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련
미셸 뷔시 지음, 최성웅 옮김 / 달콤한책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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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추리물치곤 서두가 정말 독특하게 시작되는 편이라서, 뭔가 기막히게 박진감 넘치는 사연이 펼쳐질 줄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개성 넘치고 강렬한 프롤로그 이후엔, 그저 "평범한 미제 살인 사건"의 진행, 그리고 두 형사 듀오의 가망 없어 보이는 추격이 밋밋하게 이어지더군요. 제가 가장 이해가 안 되었던 건, 이 남부 알비(중세 기독교 한 이단의 발생지로도 유명하죠) 출신의 로랑스 서장이 왜 근거 없는 "직감"에만 의존해서,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는, 볼품 없고 소심한 유부남 자크를 자꾸 궁지에 몰아넣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자격도 없는 남자가 외람되게 차지하고 있는 그 부인이 너무 멋져 보여서, 그에 대한 질투심에 눈이 멀어 공과 사를 구분 못하는 모습, 추리물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이더군요. 그와 듀오를 이루고 있는 실비오는, 그나마 사냥개처럼 치밀하게 증거를 수집하고 자그마한 가능성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믿음직했습니다만(그리고 참 부지런하더군요. 해협을 멀다 않고 양안을 오가며 사소한 증인도 찾아 다니는 그 철두철미함이란), 이 사람은 자기 상관이 가지고 있는 영감 수용 능력, 전체를 한 눈에 꿰뚫을 줄 아는 통찰이 대신 부족했습니다.



세네갈 출신의,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데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입담과 재치, 타락한 영혼을 가진 수수께끼의 미술 중개상이자 전문 감정인 아마두 캉디가 그렇게나 칭찬한 것처럼, 서로의 부족한 점을 완벽하게 메워 줄 수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이 마을 지베르니 토박이였던 안과 의사가, 칼에 찔리고, 머리가 으깨지고, 물에 빠져 질식해 죽은 사건에 대해 그저 미로를 헤맬 뿐입니다. 다섯 명의 정부(情婦)가 시선에 들어오지만, 사건의 내막은 시원스레 모습을 드러내기는커녕 더 꼬이고 꼬여 종적을 짙은 안개 속에 감추는 것 같습니다. 검은 피부색에 세상 악덕의 흔적을 다 감추고 있는 듯 보이는 캉디가, 소설 중반께 모습을 드러냈을 땐, 클로드 모네의 숨겨진 대작이 이 모든 혼란과  범죄를 부른 요인이 된 줄로만 알았습니다. "검은 수련".... <검은 수련>이란, 마치 <장미의 이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숨겨진 유작으로 설정된 <희극론>처럼, 지베르니 마을 어느 한 구석에서(혹은 다른 어느 장소에서건) 발견만 되었다 하면 미술품 시장이 사정과 몇몇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 놓을 수 있는, 전설의 아이템입니다. "그런 건 절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소견이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그런 멋진 환상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기만하려는 건지, 아니면 타지 사람들에게 조직적인 장난을 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속셈으로, 대를 이어 이 미심쩍인 이야기를 퍼뜨립니다. 하지만 검은 수련은 비단 자연계에만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말년에 이르기까지 정신이 맑았던" 모네가 생전 어느 시점에도 제작하지 않은 것으로 결국 드러나는 거죠.



책을 다 읽고 큰 충격을 받은 독자도(쇼크 안 먹은 분이 없을 줄 압니다), "대체 모네는 그럼 왜 나온 건가?"하고 의문을 가질 만합니다. 그가 마네, 드가 등과 함께 창시한 것이나 다름 없던 인상파는, 사물의 객관적, 정태적 형태를 화폭에 담은 게 아니라, 오브제가 "시간(이 키워드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과 함께 변화해 온 양상, 파동을 "인상"으로 포착하는 방법을 최초로 개발한, 그래서 이후 현대 추상 미술로 향하는 물꼬를 활짝 열어젖힌 크나큰 공로가 있습니다. 이전까지의 그림이 2차원에 지나지 않았다면, 인상파 이후의 그림은 시간 차원 하나를 더 지니게 된 것입니다. 또, 우리 눈에 보이는 색이 과연 실체에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의 문제에 대해서도, 보다 근본적 고민을 유도한 기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검정색은 그래서 모네에게 "색의 부재요 색의 혼융(이 빚은 지옥)"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인상파 기법으로 쓴 미스테리 소설이라 불러도 됩니다.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한 마디도 꺼내기 조심스럽습니다만, 바로 이 인상파의 지향이야말로 소설의 트릭을 푸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보통의 추리물에서 독자와 탐정은 서로 누가 먼저 진상을 발견하느냐를 두고 겨루는 입장이지만, 이 작품에서 로랑스-실비오 콤비는 우리들의 상대가 될 수 없는 불리한 처지입니다. 로랑스가 치정에 눈이 멀고, 실비오가 그저 자료만 들이파는 고지식한 유형이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2차원 세계에 박제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젤 바깥"에서 진상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처럼 독자가 무조건 이기는 게임이지만, 저를 포함해서 모든 독자는 그 유리한 판세를 살리지 못하고 결국 지고 맙니다. 왜? 로랑스 들과 함께 "착각된" 저차원으로 같이 휩쓸려 들어가기 때문이죠. 우리는 따지고 보면 언제나 (이 소설의 경우뿐 아니라) 전지의 신처럼 높은 지평선에서 전체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처지였는데, (스테파니 선생처럼) 키 작은 아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추다 보니 같이 실패하거나, 아니면 경주에서 뒤처졌는지도 모릅니다. 이 소설은 그런 우리에게, "당신은 높은 언덕에서, 단일 지평선 아닌 교차하는 소실선을 다 볼 수 있음을 잊지 말라!"고 처음으로, 처음으로 가르쳐 주고 있던 셈입니다.



