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보는 32가지 물리 이야기
레오나르도 콜레티 지음, 윤병언 옮김 / 작은씨앗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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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어느 베스트셀러 저자가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라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과학 본연의 연구보다 대중과의 소통을 더 중시하는 듯한 카이스트 출신의 그 저자의 작업은, 어찌 보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영화에는 스토리가 있고, 감독이나 제작진 중에는 대학에서 과학이나 공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 때에는, 대중에게 전달하려는 게 미학적 감동 외에도, 모종의 과학적 맥락의 전달 역시 있게 마련입니다. 캐릭터나 피사체가 움직이기도 하고(영화를 영어로 하면 motion picture입니다), 스토리(영화가 품고 있는) 중에서 스토리(예컨대 정재승 박사의 이야기)를 뽑아 내는 건,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극히 어려운 과제도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영화(motion picture)가 아니라, 그냥 회화(picture)에서, 그 그림을 해석하고(답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이야기를 풀어내라고 해도,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한정된 공간 안에서 구현된 구상 혹은 추상에서 "과학을 본"다라? 그건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과제일지도 모릅니다. 그림을 그린 그 거장들의 의도도 그게(과학의 구현 같은 것) 아닐 뿐더러, 정지된 이미지 한 컷에서 그 복잡한 수학적 구상이 개입해 있는 원리를 줄줄 풀어낸다... 물리학에 통달한 이에게도 힘든 일 같고, 회화와 미술사에 어지간히 밝은 이에게도 어려운 일 같습니다. 두 분야에 다 도가 튼 사람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지만, 그런 사람이 많지도 않겠거니와,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둘을 동시에 엮고 버무려 가면서 "썰"을 푸는 건 정말 힘들 것 같습니다.

 

저자 레오나르도 콜레트는 본분이 물리학 연구직입니다. 이탈리아 트렌토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현직 교수이며, 미국 물리학협회 APS 회원이라고 책 소개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 이력을 가진 사람 입에서는 절대 안 나올 것 같은 주제가 바로 회화의 역사, 기법 등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그러나 이 책에서, 미술사상 특정 유파나 조류에 속한 작가나 작품만 거론하는 게 아니라, 다빈치나 카라바조에서 마네와 샤갈, 오토 딕슨에 이르기까지, 정말 아무 공통점도 서로 갖지 않은 거장들을 32명 뽑아 놓고, 말 그대로 그림과 물리학의 역사를 종횡무진 오가면서 "썰"을 풀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아마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대학에서, 어린 학부생들을 상대로 교양 강의차 들려 주던 내용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주제를 전달하는 형식은 두 남녀 대학생(아직은 본격 사귄다기보다 썸타는 정도로 보이는 사이)의 대화로 꾸려져 있더군요. 남자 대학생이 물리학을 설명하고, 여대생이 그를 이해하는 위치에서 둘은 신나게 말을 주고 받으며, 독자와 저자의 사이에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터 역할을 해 냅니다. 대화는 유머러스하고 화기애애하며, 특히 프란체스카의 날카롭고 당돌한 질문은, 파올로의 도도한 논변을 힘겹게, 때로는 의아한 느낌으로 따라가는 독자의 심겨을 상당 부분 대변하고 있습니다.

 

분리하면서 포착한다. 사실 이 말은, divide and rule을 살짝 비튼 것입니다. 파올로의 대사 중에는 "포착"이 아니라 "정복"이라고 되어 있고, 이렇게 읽으면 저 어구와 거의 일치하죠. 물론 저자는 어지간히 진보 성향의 스탠스라서 그런지, "정복"이라는 단어가 전달할 수 있는 의미가 그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이 아님을 구태여 여러 번, 변명하듯이 덧붙입니다. 이런 책을 읽는 독자가 그런 오해를 할 가능성은 낮을 텐데도 말입니다.

 

저자의 입장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총체적으로 보자는 것이었고, 이런 입장이 교조적으로 굳어 과학은, 물리학은 수 세기 동안 발전을 할 수 없었다."
"갈릴레이가 처음으로, 부분적으로 선명한 진리를 포착하기 위해 관계 없는 다른 사정과 상황을 제거하고 사실을 관찰하려는 작업을 시도하였고, 그것이 바로 사고 실험(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이며, 이 시도를 통해 "관성"이라는 것의 개념 정립이 시도되었으며, 이를 통해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물리학이 처음 자리잡았다."
"근대 과학은 이 갈릴레이의 시도를 기점으로 눈부신 발전을 보일 수 있었으나, 이후 플랑크에 와서 한계에 부딪혔고(소위 양자성의 문제), 비로소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적 총체성으로 복귀할 필요성을 일부 느끼기 시작했다."


