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 - 중동을 들여다보는 창
캐런 엘리엇 하우스 지음, 빙진영 옮김, 서정민 해제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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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우디아라비아는 과거 우리 한국의 근로자들(지금은 다 할아버지 세대입니다만)이 건설 현장에 파견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고, 이슬람교의 종주국이자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뚜렷한 인식이 전세계에 박혀 있는 나라입니다. 아주 최근 뉴스로는, 오바마 미 대통령이 "9.11 테러 관련 소송을 못 하게 하려 행사한 법안 거부권" 관련으로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되었고, 이 책 내용 관련으로는 시아파(정통 수니파에 입장에서는 이단으로 보는) 신도들에 대한 사형 집행으로 이란과 관계가 극도로 나빠졌던 소식이 몇 달 전에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로선 거의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국가지만, 세계 정치 무대, 경제 섹터에 끼치는 영향이 아주 크므로 어느 누구도 가볍게 볼 수 없고, 그 나라나 그 주변이나 정치적 평온과 안정이 유지되길 간절히 바라게 되는 곳입니다(특히 주식 투자자들 입장에서).

이런 사우디아라비아에, 심상치 않은 조짐이 느껴진다는 게 이 책 저자의 분석입니다. "두 개의 성지를 관할하는", 아랍 세계의 큰형님과도 같은 이 나라에, 1) 사회 구조의 근본적 취약성에 기인한 동요, 2) 왕실 내부의 분쟁과 갈등 증폭, 3) 석유 수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제가 맞이하는, 세계 산업 환경의 대폭적 변화에 따른 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흔한 말로 "퍼펙트 스톰"이라 불릴 만한 국가적 재난이 닥칠 지 모른다는 내용입니다. 여성을 억압하고, 소수자(종교, 정치, 사회)를 탄압해 온 몹쓸 체제가 그 응보를 받겠거니 여기면 그만일 수도 있는데, 문제는 그로 인해 국제 사회 전체가 받게 될 타격, 그리고 그 나라 안에 사는 선의의 피해자가 입을 비극을 어떻게 수습하겠냐는 겁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한 거시경제에 닥치는 재난은 그 지역의 손해로 그치질 않는다는 점, 지난 브렉시트 위기나 그리스 재정 파탄 당시 우리는 똑똑히 지켜 봐 왔습니다. 아울러, 다 같은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보편적 가치가 제 자리를 못 지키고 붕괴할 때, 마냥 강 건너 불 구경하듯 국외자로 머물 수 없다는 일종의 사명감도 어느 일부의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은 그런 관점과 의도를 가지고, 일종의 책임감과 목적의식을 지닌 채, 공정하고 박식하며 무엇보다 현지 사정에 밝은, 위로는 왕실 주요 인사들, 아래로는 기층 민중의 간난에 대해 정확한 파악을 하고 있는 저자분이 쓰신 종합 보고서입니다. 분량도 만만치 않은데, 소설처럼 술술 읽히게 쓰신 덕분에 한달음에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보기에 막연히 그러려니 했던 선입견을 상당 부분 걷어낼 수 있었고, 근거 없는 짐작과는 정반대의 특이한 사정, 과거 내력이 상세히 적혀 있어서 읽는 내내 눈빛을 반짝이게 되더군요. 게다가 저자는 언론기관에 오랜 세월 몸담은 "여성" 저널리스트이기도 해서, 특히 여성 문제의 제반 모순으로 신음하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포착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여성 할례 문제"부터 해서 우리 보기에 역겹고 혐오스러운 사건 사고들이 그간 한둘이 아니었으니 더욱 그랬습니다.

2년 전쯤 헐리웃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소위 "닫힌 사회"일수록 근거 없는 믿음과 패거리를 모아 마구 우기기식의 한심한 작태가 횡행하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달 착륙"이, 버젓이 당시 미국 정부가 소련 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한 주장을,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이에 따르지 않는 학생에게 제재까지 가하는 장면이 있죠. 헌데 이게 아무 희망과 미래가 없게 된 가상의 세계(영화 속)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실제로 정통파가 종교의 가르침으로 전제적 지배를 행하는 신정 일치 사회에선 성직자와 권위 있는 기관의 "선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진리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쿠란이 그런 것까지 미리 예견할 수 없고 따라서 명문으로 기록된 바 없으니, 교단에서 이를 "인정"해야 애들에게 가르칠 수도 있고 일반에 통용되는 믿음 취급을 받을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현대인의 보편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이런 모습들이 이곳 닫힌 왕정 국가에선 당연하다는 듯 일상을 지배합니다.

