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 최신 인지심리학이 밝혀낸 성공적인 학습의 과학
헨리 뢰디거 외 지음, 김아영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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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과목이 절대 평가로 전환된다든지 하는 조치로, 앞으로 학생들은 입시 지옥으로부터는 점진적인 해방을 맞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사실 과거와는 달리, 요즘은 입사 전형에서도 대학 간판을 잘 보지 않는 추세라, 이 책에도 나오는 표현처럼 과연 명문대 졸업장이 당사자에게 과연 큰 도움이 될지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 있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과거에는 고3 시절 열심히 공부하다 좋은 대학 진학 후엔 (특별한 일 없으면) 무난히 졸업해서 좋은 직장 얻는 게 정해진 코스였습니다. 그러나 평생 직장 신화가 무너지고 나서는, 중간 간부직 이상으로 승진한 후에도 공부 안 하면 하루도 못 버티는 형편이 되었죠. 오죽하면 삼전에 근무하는 이들이, 라이벌 모 전자 직원들을 두고 "너희들이 여기 오면 얼마나 버틸 것 같냐?"고 조롱하는 분위기가 아주 어색하지만은 않은 반응을 얻습니다. 그 모 전자 역시, 입사하기에 얼마나 어려운 곳입니까.

 

입시를 앞둔 아이들뿐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접한 후 이른 시간 안에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업은, 이제 경제 활동을 하는 인구 모두의 미션이 되어버린 현실입니다. 일단 현장에서 바로 써먹어야 하기 때문에, 신속히 습득하는 것도 문제이고, 이 습득한 지식으로부터 2차 성과를 내기 위해, 자신의 머리 속에 진득히 장착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가면 갈수록, 그저 무난한 직장인 정도로 사는 것조차 힘들어지는가, 그건 (역시 이 책에도 나와 있듯) 지금 세상이 유난히 지식 폭발, 신기술 이노베이션이 인류 역사상 초유의 모드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서 그렇습니다. 앞 세대들은 이런 곤란을 겪은 적이 없고, 은퇴한 지금은 노동 능력이 부족하니 기득권에 집착하고, 요즘 세대들은 일은 일대로 힘들고 손에 떨어지는 건 더 빈약하니 세대 간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하죠. 그렇다고 개인 차원에서 당장 구조를 뒤집을 힘은 없으니, 현 직장이 요구하는 바 과업을 충실히 해 내는 게 그나마 최선의 선택입니다.

 

사회의 실정이 이러니, 아이들에게 현실을 들려 주면 "이 지옥을 통과해도 더한 지옥이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깊은 절망에 시달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현실 도피, 왜곡이 정답일 수는 어느 경우에도 없는 법입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결국 평생 공부하는 길만이 생존의 비결이라면, 바르게 공부하는 방법을 익히는 수밖에 없죠. 흔히 하는 말로, 물고기를 먹이지 말고 그 잡는 비결을 가르쳐 주라고 합니다만, 거액의 유산- 그 형태에 따라 시세의 변동, 혹은 경솔한 판단으로 하루 아침에 날아가 버릴 수도 있는- 을 물려 주는 것보다, 배운 후 평생 재활용, 변형 응용이 가능한 지식을 아이의 머리에 깊이 심어 주는 게 더 고마운 부모의 은혜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읽으면서 충격을 선사하는 내용을 가득 담고 있더군요. 저는 제 나름대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자님의 그 유명한 학이(學而)편 서구(序句)처럼,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것"만한 공부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말이죠, 지금 이 책에 따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었더군요. 그것 참....

 

먼저, 무작정 기계적으로 행하는 복습은 아주아주 해롭다는 게 저자들의 결론입니다(이 책은 단일 저자가 쓴 게 아니라, 학습 방법론과 심리학에 정통한 여러 학자들의 콜라보, 그리고 실증적 실험과 연구의 결과물입니다). 사실은 본인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보기만 보다 보니, "모르는 걸, 혹은 깊은 이해도 이뤄지지 않은 걸, 안다고 착각"하고서는, 약점을 보충하거나 깊은 내용으로 파고들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지적은 정말 너무도너무도 타당한 사항입니다. 제가 현재 실무에서 자주는 아니라도 종종 겪는  일이거든요. "아니 그게 그런 뜻이었어?" 마치... 뭐랄까요. 와이프의 고마움을 모르고 그녀의 진가를 평가하지 못한 채(와이프 좋은 일 시키는 게 아니라, 내 아내가 이런 사람이었어?를 먼저 알고 그녀를 즐겁게 해 주면 그건 나에게 좋은 일이라고 상무님이 그러시더군요 ㅎㅎ) 맨날 보는 여자라면서 심드렁하게 대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습관의 반복은 권태기로 이어지고, 뜻하지 않게 "위기의 부부"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죠.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즉 메타적 재귀적 비판 없이, 반복적으로 그저 보다 보니 내가 아는 것, 내가 잘하는 것이겠다 착각하는 건, 누적이 되어 치명적인 업무 실책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겪은 건, 처음에 좀 고생이 되더라도 이해 안 되는 부분을 확실히 짚어 가며, "이 모호한 설명은 진짜 의미가 뭘까?", "이 부분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까?" 라며 물어가고 검색하고 여러 권의 책을 찾아 보는 노력이, 그 지식을 진짜 머리 속에 오래 남게 하는 비법이더라는 겁니다. 이건 제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부분입니다. 엉터리로 의대 공부 마친 놈팡이가 평생 돌팔이 노릇하는 것이나 비슷하다고 할까요?

