 유지에도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루이 일가의 결정적인 패착인 바렌 사건으로 인해 일거에 물거품이 됩니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왕실 혈통을 이어 받은 이들의 자부심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로부터 50년 후, 프로이센의 왕은 연방 의회가 그에게 부여하려 했던 "독일인의 황제" 호칭을 결연한 어조로 부인한 바 있습니다. "짐은 돼지의 왕관 따위는 갖지 않겠노라!" 카페-부르봉의 오랜 연원을 지닌 역사의 왕좌를, 귀족도 아닌 제 3신분의 폭도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은, 루이와, 합스부르크의 자랑스러운 후손 마리 두 사람 모두에게, 감내할 수 없는 치욕이었을 겁니다. 생명과 재산도 문제지만, 그런 식으로 치욕스럽게 왕위를 유지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외국의 무력이라도 빌려 정당한 권위를 수복하려는 생각밖에 없었을 테고, 신이 준 왕위 자체보다 자신의 신민에게 보다 충실한 직분을 요구했던, 그리고 이제 막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의식 속에 싹틔우고 있었던 프랑스인들은 이 사건을 통해, 결정적인 배신감을 느꼈을 겁니다.


"왕이 곧 국가의 반역자다!"" 2대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짐이 곧 국가"라고 한 왕까지 있었는데요. 이제 불과 백 년도 안 되어서 세상이 이만큼이나 바뀐 것입니다. 딱히 루이 - 마리 부부가 어리석고 타락한 위인이라서기보다, 시대의 대세란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던 이유가 컸습니다.


아무튼 왕을 단두대에서 죽인 후, 프랑스는 퇴로를 차단한 채 공화정을 향한 걸음을 힘차게 내딛습니다. 1800년 전 로마에 공화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귀족의 과두정에 가까웠습니다. 이제 프랑스는 이만큼이나 거대해진 국가를, 국민의 총의를 모아 운영해 나가야 하는 초유의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믿을 건 인간의 선의와 이성, 그리고 성숙한 국민의식 뿐이었는데, 그나마 그간의 야만적인 격동 속에서 많이 흐려지고 탁해진 상태입니다.


혼란을 이용한 악덕이 횡행하고, 파벌 싸움이 끊일 날이 없자, 로베스피에르라는 법률가 출신의 독재자가 드디어 전권을 잡고 공포 정치를 시행합니다. 설득과 토론이 그 가치를 상실하자, 남은 것은 무력을 통한 공포의 지배 말고는 없습니다. 레인 오브 테러라고 하는 유명한 말이, 바로 로베스피에르의 국민 공회 정부로부터 비롯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은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마치 현대사에서 문화 혁명의 광기와도 비슷했습니다. 아무리 대의가 옳아도, 그를 실행하는 방법이 옳지 못 할 때, 어떤 참혹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똑똑히 보여 주는 비극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베스피에르 역시 사방에 적을 만든 업보로, 기요탱의 도끼 날 아래 스러지고 맙니다.




"혁명은 피를 먹고 자란다." 그러나 모두의 피가 빨린 후에 사람은 없고 혁명만 남아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프랑스로부터의 혁명 수출을 두려워한 외국 군주국들의 동맹이 형성되어, 프랑스는 내부로부터의 분열에 외침의 위협까지 겪게 됩니다. 자체 분파 싸움으로 존속이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외국의 군사 공격까지 받으면 나라가 어떻게 될까요. 그러나 이번에도 국가를 구한 건 민중의 힘이었습니다. 강해진 국민군은 비록 지휘관이 무능하여 지리멸렬일 것 같았지만, 위기 의식으로 한층 고조된 국민군의 사기는 이를 극복해 내었습니다. 괴테도 회고하듯 "그때 그곳에서 세계의 역사가 바뀐" 발미의 전투는, 프랑스가 나폴레옹을 맞이할 시간적 여유를 줍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혁명의 지도자들은 협의 하에, 실권자가 합의체 형식으로 국가 대사를 처리하는 총재정부를 도입합니다. 마치 고대 로마가 공화정의 난맥상 끝에 트로이카 체제를 도입한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말만 많았지 되는 일이 없었고, 총재정부의 무능을 풍자하는 문학적 장르가 따로 생길 만큼, 이 정부는 국민의 기대를 정면으로 저버렸습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애써 추스린 공화정이 결정적인 위기를 맞자, 포도탄의 능란한 발포로 순식간에 상황을 제압한 나폴레옹은 드디어 시대의 총아로 부상합니다, 그에게는 혁명의 숭고한 대의와 아울러, 무질서를 질서로 변모시킬 기하하적, 공학적 수완이 있었던 겁니다. 막스 갈로의 장엄한 서사는 여기서 막을 내립니다. 이의 후편은 이 책을 프리퀄로 만든 <나폴레옹>에서 더 읽어 보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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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 1
막스 갈로 지음, 박상준 옮김 / 민음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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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갈로의 필치로 접하는 프랑스 대혁명의 상세한 역사는 실로 흥미롭습니다. 


그는 프랑스 전체로부터 사랑 받는 산문가이자 역사가입니다. 우리 나라 독자들도 <나폴레옹> 5부작을 읽고 그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아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대체로 그는 모국인 프랑스의 역사를 주된 서술의 제재로 취하되, 유럽 각국의 다른 역사에도 날카롭고 종합적인 시선을 주어 특유의 운문적이고 간결한 필치로 장엄한 묘사를 펼칩니다.


