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 경영 첫걸음, 한 장 보고서
정보근 지음 / 시간여행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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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차원에서 할 수 없는 엄청난 과업을 이룰 수 있는 단위가 바로 회사입니다. 어느 회사이든 능력 있는 인재를 채용하여, 자기 조직 안에서 최대한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려 애씁니다. 사원 역시, 조직에 대한 자신의 기여를 가장 크게 하는 방향으로 노력하게 마련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소통이겠습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그것이 내 머리 안에 머물러 있는 이상, 혹은 동료나 상사, 그 윗선에 제대로 전달이 안 되는 이상, 그것은 회사에 유의미한 기여를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소통을 위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수단, 때로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보고서입니다.

 

이 책 제목은 <스피드 경영 첫걸음, 한 장 보고서>입니다. 삼성이 한국 내 1등에서 벗어나 오늘날처럼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건, 바로 최고 경영진의 스피디한 의사 결정 덕분이었다고 말합니다. 경쟁사의 액션에 대한 대응이 느리고, 바른 전략을 세웠다 해도 그 집행이 느렸던 sony의 경우,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처럼 그 막강한 자금력과 무수한 원천기술, 압도적인 브랜드 파워를 가지고도 쇠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과거에는 "스피드"가 독자적인 가치나 미덕이 아니었습니다만, 요즘에는 "그저 빠르기만 한 것"만으로도 칭찬받거나 추구해야 할 가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현대 경영에서 속도란 그만큼 중요합니다.

 

실제로 현대와 삼성에서 오랜 동안 기획과 설계 업무에 종사한 저자 정보근 씨의 이 책은, 이미 업무에 숙련되어 많은 양의 우수 보고서를 척척 작성하는 사원에게도, 혹은 갓 입사하여 서류 작성 업무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지는 사원에게도 많은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1) 가장 모범적이고 깔끔하게 작성된 보고서의 예를 제시하여, 아직 개념이 잡히지 않은 사원들은 그냥 보고 따라만 해도 될 만큼 친절히,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책에 나온 일부 보고서는, "보고서 명예의 전당"에 올라도 될 만큼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도 보입니다.

 

2) 보고서의 작성 방법 뿐 아니라, 회사에서 요구하고 윗선으로부터 칭찬 받는 기획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은 보고서 작성 실무에 주안이 놓여 있으므로, 기획의 방법론을 다룰 여유는 없습니다. 저자는 본격적인 기획 요령에 대해 알고 싶으면 자신의 다른 책을 참고하라고 합니다.

 

3) 이런 책은 뼈대만 앙상한, 팁 위주로만 짜여진 책 아닐까 하는 선입견도 부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읽어 보니, 2차 대전 당시 미국 측에서 내려졌던 오판, 1980년대 빈센스 항모가 저지른 판단 착오(이란 민항기 격추 사고) 같은 역사적 사례, 그리고 아마 저자 자신이 재직 시절 직접 경험했던 것으로 보이는, 회사 내에서 전형적으로 벌어지곤 하는 몇몇 에피소드 들이 소개되어 있더군요. 결국 저자는, 평소부터 전략적, 전술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하는 자세를 가져야, 요령 있고 조직 전체에 도움이 되는보고서를 쓸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기초 체력이 부실한 채 정력만 좋은 사람이 없듯이, 회사 생활의 기본이 안 되어 있으면서 보고서만 잘 쓰는 사람도 없다는 걸 은근히 가르쳐 주는 셈입니다.

 

4) 종이 질이 좋고, 참고 자료가 천연색으로 인쇄되어 있습니다. 동료들과 윗사람들이 편하게 볼 수 있는 보고서를 쓰라면서, 정작 그 주장을 담은 책이 보기 불편하게 되어 있다면 그것 역시 모순이겠는데요. 이 책은 솔선수범이라도 하듯 깔끔한 편집이 돋보입니다.

 

5) 흔히 경영학 학부 커리에서 배울 게 별로 없다고도 합니다. 실무에 직접 쓰이는 것도 없고, 원론이나 인사관리에서 가르치는 건 결국 말의 성찬이고 깊이도 부족하다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정작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왜 자신이 남다른 업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지, 왜 자꾸 승진에서 밀리는지 그 바른 원인을 찾지 못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이 책을  완독하고 느낀 건, 학교 다닐 때 배운 지식과 원칙들이, 내가 일상적으로 쓰는 보고서에 다 적용되고 요긴히 쓰이고 있었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경영학 교과서에서 배운 그 모든 개념들은, 그에 대해 자신이 주관적으로 어떤 평가를 하건 간에, 자신이 작성하고 윗선에서 읽을 보고서의 기본 뼈대를 이루는 도구로서 쓰이고, 요구되고 있습니다. 공부를 안 해서 적시 적소에 용어를 구사하지 못하면, 그건 다 자신의 무능을 폭로하는 결과로 돌아올 뿐입니다. 보고서를 상시 쓰면서도 채 잊고 있던 사실을, 이 책은 당사자에게 환기해 주고 있었습니다.

