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영화의 열광적 황금기 - 어느 영화 소년의 80년대 중국영화 회고론 아시아 총서 14
류원빙 지음, 홍지영 옮김 / 산지니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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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많은 느낌이 교차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책은 그 부제가 <중국 영화의 열광적 황금기>입니다. 이 문구만 보면 이 시기(즉 1980년대)에 엄청나게 많은, 양질의 중국 영화가 생산되었다는 뜻 같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양산된 중국 영화를, 마음의 눈이 열려 있는, 자격 있는 팬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제 가치를 평가한 시기라는 뜻 같습니다. 하지만 제3국 출신의, 냉정한 태도로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관찰자가 찬찬히 들여다 보면, 이는 저자분의 주관적 인식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1980년대는 중국이, 그 내세울 것 없는 국력과 빈약한 경제력으로, 다만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 아래 문호를 개방하고,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내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좋은 것들은 다 체험시켜 주겠다"는 의도로 문화 정책을 펴던 시기 같습니다. 개발도상국의 정책 당국이, 이런 순진하고 선한 방침으로 정책 목표를 구체화하는 사례, 특히 문화 분야에서 이런 발걸음을 떼어나간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드문 정도가 아니라, 제가 아는 바로는 아예 없습니다. 이 책을 읽고, "그 당시의 중국이 이에 해당하는 유일한 표본이구나."라고 처음 알았습니다. 마치, 가난하지만 자식 교육 하나는 똑바로 시키려는 억척 같은 부모를 보는 감정이랄까요. 공학, 기술 관련 정책은 또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문화 분야에서 그런 생각을 고위 정책 결정자가 갖고 유지하기란 정말 힘듭니다.

 

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것처럼, 외환 보유고가 빈약하니 민간(이라는 게 형성되지도 못한 시절이죠)이나 정부나 무슨 돈이 있어야 컨텐츠를 사 올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으니 케케묵은 옛날 작품을 패키지로 사 오는 게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헌데, 그런 옛 작품들이 교과서적이고 모범적인 고전들이니, 감수성 풍부한 "될성부를 싹"들의 눈에는 가뭄에 단비와도 같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이런 문화의 전범이라 할 명작을 애써 수입해 온 당국도 기특하지만(그저 국민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일당 독재 체제로 여겨 온 선입견과는 너무도 다르더군요), 그런 명작의 우수한 면, 생산적 요소를 알아 보고 열심히 관람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팬들"의 태도도 정말 감탄스럽더군요.

 

한국에서도 소위 "헐리웃 키드"가 우후죽순처럼 자라던 세대, 시대가 있었습니다. 1950~60년대 즈음, 그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에도 최신 미국 상업 영화가 불과 몇 년의 시차만 두고 수입되어, 구경거리에 목마른 눈과 귀를 극장으로 잔뜩 끌어대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부 정책의 계도적, 계획적 결과가 아니라, "아무 거나 들여와도 돈이 된다는 걸 알아차린" 민간 수입업자들의 상업적 계산 결과였습니다.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중국측 사정이, "당대 히트작 수입은 꿈도 못 꾸고, 그저 싼 값에 구경할 수 있는 고전 꾸러민만 잔뜩 봐야 했던 것"과는 크게 다릅니다.

 

굳이 대조를 하자면, 1) 차상위층 가정에서 입 짧은 애들이, 부모가 사다 주는 음식이나 구경거리를 "최신 유행이 아니라며" 퇴짜를 놓는 모습 2) 극빈층 가정에서 그래도 눈썰미 좋은 부모가, 값싼 양질의 물품을 애써 골라 준 걸 그 자녀들이 감사해하며 제 것으로 성실히 소화하는 모습,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1)은 그 이후 그 부모들의 성실한 노력으로 돈을 벌고, 공부는 안 하고 눈높이만 높이던 애둘에게 억지로 과외를 시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보냈지만 별 열의 없이 현재를 사는 모습, 2)는 부모가 역시 경제적 대박을 치긴 했지만, 그것과는 관계 없이 그 집 아이들이 공부에 재미를 들려 정직하게(있는 자원 없는 자원 다 그러모아가며) 학자로 대성한 결과에 비길 수 있습니다.  성장 과정이 2)가 더 건실할 뿐 아니라, 자기가 좋아서 한 일이라 전망도 더 밝습니다.

 

솔직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예산이 부족해서 그 대안으로 들여온" 볼거리에 대해, 그처럼 열광을 보낼 마음이 들었을까요? 198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낸 대륙의 그 문화 소비자들은, 제한적으로 마련된 영화 저널(당시에는 중국 아니라 어디에도, 지면 매체 외에 독자가 참여할 공간이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세요)에 열광적으로 참여헸습니다.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기로는, 그저 감정적 호불호나 비생산적 꼬투리잡기가 아닌, 치열하고 성실한 학습자(문화 소비자라기보단 그 학구열 때문에 "학습자"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들이 펼치는 간접 토론(실시간 참여 매체가 발달하지 못했으니 순차적 투고 형식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죠)과 담론의 향연이, 국외자에겐 정말 대단하고 부러웠습니다. 이런 성숙한 문화는, 그들보다 앞서 PC 통신이라는 신매체가 생겼던 우리에게도, 찾아 볼 수 없던 현상입니다. 당장 이 자랑스러운 걸음마 단계가  키워낸 지식인, 문화평론가로서 이 책의 저자 류원빙이 지금 도쿄 대 학술연구원 같은 자리에서 여전히 다양한 학술적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우리의 PC 통신 세대들(당시 기준으로 세계 최고 수준 인프라)은 국내용 담론 생산 외에 하는 게 뭐가 있을까요.