보통 우리는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지배하는 나라(특히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과 대조할 때)"로 이 사우디를 인식해 왔으나, 이들 왕실(현 집권자라 해도)이 미국에 대해 취하는 자세는 그리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주권국가가 강대국에 마냥 굽신대는 게 물론 정상이야 아닙니다만, 최근 필리핀의 두테르테 같은 이가 히틀러를 거론하며 막나가는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이들의 현실 인식 역시 대놓고 표현은 안 해도, 우리식의 구태와 인습을 사회에 그대로 유지하려 나가는 시도에 다른 나라에서 웬 간섭이냐는 식의, 아주 퇴행적인 반항이라면 그게 과연 바람직한 태도일지요. 이런 나라에서 보편적 인권 의식, 계급 타파, 평등 의식이 제 자리를 못 찾는 건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합니다. 또한 독점적 이익은 그것대로 누려 왔으면서 "미국 등 서방 자본이 우리를 내내 착취한다"고 근거 없는 피해 의식을 갖는 것도 우습습니다. 구미의 자본과 기술이 아니었다면 그나마 채굴과 판매, 유통도 못 했을 텐데도요. 만약 이런 나라들이 그저 취약한 수준의 담합(가끔)에 그치지 않고 모든 원유의 유통과 생산, 판매에 독점권을 가졌다면 우리 소비의 현실의 여러 국면, 양상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우디 왕실은 우리 생각처럼 유구한 역사를 가진 편이 아닙니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와하비 운동"과 이 족장 세력이 연합하여 아랍 수니파 생활권을 통합하려 든 게 지지난 세기의 일인데, 이 종교 운동은 지극히 편협한 믿음을 가진 일부 과격파들이 주도한 과거 역사의 일부입니다. 저자는 오늘날의 왕실을 있게 한 그 열풍에서 주류를 장악했던 교리 일부를 소개하면서, 그들이 지닌 현실의 인식과 당위의 방점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점에 놓여 있는지 독자에게 경각을 촉구합니다.

사우디 왕실은 내부 분란과 비극적 대립으로도 아픈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십 수 년 전에 네팔 왕실이 국가 장래를 둘러싸고 분쟁을 벌이다 총격으로 가족 대부분이 사망한 충격적인 소식이 전파를 탄 적 있습니다(혹자는 자작극이라고도 합니다만). 헌데 그런 작고 미미한 나라에서만 비극이 생기는 게 아니라, 이 왕실에서도 두 형제가 복수를 한답시고 현 국왕에게 총구를 겨눠 피를 본 패륜극이 모두가 보는 앞에 펼쳐진 적이 있었네요. 현재, 그 두 형제의 동생 되는 다른 왕자는, 어정쩡한 스탠스로 진보도 보수도, 평민도 왕족도, 반미도 친미도 아닌 주변인의 삶을 삽니다. 이분을 저자가 밀착 접근하여 여러 재미 있는 취재를 한 기록이 길게 나옵니다. 저자의 태도는 매우 공정하여, 우리가 흔히 갖는 중동 왕족(더군다나 선대 왕의 직계 비속인)들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와, 이들 실제 왕자들의 삶이 매우 큰 차이를 보임을 드러냅니다.

실제로 왕족 출신들 중 많은 이들이, 미국에서 최고 권위를 가진 학교를 졸업한, 전문 분야도 뚜렷하고 교양도 풍부히 쌓은 인재들입니다. 넉넉한 환경에서 마음에 응어리진 바 없이 성장한 덕에 인품도 좋고 균형 잡힌 세계관으로 외부인을 대할 도량이 넉넉한 이들이라는 군요(우리 생각으로는 막 자기 생각만 상대에게 강요할 것 같지만). 오히려 상대(기자라든가 기타 전형적인 서구인들)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떤 우려를 가질 지 미리 알고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매너가 돋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정확한 실상과 실태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저자 같은 분의 프로페셔널 저널리즘도 돋보이겠고 말입니다. 여튼 문제는, 이런 근 삼만 명에 달하는 왕족들이 마땅한 대우를 못 받거나, 개인의 적성과는 전혀 무관한 직역에 배치되어 불만과 좌절만 쌓여간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잠시 언급한 대로 사우디에는 편협한 종교 교육이 우선이기 때문에, 과학기술 등 사회의 핵심 인프라를 일굴 실질적 지적 기반이 매우 취약합니다. 애써 과정을 이수한 이들(그나마 소수)이 제 대우를 못 받을 뿐 아니라, 전통적인 우민화 정책의 영향인지 무지몽매한 이들이 아직도 과거의 폐습에 사로잡혀 무엇이 진짜 모순의 원인인지 감도 못 잡은 채 약자를 억압하는 게 현실입니다. 몇 년 전 이집트, 리비아 일대에서 보편적 실업과 빈곤에 분노한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가 일어났지만, 이곳 사우디만큼은 그런 움직임이 대단히 미미합니다. 현재에 안주하려는(이슬람 종주국이라는 헛된 자부심 등) 보수적 움직임이 주류인데다, 젊은이들조차 패배적 마인드셋, 근거 없는 반미주의에 젖어 일어날 생각을 못 하기 때문이죠. 어찌 보면 미국의 근년 어리석은 외교 정책 과오가 좋은 구실을 마련해 준 셈입니다.

