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지갑을 열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 적게 써도 행복해지는 소비의 비밀
엘리자베스 던, 마이클 노튼 지음, 방영호 옮김 / 알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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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을 열기 전에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과연 잔고가 얼마나 있는 상황에서 내가 이 물건을 사려 하는 건지, 더 긴급한 다른 용처가 내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닌지, 혹시 그 긴요한 지출처를 내가 잊고나 있었던 건 아닌지, 그 전에, 내가 지금 지갑을 주머니 안에 넣어 두기나 한 건지? 이런 항목들도 머리 속에서 체크해야 할 것들입니다만, 그런 일들은 일상적 의미의 "빈틈없음"에 불과합니다. 어찌 보면 요즘 같은 팍팍한 세상에, 그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행위만큼 기본적입니다. 지갑이 내 생명줄을 쥐고 있는 판에, 그런 기초마저 챙기지 않다간 생존 자체가 힘들 수도 있겠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HAPPY MONEY입니다. 돈이야 당연히 그 소지자(所持者), 소비자(消費者)에게 행복감을 안겨 주는 법인데 뭔 새삼스러운 소리인가, 하실 분도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잠 시 샛길로 빠지자면, 이 책 p62를 보세요. 지폐 사진을 보여주고 초콜릿을 제시받은 학생들은, 초콜릿 귀한[?] 줄을 모르고 한 입에 소비해 버렸다는 실험결과가 나오죠. 돈을 보여주니, 도리어 행복감을 지레 상실하는 우리들! 이로 보아, "돈 = 행복"이란 등식이 꼭 성립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건 그저 말장난이구요. 리뷰의 본론에서 상세히 논하겠습니다). 같은 돈이라도, 이를 어떻게 소비하느냐("무엇에" 소비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에 따라, 그 결과와 만족도가 천차만별로 갈린다는 게 이 책의 핵심논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의 내용은 "How Can We Make Money Happier?"를 가르쳐 준다고도 하겠습니다.


예전에 인촌 김성수의 부친(호남, 아니 전국에서 일등가는 지주였죠)은 자제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돈을 벌어들이는 일에 귀재였으나, 너는 그 돈을 참으로 멋지게 쓸 줄 아는 재능이 있구나!" 돈은 물론 뜻깊게 쓸 줄도 알아야만 합니다만, 순전히 이기적인 관점에서도, 같은 액수를 가지고서 최대한의 쾌감이 느껴지게 소비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죠? 돈은 그저 부지런만 떤다고 들인 노력과 시간에 비례해서 벌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어찌 보면 사람마다 돈 버는 고유의 능력은 한계가 미리 정해져 있으니(씁쓸한 말이지만 이게 현실입니다. 물론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부단히 자기계발에 힘써야 하지만, 어떤 근본의 벽을 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고정된 수입으로, 가장 행복해지고 쾌감이 극대로 치솟는 소비를 할 필요, 아니 의무가 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행복해지기"야말로 모두의 지상(至上) 미션이니까요.


이 책의 제 1장은 "체험을 구매하라" 입니다. 뭔 말인가 하실 겁니다. 이 명제를 분명히 정리하면, "물건을 사지 말고, 그 돈으로 (효용이 더 오래 가는) 체험을 사라."는 말입니다. 물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즐거움과 기쁨이 서서히 감소하여, 나중에는 남은 효용이 0에 가까워집니다. 이거 무조건 동의해야 하는 진리 아닐까요? 당장 저만 해도, 책 지르고 나서 그 쾌감, 그리고 택배 배송이 이뤄지기 직전의 그 설렘, 개봉시의 그 행복감은 어디 비길 데가 없습니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고 구석에서 먼지를 머리에 얺어가는 녀석들을 바라보십시오. 내가 언제 쟤들에게 그토록 설레었던가? 이럴 게 아니라, 커뮤니티에서 책나눔이나 벌여 인기나 모으면 차라리 기분이 좋아질듯? 하는 심리가 자연스럽게 일어날 겁니다. 아무 실속 없을 것만 같은 책나눔이 카페에서 그리 자주 일어나는 게 다 이런 배경이 작용합니다. 책나눔을 하는 분은, "이미 효용이 다한 책들"을 (무상)처분하면서, 대신 공짜로 이웃의 뿌듯한 정을 얻는 겁니다. 이게 바로 "물건이 아니라 체험을 사라"는 저자의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p47 에 나오는 구글의 예를 보십시오, 상여금 지급의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은 듯해서 코스타리카 여행의 인센티브를 실시했더니, 애사심 단결무드도 더 확고해지고 직원 개인의 만족도도 더 높더라는 겁니다(역시 구글은 이런 점, 즉 인사관리의 세세한 부분에서도 앞서가는 구나 싶었어요). p50 을 보면, 같은 티켓으로 총쏘기 체험이나 물건 뽑기냐를 선택할 수 있는 아이들의 예가 나옵니다. 전자를 고른 애들은, 같은 시간 동안 즐겨도 그 기쁨이 오래 가고 강렬해서, 같은 돈을 써도 더 큰 행복을 맛봅니다. 하지만 후자를 고른 애들은, 마약 중독자처럼(이 책에 나오는 스트로애스너 심리학 박사의 표현) 지속적으로 같은 구매를 행하지만, 도무지 만족할 줄을 모르고 그저 돈만 갖다 버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건 우리의 개인적 체험에 비추어도 맞는 말입니다. 같은 돈이면 상품이 아니라, 추억을 사야 합니다! 왜 우리는 대학 재학 중 동료, 선배들과의 MT 에 그토록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 애썼을까요? 공부하기도 바빴던 중고딩 시절 똑같이 철없는 친구들과 어울려 "추억만들기" 놀이에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가 뭘까요? 추억은 "재활용"이 가능합니다. 머리 속에 넣었다 아무리 자주 빼서 돌려도, 그 효용이 덜하질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은 간사한 동물이라, 실상보다 몇 배는 부풀려 그 기억을 행복한 것으로 조작하기까지 합니다(이른바 무드셀라 증후군). 백 원을 내고, 십만 원으로, 아니 가격 책정이 불가한 희소품으로 만드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이런 건 남한테 해를 끼치지도 않습니다. 반면 내가 오늘 당장 페라리를 샀다고 해도, 15년 지난 후에 과연 그 녀석이 어떤 쾌감과 긍지를 나에게 안겨 줄까요? 예전 어느 교수님이 하 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1년 끌어봐, 뭐라도 그냥 구루마야." 제아무리 영품이라도 감각상각의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추억은 이와 달라서, 15년의 세월이면 거꾸로 최고 우대의 복리 이자를 우리에게 안겨 줍니다. 아니, 익스포넨셜 함수로는 그 표현이 불가할 것입니다. 에 리히 프롬의 "소유나 삶이냐"는 유명한 명제(그리고 책 제목)도 생각이 나네요. 소유는 그저 일시적인 쾌감을 불러 올 뿐, 그것이 준 기만적인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이 장의 제목은, "물건이 아닌 생, 존재를 구매하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2장의 제목은 "특별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사 실 조금 추상적이라는 느낌도 듭니다만, 핵심은 그겁니다. 자주 소비하지 말고, 드물게 소비하여 매번 그 음미, 향유의 순간을 특별하게 만들라는 의미입니다. 이 내용은 앞 1장의 내용과도 한 줄기 맥락이 닿습니다. 인간은 결국 기억의 동물이라서, 기억의 조작(좀 삭막한 말입니다만)을 통해, 똑같은 조건이라도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게 대전제였는데요. 저자(들)은 이른바 cheerometer, 활기 온도계라는 개념을 써서, 자연계의 수은 같은 물질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우리 인간만의 특수 기제를 최대한 활용하라는 주문을 합니다. 바깥의 추운 날씨에 호되게 시달리다 온 수은주는, 실내로 들어오면 그저 25를 가리킬 뿐입니다. 수은이라는 애가, "아, 난 지금 이 기온에 감사하고 있어." 같은 느낌을 가질 리가 없습니다. 그냥 리셋과 적응을 반복하다, 수명이 다하면 폐기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다릅니다. 추위에 시달리며 바깥을 헤매다 맛본 25℃ 는, 예전 그 안온한 시절의 당연한 소비 대상이었던 그 흔한 여건이 아닙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축복이고, 우리는 그로부터 무한의 희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바로 "기억'이라는 회로를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물리량이나 자극에 대해서도 정반대의 기쁨, 혹은 불쾌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죠.