모네라는 모티브 외에도 이 소설은 곳곳에서 범인의 정체, 혹은 그를 알 수 있는 유력한 단서를 남겨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루하게 읽으시면 본인만 손해입니다. 아주 공정한 퍼즐이므로, 내가 반드시 풀어내겠다는 각오로 쫓아 가십시오. 로랑스는 "그녀와 관련된 세 사실 중 최소한 하나 이상은 거짓이야"라고 하는데, 근거는 딱히 없었으나 결국 이 직감은 옳았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는, 마을에서 아무도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음에 대해 내내 작은 회한을 표시하는데, 저 같은 독자는 "할머니도 이런 감정을 갖긴 하나 보다"고 넘어갈 뿐입니다(그러나 이 사소한 표백에 엄청난 복선이 깔려 있었다니!!!!). 마지막으로, 이 한국어 번역판에서만 드러나는(다시 말해, 프랑스어 원 텍스트로는 절대 알 수 없는) 힌트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건 바로 "빈센트"란 이름의 표기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프랑스어 소설에 프랑스 국적의 인물 이름인데, 왜 "뱅상"이 아니고 "빈센트"인지요? 처음에는 그저 역자 혹은 편집진의 무성의로만 생각했었는데, 다 읽고 난 후에야 그게 엄청난 의미를 가진 줄 깨달았습니다. 제가 이분의 전작 <그림자 소녀>도 진정 예측 못할 반전에다 시공간 구조를 교묘히도 비틀어 놓은 그 서술 트릭에 탄복했었는데, 이 작품은 그를 뛰어넘어 이 장르의 진화 새 단계를 이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꼭 읽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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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이빨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10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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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 dans mon potager foisonne le lupin.
(그리고 나의 텃밭에는 루핀 꽃이 만발하다네)

조제마리아 드 에레디아의 시 한 소절로써 이 아주 긴 장편은 마무리됩니다. 이 시인은 19세기에 활동한 프랑스 고답파에 속하는데, 모리스 르블랑은 이 사람으로부터 (자신은 비록 산문가였지만) 스타일이나 표현 방법에 있어 큰 영향을 받습니다. Lupin(뤼팽)이란 캐릭터 이름은 물론 그가 존경했던 에드가 앨런 포우의 피조물 "오귀스트 뒤팽(A. Dupin)"에서 따왔다는 게 정설이지만, 우리는 이 작품 <호랑이 이빨>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어원 한 구석에 다른 사연도 있었음을 알게 되네요. (루피너스[=루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을 감상하시려면 여길 클릭하십시오)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으로, 여태 나온 중 뤼팽이 가장 정열적으로 사랑한 여인과의 항구적 결합으로 이 작품은 마무리됩니다만, 그런 지어낸 듯한 감상적 결말이 애써 독자에게 주려는 인상과는 대조적으로, 전체 줄거리는 뭔가 비극적이고 애상적인 느낌을 기어이 어느 한 구석에 남기고 맙니다. 참 이상합니다.

뤼팽은 참 유쾌한 사람입니다. 물론 그렇게 재능이 뛰어나니 성취한 일도 많고, 가공할 적수들을 통쾌하게도 사지에 몰아넣거나 법의 심판을 받게 헸으니 즐거울 만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능력에 비해 그가 차지한 부의 크기나 영토는 너무나도 좁고, 잔인한 악당들, 무능한 경찰들 등 너나 할 것 없이 이 뤼팽의 명철함과 우월함을 시기, 질투하기에 바빠, 세상은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과 평판의 지극히 적은 부분을 그에게 허용합니다. 거기까지는 뭐 괜찮은데, 이 뤼팽은 그 보상을 엉뚱한 데서 취하려 듭니다.

이 작품 결말부에는 뤼팽이 총리 발랑글레(이분 <황금삼각형>에 이어 또 나옵니다)와 협상하여 자유를 얻어 내기 위해, "자신이 직접 개척, 정복했다는" 모리타니 왕국을 프랑스 정부에 넘겨 주겠다는 제안이 나오는데, 이런 터무니없는 설정은 물론 미스테리 본 줄기와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베베르 부국장의 흉계에 넘어가 교도소에 갇혔으니, 이런 극단적인 방법으로 최고 권력자와의 협상을 통해 감옥 문을 나설 수 밖에 없다는 건데, 이 수법은 이미 <813>에서 한 번 써먹은 터라 식상하고, 이런 최후의 카드는 한 번 이상 쓰이는 게 매우 곤란합니다.