"왜 당신은 절대 진리인 이슬람으로 당장 개종하지 않나요? 혹시 당신 주변에서 그런 당신을 곱게 보지 않으려는 시선을 두려워해서인가요?" 심리학에서 이런 심리를 두고 "투사"라고도 부르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이 받을 비난이 두려워 미리 상대에게 같은 허물을 씌워 말문을 막으려는 비합리적 방어 기제를 뜻합니다. 지금 누가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같은 여성이 보기에 매우 안타깝다는 듯 어느 사우디 여성이 이 책 저자에게 건넨 충고 아닌 충고입니다. 자신이 잘못된 세계관과 의식에 발목 잡힌 것도 기가 찰 판인데, 남까지 물귀신처럼 자신이 빠진 함정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으니, 우리 독자로선 어이가 없지만 이게 사우디란 나라가 처한 엄연한 현실의 일각이라는 점 무겁게 받아들여야겠죠.

사우디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정상적 산출량 증가로 도박을 벌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셰일가스/석유 업체들이 세기적 혁신을 도모하는 현황에 위기 의식을 느껴, 아직 걸음마 단계인 이들을 도산시켜 독점적 자원 생산국의 이점을 누려 보겠다는 의도였죠. 하지만 과거가 미래와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화석 원료는 이미 탄소 과다 배출이 유발하는 환경 파괴에 심각한 경각심을 가진 인류에 의해, 그리 멀지도 않은 장래에 무대에서 퇴장할 운명입니다. 비단 (같은 탄소 기반인)셰일 산업이 아니라 해도 말입니다. 미래는 화석 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적 팩터뿐 아니라, 전근대적 폐습이 개인의 어깨를 짓누르는 그 모든 전선에서 함께, 거대한 위력으로 진군하게 마련입니다. 계몽된 미래에 저항하는 사우디의 구체제가 붕괴하는 건 자명하다 해도, 어떻게 연착륙을 시킬 지가 우리 모두의 과제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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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미치지 마세요
레슬리 모건 스타이너 지음, 안유정 옮김 / 필요한책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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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사랑은 당연히 그 당사자들을 세상 누구 부럽지 않은 행복으로 이끌어 주리라 기대되는 계기, 동력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기대에 대해 부당하다는 비판이나, 지나치다는 조소를 보낼 수 없고, 그런 기대에 빠진 당사자에게는 물론, 심지어 기대나 계기 자체에까지 축복이 쏟아져야 마땅합니다. 인간이란 세속의 어떤 명예, 평판(이 책에서 자주 나오듯), 부를 손에 쥐는 것보다, 이 작은 행복, 즉 연인, 배우자와 작고 달콤한 행복의 시간을 공유하는 게 그 짧은 생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헌데, 내가 무조건적 사랑을 퍼부은 상대가, 나에게 폭력을 가한다면 어떨까요? 많은 경우 주변에선, 피해를 입은 당사자를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며 한 마디를 건넬 것입니다. "그런 자는 너를 끝까지 불행하게 만들 뿐이야. 네가 더 사랑한다고 해서 문제가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마음 독하게 먹고 관계를 정리해라." 물론 이런 말에, 당사자들의 알콩달콩한 관계를 질투한 나머지 뭔가 훼방을 놓으려는 못된 의도가 끼어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근데 구태여 이런 의심이 끼어들지 않더라도("얘 지금 배아파서 하는 소리겠지? 얼마든지 개선의 여지가 있는데도 말야."), 일단 사랑에 눈이 한번 멀면 그 냉혹한 진실이 절대 깨달아지지 않나 봅니다. 어쩌면 절대 다수의 연인들, 즉 하루하루가 제법 위태롭고 싸움(밀당이든 뭐든)도 잦은 케이스는, 이런 "완전히 눈먼 커플, 혹은 당사자 한 명"에 비해 운이 좋은지도 모릅니다. 냉철하게 자신들의 관계를 성찰할 계기라도 가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보통 이런 맹목적인 사랑을 퍼붓는 쪽은, 만약 그게 여성이라면,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거나, 전근대적 의존성 퍼스낼리티를 아직 떨치지 못했거나, 경제적 자립이 힘든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고들 봅니다. 그게 통념이죠. 하지만 이 책을 쓴 레슬리 모건 스타이너는 전혀 그런 타입이 아닙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예쁜 미모를 갖추고 태어났으며, 출신 학교는 하버드이며, 어려서부터 읽고 자라난 <세븐틴>이란 저널에서 "제발 일 좀 해달라고 상사, 고용주로부터 부탁이 들어오는" 특 A급은 몰라도 A급은 넉넉히 될 법한 인재입니다. 여성 인재가 이런저런 부대 조건을 다 갖추면 몸값이 더 높아지고, 그녀의 장래를 확고하게 떠받쳐줄 이런저런 배경까지 갖춘 능력 좋고 맹력적인 신랑감까지 어디서건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조건에 대해 이렇게 말하네요. "교육을 잘 받고, 아름다운 외모에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행운으로...." 그런데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이런 행운으로 세상의 모든 악을 피해갈 수 있기까지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책을 처음 펴들 때는 그냥 넘어갔습니다만, 중간쯤까지 읽으면서 저 앞의 말이 자꾸 독자의 머리 속에 파고들더군요. 정말, 정말 많은 이들이 이런 비슷한 말을 하는 걸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진짜 안타까운 건, 이렇게 초기 조건이 너무 좋은 분들이, 세상 더러운 물정을 잘 몰라 나쁜 사람들에게 몹쓸 일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쓰는 표현대로, "다들 내 맘 같지 않아서" 나는 잘해 주려고 관계를 시작했는데, 거꾸로 그를 이용하고 순전한 악의만으로 해코지하려는 술수에 넘어가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어쩌면 말입니다, 어쩌면, 출생시의 좋은 운은 앞으로 이런 나쁜 사건에 휘말리는 걸 피해가라고 주어진 조건에 불과한데, 그걸 제대로 활용 못 하고 이런저런 열등분자들의 먹잇감이 된 게 본인 자신의 실수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악, 당부의 평가가 바뀌는 건 물론 아니겠고, 다만 세상살이엔 선의보다 현명함이 더 강조될 때도 있다는 걸 말하고자 함입니다.