 

이런 의미에서, "배우고 (기계적으로) 때때로 익히"는 건, 만약 그 "습(習)"의 의미가 종래 피상적으로 이해한 바의 확인에 불과하다면, 아주 치명적으로 해로운 방식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 그러면, 그 구절의 앞부분, 즉, "배우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니, 무엇이어야 할까요?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게, "자기 주도 학습법"입니다. 누구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해 나가는 방법이야말로, 이상적인 공부 패턴이요 자립형 인격의 완성이기까지 한 의의를 지니고 있겠죠! 누가 감히 동의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위에 제가 스스로 찾아 나가는 학습법의 미덕을 적어 두기도 했습니다. 아닌게아니라요) 이 책 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도 문제가 크다는 말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자기 주도 학습의 크나큰 맹점은, 말 그대로 자기가 주도하다 보니, 크로스 체크, 혹은 메타적 시선에서 자기 반성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해, 틀린 게 있어도 자기 확신에 빠져(똑똑한 사람일수록 더 이런 경향이 강합니다), 틀린 줄을 모르고 그대로 프로세스를 진행해 나간다는 거죠. 이게 예를 들면, 단어 뜻을 잘못 알고 있거나, 수학 문제를 잘못된 방법으로 접근해 나가도, 내가 본래 잘하는 사람이니 내 방식이 맞겠거니 하고 고칠 줄을 모릅니다. 그러다가 그 방법이 안 통하는 문제에 처음 직면하고서야 큰 낭패, 회복 불가능한 실패를 겪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들은 타이거 우즈 같은 천재형 스포츠 선수도, 우수한 코치를 언제나 곁에 두는 팩트를 지적합니다. 우수한 인재일수록, 매너리즘에 빠져 어느 순간 잘못 들어선 경로를 수정하지 않기 때문에, 곁에서 쓴소리를 하는 멘토를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역사의 예를 들면 당 태종 이세민 같은 사람이 그랬습니다. 이 사람은 머리도 좋았고, 무예도 뛰어났으며, 전술 전략의 판단도 아주 명쾌하고 신속하게 내리는, 한마디로 사기 캐릭터였습니다. 위징은 반면 자신의 정적이었던 형의 최측근 모사였고, 형의 세력이 완전 파멸한 후에도 (이미 최고 실력자가 된)자신 앞에서 죽을 각오로 할 말은 하는 위인이었죠. 그러나 이세민은, 메타형 자기 체크를 언제나 곁에 두고행해야 내가 살아남는다는 뚜렷한 자각이 있었기에, 위징을 죽이지 않고, 아니 죽이기는커녕 지근거리에 중신으로 대접하며 그의 쓴소리, 멘토링을 경청했습니다. 잘나가는 사람일수록 더 코칭이 필요하다는 건 이를 두고 이름입니다.

 