아무튼 이 작품에서 뤼팽은 평소보다도 몇 배 더 즐겁고, 그 달성한 위업은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앨런 쿼터메인의 그것들을 합친 것보다 더 큽니다. 하지만 그는 이 작품에서 유독 자주, 위기에, 그것도 치명적인 위기에 빠지고, 판단 착오를 빈번히 범하며, 사건의 진상도 (종전과는 달리) 두 번에 걸쳐 더듬거리며 알아냅니다. 그렇다고 적수가 이전의 그들보다 더 무시무시한 자(들)이었냐면 그것도 아니고... 제스처는 더 요란해졌지만, 내실은 많이 빈곤해졌습니다. 아마 르블랑이 이 작품의 구상을 깔끔히, 치밀한 사전 작업 통해 설계한 게 아니라, 도중에 여러 번 변덕을 부린 끝에 간신히 마무리지은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시작은 정말 거창했는데, 그렇게까지 꼬인 미스테리라면 천하에 없는 작가라도 연착륙시키기 힘들 것입니다.

뤼팽이 그토록 판단을 그르칠 만한 여자라면 대단한 매력과 미모를 지닌 재원일텐데, 왠지 모르게 전작의 베로니크만큼도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007에게 본드걸이 있듯, 이 협객에게도 매 작품마다 그에 어울리는 다양한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이 르바셰르만은 선명한 이미지가 남지 않더군요. 그토록 똑똑하고 착한 여인이, 왜 늙은 괴짜 가스통 소브랑이나, OOO 같은 인간에게 아무 쓸데없는 헌신과 애정을 보인 건지... 제가 언제나 지적하는 바대로, 행동의 동기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정신이상" 따위로 마무리되고 만다는 게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Levasseur는 국립국어원이 정한 원칙대로라면 "르바쇠르"가 맞지 않을까요? 이 이름은 장 자크 루소가 여러 사생아를 낳게 한 어느 여성 세탁부의 이름과 같아서 특별히 좀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그저 범작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가스통 소브랑이 뤼팽의 거소까지 감연히 찾아들어와(원래 그 자리에는 르바셰르가 있기로 기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주장을 입증할 증거가 하나도 없지만, 진실이라는 가장 확실한 무기에 기대어 당신과 의논을 하려 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뤼팽의 입장엑서, 자신을 포함한 무고한 이들을 여럿 해치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애정을 독차지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나중에 드러나지만 이는 착각이었습니다) 남자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는 특유의 통찰력과 직관(여러 번 이 덕목을 강조하더군요)을 발휘하여 소브랑의 말이 참임을 알게 됩니다. 소브랑 역시, 상대인 뤼팽이 자신의 말을 곡해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도 명석한 판단력으로 진실은 진실대로 인정해 줄 줄 아는 뤼팽에 크게 감복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캐릭터들 사이에 대단히 깊이 있는 소통 모습을 창조해 낸 것으로서, 르블랑의 역량을 높이 평가해 주어야 마땅한 대목들이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뤼팽의 그 다음 결정이었습니다. 소브랑의 말을 믿건 안 믿건, 그들을 유치장에 보내는 게 자신의 행동 반경도 넓히고, 두 사람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며, 마주르 반장의 입지도 배려해 주늕동시에 공권력과의 상호 협력을 더 튼튼히 하는 선택 아니었을까요? 고의로 사람을 해치는 대신 교묘한 배후 조종으로 같은 목적을 달성한다는 건, 크리스티 여사, 퀸의 작품에서도 이후에 등장합니다만, 이 작품이 그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회의적입니다. 이 작품이 그런 컨셉을 효과적으로 완성하지 못했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범인의 정체와 행적 역시 말끔히 설명 안 되는 부분이 너무 많은데, 다만 스포일러가 되겠기에 더 이상 적지는 않겠습니다.

마치 관객들을 앞에 두고 실시간으로 벌이는 통속극처럼, 플롯의 전개에 일관된 원칙이 없고 너무 들쭉날쭉인 모습이 아쉬웠습니다. 물론 읽어나가는 중에는 재미있는데, 다 읽고 나면 참 허전합니다. 마지막 순간의 (la derniere minute) 뜬금없는 변덕, "사람 살려!"를 처량하게 외치다가 무대에서 "나는 그 자를 고발합니다(Je l’accuse)"를 화려하게 되뇌는 배우가 되는 뤼팽, 도대체 거부할 수 없는 제안(choses qu’on ne refuse pas)은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면서도, 한순간에 헌신짝처럼 버리고 "간지"를 택해 버리는 쾌남. 여튼 그의 매력은 이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지만, "아프리카의 왕"을 자칭하는 그의 모습은 뭔가 슬프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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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혈 2015-03-24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에 쓰려다가 깜빡 잊었는데, 이 소설에서 르블랑은 캐릭터 작명에서 우스운 센스를 보여 줍니다. 마즈로의 본명은 ˝알렉상드르˝인데, 물론 아버지 뒤마의 이름이죠. 이폴리트의 아들 이름은 ˝에드몽˝인데, 이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본명입니다. 그런가 하면 뤼팽은 호텔에 묵을 때 ˝르코크˝라는 가명으로 예약을 하는데, 이는 포우의 뒤팽보다 조금 뒤에 출현했고, 홈즈보다 앞서 나온 에밀 가보리우의 캐릭터와 이름이 같습니다.
 
