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비즈니스의 모든 것 - 소설로 읽는 중국 비즈니스 매뉴얼
김민혁 지음 / 청동거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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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흔한 말이 가장 실천에 옮기기 힘듭니다. 본래 그렇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위태롭지 않다." 이 말은 누구나 다 알듯 중국의 고전 <손자병법>이 그 출전입니다만, 한 마디 한 마디가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좌우명으로 삼기에 너무도 하중이 큰 금언이자 원칙입니다.



제가 소화한 이 책의 형식, 내용, 주제, 용도는 딱 저 한 줄의 금언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 제목을 보죠. "중국 비즈니스(비록 이 책 본문 중에서 자주, 비'지'니스로 오기되지만)의 모든 것". 그렇다면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드는 예비 구매자, 독자의 대부분은 중국에서 사업 한번 크게 벌이는 데 관심 있는 층이겠습니다.

1) 중국 시장의 특성과 중국인의 습성, 심리 구조를 파악하고("知彼"),
2) 중국 시장에 진출하려는 나의 강점과 약점, 기회와 위협 요소를 분석하며("知己"),
3)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전략 전술을 구사하되 요행을 좇지 말고 正道를 걸어라("百戰不殆").

요약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책 내용이 저렇게 추상적이면 읽는 이에게 별 도움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이 책 내용은 너무도 구체적이고, 너무도 실용적인 데다, 너무도 현지 감각이 뚝뚝 묻어 떨어지며, 중국 현지에서 열심히 현업에 종사하다 아예 비즈니스의 비의와 인생 사는 핵심의 원리까지 달통하신 저자의, 너무도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재미까지 있다는 점을 다시 강조합니다.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에게 어떻게 하면 가장 알찬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할까, 그 담긴 컨텐츠뿐 아니라 전달하는 형식의 묘미까지 깊이 고민한(만약 별 고민 없이 바로 이런 책이 쓰여졌다면 진정 천재겠네요), 저자의 살뜰한 성의가 어느 독자에게도 와 닿을 만한, 멋진 책입니다. 저자가 고민하고 성의를 기울여도 독자가 별 준비 안 된 처지라면 결국 소통이 실패할 수 있는데, 이 책은 아무 생각 없이 페이지를 넘기던 독자조차 정신이 버쩍 들게 할 만한, 뭘 고민하고 뭘 실천해야 자신의 위치에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각성시킬 그런 메시지와 정보를 담았습니다. 이 책에서 평범한 건 진정 "제목"뿐입니다.



중국에 진출하려는 사업가, 상인, 기타 아이템 보유자들은 "이 광대한 시장을 잘 공략해야지" 하는 일념과 의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물어 보면 그 나름 아는 것도 많고, 남들 하는 만큼은 계획도 섰습니다. 과연 진출한 이들 중 몇이나 성공해서 그 자리를 지키거나, 쏠쏠한 수익을 챙겨 돌아올까요? 대부분은 그저 의욕만 앞서다 실패할 뿐입니다. 이 책 본문에도 나오듯, 1990년대 초만 해도 "아, 13억 인구한테다 젓가락 하나씩만 팔아도 그게 어디여?" 같은 말이 유행어처럼 나돌았습니다. 저자는 "아마 지금은 이런 말을 하는 이가 없을 것 같다"고 하시는데, 이런 말은 사업의 기초만 모르는 게 아니라, 아예 세상이 무슨 이치로 돌아가는지 캄캄하게 모르는 사람이나 할 법한 말입니다. 지금뿐 아니라 그때도 마찬가지고, 중국 아니라 어느 지역이라 해도 사정이 같아요. 시장이 뭔지 장사가 뭔지, 아니 아예 사람이 뭔지도 모르는 절망적 무지의 소치죠.


저자는 중국뿐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의 원칙으로, 그 나라의 문화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현지인을 대할 것을 거듭 권합니다. 그런 용어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지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대하고 오해, 왜곡 없이 수용하는 능력을 CQ라고 저자는 칭합니다. IQ, EQ 다 중요하지만 중국에서 성공하려면 특히 CQ가 높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특히 1) 한국인들끼리 모여서 "에이, 중국놈들은 이게 글렀다는 거야." "아휴, 그건 양반이지. 난 이런 것도 겪었다고." 같은, 한국식 가치관을 중심에 두고 현지의 행태를 마음대로 재단하는 게, 가장 심각한 부적응자의 징후라고 지적합니다. 2) 중국인은 이러이러하다면서 개개인을 특정 집단에 거칠게 귀속 규정하는 태도 역시, 현지에 적응 못하고 사업을 접는 실패자들의 전형적 태도라고 말합니다. 한국 사람이라 해도 취향, 정치적 성향, 입맛, 용모, 빈부 차 등 천차만별인 개성인데, 어느 누굴 두고서도 그저 "한국인"이란 한 마디 규정으로 설명이 가능하겠습니까? 이런 저자의 일침은, 중국식 풍토와 사고 방식에 거부감을 느끼면서, 그들의 땅에서 돈은 돈대로 벌고 싶은 이중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만만디"라는 한 마디로 중국인의 행태를 요약하던 때도 있었지만, 산업 구조가 고도화되고 억만장자도 부쩍 증가했으며 무엇보다 전체 GDP가 이미 일본의 그것을 능가해버린 지금, 느긋하고 나사 풀린 태도를 경제 최전선에서 쉽게 목도할 수는 없죠. 하지만 저자는, 어떤 유형의 하급직에 이런 기강이 해이한, 그저 제 할 일만 최소한으로 해 놓고 조직 문화에 덜 기속되려는 "한가하고 나태한" 마인드가 분명히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런 타입도 함께 다독이고 설득도 하고 때론 기합도 넣어가며 끌고 갈 것인지 아닌지는, 업체의 현황과 조건, 특성에 따라 신중히 판단할 일이라고 하는군요.



중국인과 접촉할 때 "꽌시"가 중요하다는 지적은 흔히 접하죠. 저자는 물론 이 "꽌시(關係. 관계)"가 중요하지만, 꽌시로 흥하다가 꽌시에 뒷발 걸려 망한다는 점도 잊지 말라고 따끔히 지적합니다. 리베이트의 수수가 일상화된 현지의 풍토와 관행에 기겁하고, 이런 불법을 근절하려는 한국 간부의 지시에 반발하며, "중국은 리베이트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중국을 전혀 모르는 이가 어떻게 관리직에서 현실에 안 맞는 조치를 강요하는가?" 같은 항변을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내놓는 하급직도 흔히 본다는 거죠. 저자는 양회(兩會. 물론, 정협과 전인대를 가리킵니다) 같은 대규모 정치 행사에서 부정부패 이슈가 거론되면, 따끔하고 광범한 현지 사정을 통해 이런 관행을 뿌리뽑는 절차가 진행되고, 이 과정에서 적발된 외국인은 현지인보다 더 가혹한 제재를 받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한국에서라면 차마 못 할 일을 중국이라고 태연하게 저지르지 말자는 거죠. 사업이나 현지 적응을 위한 지혜 이런 걸 떠나, 사람 사는 도리와 원칙으로서 맞는 말입니다.