저자들은 그런 주장을 합니다. "요즘은 뛰어난 학습자일수록, 그리고 머리에 더 정돈된 지식과 판단 체계가 구축된 사람일수록, 자기 교정 작업에 능숙하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일이 안 풀리고 성과를 못 내는 사람일수록, 잘못을 고치기는커녕 비뚤어진 보상 심리로 오히려 자기주장의 고수에 더 맹목적으로 집착한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본업에 몰입하기보다, 도피 심리에서 거대 담론에만 빠져들기 쉽기도 하고요. 일이 안 풀릴 때, 귀인(歸因)을 외부에서 찾기보다, 나의 학습 방법이 잘못된 바가 없었는지 먼저 반성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참으로 유용한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읽고, 공부가 잘 안 되는 아이에게 마음을 터놓은 대화를 시도하기에 좋은 책입니다. 이런 방법론을 주제로 하고, 기존의 통념을 다 뒤집고 실무에까지 도움을 주는 책을 극히 드물게 보았기에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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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공명 병법서 - 마음을 공략해 천하를 얻는 최고의 전술서 마니아를 위한 삼국지 시리즈
제갈공명 지음, 조영렬 외 옮김, 모리야 히로시 해설 / 서책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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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국은 인간의 마음을 파악하고 사로잡는 것이 병법의 요체라는 게 이 책의 포인트라 하겠습니다. 제갈량은 <연의>에서 신출귀몰의 반신반인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일반의 선입견과는 달리 충직한 공무원, 섬세한 관료형에 가까웠다는 게 정사에 나온 그의 진면목이라는 점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정사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대단히 치밀한 사고의 소유자요, 그리고 정석적인 매뉴얼(요즘 표현을 굳이 쓰자면)에 충실한 하이 레벨 뷰로크라시의 미덕을 신봉하는 인물이었지만, "임기응변"에 약하다는 게 치명적 단점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진수 개인의 평가이며, 야사에 따르면 제갈량 가문과 진수가 개인적으로 알력이 적지 않았다는 설도 있고, 이에 맞게 <연의>의 일부가 윤색, 곡해되었다는 설도 있으므로 다 믿을 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할 건, 실제로 촉으로부터 잦은 동병으로 중원을 노렸음에도 불구, 그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촉의 국력이 위보다 현격히 떨어졌고, 가용 자원도 크게 빈약했다는 점도 고려는 해야겠지만 말입니다.

이 책은 그러나 제갈량의 바로 그 장점, 즉 임기응변에 능하지는 못하더라도 결정적 시기에 큰 패착을 저지르는 과오를 면할 수 있는, 확고한 매뉴얼을 (평소의 시행착오를 통해) 완성한 후, 그에 충실히 따르며 파국을 면하는 바로 그 장점을 확연히 엿볼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정사 삼국지에 나온 그 모습 그대로, 마치 음성 지원이 되는 듯한 제갈량의 컬러 가득한 명제와 가르침을, 이 책은 한자 원문의 소개와 더불어 우리에게 일러 주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모든 병법의 기초임을 역설하는 그의 논지입니다. 맹자는 그의 저서 중 공손추 편에서,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는 유명한 논변을 펼친 적이 있습니다. 평범한 인간들은 반대로 이치를 새기기 일쑤입니다. 나의 주변을 바로하지 못하고, 환경과 조건을 탓하며, 환경과 조건이 유리하게 조성되면 이번에는 천운이 좋지 못해 일을 그르쳤다는 등의 핑계를 댑니다. 거꾸로라고 봐야 합니다. 제아무리 시운이 승(勝)하고 물적 조건이 유리한 상황에서도, 측근 인사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한 채 추진하는 프로젝트는 모두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업도 전쟁이고, 수주 하나를 확보하는 것도 중원의 요충지를 누가 먼저 점령하느냐만큼 중요한 쟁탈전입니다. 이런 점에서, 亮의 육성을 고스란히 담은 이 책은 일의 진퇴를 결정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잘 일러 준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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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화 - 원형사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김용운 지음 / 맥스미디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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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비슷한 생김새, 피붓빛, 신장(身長)을 가지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서로 부딪히고 갈등하는 일이 잦을까요? 한, 중, 일 3국의 서로 차별되는, 그리고 많은 경우 상충하는 정서가 이 모든 사단의 근원이 아닐까 짐작은 합니다.

 

우리 동아시아 3국은 유교 문화권이라는 점도 비슷하고, 감성이 풍부하며 쌀밥을 주식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역사를 통해서도 그렇고, 현재 격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국외자(局外者)인 서양인들이 보면 대단히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도 동남아시아에 자리한 타이,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말레이시아인들이 서로 얼마나 감정이 좋지 못하며 민족 간에 분쟁이 잦은지를 접할 때마다 놀라곤 하죠.