 

보고서 작성 시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쓰는 나의 만족이 아니라 읽는 타인들의 효용을 먼저 염두에 두고 쓰여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미학적 쾌감이나 주관적 감상을 위한 게 아니라, 분초를 다투는 사업적 의사 결정의 토대를 이루는 자료라는 점에서, 그 작성의 원칙은 첫째도 요령이고 둘째도 요령입니다. 한눈에 척 보고, 무슨 내용인지 어떤 의사 결정을 권하는 것인지 알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 책이 말하는 "한 줄 보고서"는 바로 이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보고서가 언제나 한 장으로 쓰여져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특히 민간 섹터 대기업에서 회람과 결재를 위해 돌고 도는 보고서는 볼륨이 클 수 없습니다. 빠른 의사 결정을 한다면서 장문의 보고서가 고집스레 오간다면, 이는 이미 의사 결정 과정에서 무엇이 잘못되고 있다는 징후입니다. 한 장 보고서가 분명히 쓰일 용도가 따로 있고, 그 경우 그 한 장은 이러이러한 원칙에 의해 쓰여져야 한다는 게 이 책의 요지입니다. 소규모 기업에서 CEO 혼자 만기친람형으로 관리하는 환경에서는 보고서가 한 장일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이 책에서 들고 있는 천안함 사건이나 재해 보고의 경우, 한 장 보고서가 상황에 맞지 않게 강요되다 빚은 여러 무리한 사고 중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취지는 요령 있고 효율적인 보고서의 작성이지만, 중간중간 저자 자신의 경영관에 대한 피력도 나와 있어 흥미를 더합니다. 예를 들어, 스티브 잡스는 진정한 혁신가였는가? 부품 업체의 혁신 등 주변 환경의 덕을 적지 않게 본 사례가 아닌가 하는 평가도 나옵니다. 현장 실무에서 잔뼈가 굵은 거장의 한 마디이기에, 괜한 질시를 담은 폄하가 아니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TF(태스크 포스)의 남발, 남설이 조직을 망친다는 충고도 쉬이 넘길 고언이 아닙니다. 얇은 볼륨에 뭐 하나 버릴 것 없는 알찬 내용이지만, 특히 마지막 부분 part 5를 보면 실무자 입장에서 입이 딱 벌어질 만합니다. 위로부터 사랑 받는 직원이 되는 비결이 여기 다 있었다고 하겠네요.

 

오타가 몇 있었습니다.

p32: 밑에서 세번째
쓰야 -> 써야

p64: 2 늦으도 -> 늦어도

p94: 밑에서 여덟 번째
자괴감을 마저 든다 -> 자괴감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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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진설 - 근황 인문학 수프 시리즈 6
양선규 지음 / 작가와비평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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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작가들이 이처럼 깊이 있고 문장의 맛도 은근한 본격 수상록을 잘 내어 놓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냥 단편적인 주장만 내 놓거나, 독자의 편의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단문, 구호로만 채워진 글을 쓴다거나, 그도 아니면 정치색 강한 목적성 위주의 글을 쓰거나.... 자기 개성도 뚜렷이 나타내면서, 독자가 그를 통해 은근 곱씹고 배울 구석도 많고, 문학적 향취도 짙게 배어나는 글은 좀처럼 만나기 힘듭니다.

 

저는 작가님의 전작을 한 권도 읽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따로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에 동의를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이런 본격 수상록을 만나기 힘든 요즘, 한 권도 아니고 지금까지 어떤 일관된 컨셉 아래 여러 권이 시리즈로 나왔다는 자체가 고마웠다고나 할까요. 어떤 챕터는 내용이 어렵고, 어떤 장은 다들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괜히 늘려 이야기하시는 느낌도 있었고, 어떤 대목에서 털어 놓는 (작가님 자신의) 취향이나 소신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인 독후 소감은, 믿음직하고 품격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정도였습니다.