이 책은 상 하 두 권으로 되어 있지만, 다 읽어 내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도 말했지만 그의 문장은 대체로 한 문단에 긴 문장 여럿을 배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페이지에 여백이 많이 남는 편이라고 할까요. 압축적이고 시적인 하나의 문장이, 문단 전체를 차지하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이는 우리가, 소설 <나폴레옹>을 읽을 때에도 많이 느꼈던 점입니다. 빼어난 역사가들 중에는 팩트 사항을 길게 자세히 적는 이도 있고, 짧고 압축적이지만 단어 하나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심오한 문장을 즐겨 쓰는 이들도 있습니다. 막스 갈로는 후자에 가까운데요. 다만 쓰는 단어들이 비교적 평이해서 읽는 이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역사는 보통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부터 시작, 브뤼메르의 쿠데타가 마무리되는 통령 정부의 출범에서 끝납니다. 부르봉 왕조가 붕괴된 후, 프랑스에는 국민의회, 입법의회, 국민공회, 총재정부, 통령정부가 차례로 들어섭니다. 국가라고 하면 그저 왕, 신으로부터 권리를 부여 받았다는 왕이 다스리는 정체, 국체가 유일한 줄로만 알았던 당시 사람들은, 불과 1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저처럼 그 이름도 다채로운 정부가 여럿 들어섰다는 사실부터가 놀라웠을 텝니다. 한국에서는 군사 독재자가 무력으로 찬탈한 정권을 두고 "제 5공화국"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지만, "국(國)"의 모습이 "왕국","왕정"이 아닌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건 그 자체가 긍지요 환희입니다. 하물며 "공화국"이 1, 2도 아닌 제 5까지 갔다는 건, 자유와 주체, 민주주의를 영혼으로부터 떨칠 수 없는 프랑스인들에게는 무한한 자부심을 환기하는 단어입니다. 독재자는 한국 뿐 아니라 저 멀리 프랑스의 인민들에게까지 폐를 끼치고 있는 셈이죠.


막스 갈로는 이 제 1권에서, 국민공회의 출범 바로 직전, 루이 16세의 처형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국민 공회와 공포 정치, 그리고 나폴레옹의 전면 대두는 다음 권의 주제입니다.


막스 갈로의 저작이 보이는 가장 큰 미덕은, 어느 한 쪽에 치우지지 않은 균형 잡힌 필치로 다양한 역사를 응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보통 역사학자들은, 자신만의 개성과 지성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여태 그 누구도 제기하지 않은 관점과 틀을 짜 내어 역사를 프레이밍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스 갈로는 언제나 그의 책에서 표준적이고 무난하면서도, 학계에서 저간에 성취한 여러 업적과 다양한 관점을 자신의 한 권에 녹여 내듯 안정적인 관점과 패러다임으로 역사를 씁니다. 보통 역사라고 하면 건조한 논증과 인용으로 페이지가 가득 메워지는 경향도 있습니다만, 막스 갈로는 소설에서 보는 듯한 평면적 내러티브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프롤로그에서 약간의 예외가 있기는 합니다. 혹시 지난 시절, MBC TV에서 제작 방영한 <제 4공화국>이라는 드라마를 보신 적 있을까요? 이 드라마의 시작은, 충격적이게도 12.12 쿠데타 사건을 그 시작으로 삼습니다. 해당 시기의 정권은 박정희 대통령의 피격으로 이미 막을 내렸지만, 헌정사적으로는 전두환의 대두와 함께 공식적으로 그 종결을 맞습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그 결말을 대뜸 서두에 제시하는 방법은, 영화 <아마데우스> 등에도 보듯 서사의 시계열을 비트는 일종의 미학적 충격, 교훈적 의도에서의 종지부 도치 등의 효과를 노리고 시도되는 게 보통이죠. 이 책은 그런 맥락에서, 왕 루이의 최후를 프롤로그에 갑자기 배열하여, 읽는 독자로 하여금 혁명의 충격파를 급작스럽게 맛보게 하는 효과를 노립니다. 프랑스 혁명은 사실 그 전례를 찾기 힘든 드라마틱한 사건이었기에, 이런 인위적인 재배치가 그닥 필요 없기도 하지만, 막스 갈로는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의 반응을 예상하기에 앞서, 저술자인 자신이 먼저 그 극적 흥분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런 (그로서는 대단히 드문) 파격을 구사한 것 아닌가 짐작합니다.