 

냉정히 돌이켜보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남들이 보기에나 닮았지, 내부 당사자끼리는 엄청 이질감이 느껴지고, 닮은 듯하면서 속이 엄청 다른 것이 오히려 곁에서 더 못 견딜 일일지도 모릅니다. 환경과 섭생의 산물인 외모와는 달리, 내면의 원형적 정서는 외관을 배신하며 서로 상극의 차이를 보이는 일이 허다합니다. 이를 두고, "원형(原型)적" 정서의 차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들이 많았습니다. 싸움을 하고 갈등을 빚고 서로 증오하는 일이 너무 잦으면, 당사자의 생존이나 세계 평화에 큰 지장을 줍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각 민족의 마음과 생각, 지향을 구성하는 문화 원형적 요소에 눈을 크게 뜨고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 김용운 박사님은 "한국의 버트란드 러셀"이라는 평가를 받는 분입니다. 러셀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20세기 전반에 활약한, 수학자(수학자로서의 경력이 가장 먼저입니다), 철학자, 그리고 사상가이자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한 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박학다식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투옥도 겪으면서 자신과 생각을 달리하는 이들을 감화하고 설득한 분이었죠, 러셀 경과 생각을 같이하는 이들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세계는 이미 지난 세기에 3차 대전을 겪고 핵전쟁의 여파로 멸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김용운 박사님 역시 수학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펴시고, 기초과학의 대중화에 공헌한 대원로이십니다. 그는 일본에서 수학하고 미국에서 청장년기 연구 활동을 행한 국제적 석학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이분이 쓰신 <재미있는 수학(數學) 여행>을 읽고 기본 마인드를 다진 경험이 있어서, 박사님의 존함이 나온 모든 책들을 읽을 때 각별히 호기심과 신뢰가 생기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이 책을 읽으면서, 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신세계를 체험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우리가 아놀드 토인비의 <세계사 대계> 같은 책을 읽으면, 그 보는 시야의 웅대함과 비전의 깊이에 압도되곤 합니다. 책을 읽을 때는 각론을 세밀하게 판 전문서를 읽어 줘야 할 때가 많고, 그런 책을 읽어 내어야 뭔가 뿌듯하니 공부한 느낌이라도 들곤 하죠. 그러나 때로는 아주 높은 하늘 위에서 아래를 조감하기도 해야, 정신이 맑아지고 방향 감각을 잘 조율할 수가 있습니다. 애를 써서 한 분야를 천착하긴 하지만, 너무 좁은 범위에만 집중하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게 보통이죠.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탁월합니다. 토인비도 우리 한국인의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인 석학이었지만, 이 책은 마치 그 토인비가 잠시 한국인의 몸과 영혼과 언어와 스탠스를 빌려, 자신의 저서에 대한 동북아시아판 각론을 차분히 설명해 주고 있는 느낌입니다. 박사님은 지금 치열한 대립, 소모적인 감정 싸움을 벌이는 한 중 일 3국의 갈등, 그 근원이 과연 어디에 있었는지를 세밀하고도 거대한 스케일로 해명 해 주고 계십니다.

 

제목에 대해 착각하시는 분들도 있는데요. 풍수화는 독립 키워드 세 글자를 하나씩 따서 연결한 형태입니다. 한국인의 정서는 바람 즉 風으로 대변되고, 중국인의 마음 그 원형은 물, 水이며, 일본인의 그것은 불, 즉 火란 뜻입니다. 음양오행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동아시아인들이 그 사상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기본 프레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만, 박사님은 그 중 한 글자씩만을 골라 내어, 복잡다기하고 그 깊이를 모르게 꼬이고 꼬인 동아시아인 무의식 심층 구조를, 정말 재미있게 해부해 주고 계십니다.

 

박사님은 과연 전공이 어느쪽이신가 궁금할 만큼, 역사와 언어학에 대해 탁월한 식견과 통찰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계십니다. 일단 박사님은, 백제 멸망을 확정지었던 백강 전투에서, 왜군이 패퇴하고 열도로 물러나 앉은 사건이, 이후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십니다.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한반도에는 본디 백제계와 신라계가 그 남부를 반분하고 있었으며, 백제계와 신라계 모두 일본 열도에 진출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던 것이, 당나라 세력을 등에 업은 신라가 수륙 양면에서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 왕실이 무너지고, 그 잔존 세력이 일본 천황가를 세워 반도에 대한 극단적 적대 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겁니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생긴 것도 이때 이후이며,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긴 한반도 패주사에 대해 철저히 망각하고자 정반대의 기술로 새로운 정체성을 앙양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책이라는 게 저자의 시각입니다.

 

일본서기를 두고 저자는 신화적 접근 방식으로, 저술 당시의 일본인들이 지난 역사와 앞으로 열도인들이 취해야 할 방향성이 어떠했는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진구 황후가산욕을 참으며 돌로 자궁을 막고 반도에 진출하여 정벌을 마치고 귀국하였다는 대목은,  낯선 중국인들의 힘을 빌려 백제계의 토대를 말살한 신라계에 대한 적대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 준다고 합니다. 알려진 것처럼 일본에는 두 천황가가 양립하며 남북조를 형성하고 대립한 분열기가 있었는데요, 저자는 이 역시 다이라씨(平氏)와 미나모토씨(原氏) 사이의 항쟁도, 백제계와 신라계의 싸움으로 봅니다.