 

남자는 얼굴을 보고 여자는 옷을 본다. 여자 얼굴만 따지는 게 남자의 본성이라는 게 우리의 상식이긴 하죠. 그러나 이런 말은, 중립적 입장에서 진술되어야 신뢰가 가는 법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성(性)의 중립지대는 있을 수 없으니, 이 역할은 많이 배우고 수양이 쌓여 색에 흔들리지 않는 남자가 이야기하면 무난한 타협이 되지 싶습니다. 여자 얼굴 어지간히 안 본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님 같은 분이 이야기를 해야 말이 먹히지 싶은데, 작가님은 소싯적에 본 홍콩 영화의 어느 묘하게 생긴(생겼던) 주연배우를 좋아하신다 하니 이는 얼굴을 안 보는 게 아니라 취향이 독특하신 게 아닌가 독자로선 생각이 들더군요. 검색을 해 보니 한국에서 그 특정 배우가 인기를 끌 때 여고생들의 반응이 특히 유별났다고는 하나, 그 또래 남자아이들 사이에선 딱히 열광의 분위기가 없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불안의 대상화. 작가님의 태도에 의하면, 불안이란 전적으로 이를 느끼는 주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교란의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불안을 제거하거나 치유할 때, 밖에서 원인을 찾으면 안 됩니다. 나의 덜 익고 상처난 내면을 다스리는 게 순서입니다. 그런데 나의 결함은 인정하기 싫으니 특정 대상을 지목해 이를 타자화하는 것, 이게 작금의 세태를 지배하는 악습이다, 대충 이런 식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불안의 유형이 따라,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대응 방법과 처방전이 다르지 않을까도 생각됩니다.

 

소통이란 무엇인가. 작가님이 하신 말 중 "요즘 소통은 그 자체로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다기보다, 오히려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매도하기 위한 명분, 트집으로 자주 악용되는 듯하다"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저 사람은 불통이야!"란 단정은, 이유가 제시되지 않으면 그건 객관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불통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지 타인에게 있는지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단죄는 그저 일방적일 뿐 아니라, 오히려 건강한 소통을 방해하기까지 합니다. 조선 시대의 "역적 고변"에 빗댄 건 그런 의미에서 참 적절했습니다. 거사는 본디 성공하면 충신이요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게 고정 훌이었으니까요.

 

소설의 기원을 설명할 때 자주 거론되는 어구가 이 "소가진설"이라고 합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작가님의 깊이 있고 진득한 이야기에 잔뜩 취하기는 했으나, 제목과 제가 감상한 책의 내용이 얼마나 부합했는지는 잘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건 책을 쓰신 작가의 의도를 제가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도 되겠습니다만, 반대로 "인문학 수프"를 들고 나오신 이 책의 컨셉 그 하위 섹터까지 일일이 동의를 보낼 필요는 없겠다는 독자로서의 의식적인 자각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명인의 레시피도 교조가 꼭 될 수는 없고, 다만 여러 사람을 감동시키거나 훌륭한 참고가 되는 정도라고 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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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소녀
미셸 뷔시 지음, 임명주 옮김 / 달콤한책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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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비밀"은 정말 진부한 소재입니다. 지금까지 이 흔한 소재를 두고서 너무도 많은 소설, 오페라, 영화, 그리고 막장드라마 들이 나왔기 때문에, 어떤 작품이 이런 테마를 품었다면 그로부터는 아무것도 새로운 걸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결말까지 다 읽고 나면, 처에 막연히 가졌던 기대(그러나 이 기대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거나, 혹은 진상이 드러난다면 상당히 독자의 기분이 좋지 못할 그런 기대)가 다 배신당하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최소한 세 번에 걸쳐 독자는 소위 "반전"을 구경하게 됩니다. 이런 미스터리물을 읽는 보람 중 상당한 비중은 그런 "반전"이 주는 쾌감을 맛보는 데에 있기 때문(최소한 저는요)에, 솔직히 이것만으로도 투자한 시간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독자가, 그런 착각에 가까웠던, 그리고 불쾌했던, 기대를 형성했던 , 작가의 서술 트릭 때문이었습니다. 책에서 크레줄 탐정에게 접근해 와서 결정적인 힌트를 주었던 아마츄어 사기꾼(그러나 나중에 모두 진실을 말한 것으로 밝혀지는)의 손재주처럼, 다 알면서도 속아 주고, 다시 의외의 통쾌함을 맛보는 결말을 기대하는 게 우리 독자들이기에, 그러나 이런 트릭은 불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속아 줄 용의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곱씹어 보면, 결국 작가가 불공평하게 차려 놓은 테이블을 두고 마지막에 자기가 엎었을 뿐이라는 식으로 독자가 제 맘 편하게 정리하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영어에서 "파멸"이라는 의미로 undoing이란 게 있습니다. 작가가 마지막에 마련해 놓고 있는 결말은, 결국 지금까지 픽션 안에 차려 놓았던 모든 설정과 (비도덕적) 발전을, 스스로 다 취소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일단 1) 그 영리한 솜씨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고 2) 그렇게 취소된 모든 전개가 빚어내는 그 모든 도덕적 마무리에 대해, 후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스테리의 정교한 창조에도 감탄하게 되지만, 사실 빼어난 점은 그뿐이 아닙니다. 작가는 은근 보편의 상식이나 도덕감정에 반하는(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불편한 진실로 판명되는) 단정을 소설 곳곳에서 늘어 놓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독자는, 쓴 입맛을 다시면서 그 당부를 판단하고, 다시 큰 불편을 느끼며 말없이 수긍하게 됩니다. ("어쩌겠어, 현실이 그러니....") 이처럼 어두워진 마음을, 충격적 반전(이는 기술적 빼어남입니다)과 함깨, 다시 도덕과 상식의 승리를 알려 주며, "병 주고 약 주는" 솜씨로 어루만지는 게 작가의 기특한 수습(이는 마음이 착해서입니다^)에 우리는 두 겹으로 쾌감을 얻게 됩니다.