 

영화 분석의 패러다임으로 바쟁의 이론이 자주 언급되는 것도, 이들이 당시에 접하고 향유하며 소화할 수 있는 평론이 제한되었기 때문입니다. 당국에서 검열과 통제를 했다기보다(그런 사정도 있겠지만) 폐쇄적이고 가난한 나라다 보니 그런 문화 이론 포맷의 선진 문물 도입도 채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여튼 저자 류원빙을 비롯, 건전한 문화적 소비 욕구에 가득차 있던 그들은, 입에는 쓰나 몸에는 좋은 양식을 열광적으로 소화하였고, 이는 대륙의 O세대 예술가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양질의 작품을 생신하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면 한국의 실정은, 21세기인 지금조차 착각과 유치한 자기애에 빠진 감독들, 그리고 예술보다는 정치투쟁의 프락치로 더 뿌듯한 자긍을 형성하는 저질 관람자들로 인해 그 내장이 곪고 있죠.

 

책은 그 서두의 추천사가 정말 좋습니다. 목포대 임춘성 교수님의 글인데, 이분이 다음에도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가 보십시오. 이 책의 뛰어난 점은 본문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읽으면서 정말 놀랐는데, 역자가 원 텍스트 곳곳에 각주로 삽입한 설명들은, 사실 각주가 아니라 독자적인 영화 이론 해설에 가깝습니다. 필자가 당연하다는 듯 꺼내고 적용하는 이론들은, (놀랍게도) 담론에 무지한 한국 독자들에게는 그 맥락에 대해 감이 안 잡힐 수 있다는 배려의 산물인 것 같습니다. 1990년대 홍대 등을 중심으로 진지하게 펼쳐지던 X 세대의 활개 중 가장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가닥이 빚어낸 결과가, 지금 역자 홍지영 선생이 우리에게 들려 주는 이런 해설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진짜, 역주만 읽어도 회고가 되고 공부가 됩니다. 대륙의 저자(현재는 일본에 기반을 잡고 있는) 류원빙에 거의 한 세대가 뒤지는(한 세대를 앞서도 뭐할 판에) 일군의 문화 평론가 중에 이런 분이 계시다는 사실에서, 그나마 창피함이 덜해지는 느낌입니다. 어찌 보면 책의 중심 테마로 조안 첸이 잡힌 것도, 저자 류원빙이 소년 시절 열광했던 아이돌이기도 했지만, 이 저자처럼 자신의 조국과 미묘한 스탠스가 잡혀 있는 현실에서도 공통점이 서로 존재합니다. 영화 공부도 될 뿐 아니라, 지식인과 조국의 관계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가능한 좋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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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의 풋라이트
찰리 채플린.데이비드 로빈슨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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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이라 쉽게 불리기엔 너무도 현대적인 그 고전 <라임라이트>를, 보지 않은 이들은 많아도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영화의 주제 음악이, 관련 어느 정규 교양 프로그램의 시그널로 쓰인 것도, 한국에서의 현재 유명도에 한 몫을 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아름답고 감미로우면서도 뭔가 말할 수 없는 근원적 슬픔을 담은 애잔한 테마는, 그저 듣기에만 스산한 듯 달콤한 게 아니라 영화 전체의 내용, 주제, 분위기를 선율적으로 완전히 체화한 명곡인데요. 잘 모르는 이들이 많지만, 이 주제곡은 감독, 각본,  기획 등 1인 8역을 소화한 걸로도 유명한, 채플린 본인이 작곡한 솜씨입니다.

이 책은 그 성격과 개성이 다소 묘할 뿐 아니라, 그 "의의"에 대해서도 한 차원으로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이 책은 1) 채플린 본인이 쓴 소설을 담고 있고, 그것의 제목이 (이 책 전체의 제목이기도 한) <풋라이트>입니다. 2) 그러나 이 책은 채플린이란 복합적이고 위대하며 다층적인 성격의 거인을, 특히 어느 한 시기와 한 대표작(그는 한 손가락으로 무엇무엇이 그의 대표작이라고 한정할 수 없는, 모든 성취가 인류의 소중한 자산인 그런 예술가였지만)에 초점을 두어 분석한 평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3) 마지막으로, 이 책은 그의 가장 헌신적인 스탭이자 지근거리의 관찰자였던, 어느 노장의 "팬북"이기도 합니다. 팬이 쓴 헌사, 찬미자의 입으로부터 나온 회고에 대해서는 정확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모순과 논란으로 점철된 이 천재  예술가의 수수께끼 같은 인생에 대해 온당한 조명("라이트")를 비추려면, 발("풋")로 뛰어 사랑과 존경, 열정을 가득 담은 추적과 해명을 펴 나갈 수 있는 이의 재능과 경력과 통찰이 필요합니다.모든 팬북이 그런 것처럼, 이 책도 내용의 충실함 못지 않게, 예쁜 장정과 외관, 디자인을 갖고 있습니다. 솔직히, 채플린에 대해 무지하거나 별 감흥을 안 가진 무심한 독자가 봐도, 이 책 한 권 때문에 관심이 생길 만할 것 같습니다. 아니, 이 예술가나 영화예술 장르 전체에 대해 아무 애착이 없는 이도, 그저 책이 예뻐서 갖고 싶고, 책 가진 김에 채플린에 대해 좀 더 알아볼 기회를 가질 것 같습니다.