 

이는 참으로 흥미진진한 게, 실제로 다이라씨의 후손을 자처한 풍신수길은 임진왜란을 일으키며 한반도를 쳐들어 왔고, 신라계라는 미나모토 씨의 후예(역사적으로는 확실치 않습니다)인 덕천가강은 조선 왕국과 화친을 꾀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하나하나 맞아 떨어지죠. 그뿐이 아닙니다. 메이지 유신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조슈 - 사쓰마 번 연합체가 일으킨 패권 전환 모멘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서쪽에 웅거한 번 세력도, 알고 보면 일본 열도 서쪽에 기반을 둔 백제계의 후손이라는 거죠. 결국 백제계는 끊임 없이 반도를 적대하고, 외세와 연대하여 자신들을 반도에서 쫓아 낸 신라계에 응징을 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증적 근거를 떠나 참 재밌는 논의이며, 아귀가 척척 맞기도 합니다. 중일전쟁 등 일제의 대륙 침략도 백강 전투 괴멸의 분풀이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하겠네요.

 

박사님은 이처럼 고대사에 대한 개관을 마친 후, 언어적 탐구를 통해 2라운드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반도인들이 쓰던 언어는 "가라어"라는 게 있었는데, 이를 반영한 게 향찰 문자이며, 가라어의 원형을 계승하고 향찰을 개량한 게 가나라는 주장입니다. 재미있는 건 가나가 고안되기 전 쓰이던 만요 문자(만엽집에서 쓰던 문자)를 보면, 이 가라어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는 건데요. 가나가 쓰이고 나서는 역으로 문자 언어가 음성언어를 규제하는 일이 벌어져, 현대 일본어는 가라어 원형에서 거리를 두고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말은, 한자어의 대대적인 침투로. 가라 어 원형은 거의 찾아볼 수도 없게 바뀌고 말았구요.

 

일본 학자들이 <만엽집>을 해석할 때 애로를 겪거나 "알 수 없음"으로 얼버무리고 마는 대목은, 바로 이 가라어라는 유용한 도구를 적용할 때 바로 해결이 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저자가 대단히 안타까워하는 대목은, 일본인들의 한반도 컴플렉스, 즉 "우리는 저 반도인들과 아무 관계 없어!' 같은 열등 강박 때문에, 분명히 보이는 해답도 애써 외면하며 먼 길을 우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이 책 말미에 "천 년 동안 풀리지 않았던 난제를 내(저자 김용운 박사님 자신)가 풀 수 있었던 건, 바로 한국어와의 연관성에 처음부터 주목했기 때문"이라고도 적고 있습니다. <만엽집>의 해석은 예전에 이영희라는 수필가가 조선일보에 성적 담론으로 일관한 해독을 장기간에 걸쳐 연재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지요. 저자는 그 일에 대해서도 실명 거론 없이 잠시 언급을 합니다. 참고로 이것 관련해서 저자분은 좀 특이한 이력을 갖고 계시기도 한데요. 혐한 중상 모략이 요즘에만 있는 게 아니라서, 1970년대에 한국인을 가장한 익명의 저자가, 한국의 문화와 정체성에 대해 대대적으로 헐뜯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이때 자신의 명의로 그에 대해 일일이 반박하는 주장을 정리해서 대응한 분이 바로 이 김용운 박사님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도 그에 대한 회고가 있습니다.

 

박사님은 한국어에 대해서도 신선한 분석과 시각을 내어 놓습니다. 저는 예전에 재미 음악인들이 "한국어는 받침이 많아서 음에 가사 달기가 어렵다"고 하는 걸 들었습니다(요즘은 랩 때문에 오히려 유용하다는 평가를 듣죠). 과연 일어나 중국어(관화 보통어 기준)에는 받침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본디 가라어는 받침이 거의 없고, 이런 종성의 보편적 확산은 한자어를 수용하며 이뤄진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럼 현대 북경어에 받침이 거의 없는 이유는 뭔가(광둥어는 그렇지 않거든요). 이는 언어의 간이화라는 대세를 겪기도 했고, 저자도 이 책에서 (명시적으로는 아니라도) 은근 암시하는 대로, 몽골 족의 침략을 대거 겪고 나서 남은 흔적이라는 겁니다. 몽골 역시 우리와 형제뻘인 알타이 어족이므로(논란이 있는 이슈지만 일단 저자의견해를 따릅니다), 받침이 없는 원형을 그대로 간직했기에 가능하죠.