 

비행기 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고 알려진 아기를 놓고, 거의 빈민에 가까운 부부와, 유럽에서 첫손에 꼽히는 갑부- 귀족 집안의 부부가, 서로 조부모의 자격을 주장하며 데려가겼다고 법정 싸움을 벌입니다.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비행기 사고에서 아기가 살아 남은 것도 기적인데, 이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혈연이라며 다투는 가족들까지 등장했으니, 매스 미디어가 온 신경을 집중할 세기의 특종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한쪽은 유럽에서, 그 성취한 부(富)와 명성으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냉혈한이자 사업가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능숙한 승부사라기보다, 자본주의(특히 언론 자본과 흡혈귀 변호사들)의 콜드 블러드에 놀아나는 꼭두각시, 그리고 장난꾸러기 신의 농간 앞에 속수무책인 졸(卒)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이 책에는 공교롭게도 "끈 떨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는 표현도 나오더군요).

 

저는 이 작품에서, 귀족의 피를 이어 받은, 진정 냉정한 사업가인 마틸다 노부인에게 가장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결국 적임자(아!)에게 일을 맡겨서, (비록 큰 희생을 치르기는 했으나) 여튼 사건의 진상만큼은 제대로 알아 내고 만 것입니다. 소설을 다 읽은 분은 알겠지만, 그녀는 자신과 남편이 저지른 그 무수한 mess도 다 치우고 무대에서 퇴장했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그녀 역시 완전히는 몰랐던 탓에, 젊은이(전적으로 무고한)에 게 마음의 상처를 좀 안기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보인 능숙하고 현명한 처신 역시 감탄을 자아내게 하더군요. 거의 동년배인 니콜(출신은 천하나 결코 만만치 않는 depth를 지녔던)과 보이는 정신적 승부도 볼 만합니다. 반면 남편은, 그처럼이나 사업에서 놀라운 수완을 보였지만(아내 가문이 보유한 재산만으로는 그런 權貴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한번 마음이 흔들리자 걷잡을 수 없는 추락과 동요를 보이고,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게 바로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자와, 한순간에 벼락 출세한 자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미스터리물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캐릭터의 섬세한 설정이 빛나는 대목이었습니다.

 