문외한에게도 구미를 당기게 할 만큼 깔끔한 모습과 포맷으로 꾸려진 이 책은, 그러나 채플린에 대해 제법 많은 지식을 가진 이들도 아마 처음 접할 만한 새로운 사실을 많이 발굴해 내고 있기도 합니다. 우선, 이 책은 동시대에 산 동년배(서로 생일도 얼마 차이 안 나는 진짜 동갑내기라고 하는군요)로서,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고 받았던 천재 예술가로 교류하였던, 러시아 출신 무용수 바슬라프 니진스키와의 오랜 인연에 대해 언급하는 걸로 그 시작을 삼습니다.



채플린은 자신의 소설에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어느 춤꾼과 그의 후원자에 대해, 알듯 모를듯한 설정을 그 뼈대로 잡고 이야기를 꾸려 나갑니다. 훗날 많은 부분이 변형되고, 완성된 모습으로 굳은 "한때 위기에 빠졌으나 남성의 후원과 애정으로 이를 극복하고, 보란 듯 그 오랜 애정과 은혜를 배신하고 다른 남성과 사랑에 빠지는 여배우, 다만 이를 진정한 사랑으로 포용하고 이해하며 '무대 뒤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남성"에 대한 테마는, 이후에 나온 많은 작품들에 크고 다양하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하나의 예를 들면, 1950년대 헐리웃의 신성으로 떠오른 오드리 헵번도, 이 비슷한 줄거리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고, 얄궂게도 멜 퍼러와 그녀는 실제 인생에서 이와 매우 닮은 사연을 빚은 적도 있습니다. 도스토옙스끼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 뿐 아니라 실물의 모사품을 마법처럼 뽑아낸, 크고도 넉넉한 품의 외투"였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니진스키와 쇼 기획자이자 스폰서(이 단어의 부정적 의미까지 다 담은 뜻에서 그는 불멸의 "스폰서"였습니다)인 디아글레프에 대해서는, 천재 예술가의 삶과 성취를 파멸로 몰아넣은, 상업혼에 찌든 악마와도 같은 착취자요, 심지어 파렴치한 변태 성욕자로 치부하는 게 오늘날 우리 후대인들의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신화적인 발레리노와, 그 발레리노를 무지한 세상 앞에 본연의 찬란한 면모로 소개했던 영민한 비즈니스맨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객관적인 태도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도 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니진스키는 채플린과 나이까지 똑 같은 친한 벗이었으며, 천재적 감성과 비전을 타고난 예술가답게 서로 공유하는 요소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성격상 신랄하고 괴퍅하며 대책 없이 자기 중심적인 데가 있던 채플린은, 이 니진스키에 대해서도 자기 위주로 왜곡한 기술(記述)과 회고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가 결코 다정하기만 하고 착하기만 성격이 아니었다는 점을 잘 아는 이들은, 이 논점에 대해서도 뻔한 허풍과 과장으로 쉽게 치부하기 일쑤입니다. 우리들은 세상에 적에 없었을 것만 같은 이 희극인에 대해 따뜻하고 풍요로우며 넉넉한 포용심을 가졌으리라 오해하는 수가 있지만(이런 선입견을 빚는 데엔 바로 <라임라이트>가 크게 기여한 바 있습니다), 사실 그는 정반대로, 누구라도 쉽게 마음을 트고 소통하기가 쉽지 않은 괴짜에 가까웠죠. <라임라이트> 같은 남성의 순애보를 보고서도 참 역설적이다 싶은 게, 여성을 홀리는 데에 탁월한 재주까지 갖춘 이 희대의 바람둥이(대체 여자를 몇 명이나 갈아치웠는지요!)가 풀어내는 내러티브치곤 너무도 천연덕스러워, 알 것 다 아는 관측자에겐 아이러니하다는 느낌마저 주기 때문입니다("그가 과연 이런 이야기를 가꿔 낼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책에는 눈길이 가는 자료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예를 들면 p27이 싣고 있는 이미지는, 놀랍게도 에릭 캠벨, 니진스키, 그리고 채플린이 한 컷에 다 담겨 있는데, 처음 보는 분들도 제법 될 것입니다. 이 사진은 채플린의 1917년작 단편 무성영화 <자립재정>을 제작 즈음에 촬영되었는데, 아래 자료에서 보듯 책의 사진은 그 일부의 크라핑입니다. 원본에는 보시는 것처럼 더 많은 인물들이 실려 있습니다. (자료출처: www.discoveringchaplin.com/2013/10/russian-dancer-vaslav-nijinsky-company.htmleasy street) 참고로, 한국 한정 번역 제목인 "자립재정"은 오역에 가까운데 여전히 널리 통용되고 있죠. easy street에 그런 뜻이 있기는 합니다만.