서른 개의 관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9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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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쯤 <천둥꽃>이란 소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와 독자들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늦게 중앙집권 시스템에 편입된 지방인 브레타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정신 이상 증세를 앓았던 끔찍한 여성 연쇄 살인마(실존 인물)를 다루고 있었죠. 그 작품 뿐 아니라, 브레타뉴는 켈트 족이 마지막까지 문화적, 종족적 독자성을지키려, 크리스트 교 세력의 동화 노력에 완강히 저항했던 지역이라, 여러 문학 작품에서 기이하고 소름끼치는 이미지를 창출하는 역헐로 오랜 동안 소재로 애용되어 왔습니다. 라틴 인, 게르만 인의 눈으로 봤을 때 무지몽매, 미신, 야만의 풍습이 최후까지 남아 있는 암흑의 땅 비슷한 곳으로 여겨져 온 게 사실이고, 다른 작품 예를 들 것도 없이 바로 이 코너스톤 시리즈 제6권에도, 최후까지 까페 왕조가 내리는 귀족 작위를 받지 않고 거부한 토착 가문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체로 주류 프랑스인들에게서는 비웃음거리로 여겨지지만, 지금이야 뭐 옛 흔적이 거의 안 느껴질 만큼 변화한 모습이죠.

소수 민족의 강제 동화, 차별 이슈는 예나 지금이나 "핫 포테이토"이겠으며, 정치인들이나 일반 민중들 모두에게 참 난감한 문제입니다. 미지의 대상이다, 이질감이다 하는 막연한 인식, 감정은 타자에게 괴물의 더께를 씌우는 쪽으로 귀착이 나는 게 보통인데요. 이 작품에서도 브레타뉴인들은 드루이드 교를 믿니, 흑마술을 쓰니 하는 식으로 왜곡, 사갈시 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맹획을 칠종칠금하는 대목은, 이 오지에서 각종 괴수, 마법, 초자연적 술책이 횡행하는 걸로 과장되이 묘사하는데, 연의가 판타지 색채를 가장 짙게, 노골적으로 띠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기도 하죠. 그런데 정말 특정 변경 지역이 그런 오묘한 술수를 부릴 줄 안다면, 애써 "왕화(王化)"의 혜택을 베풀 게 아니라, 그대로 양성해서 비밀 병기로 간직하는 편이 나을 텐데요. 농담이 아니라, 이 작품은 "신의 돌(la Pierre-Dieu)"에 대해서도 매우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상 사기에 불과하지만 마법 비슷한 기술로 생계를 잇는 세 여인(겉모습으로 보아 영낙없는 마녀들인데, 오랜 전통을 잇느라고 그랬는지 머릿수도 정확히 세 명을 맞추었네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하는 네 여자(이 지방의 반 기독교 정서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신의 돌에 손을 대었다 화상을 입고 제 손을 도끼로 잘라버린 노인, 손자를 납치하다 손자와 함께 목숨을 잃은(혹은 그렇게 알려진) 귀족 노인,.... 제가 여러 번 지적하는 대로, 뤼팽은 어떤 이미지의 형상화에 상당히 능한 편입니다. 여느 호러물 전문 작가에 못지 않게, 이 장편에서 뤼팽은 끔찍한 이교적(heretic) 심상을 기막히게 잘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미스테리가 좀 약하다 싶어도 다른 훌륭한 장점들에 의해 깔끔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보완이 되고, 독자는 괜히 속물 심리에서 까탈을 떠는 게 아니라면 정직하게 그의 작품을 즐길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 중에, "뭐만 좀 막혔다 싶으면 비밀 공간, 지하 통로를 등장시켜 난관을 피해간다"는 게 있는데, 부당한 비판입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점부터 세련된 문명을 이루고 살아 온 이들이 프랑스인들이라, 그들의 건축물이나 유적은 (픽션이 아닌) 진짜 비밀스럽고 비의적 구조를 지닌 게 많습니다. 르블랑 뿐 아니라 심지어 다른 나라 작가들도,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는 으레 지하 통로를 등장시킵니다. 게다가 르블랑의 필치는, 이런 장면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돌아갑니다. 지난 3, 4, 5 권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도일 경의 작품과 소략한 문장에서 결코 볼 수 없는 디테일드 묘사가 펼쳐지고, 독자에게는 그 자체로 선물이고 향연입니다. 장르물의 공식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면, 공식만 앙상하게 머리 속에 넣고 자기 만족을 하면 되지, 개별 작품들을 읽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요?