앞서 제가 1) 작가의 서술 트릭 2) 결말에서 스스로 차린 모든 상을 스스로 엎는 태도에 약간의 불만을 표현했지만, 지금 리뷰를 쓰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작가는 제법 "위험한 수준"의 힌트를 작품 중에서 이미 주고도 있었습니다(지금 생각이 나네요). 재미도 있으면서, 공정하면서, 도덕적 쾌감까지 안겨 주는 스릴러를 오랜만에 읽은 것 같습니다. 어 리고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치명적인 사랑에 빠지다 파멸적인 파국으로 몇 발 디뎌 나가다 결국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되고, 사악한 탐욕의 손길과 시선이 그들을 뒤에서 엿보며, 그 뒤에는, 세상을 통째로 바꾸진 못하지만, 몇 사람의 인생은 근본에서부터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무서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는 이야기, 이야기들, 아주 진부해서 뭐 하나 기대될 여지가 없을 만큼 통속적인데, 이처럼 새롭고 재미있는 사연을 큰 스케일로 꾸려낸 게 신기했습니다. 다만 예컨대 나짐의 애인이 터키 반체제 운동가의 딸(그래서 프랑스에 흘러들어옴)이라든가, 마르크의 고향을 "공산주의자의 도시"로 꾸려 놓은 건, 공연히 시대적 무게 같은 걸 소설에 덧입히려는 의도 외에 별 필연성이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자면, 우리말 제목 번역이 기가 막히다는 점이어요. 원제와눈 전혀 무관한 표현인데, 오히려 작품의 가치와 함의, 분위기를 더 잘 전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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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국새를 삼켰는가 - 우리가 모르는 대한민국 4대 국새의 비밀
조정진 지음 / 글로세움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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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착잡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국민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곳은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 기관인 사법부입니다. 사법부의 정치적 독립은 그래서 헌법의 보장 사항이며, 재판에는 그 어떤 외부의 압력이나 간여(干與)가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는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건이 관심의 초점에 놓일 때는 반짝 열을 내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일도 있었나?"하며 까맣게 잊고 마는 게 우리 대중들의 큰 문제입니다. 저 역시, "국새 사기 사건"이라고 해서 한때 신문, 방송에서 크게 다뤘던 건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그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범인"의 근황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주지 않았고, 따라서 아는 바도 거의 없다시피했습니다.

 

인터넷 포털에서 검색을 해 보니, 그런 저의 무지도 크게 책잡힐 일은 아니더군요. "범인으로 지목된" 민홍규씨가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까지만 언론이 다루고 있었습니다. 이게 2011년 말의 일입니다. 그 이후에는 언론이건 대중들이건 관심사에서 멀어진 게 이 사건입니다. 솔직히 저는, 사건 발생 당시에도 "그런가 보다"하는 정도로 넘어갔기 때문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갖가지 팩트들(이 책에서 주장하기론 말이죠)이 아주 상세한 디테일을 적어 놓고 있어도, "아 내가 알던 것과 이렇게나 달랐구나."하는 충격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죠.

 

책을 제가 너무 쉽게 넘기는 것 같아서, 긴장감을 주려고 인터넷에서 수시로 기사를 검색했습니다. 당시 신문, 방송에서 보도된 내용을 대충 읽어 보니, 이슈는 크게 네 가지더군요. 1) 민씨가 금을 횡령했다. 2) 이 국새제작단 단장으로 선임되기 전에, 정계에 로비를 했다(자신이 만든 금 도장을 뿌리고 다님) 3) 민씨는 전통 국새 제작 기법을 지니고 있지 못한 무자격자다. 4) 국새에 자기 이름을 슬쩍 새겨 넣었다. 여기에, "국민 앞에 사죄한다."는 본인 자신의 기자 회견 내용까지 크게, 그의 사진과 함께 기사화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평균적인 한국인으로서 뭐 주저 없이 사람 하나 매장시키는 대열에 동참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좀 사전 지식을 갖추고 나서 이 책을 읽으니까, 내용이 머리에 더 잘 들어오더군요. 올바르고 그르고를 판단하는데, 지식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가? 물론이죠. 오히려 그게 이런 책의 취지이기도 합니다. 저자들이 재판부와 검찰, 경찰을 비판하는 이유는, 민씨를 유죄로 보기 힘든 강력한 반증, 정황들이 여럿 존재했고, 변호인들이 증거로 제출하기까지 했는데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묵살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또, 검찰 측의 증거, 증인들에 대해, 상당한 정도로 그 신빙성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애써서 믿고 또 믿어 준 끝에 민씨를 유죄로 몰아갔다는 그 점을 계속 지적하고 있습니다. 과연 민홍규씨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이를 판단함에 있어 사실 문제, 객관적 팩트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없습니다. 판사를 비판하려면, 우리 독자들은 그 판사보다 더 객관적이고 더 공정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한쪽 말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책 한 권 읽고 한쪽 말만 듣는 사람은, 나중에 읽은 다른 책(혹은 시청한 방송)이 다른 말을 하면, 언제 그랬더냐는 듯 금방 입장을 바꿀 것입니다.