이 모든 주장을 저자는 움베르토 보초니의 <동시적 착상> 한 폭의 그림에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저 표현들은 제 느낌과 기억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이므로 책 원문과 차이가 있을 수 있고요)

 

옳은 말이고, 이 1장은 이후 계속 이어지는 뉴턴의 고전 역학에 대한 저자의 설명에 있어 토대와 대전제를 이루는 내용이라서, 독자는 반드시 읽고 지나야 합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발췌독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명작 32점은 그 배열에 별반 필연성이나 깊은 의도가 없지만, 그 명작 32점을 모티브로 하여 펼쳐지는 과학사(이 책 내용은 과학 이론 현황 설명이라기보다는 과학사 해설에 가깝습니다. 지금은 폐기된 에테르論, 플로지스톤 說도 등장하니까요) 설명에는 반드시 시간적 맥락(어떤 이론이 무엇을 극복하고 등장한 것이다)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순서를 바꿔서 읽으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과학사에 이미 밝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도, 저자만이 사용하고 있는 독특한 개념어가 여러 번 나오기 때문에, 발췌독 형식은 어렵습니다).

 

저자는 과학의 발전과정, 혹은 과학이라는 정신 작용을 독특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분명 저자는 상대론적 관점에서 이 모든 주제를 소화하고,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충격을 받은 건, 저자는 "원자" 개념에조차도 얼마든지 향후 붕괴할 수 있는 가설 정도의 위치 이상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원자가 물질의 최소 단위라는 돌턴식 개념은 타파된 지가 한 세기가 넘었습니다만, 적어도 "원자"라는 단위가 물리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에는 아무에게서도 이의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저자는 그러나, "원자 역시 그 누구도 눈으로 본 사람이 없으며, 더 유력한 설명이 나올 때까지 잠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설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투로 이야기합니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원자는 끈(혹은 초끈) 이상의 실감이 나는 개념도 못 되는 셈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나오는 중입니다.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건, "불변의 진리라고 받아들였던 그 모든 도그마를 손쉽게 버릴 줄 알아야 대가라고 할 수 있다"더군요.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총체성을 폐기함으로써 새로운 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고, 그런 갈릴레오의 관성 개념이나 원운동 역시, 뉴턴에 의해 전면적으로 비판, 수정되고야 말았습니다. 저자가 직접 말하고 있지는 않으나, 서양 회화 역시 관점과 스타일을 그토록 정교하고 세련되고 발전시켜 오다가, 어느 천재(마네나 마티스 등)에 의해 송두리째 버려지고 전혀 새로운 기법, 스타일이 만들어지면서 발전해 온 사정이나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지요. 그냥 과학 이야기만 해도 될 것을 굳이 그림까지 끌여 들여 온 건 그런 의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자기 스승(티코 브라헤)를 충실히 섬긴 걸로 유명한 케플러, 그리고 교회와도 큰 마찰을 빚지 않고 무난히 넘어갔던 케플러에게서 "혁명가, 파괴자"의 성격을 찾는 건 좀 힘들어 보입니다. 저자는 그러나, 갈릴레오의 원운동 개념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고 타원 운동설을 정립한 그야말로, "틀린 것을 과감히 포기할 줄 아는" 진정한 혁명적 과학자의 자격이 있다고 단언합니다. 제 생각에는 그저 케플러가, 티코(이 책에서는 "튀코"라고 표기합니다. 그게 정확하죠) 브라헤와 갈릴레오라는 두 神 사이에서 전자를 선택한 것 뿐 같습니다만.

 

이처럼, 모든 이론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과감히 다은 이론을 내어 놓음으로써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이런 말은 없습니다만 독자로서의 제 해석)이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니,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론이 빠질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저자는 카라바조의 <바울의 회심>을 두고, 회심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빛"을 가득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며 이 이야기를 하고 있더군요.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은, 보통 권위 있는 미술 평론가들에 의해 내려지는 그것과는 거리가 상당히 멉니다. 거의 꿈보다 해몽이라고 될 만큼, 이 걸작을 놓고 풀어지는 설명은 저자 특유의 물리학사 해설이 주종을 이룹니다.

 

예컨대 저는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두고, "사실주의적 결함"을 들고 나오는 저자의 태도에서 과연 물리학자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총을 쏘는 군인들이 꼿꼿이 서 있느냐는 거죠. 물론 이는 저자의 편협한 주장은 아닙니다. 인상파 작가들이 처음 나올 때부터 받은 비판이 바로 그런 류였습니다. 마네는 처음부터 "그 꼿꼿한 인상"을 포착하여 전달하려 했던 것으므로, 아무 잘못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탁월하기까지 합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개인으로서 막시밀리안 1세(멕시코의)를 두고 저자가 너무 왜곡된 주장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황제로서 실권을 가지지도 못했고, 나폴레옹 3세의 농간에 놀아나 대신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뿐이었죠. 빈민과 약자에 대해 대단히 온정적이었고 굳이 사지로 가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남자답게 군주답게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좀 지나친 평가가 아닌가 했습니다. 물리학자는 물리학 이야기만 해야 하지 않았나 싶은 대목이었습니다. 물론 이 장에서 펼쳐지는 작용 반작용 설명은 대단히 재미있고 유익합니다.

