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의 자전거 세계일주 1 : 중국편 - 너와 나, 우린 펑요 찰리의 자전거 세계일주 1
찰리(이찬양) 글.사진 / 이음스토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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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많이 했던 작품입니다. 처음의 제목은 <찰리의 자전거 여행>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받아 본 책(공을 많이 들인 책이라서 그런지, 겉도 속도 참 예쁩니다)의 제목은 <찰리의 자전거 세계 일주>네요. 물론 저자 이찬양씨의 이름이 "찰리"이며, 이 책 제목 그대로 자전거 하나로 세계 일주를 하는 분입니다.

 

우리 인간은 냉정히 말해 환경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태어난 환경 그대로에 머무르면, 갖고 자란 기질, 천성의 한계, 그리고 낳아 주신 부모님에게 받을 수 있는 미덕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큰 사람이 되려면, 지금보다 나은 인생으로 거듭나려면, 배우고 익혀서 정신의 눈을 키워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육체의 성숙, 나아가 타인과의 관계와 소통의 차원까지 높인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며 간접 체험의 폭을 넓히며,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직접 체험의 수단으로 여행을 시도합니다.

 

책은 사람에 따라 그렇게 잘 맞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만약 아니라면, 출판계가 이처럼 불황에 시달려 할 이유가 없을 테죠). 하지만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간과 돈의 여유가 있어 유람을 자신의 취향에 맞춰 다녀오는 분들도 있을 테고, 저처럼 막 모종의 여정을 일 관련으로 마치고 온 처지도 있을 것입니다. 매번 보고 스치는 것만 접하다, 타지에서 확 다른 풍광을 몸에 끼얹고 돌아 오면 기분전환이 되는 것은 물론, 정신적으로 각성의 느낌을 받습니다. 여행은 그래서 일개 도락이 아닌, 교육의 일환이자 거듭남의 방편입니다.

 

저자 이찬양씨가 바로 그런 분이 아닐까 합니다. 약력만 보아도(책을 읽기 전부터 약력을 읽을 수 있었고, 참 대단한 분이다 싶었습니다) 그는 소위 글로벌 마인드를 지닐 수 있는 가정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더군요. 아마도 그 끼를 주체 하지 못하고, 혹은 배움에의 강렬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자전거 한 대에 몸을 싣고(사진을 보니 확실히, 패셔너블보다는 내구성에 주안을 두는 분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세계를 그저 몸뚱아리 하나로 일주하겠다는 포부로 무작정 나섭니다. 대단합니다. 자신의 말대로,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반드시 있기 마련인데도 말입니다. 여행의 기쁨이 있으면, 그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얻을 수 있었던, 혹은 가시적으로 희생한 그 무엇이, 그로서는 작지 않은 것이었을 텐데도, 그는 감연히 여행길에 나섭니다, 대단한 결단입니다.

 

기독교의 성경에서도 왜 "빛과 소금"이라는 말이 나오듯, 소금이란 인간의 삶에 있어 그 부존재를 감당할 수 없는 중요한 물질입니다. 일개 소금장수에 불과했던 황소가, 그를 통해 축적한 부(富)를 기반으로 난을 일으켰고, 그 부 축적 활동 와중에 쌓았던 인간 관계와 나름 터득한 지혜에 기대어 감히 천하를 갈무리하려 했던 그 행적에 비추어서도, 이 소금이라는 물질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찬양씨는 중국 여행(말이 중국이지, 얼마나 광대한 곳인가요! 이 책이 전 중국을 다 커버한 것도 아닌데, 책 두께가 이처럼 두꺼운 걸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더군다나 사진도 많지만, 다른 여행 서적에 비해 텍스트 양이 적지 않은 편인데도요)의 시발점을, 장쑤 성(강소 성)으로 잡고 있습니다. 옌청의 "옌"은 소금 염(鹽) 자입니다. 장쑤 성 밑의 저장 성(절강 성)에, 5대 10국 시절 오월(오와 월의 합칭이 아니라, 그냥 나라 이름이 오월입니다)이라는 나라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 나라를 세운 시조 전류가 바로, 소금 장사로 큰 부를 모은 경우죠.