다만 저는, 저런 당국의 조치가 예컨대 공산당 고위 당국의 청렴성, 도덕성, 공정성 등을 담보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말단에서 암암리에 생성되는 부정한 "꽌시"를 주기적으로 소탕, 리셋하는 건 오히려 상층부 권력의 존재감을 확인시키는 절차에 불과합니다. 정말 힘이 센 "꽌시"는 소멸하지 않는데, 이런 연줄은 일개 외국인이 어떤 빈틈을 파고 들기 어렵죠. 사정과 단속은 하위직이나 외국인들에게 "주제파악"을 시키는 공산당 고위층의 연례 행사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대응 방식은, 기존의 "꽌시"에 미련스레 집착하지 말고, 효용이 다한 "꽌시"를 제때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잘 갈아타는 정보력과 시세 감각입니다. 저자께서는 "결국 대형 마트의 새 구매담당자가 우수한 제품을 매대에 배치하겠다며 다시 거래를 트자고 자발적으로 찾아왔다"고 하시지만, 그게 그렇게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되는 게 아니네요. 그 사람도 좀 시간이 지나 보십시오, 바로 뒷돈 달라고 눈치를 준단 말입니다. ㅎㅎ



이 책은 놀랍게도 소설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 소설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하잖아? 나는 나한테 필요한 정보만 쉽게 찾아 소화하고 싶은데." 뭐 이런 반응을 보일 분들한테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1) 목차는 사항별 색인처럼 되어 있어서, 관심 있는 토픽을 앞 차례에서 찾아 그 페이지로 가면 "에피소드"와 함께 당신에게 필요한 정보가 나와 있을 겁니다. 사례 형식이라 더 이해도 빠르겠고요. 2) 이 책은 버릴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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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순호선사 평전
방남수.임병화 지음 / 화남출판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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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을 아주 든든하게 지켜 주는 제도, 관념, 시설 등은 그저 당연하게만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런 버팀목들이 제 자리를 지키며 우뚝 서기까지는 많은 선구자들의 영웅적 노력이 있었을 텐데요. 특히 나라가 어렵고 질서가 바로잡히지 않았던 시절에는, 그저 탁상공론만으로 장애가 해소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강력한 지도력과 실천 의지로 앞장을 서야만 합니다.

불교는 한반도에 겨레가 터잡고 살아온 이래 1700년 동안 민족의 정신적 지주 중 하나로 기능해 왔습니다. 이런 불교의 수난사는, 곧 민족의 고난 행적과 궤를 같이합니다. 일제가 한반도를 침략하여 검은 잇속을 취하면서 겉으로는 "서양 세력으로부터 가난한 조선을 지켜 준다"는 허위 명분을 내세울 때, 불교 역시 왜색화의 침노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해방이 되고 나서도 상당수의 사찰, 승려들이 특히 비구의 교리를 버리고 공공연히 처자식과 재산을 간수했는데, 이런 왜색을 일거에 쓸어버리지 않으면 민족 정기의 고유한 부분이 크게 오염될 수 있었습니다.

청담 스님은 소년 시절부터 범상치 않은 의기와 총명함, 남다른 강건함으로 주위의 주목을 받던 분이었는데요.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첫째 일제 강점기에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 스님으로서 조선 고유의 불교 전통을 잘 보전한 것, 둘째 광복 후에는 본격적으로 일제 잔재 청산에 나서서, 대처승들을 전국의 본산에서 축출한 것입니다. 이런 여러 업적 때문에 불교계에서는 지난 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큰스님으로 추앙 받아 왔습니다만, 스님이 입적하신지 근 반 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은 그의 이름조차 잊은 이들이 많거나, 갖은 오해와 헛소문으로 높은 명예에 누가 되는 일까지 종종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 책은 일제가 패망한 지 십 수 년이 흐르도록 바로잡히지 않았던 한국 불교의 바른 맥을 세워 준 그의 생애를, 여러 조사와 치밀한 고증을 거쳐 객관적으로 재조명, 정리, 연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집니다. 책의 판형이 크라운판인데다, 분량은 근 800페이지에 달합니다. 혜성 스님의 치사, 법산 스님의 발문, 그리고 저자 두 분(불교계 언론인)의 발간사가 엄정히 책머리에 자리하는 정격을 갖췄습니다. 연표가 잘 정리되어, 스님의 생애 큰 줄기에 어떤 역사적 사건이 관련되었는지 독자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습니다.

큰스님의 존호는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게 법도입니다만, 일단 "청담"은 스님의 법호이며, "순호"는 법명입니다. 법명은 처음에 출가하거나, 기타 은사 스님이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 지어주는 이름입니다. 대개는 청소년기나 젊은 시절에 붙습니다. 법호는 일단 법명을 가진 분(대개는 장년을 넘긴 어른 스님)이 일정 계기를 마련하여 다시 붙는 이름입니다. 스님의 속명은 "이찬호"였는데, 소년이 성장기에 접어들었을 때에는 이미 국권이 일제의 발톱 안에 할퀴운 지 오래였습니다. 이런 난국일수록 수신제가의 바른 길로 국운을 바로세워야겠다는 소년의 결의는 남달랐는데요. 조선인이 웬만해선 들어가기 힘들었던 진주 일대의 명문교에 입학한 후, 그 성적도 학교에서 거의 수석을 놓치지 않는 성실함과 영민함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학업에 정진하던 학교를 도중에 그만둔 이유는, 일생의 전기를 마련해 준 소중한 은사 스님을 뵙고 특별한 회심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앞날이 풍전등화에 놓인 시국, 개인과 겨레 전체의 살 길은 오로지 부처님의 등불 아래밖에 없다." 이때 출가하여 받은 법명이 "순호"임은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스님은 탁월한 총기로 반야심경을 며칠 만에 외워 주위를 놀라게도 했는데요. 그러나 주위에 융화하고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절 안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이때부터 스님은 "인욕의 미덕"으로도 명성이 높았는데, 결기와 체력으로는 모두를 압도할 만큼 장사였지만, 시정 잡배들의 허튼 수작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다는 높은 의기로 주변을 감복시킨 까닭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스님의 가장 큰 업적은 "불교 정화"와 관련된 여러 실천적 조치에 있습니다. 당시 자유당 정권 때 조계종은 대처승 측과 법정에서 소송을 벌이고, 한편으로는 각지의 사찰에서 실력 행사를 벌이며 대립했습니다. 결국 2심, 최종심에서 스님이 이끌던 조계종 측에 승소 판결이 내려지고, 지금의 청담동 소재 "태고사"는 "조계사"로 현판을 바꿔 달았습니다. 아마, 청담 대종사의 법호에서 "카페가 밀집한 강남 청담동"을 대뜸 연상하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일제 시절 청담리로 불린 이 한적한 고장에 불교 사찰이 오래 그 자리를 지킨 것도 당연하며, 스님이 한창 정화운동에 헌신하던 시절만 해도 오늘같은 발전상, 지가 폭등은 상상할 수 없던 형편이었겠습니다. 이 시점에 스님은 오랜 은사와 "이연(절연과 비슷합니다)"하고, 그 의미 깊은 지명을 따라 새로 법호를 지어 올렸던 거죠.