이 장은 특히나 재미있는 예가 많이 나옵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주인공 찰리는 가난한 탓에 10센트짜리 초콜릿을 두고 한 달을 재어 먹습니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매 bite는, 투르크의 술탄이 베어먹는 진미의 효용을 몇 배는 초과하는 지복의 순간일 것입니다. 좋은 걸 마구 써버리지 말고, 아껴서 소비하라는 겁니다. 능수능란한 안마사는 서비스의 도중에 약간의 term을 두어서, 마사지의 효용이 극대에 달하게 만듭니다. 맥 도널드의 맥립 간헐 판매 전략, TV 쇼의 중간 광고, 이 모든 게 다 마찬가지 기법입니다. 영화도 정상적인 극 전개를 인위적으로 끊고,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전환하는 수법이 다 이런 미학효과를 노린 거죠. 이어서 써버리지 말라는 겁니다. 아껴 쓰면 매번이 특별해진다는 뜻입니다.


2장 말미에는 약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복권을 구입하게 하는데, 상품을 "200달러짜리 근사한 식사"로 내걸었더니, 그렇지 않고 "그냥 현금 200달러"가 걸려 있을 때보다 더 구매자가 증가하더랍니다. 이건 경제학의 기본 상식에 반하는 내용입니다. 현금 200달러와 식사 200달러는, 전자가 후자를 확실히 "지배(dominate)"하는 선택안입니다. 전자로는 후자가 커버할 수 없는 다른 영역의 소비까지 가능하니까요. 그런데도 왜 이런 상식에 반하는 결과가 나왔을까요? 해답은 일단 저자들의 해석으로는, 물건이 아닌 체험의 가치를 우선시하는(이 책 1장의 결론) 선택 심리가 작용했고, 다음으로 프로테스탄트 문화권 특유의 분위기로, 200달러 식사를 행운의 유도가 아닌 금전 지출로 시도하는 건 이유 없는 사치라는 죄의식이 작용한다는 겁니다.(그래서, 복권의 매개가 아닌 그냥 선택의 경우라면 결과가 달랐을 거라는 게 저자들의 함의로도 읽힙니다) 마지막으로, 어차피 200달러라면 별반 그럴싸한 상품을 살 수도 없을 거라는 지레 포기하는 심리가 작용하기도 한다는 거죠. 이 결과는 상당히 논란을 유발할 패러독스가 가득한 소재인데, 책의 주제에서는 약간 이탈한 감이 있으나 여튼 흥미로운 읽을거리였습니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했다면 아마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겁니다. 


3장은 더 신선한 내용을 제시합니다. 좀 논지의 구체화가 더 이루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돈 중심 물건 중심이 아닌, 시간 중심으로 사고를 바꾸라는 겁니다. 바쁘면 행복하고, 그로 인해 통장잔고가 늘어나면 비례적 행복이 체감되어야 마땅하겠으나, 그렇지가 않고 오히려 전보다 더 행복감이 줄어든다는 게 공통적인 현대인의 고민입니다. 환승 코스의 항공편이 가져다 주는 금전적 이익은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 몇 푼을 아끼겠다고 공항 대기석에서 어리석게 시간을 내버리는 당신! 당신이 불행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돈 몇 푼을 더 쥐어주고서라도 직항로를 골라서,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십시오. 정 할 일이 없으면 개라도 끌고 나가 산책을 시키세요. 생각지도 않던 잘 통하는 이웃을 만나 즐거운 교제를 할 수도 있습니다. 돈이 아니라 시간을 사서, 그 시간으로 돈이 가져다 줄 수 없는 행복을 사라는 게 저자의 충고입니다. 맞는 말 아니겠습니까? 


4장은 돈을 먼저 내고 나중에 소비하라는 주장입니다. 지를 때의 그 쾌감은 누가 대신 설명해 줄 수 없을 만큼 짜릿하지만, 그 즐거움이란 고지서의 공포로 곧 상쇄됩니다. 이는 어쩌면 "매도 먼저 맞는 편이 낫다"는 말로 바꿔 쓸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quid pro quo, 무엇을 얻으면 하나를 내놓아야 합니다. 거저 재화를 획득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싫고 꺼려지는 체험을 앞에다 밀어넣어, 나중에 찾아올 긍정적인 요소로 그 불쾌를 잊는 선택, 전략이 현명합니다. 판매자들은 다양한 전술을 고안하여, 소비자가 과연 지출을 했는지, 그의 소중한 예산 일부가 빠져 나갔는지조차 감을 못 잡게 하는 초스피드결제 시스테을 개발했습니다. 그게 바로 이 책 p159에 나오는 "페이위드스퀘어"입니다. 너무도 빠른 순간에 결제가 이뤄져서, 사람들은 물건을 도둑질이라도 한 듯 착각하며, 결국 돈 나갔다는 상실감이 없어서 같은 물건을 또 사게 된다는 겁니다. 무서운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는 인터넷 구매의 장점도 있음을 지적합니다만, 배송 기간이 오래 걸리는 사실은, 오히려 충동구매를 막아준다는 거죠. 매장의 화려한 유혹은 별 필요도 없는 물건을 금세 사게 만드는 점에서, 인터넷 쇼핑보다 위험하다는 겁니다. 돈을 먼저 내고 나중에 소비하라! 명심해야 할 철칙이 아닐 수 없네요.