 

이 다음부터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한중일 삼국의 민족성 분석입니다. 일본인은 원수를 곁에 두지 않고, 자기가 죽든가 철저히 복종하든가 둘 중 하나이며, 한국인은 "두고 보자"는 태도이고, 중국인은 대륙 문화에의 장기적 흡수로 이를 해결한다는 거죠. 대담한 도식화를 열 두어 가지 토픽에 대해 시도하고 있는데, 하나 하나 읽어 보면 공감이 가면서도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유교에 대해서도, 일본인은 열도의 체질에 맞게 변형하고, 중국인은 실용적으로 융통성 있게 활용하며, 우리 한국인만 별나게 원리주의적 집착을 보인다는 겁니다. 참 맞는 말입니다. 이 책에는 왜 유독 한국인만 평등주의에 집착하는지에 대해서도 이른바 "문화적 원형"에 의한 재미있는 설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근래 우리 주위(특히 수도권이라면)에서 자주 마주치는 게 중국인이고, 그런 중국인들의 특이한 습성을 본 이들이라면 정말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간결체 문장(석학 중에서는 드문 개성이죠)을 구사하셔서, 독자가 읽기 편하다는 것도 마음에 들더군요.

 

저자는 결론적으로, 중국인은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저자는 문화적 원형(저자의 시각에 따른)을 동원한 체계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날마다 긴장이 고조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볼 때, 저자의 이런 진단은 의미심장합니다. 저자는 우리 민족의 특성에 대해, 종족적 개성을 죽어도 포기하지 않으나, 한 중 일 삼국 중 단연 높은 수치로 "보편 문화를 지향"하는, 매우 바람직한 성향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로써, 한국이 동아시아 중심, 벨런서로서 그 위상을 확고히해야, 항구적인 평화가 자리핳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일본인에 대해서는, 애써 왜곡된 정체성으로 반도인을 경원, 적대할 게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 응시할 것을 권합니다. 이는 "일선동조론"이나 "만선사관" 따위와는 달리,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정립에 매우 중요한 인자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갖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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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기계 시대 - 인간과 기계의 공생이 시작된다
에릭 브린욜프슨 & 앤드루 맥아피 지음, 이한음 옮김 / 청림출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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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참신하고 획기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접근 방식이냐면, 책이 주제로 삼고 있는 대단히 심각한 이슈에 대해서입니다. 그 이슈가 무엇이냐면, 바로 최근에 심화되어 모두의 이마에 깊은 주름을 남기고 있는 "불평등"입니다.


"불평등"이란 체제의 근본 모순에 대해 우려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이의 심각성과 원인, 나름의 처방에 대해 저명한 학자, 전문가들은 한마디씩 하려 듭니다. 그런 저자들 중에서서는 최근 전지구적으로 단연 큰 화제가 된 토마 피케티가 있었지요. 그가 기존 경제학이 발전시켜 온 tool만을 활용하여, 다른 누가 좀처럼 생각하지 못하던 기발한 논증으로 이 분야 담론의 신기원을 이뤘다면, 브린욜프슨, 맥아피(기업용 바이러스 백신 개발자-창업주와는 무관합니다) 등의 공저자들은, 문명사관, 혹은 과학사가(史家)의 입장에서 해답을 내어 놓고 있습니다.