막스 갈로는 다양한 사료로부터 인용을 하되, 주로 인물들의 편지나 개인적 회고를 즐겨 인용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소설을 빼닮은 그의 글에 배치할 때 마치 대사처럼 활용하곤 합니다. 그의 이런 기법은 우선 인물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고, 소설적 재구성에 있어 대사를 인위적으로 지어내는 부담을 덜 뿐 아니라 사실에 충실하게 극을 재현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루이 15세는 이미 늙어 나라를 경영할 활력을 이미 잃고 있으며, 후계자는 그 자질이나 인성 면에서 믿음이 가지 않는 인물입니다. 왕실을 둘러싼 이런 불안한 분위기는, 오스트리아 대사가 본국에 보낸 서간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대사의 생생한 표현을 그대로 끌어 오는 방식으로, 갈로는 후계자 루이의 인간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상퀼로트(바지조차 입지 못 한 자), 제 3신분(시예즈의 표현대로, 모든 것이어야 하나 아무것도 아닌 자)의 부당한 처지와 대우를 상세히 공초하고, 이런 정의의 입장으로부터 부패하고 무능한 왕정이 전복되었다는 식의 서술, 교훈적 서사, 선과 악을 가르는 공리적 관점은 역시 우리가 익히 봐 오던 것입니다. 최근에는 이런 전통적 관점에 대해, 혁명 세력의 과도한 자기 합리화가 부른 역사 왜곡이라는 반론이 만만치 않게 일어 왔습니다. 멀리는 츠바이크의 평전도 다소 그런 분위기였으며, 최근에는 안토니아 프레이저의 저술이, 시대의 거부할 수 없는 파고 앞에 부당한 누명을 쓰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 왕가를 다소 동정적인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죠. 막스 갈로는 이런 다양한 시선의 교차 와중에, 절묘한 스탠스로 균형을 잡고 모든 파트의 입장을 퓨전으로 영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혁명 세력, 시대의 정의와 유리한 파고를 거침 없이 이용하는 전위의 움직임도 남김 없이 잡고 있으며, 동시에 (비록 무능했을망정)고상하고 품위 있는 왕족들이 야만적인 대중 앞에서 맞이해야 했던 최후를 가감 없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 맨 앞에 보면, 루이 15세에게 칼을 휘두르다 가벼운 상처를 입힌 광인의, 사지 절단식 사형이 등장합니다. 그는 죽음의 순간 모발 모두가 갑자기 희어지는 초자연적 경험을 맞았다고 하는데요, 이 책 맨 뒤에 나오는 앙트와네트 왕비 역시, 그 시련과 모욕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고 합니다, 혁명은 마치 설원에 낭자한 핏방울의 흔적처럼, 그렇게 사회와 인간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성장을 꾀하는 잔인한 진화의 총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누가 정의인가, 누가 죽어 마땅한 반동이었는가, 이런 질문은 장엄한 역사의 전개 앞에 무의미하게까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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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퍼펙트 베이비 - 완벽한 아이를 위한 결정적 조건
EBS <퍼펙트 베이비> 제작팀 지음 / 와이즈베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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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솔직히 제목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완벽주의라는 개념은, 아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얼마 전에도 공부와 성적에 대한 강박을 이기지 못하고, 투신 자살한 중고등학생들의 소식이, 어른들의 마음을 대단히 아프게 한 적이 있었죠. 


"아이들 때부터 퍼펙트해져야 살아 남을 수 있는 이 세상인가?"

"아이도 아니고 이제는 베이비 시절부터 퍼펙트해져야 생존이 가능한가?"


아, 그런데.... 책을 펼쳐 보니 그런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아이건 어른이건, 남을 짓누르고 앞지르고 몰아세우는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라는 퍼펙트함을 강요하는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도 행복해지고, 주변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들며, 자신을 낳아 준 부모에게 참된 기쁨을 안기고, 나아가 언젠가는 자신도 그 신분을 취득할 부모가 되어, 훌륭한 양육의 본분까지 다할, 그런 아이를 낳고 기르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이 책은

신생아를 낳아 기르기 시작하는 부모,

한창 커 가는 틴에이저를 키우는 부모,

앞으로 부모가 될 젊은 커플,

자녀를 혼인시킨 후 육아 과정을 돌이켜 보는 veteran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크게 2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1부는 태아편입니다. 태교의 효과와 중요성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마다 아직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많은 임신부, 예비 맘들은 어쨌든 아이에게 최대한의 배려와 정성을 쏟으려고 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래서, 태교의 방법으로 좋다는 건 다 시도해 보곤 하죠. 


이 책의 태아편은, 그간 식상할 만큼 흔히 알려진 정보 외에,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놀라운 사실, 혹은 그간 확신을 갖지 못하던 몇 가지 사항에 대해, 분명한 물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2부는 발달편입니다. 세상에 고고의 성을 울리며 태어난 아이들을, 어떻게 해서 주위와 잘 융화하고 필요한 지식을 잘 습득하며, 자기 감정을 잘 조절하는 매력적이고 착한 아이로 키울까 하는 고민과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 이 책의 원전 격인 EBS 다큐멘터리 vod도 찾아 보았습니다.

다큐는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었구요. 1부가 이 책의 '태아편'이었으며, 2~5부가 이 책의 '발달편'에 해당합니다. 와이즈베리 출판사의 이 책은, 약간 산만하고 중복된 감을 주던 2~4부를 적절히 통합,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고르신 분들은, EBS의 빼어난 다큐멘터리를 매우 인상깊게 보고, 자신의 느낌을 정리하기 위해, 혹은 일회성으로 휘발되기 쉬운 지식을 보다 체계적으로 접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께 이 책은 아주 퍼펙트한 완결편 노릇을 해 줄 것입니다. 다큐멘터리의 내러티브를 최대한 살려 놓았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만 찾아서 집중적으로 '복습'할 수 있는 멋진 매뉴얼, 교과서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TV 다큐는 러닝 타임의 배열에 따라 계속 지켜 봐야 하기 때문에, 바쁜 분들은 능동적으로 참고하기가 힘들죠). 게다가 종이의 질이 고급이고, 다큐멘터리의 화면을 여럿 살려 도판으로 제시하고 있어서, 방송을 전혀 보지 않은 분들에게도 그 자체로 유익하고 풍부한 정보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1부 태아편입니다. 이름하여, '태아 프로그래밍'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국민성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인들은, 최근에 암스테르담 메디컬센터 테사 로스붐(Tessa Roseboom)박사의  주도 아래 이끌어지는 어떤 연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의 목적은, ㄱ. 유전과 ㄴ. 태아기에 태아가 임신부의 배 속에서 겪은 체험, ㄷ. 출생 이후의 후천적 환경, 이 셋 중 어떤 것이, 인간의 체질과 건강, 기타의 상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아이의 유전적 특질은, 이미 아빠와 엄마의 유전자 반씩을 물려 받을 때부터 결정됩니다. 이는 '결합 당시'의 염색체 보유자 양 당사자 외에는, 어떤 인간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요소 중, 가장 '운명적'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미 유전자조합은 결정되었지만, 엄마의 자궁 안에서 280일을 보내는 동안 태아는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만약 엄마가 전쟁, 기근, 빈곤 등으로 태아에게 10달 동안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지 못했다면, 태아는 이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게 됩니다.