얼마 전 한전 본사 부지가 상상을 초월하는 고가에 (주)현대차에 낙찰되어 세간을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 땅은 처음에 조계사 소유였다고 합니다. 다만 개발 경제 드라이브가 한창 피치를 올리던 시절, 국가 시책 협조 차원에서 토지를 공기업에 제공했던 건데(그 과정에 관료들과 시청 측의 강압도 있었다는 주장), 이제 민간기업에 소유권이 넘어가는 시점, 과거의 합의가 어떠했는지 시비와 경위를 분명히 가릴 필요가 생긴 거죠. 당사자들의 합리적이고 원만한 해결을 기대하는 게 국외자들의 바른 태도이겠습니다.

스님은 소탈하면서도 명분 앞에 거침 없는 태도로 세인을 대해 왔습니다. 그 예로 후배이자 동문수학한 문인인 조지훈 시인의 비판에 대해, 점잖은 어조로 "사태를 면밀히 살핀 후 평가에 나설 것"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스님과 동문수학한 유명 인사들은 셀 수 없이 많은데요. 이 중에는 이광수, 신석정 등의 거물급 문인들이 꼽힙니다. 스님은 또한 세속의 언론 기관과 격의 없는 접촉을 가져, 바른 법도의 전파에 앞장 선 기여가 있기도 합니다. 이 중에는 고 권오기 동아일보 논설위원과의 대담이 유명한데, 이후 권 논설위원은 동아일보 사장, 통일부총리를 역임하기도 하죠. 워낙 교분이 넓고 거물급 종교인이다 보니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과 친분을 다졌는데, 이 중에는 생전 정치적 성향이 정반대라 할 강원룡 목사도 있습니다. "대도무문"이란 말은 진정 이런 분에게 어울리는 문구입니다.

스님의 사상은 언제나 대중과 함께하는 불교, 속세와 유리되지 않고 함께 예토를 정화해 나가는 장벽 없는 불교의 주창에 그 중심이 놓였습니다. 고고한 학식과 남다른 기백의 소유자였지만, 가장 미천한 자들과 서슴없이 소통에 나서는, 진정 사해평등의 마음가짐을 앞장 서 실천한, 한국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고승 대덕이시더군요. 이런 분의 정신과 뜻을 현재에 받들고 계승해야, 첩첩산중인 겨레의 앞날에 어떤 활로가 모색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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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꿈결 클래식 6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흑미 그림, 백정국 옮김 / 꿈결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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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고전에 무지하고 소양이 부족하다 해도 이 <노인과 바다>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또, 아무리, 읽지도 않고 아는 척 한 마디씩 하는 게 고전이라곤 하나, 이 작품에 관해선 대강의 줄거리(!)를 누구라도 당당하게(?) 남 앞에서 늘어놓을 수 있을 것 같고요("아, 그건 나도 알지. 그 노인이 혼자 .... 뭐 이런 얘기 아냐? 맞지?"). 심지어 제가 어렸을 땐 이 고전을 소재삼아 허무 개그 비슷한 농담거리가 아이들 사이에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개그의 소재로 쓰이려면 일단 토픽이 대화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어야 하겠으니, 줄거리의 유명도 면에서 이 작품을 능가할 만한 고전은 아마 없었지 않나 싶습니다. <구토>라든가 <인간의 굴레>를 소재로 웃기는 이야기를 지어내 퍼뜨릴 수 있을까요?


전에 꿈결 클래식의 일환으로 나온 <변신>을 읽고 아 이 작품이 이런 메시지를 담았었구나, 하고 제법 신선한 충격을 받아 가며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공식화, 박제화하여 "A작품- B라는 주제"라 편의로 정리하는 내용들은, 그게 입시 위주의 교육이 부호화하여 보급하는 게 아닙니다(한국 입시 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어리석고 정직하지 못한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지식과 소양을 과시하기 위해, 속물들끼리 모여 합의한 바를 암기하고 다니는 거죠. 그래서 껍데기만 남은 부호로 내 정신의 공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시간을 내어서 원전 혹은 알찬 번역본을 마주해야 합니다.


청소년 시절, 혹은 학부 시절에 이미 진지하게 읽은 내용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카소의 추상화가 그를 볼 때마다 새로운 상념을 환기시켜 감상자가 "질리지 않듯", 고전 역시 읽을 때마다 자신의 그간 성숙한 진도에 맞춰 전혀 새로운 내용으로 다가올 수 있고, 어쩌면 가장 깊은 오의가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어려서 고전을 읽었다 함은, 그렇지 않은 남보다 먼 거리를 볼 수 있다는 정도이지 그걸로 최종의 단계를 마쳤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늙어서 처음 맛보는 독서는 늙어서 겪는 성행위처럼, 절정은 물론 끝물까지 다 지난, 시들고 어설프며 슬프기까지한 모종의 흉내에 불과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 이 작품을 읽고 부친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여기에는 야구 이야기가 왜 이렇게 많이 나오나요?" 답은, "그래서 이 작품이 위대한 것이다."였는데, ㅎㅎ 이 말씀은 지금 생각해도 명답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질문에 대한 직접적 답이 아닌데, 그간 책깨나 읽은 저도 제 아들(없지만)에게 이런 명답은 못해 줄 것 같습니다. 역자 후기에 보니, 역자께서는 대단히 심오한 해석을 내립니다. 조금만 인용해 보면...

"... 자주 끼어드는 야구 이야기가 작품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다고도 보인다. 그러나 야구는, base로 돌아오는 게 목적인 게임이다. 노인 역시 고기를 잡았건 못 잡았건, 영혼의 안식을 얻었건 못 얻었건, 배를 몰고 나갔던 바다에서 결국은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 모두는 어른이 되기 위해,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가지만, 밖에 머물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건 원점 회귀나 퇴행적 리셋이 아닙니다. 돌아오고 나서야 우리는 자신의 성장과 성취를 겸허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뭔가를 이루지 못했다면, 겸허한 반성과 내려 놓음 역시 나의 초심이 소재한 그곳에서 이루는 것이죠.