5장의 시사점은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 동양권이야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연대의 이데올로기가 일찍부터 발달해 왔지만, 서양은 어디까지나 개인에서 시작해서 개인으로 끝납니다. 타인에게 피 같은 내 돈을 기부하라? 도덕 차원이 아닌, 경제학 관점에서야 애초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했지만, 인간은 사회 속에서만 존재의 가치가 확인되는 동물입니다. 개인의 고립된 효용함수나 성취감의 산물이 아닌, 네트워크 속에서 확장된 자아의 존중을 받는 데서 오는 뿌듯함과 행복은 다른 걸로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주 관적이고 모호한 "행복"의 영역에서는, 논의의 초점이 shift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관적 긍지나 자족에 빠질 수 없는, 회사라는 집단을 단위로 두어도 결론이 같을까? 저자들은 이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결론을 제시합니다. 이긴 팀에게 개인별 상여들 지급한 경우와, 다른 팀원 동료들을 위한 지출이 의무로 붙은 상여를 지급(대신, 팀원은 형식적 배려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선물을 동료에게 해야 합니다)한 두 경우를 비교했더니, 전자가 훨씬 승률이 낮아졌다는 거죠.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서, 자신을 위해 자기가 소비하는 뻔한 인과의 사슬에서는 정해진 쾌감밖에 못 느낍니다. 대신 남에게 선물을 받으면, 설사 비슷한 비용을 지출하여 답례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서로간에 남아 있는 순효용은 그저 개별 구입, 지출을 했을 때보다 더 크다는 말이죠. 한중일에서 부조 문화가 그리발달한 것도 다 이런 앞선 지혜를 미리 터득한 이유가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게 좀 심해서 잔머리를 굴리다보니 더 불쾌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여튼 서구의 과학이 이 점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 대목이었습니다.


만사는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같은 씀씀이라도 쓰는 방법과 절차를 바꾸어서, 몇 배의 기쁨을 누리는 게 가능하다는 희망적인 결론을 이 책으로부터 받는다면, 그런 우리가 현명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방영호 선생의 번역이 참으로 매끄러웠다는 점 첨언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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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노예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9
미셸 오스트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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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공쿠르상 수상작입니다. 과연 듣던 대로 미셸 오스트의 개성과 깊이가 물씬 묻어나는, 페이지를 쉬이 넘기기가 삼가지는, 축축하면서도 속이 꽉 찬 내러티브네요. 이름만 보고 착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던데, 이분은 이 작품을 쓸 때 44세였고, 지금은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할아버지입니다. 최근에는 작품 활동이 뜸해진 걸로 압니다.


내용은 다들 아시는 대로입니다. 주인공은 자신도 여러 차례 강조하듯, 유한 계급 출신의 사실상 기생 생활자입니다. 스 스로에 대해 확신이 결여되었고, 가족과 친지들과의 관계도 원만치 못합니다. 비전도 희망도 먼 과거에 버려둔지 오래이며, 다만 자신이 보유한 다양한 종류의 결핍에 대한 모호한 보상심리, 혹은 모친과의 껄끄러운 관계에 대한 일종의 타협안으로, 폴라라는 여인(시를 쓴다고는 하나 재능도 충분치 않고 대외적으로 확고히 인정 받은 직업이 못 됩니다)과 교제하는 게 유일한 타인과의 소통 창구입니다. 거리의 지나가는 여인들을 두고, 마치 자신의 의지가 작용이라도 해서 거리가 멀어지는 양 자발적 착각을 통해 모종의 쾌감을 느낄 만큼, 염세적이고 퇴행적인 자아의 소유자죠.


주인공은 유년기의 교육, 정서의 건전한 발달, 성취감정, 자아통합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장애성 결핍에 시달리는 유형이지만, 이에는 중요한 세 가지 원인이 작용한 바 있습니다. 1) 부친 상실(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처음엔요) 2) 모친으로부터의 애정 거부 경험 3) 별 가치 없는 불장난으로서 맞이한 첫사랑의 (그나마) 좌절, 이 세 가지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트라우마로 작용하는 듯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말투만 들어서 청소년이나 미숙한 청년 정도인가 했으나, 어느 자리에서건 경칭을 들을 만한 장년의 나이입니다. 외부에서 보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며, 다행인 것은 그 자신도 이걸 잘 안다는 점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소식을 알고, 상봉을 원한 건 딱히 현실 타개의 의욕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듯, 모든 문제가 거기서부터 잘못되었겠거니 하는 막연한 치유 욕구에서이죠. 주인공의 자아는 그만큼 병든 상태이며, 우리 독자는 이런 매력 없는 캐릭터로부터 멀찌감치 거리를 유지하게 됩니다. 동정할 건 없습니다. 그도 그걸 원할 테니까요. 아무튼 이 점에서, 저는 역자의 이른바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그리고 미궁에의 유비"에는 격하게 반대하는 편입니다(역자 후기 참조). 테세우스는 이 필립과 정반대의 스탠스라고 봐야죠. 신화에서의 그 demigod는, 고귀한 출생이었으나 나면서부터 그 모든 세속의 혜택을 상실했고, 모든 것을 회복하는 그 순간 죽음으로부터의 도전장을 받았으며,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해 가망없는 모험에 모든 것을 건 말 그대로의 영웅이었습니다. 반면 필립은 뭡니까.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이 테세우스의 사항별 대척형이라고 봐도 되죠. 그가 아버지를 찾아 떠난 건 자아의 환골 탈태나 주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게 아니라, 그저 찌질하게 응석을 부리고 싶은 이유밖에 없었습니다. 부친을 찾아 떠나는 여행도 그 가망이 없었던 게, 이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 형성에 원초적 장애가 있는 유형이니까요. 대상이 친부라고 해서 결과가 크게 다르지도 않았을 테며 그 결말도 과연, 끝까지 읽은 우리가 아는 대로입니다.