엄마 뱃속에서 태아가, 결핍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 아이는 태어나면서 유전자의 기능이 차단된다는 것입니다. 지(방)질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못하는 태아는 POMC 유전자의 '스위치'가 닫히게 되는데요, 그 이유는 지방질을 분해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이후 지방을 섭취해도 스위치가 닫힌 유전자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비만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태아 상태에서 췌장이 발달하지 못한 아이는, 태어나서 인슐린을 원활히 분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 당뇨병에 걸리거나, 아니면 소아당뇨로 고생하게 되는 거죠. 


선천적으로 유전자가 고정된 면을 주시하는 것보다, 후천적으로 유전자가 환경에 따라 변모를 겪을 가능성과 양태에 더 주목하는 학문 분야를 '후성유전학'이라고 부릅니다. 이 후성유전학은 일차적으로, 자궁 속에서의 후천적 환경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합니다.


그러면, 선천적 유전자 특질보다 더 중요한, 자궁 속에서의 280일을, 바람직한 방법으로 보내지 못 한 아이는, 운명 아닌 운명에 평생 속박되어 살아가야 하며, 그 어머니는 일생을 죄책감 속에 지내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후성유전학이 보내는 긍정적 메시지와 의의는 바로 이 부분입니다. 아이는 태어난 이후에도, 특히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계속 의미 있는 성장을 거칩니다. 이때, 이미 받은 나쁜 영향을 본인과 주변의 노력에 의해, 충분히 보상하고 극복할 수 있다는 게 후성 유전학자들의 일치된 주장입니다.


이 책은 이런 전제 하에, '태아프로그래밍' 편을 접고 2부, '발달'로 넘어갑니다. 사실 아무리 퍼펙트한 유전자, 퍼펙트한 자궁 내 체험을 보유, '이수'한 아이라도, 이후 과정이 험난하면 퍼펙트한 성인으로 자라날 수 없죠. 정작 중요한 건 지금부터입니다. 인간(즉 부모)의 의지와 노력, 정성이 가장 많이 개입할 수 있는 단계니까요.


1부 태아프로그래밍 편은, TV 다큐가 다룬 것 이상의 부분을 다룹니다. 캐나다 얼음폭풍의 사례, 임신 중 스트레스, 임부가 받은 스트레스가 아이의 감정 조절 능력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의 논의가, 각종 도표와 함께 상세히 다뤄집니다. 특히 '퍼펙트 정보' 파트는, 정확하고 분명한 추가 정보를 독자에게 전달하며, 많은 참고 자료를 제공합니다.


2부 '발달'에서는, 어떻게 하면 학습 능력이 증진되고 자기 감정을 잘 통제하여, 우수한 학생, 인기 있는 친구가 될 것인지를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자기 감정을 잘 통제하는 아이는 남의 감정을 읽어내는 능력도 뛰어나며, 이런 아이가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고,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정 조절 능력이란, 억울함이나 분노를 무조건 참기만 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과잉 분출도 문제지만, 과소 분출 역시 마찬가지로 문제입니다. 이런 감정 조절이 능숙한 아이가, 결국 학업 성취도 만족할 만한 수준을 보이게 된다는 게 연구진의 결론입니다.


학업 성취는 어떤 경우에 최대화할 수 있을까요? 전통적으로 경영학, 심리학에서는 인센티브 이론을 견지해 왔습니다. 작업 능률에 따라 성과급을 지불하면, 노동자들은 그에 비례해 생산성을 향상시킨다는 거죠. 그러나 생활 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이 이론은 더 이상 그 효용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작정 당근만 기계적으로 제시한다고, 그에 따라 결과를 내 놓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자아 성취의 쾌감을 느낄 수 있을 때, 가장 높은 질적 성취를 이뤄 낸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남의 동기가 아니라, 나 자신의 동기에 의해 행동하는 사람이, 남보다 나은 결과를 낳고, 자신의 잠재 능력도 최고도로 발휘한다는 뜻이죠. 