야구가 베이스(물론 홈 베이스를 가리킵니다. 베이스는 1, 2, 3루에도 다 있으니까요)로 돌아오는 게 목적인 게임이라는 말씀은, 특히 이 작품의 주제와 연관할 때 참으로 심오한 지적이십니다. 하지만 저는 ㅎㅎ 꼭 그런 교화적 스탠스를 떠나서도, 이 야구 이야기가 내용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조 디마지오는 물론 제가 이 소설을 읽을 때도 생존해 있긴 했으나, 요즘 아이들이 무하마드 알리에 대해 가지는 느낌처럼 운동 선수라기보다는 아득한 전설 같이 다가왔습니다. 조 디마지오는 그 어렸던 시절 제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는데, 딕 시슬러는 제가 이 꿈결판을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읽고서야 "아 맞어, 이 이름도 그때 있었어."라는 생각이 비로소 떠오르더군요. 만약에, 헤밍웨이의 이 작품에 조 디마지오만 있었으면 야구 이야기 전체가 대단히 공허하게 다가왔을 겁니다. 저는 요즘 한국 작가들의 단편을 읽을 때, 그저 분위기만 내려고 (작가 자신이 잘 소화도 못 한) 몇몇 이름이나 사건을 끌어대는 게 상당히 눈에 거슬리더군요. 조 디마지오 이름 옆에 딕 시슬러가 나오기 때문에, 야구 이야기가 건성의 흉내가 아님이 증명되며, 당대 야구팬(들)의 실감과 역동성 한 자락이 이 작품 속에 멋지게 포착되는 겁니다. "뭐, 딕 시슬러라고? 이 사람 이거 그때 야구 좀 본 사람 맞네!" 자기 작품이 후대에 길이 남을 줄 알고 헤밍웨이가 영리한 도장을 이렇게 찍어 둔 거죠. 야구팬이면 뭐합니까. 아는 사람들 사이에 티를 낼 줄 알아야지.

노인...의 말이라기보다 작가 자신(다르죠?)의 말로, "거센 바다를 가리켜 쿠바 어부들은 여성 정관사 la를 쓰지 않고, 남성 정관사 el을 붙이기도 한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권위자의 완역본을 읽었어도, 이런 말은 어린 머리에 납득이 안 되었기에 그냥 흘려넘긴 부분이죠. 저는 솔직히 이런 말은, 헤밍웨이가 이쪽 언어 화자들의 정서를 표피적으로만 받아들인 소치라고 봅니다. 언어 속의 성(gender. 문법의 성)은, 자연적 성별과 아무 관계 없습니다. 인도 유럽 어족 중 유독 영어만이 이 gender를 까맣게 잊은 채 놀고 있기 때문에, 영어권 작가인 헤밍웨이가 이런 소릴 할 수도 있는 거죠. sex와 gender가 별개라는 데서 성 해방 담론이 태동할 수 있는 건데, 묘하게도 그의 (언어적, 담론적) 무지가 생전 실물로서의 성향과도 매치되는 면이 있습니다.



이 책은 역주가 친절합니다. 이 고기가 어느 종을 가리키느냐를 놓고, 이미 청새치라는 게 정설로 굳어졌지만, 역자께서는 본문의 어느 대목까지가 그저 "새치"이며, 어디서부터를 두고 "청새치"로 해석해야 할 지 근거를 들어 가며 세심하게 구분합니다. 지명 "산 티아고"를 두고 역자께서는  어원을 쉽게 풀어 주시는데, 혹 어떤 독자는 Sant+Iago의 오류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지는 않아요. 이는 오랜 역사를 두고 이뤄진 언중(言衆)의 오분석이며, 실제로 저쪽 사람들이 디에고나 티아고 같은 이름을 흔히 쓰고 있습니다.


역자께서는 이 작품이 처음에 헤밍웨이가 의도했던 다른 제목이 붙었을 수 있던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실제로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이만큼 제목이 줄거리와 주제를 잘 함축하는 예도 드물지요. 이 작품이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까지 그만큼이나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비결은, 주제의 보편성, 플롯의 (위대한) 단순성 못지 않게, 제목의 함축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자께서는 그 외에도 TV 주말의 명화 코너에서 이 작품의 영화판을 감상했던 회고를 적어 두시는데, 1) 흑백 2) 잦은 재방송 등을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세대 차이를 절감했습니다. 흑백 방송 시대에는 도대체 영화가 컬러인지 본래 흑백인지를 판별할 방법이 없었을 텐데, 저는 이 영화를 제 성장기에 딱 한 번 방영된 게 컬러였던 걸 또렷이 기억하거든요. 확실히 흑백 포맷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을 자극하기 때문에, 지루한 영화도 어떤 점에서 재미있게 보도록 돕는 면이 있습니다. 저의 부친(극장에서 컬러판 필름을 이미 보신 분)은 그 주말 밤에 "이 소설은 절대 영화로 만들어져서는 안된다"며 말씀을 길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진정 이 충실한 완역본 본문만 읽어 봐도 어느 정도는 공감이 될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구토> 같은 걸 스크린에 담은 채 전달이 과연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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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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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로서의 유쾌함과 소재로서의 범죄가 한 작품에 같이 다뤄지기는 여간 힘들지 않을 텐데, 그런 뜻에서 코지(cozy) 미스테리의 창작자들에게 고충이 크리라 짐작합니다. 독자도 끔찍한 상황들의 이해, 접수, 정리에 대한 부담을 덜고 순전히 지적 유희로서의 미스테리 해결에만 몰두할 수 있으면 정말 편하겠죠. 배경과 인물, 사건 등이 모두 한국적인 것들로 바뀔 수 있다면 읽어가기에 더 고마울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암울한 삼수생의 처지인데다 처음에 스스로 흘리는 암시와는 달리 용모도 그닥 매력적일 것 같지 않은(어느 어르신께 "애기엄마"란 말을 듣는다든가, 유창희한테 "아줌마"로 불린다든가 하는 걸로 보아), 강무순이라는 여성이 1인칭 화자 겸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 이곳 시골(작품 중에는 구체적으로 "충남 운산군 산내면 두왕리"라 나오지만, 가상의 주소죠)에 살았는데, 삼수생이 되어 다시 돌아온 거죠. 여기서 몇 년 전 홀로되신 할머니 홍간난 여사와 여름을 함께 지내야 합니다.