르블랑의 진짜 문제는, 악당의 동기에 개연성이 부족하다 싶으면, 그냥 편하게 "정신 이상"으로 몰고 가는 데에 있습니다. 이 작품도 그렇습니다. 보르스키는 뭐하러 이런 개고생 노가다를 하는 걸까요? 답은 그냥 "미쳐서"입니다. 게다가 이런 설정 배경에는, 비이성적(전쟁 직후라 참작이 되는 면이 있긴 하지만) 반독 감정이 자리하고 있는 터라, 더욱 큰 아쉬움을 줍니다. 물론 도일 경도(이분 역시 문학을 문학으로 존중하지 않고, 다른 중요한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 정도로 경시했다는 공통점이 있죠) 홈즈 시리즈 후기작들에서 애국심 편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만, 르블랑은 그 정도가 더 심해 전혀  자제하는 모습 없이 "전범국이자 조국의 원수"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브레타뉴가 그 과거가 어찌되었든, 르블랑의 시대 이미 훨씬 전부터 위대한 조국 프랑스의 본체적(integrative) 구성 요소입니다. 이런 브레타뉴에서, 흑마술과 범죄를 저지르는 악마 역을 토착인(이들은 자랑스러운 프랑스인입니다!)에게 맡길 수는 없죠. 그래서 전혀 엉뚱하게 끌어들인 게 "또 독일놈"인데, 이 책도 그렇고 성귀수 선생님 책도 그렇고 Superboche라는 원어(신조어입니다. boche라는 비칭에 super를 붙인 거죠)를 "슈퍼 독일놈"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다소 유치하게 느껴질 만큼 반독 감정이 우려되는 대목들입니다. 이 작품은 그 출간이 1920년에 이뤄졌는데, 작품 완성 시점을 조금 이르게 잡는다 해도 전황이 완전히 연합국 측에 기울거나, 이미 독일 제국이 패망한 후(1918)일 것입니다. 전쟁도 끝나고 했으니 이제 대놓고 독일을 비방하겠다는 르블랑의 비뚤어진(?) 사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에 대한 비판, 저주 중에는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것도 많더군요. p333을 보시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허영심과 잔혹, 냉소와 신비주의가 멋들어지게(반어법입니다) 섞여 있다니까! 네놈들은 항상 이루어야 할 임무가 있다고 말하면서, 고작 하는 짓이라곤 약탈과 살인 말고 뭐가 있냐 말이다!"라는 말이 뤼팽의 입에서 나오는데, 기가 막히게 들어맞지 않습니까? 특히 이 작품이 나오고 20년 후에, 2차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을 떠올려 보십시오. 심지어 이 작품에는 칼자루에 새겨진 만(卍)자 무늬를 언급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이 시절이면 히틀러가 맥주홀 폭동을 일으키기 몇 년 전이고, 나치 당이란 얼개를 갖추지도 못했을 때입니다. 진짜 예언은 드루이드 교의 미신적이고 근거도 없는 예언이 아니라, 이 작품에서 르블랑이 뤼팽의 입을 빌려 하고 있는 셈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어떤 독자는 이 작품에 "핵무기"가 나온다면서 경이를 표하기도 하더군요. 그러나 그 정도까진 아니고, 폴란드 출신으로 프랑스에 망명하여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퀴리 부인에 의해, 라듐이나 우라늄 등의 속성에 대해서는 르블랑의 시대에도 웬만큼 알려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마침 보르스키가 사칭한 신분이 애꿎게도 "폴란드 귀족"이긴 합니다만). 르블랑의 놀라운 점은 그게 아니라, "어떻게 천연 상태에서 사람의 손을 데게 할 정도로 순도 높은 광석이 생성될 수 있느냐?"라는, 지극히 타당한 의문을 가정교사 스테판의 입에서 나오게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독자에 따라선 수긍을 못할 수 있으나, "들판에 핀 꽃이야말로 알고 보면 더 놀라운 기적"이란 뤼팽(즉 르블랑)의 설명은, 문제의 호도가 아니라 오히려 근본이치에 대한 심오하고 차분한 설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프리카 가봉의 오클로라는 마을에, 실제로 "천연 핵분열"이 벌어지는 놀라운 현상이 있습니다. 여기 클릭해 보십시오.

이 작품에는 8권에서 우리에게 친숙했던 벨발 대위가 잠시, 그 상이용사 친구들은 동반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냅니다. 뤼팽(아니, 르브랑)은 여기서 대단히 우습게 작품 외적 개입을 시도하는데, "분위기가 너무 음산해서 이야기를 좀 재미있게 만들려고, 자고 있는 보르스키를 바로 박살내서 프랑수아를 구하지 않고(켁), 드루이드 교 노사제로 둔갑해서 놈을 좀 갖고 놀았다"는 말까지 합니다. 독자의 재미를 위해(자기 입으로 이러고 있습니다), 아이가 지금 어디서 배를 쫄쫄 굶고 있는 사정은 잠시 뒤로 밀린 겁니다! 도일 경과는 달리, 르블랑은 문학에의 직접 공로로 레종 도뇌르를 수훈한 사람인데... 여튼 그는 대단히 구식이긴 해도, 현란한 말빨과 탁월한 형상력으로, 거진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 한국 독자를 이처럼 매혹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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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즈번드 시크릿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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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 너무너무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재미있고, 이렇게 슬프며, 막판에 반전까지 마련된 소설을 읽은 게 진짜 행운처럼 느껴지네요.

 

제목만 봤을 때 무슨 통속 소설인 줄 알았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쓴 편지, 그 겉봉투에 "내가 죽거든 읽어 봐"라고 쓰여져 있다면, 아내인 당신은 과연 어떻게 하겠습니까? 훌륭한 문학 작품은 이처럼, 보편적인 독자가 언제라도 맞이할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하며, "나라면 어떻게 할까?"의 물음을 작중 인물들과 함께 풀어가게 해 줍니다. 미리 답을 말하자면, 문제의 아내 세실리아는 결국 편지를 열어 봅니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세요?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습니다. 세실리아는 남편 존 폴을 원망합니다. "대체 날 뭘로 봤기에 이런 편지를 써 놓았지? 지옥은 당신 혼자 겪어야지, 왜 이 문제를 내 것으로 만든거야?" 책을 읽는 독자도 같은 생각입니다. 일을 저지른 남편도 어리석고, 그 후에 한 행동은 더 어리석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문제도 자기 것으로 오롯이 떠안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존 폴이란 남자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요.