과연 이 소설에서 폴라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영웅 테세우스의 자아 완결, 세상의 구원 오디세이에 동참한 순교자였습니다. 저는 이 소설에서 폴라가 맡은 역할은, 유혹적이지도 않으면서 안온한 중독으로 사람을 꾀어서는, 결국 극한의 회의와 환멸을 부르는 현실 절충적 키르케에 가깝다고 봅니다. 아니, 필립에게는 오뒷세우스를 억류했던 바로 그 고혹적 마녀로 다가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키하나 노인의 눈에 푸줏간 딸 둘시네아가 공주처럼 보였듯이요. 가망 없는 난관을 타개하게 도와주는 마돈나는커녕, 그나마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던 낙오자의 삶에 최종의 관 뚜껑을 덮어 못질해 주는 악질의 마녀라고나 해야 합당하겠습니다.


아무런 생기도 존재 이유도 없는 잉여의 인생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소설의 주인공 필립은 과연 뭘 상징하고 있는 걸까요? 저는 2차 대전 이후 자존감의 근원, 재생의 활기, 하다못해 유구한 역사의 상속자로서의 긍지, 이 모든 걸 상실한 프랑스 자체라고 봅니다. 이런 소설에 왜 그토록 자주, "게르만"에 대한 적대감이 등장하며, 또 "유태인"이라는 민감한 코드와 "배경"이 자주 제시되어야 했던 걸까요? 제가 생각하는 답은, 2차 대전 이후 외부의 도움을 받아 침략자의 점령으로부터 벗어나긴 했으나, "위대한 조국"의 이상상에 걸맞는 정체감을 여전히 회복 못 하고 표류하는, 프랑스 자체를 표상하는 캐릭터가 바로 이 필립이라고 봅니다. 소설에서 우울한 나르시즘의 보조관념으로 자주 쓰이는 여성화된 도시 파리의 무게가 바로 그 예증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Grand Nation의 심장 노릇을 했던 그 고색창연한 수도, 그 사소한 풍경이나 개성 하나도 거주자, 시민, 국민인 그(필립보다는 차라리 작가 오스트라고 하겠습니다. 이 소설에서 화자는 분명 "나", 즉 필립이지만, 그 자학적이고 음울한 말투는 제 3의 전지적 존재로부터 일종의 필터링을 거치는 듯만 합니다)의 눈에 허투루 지나칠 수 없습니다. 파리가 당하는 굴욕은 프랑스의 굴욕이고, 그녀의 조신하지 못한 거동은 곧 육각형 조국이 내비치는 부정함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짙은 우수와 비관으로 묘사되는 파리의 정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만, 바로 그 점 역시 작품의 전 설정이 프랑스 역사의 대유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부분이기도 하죠. 본디 프랑스어에서 valet은, "노예"같은 강한 뜻이 아닙니다(호텔 등에서의 "발렛 파킹"이 뭐라고 생각하세요?).그저 "시종"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이 작품에서는, 말 그대로 "노예"의 의미가 실감납니다. "밤la nuit"이란 무엇인가. 치욕과 모멸을 원인으로 한 자폐의 대유겠죠.


현실이 못마땅하고, 먹고 살 만한 여유는 있으나 왠지 수치심이 느껴집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없고, 바로 응보의 파멸이 자신의 운명을 방문할 것만 같은 불안을 못 떨칩니다. 내가 지금은 이처럼 초라한 존재지만, 나의 부친은 멋지고 존경 받을 만한 위인이 아니었을까? 못난 후손은 과거의 (가상적) 영광에 기대며 힘들고 지친 자아을 지탱합니다. 그냥 그대로 덮어도 좋은데, 현실이 못 견딜 만큼 괴로운지라 막판에 몰린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 안 보느니만도 못한 환멸입니다. 나의 근원, 나의 과거 역시, 현재의 자아와 하나 다를 바 없이 초라하고 추악했습니다. 폴라의 부친은 파티 석상에서, 서로 속이고 불신하는 모세와 아브라함의 농담을 들려 주죠. 폴라의 부친이 필립에게 들려 주는 그 자랑스러운 (부친의)무용담에는, 이미 사기와 과장의 복선이 깔려 있었던 겁니다. 그는 말 중에 이런 의미심장한 한 자락을 깔아 둡니다. "저항도 좋지만,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지나 정확히 알고 살았어야 했는데,..." 레지스탕스의 신화는, 샤를 에바리스테라는 거창한 이름(수학자 갈로아의 이름에서 땄다고 하죠?)을 단 아버지의 그 처참한 몰골에서 역력히 붕괴하고 맙니다. 레지스탕스는 무슨. 처음부터 우세한 전력과 부(富)를 두고 마지노선에서 패퇴하질 말았어야죠. 이 엉큼한 유태인 족속들은, 그 모든 사정을 알고도 더 참담한 침잠을 유발하느라고, 가증스런 극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던 거죠. 물론 유태인을 그리 노골적으로 악하게 묘사하면 "법"에 걸리므로, 그 정도로 돌리고 또 돌려 말합니다.


오스트의 문장은 파리 최고의 멋쟁이가 부리는 세련의 극치요, 동시에 데카당스의 퇴폐 그 극한입니다. p192의 "주름살이 여자를 절단하듯 물결은 도시의 동체를 절단한다." 같은 걸 보세요. 대단히 감각적인 표현이죠. 일단 저 문장의 전단에서, 여자를 "절단"하는 게 주름살이란 언사에 정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자의 경우,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신분의 남자의 얼굴에 설득력있게 이리 저리 획을 그은 주름살이란 정말 멋져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주름살은, 가장 화사한 미소를 지을 때 눈가, 입가에 살짝 생기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에게 연민과 비애(최소한 그렇다는 겁니다. 대부분은 불쾌감과 역겨움을 자아낼 때도 있습니다)를 유발합니다. 그 타당성은 그렇다치고, 후단의 "도시 동체 절단" 운운은 뭘까요? 원문을 찾아 보지는 않았으나, 여기서의 물결이란 도시에 생명력을 공급하는 강줄기가 아니라, 마치 채만식의 맥락에서 그 "탁류" 같은 걸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바로 그 뒤에 작가의 의도가 더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심상 간의 비례식이 확실히 완성되죠.