 

<사울의 죽음>은, 제 개인적으로 가장 탁월한 챕터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전쟁터에서 보이는 무수한 창날을 보고 "벡터"를 떠올린다든가, 울퉁불퉁한 지평선의 완급을 보고 함수의 개념을 설명한다든가 하는 건, 어린 학생들에게 읽히면 참 유익한 설명이었습니다. 특히 우리말 역자의 센스가 돋보이는 게, 벡"터"와 전쟁"터"를 갖고 벌이는 언어 유희가 일품이었네요. 어원적으로는 전혀 무관한 두 단어인데도 말이죠.

 

아쉬운 건, 그림 사이즈가 작아서 저자의 의도, 설명을 그림과 함께 대조해 가면서 읽기가 불편했다는 점입니다. 하긴 개인적으로는 그림 많고 텍스트 적은 책을 좋아라 하지 않기 때문에, 저는 이 책에 대해 불만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입장이 다른 독자도 있을 것 같고요. 정 그런 분은 인터넷에서 해당 작품을 검색하면 큰 해상도의 파일이 쉽게 구해질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 드릴 것은, 이 책은 명화를 해설하는 책이 아닙니다. 정통적인 해석은 다른 책에서 알아 보셔야 할 것 같고, 이 책은 그림 하나를 구실(?) 삼아, 지난 물리학의 역사 자취를 짚어 가고, 바람직한 과학인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은근 강도 높게 설파하는 "과학책"이란 사실입니다. 저자는 이탈리아인이라서, "전화의 최초 발명자"를 두고 A G  벨만 꼽지 않고, (우리가 잘 모르는) 메우치(미국식 발음으로는 메유치죠)를 슬쩍 끼워 넣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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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지음 / 다섯수레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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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견이라는 게 그래서 무섭습니다. 가톨릭 교회라고 하면 보수주의, 전통에의 완강한 집착 같은 막연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현존하는 종교 조직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유지된 실체이니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보는 시선이 그렇다는 것이고,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그렇게나 긴 시간 동안 마냥 변화를 거부하고 지냈다면, 아마 오늘날까지 교회가 존속하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실제, 16세기 초의 로마 대 약탈, 19세기말의 이탈리아 통일 등, 교황청은 아예 그 존폐가 문제될 정도의 위기를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그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이어져 온 건, 끈질긴 생명력 같은 이유라기보다, 변화하는 시대에 (우리 일반이 생각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열심히 적응해 온, 아니 그를 넘어 어쩌면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시대를 이끌어 온, 성직자들의 노력 그 결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마 그 역할은,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교황보다는, 진보적이고 열린 생각을 지닌 교황들이 보다 더 비중 높게 맡아 왔을 것 같아요.

 

이 책의 제목은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입니다만, 이런 비슷한 제목을 달고 있는 다른 책들과는, 그 보는 시야와 취지, 담고 있는 내용이 사뭇 다릅니다. 아마 이 교황, 호르헤 베르골료는, 지금까지 구교가 맞이했던 교황 중 가장 진보적 색채가 짙은 인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이 교황이 어떤 족적을 보이고, 어떤 업적을 남기고 가실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만(뉴스에 의하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임자처럼 생전에 은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자들에게 시사한 적 있다고 합니다), 이 정도씩이나 진보적인 인사가 교황직에 착좌(이런 용어를 쓰더군요)했다는 자체가, 교회사에 뭔가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저자는 보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 책에 담긴 내용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타원의 초점 중 하나로 놓고, 다른 하나의 초점을 보수 세력에 둔 후, 가톨릭 교회가 그려 나갈 타원의 반경이 앞으로 어디까지 확대될 수 있을지, 혹은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움츠려들지, 최근 한 세기 정도를 주된 범위로 잡아 교회 전반의 형편, 내력을 조명한 책입니다. 물론 교황 개인에 대한 여러 신변 사항,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 그 전임자인 대교황(아직 정식 호칭은 아닙니다만) 요한 바오로 2세 등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신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신변잡기가 아니라 보수-진보의 대립, 혹은 발전적 갈등에 대한 저자 나름의 정리와 해석입니다. (그래서 저는 <보-혁 구도를 축으로 놓고 본 현대 가톨릭 교회사> 정도로 부제를 달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이 책의 저자는 가톨릭계 언론 기관에서 주필로 오래 봉직했던 한상봉 선생입니다. 저자는 사제가 아니지만, 학문적 배경을 구교 관련 영역에서 갖춘 분입니다. 저자는 먼저 "현 교황은 공산주의자인가?"라는 당혹스러운 질문으로 책의 서두를 열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 같은 분이 그런 시각을 가질 리는 없고요, "현 교황처럼 온건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인사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자'로 손쉽게 매도하려는 세력이 교회 내에 엄존한다."는 논의를 열기 위함입니다. 진보적 분위기, 민중과 호흡을 같이하려는 성직자에 대해 언제나 마뜩지 않은 시선을 주어 왔던 세력이 교회에는 상존해 왔고, 이는 물경,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활약하던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도 잘 나오듯, 가난한 이와 함께 하고 민중의 아픔을 지배층에 알리려는 움직임은, 언제나 이단으로 경원시되어 왔습니다. 아시시의 성인이 활약하던 시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당사자가 세상을 떠난 후 그리 오랜 시간을 끌지 않고 시성함으로써, 교회가 결코 변화의 움직임에 눈을 감고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해 보였습니다. 반면, 교회가 변화를 거부하고 타락한 소수의 책동에 놀아날 때에는, 프로테스탄트와의 대립 등 파국적인 결과를 맞이해 왔다는 점을, 저자는 여러 역사적 사실을 들며 암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저자의 관점은 그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는 언제나 빈민과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해 왔다. 지금의 교회가 가져야 할 사명 역시 그것이다. 너무도 단순 명쾌하지 않은가?" 마르크스의 명제 중에 유명한 것으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가 있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쟁쟁한 명성의 해방 신학자들(예: 볼프)은 한결같이 지적합니다. "이 명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무엇이 다른가?"