코너는 이 레슬리가 자기 인생의 이성이라 여길 만한, 매력적이고 총명한 두뇌의 소유자였습니다. 다만 이 상대는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당연하게도 레슬리 자신처럼 좋은 배경, 학벌 등을 갖질 못했습니다. 본래 출신 배경이 다르면 사귀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을 베풀곤 합니다만, 레슬리는 역으로 이런 점에 더 끌려서 코너에 깊은 애정을 품은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레슬리 자신의 아픈 상처도 어느 정도는 작용을 했는데, 양친이 비록 부유하긴 했으나 어려서 레슬리를 살뜰히 돌보는 타입이 아니었고, 좀 유별난 개성에 자기만의 세계를 추구하는 분들이라 레슬리에 많은 애정을 쏟질 못했습니다. 참고로 그 부친은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지역 사회에서 매우 명망 높은 판사였는데도 말입니다. 레슬리는 어느 정도, 이런 다른 방향으로 불운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 심리, 혹은 동병상련의 동기로 코너에 더 관심을 쏟은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 코너는 그저 폭력 성향이 강한 남성, 이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정신 분열 증상을 보이는 듯합니다. 그의 폭력은 애인, 그리고 이후 아내가 된 여성을 향해, 그녀가 보이는 어떤 제스처, 행동, 언어가 "과거 자신을 아프게 한 어떤 기억"을 강하게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불쑥" 튀어나옵니다. 자기 행동에 대해 자기가 통제를 못하는 거죠. 이러다가도 레슬리가 자신을 달래고, 따끔한 경고라기보다 애원에 가까운 투로(이럴 때 정신이 버쩍 들게 매서운 한 마디를 날렸다면, 그렇게 비생산적인 관계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을 텐데요) 한 마디 하면, 이 작자는 잠시 수그러듭니다. 그러고 나선 또 반복입니다. 빨리 정리하는 게 답인데, 이 책 제목을 보십시오. "사랑에 빠지지 마세요." 너무 사랑해서 내가 이만큼 다쳤다는 뜻인데,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책에 잘 나옵니다. 이 정도 당찬 여성이 이런 피해를 입을 정도면, 사실 어느 정도는 시스템적 보호 장치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해요. 웬만해서는 이런 함정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랑이 진득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선 어떤 놀라운 순간, 혹은 깊은 연대의 계기가 마련될 필요도 있습니다. 책을 잘 읽어 보면 레슬리가 코너를 집에 데려와 부모와 상견례를 시킬 때, 이 아버지, 그리고 심지어 그 어머니까지 레슬리에게 너무 깊은 상처를 주는 대목이 있더군요. 책에 자세히 술회되어 있지는 않으나, 레슬리가 십대 시절 그 부모와 깊은 불화의 시간을 가졌나 봅니다. 여기에 일일이 적진 않겠으나, 마치 몇 달 전 어느 연예인과 그 생모 되는 분이 깜짝 놀랄 만한 다툼을 대중들이 뻔히 보는 중에 벌이면서 나온, 그 참혹한 언사들을 떠올리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말을 약혼자 될 사람한테 하다니.. 물론 관계가 이리 파국으로 끝나고, 그 남편 될 작자가 그리 말종인 줄 몰랐던 상태에서, 오히려 "내 딸 같은 여자를 조심하라" 내지 관계를 망치려 든 심리가 작용을 했던 겁니다. 후~. 여튼 이런 일을 겪고 나서 레슬리는 더욱 코너에게 의존하려 들지 않았겠습니까? 이 자는 그런 약한 마음을 더 악용하려 들었겠고 말이죠.