이처럼 문장이란, 단지 기계적 의미를 전달함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무수한 심상의 연속이요, 나아가 자아와 세계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도구이며, 어쩌면 문학의 본체적 요소일지도 모릅니다. 어리석고 둔한 머리에서 생산되는 그 생각이 짧으면 말도 덩달아 짧을수밖에 없고, 말이 짧다고 해서 허위와 군더더기가 없는 정신의 건강성을 보증하는 건 전혀 아니라고 봐야 겠죠. 이를 간결한 표현으로 절제된 의지와 정갈한 상념을 전달하는 양 호도, 위장하는 것은 오히려 (예컨대 헤밍웨이 같은) 간결체를 즐겨 구사한 대문호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미셸 오스트의 예에서, 산문이 시가 되고, 화사한 문장이 깊이 있는 사색으로 전화하는 좋은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어요. 어리석고 열등감에 가득찬 낙오의 인생은, 극히 제한된 자신만의 오타쿠적 미니어처 밀실에서 세상이 시작하고 끝나는 줄 알지만, 아니 우기는 중이지만, 그런 자에게도 잔혹한 각성의 순간은 찾아 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펜을 향하고 펜을 통하여 우주를 제한된 수단으로 포착하려는 문필에의 꿈을 그 하찮은 정신으로도 꿈꾼 적이야 있겠으나, 이에 성공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냉연한 현실에서 문득문득 마무치는 자신의 모습이란,  밀가루푸대마냥 밋밋하고 초점 없이 흔해빠진 그 얼굴만큼이나 가망 없이 역력한 시궁창임을 확인할 뿐이겠죠. 풋.

p238 핑크 플로이드의 "디 아더 사이드 오브 더 문" 언급은 시대상의 반영이고, 동시에 청각 매체를 동원할 수 없는 소설의 한계상 우리가 최대한 협조하며 떠올려야 할 미장센입니다. 소설의 분위기가 잘 감이 안 잡히는 분은, 이 곡을 듣고 책을 다시 읽어 보세요. 오스트와 바로 페친 먹고 싶으실 겁니다(이 할아버지는 아마 SNS를 안 하시겠습니다만).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리고요? 차라리 "병태와 영자"라고 하시는 게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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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을 사로잡는 Why 마케팅 - 감성시대에 요구되는 마케팅 트렌드
조기선 지음 / 타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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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마케팅에 주제가 한정된 것 같지만, 내용을 통독해 보니 이 급변하는 세상이 어떤 방향과 패턴으로 그 구조를 형성해 가고 있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안목을 길러 주는 책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의 다양한 소창업자(자영업), 중소 기업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어서 비즈니스 현장의 실감을 얻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례를 책 한 권에 담을 수 있었던 건, 저자 조기선 씨가 실제로 비즈니스 스큘, 혹은 소규모 모임을 운영하고 있으므로, 자신이 관리하는 회원들의 모범 케이스를 고스란히 소개할 수 있는 입장이기 때문이죠. 두껍지도 않은 책에서 생생한 정보를 이만큼이나 많이 얻을 수 있는 점은 우리 독자로선 고마울 뿐이구요.


일단 주제부터 좀 짚어 보겠습니다. WHY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저개발의 질곡에 신음하는 나라라면 몰라도, 한국처럼 산업과 환경이 고루 잘 발달한 나라라면, 어떤 생산자나 판매자가 독점적 위치(과점이라면 모르겠지만)를 갖고 시장 지배적 위치를 제 홀로 누릴 수는 없다는 겁니다. 내가 만드는 건(특허, 실용신안 등의 법제적 제약, 혹은 권리가 따르지 않는 한) 남도 만들 수가 있고, 결국 commodity로 떨어져서 레드 오션이 되기 쉽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고, 또 익히 알려진 상식입니다. 내 제품은 이런저런 점이 좋다? 남도 얼마 후면 그 좋은 점을 다 따라합니다. 그러면 결국 개성과 장점이 사라지게 되죠. 또, 내 제품은 이 인근에서 가장 가격이 싸다? 이거 아무 소용 없습니다. 요즘처럼 정보가 흔하고 생존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가격 인하 요인은 결국 경쟁자도 다 배우고 따라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제품과 서비스가 최고의 질, 혹은 양(가격)을 자랑합니다!" 이게 바로 구시대의 마케팅 개념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파는 그 무엇(what)을 내세우는 마케팅이 아니라, "여기도 저기도 당신의 상품, 서비스에 못지 않은 우수한 것들이 널려 있는데, 왜(why) 그 경쟁자들을 젖혀 두고 당신에게서 그것을 구매해야 하는가? "를 소비자, 고객에게 납득시키는 쪽으로 발상부터가 전환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바로 저자가 말하는 why 마케팅입니다.


이 책을 읽은 분이면 누구나 흥미롭게 보셨겠습니다만, p75에 보면 와인 POP가 나와 있습니다(위사진 오른쪽). 와인의 품질과 가격을 어필하는 문구가 아닙니다. 그 숱한 명품 와인, 혹은 이름 있는 사업자를 다 마다하고, 왜 우리(그들)에게서 이 와인을 구매해야 하는지를 잘 소개해주는 좋은 예입니다(국내에서는 저 브랜드가 상당히 명품인 걸로 인식들 합니다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저사진 보시면 "방싱 질탕"이라는 이상한 표기가 있습니다. 밑에 나온 대로 뱅상 지르라댕이 정확합니다). 저자는 여기서, what이 아닌 why를 파는 아주 전형적인 마케팅의 사례를 보여줍니다. 이 사례가 실린 제 2장의 제목은 what이 아닌 why를 팔다인데요, 책 제목과도 거의 문구 일치를 보이는 이 챕터는, 이 책 내용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이 2장만 읽어도 내용의 핵심을 알 수 있습니다. 10회 주문하면 서비스 1회를 제공하는 치킨집, 이거 너무 식상합니다(이 혜택을 제공하지 않는 업소는 없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업소는, 단골 고객에게 부정기적으로(꼭 10회, 20회 등의 순번이 아니라도) 꽃과 카드를 제공한다거나, 친절한 배달 서비스로 "치킨 외의" 감동을 선사하는 시도를 합니다. "왜 당신네 가게에서 닭을 사먹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주문하는 나를 "차별화"하여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나도 그 가게의 서비스를 "특별히 알아 주면서" 애용하게 되죠. <어린 왕자>의 그 유명한 문장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 장에는 이 사례 말고도, 요즘처럼 일반 빵가게 죽어나는 프랜차이즈 제과점의 홍수 시대에, 안산 신도시에서 꿋꿋하게 지방 최고의 명소로 자리잡은 제과점의 이야기도 소개됩니다. 이 제과점의 "고객 우선, 감성 전달"의 마케팅은 그것만으로도 주목할 만하지만, 더 놀라운 건 제과점 내에서 직원을 교육하고 다루는 방식, 나아가 "기업(규모가 작아도 기업은 기업입니다)"을 경영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일반 자영업자들이 크게 반성하고 참조할 점을 시사하고 있었다는 건데요. 이 사항은 리뷰의 좀 뒷부분에서 논급하겠습니다.