 

보통 여행 서적을 보면 인문적 통찰이 그리 두드러지지 않은 채, 간단한 느낌이나 흔한 통념만 적고 예쁜 사진만 가득 채우는 일이 많습니다. 사실 우리들도, 어딜 여행 갔다 하면 "남는 게 사진이다"며 이런 태도에서 거의 벗어나질 못합니다. 이 책은 사진도 많지만, (앞서 적은 것처럼) 텍스트가 참 많은 편입니다. 지명을 한자(漢字)로 일일이 같이 적어 주는 태도도 친절하고, 저렇게 "소금 염"에 관한 작가의 생각을 깊이 있게 언급하는 것(그러나 이 서평에서 5대 10국 운운은 제 생각이고 작가분의 언급은 아닙니다)도 돋보였습니다.

 

책에는 무엇보다 "사람"이 넘쳐납니다. 여행길에서 만난 이들, 그 중 며칠을 같이 머무르며 친분을 쌓은 이들, 재래 시장에서 물건을 사며 잠시 스쳐 지나갔을 뿐이지만 그새 깊은 공감을 주고받은 이들... 사진에 잘 담겨진 풍광도 보기 좋지만, 책에서 가장 두드러진 건 못나든 잘났든 구질구질하든 산뜻하든 저마다의 정과 깊이와 색깔을 간직한 사람, 사람,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사진상의 모습으로는 그런 인상을 안 받았는데(죄송합니다 ㅎ) 작가분은 신신실한 기독교 신도이신가 봅니다. 성함이 물론 이찬양이시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속단할 수 없는 문제인데, 작가는 여행 곳곳에서 큐티를 통해 마음을 다잡고 힘을 얻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결국 작가분이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어느 곳에서나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예: 재래 시장의 음식은 싸고 맛있다)." "겉으로 모든 걸 판단할 게 아니다. 누가 중국 땅에서 영어로 능숙하게 말을 걸어 오는 노인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겠는가?"

 

반면 자신의 지식, 그리고 인식상의 한계를 쉬이 인정하고 반성에 잠기는 모습도 엿보입니다. 지금 이곳은 중국 남부라서, 장쑤 성, 저쟝 성, 그리고 광둥 성까지 죽 내려가다 보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만이 나오죠. 현지의 지도를 보니 대만은 중국의 성 중 하나로 표시된 걸 보고 놀라는 모습이 나옵니다. 현지인들의 인식 역시 "당연히 중국의 성(省)인 것을 무슨 소리인가?" 같은 반응입니다. 여기서 하는 말이 걸작이죠. "나도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당연히 그렇게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아는 대로, 대만은 중국의 행정력이 미치지도 못하고, 진입하려면 출입국 절차를 밟아야 하는 별개의 주권 영역입니다. 현실이 그렇습니다.

 

여행은 분명 나의 한계를 깨치고, 더 나은 자아를 구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 중 하나입니다. 자전거 하나에 몸을 싣고, 나 아닌 다른 사람, 내 겨레가 아닌 이족의 생활과 풍습을 보고 더 나은 미래와 비전을 도모함은, 우리 누구라도 작은 가슴에 품어 온 하나의 소망입니다. 신중하게 쓰여진 이 책(앞부분은 2007년에 쓰여진, 즉 2007년에 답사한 기록이더군요. 그는 장장 7년 동안 자전거 하나에 의지해서 세계 일주를 마치고 이 책을 이제 펴내기 시작한 겁니다.....)을 통해, 우리는 그 대리만족을 충분히 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의 여행을 대신 떠나 주는 이찬양씨의 후속작, 정말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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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말해줘
존 그린 지음, 박산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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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의 최대 미덕은, 물론 감동적인 이야기 구조의 창조에도 있습니다. 아직 한창 나이들이고, 더군다나 학교 최고, 아니 그 지역 일대에서 최고 킹카로 소문난 남자애가, 얼토당토 않게만 느껴지는 암에 걸려서 곧 죽을 운명이라니, 세상에 이처럼 부당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살 만큼 산 늙은이들 중에, 남에게 몹쓸 짓을 한 극악무도한 치들도 많을 텐데 말입니다. 천도(天道)라는 게 있으면 그런 것들을 먼저 데려가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대체 그 생떼같은 소년에게 무슨 죄가 있다는 건지요. 그래서 소설 제목은, "인간에게는 무슨. 잘못은 그저타고난 별자리에나 있었을 뿐인가보지." 같은 냉소적, 체념적 어구를 달았던 것이었습니다.