책의 설명에 에릭 캠벨의 위치를 "니진스키의 오른쪽"이라고 적혀 있는데, 원본이나 이 발췌본의 상황이나 "왼쪽"이 맞겠습니다(사진의 피사체인 니진스키 입장에선 "오른쪽"이었겠지만). 저자가 "키큰 사람"으로 표현하는 에릭 캠벨은 당대에 꽤 유명한 배우였으며, 실제 신장이 2m에 달했던, 당시 기준으로 거인에 속하는 편이었습니다(이 사진의 얼굴도 분장 탓도 있겠으나 제법 무서운 표정입니다). 니진스키는 제 뜻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무원의 순종적 짜증을 담은 이상한 얼굴(바로 뒤 페이지를 보면 남성인지 여성인지 분간이 안 가는 고혹적 자태를 담은 사진도 실려 있습니다)이고, 채플린은 거의 아이콘화한 그 모습 그대로를 이 컷에서도 유지하고 있기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습니다. 채플린은 아주 단신으로 희화화한 자태가 우리에게 익숙하기에 그가 난쟁이나 아니었을까 오해하는 이도 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평범한 단신" 수준인 1m 65였습니다. 반면 워낙 비율이 좋다보니 꽤 장신이었을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니진스키는, 역시 우리 예상을 배반하고 채플린과 절친 아니랄까봐 키까지 같은 단신이었습니다. 이 사진은 이처럼, 채플린과 그의 주위 사람들, 나아가 그가 속한 시대에 대해서까지 참으로 많은 정보를 전달합니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도, 죽고 난 후 그 흔적을 정리하려 들고 보면, 자신과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많은 정보와 자취를 남기고 있을까요? 채플린은 본디 영국 태생인 이가 미국으로 건너가 완벽한 자아 실현에 성공한 케이스고, 다시 그 "제2의 고향"으로부터 얼김에 축출되어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그리 고운 시선으로 볼 수만은 없는 "세무 관련 동기" 때문에 스위스에 거주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주가 잦다 보면 (후대의 저널리스트나 전기작가들에게 대단히 불리하게도) 그의 흔적이 잘 남아 있지 않는 수가 많으나, 그는 (이 책 저자의 표현대로) 거의 기적적이라 할 만큼, 특히 특정 시기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편입니다. 아무리 채플린의 위대함을 잘 아는 이라 해도, 이런 날것 그대로의 난장판을 보고 나면 신물과 환멸을 느끼기 쉬운데, 제가 이 서평 첫머리에 적었듯, 열렬한 찬미자, 혹은 수제자급 인물이 아니면 이들을 유의미한 질서와 맥락으로 정돈, 재창조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작업은 따라서, 소설에 대한 총체적 주해서이며, 다큐멘터리성 리포트를, 그윽한 감성과 통찰로 예쁘게 짜 낸, 채플린을 위한 소(小) 우주라 불러 줘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긴 소개도 필요 없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올컬러 책장만 휘휘 넘겨도, 독자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책이리고 하면 아주 정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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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형제 동화전집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
그림 형제 지음, 아서 래컴 그림, 김열규 옮김 / 현대지성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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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었습니다.

이 책,

무려 210편을 담고 있습니다, 무려. 