 

아마 평균적인 한국인에게라면 답은 하나일 것 같습니다. 아내는 그저 함구할 뿐입니다. 지난 일은 지난 일, 어찌되었든 내 가정은 지켜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동서들에게 언제나 증오의 대상이 되는 시어머니(즉 존 폴의 어머니)가 뭔 낌새를 챘는지 그날따라 찾아와서, "가정이 가장 소중하다."는 말을 뭔 생각에서인지 남깁니다. 멍청한 아들이 뭘 감추려 들어도, 어머니는 다 눈치를 채나 봅니다. 세실리아는 존 폴이 자기 어머니에게 사실을 털어 놓았는지 궁금해하는데, 자신도 아이 어머니면서 그만한 사정도 짐작을 못할까 싶었습니다. 1등 며느리, 1등 아내, 1등 엄마에게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정이 닥치면 이런 빈 구석이 드러나나 봅니다.

 

제목인 <허스번드 시크릿>엔 일단 이런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게 다가 아닙니다. 편지에 쓰여진 내용은 누구에게도, 또 어느 공동체에서도 결코 소홀히 다뤄지지 않을 중대한 사건이지만, 소설은 그 밖에도 두 여인이 더 나옵니다. 한 명은 테스, 다른 한 명은 (결국 세실리아 부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걸로 드러나는) 레이첼입니다. 테스는 세실리아와 비슷한 또래이며, 레이첼은 20여년 전 두 여인과 같은 또래이자 같은 학교를 다녔던 딸을 (끔찍한 사고로) 여읜 후, 지금은 손자를 본 할머니입니다. 이 세 여인의 사연이 기묘하게 얽히면서, 독자는 과연 어떤 결말로 이 악연의 실타래가 풀릴지, 혹은 더 꼬일지 가슴을 졸이게 됩니다.

 

세실리아는 남편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미래에 그들에게 닥칠 지 모르는 끔찍한 불행에의 공포에 시달립니다. 세실리아와 비슷한 또래인 테스(토머스 하디의 작품 여주인공과 같습니다)는, 어려서 자매처럼 자라던 사촌(읽어 보니 외사촌이더군요. 서양은 구분을 하지 않죠) 펠리시티("행운"이란 뜻이죠)가, 자기 남편 윌과 바람이 나는 황당한 일을 겪습니다. 그녀로선 남편과,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벗(이자 혈육)을 동시에 잃은 건데요. 남편과 사이에 아들까지 있는 그녀로선 하루 아침에 모든 걸 잃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다시 짜야 하는 끔찍한 운명을 직시하게 됩니다. 10대때 의문의 죽음을 당한 딸이 만약 살아 있었다면 이 두 여인과 비슷한 또래가 될 할머니 레이첼은, 과거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던 아들 롭은, 잘나가는 아내(즉 레이첼의 며느리)의 진로를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갈 예정입니다.

 

이처럼 세 여인은 각각 미래, 현재, 과거의 불행과 상실감에 고통 받고 있습니다. 이 세 여인의 불안과 고뇌는, 공교롭게도 기독교의 사순 마지막 고난 주간에 "저 문제의 편지" 발견을 계기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교차로의 동일 지점으로 질주합니다. 세 여인의 인생에 있어 이 고난 일주간은 말 그대로 운명의 전환점이 되는 셈인데요..... 결말은 실로 장엄한 화해와 용서, 모든 갈등의 승화로 채워집니다. 읽는 분에 따라 조금 작위적이지 않나 생각도 드실 수 있는데(특히 베를린 장벽의 잦은 언급), 소설의 배경은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작부터 가톨릭적 요소와 분위기가 복선처럼 깔리고 있습니다.

 

호주에서 로마 가톨릭은 소수파 종교입니다. 그런데도 호주를 대표할 만한 이런 명작들은 이 종교를 배경색으로 집어 넣는 걸 자주 본다는 게 흥미롭습니다(다른 예로는 칼린 매컬로 여사의 <가시나무새>). 처음에 "부활절인데 왜 가을이라고 하지?" 같은 의문이 들었는데, 계속 읽어가면서야 "아 배경이 호주라서..." 라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치정 드라마도 아니요, 범죄 미스테리도 아닌, 우리들 평범한 사람들의 세심하고 가녀린 심성과 복잡한 감정의 갈래를 어쩌면 이렇게도 잘 표현하고 있는지 그저 놀라웠습니다. 드라마만 장중한 게 아니라,  평균적인 독자의 공감대를 정확히 자극하고, 가식 없는 진솔한 느낌을 절묘히 표현하면서도 천박한 막장 요소는 전무한, 정말 감동적이면서 깨끗한 뒷맛을 남기는 소설이었네요. 이렇게 세심한 심리를 표현한 문장은, 번역에서 통사 구조가 꼬이기 쉬운데, 이 책은 그런 구석도 없더군요. 여느 한국 소설보다 더 쉽게 술술 읽혀서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실수는 인간이 저지르나, 용서는 신이 행하는 바"라는 알렉산더 포프의 명언이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야무지건 멍청하건, 냉정하건 온화하건 간에 다 한 번씩 싥수를 저지릅니다. 어떤 건 제법 큰 실수이고, 어떤 건 그 자체론 사소한데 나중에 여파가 커집니다. 뜻하지 않은 비극, 혹은 감당 못할 파국을 앞두고, 이 보통 사람들은 더럽고 이기적이며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저버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결정적 대목에서, 신이 아니기에 고귀할 수만은 없는 평범한 인간이 고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결단들을 다들 내립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첼 할머니는 범인을 용서합니다. 동시에 그녀는, 그렇게나 마음에 안 들던 며느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화해를 시도합니다. 고부 둘 다 점잖은 사람들이라 표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했으나, 사실 지옥과도 같은 냉전을 치르고 있었기에, 너무도 의외의 순간에 뜻밖의 전갈을 받은 며느리는 잠시 감회를 추스르느라 말을 잇지 못합니다. 저는 사실 이 "부수적으로 치러지는 작은 화해"가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큰 일은 큰 일대로, 최종의 심판은 신에 맡긴 채 기억의 저편으로 보내고, 내가 매조지할 수 있는 작은 일, 진즉에 어루만질 수 있었던 작은 다툼부터 해결하겠다는 레이첼의 결정-사실은 본인도 외로움과 번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몰려서 건 전화였습니다만-이, 책을 덮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게 다인줄 알았더니, 이건 웬걸, 에필로그에선 전지적 화자가 더 엄청난 반전을 예비하고 있더군요. 우리 인간은 먼 곳을 볼 줄 모르고, 자신의 이해만 돌볼 줄 아는 구제 불능의 속물들입니다. 프레임 밖에서 어떤 큰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지, 제아무리 현명하고 명철한 이라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자칫 경솔한 겳정과 감정의 폭발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고, 혹시 저 멀리서, 저 높은 곳에서 누가 연민의 정 가득한 눈길로 우리의 어리석음을 지켜 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하고 또 성찰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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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삼각형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8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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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p de fleurs, madame, n’en jetez plus!
(꽃이 너무 많아요 부인, 더 이상 던지지 마세요!)