사실 책의 주제와는 좀 무관한 부분이긴 합니다만, 안산 제과점의 경우는 마케팅 개념의 혁신에만 장점이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주제와는 다소 상반되는 느낌마저 듭니다만, 이 제과점의 경우 WHY에만 초점을 둔 게 아니라, WHAT에도 분명히 방점을 찍고 있는 셈입니다. 그 증거로 1)빵은 아침에만 굽는다는 고정 관념을 깨고, 현실적으로 한국 직장인들이 빵을 사가는 오후에 맞춰 구워 낸다(빵이 일용식인 서양에서나 맞는 관습이었죠. 저도 이 생각은 언제나 들었습니다) 2) 쿠폰제를 적극 활용하여 재방문을 유도한다(이는 WHY 마케팅 요소와 직접 연관이 있습니다. 기존 고객의 중시라는 대원칙에도 부합하고요) 3) 입자가 더 고운 빵가루를 사용하여, 결과적으로 더 우수한 품질의 빵을 제조해 낸다(전형적인 WHAT요소입니다). 다 시 말씀 드리지만, 책의 컨셉과는 안 맞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책의 구조미를 따지는 일이 아니죠, 죽느냐 사느냐 하는 비즈니스판에서, 같은 책에서라도 뭐 하나 유용한 정보를 더 건지면 그게 남는 장사입니다. 좋은 정보가 많아서 독자는 그저 고맙네요.


요즘 어쩌다 전철을 이용하면, "이런 사람들도 이처럼 대규모 광고를 론칭하나 싶게, 창의적이고 재기발랄한 자영업자들의 PR 실례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구체적 거명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그런데 이 책에서도, 그런 광고의 컨셉과 거의 일치하는 좋은 예를, p94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정서와 감성에 호소하는 새로운 트렌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올해 초에 필립 코틀러의 신작을 읽고, SCR(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그의 주장에 깊이 공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SCR이라는 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결국 "왜 우리 기업에서 물건과 서비스를 사셔야 하"는지, 그 이유를 납득시켜 주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이게 꼭 사회학이나 윤리학의 이슈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당신네 기업은, 내가 지속적으로 상품을 구매해야 할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당신 기업의 고객인 이유이다. 이게 바로 이 책 저자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SCR의 존재기반이 참 여러 차원에서 마련되는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 책의 본체적 컨텐츠는 1장과 2장에 있습니다. 1장은 사회의 거대한 트렌드에 대한 개관입니다. 마케팅에 아무 관심이 없더라도, 이 1장은 일독의 가치가 있습니다. 경영이라기보다는 인문의 비전을 던져 주는 바 있습니다. 혹시, 여기저기서 들어 본 이야기의 반복이다 같은 반응을 보이는 분에게라면, "세상을 좀 긍정의 시선으로 보라."는 한 마디를 던지고 싶네요. 저는 아주 유익하게 읽었거든요. 2장은 다양한 사례(어떤 건 일본의 익잼플이 아닐까 싶지만, 대체로 저자가 직접 보고 겪은 국내의 사례들입니다)가 실려 있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갑니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특이한 점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좀 다른 주제까지 다루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3장의 제목은 One&Only 회사를 만들다. 4장의 제목은 비즈니스가 요구하는 능력입니다. 이 내용들은 딱히 마케팅 관련도 아니고, 책의 핵심 컨셉과도 직접 연결사항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자가 직접 체험하고 통감한 현장의 감이 듬뿍 담겨 있어서, 어느 구석을 읽어도 도움이 된다는 점입니다. 3장의 내용은 주로 중소 규모 기업의 경영자가 참고할 내용인데요, 그 핵심은 회사의 정체성 자체를, 대체불가능한 소통의 대상으로 소비자에게 각인시키라는 게 핵심입니다. 그렇게만 놓고 보면 결국 마케팅론 아닌가 생각하시겠지만, 조직 구조 리빌딩 작업(인적 자원 관리)에 대한 많은 시사가 주된 내용이므로, 굳이 마케팅 개념으로 보자면 그 최광의적 확장이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원 앤온리의 개념은 많이들 들어 보셨을 테므로 반복하지 않습니다만, 이 책에는 가장 최근의 실제 사례가 실려 있어 역시 부담 없이 읽어 나갈 수 있다는 게 좋습니다. 읽기는 편하게 읽어도, 머리는 긴장을 시켜야 독서의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4장은 결국 이 책의 총정리 파트입니다. 앞에서 말한 WHY 컨셉과 원앤온리 아이덴티티 형성이, 얄팍한 눈가림이나 상술이 아니라, 경영자 인격 자체의 변혁과 탈바꿈이 근본 추동력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사람이 바뀌어야 스토리도 진정성 있게 생기고, 그 스토리를 체화한 직원들도 CEO의 스피릿을 잘 소화하여 손발이 척척 맞는 유기체로 재탄생이 가능하다는 요지입니다. 이 모든 주장이, 일관되게 "실제사례"라는 강력한 물증의 뒷받침이 이뤄져 있기에, 이 책은 원앤온리의 가치를 지니는 것처럼 보이네요. 좋은 책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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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만처럼 - 나일론에서 쏘아올린 섬유 강국의 신화 대한민국을 바꾼 경제거인 시리즈 8
박시온 지음, 나공묵 감수 / FKI미디어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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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KI에서 청소년을 위한 기업인 위인전을 계속 발간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번에 한화그룹 창업자 김종희씨를 다룬 전기를 읽었는데요, 이번에는 코오롱그룹 창업자 이원만씨를 주인공으로 한 이 책을 일게 되었습니다.


코오롱그룹이라고 하면 저를 포함해서 요즘 세대들은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기업의 지명도가 상당했고, 이 책에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라이벌 선경그룹이 MBC 장학퀴즈를 후원할 때 이 기업은 KBS의 다른 퀴즈프로그램(성우 배한성씨 진행)을 스폰싱했고, 1990년대초 한국이동통신이 당시 대통령 사돈 가문이었던 모 대기업으로 넘어갈 때, 017을 식별번호로 하는 이동통신 사업자 컨소시엄에 포항제철(현 포스코그룹)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현재는 많이 격차가 벌어진 상태이지만, 재계의 굴지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한, 섬유화학 분야에서 한국인의 기초 생활 품목 보급을 담당한, 국가의 기간 산업을 담당하여 오늘날의 무역대국 코리아를 일궈 내는 데에 한몫한 엄청난 기업이라는 뜻입니다.


현재는 이 코오롱그룹이, 미국 듀퐁사와의 큰 소송에 걸려 있습니다. 최첨단 소재의 특허와 미국 내 판매유통권을 두고, 기업의 생사를 건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다른 기업들이 비업무용 부동산 투기나 손쉬운 사치성, 향락성 소비재 시장의 개척에만 몰 두하여 떳떳지 못한 축재에만 몰두할 때, 코오롱 기업은 국민의 기초 생활 품목과 첨단 벤처 업종에만 역량을 전념하여, 남들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묵묵히 제 길을 걸으며 사업보국의 길을 걸어 온 거죠. 이런 걸 보면 우리 한국인은 참다운 기여와 가치를 인정하는 데에 인색하다는 생각입니다. 금전적 보상이 아니라 해도 무형의 평판이라는 대상(代償)을 고생한 이들에게 부여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러면 음지에서 명분 하나로 고생할 이가 누가 있을까 싶기만 합니다.