아이를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하는 거짓말을 무섭게 알아챕니다. 진심이 아닌데도, 아이더러 공부를 잘 하게 만들기 위해, 마음에 없는 칭찬을 하는 순간을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공부하는 아이들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공부하는 아이들이라는 거죠. 이를 위해서는 동기가 외부적인 것이 아닌, 철저한 자발성에 기초한 내부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육아를 현재 진행 중이거나, 임박한 미래에 계획 중인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육아가 먼 미래에 있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 전망이 없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은, 우리 인간의 육체적 건강 여부가 어디에서 가장 먼 기원이 비롯하는지, 혹시 잘못되었다면 바로 잡을 방법은 없는지, 어떤 방식으로 소속 집단의 구성원, 동료들과 소통해야 하는지, 나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는 방법이 뭔지, 아이의 예를 통해 되돌아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자 척도란 말이 있듯, 퍼펙트 베이비를 통해 우리는 불완전한 자신을 보다 바람직하고 나은 인간형으로 가다듬을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 책은 세심하고 깔끔한 편집과 알찬 정보로, 미처 챙기지 못하고 지나친 소중한 지혜를 갈무리하게 도와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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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페르노 1 로버트 랭던 시리즈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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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이상한 질문을 던져 볼까 합니다. 댄 브라운은 우리 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라이터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댄 브라운을 일러 author라고 불러 줘도 될까요? 아무리 순수 미학의 차원을 도외시한 세속적 차원에서의 성공이라고는 하나, 이미 그렇게까지 성공한 이를 두고 새삼 "저술가"라는 호칭에 인색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다수일 겁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대단히 부당한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단 한 작품의 성공 후 곧 잊혀진 사람도 아니고, 그 이후 그는 그저 로버트 랭던만을 주인공으로 삼았다고 하나 연작을 잇따라 내어 쏠쏠한 상업적 성취, 대중의 주목을 얻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로지 그 자신의 붓끝으로만 이뤄 낸 일입니다. 어쩌면 인류 문명사가 시작한 이래 펜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이들의 반열에 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영향력이라는 차원에서, 댄 브라운 같은 예는 대단히 드뭅니다. 로마 교황청은 19세기 후반, "교황 무류설" 도그마의 채택으로 전 세계 지성인들로부터 결정적인 외면을 받는 어리석은 실책을 범하기는 했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인류 이성의 표준에 정면으로 거역하는 처사를 저지른 적은 별로 없다고 봐야 하며(나치가 발호하던 시절의 논란 많은 자세는, 당대 재임 교황의 개인적 선행도 있고 했으니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요), 전인류적 이슈에 대해 대체로 차분하고 신중한 스탠스를 견지해 왔습니다. 몇몇 교황은 종교와 신앙의 이동, 유무 여부를 떠나 폭 넓은 지지와 존경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003년 느닷 발간되어 세계적 히트를 친 소설 <다 빈치 코드>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비난 성명까지 내며 감정적 색채가 다분한 성명까지 내었습니다. 일개 소설에서 펼친 이런저런 주장을 두고, 오랜 역사를 지닌 거대 종교의 핵심 수뇌부가 점잖지 못하게 격떨어지는 성명전을 일 개인과 벌이고 나선 것입니다. 바티칸은 나름대로 절박한 필요에서 취한 액션이었겠으나, 그 결과는 스스로 불러 들인 위신의 추락, 그리고 역설적으로 "로마 가톨릭과 맞짱을 뜬 신출내기 작가"로, 아직까지는 그 본연의 저력을 의심 받고 있던 댄 브라운이라는 인물을 일약 세계적 차원의 명사로 끌어올린 일이었습니다. 그가 보유한 영향력은 반은 자신의 (나름) 재능, 반은 체신 없는 교회의 과민반응이 합작하여 낳은 결과물이라 하겠습니다. 거대 종교와 맞선 문인의 다른 예로는 살만 루시디가 있겠습니다만, 화제가 된 사건 이전의 종합적 문단 경력이라든가, 그가 영어를 다루고 어르는 솜씨를 고려하면,  댄 브라운은 감히 그와 비교 대상에 오를 수준이 못 됩니다. 

 

이렇듯 대단한 영향력을 만방에 떨치게 된 그라고 하지만, 여전히 author라는 호칭을 아무 거리낌 없이 붙여 주기에는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있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하나는, 그가 구사해 온 문장의 미숙함입니다. 단어의 구사 양태는 대단히 단조롭고, 어휘는 중학생 수준으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이 단점이 한국 독자들에게 선명히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안종설씨의 매끄럽고 빼어난 번역이 크게 한몫 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오노 나나미가 그 모국어를 공유하는 본향(일본)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큰 공감을 획득한 것이 김석희 선생의 매끄러운 번역에 크게 빚진 사례나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른 이유는, 소설 미학적 영역에 놓여 있습니다. 그가 2000년 <천사와 악마>를 통해 세상에 처음 등장시킨 로버트 랭던은, 어찌 보면 너무 속보이는 "인디애나 존스"의 소설판 짝퉁입니다. 선과 악의 평면적 캐릭터들의 클리셰적 충돌이, 다만 영리한 작가가 미리 예비해 둔 계산적 트위스팅 속에 이리저리 구조적 요동을 이루다가, 다소 의외다 싶은 결말로 독자의 얼을 잠시나마 빼 놓는 수법은, 단테 이래 문명의 햇살이 비추고 도시적 풍요가 넘실대던 공동체에서는 으레 존재했던 재주꾼들이 일찍부터 피우던 재롱이었습니다. 댄 브라운은 자신보다 훨씬 재기 넘치던 선배들이 다져 놓은 평탄한 길을, 요령 좋게 최소 비용 최대 효율의 경로로 얌체 같이 밟아 왔을 뿐입니다. 하다못해 그는, 창의력 면에서, 다른 문화 영역의 흥행사 스필버그의 그늘을 단 한 치도 못 벗어나는, "따라쟁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다 빈치 코드> 역시, 그 핵심의 화제는 모조리 <성혈과 성배>에서 모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 빈치 코드> 이후 10년이 지났습니다만, 여전히 그를 향한 대중의 시선이란 운 좋게 한 방으로 뜬 유명인, 연예인 이상의 인식이 아니었습니다. 그 는 비록 자신이 노리던 거의 모든 것을 다 이뤘다고는 하지만(그는 대학을 여러 군데 다녔고, 대중 문화 섹터라고 할 수 있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렸으나 나이를 꽤 먹도록 분명한 커리어를 쌓지 못했습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직업으로서의 교사가 그리 높은 위상이 아니지만, 그는 변변한 정교사도 아닌, 부유층 상대의 (학년 등급이 존재하는) 사설 교습소에서 몇몇 언어를 강의한 것 이상의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명성이 문필가라는 수단을 통해 얻어진 것이니만큼, 이제는 결자해지(?) 차원에서 세상에 무엇인가를 선보여야만 했습니다. 또다른 엔터테인먼트 롤러코스터 하나를 내놓은 것에 그쳤다면, 설사 그것이 또다른 상업적 대히트를 부르는 데 성공한다손 쳐도, 장사치나 연예인이 아닌 저술가(author)로서의 체면에는 크게 값하지 못하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 줘야 마땅할 때였다고 저는 생각했는데요.....