 

저자는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인입니다. 한국인 평신도로서 그는, "용산 참사 등 민중이 억압받고 생존의 위기에 몰렸을 때, 교회 관계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고 묻습니다. 한국의 경우 예컨대 정진석 추기경 등은 현장에 몸소 나와 이들의 고충을 묻고 위로를 건넨 일이 전무하다는 게 저자의 지적입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면, 현 교황은 대주교 베르골료이던 시절, 나이트클럽 화재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했던 때, 누구보다 먼저 현장을 찾은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사가 이제 세계 십 수억 가톨릭 신도를 이끄는 수장이 된 시점에서, 실천과 탈권위의 소통을 보이지 못한 고위 성직자들은 반성해야 하지 않냐는 게 저자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이 책에서도 여러 번 나오는) 강우일 대주교처럼 진보적인 인사도 한국 교회에는 존재합니다. 아니, 주필직 같은 중책을, 이 책의 저자처럼 진보적인 성향의 인사가 오랜 기간 동안 맡아 왔다는 사실부터가 무엇인가를 강력히 시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입견은 엄연한 현실 앞에 아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이 책은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저는 현 교황을 담은 여러 사진을 보면, 자애롭고 깊은 수양이 담긴 표정이 있는가 하면(저자의 평가로는, 현 교황이 외모 면에서도 아주 출중하다고 하십니다), 뭔가 수심 가득하고, 인간적인 불안이 짙게 배어나오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가 지극히 소탈하고 가식 없는 분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앞으로 교황으로서 그가 교회 내부의 반대 세력, 교회 외부에서 가해져 오는 심각한 위협, 부정 부패 등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 그 전망이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걸 암시해 주는 것도 같더군요. 앞에서 인용한 "전임 베네딕토 교황처럼 조기 은퇴할 수 있다."는 언급도, 해석하기에 따라선 상당히 무거운 의미로 다가오기도 하고요. 교황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기보다, 내가 교황께 무엇인가 힘을 보태고 싶다는 성숙한 생각이 드는 가톨릭 신자라면, 이 책을 읽고 현 교황이 얼마나 어려운 입지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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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당신을 최고로 만드는가
스티브 올셔 지음, 이미숙.조병학 옮김 / 인사이트앤뷰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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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 많은 놈이 밥 굶는다"란 말이 있습니다. 참 역설적인 이치랄까요. 재능이 많으면 남들보다 몇 배는 넉넉한 삶을 누려야 마땅한데, 오히려 남들보다 더 평탄치 못한 결과를 얻는다... 이것은 물론 주된 원인이, "사회성 부족"에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자아실현이건 경제 활동이건 다른 동료들과 어울려 이뤄 나가는 길 말고 다른 방법이 없는 게 보통이죠. 재능보다 더 중요한 건(중요하다기보다는 더 기본적인 덕목) 사회성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진단한 결과입니다. 타인의 팩터를 떠나서 그 사람 개인의 문제를 본다면, 이는 "선택과 집중"의 문제를 등한히한 탓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제아무리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난 인생이라고 해도,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은 동일합니다. 한정된 시간 동안 이것저것 건드리며 정력을 분산하면, "한 우물만 판" 사람보다 오히려 더 나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재주가 많은 사람"도 효율적인 자기 관리가 되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을 살 수도 있는데, 하물며 별 재능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 어중간한 위치의 우리들이라면 어떨까요? 효과적으로 가용 자원을 써 먹지 못하면, "중간도 가기 힘든" 위태위태한 처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스티브 올셔라는 사람은, "보잘것없는 재주만을 타고난 사람도, 자기만의 특별한 끼를 계발하고 그것에다 가진 모든 정력과 주의를 쏟아 부으면, 당장이라도 최고가 못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더군요.