 

이 소설 <이름을 말해줘> 역시, 존 그린의 진짜 재능이 어디 있었는지를 확연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전작이 이야기상 그 이상으로 비극적일 수 없는, 대단히 부조리한 스토리를 다루고 있었고, 뻔히 예견할 수 있는 주인공의 죽음이란 결말을 영리하게 예비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이 작품은 그 비결을 고스란히 살려 가며, 전작에서 심각하게 상처 받은 마음을 능수능란하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습니다. 그 비결이란 바로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존 그린만의 천재적인 말솜씨와 재치입니다.

 

영미소설의 진짜 매력에 대해 우리 국내 독자들은 간혹 오해하는 바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고급 문예를 이끌어가는 선두 주자이고, 이미 동양의 그것을 역전한 지 오래인 문예, 그 전통의 어드밴티지를 입어 그 깊이와 우열 면에서도 (솔직히) 우리의 것을 넉넉히 앞지릅니다. 그들 역시 그들만의 정서와 느낌에 갇히는 바 없지 않을 텐데도, 이를 달성하고 남은 힘만으로 지구 반대편의 우리들에게까지 이처럼이나 보편적인 공감을 전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존 그린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진짜 강점은 쉴새없이 터져 나오는 고급의 유머와 해학에 있습니다. 물론 이 작품에서 존 그린 특유의 말장난은, 전작에서만큼은 돋보이지 않습니다. 전작의 경우, 감당이 안 되는 최루적 상황이, 현란한 유머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일종의 호조건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반면, 이 작품 <이름을 말해줘>는 어떨까요? 주인공 소년(결국 전작처럼 초점은 남주에게 놓인다는 것 역시, 아직까지는 눈에 띄는 설정상의 한계이자 여성 독자들의 불만일 것입니다)이 천재형 두뇌를 가진 것으로 나오기에, 또 저들 문화권에서는 재담(才談)의 만발이야말로 정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하나의 증거로 보기에, 이 소설에서 어느 정도 말의 향연이 펼쳐질 지야 독자들이 그 마음의 준비를 잔뜩 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습니다.

 