 

1) 금 횡령에 대해서는, 이 책의 주장에 의하면 검찰 공소장에서 모두 빠졌다고 합니다. 아무리 책이 한쪽 입장만을 대변한다고 해도, 이런 기초적 사실을 왜곡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시간이 없어 판결문을 찾아 보지는 못했지만, 일단 책의 내용만으로도 금 횡령 건은 사실 무근에 가까운 것 같더군요. 책은 오히려 민씨가 사비(私費)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만약 이 부분 횡령죄가 기소 대상이되었으면, 당연히 재판 과정에서 배척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혐의의 인정에까지 간접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사실이라면,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갸륵한 일이겠습니까.

 

2) 인터넷에서 기사를 검색하면, 실제로 몇몇 정치인들이 민씨로부터 도장을 받은 사실을 "시인"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일반인 수준에서는, 이 정도면 게임 끝으로 판단합니다. "뇌물"을 받은 사람이 스스로 받았다고 하는데, 무슨 발뺌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책의 내용은 다릅니다. 정동영 씨 등이 "도장을 받았으나, 대금으로 50만원을 주었다."고 말한 게 정확한 내용이랍니다. 이건 완전히 다른 뉘앙스 아니겠습니까? 이런 걸 두고 "도장 받은 사실을 시인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신문 기사를 읽을 때 참 조심해야겠다 싶었습니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 수준이 아니라, 아예 극과 극으로 차이 나는 결과입니다. 여기에 대해, 최소한 신문 기사 수준에서는 재반박의 내용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3) 민씨는 과연 자격이 있는 장인인가? 신문 기사들은 석불 정기호 선생의 장남의 말을 인용하여, "민씨는 선친의 집에 두어 차례 방문했을 뿐이다. 최소 6년은 숙식을 같이하며 배워야 하는데, 집에 오래 머물지도 않은 이가 수제자는커녕 어떻게 제자라고 할 수 있는가?" "선친이 말년에 노망기가 있어서, 민씨에게 착오로 증명서 같은 걸 써 주었을 수 있다."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명장의 친아들이 이런 말을 하는데, 대중은 그저 믿을 수밖에요. 그러나 책은 여기에 대해서도 반론을 가합니다. "정 선생의 집은 타인이 묵고 지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버스나 다른 차로 선생을 방문하여 배우러 가곤 했다."는 다른 증언을 소개합니다. 그 외에, 정 선생과 민씨가 인적 연계를 맺었다는 다양한 방증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민씨가 명문가의 후손이고, 어려서부터 각종 대회에 입상하는 등 자질을 입증해 보였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습니다.

명장의 수제자다 아니다를 떠나, 과연 전통 기법을 현재 보유한 인물인지 여부가 더 중요합니다.

 

앞의 1) 2)는 재판 과정에서 쟁점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법원이 확정 판결을 내릴 때도 이유의 핵심은 "전통 기법으로 제작한다고 해 놓고, 막상 적용한 건 현대식 기법이었다."였습니다. 그래서 사기라는 거죠.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든 생각은, "과연 공인된 전통 기법이란 게 존재하는가?"였습니다. 전통 기법을 보유한 사람이 명장인 거냐, 아니면 명장이라는 이가 보유한 그게 바로 전통 기법이냐. 재판부와 수사 당국은 민씨를 처음부터 명장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통 기법을 보유하고 있는지 여부로 이 사건의 핵심에 접근하려 했고, 그 결과는 "아니다"였습니다. 그럼 전통 기법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아니, 전통 기법의 실체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마다 입장이 다 다릅니다. 여튼 수사 당국은 민씨의 제조 방법은 "아닌 것"으로 보았고, 그게 바로 민씨가 유죄 판결을 받은 유일한 근거입니다.

 

in dubio pro reo.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형사사법의 대전제입니다. 실제로 민성재 사건이나 낙지 살인 사건 등에서도 우리가 본 것처럼, 어지간한 심증이 가는 경우에도, 반대의 정황이 얼마라도 존재하면 무죄 판결이 내려지곤 하는 게 우리 사법부의 태도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견해가 달라질 수 있는 문제를 두고, 너무도 쉽게 유죄 판결이, 형식적 증거 조사 과정만을 거쳐 내려진 게 아닌지 충분히 아쉬움이 느껴질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저자의 주장처럼 "배후에 정치 권력이 숨어 있다"까지 비약할 필연성은 부족하다고 해도 말입니다.