 

어찌보면 모든 자기계발서가 판에 박힌 모습으로 다루는 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책을 읽을 때 항상 먼저 보는 건, 책의 저자가 무슨 경력을 가진 인물이냐 하는 점입니다. 대체로 저는, 학력 좋고 지식 많은 이들보다는,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제 사업을 일구면서 크게 성과를 올린 이들에 더 신뢰가 갑니다. 또 하나는, 같은 말을 해도 얼마나 읽는 이의 동기를 자극할 수 있는, 신명나는 어조로 말하고 있느냐로 기준을 삼습니다. 말이 흔하고 정보가 널려 있는 세상에, 남의 말을 비슷하게 카피해서 그럴싸하게 꾸미는 건 누구나 할 수 있고, 많이 배운 사람(저자)일수록 이런 일은 더 쉬운 법이죠. 하지만 자기가 몸소 겪은 바를 사무치게 증언하는 사람,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버젓이 책까지 쓸 만큼 성공한 사람의 어투는, 직접 들으면 더할 것이고 이렇게 책으로 읽으면서도 감동이 몰려 옵니다.

 

이 책의 저자도 그렇더군요. 체계를 세워서 하는 이론은
학습에는 네 단계가 있다
1) 무의식적 무능력
2) 의식적 무능력
3) 의식적 능력
4) 무의식적 능력

 

상식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특별한 건 없습니다. 처음에는 잘해야겠다는 의식도 없고 머리에 든 것도 없으니 무능하고, 그 다음에는 "아 내가 많이 부족하구나"를 아는 수준으로 올라오고(여전히 무능), 그 다음에는 나름대로 노력을 해서, 낑낑거리는 가운데 무엇인가를 해 내기는 하는 단계, 최종적으로는 힘 하나도 안 들이고 몸에 밴 요령만으로 척척 임무를 해 내는 단계를 각각 가리킵니다.

 

그럼 이런 학습 단계를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거칠 수 있는가? 저자는 여러 가지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인생에 있어 내가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인가? 철저한 무기력 상태에 빠졌던 건 언제인가? 내가 가장 환희에 차서 무엇인가를 성취해 낸 적은 언제였던가? 등으로 내적 의지, 감정의 구조를 재편성하라는 것입니다. (자세한 건 책 고유의 주장이므로 여기에 적지 않겠습니다)

 

저자는 또한 사분원을 그려서, 내가 지금 당장, 가장 가까운 범위에서 접촉하고 의지하는 이들을 네 명 배치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특성과 성향을 파악하라고 합니다. 나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맥(저자는 그런 말을 쓰지 않지만 우리식 표현으로는 인맥이겠죠)을 다 쳐 내라고 고언합니다. 사실 저는 전에 읽은 어떤 자계서와 이 책이 주장하는 내용이, 너무 똑같아서 좀 놀랐습니다. 자계서의 내용은 다 그게 그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읽으면서도 어느 책이 시간 순서로 다른 책의 영향을 받았겠다 싶은 건 읽다 보면 눈에 훤히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읽은 두 책의 그 대목들은, 저자 자신의 경험담을 적은 내용이라, 뭘 표절할 가능성이 없었죠. 아무튼 도움 안 되는 인맥을 솎아 내라는 주장은, 마음이 좀 아프긴 해도 맞는 말이다 싶어서 가슴에 좀 새겨 놓아야 할까 봅니다. 분명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저자는 매슬로의 5단계 욕구 이론을 원용하며, 다만 자신은 여기에 중대한 수정을 가하겠다고 합니다. 뭐냐면, 매슬로는 하위 욕구가 만족된 후에야 상위 욕구가 만족된다고 했으나, 자신은 그에 대해 반대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5욕구는 계층이 없으며, 동시적으로 고르게 만족되는 게 최대 수준의 행복을 가져 온다는 겁니다. 물론 매슬로의 이론을 그렇게만 이해하는 건 학문적 태도와는 거리가 멉니다만, 이 책은 자계서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죠. 중요한 건 누가, 내 발전하고자 하는 기분이랄까 동기를 띄워 주면, 나는 그 흐름에 힘 안 들이고 올라타면 된다는 겁니다. 내가 내 기분 스스로 업 시키는 것도 돈 들고 수고스럽거든요. 그런데 누가 그걸 공짜로(책값만 빼고) 해 주겠다? 그럼 받아 들이면 됩니다. 그게 자계서 읽는 이유입니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신나고 고마운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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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카페에서 커피가 운다면 새봄 그림책 1
조철희 지음, 이민영 그림 / 새봄출판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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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에 피눈물, 그것도 불공정 조건으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피눈물이 섞여 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자신만의 아늑한 공간에 여유롭게 앉아 그날의 신문과 서류철을 뒤적이며 한 잔의 커피를 즐기는 이(예를 들면 지금의 저 같은)들이, 전혀 받아 들이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입니다.