 

 

이 장편은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이 배경입니다. 도입부가 꽤나 충격적인데, 마치  007 시리즈 첫째 편인 "닥터 노"의 인트로를 보는 듯합니다. 전쟁에서 조국을 지키려 싸우다 불구가 되었다고는 하나, 멋쟁이들만 활보하는 파리 시내에서, 한쪽 팔이 없는 사람, 한쪽 다리가 없는 사람, 얼굴 일부가 날아가버린 사람 들이 줄을 이어 걷고 있으면, 그 모습은 참 그로테스크할 것입니다. 착한 독자인 우리는 그러려니 하는 마음, 만약 한국국적이기라도 하면 "저분들 아니셨으면 우리는...." 같은 경외어린 시선을 갖고 그들을 보았겠지만, 경박한 프랑스인들, 그 중에서도 파리의 아가씨들은 그러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참에, 어느 미인, 차림새는 수수하나 동작과 실루엣으로 미루어 꽤나 미인일 것 같은 어느 여성이, 괴한들에게 자동차로 납치를 당합니다. 더 놀라운 건, 저 상이군인들이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 재빠르게 행동에 들어가, 그 여인을 구하기까지 한다는 것이죠. 아무리 전직 군인 신분이라고는 하나 몸놀림이 성치 않을 텐데, 어떻게 그런 기민한 반응이 나오며, 이런 일사불란한 작전을 지휘하는 이는 또 누구일까요? 백주 대로상에서 여인을 납치하려 했던 자들은 그 정체가 또 무엇이며 말이죠. bunch of wonders라 부를 이런 빼어난 테크닉은, 이후 같은 장르의 여러 작품들에서 후배들에 의해 되풀이되겠죠.

 

이런 기이한 장면을 잘도 시각화하는 르블랑의 재주는 이미 앞 작품들에서 여러 번 본 바 있습니다. 6권의 세번째 단편 <그림자...>가 그 좋은 예입니다. 너덜너덜 옷을 기워입은 사람, 그나마 멋 좀 낸 사람, 늙은이, 꼬마, 아가씨,.. 도저히 같은 동아리로 엮일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천태만상의 인간들이, 해마다 같은 날, 폐쇄된 어느 부지에 모여 우물을 들여다 보거나, 땅을 헤집거나 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날이 저물기 전 한탄을 쏟아내는 사람들 앞에서, 어느 젊은 여인이 일장 연설을 해댑니다. 사연을 모르면 이보다 더 괴이쩍은 풍경이 없습니다. 르블랑은 이처럼,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이미지들을 모아 극적으로 모자이크하여, 독자들 앞에 이야기의 서두로 척 꺼내어 놓는 기막힌 장기가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으로는 파트리스 벨발을 꼽아야겠습니다만, 처음에 단단히 한몫 해 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코랄리 엄마"가, 1부 이후로는 무대에서 모습이 뜸해지는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입니다. 물론 힘 없는 여인의 몸이고, 간악한 악당의 손에 납치되고 감금되느라 그렇긴 합니다만... "엄마"는 물론 누군가의 모친이라는 뜻이 아니라, 젊은 간호사 코랄리를 친근하게 부르는 환자, 병사들로부터의 애칭입니다. 만약 나이 지긋한 간호사라면 mere라고 불렀을 텐데, 나이가 어리다 보니 maman이라고 한 겁니다. 코랄리는 이제 겨우 이십대 중반 정도인 것 같고, 병사들도 대개 그 또래거나 더 많은 게 보통이죠. 주인공 파트리스는 서른이 넘었지만 그를 maman이라 부르는데, 우리말 "엄마"하고는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이건 성귀수 선생님도 이 표현을 쓰고 있던데, 느낌이 어색해서 좀 다른 대안이 없을지 번역가들이 연구를 좀 했으면 합니다.