이 책은 그 코오롱기업의 창업주 이원만의 일대기를 다룬 내용입니다. 이원만은 1904년생이니, 김일성보다 8년 연상이고, 박정희보다 13살 더 먹은 나이였습니다. 이원만이 태어났을 무렵이면, 성숙기에 막 접어든 일본 제국주의는 10년 전 청 제국의 핵심전력을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궤멸시키면서 동아시아 핵심 지역의 이권을 여럿 확보한 상태였겠죠? 그를 발판으로, 이번에는 전세계를 무대로 하여 영국과 곳곳에서 패권 다툼을 벌이는 초열강 러시아와 한판 싸움을 막 열고 있을 때입니다. 이 전쟁에서, 역시 세계를 충격과 경악에 몰아 넣은, 대한해협에서의 극적인 해전을 계기로, 최강 러시아의 예봉을 무너뜨린 채 동아시아의 절대 강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식민지에서 출생한 이원만은, 이런 시국에서 제아무리 강단있고 의식이 투철했다고는 하나, 그의 비전과 포부를 실현하는 기반을 조선 국내에서 마련할 수는 없었습니다. 욱일승천 기세의 일본으로 건너 가서, 기술도 배우고 사업 밑천도 장만하는 길밖에 없었죠.


식민지 출신은 변변한 셋방 한 칸 얻기 어려운 상황에서, 취업은 고사하고 단단한 일자리 하나 잡기가 쉽지 않은 게 현지의 이원만 청년이 직면한 처지였습니다. 이 젊은이의 가장 빼어난 자질은, 역경에 직면해서도 목표한 바를 포기할 줄 모르는 그 불굴의 의지에 있었습니다. 그는, 받아주지 않으려 하는 일본인들의 텃세와 멸시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원하는 직장의 문을 노크하고 기어이 노른자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포스트를 따 냅니다. 아무래도 청소년전기라는 한계가 있으므로, 다 소의 미화와 비약이 없지는 않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현지의 일인들이 짐짓 취업의 문을 닫는 척 하면서, 요즘말로 3D 포스트에 전략적으로 조선인 출신을 몰아넣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원만은 expendable 신세로 떨어지지 않고, 그 회사에서 용케 핵심 기술을 배우고 또 약게 그 정수를 뽑아내어, 장래의 생존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이 놀라웠던 겁니다. 이원만은 일단 허점이 보인다 싶으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식으로 진입 장벽을 허물었고, 그 안에서 다시 힘의 한계에 부딪혔다 싶으면 살짝 잔꾀(제가 보기에는,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조선에 돌아가 큰 말썽을 만들어 당신을 곤경에 몰아 넣겠다."고 일본인을 몰아 붙인 건, 결국 대구의 지역 유지였던 친척 형 이원기의 뒷배를 의식한 점도 적지 않았다고 봅니다)도 부려 가면서, 결국은 주위 모든 이들을 설복하기에 이르렀던 거죠.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끈적한 생존 근성을 배울 필요가 있는 대목으로 생각합니다.


아무튼 어언 40대에 접어든 이원만은, 일본에서 제법 큰 성공을 거두기에 이르고(이런 경우가 아주 드문 건 아닙니다. 나이로는 이원만의 아들뻘인 롯데 창업주 신격호씨도 이런 케이스죠), 패전 직전 집중 폭격을 받았던 오사카가 폐허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원만의 자산만은 멀쩡하게 보호되는 행운이 생깁니다. 결국 전쟁은 일본의 패망으로 귀결하고, 조선 땅에는 해방이 찾아 오죠. 본디 정치를 했던 가문이기도 해서, 일본 현지에서 큰 재산을 모은 사업가라는 자랑스러운 경력도 생긴 그는 신생 조국에서 유력 정당 한민당(책에는 안 나오지만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 등이 그 설립 주체였습니다)의 공천을 받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의 다소 파격적인 언행은 선거구민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선거라기보다 테러에 가까운 험악한 분위기에 밀려 결국은 석패하기에 이르죠. 낙담한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붉은여왕의 법칙이 이 당시에도 통용되지 않은 게 아니라서, 그저 현재상태에 안주할 수 있었던 이원만이었으나, NYT에서 소개하는 최첨단 신소재에 눈이 번쩍 뜨이게 됩니다. 그게 바로 나일론이었습니다. 이에 주목한 이원만은 대 뜸 이 나일론에 손을 뻗쳐, 이미 단단한 기반의 사업은 더욱 큰 확장을 이루게 되죠. 그런데 이원만은 여기서 남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개인의 장사가 잘되는 건 좋으나, 그 과정에서 외화 유출이 많다는 게 개탄스러웠던 거죠. "저 stretch絲 하나만 우리 기술로 직조 가능해도, 아까운 달러가 출혈하는 일은 없을 것 아닌가?" 이 책에는 안 나와 있습니다만, 지금 코오롱그룹이 겪고 있는 고초도 어찌 보면 창업자의 이 고지식한 경영 이념을 고수한 결과입니다. 좀 국민들이 이런 기업에는 성원을 보내 줘야 합니다. 땅투기나 하고 설탕 밀수나 하던 악덕 사업자는 결국 "개처럼 벌어도 정승처럼 잘 쓰는" 복을 받고, 예전에도 굳이 편한 벌이 다 내팽개치고 험지에서 국가 건설의 일념으로 어렵게 사업하던 역군은 지금도 그 후손들조차 고생길에서 여전히 악전고투하는 중입니다, 이래 가지고 나라에 정의가 선다 할 수 있겠습니까?


1960년대 코오롱그룹이 한국에 나일론을 성공적으로 공급하지 못했으면, 한국인이 언제 의식주 최소의 욕구를 해결하고 빈곤선을 탈피했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도 코오롱은 그저 중소기업 레벨에 머물러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에 속지 말고,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진정한 공로자, 은인이 누구인지 좀 생각도 하면서 사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푼도 안되는 정치선동 프로파간다만 외우고 다닐 게 아니라 말이죠.