 

본디 커피란 플랜테이션 농업의 산물입니다. 커피는 그저 가나 같은 열대 지방에서 우연히 몇 군데에 집중 서식하던 식물의 열매에 지나지 않았고, 이는 그 땅의 거주자에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던 존재일 뿐이었겠죠. 그러나 백인 침략자가 이를 발견하고, 우월한 무력으로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자국의 시민들에게 고가의 기호 식품으로 팔아 먹을 생각을 하고부터는 모든 사정이 바뀌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차"를 얻기 위해 "아편"을 보급할 반인도적인 책략을 부렸고, 아프리카와 남미에서는 "커피"를 얻기 위해 현지인의 생활 양식을 송두리째 바꾸고 대규모 단작 체제를 갖추어 노예 노동으로 이를 수확, 수탈했습니다. 말 그대로 "악마의 음료"가 되어 버린 셈입니다.

 

현대에 들어 이런 원주민 착취 구조나 행태는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합니다. 그러나 자본의 속성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변한 게 없습니다. 이윤이 가능하면 많이 남는 쪽으로 생산 구조를 개편하고, 법의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편법적인 자원 운용을 도모합니다. 이것이 가장 악질적인 지경까지 간 것이, 아동들의 (거의 공짜나 다름 없는) 노동력을 이용하여, 과거의 플랜테이션 착취 구조를 겉모습만 살짝 바꿔 재현하는 못된 풍조입니다.

 

사실 커피는 성인의 기호 식품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그리 친숙한 음료가 아니며,  성인이 되어서도 분위기 때문에 겨우 버릇을 들이기 시작할까, 평생 입에 안 대려면 얼마든지 가능한 대상입니다. 담배처럼 중독성이 강하지도 않고요. 그러나 아이들이라고 해도, 쇠고기 버거 같은 건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얼마든지 즐겨 찾는 아이템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값싼 쇠고기, 값싼 커피를, 대량으로 팔아 이윤을 얻고자 하는 구조 속에, 저 어두운 세상의 반대편에서는 자기 또래의 어린 아이가 하루하루 힘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피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이 존재합니다. 이건 아이들도, 매우 마음이 아프겠지만 어려서부터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내 몸과 마음에 꼭 필요하지도 않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누군가가 인권과 인격과 영혼을 송두리째 희생당한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버젓이 종래의 삶의 패턴을 이어나간다면, 그 사람은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힘든 사람입니다.


아이들에게 언제나 밝고 아름답고 풍요롭고 따뜻한 것만 보여 줄 게 아니라, 생의 어두운 이면도, 그것이 진실이라면 반드시 이에 노출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그에 담긴 타인의 눈물을 감지하고, 자신도 따라 뜨거운 눈물을 떨굴 줄 알고, 다음의 1센트를 보다 값진 용도에 쓸 줄 아는 어린이가, 커서도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기여할 수 있는 좋은 어른이 될 것 같습니다. "공정 무역"이나 "아름다운 가게"에 관한 책도 함께 읽히면 바람직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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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의 공격헬기 AH-64 Apache 밀리터리 하이테크 3
쓰보타 아쓰시 지음, 권재상 옮김 / 북스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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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지구상의 유일한 동물입니다. 인간은 맹수에 비해 연약한 신체를 가지고 있고(방어에 취약), 달리는 속도가 느리며(효과적인 도주 능력이 떨어짐), 비록 같은 종(種)인 사람을 때때로 죽일 수도 있다고는 하나 맨손으로 가하는 타격의 힘이 강하지 못합니다(보잘것없는 공격력). 그런데 이 모든 선천적인 약점을, 가공할 만한 병기(兵機)를 만들어 보완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병기 또한, 다른 종(種)의 동물에 넘어가거나, 혼자 놓였을 경우 아무 쓸모 없는 고철덩어리 이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오로지 인간의 손에 들어 왔을 경우에만 위력을 발휘하는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에서도, 대단히 특이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집념이 비행기라는 도구를 탄생시켰지만, 이 이기(利器)는 초기에 여객 운송의 수단보다 전쟁의 도구로 더 활발히 이용되었습니다. 2 차 대전을 거치면서 전투기는 정말 짧은 시간 안에, 가공할 성능을 지닌, 전쟁의 대세를 좌우하는 결정적 자원으로 활용되었죠. 일제가 강점기 말 한민족을 수탈하면서 재력가들에게는 "비행기 헌납"을 강요했고, 징용으로 잡아 간 인력은 활주로 공사장에  투입하곤 했던 사실을 보아도 간 접적으로 이 병기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영국이 독일에게 정복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소위 "배틀 오브 브리튼"에서 괴링의 나치 공군을 최종적으로 격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공권을 빼앗긴 그 어느 나라의 군대도 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고,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종래의 전투기(지금도 해리어 기 등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마찬가지지만)가 안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활주로가 없으면 이착륙이 불가능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또, 육상이나 해상이 아닌 소규모 공중 운송의 경우 굳이 번거로운 이착륙절차를 거치지 않고, 신속하고 간이한 과정만을 거칠 필요가 있는데, 이 사항을 기존의 비행기들은 만족시킬 수 없었지요. 과연 필요가 발명을 낳는다고, 로터(rotor)의 추력(推力)을 통해 하늘을 나는 원리의, 새로운, 어쩌면 더 혁신적인, 발명품이 출현하여, 이 니즈를 빨리도 만족시키고 나왔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헬리콥터입니다.