냉정히 말해 약간 쉬어가는 작품으로도 보입니다. 존 그린의 작품은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잘 돌아가는 두뇌를 가진 인물을 등장시키는 편을 선호하죠. 전작에서는 비록 조연이나 플롯의 핵심에 기여하는 (노년의) 네덜란드 작가가 나왔었고, 이 작에서는 보시는 대로 (어린) 남주 자신이 그런 인물입니다. 본디 장유유서의 개념이 없는 그들이지만, 여튼 우수한 두뇌의 힘을 빌려서건 (그렇지는 못하나) 순수한 마음의 원활한 작동에 기댄 재치의 발휘이건, 날카롭고 재치있는 언사의 대결 역시, 언제나처럼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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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레터스
헌터 데이비스 지음, 김경주 옮김 / 북폴리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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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발달로 대중의 시대가 본격 개막한 이래, 비틀즈만큼 전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던 예인 집단은 아마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밴드를 이룬 4인 중에서도, 특히 사실상의 리더였던 존 레넌은, 뮤지션으로서 이룬 음악적 성취와, 인도주의자, 평화애호가, 그리고 뚜렷한 개성을 지닌 한 인간의 행적, 이 두 가지 면에서 강력한 인상을 당대인, 그리고 후대인에게 남겼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한 정신이상자의 습격을 받아 유명을 달리한 충격적 사건 때문에, 존 레논은 그를 사랑하던 이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그를 딱히 사랑하지 않았거나, 무시로 그가 대중을 향해, 정치인들을 겨냥해, 타락하고 폭력적인 세상을 두고 던지던 메시지 때문에, 그를 꺼리기까지 했던 이들에게조차, 깊은 인상을 주었고 특별한 존재로 남게 되었습니다. 최근의 신해철 씨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아직 때가 아닌데 일찍 갔다"고 여겨지는 이들, 특히 예술인들은, 더 각별한 의미로 동시대의 살아 남은 자들 그 뇌리에 새겨지는 지도 모릅니다. 그 죽음의 과정이 안타까울수록, 혹은 불의스러움이 더 깊이 개입했다고 여겨질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 충격적인 죽음을 통해, 일종의 신화로 남았는지도 모릅니다. 존 레논은 물론 아름다운 목소리, 그리고 그가 남긴 노래들을 지구촌 곳곳의 누구라도 애송, 애창하는 그 범위와 실태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인류가 배출한 뮤지션 중 단연 첫째, 둘째의 왕좌에 놓여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음악성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논자에 따라서는, 음악적 역량으로만 따지면 같은 팀의 폴 매카트니에 미치지 못했다고 평하는 이도 있습니다(물론, 예인의 능력치 순위를 매기는 것만큼 미성숙하고 불필요한 소동도 없다는 점에서, 누구 사이의 무슨 우열을 따지는 일은 진정 무의미합니다). 하지만 매카트니의 그것에 비해, 존 레논의 현재 위상이란 단순 비교가 좀 어려울 만치 높아져 있습니다. 그는 거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어떤 위격을 가진 반신(半神)적 존재나 아닐까 때때로 착각될 만큼입니다.

이 책은 존 레논이, 그의 지인들과 연인, 그리고 다양한 관계자들에게 띄운 서신을 모아 놓고, 이를 비평적으로 분석하거나 회고하는 책입니다. 제목이 저렇게 되어 있어서 정말 편지만 모아 놓은 책인가 보다 하고 잘못 생각했더랬습니다. 존 레논의 노래들을 평소에 흥얼흥얼 읊는 이들이라고 해도, 그가 보인 후년의 다분히 정치적인 행보에 대해서는 불편해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런 사람이라면, 그가 남긴 편지에 대해서도, "또 무슨 설익은 평화주의자 특유의 몽상적 푸념이나 잔뜩 담겨 있을 듯" 같은 오해나 부르기 쉬울 것 같은 겉모습이었죠.



사진에서 보시듯, 책은 제법 큰 사이즈에 두껍기까지 합니다. 펼쳐 보면, 고급 백상지에 천연색 인쇄더군요. 이런 책치고는 값이 비싸지 않은 편이라(비슷한 사양에 3만원대 후반~ 4만원대 초반까지 매겨지는 경우를 많이 보아서요), 아 내용은 그냥 레논의 편지만 줄창 나오겠구나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저자들의 설명과 분석, 주석, 평가가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네요.




그가 보낸 엽서(위에 적었지만 천연색 인쇄라서, 당시 이런 예쁜 엽서가 발행되었구나 같은 눈호강을 독서에 겸할 수 있습니다. 우표도 아니고 민간에서 자유로이 찍을 수 있는 엽서야 하긴 얼마나 많겠습니까만, 이것이 존 레논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실물이 아니라 책에 인쇄된 모습으로도 참 귀하게 여겨지던데요), 편지 여백에 남긴 재미있는 낙서, 그리고 존 레논과 그 주변 인물들을 담은 다양한 시기의 사진들이 실려 있습니다. 이런 도판의 양이 꽤 많습니다. 거의 두세 쪽을 넘길 때마다 두어 컷은 꼭 나오는 비율입니다. 솔직히 보기 드문 이런 컨텐츠를 구경하기만 해도 책 읽기의 본전은 뽑고도 남는다고 생각이 든다는 점에서, "책값이 싸다"는 생각, 다 읽은 후인 아직도 떨칠 수 없습니다. 흐뭇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참 존 레논에 대해 아는 게 없었구나"하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그가 데뷔하기까지 거쳤던 이런저런 업계의 실력자들, 신인 시절부터 전성기, 그리고 사회활동가로서 사실상 전업하기까지 계약 관계에 있었던 업자들과의 사연은, 다른 책이나 신문 특집 기사에서 피상적으로나마 접해 왔었지만, 이 책에는 그보다 훨씬 풍성하고 심도 있는 에피소드, 아니 역사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들려 주고 있었네요. 그래서 이 책은, 인물 평전이자 한 예인을 통해 바라본 단대사라고까지 여겨졌어요.