200편의 기묘하고 개성적인 이야기에, 부록격으로 열 편이 더 붙어 있는, 실로 거대한 책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죠. 재질이 좋고 잘 빚어진 구슬이라면 단품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닙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익히 봐 왔던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라푼젤>, <빨간 두건> 등의 동화가, 다 이런 "혼자 놓여도 아름답게 빛나는 구슬"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런 명편들 역시, 전(全) 체계(體系)가 오롯이 갖춰진 본 모습 속에서 더 아름답게, 제 가치를 발산하고 증명하는 법인지, 이 완결본 완역판을 다 읽고서야, 시대의 퇴행과 반동을 뼈속으로부터 경멸하고, 진흙 속에 파묻힌 채 스스로를 부정, 망각하고 살던 민중의 의기를 깨우치는 작업에 재능과 열정을 아끼지 않았던 어느 형제의 정신, 소양, 사상의 깊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림 형제는 그저 동화 작가로서 활약한 이들이 아니라, 출중한 언어학적 자질과 투철한 계몽 사상으로 무장했던, 일세(一世)를 대표할 만한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기층의 민속으로부터 다양한 민담과 설화를 채록, 정리한 건 그래서 단지 수집가적 습벽과 기호의 산물, 발로가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이어오던 무가공의 풀뿌리 인문 정신의 재발견, 그리고 집대성을 위한 위대한 시도였고 그 찬연한 성과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백설 공주> 등도, 이 210편의 컬렉션 속에서야, 존재와 태생의 아름다움을 제 가치대로 비로소 증명하고 뽐냅니다. 동화는 이제 아이들이나 즐기고 구연하는 하품의 텍스트가 아니라, 성인들이 진지한 감성과 오성을 작동하여 음미하여야 할 인문으로 승급(昇級)합니다. 어쩌면 새삼스러운 엘리베이션이라기보다, 늦게 뜬 눈의 망막에 비로소 영사된,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버티고 서 있었던 사물의 진상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다른 출판사의 <..전집>울 이미 갖고 있었습니다만, 사실 책이 두꺼워서 소장 자체를 목적으로 사 두었을 뿐, "유치할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읽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현대지성판 전집이 새로 번역, 출판되었고, 이를 계기로 대조 분석도 해 볼 겸 두 권을 같이 읽게 되었고, 종전에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분석이나 서평 쓰기를 목적으로 읽은 게 아니라, 읽다 보니 재미가 읽어서, 두 번, 세 번을 통독했습니다. 그만큼 재미가 있었기에, 여러 번 완독해서 텍스트를 (거의)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하고 싶었습니다. "소화"라는 말을 굳이 쓰고 싶을 만큼, 이 동화 전집은 정독의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책의 편집상 특징은, 1) 원저의 스타일에 따라 번호를 일일이 붙이고 있다는 점, 2) 그림 형제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시대의 유명 삽화가인 아서 래컴의 일러스트 거의 전편(몇 편에는 해당 아티스트의 일러스트가 처음부터 시도되지 않았습니다)을 천연색도로 싣고 있다는 점, 3) 김열규 교수님 같은 거물이 번역 명의로 등재되어 있다는 점 등입니다. 이상은 출판사 편집측에서 내세우고 있는 장점인 듯하며, 제가 독자 입장에서 캐치하기로는 4) (속지의) 거의 매 에피소드마다 단색도의 일러스트를 실어 주고 있는 점(개인적으로 아서 래컴의 작품보다, 다양한 출처를 지닌 이 삽화들이 더 좋았다는 느낌입니다) 5) 역자 주가 상대적으로 많이 달려 있는 점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현대지성판

타 출판사판

1)

KHM 넘버링 표기

없음(목차에서 바로 찾아가기가 조금 불편)

2)

아서 래컴의 작품 상당수가 수록

이 책이 소속된 시리즈의 다른 책들이 컬러 일러스트를 보통은 앞에 싣곤 하나, 유독 이 책은 그렇지 않음

3)

김열규 교수님(권위 있고 가독성 좋음)

김유경 선생님 (정확함)

4)

양질의 본문 부대 삽화

왼쪽 책과 다른 출처의 삽화(역시 무난함)

5)

역자 주 많음

역주는 없고 본문 안에서 해결

기타

1061쪽(종이질이 얇아서-사전용지- 더 볼륨이 작아 보임). 반양장

1008쪽. 종이질은 보통이며 양쟝판. 판형은 왼쪽 책과 같은 크라운판.


 

얼핏 보아 괴이쩍고 맥락이 없는 희화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를 곱씹어 보면 깊은 의미를 담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34번 <영리한 엘제> 같은 걸 보십시오. 선반 이에 올려 놓은 물건이 언제 자신의 머리 위에 떨어져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모든 일을 중도작파하고 부엌에 주저앉아 우는 엘제, 백치의 극한을 치닫는 그녀의 지성에 조소를 보낼 분, 어느 독자가 이들 시골뜨기의 합창에 동조하여 그녀를 "영리한 엘제"라고 부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네의 운명이란, 혹은 행복이란, 예리한 지성과 강철 같은 의지로도, 개별 사건의 통제는 물론, 개략적인 향방의 지휘마저도 난감하기가 일쑤입니다. "영리한 엘제"란 호칭은 그저 반어(反語)가 아닙니다. 삶의 원초적 불안정성과 불가해성이 빚는 근원적 슬픔을, 일상에 찌들어 망각한 범인(凡人)들에게 경각하는, 본 질을 꿰뚫어 본 현자가 바로 엘제인 것입니다. 심지어 그녀는 "지금의 나는 사실 내가 아닐지도 모르고, 내가 아는 나 자신인 엘제는 이미 저 따뜻한 집 안에 들어 와 있음"을 자각한 후, 어둠에 둘러싸인 미지의 지평선을 쫓아 달리고 달리기까지 합니다. "실존의 무상성에 대한 역겨움" 때문에 전위예술로서의 "구토"를 행하는 엘제는, 이미 장폴 사르트르의 개념적 선구였다고나 하겠습니다. 