사랑의 결핍이 결국 다른 사랑을 찾으려다 눈먼 비극적인 사랑을 낳고 만다는 게 결국은 결론이겠습니다. 이게 어떤 데이트폭력이다, 혹은 가정 폭력이다 하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좀 사정이 달라서 한마디로 뭘 단정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긴 합니다(코너가 나쁜 놈이라는 진단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만). 텍스트가 예쁜 편집으로 독자에게 제시되며, 이런 여성 저자들(재치있고 많은 교육을 받았으며 풍성한 대도시 문화 체험 속에 과거나 현재나 빠져 사는)이 흔히 구사하는 다양한 idiom과 문화적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게 역주가 많이 달려 있습니다(그래서 처음에는 예쁘고 발랄하고 유쾌한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이건 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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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없이 회의하라 - 가족, 직장, 친구, 나 자신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5가지 T.A.B.L.E
김동완 지음 / 레드베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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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중요함이 부쩍 강조되는 요즘입니다. 특히 회사와 같은 2차 집단, 이익 사회 안에서는 설령 개개인의 역량이 강하더라도, 혹은 보유한 자원의 질이 우수하더라도, 이를 운용하거나 이에 참여하는 직원들 사이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면, 1+1=2의 효과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逆) 시너지 효과라고나 할까요. 논자에 따라선 아예 "회의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극단적인 주장도 나오지만, 그런 경우라 해도 이를 대체할 의사 소통 수단, 아래에서 위로 안건을 상신할 루트는 마련이 되어야 합니다.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생산성 없이 진행되는 회의는 안 하느니만도 못하는 뜻 정도로 받아들여야겠죠.

이 책은 "소통의 기술 전문가"이자, 특히 현장에서는 "회사에서의 회의 혁신, 개선에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달인"으로 소문이 자자한 김동완 선생의, 강연자, 모티베이터, 컨설턴트로서 그간 왕성한 활동의 결산이 담겼다 할 내용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분의 강연을 들어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짧지도 길지도 않은 한 권의 분량 안에 과연 달인의 명성에 걸맞은 소중한 지혜가 담겼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조직 생활을 안 해 본 독자라면 "그저 좋은 말씀이군." 정도로 감흥이 없을 수 있지만, 같은 주장이라도 어떤 어휘를 쓰는지, 한 챕터 안에서 어떤 주장과 충고들이 한데 엮여 들어가는지에 따라 독자가 받는 느낌과 감화의 정도가 다르죠. 통하는 사람들끼리는 한 마디의 짧은 코드도 만 가지 의미로 와 닿는 거니까요.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여기서 주인이 그간 장사를 벌이는 방식을 보고 제2의 창의적인 개척로를 깨달은 하인이, 그간 모아 둔 밑천으로 크게 성공했다는 이야기인데, 제 생각에는 주인은 그 역시 윗대에서 보고 배운 방식만 고스란히 되풀이한 경영자 타입 같습니다. 일단 한 번 시련이 있었으니 그 상처로 재기가 어려웠겠고, 다음으로 사업의 기반이 허물어지니 다시 일으켜세울 지혜는 부족했던 거죠. 반면 하인은 하나를 보면 둘까지 헤아리는 "지혜"가 뛰어났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거대담론 하나로 디테일을 무시하는 나쁜 버릇을 들이면서 "지식이 아닌 지혜"라며 터무니없는 합리화를 일삼는 경우를 보는데, 그건 지식도 지혜도 아닌 가장 저차원의 고집, 착각에 불과하죠. 부족한 사람일수록 어디서도 안 통하는 자기만의 "소신"에 미련스레 매달릴 뿐입니다. 록펠러의 말로 인용된 건, "상황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적응이 가능한 유연성"을 강조한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김동완 선생님이 제주도 분이라 들려줄 수 있는(혹은 원용할 수 있는) 이야기가 책에는 많은데요. 그중 본인의 경험담으로 "수업 시간에만큼은 사투리를 쓰지 말고 표준어 사용"을 강조하신 어느 선생님을 회고하시는데, 이런 순간이 자신에게는 뭔가 새로운 시작점으로까지 여겨진다시는군요. 아마도 저런 선생님들의 노력이 모이고 모여, 제주도에는 오늘날처럼 확고한 "이중언어 구사 현상"이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이중언어"는 중동이라든지, 북유럽이라든지, 두루 통할 수 있는 "링구아 프랑카"와 "다이얼렉트"를 동시에 언중이 구사하는 걸 가리킵니다. 사소해 보이는 게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 조직도 사소한 부정적 분위기와 비능률적 요소, 오해와 곡해, 적의의 분위기가 모여 삽시간에 기둥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소해 보였던 우의와 이해가 모이고 모여, 전체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그 회사만의 강점을 키우는 계기로 발전하기도 하죠.