번역도 세심합니다. 아시다시피 존 레논은 그 무수한 히트곡(이렇게 부르자니 너무 그를 세속적으로만 평가하는 것 같아 좀 삼가지기까지 합니다. 이제는 일종의 경전이 되기도 한 셈인데요)의 가사를 손수 지은, 시인을 겸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가 남긴 짤막한 글귀, 엽서에 적은 소회 등은, 그가 유명인(셀러브리티)이라서 값지기만 한 게 아니라, 어떤 문학적 가치까지를 부여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간단한 느낌을 친우들과 나눌 때도 예사롭지 않은 감각으로 어휘를 골라 썼습니다. 쓰는 말이 어렵다는 게 아니라. 그 단어를 이런 문장과 맥락에 사용하는구나 하는 생경함, 그리고 감동 같은 느낌이 들게 말입니다. 1960년대 극심한 인종 차별과 사회적 갈등 때문에 사분오열된 미국을 두고(오죽했으면 1968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 공화당의 닉슨이 "TO BRING US TOGETHER"를 모토로 내걸었을까요), the disunited states라고 비꼰 대목이 있습니다. 물론 미국의 정식 국호인 the United States를 뒤튼 것입니다. 이 문구를 역자는 "비(非)합중국"이라 옮기고 있습니다.  흐뭇한 웃음이 나왔고, 책 한 권을 꾸려내는 출판사의 성의와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네요. 독자로서는 고마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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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거짓말 말의 거짓말
남재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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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읽는, 머리가 뻐근해지는 인문, 사회, 그리고 정치 분야를 속속 파헤치고 진단해 주는 담론서(에 가까운 저널)을 읽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어떤 사람 혹은 어떤 말을 두고 "거짓"이라고 규정하는 행동이 아주 큰 모욕이고, 공격이 된다고 합니다. 사회에서 오가는 수많은 말들 중에, 상당수가 (어떤 이유에서건, 또 누구로부터건 간에)"거짓"이라고 불린다면, 그런 딱지붙임이 거짓이든 참이든 간에 비극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이 진짜 거짓이 아니라고 해도, "거짓말이야!"를 외친 이는 간절히 거짓이라 믿고 싶었다는 뜻이고, 진짜 거짓에 불과했다면, 그렇게 태연히 거짓이 통용되는 사회는 어딘가 병이 단단히 들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자 남재일 교수님은, 거짓말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눠서 보고 계신 듯합니다. 첫째는 "사람의 거짓말"이요, 둘째는 "말의 거짓말"입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사람의 거짓말이란 말 그대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거짓말을 의미한다고 이해했습니다. 부당한 잇속을 차리기 위해 하는 거짓말,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 당장 면전에서 듣기 좋은 언사를 꾸며 댈 때 동원되는 거짓말,... 여기에는 물론, 정치인들, 자본가들이, 무지한 대중,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향해 교묘한 선동, 상징 조작을 할 때 쓰는 수단도 포함되겠습니다. 이런 거짓말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의 각종 현상이나 사건을 볼 때 표피적 관찰에 머물지 않고, (여러 철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이 꾸려 낸 담론의 도움을 얻어) 그 구조의 허구성을 간파할 줄 알아야 한다는 조언을, 저자는 이 책 전체를 통해 우리 독자에게 일러 주고 계십니다.