59번 <프리더와 카터리제>를 보면, 역시 (상식의 눈으로 보아) 어리석기 짝이 없는 프리더의 아내 카터리제가 나와서, 일을 하다 항상적 자아를 잊고 해학적 기행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가 특히 이 에피소드에서 두 책의 태도가 많은 차이를 보여 면밀히 대조해 보았는데요. 한 책에서 빠진 내용이 다른 책에 들어간 것도 있고, 반대로 한 책에서 모호하게 옮기거나 원의의 맛이 잘 안 사는 번역에 그친 걸 다른 책에선 (그림 형제의) 의도가 두드러지게 처리한 것도 있었습니다(특히 목사의 밭에서 무를 뽑는 모습을 보고 악마라고 놀라서 달아나는 대목). 타 출판사 책에는 카터리제의 이름이 "카터리스헨"으로 달리 표기되어 있습니다.



7번 <괜찮은 거래>는 동음(혹은 유사음)이의어를 이용한 소화(笑話)입니다. 이 책의 번역은, 개구리 우는 소리("아크")와, 8을 의미하는 독일어 acht("아흐트")가 서로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을 역주에서 분명히 지적하고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타 출판사 책의 해당 대목에서 취하고 있는 태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번역본만이 지닌 장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개 짖는 소리("")가 왜 "조금"이라는 의미가 되는지에 대해선 분명한 설명이 없는데요, 원문에는 was("약간")이라고 되어 있어, 이것이 개짖는 소리의 의성어인 wau와 통하는 걸로 간주한 듯 보입니다.



43번 <트루데 부인>은 다소 소름끼치는 함축적 우화적 괴담입니다(타 출판사 책에는 <트루데 아주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무서운 건, 짧은 분량에다 그저 부조리하게만 느껴지는 "확정적 배드 엔딩"울 취한 까닭이 큰데요. 마지막 트루데 부인의 대사를 두고 이 책의 번역은 "그것 참 밝기도 하다."이며, 타 출판사 버전은 "그것 참 잘도 탄다."입니다. 둘 중 저는, 이 책의 옮김이 더 무서웠고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 전집에는 "소름 끼치는 법을 배우러" 넓은 세상을 향해 감연히 뛰쳐 나가는 어느 청년의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자신의 부모로부터 바보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이가 더 큰 무대 위에선 "최고의 대담성을 지닌 용자"로 밝혀지는, 일종의 성장 테마를 취한 그림 형제판 "미운오리새끼"라 할 수도 있습니다.



재미있습니다. 어떤 건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고, 어떤 건 간단하고 창의적인 이야기 구조 속에 이런 깊고 은근한 진실을 담았나 하는 감탄에 흐뭇한 웃음이 나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가볍게 때우고 싶을 때도 손에 잡고(하드커버가 아니라서 오히려 편합니다) 술술 페이지를 넘기기 좋은 책입니다. 아이들보다는 차라리, 머리 아플 일이 많을 어른들에게 친한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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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외교를 통해 본 김대중 대통령
김하중 지음 / 비전과리더십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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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대통령의 개방 의지는 확고했다. 한민족은 독창성을 가진 문화 민족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중국 문화권에 있으면서도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중국 문화를 우리 문화로 재창조했다고 하면서, 일본에 (대중) 문화를 개방한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니 문화를 개방하라고 지시했다."
- p122: 5


민주 투사로서의 김대중 전 대통령, 그 행적이나 이미지는 우리들에게 널리 퍼져 있습니다만, 대통령 재임 시절 대외관계에서 어느 정도나 두드러진 행적을 남긴 분인지는 깊은 인상이 안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객관적 성과가 얼마나 남아 있느냐와는 관계 없이, 우리 인식 용량에 한계가 있어서일 뿐이어서일 때가 많죠. 역대 대통령이라면 누구나 외교 분야에서 가시적인 족적을 남기려고 애를 썼고, 때로는 무리수를 둬 가며 (그저 기록에 남기는 과시를 위해) 실속 없는 프로젝트 발주를 남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 재임기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주변의 정치적 지형이 급변하던 무렵이었으며, 특히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움직임을 갓 드러내고 있었을 뿐 아니라,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둘러싸고 일-미-남북 사이의 미묘한 갈등이 수면위로 처음 떠오르던 시기였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어땠을까요? 누구나 다 기억하시듯, 직전 정부에서 외환위기라는 미증유의 혼란을 빚은 대실책을 저지른 탓에,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인(당시 표현으로 "당선자") 시절부터, 나쁘게 말해서 "구제자금을 구걸하러" 해외를 순방해야 했습니다. 동행 기자들이나 해외 교민들도 이 표현("구걸")을 그대로 사용하며, "국운의 형세에 비통한 눈물을 흘려야 했다."고 심회를 토로하던 기억이 나네요. 정치적 스탠스의 차이를 떠나, 누가 국가 존망의 위기를 불렀고 누가 이를 수습했는지는 국민 모두가 뇌리에 깊이 새겨야 할 일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튼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자 시기부터, 식물인간화한 현직 대통령을 제껴 두고 국가 살림, 대외 관계 수습의 총책임자로 등장했지만, 그의 여정은 등등한 위세나 화려한 빛깔로 채워지기보다는, 고달프고 처량한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개인의 능력이나 가치와는 무관하게, 준(準) 망국인의 신세란 그래서 참담한 것입니다. 위기가 극복이 되고 나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는 듯 또 과거의 행태로 복귀하는 모습은, 그래서 개탄과 우려를 부릅니다.