우리가 오랜 동안 타성에 젖어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쓰는 말도 많습니다. 습관적으로 "재청 있습니까?"라고 사회자가 묻곤 하는데, 이 말은 본디 이의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적 발언인데도 그저 좌중의 동의를 구하는 여음구처럼 오해되죠. 문제는, "재청 있냐"고 물으면 정말 재청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한두 군데에서는 나와 줘야 그게 건강하고 정상적인 조직이라는 거죠. 예의상, 분위기상, 어떤 대세가 형성되면 그저 묻어가려고만 들게 아니라, 때로는 튀더라도 건전한 상식에 부합하는 지적이 나오고, 그를 용인하는 합리적 조직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뜻이겠습니다.

회의 전문가의 책 답게 과연 이런 명언도 실려 있는데요. "인생은, 삶은, 매 순간이 회의와 같다." 조직에서 회의를 잘하고, 자신의 업무를 잘 처리하며, 타 직원들과 원활한 소통을 이루는 이는, 먼저 혼자 있는 시간에 "자기 자신과의 회의"를 능숙하게 해낸다는 지적입니다. 이때 유념해야 할 점은, 절대 감정과 충동에 따르지 말고, 잘 판단이 안 서거든 혹시 지금이 비이성적 흐름에 맡겨져 있는 상태나 아닐지 스스로를 항상 점검해야 핝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회사의 미팅에서도 분위기를 잘 조절하고,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전체의 흐름을 건설적으로 리딩하는 건 당연하죠.

달인은 사소한 순간에서도 배움과 깨달음의 계기를 마련합니다. 창립 기념식에서 여흥을 돋우고자 윷놀이 대회가 열렸는데, 어떤 분은 "저는 지금까지 이런 데서 이겨 본 적이 없어요."라며 겸연쩍어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소장님은 "바로 그런, 아주 사소해 보이는 마인드셋이, 확률상으로도 벌어지기 힘든 연패를 가져왔다"며 부정적 태도의 해악을 지적하시네요. 게임은 아무리 플레이어의 수완이 좋거나 나빠도, 어느 정도는 운에 좌우되는데 한 사람이 그렇게나 매번 질 수는 없죠. 내가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전망과 실적은 큰 폭으로 변화하고 비우호적인 국면도 유리하게 전환될 수 있겠습니다.

개인의 역량이 뛰어나도 조직에 그 효과가 전달되지 않는 건 사내 정치가 지나치게 과열되어 도통 화합과 팀웍이 안 이루어질 때입니다. 서양은 어차피 개인주의 패턴이라 조직 안에서 이합집산이 활성화되지 않는데(없다고는 말 못해도), 한국은 한번 회사 내 팩션(派黨)들이 형성되면 그 악폐와 부작용이 회사 전체를 병들게까지 합니다. 오너들이 때로 너무 제왕적으로 군림하는 것도, 어차피 민주적 리더십이 안 통하기 때문이기도 하죠. 그래서 김 소장님은 "건전하게 경쟁하라"는 주문을 합니다. 이는 주로 관리자들이 판국을 위에서 잘 내다보고 뭔가 과열이다 싶을 때 알아서 커팅하는 센스가 중요합니다. 개개인 차원에선 부처님 급이 아닌 이상 절제가 힘들고요.