경제사 공부할 때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들어 보셨을 겁니다. 산업 혁명 당시 기계와 공장제 시스템이 급속히 확산되자, 길드에 소속된 장인이나 독립 숙련공들은 자신 또는 자신의 가문이 배타적으로 보유하던 일자리가 축소되거나, 이를 상실했습니다. "루드 장군이 배후에서 이를 지휘하신다"는 가공의 믿음 하에, 이들은 공장주가 보유하던 기계와 설비를 파괴하는 대규모의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근현대 들어서 제도적으로 보장 받고 있는 노동자 파업과는 다른, 생존권의 보장과 경제인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양상이었는데요. 오늘날에 들어와서는 "생산으로부터의 인간 소외" 극복이라는 면에서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이 러다이트 운동에 대해, 저자들은 오늘날의 불평등 심화 현상과 긴밀한 역사적 연계를 찾습니다. 저 시기에도 시스템은, 일찍이 존재한 적 없던 이노베이션을 통해 생산성의 급격한 향상을 겪습니다. 생산성이 혁명적으로 개선되었다 함은, 분배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사회 전체의 복리 향상으로 이어지는 대단히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여기서 분배의 문제라면, 세습적 특권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결국은 공동체 보편의 잉여 증가로 필연적 귀결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생산성 증가 자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최초 혁신자 - 극소수이겠지요-의 손에 쥐어진 엄청난 규모의 부(富)가, 언제쯤에나 보편적 풍요를 달성할, 아니 체감할 만큼, 빠른 순환이 이뤄지느냐에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닙니다. 최초 혁신자-다시 강조하지만 극소수입니다- 가 결과적으로 빼앗아 간 숱한 일자리, 이 때문에 당장 생계를 위협받기까지 하며 한계 상황에 내몰리거나 나이에 걸맞지 않은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될 평범한 노동자들은, 뚜렷이 감소한 share가 가져다 주는 궁핍을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급작스러운 불평등의 심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특이점적 혁신(레이 커즈와일의 규정입니다)을 맞고 있는, 우리 시대의 대박에서 기인한 희비극이라는 게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산업 혁명 당시, 경이적인 생산성의 증가는 보편 대중의 편익과 풍요에 분명 유의미하게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광공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나, (앞서 언급한) 숙련공들의 몰락은, 당사자들이 어디서도 보상 받을 수 없는 시대적 비극이었습니다. 최근 물꼬 터지듯 각 산업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신의 대열을, 두 손 들고 환영할 수만은 없는 게 이런 딜레마에 기인합니다.

이 책 전반부는 우리 조상들이 경험할 수 없었던 놀라운 규모와 파장의 기술적 혁신에 대해, 전문가들의 눈썰미를 발휘하여 예리하게도 하나하나 짚어 가고 있습니다. 1960년대 무어의 법칙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모바일 혁명까지, 발전과 발견 그리고 그 모두를 뛰어넘는 혁신은, 과거 쿠즈네츠가 지적했듯 최장주기를 지닌 간헐적 이벤트가 아니라, 이제 대세와 추세가 되어 버린 일상 환경, 상수적 팩터의 위상입니다. 이제 눈만 뜨고 일어나면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새로운 진보가 어엿한 현실이 되어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진보가 왜 모두에게 희소식이 되지 못하는가. 앞서 말한 대로입니다. 어느 분야에서 혁신이 일어나면, 전통적 방식으로 그 분야 생산에 참여하던 이들은(노동자이든 화이트컬러이든 무관하게) 종래의 중요성을 잃어버립니다. 평생 직장의 신화가 무너지고 40대의 나이에 직장에서 몰려 목 좋은 치킨집 개업을 알아 봐야 하는 건, 그나마 요식배달업에서는 최초 부가가치 창출 단계에서 혁신이 더디므로, 낮은 진입 장벽으로 인한 무한 경쟁이라는 요소(이게 더 무서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외에는 아직은 기술적 위협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두려운(?) 기술 진보와 혁신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저자들의 인상적인 인용을 다시 적어 보자면, "인류의 최대 약점은 지수함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수함수는


이런 모양인데요. 생략한 더 오른쪽의 형태는 거의 수직 상승이라 할 만큼 경사가 가파릅니다. 저 역시 인류의 약점을 그대로 공유한지라, 무의식 중에 저렇게 상대적으로 평탄한 부분만 그리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느릿느릿 증가하다가 어느 순간 지금까지의 추세를 모두 무시하겠다는 듯 급격히 상승하는 이런 패턴을, 선형적 사고에만 길든 우리들은 이해 못한다는 뜻입니다. 100을 2로, 10000를 4로 치환하는 로그의 도입이 수학자 네이피어에 의해 이뤄지고 나서야, 우리는 지수적으로(exponentially) 증가하는 추세의 공포와 위력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레이 커즈와일이 누구보다 앞서 지적했지만, 우리는 지금 이 같은 혁신의 폭포, 위험하기끼지 한 이노베이션의 홍수 속에 몸을 맡기고 있습니다. 커즈와일이 문명사관적 혁신의 기술적 측면에 주목했다면, 이 저자들은 그로부터 파생되는 필연적인 불평등 추세에 대해 날카롭게 짚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두 가지 효용을 가집니다. 1)우리가 직면하게 될 기술 진보가 어떤 추세적 패턴을 지니고 진행될 것인지에 대한 예견 2)이 불평등의 암울한 물결은 과연 언제 진정되기나 할지의 추측. 저자들은 다양한 논의와 논거들을 분명하고 유용한 프레임에 맞춰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현명한 독자는 그로부터 자신에 필요한 통찰을 알뜰하게 챙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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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람다 2014-12-2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봤습니다.
 