평온하고 낭만적으로 보이는 이 마을은, 15년 전 피해 당사자는 물론 마을 전체에 깊은 상흔을 남긴 어떤 "범죄 사건"을 겪었는데, 공권력과 미디어가 집중적인 관심을 보였고 전국적 시선을 끌었지만 아직도 진상이 오리무중입니다. 삼수생이 언제나 그렇듯 공부는 하기 싫고 엉뚱한 데서 존재감은 느껴 보고 싶고, 마침 우연히 마주친 저편 사는 "같은 양반댁"의 종손 유창희(중학생 꽃돌이로 묘사됩니다)를 만나 같은 관심사도 확인한 겸, 팔자에 없는 명탐정으로 변신합니다. 남 일에 코 디밀기가 얼마 안 남은 생에 큰 낙이신데다 연세에 비해 여전히 정력 넘치는 홍간난 여사도 이에 합류, 3인은 드디어 "한날 한시에 같이 실종된 네 여성들"의 행방을 찾아 나섭니다. 홍간난 여사의 회고로는 "...그땐 워낙 인신매매도 많았던 터라.. "라지만, 이 말이 타당하려면 소설의 배경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쯤이라야 하겠습니다. 여튼 멀쩡히 잘 살던 네 명의 여성(처녀, 유아, 학생 등)들이 갑자기 없어졌다면, 이는 누군가 나서도 해결해야 할 불의, 범죄,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피해자 가족 중 하나인 목사님 부인은 사라진 딸 때문에 완전히 실성해 버린 상태라고 하니.

눈에 띄는 건 이런 시골 마을의 사정상, 이웃의 피해와 아픔은 일단은 곧 나 자신의 곤란으로 바로 공감대가 연결되었다는 점이죠. 홍간난 여사도 피해자들을 무지 동정할 뿐 아니라, 당장 제 살 길 걱정해야 할 이웃들도 마음씀이 다들 비슷합니다. 마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삼수생이 책은 안 보고 의분에 불타며 실종자를 찾아 나서는 마음과도 닮은(..은 아닌가요?) 목가적이고 더없이 평화로운 인상과는 달리, 이 마을의 삶은 윤택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각 가정마다 비극적이고 불쾌한 사연들을 대개 하나 이상씩 품고 있습니다. "이런 안온한 고장에 왜 이런 범죄가...!"는 외부인의 물정 모르는 감상일 뿐이고, 언제 터져도 터질 고름과 상처가 범죄 사건으로 응집되어 나타났다는 게 더 정확한 진단 같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이런 시골을 보고 그런 삭막한 말을 할 수 있나?"
"오히려 자네가 몰라서 하는 소릴세, 도시에는 여론도 있고 보는 눈도 있고 보다 세련되고 타당한 판단이 지배하는 곳이기나 하지. 하지만 시골은 닫힌 동네야. 편협한 여론이 한번 가치의 대세를 점하면 그게 곧 진리로 행세하겠으며, 드문드문 떨어져 사는 여건상 범죄를 은폐하기란 또 얼마나 편하겠나?"

셜록 홈즈의 이런 평가가 유별난 게 아니라, 일반인이 인정하기 불편할 뿐 그게 곧 진상을 꿰뚫은 말입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활기있는 장면이 펼쳐지는 건, 자신이 멀미에 약하다는 것도 잊고 사태의 진상을 밝힐 의지 하나로 두 젊은이(..)와 함께 장거리 버스편으로 유씨 댁 부부를 미행하는 홍간난 할머니를 묘사한 대목입니다. "전투력을 상실한 아군을 버려두고" 운운하는 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강무순의 엄청난 수다에 담긴 표현들이 다 참신하고 웃기지는 않았으며, 솔직히 그 상당수는 짜증이 나기까지 했습니다만, "철학은 몰라도 시간은 칸트였다(정해진 순간 정확히 코를 골며 숙면에 빠지는 자기 할머니를 두고 하는 말)" 등 몇몇 마디는 꽤 재치있었지요. 강무순은 이과인지 문과인지 모르겠는데, 어떤 때는 멘델을 거론하기도 하니 말입니다. "행렬을 중1때 그만뒀다"는 걸로 봐서 공부하고는 연이 안 닿는 분 같습니다. 그만 둔 게 문제가 아니라 뭘 언제 공부했는지도 맵이 생성 안 된 걸로 봐서요.

진상은 하나하나 드러납니다. 강무순 유창희 홍간난 트리오에게 특별히 마플 급의 탐정력이 보유, 실현되어서라기보다, 진실이란 본디 그렇게 힘이 쎈 편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이란, 대개는 중력의 법칙에 지배를 받기 마련이라, 인위의 세팅이 이를 가로막기란 오히려 그게 더 어렵겠죠. 진실이 (홍간난 여사 말마따나 박사님 전문가님 기자님 따위가 그렇게 많이 마을을 거쳐 가며 헤집어 놨음에도 안 밝혀진 진실이) 그렇게 쉽게 모습을 드러낸 건, 본디 진실이란 인간 사이의 진정어린, 1차적 소통에 근거를 두며, 그 소통이 본래의 힘을 발휘할 때 마치 썩은 장막이 제풀에 주저앉듯, 혹은 햇볕이 망또를 자발적으로 벗기듯, 사리를 제 자리로 갖다 둘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실은 하나하나 드러납니다. 본디 하나가 아니라 "따로 또 같이"에 불과했기에, 한꺼번이 아니라 하나하나 드러납니다. 어째서 그 재앙들이 한 날 한 시에 다가왔는가? 이는 우연이 아니라, 재앙이 다른 재앙을 알아보고 길동무를 삼는 이치와 같습니다. 결과는 또다른 원인이 되어 사고를 유발하고, 그래서 결과들은 처음부터 한 형제였던 양 어깨를 겯습니다. When it rains. it pours.

(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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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치 개구리 소년 실종처럼 최소 사고라고 생각했던 그 미제 사건은, 알고 보니 한 건만 단순 사고였을 뿐이었네요. 진상이 모두 밝혀지니 강무순 트리오는 정말로 명탐정으로 등극해 마땅한 듯 할당된 미션을 다 해결했습니다. 그들에게 더 이상 부담을 지울 이유는 없으나, 보는 우리는 과연 마음이 편안해도 될까요?

실종 사건은 그저 단순 사고에 불과했지만, 진짜 "범죄"는 모두의 눈에 띄지 않고 영원히 은폐되었습니다. 범죄자가 제 응보를 받았다고 생각하시나요? 천만에. 그는 존재감도 없던 풍경에서 이제 끔찍한 사고의 희생자로 모두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겁니다. 그는 오히려 사면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죽어가는 그 순간 이 가증스러운 범인은 무엇이 제 인생에서 남는 장사일지 얄팍한 계산을 하고 있었어요. 그의 기대대로 되었으니 이 피해자를 가장한 범죄자는 죽음과 승리를 맞바꾼 셈 아니겠습니까? 유령같이 살아 온 그에게 목숨이 큰 의미를 가진 듯 보이지도 않고 말이죠.