"너무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몰려들지 않는다." 김영란법 시행 관련해서 앞으로 우리 사회에 이 원칙이 어떻게 수정, 변형되어 통할지도 귀추가 주목됩니다. 소장님은 이 말씀을, 1) 너무 완벽주의로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지 말고, 2) 조직 안에선 강점과 실적에 대한 자부심을 적정 수준에서만 드러내라 처럼 해석하시네요. 1)은 요즘 이런 타입들이 너무 늘어나서 기업 차원에서도 인적 자원의 손실 요소로 우려될 정도고, 2)는 한국 조직 문화의 특성상 남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어느 정도는 운명적인 처세 원칙의 일환으로 여겨집니다. 1)과 2)는 따지고 보면 개인 퍼스낼리티에서 둘이 아닌 하나로 연결되는데, 결국 1)이 잘 해결된 사람은 대외적으로 2)가 자연스럽게 표출되기도 하더군요. 내면에 여유를 마련한 사람이 처신도 능숙한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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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블 인 헤븐
가와이 간지 지음, 이규원 옮김 / 작가정신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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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떤 책을 읽을 때 보통 그 붙은 제목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습니다. 어떤 주제가 책 한 권으로 낱낱이 해명되기를 바라는 건, 단돈 3만원으로 세상의 지혜를 수 분 안에 패스트푸드처럼 손에 넣기를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무모하고 탐욕스럽습니다. 아니면 동전 몇 푼을 집어넣고 레버 한 번 당긴 후 수백만 달러가 나오길 진지하게 갈망하는 도박꾼만큼 어리석다고나 할까요. 헌데 이 책은 정말, "제목값을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트럼프 카드 한 장 뒤에 그려진 "죽음의 천사"가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닌다고는, 장르물 폭식이란 나쁜 습관을 들인 독자로서 순진하게 믿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모티프로 미스테리를 끌어 나갈 계획일까?(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반 쯤에 크리스채니티 관련 각종 상징과 암유가 등장할 때도 "작가가 연구 많이 했군. 하지만 장식이겠지" 정도로 넘겼는데요. 소설 끝까지 읽고 이 작가님이 "앞에서 벌인 모든 떡밥을 성실히 회수하고, 깐깐하게 해명하며, 심오한 주제까지 장엄히 펼치기까지 하고" 마무리하는 데 감탄했습니다. 결말이 멋지기도 했지만, 이런 묵묵한 작가적 화룡점정에 더 박수를 보내느라 그 멋진 맛을 음미할 차례를 잠시 잊었네요.

일본의 사회파 작가들은 보통 화려한 도시 그 이면의 추악하고 찜찜한 사정을 철저히 연구한 후 작품을 펴냅니다. 너무 준비가 철저해서 업계로부터 항의까지 받는다는 뒷말이 있을 정도죠. 이 작품은 2023년이라는 근미래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습니다만, 마치 현재 진행형의 비위를 고발이라도 하듯 실감이 나며, 그 상상은 바로 지금의 모순과 직접 꼬리를 닿아 있기에 독자로서 경각심까지 생깁니다. 2023년이란 연도는 1) 작가의 창작 시점으로부터 10년 뒤, 2) 두번째로 도쿄에서 열리는 올림픽 그 후의 시점 이란 의미를 가지겠는데, 그나마 저 중요한 건 2)의 뜻입니다. 인구 구조는 점점 노령화하고, 성장의 한계에는 진즉에 부딪혔는데,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노인들을 국가로서 어떻게 대하고 다뤄야 할까. 여기에 대한 답은 여럿이 가능하겠으나, 이 소설에선 가장 무서운 것을 내놓고, 냉혹하게 집행하는 시나리오입니다. 극중 캐릭터인 보험 조사원 하마나의 말을 잠시 빌리죠. "당신은 국가가 정말, 시민의 생명을 중히 여긴다고 믿습니까?"

소설은 불법 영업 카지노에서 바카라 게임에 몰두하는 어느 조폭 두목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일진이 좋지 않았던 그는, 불가능한 확률 상황에서 계속 따기만 하는 푸른 눈의 젊은이에게 대신 화풀이를 하려 드는군요. 이 장면에서 젊은이의 용모에 대한 묘사가 자세하지 않았는데, 결국 이게 일종의 복선이더군요. 젊은이는 무슨 비결이 있는지 결국 "밑장빼기"까지 시도한 딜러와 웨이터, 조폭 두목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더 쎈 수"로 승부를 걸어 완승을 거둡니다. 하지만 이런 재주로 판을 쓸어 담는 돌출분자에게 세상이 공평할 리 없고 하물며 거기가 도박판이라면 말할 것도 없죠. 독자들의 안타까움을 뒤로 한 채, 이 젊은이 - 마슈라는 이름 -은 생사의 기로에 놓입니다.