피바람 인수대비 - 상
이은식 지음 / 타오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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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깨닫게 된 바는, 수양대군 세조로부터 시작된 비정통 차자(次子)의 왕계가 이뤄 낸 역사에, 이처럼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도 꿰어져 등장하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걸출"하다는 말은 반드시 긍정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한명회 같은 이도 나쁘게 보면 간신이자 정상배였지만, 아직 그 건국의 기반이 내내 튼튼하지만 않았던 조선 초기에, 각종 행정 수완을 발휘해서, 시스템상으로 흔들리지 않는 펀더멘털을 형성한 게 분명한 사실입니다.

배신의 아이콘 신숙주는 어떻습니까? 아무도 왜구의 발호를 국제정세적 주요 변수로 간주하지 않을 무렵 "거리가 가깝고 인구 수가 많으며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니 화친하며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그의 저서 <해동제국기>에서 선구자적 안목으로 적어 둔 바 있는 경세가였습니다.

세조의 아들이자 소혜왕후의 부군이었던 의경세자가 낳은 아들이 성종이었는데, 묘호가 성종인데에서도 알 수 있듯, 할아버지가 시작한 국체(國體)의 공사를 튼튼히 마무리한 이가 바로 9대 임금인 그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감상적으로 봐 주자면 비운의 군주라 할 수 있는 연산군이었습니다.

고려 때에야 신하에 의한 폐립이 잦았지만, 확고한 유교 통치 이념이 정착한 후로는 극히 드물게 보는 일이 소위 "반정"이었는데요. 단 두 명의 폐출 군주 중 하나가 이 연산군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큰 정변을 겪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위화도 회군에 이어진 우왕 폐위는 얼마 가지 않아 고려의 멸망으로 이어졌죠), 오히려 중앙 집권을 더 강화하며 확고한 농민 장악과 수취 체제의 완결에 성공했던 게 바로 이 시기의 모습입니다.


 


이 책은 바로, 조선 시대의 척추에 해당하는 세조 말년~ 연산군 시기의 모습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구성하고 있는 책입니다. 보통 소설의 포맷이라면 작가의 과도한 상상력이 끼어들어 정사(正史)의 이해에는 방해를 끼칠 수도 있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대중서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울 정도로, 왕실 세계도와 각종 자료를 풍부히 집어 넣어, 본문 이해가 어려울 때마다(이 왕족이 누구의 몇째 아들이던가?) 수시로 참조할 수 있게, 독자의 편의를 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용한 사료가 많이 삽입되면 딱딱한 학술서가 아닐까 선입견을 갖기 쉽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소설처럼 술술 읽힙니다. 정사의 정연한 체제와 팩트 사항은 그것대로 담고, 다만 문제가 격의 없이 물 흐르듯 읽히는 게 소설의 맛은 그것대로 살렸습니다. 이 점이 이 책의 가장 우수한 매력입니다.

최근의 소설은 지나치게 현대어를 자주 삽입하여, 지난 시대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독자의 머리 속에 피어오르게 하는 일에 실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린 독자들에게는 그저 생경함이 적어서 좋을지 몰라도, 월탄 박종화 같은 정통파 역사소설 작가의 고풍스러운 필치에 맛을 들인 독자에게는 그런 시도가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죠.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스러운 어휘가 적재적소에 쓰이고 있어, 시대물의 참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 줍니다. 또 이 책의 중요한 장점은, 이야기가 시대순으로 기계적인 서술을 따르지 않고, 저자분께서 상상의 방향이 옮겨가는 대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을 취하고 있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이 책은 컬러 사진이 유독 많습니다. 종이 질도 최상급입니다. 이런 책 중에 이처럼 편집과 외관에 큰 공을 들인 경우는 좀처럼 보지 못했을 정도였어요. 책값이 좀 비싸긴 하지만, 그만큼 제값을 한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표지에 나온 것처럼 수능에 과연 도움이 될까요? 최근 출제 경향은 단편적 사항 암기를 테스트하지 않고, 문헌이나 사적을 원형 그대로 제시하여 시대 속성의 정확한 이해에 성공했는지를 묻는 문항이 많다고 합니다. 이 책에 실린 다양한 사진과, 풍성한 배경 설명은 역사의 입체적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오타가 (이렇게 미려하게 편집된 책에 어울리지 않게) 종종 등장하고, 예컨대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데려가겠다."며 문종비가 세조의 꿈에 등장한 후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단종보다 의경세자가 먼저 죽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야사에 가깝습니다. 아쉬운 점도 적잖게 있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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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람다 2014-12-22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