 

이 책은 같은 시리즈의 다른 권에 비해 내용이 재미있다는 게 특징이에요. 고 이원만 회장이 참 재미있는 캐릭터여서 일화가 많이 남은 이유도 있겠으나, 집필자가 필력이 빼어나서 같은 이야기라도 재미있게 구성하는 능력이 탁월한 덕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론 앞으로 이 시리즈는 이 박시온씨가 계속 맡앗으면 하는 바람도 있네요.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읽기에 재미있는 책이 대중적 보급도 수월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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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 - 어느 은둔자의 고백
리즈 무어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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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떤 평면 위에 최소한의 숫자만으로, 흔들리지 않는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는 삼발이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삼위일체의 교의를 가르쳐 왔고, 우리의 단군 신화에도 환인, 환웅, 단군의 3대가 등장합니다. 둘만으로도 외롭고, 셋이 있어 줘야 최소의 틀이 생깁니다.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는 요즘이지만, 커플만으로도 왠지 허전하고, 가족이란 모름지기 자식이라는 한 명의 성원이 더 있어 줘야 하죠.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그 원심- 구심의 상호 균형이 깨어져, 각각의 안정된 삶도 자칫 붕괴할 수 있는 위험이 생깁니다.


은둔자의 고백이라는 부제 때문에, 저는 상당히 (본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무거운 내용의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그 은둔자는, 주로 절제 못 하는 식욕 때문에, 거동도 불편하고 수치심으로 밖에도 못 나가는 딱한 처지입니다. 이런 분들은 보통 성격에 문제가 있는 수가 많고, 특히나 그간 많은 소설(특히 스릴러)에서라면, 처참하게 희생당하는 처지나, 아니면 그 반대로 가해자에 놓이는 걸 종종 봤습니다. 아니라고 해도, 결국 자기 혐오와 연민을 이기지 못하고 파멸로 치닫는다든가 하는 설정을요.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게 전개됩니다. 은둔자는 성격 이상자는 아니고, 빼어난 지성을 지니지는 못했으나, 평균을 상회하는 지성과 자기 성찰력, 교직 경력, 그리고 넉넉한 재산을 가진 중년의 캐릭터입니다. 다만 그가 굴하는 건 식욕쪽입니다. 식욕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그의 건전한 판단력과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그는 대인 접촉을 대단히 꺼리는 편이나, 이에는 대체로 자신의 감정에 대한 우려 못지 않게 타인의 감정에 대한 배려가 더 크게 작용합니다. 돈을 지불하고 가사 정리를 맡기는 출장 홈메이드 인력에조차, 그는 별스럽다 싶을 정도의 조심과 유의를 기울입니다.


그는 비대한 체구 때문에 상당한 열등감을 가지는 듯도 보이입니다. 예컨대 켈의 사진을 보고 홈메이드 욜란다가 "누구에요?"라고 묻자, "아들"이라고 대답하려는 걸 억지로 누르고 조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죠(물론 이 장면은 중반 이후로 가면서 대단한 반전의 복선이 됩니다만). "아들"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는 건 본능적 친밀감과 관계 회복에의 욕구, "조카"라고 타협적으로 수위를 낮춰 대답하는 건 상대 욜란다에 대한 배려("네 선입견을 굳이 배반하고 싶지 않아.")의 산물입니다. 욜란다는 켈보다 두 살이 많은,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아마도) 불법 이민자 출신의 혈혈단신 처녀입니다. 청소는 잘할지 모르지만, 그 외의 서비스 매너는 미숙련 인력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 취약 계층입니다. 이런 사람에까지 주인공(아서)이 순진한 애착을 보이는 건, 순전히 관계(relationship)에의 욕구, 가족 회귀 본능에 기인합니다. 그 는 욜란다를 볼 때마다, "저 아이를 입양하면 어떨까?"같은 생각을 끊임 없이 떠올립니다. 관계의 본격적 상실 이전에도 그는 비만의 징후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재앙으로 귀결한 건 사람들과의 유리가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가족, 가족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한편 저 멀리, 아서와 오래 전 잠시의 인연을 맺었으나 타향에서 살고 있는 모자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많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외국은 우리 나라와 달리 이런 예가 드문데도) 하나뿐인 아들의 교육에 강박적으로 집착합니다. 아들은 선천적으로 머리가 둔하다기보다, 이런 어머니에 대한 반작용 때문인지 공부를 싫어합니다. 대신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지역에서 촉망 받는 야구 선수였습니다. 이미 14세부터 로컬지에 이름이 나서, 인터넷에 그를 검색하면 사진이 나올 정도입니다. 결정적 시함에서 트리플 플레이(플라이아웃-3루 주자 태그아웃- 2루 주자 아웃)의 짜릿한 경험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 절대 긍지를 놓지 않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그는 언제나 스타였고, 동급 여학생들의 시선을 한몸에 모으는 주목 받는 인생이었습니다. 엄마는 이런 아들의 진학(엄마의 관심사는, 정확히 말하면 "교육"보다 "진학, 학벌"에 가깝습니다)을 위해 없는 돈을 들여 (우리식으로 말하면) 학군이 나은 동네로 이사 오지만, 그는 순탄히 적응하지 못합니다. 소년 켈(아빠 이름을 땄다는)은 언제나 어머니에 대한 불안과 불만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데, 이는 엄마에 대한 정면의 반감이라기보다,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허기가 더 크게 작용한 듯합니다.


소년의 엄마는, 존재 깊은 곳의 근원적 불안을 떨치지 못합니다. 살아오면서 받은 많은 상처와, 태생적으로 보유한 성격적 결함이, 일종의 네크로필리아로 수렴하는 모습입니다. 엄마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며 아서(은둔자 주인공)에게 오랜 인연을 환기하며 아들의 사교육을 촉탁하고, 그저 가족관계가 그리웠을 뿐이었던 아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락합니다. 사진을 보니 잘생겼고("나 같은 이에게서 이런 아들이 나올 수야 없지!"), 자동응답기에 남겨진 음성을 살짝 들어보니 생각보다 더 앳된 목소리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만나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봉사나 배려를 베풀고 싶습니다.


이 소설은 은둔자의 고백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나, 시점의 전환은 장마다 교차되고, 마지막 장에서 드디어 두 화자가 만나면서 그 통일이 이뤄집니다. 아서의 독백, 그리고 소년 켈의 독백이 번갈아 등장하는 식입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분명히 ㅗ속 집단으로부터 경원될 소지를 안고 있으면서도, 결정적 이유 하나 때문에 이른바 "왕따" 신세로 추락하지는 않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둘은 지향하는 바도 같습니다. 아서는 아들(혹은 자식)을 원하고, 켈은 아버지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소년의 어머니는? 그녀가 원하는 건 무엇이었을까요? 자식의 출세, 학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소설의 주제입니다. 소설은 일종의 비극적 결말을 예비하지만, 남은 인물들은 새로운 출발과 희망의 맹아를 보게 됩니다. 그 과실은 거저 다가오지 않고, 우리에게 나름의 부담, 즉 무게(heft)로 다가옵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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