이 책은 김대중 대통령의 이 당선자 시절에 대해선 아주 심도 있는 회고가 자주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저자 김하중 전 장관이, 이 시기 동안에는 지근거리에서 보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하중의 회고록"인 이 책에서 직접 언급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었겠죠,. 그러나 저자분이 의전비서관으로 취임한 시기가 충분히 이르기 때문에 "국난 극복의 과정"에 대해서도 개략적 회고 사항을 이 책에 다루고는 있습니다.

저자가 의전비서관으로 재직하던 무렵, 김대중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청와대 면담 신청은 의전비서실을 통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이 책에 나와 있지는 않으나, 종래 이런  일에 대해서는 별도의 "직행" 비선 라인이 있거나, 부속실, 정무수석실 등 비정상적 통로로 수상쩍은 접촉이 시도되기 일쑤였습니다. 김 대통령의 이런 지시는 국가 공무의 상궤를 바른 모습으로 북귀시켰을 뿐 아니라, (범위를 좀 좁혀서 보자면) 바로 이 책의 집필자가 이런 두꺼운 회고록을 집필할 수 있었던(다시 말해, 김 대통령의 중요 행보를 측근에서 지켜 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했던 것입니다.



대통령이 해외를 방문하면, 그 국가의 교민들이 "열렬한" 환영을 위해 거리에 대거 도열해 있고, 국기를 흔드면서 과장된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을 흔히 우리는 보아 왔습니다. 이 행사가 끝나면, 교민들은 인근 호텔로 초청되어, 비싼 비용을 치르고 마련된 리셉션에서 소위 "환담"을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데 김 대통령은 이런 "관행"에 대해 전면 재고할 것을 지시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환영을 구태여 "동원 과정"을 거쳐 (현지인들에게 볼썽사납게) 치를 것이 무엇이며, 더군다나 국고 지출을 감내하며 호화 만찬장을 차리는 게 무슨 긴절한 필요가 있겠느냐는 취지에서였습니다. 게다가 해당 시기가 국난 극복의 지난한 시련을 치르는 동안이었으니, 재외국민들에게건 외국인들에게건 뭔가 모범적인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게 대통령의 취지였습니다. 어떠신진요. 이런 일화는 마치 중국 고전 역사서에나 나올 법한 모범적이고 감동적인 요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보이지 않으십니까. 큰 인물의 족적에는 이런 가슴 울컥하는 공통의 에센스가 반드시 포함되기 마련입니다.

김하중 씨가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시절은 의전비서관 시절/외교안보수석보좌관 시절로 나뉘어집니다. 전자와 후자는 각각 이 책의 1부/2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기가 한국 현대사에서 워낙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굵직굵직한 사건과 (겉으로 보이지 않는) 중차대한 외교사(外交事) 역시 많이 처리되어야 했던 시기였는지라, 1부, 2부 가릴 것 없이 독자에게는 엄청난 비중으로 다가옵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혁명 1세대들 중 마지막 최고실력자였던 덩샤오핑 사후, 차세대 중국을 영도한 최초의 인물이었던 장쩌민 주석과 같은 시기에 인접국의 국가 원수로 재임하였습니다. 장 주석은 특히 김 대통령에게 인간적으로 큰 호감과 존경을 가지고 있던 터라, 이 책에도 흥미로운 일화가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장 주석은 1990년대 후반 일본 와세다 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학생들의 빗발치는 질문에 대해 땀을 뻘뻘 흘리며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는 장면을 노출하여, 현장에 있던 이들과 TV 생중계로 이 모습을 지켜 보던 시청자들을 당혹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는 노련하고 유능한 테크노크라트였지만, 세련되고 국제 감각 넘치는 지도자의 풍모와는 거리가 있지 않았느냐는 게 제 생각인데요. 김 대통령은 이분과 함께한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다 실수한 그에게 "한 옥타브만 낮춰서 부르시면 어떤가"라고 제의하여, 정말 자신의 지시대로 음을 낮춰 노래를 불러 분위기를 다시 살리고선 김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하는 장 주석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김 대통령은, 자신도 노래 한 소절을 약간 매끄럽지 못한 솜씨로 부르고는, "노래 실력은 내가 장 주석에 못 미치는 것 같다"는 멘트로 끝까지 장 주석을 추어주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다루는 솜씨가, 장 주석 같은 대국의 지도자보다 몇 수는 위였다는 느낌입니다.