 

이번의 신작 <인페르노>는, 알다시피 단테의 고전 <신곡>의 지옥편에서 그 제목과 모티브를 따 왔습니다. 댄 브라운은 유럽 곳곳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개인적 배경이 있어서인지, 그의 모든 소설은 "유럽 모처에 집도 절도 없이 툭 떨어진 미국 출신의 이방인" 로버트 랭던의 (다소 모성애를 자극하는) 좌충우돌 활약상으로 꾸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작품 <인페르노>에선 그 색채가 유럽풍의 외피만 빌린 것이 아닌, 르네상스 고전의 인문적 자취에 깊이 천착한 모습입니다. <인페르노>는 단지 단테 알리기에리의 작품에서 그 제목만 빌린 게 아니라, 그 구조와 은유적 함의까지 "애써서" 일개 오락물에 투영하려 한 노력의 흔적이 역력합니다. 소설의 초두에 등장하는, 지하 동굴의 "호수" 따위의 소재, 그리고 배경으로 등장하는 피렌체(토스카나)의 설정이 다 뭐겠습니까. 이 번에는 댄 브라운 이 사람이, 작심을 하고 중학생용 어드벤처 오락물에 인문의 향취, 고전의 아우라를 욱여 넣고 세상에 그 노력의 산물을 "tada!"하고 내어 놓은 것입니다. 그는 "실질적인" 데뷔 10년차를 맞아, 나름 거듭남의 고뇌를 세상에 진정성 있게 시연해 보인 것입니다.

 

진지한 author로 거듭나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하필 왜 <인페르노>였을까요? 이는 단테와 이 작품이 갖는 세계사적 의의를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신곡>은 대단히 깁니다. 이런 장편의 분량과 그 웅대한 스케일에선 아무리 졸렬한 솜씨라 한들, 뭘 빌려도 빌리는 게 가능합니다. 만약 그간 호되게 교계 관계자나 열혈 신도로부터 시달려 온 분풀이를 하고자 함이었으면, 아예 <우신예찬>이나 <데카메론>에서 영감을 얻는 편이 효과적이었겠죠. 하지만 이들 작품은 분량이 짧거나, 구조와 내러티브의 규모가 부적합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어드벤처 스토리의 모티브를 빌려 주기에는 모태가 빈약합니다. 다음으로, 댄 브라운은 그저 평탄한 환경에서, 어떤 한 분야에 헌신하는 인생을 지향했다기보다, 딴따라식 설렁설렁 한량 스타일로 그 나이를 먹을 때까지 버텨 온 유형입니다. 이런 사람이 설사 무엇이 제 개인 소신에 반한다 한들, 그 부당함을 세상에 대고 증명해 보이는 식의 투사형 애티튜드를 지니진 않죠. 단테가 누구입니까. 그의 작품 앞에 후세인들이 divine이라는 한정어를 따로 붙여줄 정도였죠. 인문의 자유로움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정신은 당대 교회의 교리 훈육의 바운더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체제 안에서의 최대 자유를 지향한 단테의 마인드를, 일개 예능인인 댄 브라운은 모사하려 한 것입니다. <우신 예찬>에 굳이 빚지려 하지 않은 건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댄 브라운이 <다 빈치 코드>에서 그토록 세계 대중에게 사랑 받은 비결은, 빼어난 이야기솜씨(비록 표현은 단조로우나, 가장 겸손[?]하고 간명한 표현만 구사해서 제 할 말을 다한, 이상한 기교죠)를 보였고, 다음으로 그 반전이라는 게 인문적 상징 체계에 그 기반을 두었다는 개성입니다. 더군다나 그 반전이 폭로하는 결론이라는 게, "알고 보니 전부 너였다!"는, 어찌 보면 터무니없는 개인 회귀로 치닫는 점도, 현대인의 치기 어린 나르시즘 그 급소를 치는 면이 있었어요. 그는 내러티브 롤러코스터의 곡률 면에서 시드니 셀던만 못하고, 상상력의 범위와 배경 지식의 스케일 면에서 마이클 크라이튼의 발 끝에도 못 미칩니다. 하지만 댄 브라운은 그 둘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규모의 상업적 성공을, 최소 비용만을 투자하여 얻어 낸 경영의 대가입니다. 이 점에서, 그는 빼어난 장사치지 아직도 작가는 아니라고 할 분도 많이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댄 브라운 아닌 어떤 신인작가가 쓴 제법 큰 규모의 오락 소설이라는 식으로, 색안경을 걷어 낸 신선한 눈초리로, 전체를 다시 스캔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습니다. 이번 소설은 최소한의 격조가 느껴지고, 파렴치한 중딩 상대 야바위 같다는 인상은 어디서도 안 풍깁니다. 덮어 쓴 인문의 베일도 가식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댄 브라운 고유의 노력으로 축적한 개성과 내공의 산물이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면서도 여태의 그의 매력은 그것대로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이제 최소한 저 개인적으로는, 그를 거리낌 없이, 엔터테이너 아닌, author라고 불러 주고 싶네요. 마치 "효부라 불리운 며느리"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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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근담 - 국내 최초의 완벽 주석서
홍자성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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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근담은 정말 종류도 다양합니다. 인간사랑에서 펴낸 이 완벽 주석본의 저자이신 신동준 선생의 설명처럼, 명대에 나온 원본, 이후 청대에 나온 건륭본, 그리고 중국 대륙(China proper)와 대만에서 나온 그 숱한 해제본 등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만, 우리 한국에서 그간 다양한 저자들에 의해 나온 역본 역시 만만치 않게 수효가 많습니다. 지훈동탁("승무"의 시인)의 채근담, 더 시대를 앞서 만해 한용운의 채근담도 있습니다. 댓글 이벤트에서도 제가 그렇게 썼지만, 채근담은 그간 별 이유도 없이 <명심보감>, <소학>처럼 아동용 수신서 정도로만 인식되었을 뿐, 그 진가를 평가 받지 못 한 아쉬움이 컸는데요. 신동준 선생님은 발문에서, 공교롭게도 역시 <명심보감>, <소학>을 거론하고 계시지만(저는 미리 이 책을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제가 거주하는 곳은 서점이 많지 않아서요), 저와는 정반대의 맥락에서 교양인들은 이 세 서적을 필독서로 쳐 왔다는 점을 밝히고 계십니다. 일개 독자인 저는 다시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신동준 선생은 들어가는 글에서, 진계유의 <소창유기>, 왕영빈의 <원로야화>와 함께 혼자성의 이 책을 처세 3대 기서라고 하고 계십니다. 기 서라는 말은,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를 총칭할 때 흔히 쓰는 말이죠. 기서는 기이한 책이라고 하나, 좋은 의미로 쓰인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타당합니다. 제가 조금만 덧붙이자면, '기이'라는 말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립적인 말입니다. 맥락에 따라 "기이하다."고 하면, "가괴(可怪)로 고!" 하는 말처럼 개탄하는 의미도 될 수 있습니다. 혹은 초자연적이라는 뜻도 품습니다. 영어에서도 대체로 비슷한 의미인데요, extraordinary는 상궤에서 벗어났다는 뜻도 되지만, 그래픽 노블이나 영화 제목에서처럼 "특별한"의 의미로 쓸 때도 있습니다. 이 extraordinary가, 한자의 奇異와 아주 흡사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기이(奇異)"에서 기(奇) 자만 골라 뽑으면, 대체로 좋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요즘은 잘 안 쓰지만, "기남자(奇男子)"라고 하면, 젊고 잘생긴 남자라는 뜻입니다. 이 때에는, handsome과 같은 의미죠. 모리스 르블랑의 작품 <기암성>이라고 할 때의 기(奇) 자도, 절경(絶景)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프랑스어 원제목은 L'Aiguille creuse라고 해서, 그저 "빈 바늘"이라는 뜻뿐입니다만).