그렇다곤 하나 오랜 시간 동안 헬기는 그저 헬기였을 뿐입니다. 기름을 덜 먹는다고는 하나 속도도 느리고 약한 재질로 만들어져, 지상으로부터의 공격에 더 큰 취약점을 드러내는 게 보통이었죠. 헬기는 헬기로서 만족해야 할 뿐, 너무 큰 기대는 곤란했습니다. 하지만, 힘들게 탄생한 이  헬기의 혁신을 바라는 군사 당국자나 기술진의 열망 역시 정체되어 있지만은 않았지요. 그저 탑승자가 수동으로 쏘아 대는 기총 소사 같은 것 말고도, 기체와 일체가 된 공격력의 증강, 혹은 360도 회전 따위를 실현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그들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세계 최강의 공격 헬기"라고 다소 심심한 제목이 붙어 있을 뿐이지만, 이 AH-64는 그간 헬기에 대해 기술진이 품어 오던 모든 희망사항, 거의 꿈에서나 가능할 것만 같았던 요구를 대부분 충족시켜 주는.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이자 꿈의 병기라고 할 만합니다. AH-64에 대해, 책에서 이를 두고 붙인 이름은 "하늘을 나는 탱크"입니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라, AH-64가 행하는 주 기능이 공격 용도임을 잘 드러냅니다. 처칠은 대전 당시에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건 더도 덜도 아닌 탱크"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탱크가 하늘을 날아 다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탱크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포를 쏘아대기만 하는 장치가 아닙니다. 적의 공격에 거뜬히 견뎌낼 수 있는 맷집이 있어야 합니다. 이 AH-64를 두고 "하늘을 나는 탱크"라고 부름은, 지상군으로부터의 반격(때로는 공중전)에 그만큼 강한 방어력을 갖추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몸체를 튼튼히 만들려면, 당연히 그 중량이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거워진 무게를 버텨 내려면, 일단은 엔진의 힘이 강해야 하며, 설계 구조면에서의 극적인 개선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간 기술적 장벽이 거대하게도 자리했던 영역으로 평가 받았지만, AH-64는 그 모든 애로를 효과적으로 극복한, 거의 기적이라 할 만한 개선과 혁신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중량 증가는 단지 튼튼한 기체 구축 때문에 초래된 것은 아닙니다. AH-64는 마치 전폭기처럼, 기체와 폭격 장치가 일체화된, 종래의 범용(유틸리티)이 아닌 공격 전용 무기입니다. 공격에 특화된 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종래의 헐렁한 녀석들과는 달리 몸이 엄청 무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엔진의 우수성은 이 점에서도 특별히 요구되는 사양이겠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병기는 미국에서 개발되었고, 군수 산업의 구조가 언제나 그렇지만 투자의 본전을 뽑기 위해서는 자국 국방부에 납품하는 걸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군사 무기를 애국심에만 의존해서 개발, 양산을 기대한다면, 제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어느새 군비 경쟁에서 타의 추월을 허용하고 말 것입니다. 미국 시스템의 무서운 점은, 엄청난 이윤을 노리고 민간에서 첨단 무기의 제작을 주도하는 구조라는 사실이죠. 다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는 것이, 이윤을 노리고 무기를 여기 저기 팔다 보니, 미국이 전혀 선호하지 않는 국가 혹은 세력의 수중에, 가공할 화력의 무기가 넘어가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테러리스트들이 어디서 그처럼 성능 좋은 무기를 얻어 펑펑 써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구조의 취약한 점에 대해 실감이 납니다. AH-64야 물론 총기류 따위와 달리 함부로 거래가 가능하지도 않고 일단 어렵게 손에 넣은 축이 함부로 남에게 넘기지도 않을 것이며, 리버스 엔지니어링 따위가 결코, 결코, 용의하지도 않겠습니다만. 여튼 이런 헬기가 굳이 개발될 필요를 부를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자체가 어찌 보면 참 미련한 악순환의 한 고리가 아닐까 하는 회의감이 듭니다.