 

다만 제가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시원히 풀지 못할 숙제로 다가 온 건, "말의 거짓말"이 대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우선 저는, 표의자의 진정이 가득 담겨 있는, 그리고 논리적 치밀함도 겸비하고 있는 "말"이긴 하나, 당장 그 말이 표의된 시점에서의 현실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탓에, 현상적 거짓으로 판명되거나, 모순 심화의 하부 도구로밖에 기능하지 못하는 담론을 그리 부르시는 것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음으로, 그 말을 이해하는 입장에서의, 고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소통 과정에서 발생한 곡해, 오해를 통해, 결과적으로 거짓이 되고 만 말들을 그렇게 부를 수 있지 않을지, 급한 대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이 주제어들을 두고 과연 어떤 식의 개념정리가 가능할지, 또 정(定)해진 정(正)답이 무엇이든 간에, 저는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그 아름답고 우아하게 빚어진 문장에 대해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아한 문장이 흔히 놓치기 쉬운 미덕이, 명료함과 (많은 경우 진정성까지를 그대로 담고 있는) 직설성입니다만, 남재일 교수님의 이 책은 그런 목표들까지도 전혀 놓치지 않고 계십니다. 우아한 문장은 각 문단의 적절한 길이와 내용적 안배가 이뤄져야 돋보이고, 다양한 개념어들이 각기 정확한 의미로서 인용, 원용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은 분들이라면, 인용은 인용대로, 저자분 고유의 주장은 또 그것대로, 참 아름답고도 명쾌하게 구사된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느낌을 받으셨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교수님은 분명한 자신의 정치적 주장(그는 누가 뭐래도 이 책에서 정치적입니다)을 전달하는 데에,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모호해지지 않습니다. 그는 그가 규정하기에 타락한 정치인(여기에는 보수정당은 물론, 현 야당 측의 김광진 의원 같은 이도 포함됩니다)이다 싶은 이들에게, 쓰디쓴 고언을 넘어 준열한 단죄를 서슴지 않습니다(여기에서 그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그 유명한 "애정의 결핍"을 끌어오고 있습니다. 특정 세대에게는 사실 너무도 인기 있던 철학자라서, 모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현재 큰 논란을 빚고 있는 모 사이트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도, 잉여인간의 원한과 좌절을 해소하는 수단으로서 정치적 액션을 취하는 그들에게, 정치적 위상을 부여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경멸과 무시"를 처방합니다(여기에는, 이미 나치 발호 시점부터 그들의 허상과 정체를 꿰뚫어 보았던 라이히 같은 철학자의 담론이 적절히도 원용됩니다).

 

문장에는 빈틈이 없고(형식, 내용 모든 면에서 그러합니다), 신랄하면서도 때로 유머를 잊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정말 글이란 (혹시 쓰게 된다면)이런 방법으로 써야겠다는 각성과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직정적 표현으로 시원하게 대중을 대변해 주는 이들도 많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답답한 현상을 타개하려 애 쓰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강력한 논리와 화려한 언변으로 무장한 적수를 시원히 논파해 주는 논객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돈되고 정확한 어휘, 문장, 글월로, 복잡다단한 현상을 그 심연까지 파고 들어가서 이처럼 명쾌하게 규정, 해명, 분석해 주는 글은 근래 참 오랜만에 읽어 보는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각 글들이, 어떤 일관된 계획 하에 한 권의 책으로 묶이기 위해서 저술된 게 아니라, 매체에 기회 있을 때마다 기고된 글들을 모은 것이라 더욱 감탄을 자아냅니다. 남재일 교수님께서, 이 가망 없고 출구가 닫힌 듯 암울한 세태를, "한 큐에" 꿰고 정리할 수 있는 종합적 담론을 담은 체계서(體系書)도 가까운 시일에 출판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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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감옥 - 생각을 통제하는 거대한 힘
니콜라스 카 지음, 이진원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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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기기의 폐해라고 하면, 이를 지적함에 있어서 특별히 인문적 소양이 필요하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쉽게 말해, "아무나 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도 인문적 패러다임을 그 도구로 하여, 남들이 쉬이 보지 못하는 점을 지적하고, 나아가 우리 사회의 미래 그 구체적인 패턴 변형까지 지적하는 저자가 있습니다. 바로 이 책을 쓴 니콜라스 카가 그 사람입니다. (작성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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