 


이 채근담 역시, <고문진보>나 그 외의 많은 걸작 고전처럼, 진집과 후집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인간사랑판의 가장 놀라운 장점 중 하나는, 바로 사자(四字)제(題)의 편집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본디 4글자로 된 형식과 라임을 좋아하는 데다, 우리 역시 한문 고전을 접할 때는 이에 익숙해진 터라, 신동준 선생의 이런 태도처럼 4글자 제목이 위에 붙어 있으면 기억하기도 좋고, 의미가 압축적으로 정리, 연상되어서 더할 나위 없이 편합니다.


1장 "일시만고"를 보면, 寧受日時之寂寞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본디 고전의 주해에서는 실질어, 명사어구를 중심으로 풀어 놓는 것이 관행이고, 또 주희니 좌구명이니 하는 분들은 본디 중국인이니만치 허사나 기능어의 해석을 베풀 필요를 못 느꼈습니다. 이런 책에서는 그래서 문법사의 설명을 하지 않는 게 보통입니다. 저 맨 앞의 寧자는, 안녕이라고 할 때의 그 "영"인데요. 여기서는 차라리 寗으로 새기는 게 타당합니다. 같은 음이긴 하나 뜻이 판이하게 다른 것을, 동음동자라고 해서 일종의 가차로, 허신은 그의 <설문해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채근담>에서도 이런 예는 무수히 많은데, 바로 뒤의 2장 "박로소광"에서 (p41:3) "기계"라는 글자에서 보듯, 여기서는 그저 奇計의 의미일 뿐입니다. 신동준 선생도 이 점 분명히 밝히고 계시죠.


제 5장 "역이지언"을 보면, 이상하게도 해석에서 便把此生 어구가, 한문 원문에는 나와 있으나 한국어 해석에서, 그리고 주석에서도 빠져 있습니다.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인데요. 이 어구는,

즉, 제 목숨을 집어 들어...

라는 뜻입니다.

便은 卽입니다. "곧. 다시 말하면"으로 해석하고요.  把는 "파악"이라고할 때의 그 "파"입니다. 집다, 장악하다의 뜻입니다. "제 목숨, 제 일신을 집어 들어 짐새의 독에 빠뜨린다."이렇게 full로 새겨야 문학적 박진감이 와 닿습니다.


제 2부의 내용은 "방원"입니다. "방원方圓"이란 무엇인가. 方이란 글자는 방정方正의 방입니다. 바 르고 모가 났다는 뜻이죠. 반듯반듯한 건 구부러진 것보다 보기는 좋고, 본성상 우월합니다. 하지만 우리 말 속담에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너무 반듯한 것은 꺾이기 쉽고, 공격의 표적이 되기 쉽습니다. 사람이 타고난 재주를 연마해서, 반듯반듯한 모서리를 더욱 곧게 하고, 날카로운 지혜는 더욱 날카롭게 해서, 세상에 공리적으로 기여를 하거나, 자신의 이상을 성취하면 좋겠으나, 세상 사람들이란 그런 독주를 곱게 보지 않습니다. 아무 이익이 되지 않아도, 잘나가는 사람 딴지를 걸고 싶은 게 속마음이자 대세입니다. 세상의 풍토가 본디 이와 같다면, 군자는 그 처세를 어떻게 가져야 할까요? 여기서 두 번째 글자의 소용이 등장합니다. 圓滿입니다. 둥글둥글 사는 미덕이 필요하다는 거죠.