 

4)에 대해서도 이 책은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장인이 자신의 작품에 "싸인"을 하는 건 당연하다는 겁니다. 3대 국새를 제작한 장인 역시, "그게 뭐가 이상하냐?"는 반문을 했다고 합니다. 참, 똑같은 사실을 두고서도, 앞뒤에 어떤 배경을 배치했느냐에 따라 이렇게 느낌이 달라지는 걸 보고, 사람이란 정말 간사하고 못 믿을 존재구나 싶었습니다. 신문 기사를 보았을 때는 "민씨가 잘못했네!"라는 판단이 바로 내려졌는데, 이 책의 내용을 보니 또 그게 아닌 것 같으니 말입니다. 현재로서는 이 이슈에 한해서는, 책의 내용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결국 남은 건 3)뿐입니다. 민씨가 전통적 방법으로 국새를 만들었는가 아니었는가! 이는 사실 재판부가 쉽사리 판정을 할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론에 맡길 일도 아닙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섰어야 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몸을 사리거나, 아니면 무슨 이유에서건 서로 의견이 판이하게 갈리니, 결국 증명 불능의 상태로 남은 셈입니다. 다시 떠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in dubio pro reo의 원칙을요.

 

책의 내용에 다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의문의 교통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 하셨다고 하지만, 그게 꼭 정치권력이나 반대편 세력의 사주로 인한 것인지는 명확지 않습니다. 또, 결국 재판을 확정한 건 대법원 해당 재판부입니다. 아무리 최종심이 법룰심이라고는 하나, 결국 오심(만약 오심이라면요)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건 대법관들입니다. 책은 1심 재판부에 대해서는 강력히 비판하고 있으나, 대법관들에 대한 언급은 거의 않고 있습니다. 형량을 다 채우고 출소했다는 사실의 진술에서, "아 이 사건이 이미 대법원에서 확정되었구나"하는 생각이 겨우 들었을 뿐입니다. 독자로서는, "대법관들도 결국 그런 판결을 내렸다면, 이 책에서 말하지 않은 뭔가 다른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요. 이래서 배심 재판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에도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습니다. 언론이 그렇게나 효과적으로 여론몰이를 하고 난 후였는데, 배심원인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저자분은 동료 언론인들의 자질과 진정성을 문제 삼으셨어야 순서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책의 프롤로그, 에필로그는 모두 거물 법조인이 담당하여 집필하였습니다. 두 분은 민홍규씨의 사정이 억울하다고 판단하여, 무료 변론을 맡은 소송대리인이기도 합니다. 이런 거물들이 사건을 맡아 대법원까지 간 사건인데도 결국 유죄 판결이 났다면, 사건의 진상은 보다 복잡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책은 나와야 합니다. 오심의 가능성은 어떤 경우에도 존재하며, 무작정 억울하다는 식이 아니라 이처럼 치밀하고 자세한 팩트에 근거한 반론이라면, 마땅히 공론의 장에 나와 여론의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사법부가 이미 판결 확정이 끝난 사건에 대해 일일이 답할 책무는 없더라도, 최소한 설득력 있는 항변에 대해 뭔가 입장 표명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고는 하지만, 형식보다 중요한 건 국민의 인권이고 정의의 실현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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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고금통의 1 - 오늘을 위한 성찰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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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義)"가 "통(通)"함은 예[古]와 지금[今]이 다르지 않다.

이 얼마나 호쾌하고 희망 가득한 말입니까? 만약 세상이 폭력과 사술만 판치는 곳이고, 우매한 대중을 기만하는 정상배와, 아집 가득한 폭군이 두려움 없이 전횡할 뿐이라면, 책을 읽을 필요도 없고 정의를 세울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고"와 "금"을 통하는 "의"인지는, 보다 나아간 논의가 필요합니다. 이덕일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주제를 취한 단문 논평 여럿을 통해, 본인과 독자 모두에게 '의"가 과연 무엇인지 귀납적 탐구의 과제를 던지는 듯합니다. 그는 힘 있는 필치의 장문 논설에 능한 저술가이지만, 모 일간지에 장기간 칼럼을 연재한 이력에서 알 수 있듯 촌철살인의 단문에서도 그만의 컬러와 기량을 과시할 수 있는 재사입니다.

 

무엇이 과연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의(義)"인지를 구명(究明)하기 위해, 저자는 자신의 소견이나 퍼뜩 떠오른 영감에만 의지하지 않고, 옛 문헌을 비교 검증하는 데에서 화제의 단초를 찾습니다. 그런 작은 발단에서, 어느 새 이런 거대한 결론과 박력 있는 비전이 도출 가능한가 싶게, 마주보는 두 페이지 분량의 짧은 칼럼은 어느 새 대용량 저서 한 권의 무게를 우리 독자의 정신에 올려 놓습니다. 이 비결은, 옛 문헌의 뜻[義]을 정확히 풀어 주는[解] 그의 능력에 크게 빚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저도 판사, 검사의 과도한 권력에 대해 큰 우려를 표명하는 어느 책을 읽은 바 있지만, 저자는 조선 시대 법제에서 이 큰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바대로, 율(律)학은 무과보다도 품계가 낮은 잡과에 속했습니다. 품계가 낮은 하급 관리가 행하는 직분이니, 자의(恣意)가 개입하지 않고, 기계적 법 적용이 가능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법조의 적용이 개인적 세계관이나 취향, 경향에 영향을 받기보다, 천편일률로 행해지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그의 생각에 한편으로 수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과연 다른 부작용은 없을지 잠시 생각하게 되었네요.