다만 엔진의 우수성 기여도에 대해서는, 이를 수입한 각국마다 입장의 차이가 있습니다. 유럽(특히 네덜란드)과 일본의 경우, MD의 엔 진을 쓰지 않고, 자국의 고유 부품으로 대체한다고 이 책에 나와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재미있게도, 대신 장착한 그 엔진 역시 독자 개발이 아니라 또다른 당사자에 라이센스료를 주는 방식입니다. 아무튼 이는 아마도 수입국 측에서 비용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엔진 파트에만은 fee를 지급하지 않기 위해(혹은 줄이기 위해) 지국이 보유한 기존 자원을 재활용하는 방식을 선택해서가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추측해 보았습니다(책에 분명한 경위 설명이 없으므로). 그러고도 원활한 운용이 가능한 건, 이 AH-64의 성능 혁신이 엔진 개선에만 의존하지 않았다는 확증이 될 수 있습니다. 군사 무기를 각국의 실정에 맞게 "자기 버전"으로 수입하는 건 드물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구조 면에서도 재미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조종석이 후방에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동차건 비행기건 배건, 조종사는 내부의 가장 앞 좌석에 앉아야 한다는 선입견, 통념을 깨뜨린, 대표적인 역발상의 예라고 하겠습니다. 시야가 보다 넓게 확보되는 등 이런 개선이 부른 구체적인 장점들은 책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AH-64의 예는 아니지만, 이 책에 소개된 다른 헬기의 설명 파트에서, 적의 시야에 최대한 느리게 나타나기 위해(눈에 띄지 않기 위해) 탠덤식 구조가 나왔다는 사실에서도, 비단 군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경영 혁신 전반에 걸쳐 여러 시사점을 던져 주는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하겠습니다.


AH- 64에 달려 있는 성능 좋은 레이더는, 지상의 적군 배치에 대한 소상한 정보를, 탑승한 조종사와 전투 요원에게 알려 줄 뿐 아니라, 전술 전반을 결정할 멀리 떨어진 지휘부에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정보(의 일부)를 전달해 줍니다. 정찰기의 임무와 겹치지도 않습니다. 헬기는 군 편제상 육군 소속이므로, 이러한 기능은 기존의 커버 범위와 겹치지 않을 뿐 아니라, 공백 영역을 메꾸어 주는 역할입니다.


오래 전 영화(예컨대 로이 사이더 주연의 <블루 썬더>)에 보면, 360 도 회전을 묘사하면서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기적"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이런 가공할 무기가 더 이상 세계의 평화를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 하에, 철로에 세워 두고 파괴해 버리는 것으로 영화가 끝납니다. "현재 기술로는 불가능하다"가 아니라,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한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360도 회전은 그만큼 종래 상상이 어려웠던 고난도 기술의 구현입니다. 그 외, 이 헬기에서 빠질 수 없는 특장점 중 하나는 호버링 상태에서 벌일 수 있는 여러 빼어난 성능들입니다. 호버링은 이 책에서 "공중정지"로 번역되어 있지만, 공중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뚜렷한 전진 후진 없이 일대를 배회하는 걸 말합니다. 구약 성경 창세기 나오는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하는 그 "운행"입니다.


책의 저자가 일본인이다 보니 재미있는(이라기보다 유익한) 정보도 많습니다. 일본 자위대는 이 AH-64D를 일반 대중에 정기적으로 공개한다고 합니다. 국민 세금으로 운용되는 사항이라 국민의 감시와 관심에 노출되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원칙의 결과라고 하네요. 우리야 이런 첨단 무기를 보유하고 있지도 않지만(아직은요), 만약 보여 달라고 하는 일반인이 있을 경우 군 당국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지는... 그들의 실정에 대해 확실히 부러움이 느껴지기도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책에는 이 무기를 수입한 나라 중 이스라엘이, 이를 어떻게 운용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군사기밀이므로 당연합니다만, 이 책의 저술 시점이 아니라 지금에서는, AH-64D에 관심이 없던 대중도, CNN 기자가 매일 같이 읊어 대는 뉴스 때문에라도 모를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군의 AH-64는. 지금 가자 지구를 쓸어 대는 일에 열심히 그 성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책에는 "테러리스트의 경우 레이더에 감지되는 성격이 아니므로 아프간이나 이라크에서 이 AH-64의 성능이란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적고 있는데, 하마스는 주로 대공포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패턴이므로(하마스를 두고 테러리스트라 매도하는 건 아닙니다) 이 AH-64는 나름 톡톡히 제 할 일(...)을 하는 중인가 봅니다. 다시 1차 대전 당시의 여러 전황을 살펴 보게 되기도 하고, 영화 <블루 썬더>의 엔딩을 곱씹게도 하는, 마음이 착잡한 뉴스, 요즘 얼마든지 접할 수 있습니다. 이번 이-팔 간의 공방은 50일을 넘김으로써 최근 기준으로 최장 기록을 세우는 중이라는군요. 러분은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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