정권 후기로 갈수록 김대중 정부에선 시련도 많이 겪게 되었는데, 이는 대외적으로 조지 W 부시가 취임하고 미국 외교 정첵이 보수화, 강경 드라이브 선회 움직임이 뚜렷해지는 외부 변수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국무장관 콜린 파월을 눈짓으로, 대담장(정상 회담 장소)에서 급히 나가라는 의사를 전달하고, 파월이 이에 따랐다는 일화를 소개하는데요, 파월은 당시 정부(즉 부시 대통령이나 체니 부통령, 무엇보다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성향이 달랐고, 몇 년 후 급작스러운 사임으로 큰 뉴스가 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에피소드는 실로 의미심장합니다. 외국 책에서도 잘 다루지 않았던 팩트인데, 외교사에 관심 많은 분들은 꼭 한번 챙겨 읽어 볼 만한 부분입니다. 볼륨이 두껍지만 폰트가 크기 때문에 완독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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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아이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박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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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형사의 아이>라서 우리말로 그렇게 옮겼을 뿐일까 생각했는데, 원제도 똑같이 <刑事の子>더군요. 미미 여사의 초기작이라고 하는데, 현직 경찰을 존경스러운 아버지로 두고, 어설프게나마 탐정 흉내를 내 가며 처음에는 유희의 일환으로 시작하다. 나중에는 본의 아니게 사태의 진상 한복판으로 말려들어가는 진행이 흥미롭습니다. 말 그대로 "10대 아이"가 주인공입니다. 주도적으로 추리를 하는 어린 주인공과, 그 옆에서 보조를 맞추고 도움도 주고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려(?) 아둔한 소리도 늘어놓곤 하는 사이드킥 노릇의 친구도 한 명 나옵니다. 마치 코난과, 소년 탐정단의 관계 같습니다.

 

경찰뿐 아니라 검사, 판사라고 해도, 승진보다 현장에서의 사건 해결이라는 본분에 더 충실한 유형은, 문예의 캐릭터들 중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드물지만은 않게 발견됩니다. 야기사와 미치오(八木擇道雄) 씨가 바로 그런 타입으로서, 처음에 독자는 "이 나이에 아직 경감에게 존대를 해야 하는 처지인가." 같은 생각이 살짝 들었지만, 주인공의 친구인 신고가 독자들에게 "진정 존경스러운 경찰상"이라며 부정확한 선입견을 바로잡아 줍니다. 그리고 주인공 야기사와 준은, 지역에서 손꼽는 부호의 자제인 저 신고의 친구로서, 이 야기사와 경관이 홀로 키우는 아들인, 이제 중학교 1학년인 소년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이 그토록 사랑받으며 장수하는 비결은, 육체적으로 미성숙하고 완력이 부족해도, 빼어난 지력(과 정의감)만으로 흉악한 범죄를 해결하는 그 과정이 통쾌하며, 또한 이처럼 육체적으로 허약한 인물이 맹활약을 보일 수 있도록 하는 설정이, 재기와 지성을 겨루는 가상의 장(場)인 미스테리 장르에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고작 중1인 야기사와 준에게 독자인 우리가 흔쾌히 신뢰를 보낼 수 있을지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침착한 품성,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사건의 실타래를 냉연한 눈으로 볼 줄 아는 그 지혜를, 이 소설 도입부의 여러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문예에서(장르 불문) 자주 등장하는 유형이, 주위와 불화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고집스러운 예술가, 그 중에서도 화가입니다. 주변으로부터 평판이 좋지 않은 lonely wolf 타입이, 흉악한 범죄가 터졌을 때 제일 먼저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처음에 이 수상쩍은 화가, 재능은 탁월하나 동료와 평단으로부터 조금도 인정 받지 못하는 예술가에 대해, 어린 주인공이 대뜸 도서관부터 찾는 대목이 흥미로웠습니다. 도서관이란, 모든 지혜 있는 영혼이, 탐색과 발견을 위해 제일 먼저(first), 그리고 제일 우선적으로(primarily) 의지하는 곳입니다. 준은 <올 더 프레지던트 멘>이라는 헐리웃 고전 한 장면을 원용하는데, 비단 그 영화뿐 아니라 탐정, 형사가 지식의 보고인 도서관에서 사건 해결을 위한 첫 발을 떼는 장면은 보편적 설렘과 감동을 주는 단골 장치입니다.

 

주인공이 어린 소년은 아니지만, 구체적인 생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공권력 집행자인 부친에 기대어 범죄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은, 다름 아닌 엘러리 퀸 시리즈에서 처음 제시되었죠. 부친 퀸 경감도, 관록이나 공헌에 비해선 고위직이 아닙니다. 아마츄어의 눈과 손길로, 사회의 가장 병든 단면을 직시하고 치유하는 설정은, 언제 어느 작품에서 접해도 매력적입니다. 이 미미 여사의 초기작은, 퀸 시리즈의 특징인 트릭의 정교함, <에밀 탐정단> 등의 고전에서 볼 수 있는 풋풋한 아마츄어들의 서툴러도 힘찬 발길, 도전적이고 사악한 범죄자와의 두뇌 싸움 등이 잘 어울어져, 낯익은 듯 편안하면서도 흔하게 진부하지 않은, 매력적인 장편을 잘 꾸려내고 있습니다. 미미 여사의 팬, 그리고 일본 추리 장르의 애호가라면 반드시 읽어 봐야 할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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