그녀, 모두의 선망이 된 그녀였지만 박제처럼 이상화하여 존재가 규정되어 버린 삶이었기에, 죽어도 죽은 게 아니었고 범죄자의 손에 끔찍한 꼴을 당해도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는 무정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은 못난이 모지리로 태어났다 해도, 한 순간이라도 자기 자신으로 살다 죽어야 합니다. 광인, 변태성욕자의 손에 죽은 것보다, 19년을 모두의 허상에 맞춰 붕 뜬 듯 산 그 시간이 더 비극이라고 하겠습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유창희의 나이라든가 강무순의 무심한 듯 내뱉은 말 속에 들어 있던 진실처럼 "미모는 이 집안 내력일세" 어쩌구 하는 것, 기타 그 숱한 단서들에서 감을 어느 정도는 잡았을 겁니다. 腐녀자스러운 강무순의 수다가 (거듭 말하지만) 짜증스럽긴 하지만(BL깨나 좋아할 것 같죠? 쩝), 크리스티 여사의 <ABC 살인 사건>에서 "헤이스팅스가 몰랐던 사실"처럼, 어느 죽어가는 자의 "주마등'이 시점(視點)과 시간을 초월하여 독자에게 건네는 말 등이, 책을 끝까지 덮지 못하게 만듭니다. 나무를 감추려면 숲에 숨기라는 기본 트릭까지 닮았네요, 그러고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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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자들 - 뇌의 사소한 결함이 몰고 온 기묘하고도 놀라운 이야기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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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란 생각할수록 신비한 조직입니다. 분명 사람의 자그마한 신체 안에 부착된 일개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전 우주를 품을 듯 방대한 사고를 수행하고, 물리계에서 채 감지되지도 않을 미세한 영역까지 훑을 듯 세심합니다. 코아세르베이트에서 단백질이 정보 전달의 필사적이고도 면면한 레이스를 시작하려 진화의 첫 발걸음을 떼었을 때, 뇌의 이처럼 찬란한 진화까지 예비했을까요? 플라나리아나 미역, 버섯은 고사하고, 우리 바로 아래 단계인 원숭이, 침팬지만 봐도 별반 그런 생각이 안 듭니다. 동물의 경우 그저 치명적 사고나 방지하기 위한 원시적 콘트롤 타워 이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주객이 전도된 듯 존엄한 진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사람의 신체와 안위를 지키기 위해 뇌가 발전한 게 아니라, 차라리 그 반대인 듯 말입니다.

이런 뇌에 대해, 괜한 선입견을 버리고 그저 건조한 시선으로 대담한 탐구를 시도하는 게 현대의 뇌과학자들입니다. 어느 신체 기관이나 마찬가지로, 뇌 역시 그 주인인 인간이 당한 우연한, 혹은 의도된 사건에 의해 상처를 입게 마련입니다. 이런 상처가 상처를 입은 당사자에게 영구적인 손해를 입히고 마는지(안타깝지만,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장애의 경우, 말 그대로 상처가 장애로 기능하고 만 불행한 예이고, 이런 진행과 결과가 절대 다수지요), 행여 뜻하지 않은 축복으로 작용하는지를 놓고 실로 흥미로운 연구가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례는 현대의 임상 사례뿐 아니라, (저 같은 독자에게는 정말 흥미롭게도) 과거 역사의 숱한 중요 인물(역사에 남으려면 중요한 인물이라야 하니까요)의 예까지 모두 포함하는 게 이 책의 태도입니다. 과거의 기록에서 "뇌의 상처와 그 효과"를 더듬는 건 저자 샘 킨의 시도라기보다, 그 역시 (현대 임상례부터의 유용한 결론 추출이나 마찬가지로) 뇌과학자들의 연구 성과입니다. 샘 킴 같은 대중서 저자들은 어디까지나, 이를 소양 없는 일반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또 재미있게, 다듬는 역할이죠.

허먼 멜빌이 그의 장편 <모비 딕> 서두에, 고래에 관한 거의 모든 기록과 언급을 인용하고, 작품 도중에도 고래의 생리에 대해 그처럼이나 자세한 서술을 행한 점 때문에, 문헌 분류 당국에서 처음에는 이 책을 수산업 영역에 배치했다는 사실은 유명하죠. 책 한 권을 쓰려면 그만큼 관련 주제에 대한 몰입적 헌신과 철두철미한 연구, 나아가 저술 전과 후의 자신이 다른 존재로 거듭나려는 각오까지 다 필요하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샘 킴의 이 책도 비록 대중서라고는 하나 저자의 비상한 성의가 돋보입니다. 다양한 뇌 손상의 사례는 그 자체로, 개별로 떼어 놓고 읽어도 (만약 신문 기사의 단편적 보도라고 쳐도) 재미있는 아티클입니다만, 제가 이 책을 통독한 후 챕터의 명명이나 주제별로 다시 시야를 달리해 읽어도 그 세심한 사례의 편집 감각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읽기에 재미도 있지만, 이 책은 마치 아름다워도 모든 각도에서 다 아름다운 미인의 얼굴처럼, 구조의 미를 지닌 그런 책이더군요.

구조의 아름다움이란 크게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책에 "꽂혀진" 수많은 미주들입니다(미주인지 각주인지는 원서를 확인하지 못 해 모르겠습니다만, 독자는 이 어노테이션들을 읽는 재미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책의 재미 반 이상을 잃음과 같아요). 둘째는 특히 책의 첫 장도 아니고 제3장에 마련된, 저자 나름의 뇌신경개론 강의입니다. 이는 대체 책 주제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학문적 발판, 전제가 될 뿐 아니라, 저자 자신이 앞으로 이 책에서 무슨 용어(반드시 학문적으로 합의된 바가 아니라, 때로는 저자 자신만의 프로토콜, 혹은 감정적, 편의적 의미를 담아 쓸 때도 있습니다)를 어떤 식으로 쓰겠다는 공표인데, 이를 (흔히 교과서가 그리하듯) 첫 장에 배치하지 않은 건 형식적 딱딱함을 최대한 멀리하겠다는 제스처, 혹은 첫 두 챕터를 벌써 읽어 봐서 알겠지만, 이 책에 쓰이는 말이나 논리라는 게, 어느 정도는 독자들이 (일일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해할 만한 수준의 용어례라는 것, 일종의 자신감을 불어 넣기 위한 의도라고 보입니다. 이것이 저자의 유쾌한 어조와 겹쳐, 형식과 의도와 일치하는 구조미를 자아낸다는 뜻입니다.