 

아무튼 파트리스 벨발은 애국심 강하고 투지와 열정에 불타는 사람입니다. 한쪽 다리를 완전히 잃고 의족을 단 사람이지만,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코랄리에게 구애를 합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너무 자신감 넘치게 코랄리에게 수다스러울 만큼 들이대는 모습은 약간 민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코랄리는 알고 보니 유부녀였고, 그 남편이란 자는 나이도 많은 데가 인상이 아주 고약한 자였습니다. 게다가, 그 착한 코랄리는 그 남편이 위험에 처한 모습을 보고도 별반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습니다. 파트리스는 이 사실을 한꺼번에 알게 되자 그저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그의 동선과 심리를 ㄸ라가는 우리 독자들도 같은 느낌입니다. 이야기를 이처럼 뒷부분이 자꾸 궁금해져서 페이지를 놓지 못하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야말로 정말 경탄스럽습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사건 전개도 물론 재미있습니다. 결국 이 장편도 뤼팽이 나와서 해결해 주는 구조인데요. 재미있는 건 둘째치고, 사실 에사레스란 자가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을 때부터 이미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예측이 되었습니다. 이 트릭은 전에 한번 나오기도 했고, 뤼팽의 열렬한 팬이라면 대체로 이야기가 어떤 모양으로 흘러가는지 감이 잡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골육상잔이라는 끔찍한 패륜이 절대 작품에서 용납 안 된다는 건 6권의 <배회하는 죽음>에서도 보여진 바 있습니다. 시계의 트릭 역시 처음 보는 속임수는 아닙니다.

 

이 작품의 악당으로는 에사레스라는 터키인이 제시됩니다. 투르크는 1차 대전 당시 동맹국 편을 들었는데요. 책에서 반독 요소는 현저히 줄어든 반면, (아마 프랑스 입장에선 예상치 못했던) 이 동방의 늙은 대국이 취한 선택에, 애국심 넘치는 작가 역시 어지간히 분개한 것 같습니다. 반면 그리스에 대해서는, 시대착오적 낭만주의를 가슴 가득 간직한 르블랑이어서인지, 꽤나 호의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바이런 경 등을 떠올려 보십시오). 소설 중에 나오는 배 이름 중에 "벨 엘렌"이 있는데, 이게 바로 Belle Helene, 우리가 아는 그리스 신화의 미녀입니다. 그리스풍 조각상도 소설 속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데, 스포일러라 여기 적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 예비역 군인이 나와서 저는 이 사람도 뤼팽의 분신일까 생각했는데, 아무렴 다리 하나를 자르고 그런 변장까지 해야 할 이유는 없겠죠. 6권에 보면 "퇴역 군인 자니오"란 이름으로 뤼팽이 나오는데, 애써 도와 준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이래서 하층민 따위에게 함부로 선의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암시까지 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작품 읽은 분들 중에, 어째서 뤼팽이 그리 순순히 물러났는지 의아했을 수도 있는데요(뤼팽이 아직 유명한 범죄자가 아니었을 시절인데). 아무리 공증인이 개입해서 작성된 계약이라고 해도, 이를 상대로 소송을 하려면 원고, 피고 모두 실존 인물이어야 합니다. 소송이 유지되기 위한 대 전제입니다. 실존 인물이 당사자가 아닌 소송을 "허무인 소송"이라고 하는데, 나면서부터 일련번호가 개개인에게 발급되는 우리 나라에서는 교과서 외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 이슈지만, 다른 나라라면 사정이 그렇지 않죠. 계약 내용이 진정성을 갖추어도, 원고가 실재하지 않는 이라면 그 소송은 원천 무효입니다.

 

뤼팽도 여기서, 진짜 예비역 장교에게 "배신행위"를 당합니다. 그러나 뤼팽이 누굽니까. 아마 이 작품은, 읽는 독자들에게 결말에서 가장 후련하고 통쾌한 방법으로 사건이 마무리되는 체험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처럼 도중에 진상을 다 짐작한 독자도, 대단원에서는 그냥 뭐 묵은 체증이 다 가시는 느낌이었으니... 청춘 남녀(남자가 약간 나이가 많긴 하지만)도 부모대부터 못 이룬 사랑을 이루고, 전황은 우리 모두의 조국(뤼팽을 읽는 동안에는 모든 독자는 프랑스인이 됩니다!)을 위해 유리하게 돌아가니 말입니다.

 

에필로그에 나오는 프랑스 수상 "발랑글레"는, 아마 제 생각에 아리스티드 브리앙을 모델로 한 것 같습니다. 아주 유능한 수완가이고, 세계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켈로그-브리앙 조약을 체결한 인물이기도 하며, 노벨 평화상도 받았지요. "유럽 최강대국"이 연합국 대열에 동참하는 조건으로 자금 지원을 요청한다는 서술이 있는데(이 나라가 돈을 조건으로 흥정한다는 야비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프랑스가 양해하건 안하건 무관하게 참전은 한다"는 말도 덧붙이고 있으나, 사실이 아닙니다), 이는 오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문은 la dernire des grandes puissances europennes인데, "유럽의 마지막(=최후로 남은) 강대국"이지 "최강대국"은 아닙니다. 최강대국은 당연 영불독 외에 누가 있습니까? 일찌감치 그들은 교전 당사자였고요. 여기서 이름이 안 나온 채 은근 암시만 되고 있는 이 나라는 이탈리아입니다. 이탈리아는 "열강"이기는 하나 최강대국은 아니죠. 1915년에 삼국 동맹을 깨고 독-오의 뒤통수를 쳤으니 이 점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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