 

이념이 난무하면 국력이 쇠한다. 효종의 죽음이 뭔가 의문스러운 사연이 개입했다고 보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 나올 만한 결론입니다. 필자는 북벌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고 여기고 있으며, 특히 오삼계 등이 일으킨 삼번의 난이, 조선 측에서 동병(動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특히 현 중국 당국이 주도하고 있는 동북 공정이, 벌써 이 청대부터의 침략적 경향의 연장선상에 있다 보고, 강한 민족주의적 각성으로 이에 대처해야 한다고 책의 여러 파트에서 반복 역설하고 있습니다.

 

고인돌은 동북아 일대에 널리 뻗쳐 있었던 대제국의 흔적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같은 형식의 고인돌이 일정 강역에 분포하면, 동일 정치 체제의 통치 시스템 존재의 증거라고 보는 게 상식인데, 대동강 유역에 고조선의 판도가 한정되었다고 보는 고정관념(저자의 입장대로라면, 이는 식민 강단 사학의 잔재지요) 때문에 뻔한 진실을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이런 입장이라면 대동강 일대에 분포하는 고인돌을 두고서조차 논리적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거죠. 특히 저는 후자의 모순을 지적하는 저자의 입장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역사는 기록자의 왜곡과 정치적 입장이 언제나 개입한다는 씁쓸한 확인이, 송첸캄포를 다룬 <唐史>에도 나온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실제의 팩트는 토번의 승승장구와 이세민의 비굴한 회유에 불과한데, 사서의 기록은 정반대로 열심히 중화의 영예와 승리를 주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 "서남 공정"이라는 중국 측의 부단하고 집요한 정책으로 그대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동북 공정"으로 동병 상련을 겪고 있는 우리가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고 그는 비장하게 주장합니다.

 

그는 진보적 스탠스를 유지하는 논객답게, 아마 남녀 평등을 주창하는 인사들과 잦은 교류가 있을 것이며, 그 중에서도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상당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런 이들이 지닌 명함을 보면 다성(多姓) 표기가 많죠. 모계 쪽 성(姓)을 병기하는 이런 관행은 그러나 큰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취지에는 찬성하지만 말입니다. 왜냐 하면, 모친의 성 역시 부계 혈통의 대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며, 이는 결국 운동의 본의마저 오히려 훼손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저자는 은근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칼럼에서 저자는 오히려 다른 쪽의 결론으로 내딛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남녀 평등의 관념을 강하게 유지하여 왔으며, 모여성의 성이 결혼 후에도 (서양이나 일본과 달리) 남편을 따르지 않고 제 부친의 것을 유지한 본의는, 양 집안의 대등한 결합 사실을 강력하게 상징하려는 데 있었다고까지 합니다. 양반 가에서 정실 부인은, 언제나 남편에 대해 당당하고 강한 어조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다성(多姓) 표기는 이런 관점에서라면 그 타당성 여부를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간회 초대 책임자를 지낸 이상재 선생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 여럿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높고 굳건한 지조를 지녔다고 해도, 현실의 벽이 너무도 높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월남 선생이 택한 방법은 해학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제시된 몇몇 일화는 그 암울한 정치적 상황과는 너무도 잘 대비되는 익살이라 재미있고, 한편으로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시대 배경을 감안하고 다시 읽으면 눈물이 고이는 비애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놓고 모인 단문이니 지루할 틈이 없고, 짧은 분량 속에서 할 말은 다 해 놓고 토픽의 완결성도 잃지 않는 그의 솜씨에 경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형식적 치장에 구애 받음 없이 본연의 주제의식과 명분은 언제나 찔러 두고 가는 그이기에, 독자는 편안함과 도덕적 만족을 동시에 맛보게 됩니다. 이런 칼럼이 역사라는 큰 줄기에서 언제나 일정 거리 밖으로 논점을 이탈하지 않는 것도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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