ㅎㅎ 사실 저자의 배치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이뤄져서일 뿐이지만, 지지난 세기 미국에서 일어났던 중 두 건의 암살자(당대에도 그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는 유명한 편이죠)에 대해, 구태여 한 챕터에서 다룰 필요는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이 정신이상, 과대망상이라는 주장은 매우 유력합니다만, 그게 구체적인 뇌손상에서 비롯했다는 증거는 사실 뚜렷하지 않거든요. 또, 뇌손상이 설령 있었다 한들 암살자의 행동에까지 "주인"을 몰고간 공통점이 있기까지하다는 정황은 어디에서건 안 드러납니다. 이 책에도, 죄인을 살리기 위한 최후의 수단일 "정신이상 책임무능력" 항변은 재판 절차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무렵이면 책임무능력 항변 자체가 이론적으로 (특히 미국에서라면) 정립되지 않았을 시절이긴 합니다만. 여튼 외부 손상이라는 어떤 계기가 없어도, 일부의 내상이 점점 전체로 파고 들어, 얼굴 근육의 좌우 통제를 동일하게 이룰 수 없다든가 안구의 조절이 자유롭지 못하다든가 하는 게 모두 전반적인 뇌손상의 효과라는 점을 "주장"하는 건, 뇌과학자 아니라 일반 독자의 관점에서도 매우 "흥미"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광신자들의 일탈 행동이 극단(무려 대통령 암살!)으로 치닫는 건, 우리 샘 킨님의 말씀처럼 그들의 "뇌"가 어딘가 잘못된 소치이지, 결코 정치적 음모론의 주장(꼭 쑹홍빙의 <화폐 전쟁>이라고는 제가 말 안 하겠습니다)처럼 거대한 세력의 도구로 쓰고 버려진 결과가 아니라는 점 다시 강조하는 바입니다! ㅎㅎ 이 책 읽고서는 이 소리, 저 책 읽고서는 저 소리를 말한다면, 그건 이미 뇌가 손상된 독자라는 자백이니까요! ㅋㅋ

헤르페스 바이러스는 그저 성병 관련 인자인 줄 알았는데, 뇌에 침투하여 사물의 정확한 인식을 방해할 수 있다는 건 처음 배웠습니다. 이 장에서는 "얼굴의 이식"과 "얼굴 인식"의 상호 관련에 대해 논급하는데요, 특히 전자는 몇 달 전 의미 있는 학문적, 임상적 진보가 이뤄져 언론 보도를 타기도 했습니다. "얼굴"이 그저 인간 피부의 평균적 연장이 아니라, 뇌와 긴밀한 연계를 갖고 그 특성, 손상, 질환, 장애를 일일이 다 대변하기에 그 이식도 그렇게나 (그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는 게 저자의 핵심 취지이겠습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이 책은 뇌과학 개론서가 아니라, 그저 이야기책 같이 보이고, 실제 이야기책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읽다 자연스럽게, 현대의 뇌과학자들이 지금 어떤 결론에 잠정 도달해 있는지, 그 최소한의 컨센서스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는 게 책의 마력이더군요.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신해철도 생전에 "얼굴맹" 증상을 호소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이게 그저 웃고 넘길 건망증이라든가 사회성 적성 무력으로 치부할 가벼운 이슈가 아님을, 책은 은근 짚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하나의 주장일 뿐임을 독자는 유념할 필요가 있겠네요. 다시 말하지만 저는 책에 제시된 낱낱의 흥미진진한 사례보다, 왜 이 사례들을 저자가 한 챕터에 넣었는지 의미를 곱씹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이야기는 금방 읽혀지기 마련이고, 뇌의 기능과 구조라며 요즘 나오는 책들이 그간 너무 자주 다뤄서 선지식도 부족하다곤 못하겠으니 말입니다.

반드시 머리를 다쳐서가 아니라, 어디가 되었든 중추 신경의 일부가 손상되면 바른 감각, 바른 판단에 장애가 생겨 타인(정상인)이 보기에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목격되죠. 제2장에서도 총을 맞은 가필드가 통증과 파편의 소재에 대해 엉뚱한 소리를 하는 서술이 있었는데, 5장에서는 "환상 사지"라는 토픽 아래 소위 유령 감각에 대해 재미있는 사례가 계속 소개됩니다. 없는 걸(이제는 없어진 걸) 있다고 우기는 환자를 보면 기가 막힐 만한데, 이미 뇌에 확고한 자리를 잡고 구축된 신경 회로가 변화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계속 동일한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환상 통증"의 경우 이 기막힌 아이러니가 극적으로 드러나는 경우인데요. 가려워서 긁고 싶은데 긁지를 못하는(잘려 나가서 긁을 데가 없는) 당사자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아마 그런 처지에 속하면, 진정 인간 존엄의 최소 조건이 파괴된 자신에 대해 근본적 애착이 떨어져 나갈 만한 감정적 충격을 겪지 싶습니다. 남북 전쟁의 casualty에 대해 그런 식으로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전쟁의 참상, 극단적 상황에 처한 타인의 불행에 대해 새삼 진지하게 생각할 만한 화제가 아니었을지요. 여튼 이 책에서도 친절히 설명하는 "뇌의 가소성"은, 그래서 다시 인간의 존엄을 증명이라도 하듯 (당사자의 노력 여부에 따라) 새로운 경로를 발견하고 생존의 편의를 위한 노력을 벌일 것입니다.

모든 과학적 개념과 패러다임은 단단한 위치를 갖고 출발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단단한 기반을 가졌던 출발의 이점을 상실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샘 킨이 아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8년 전에 이 프리온 이론의 당부를 놓고(?) 엄청난 집단 홍역을 앓은 적이 있죠. 스탠리 프루시너가 처음에 겪었던 곤란은 첫째 이 개념이 기존의 체계와 대단히 이질적이어서, 마치 기존의 체계가 이종 단백질에 대해 면역 반응이나 보이듯(ㅋㅋ) 그저 감성적으로 거부되었다는 사실, 둘째 아무래도 업계와 학계가 공생 관계에 놓인 부분이 크니, 업계의 이익이 학계의 이익과 운명을 같이할 수 있었다는 점 도저히 부인은 못 할 겁니다. 샘 킨은 "... 여전히 체내에 잠복하여 그 도화선에 불 붙을 날만 기다리는... " 같은 서술을 하는데, 이만큼이나 현생 인류는 마치 기우제를 지내며 기근을 모면하려는 조상들처럼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인류가 여기까지 생존한 건 그저 요행이었는지도, 혹은 지난 시절 흑사병이나 대규모 전쟁 같은 재앙은 그저 서곡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지질시대가 워낙 압도적인 볼륨을 자랑하니, 유한한 인간의 (이 책에서 잘 가르치듯) 매우 유한한 두뇌로서는 생각할 수 있는 게 고작... 역자 설명 중 p-word에 대한 풀이가 있는데, f-word도 있습니다(성질은 서로 비슷해요. 이런 말로 표현했다는 자체가 기성 주류의 엄청난 거부감이 전달되고도 남는 겁니다). 같은 장에 소개된 소아성애자 가이듀섹의 한심하고 개탄스러운 일화는 제 생각에 샘 킨의 유머 감각 발로라고 여겨지니, 주제와의 지나친 연계는 심각하게 따질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가이듀섹 이 인간 뇌를 스캔해봐야?"ㅋ).