飛蛾投燈 : 날아다니는 부나방이 등불에 뛰어드는 것을 말합니다.

羝羊觸蕃 : 멋모르는 숫양이 울타리를 뿔로 들이받다가, 꼼짝도 못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신동준 선생은 이 두 구절을, 自繩自縛과 같다고 풀고 있습니다. 재주가 뛰어난 것만 믿고 함부로 날뛰다가, 돌이킬 수 없는 함정에 빠져 신세를 망치는 걸 빗댄 말입니다. 채근담은 이처럼 정연한 편제를 갖추고 있어서, 한 가지 제목에 유사한 내용이 점층적으로 심화되는 모습입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을 읽어 가며, 처세의 깊은 교훈을 새길 수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그 혈기방장함을 삭일 때 유용할 것이라 짐작합니다.


45장은 維摩屠劊라고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維摩는 재가의 처사로서, 부처님의 제자보다 더 깊은 도를 깨친 수행자라고 합니다. 이런 재가 불자를 처사라고 하는데, 유마는 최초의 처사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유마와, 백정인 도회는 서로 본성이 다르지 않고, 마음 속에 다 같은 부처님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시기 중국에 불교가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 알 수 있고요. 또 <채근담>이 유교 일변도의 가르침이 아닌, 오픈된 자세로 동양 정신의 진수를 다 담은 텍스트임도 짐작게 합니다.



해동의 금강(金剛)은 갈수록 기화요초가 눈을 시리게 한다고 송강은 오백 년 전 그의 가사에서 술회한 바 있습니다만, 이 신동준 선생의 채근담이야말로 갈수록 장관입니다.

옛말에 문일지십이라고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안회, 안자를 일컬어 생긴 말이죠. 그런데 한때 기업체에 몸담으셨다가 본격 저술가로 변신한 이 신동준 선생의 책을 보면, 한 권을 읽고 열 권의 지식을 쌓는 느낌입니다.


본디 주석서란, 동양 고유의 전통입니다. 앞에서도 한 번 언급했지만, 이미 전국시대에 공자의 저서(라고 알려진) <춘추>를, 좌구명이 평석을 가해 내놓은 책이 이 경전의 결정판으로 이후 내내 애독됩니다. 서양의 annotation은 4,5세기에 들어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래, 성경 주석 작업에 일류 학자들이 종사하기 시작한 것이 고작 그 유래입니다. 법학 주석은 그보다도 한참 뒤죠. 다만 채근담의 경우, 경전의 지위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출현한 시기 자체가 명대 정도밖에 되지 않으므로, 이 책 자체에 대한 주석 작업은 상대적으로 그리 활발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이 런 의미에서 신 선생의 이번 저술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석이 그저 뜻풀이나 고증적 해의에만 그쳤다면, 그것은 학문적으로는 의의가 크겠으나 같은 시대를 사는 우리 같은 일반 독자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점을 신 선생은 간파라도 하듯, 채근담의 자구 해석을 떠나 연관되는 주제에 얽힌 고사, 사화를 책 곳곳에 소개함으로써, 책의 단일 텍스트 이해를 넘어 삶의 진실, 처세의 궁극을 독자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45p를 보십시오. 무명무위, 명예도 지위도 없는 것이 최대의 기쁨이다. 이 편을 보시면, 역대 최고의 명필 중 한 분으로 꼽히는 왕안석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태위 벼 슬을 지낸 치담이라는 이에게 재색을 겸비한 딸이 있었는데, 왕씨 가문과 혼인을 맺고 싶어 당주인 왕도에게 사람을 보내었답니다. 소임을 마치고 다녀온 이에게 어느 동자가 괜찮더냐고 물으니, 이 사람 왈 "왕씨의 자제들이 모두 훌륭했으나 유독 한 도령만은 오불관언이라는 듯 배를 드러내고 침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치담은 이 말을 듣고, '내가 원한 사윗감이 바로 그 녀석이다!"며 무릎을 쳤다고 합니다. 이 기이한 처신을 한 사내아이가 바로 왕안석이었구요.


서 성이라고는 하나, 그저 글씨만 잘 썼을 뿐 아무 업적을 공직이나 학문 분야에서 남긴 바 없었으면 그의 이름이 그토록 알려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또, 그저 예쁘게 보이는 게 목적의 전부인 기술과는 달리, 그의 솜씨에는 닦은 인격이 드러나 있었기에 칭송을 받은 거겠구요. 치 담이라는 이의 안목, 감정안도 그렇습니다. 손님이 왔는데 그냥 배만 드러내고 누워 자고 있으면 상수일까요? 그건 무례함을 드러내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왕도 집안의 가풍이 어떠한지는 나머지 형제들이 단정한 몸가짐으로 손님을 맞이했다는 일에서 알 수 있습니다. 태위가 보낸 사람이면, 그 사람은 전 집안 차원의 정성이 깃든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일은 예사 가문에서, 일 년에 한 번도 채 일어나기 힘든 일입니다. 그의 방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무리 철이 없어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만 약 형제들 모두가, 손님이 오건 말건 배를 드러내고 낮잠이나 자고 있었으면, 이 집안은 혼사를 맺는 건 고사하고 이후 명문가의 사교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수모를 겪었을 것입니다. 집안의 훌륭한 분위기는 나머지 형제들이 증명했고, 그 과실은 그러나 배포 좋은 안석이 얌체처럼 영리한 한 수를 두어 따 먹은 거겠죠. 물론 천박한 "쇼"가 아니었음은 이후 그의 행실이 증명했겠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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