아, 그렇군요. 다음 장의 토픽 일부가 성(性)과 관련되어 있으니, 매끄럽게 넘어가려고 유머의 기름칠을...(은 아닙니다). 변연계에 대해서는 그게 왜 영어로 limbic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아리송했는데, 이 부분을 읽고 잘 납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름이 붙었다는 자체가, 그간 왜 학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지 알려줌이나 마찬가지죠. 여기서부터 구체적인 지각과 반응의 기제가 아닌, 보다 추상적인 감정의 영역으로 들어가니 더욱 논의의 혼란이 커지는 게 당연합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저술가"인 샘이 이 논란 많은 토픽을 과연 어떻게 처리할까가 주목되었는데, 과연 그답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흥미의 불을 지피기, 자신이 은근 지지하는 결론 암시하기 스킬로 책(대중서)의 밀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마엽(요즘은 우리 학계가 "전두엽"을 이렇게 순화해서 부르나 보죠? 전 몰랐습니다)의 손상은 결국 감정의 원활한 작동을 방해하는데, 이렇게 되면 사람이 세부적인 사항에 집착해서 상위 단계의 결정을 못 내린다는 점은 이미 많은 책에서 지적하던 내용이죠. 샘 킨의 표현을 빌리면, 전두엽 손상자는 "빅 픽처"를 못 그린다는 겁니다. 우리가 누굴 두고 근시안적이다, 먼 미래를 보고 일을 꾸미지 못한다고 할 때 앞으로는 "쟤 전두엽이 덜 떨어졌군"이라고 비웃으면 될 것 같아요. 이런 걸 보면 지난 시절 통속작가들(시드니 셀던이라고 콕 짚지는 않겠습니다)이 얼마나 이 이슈에 대해 피상적으로 이해한 후 소설에 다뤘는지 알 수 있습니다(속았다는 느낌에 갑자기 화가 나는군요).

이 이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어느 책에도 다 나오는) 와일더 펜필드 박사님이 해당 장을 다 채우다시피하네요. 책에는 안 나오지만 아니, 이 "축복받은 질환"(소위) 뇌전증 하면 줄리어스 시저(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당연 나와 줘야 하는 것 아닌지 그게 이상했습니다. 축복 어쩌구 하는 것도 태반은 그의 사례에서 연유했고 말이죠. 물론 다들 예상하다시피 도스토옙스키, 잔다르크, 이런 고정 멤버들은 다 불려 나옵니다. 저는 사례 중에 (불쌍하게도 수술 당한) 고양이들이 특유의 장난스러움, 개성 등을 다 상실하고 좀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도 나와서 하는 소리지만, "소금이 그 짠맛을 잃으면 어디에 쓸 것"이며 고양이가 말썽을 안 피우면 그게 맛도 없는 움직이는 고깃덩어리와 뭐가 다를까요? 많은 혁신적인 가설들은, 그게 잘 제한된(자격 갖춘) 실험 환경에서 이뤄지지 않았다거나, 혹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실험군, 대조군의 결과일 뿐이라는 이유에서 배척, 기각됩니다. 뇌과학자들(다른 분야라도 마찬가지입니다만)이 내놓은 그 숱한 결론과 주장들은, 이런 이유에서 어디까지나 신중하게, 유보된 자세의 필터와 또다른 검증을 거쳐야만, 탄탄한 신뢰의 "경전"인 교과서에 실리게 되죠. 이 역시 무한 번의 개정과 변경, 철회의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만. 호문클로스, 혹은 육-영-심의 오묘한 구조는, 제가 아주 오래 전에 읽은 과학교양서에도 실려 있던 주제입니다만, 이 책도 변함 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정녕 이 영역에서 순수 과학만을 분별 증류하려면, 생체 실험이라도 해야 화끈한 도약이 이뤄질까요? (어디까지나 농담입니다. 다만 많은 발전이 이뤄졌음에도, 어떤 섹터는 낡은 관념의 덫에 걸려 맨날 제자리걸음인 현실이 개탄스러워서 했던 소리에요)

앞 장도 망상(어떤 망상은 너무도 위대하고 유용하기까지해서, 잔 다르크는 제 나라를 구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샘 킨을 비롯한 일부의 해석, 주장입니다)에 큰 비중을 둔 주제지만, 이 장 역시 신체의 통제와 관련하여 무엇을 뇌가 무시하고 놓치는지, 그 결과로서의 망상이 다뤄집니다. 그 중 통제 불가능한 손은, alien hand라는 원어가 잘 드러내듯, 그저 통제만 안 되는 게 아니라 마치 남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듯 제멋대로인 증후군을 가리킵니다. 이 기제는 책에 친절히 잘 설명되어 있는데, 비단 손 뿐이 아니라 감각영역 손상(역시 전두엽 손상일 경우)이 일어났다면, 이 감각 영역에서 더 이상 피드백을 보내 주지 않자, 앞서서 움직인 손(물론 자신이 원해서 움직인)이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인 게 아니라고 그 마루엽(예전에 두정엽이라고 부르던 것)이 판단하는 겁니다. 소위 "주체 감각"을 잃기 때문에, 이 감각을 다시 느낄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하게 되며, 이 때문에 (이 기제를 이해 못하는 사고 중추는) 내 손이 남에 의해 제멋대로 움직이게 된다고 보는 거죠. 마루엽의 "장난"은, 그 임자가 더 이상 자신의 신체에 대한 조절을 못 하고, 나아가 모든 충동을 통제할 수 없는 원인으로 설명됩니다. 물론 "그"는 장난을 하는 게 아니라, 이전의 편안한 정상 상태로 복귀하기 위해 필사적인, 그러나 무용한 노력을 하는 중이지만.

익숙한 것과 그렇지 못한 영역 사이를 처리하는, 인간만이 보유한 신비한 회로가 고장 났을 때,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중한 관계가 파탄나기 일쑤입니다. 어떤 사람이 살아오며 축적한 기억, 정서, 애착 등이 가지는 고유한 색깔, 개성이 사라졌을 때, 그 사람은 이미 더 이상 속해 있던 네트워크 속의 그 사람이 아니죠. 저자는 이런 사례를 다루며, 인간 통성으로 유발할 수 있는 애틋하고 유감스러우며 저 깊은 감정의 심연에서 솟아나올 법한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근원적 비관을 (유려한 문장 속에) 표현합니다. 익숙한 사실, 어쩌면 통속적인 사례 하나를 전달해도 듣는 독자의 반응을 고려한 이런 영리한 화술이야말로, 각별히 뛰어난 소통 능력을 지닌 샘 킨의 우월한 뇌가 존재 증명을 하는 대목이겠습니다. 원 제목과는 달리 "뇌과학자들의 결투"는 기대만큼 자주 부각되지는 않는데요. 결투를 생생히 재현하다 혹시 관전하는 독자의 뇌가 과부하로 다칠 수 있다는 그의 배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학계의 첨단을 평균적인 독자가 소화하기에 이 정도 내용이면 임계의 안전한 하회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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