저런 마슈와는 처지가 사뭇 다를 법한, 어느 축복받은 인생이 따로 있습니다. 유복한 부모님 슬하에서 나고 자라 미국에 머무는 이 젊은이는, 느닷 양친의 사망이란 비보를 접하고 귀국을 서두릅니다. 프롤로그는 여기서 호흡을 끊는데, 이 인물은 2부부터 다시 같은 신원이라며 등장해서, 세월이 십여 년 지난 현재 사법시험 합격, 변호사 개업, 중의원 당선 이란 출세 코스를 다 밟아 촉망받는 정치인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살짝 서술 트릭이 개입했는데, 하우스의 직원이 "원체 총명한 두뇌를 타고 나셨으니,..." 운운하는 대목이 그것이죠. 이게 false compliment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전부터, 왜 일본에서는 소비자 금융(좋게 말해서)이 저렇게나 발달했을까 궁금했습니다. 일본은 1980년대 중반만 해도 전세계로부터 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도 같았죠. 이러던 게 성장 동력을 잃고는 만만한 자국의 서민들한테 체계적으로 푼돈을 모아들이는 쪽으로 영 건전성이 떨어지고 만 게 그들의 거시 경제입니다. 이 소설은 이런 일본의 시스템적 문제에 대해, "국가가 아예 야쿠자로 변했다."며 지독한 비판을 날립니다. 이런 착취와 경제 질서 왜곡은 누구의 음모로 벌어지는 걸까요? 답은 소설 중반쯤에 이미 나옵니다. "부도덕한 체계 속에서는 집합자아(group ego)라는 게 절로 형성되어, 악마 같은 개인이 배후조종하지 않아도 특정 목적을 향해 일사불란 작동되게 마련이다." 이 결론은 물론 작품의 대단원에도 한 번 더 강조되며, 작가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곱씹게 합니다. 과연 범인은 OOO이었을까요? 물론 소설은 명시적으로 그를 지목하며 심판까지 받게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 모든 게 거대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OOO는 특히 후반부에서 내내 강조되듯,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그 많은 희생자를 낳은 건 사악한 체제 자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거죠.

소설은 이런 담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세상 곤란을 모두 잊고 라스베거스의 VIP 숙소에서 호사를 누리던 귀공자의 부모를 죽인 자는 누구였을까요? 누구도 못 말릴 정의감과 한 여인을 지키려는 의무감에 불타던 진자이 형사는 그 사건 이후 어떻게 된 걸까요?(약간 이 대목에서 납득이 안 되던 게, 무장한 폭력배들을 단신으로 모두 살해한 "cop hero"에게 책임을 오히려 물을 공권력이나 여론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작가께서 설정상 좀 오버하신 듯) 참으로 고지식하게 형사로서 본분을 지키려는 스와 형사는, 이 불리한 형세를 어떻게 헤치고 거대한 악과 맞설까요? 플롯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성실히 답하며 짜릿한 반전까지 예비합니다. 만약 결말이 내내 마음에 안 차는 독자가 있다면, 이 글 바로 위 문단 마지막 문장처럼, 범인을 그저 "체제"라고 새기면 됩니다. 하마나, 기자키 계장이 갑자기 미스테리 해결 과정을 확 진척시키는 약간의 구성 불균형만 빼고는, 저 개인적으론 간만에 최고의 스릴러를 읽었다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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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용도 (양장)
니콜라 부비에 지음, 티에리 베르네 그림, 이재형 옮김 / 소동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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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그가 속한 곳(where he/she belongs)에서만 최우선의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그가 성장하며 사귄 친구, 그의 평판을 보증해 줄 지인들, 그가 이뤄 온 업적들(크든 작든),... 그의 존재는 그의 본향에서야 제 색깔을 지니고, 그의 말은 그의 동아리 안에서 제 의미를 드러내죠. 이런 익숙한 환경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을 보다 편안히, 그리고 유창하게(fluently) 규정하지만(define), 정작 당사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에서 빠져 나오려 가끔 몸부림치는 다른 감정의 덩어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고, 때로는 불안 속에 스스로를 묻습니다. 이때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게 바로 여행입니다.

여행 속에서 발견하는 게 참다운, 그간 억눌려 왔던 자아일 수도 있고, 과거 어느 순간 극복되었던 퇴행의 흔적일 수도 있습니다. 수치로야 한 길도 안 되는 연약한 인간, 그 육신과 동반하는 마음의 복잡한 구조와 규모란 우주의 그것과도 맞먹고, 이 때문에 이를 다스리는(다스리려 하는) 주인의 심사란, 반란이 심한 속주를 다스리는 총독의 고뇌로 가득합니다. 정말 피치자를 제압하려 드는 관리이건, 부모의 마음으로 상처를 돌보려는 구호자이건, 제 목적을 달성하려면 현지를 방문 그 정확한 실상을 살펴야 합니다. 여행은 그런 의미에서, 타지에 임할 때 바로 드러나는 타자 같은 자아와의 맞대면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 자신을 파괴할 권리"를 과감히 자신들에 부여한(니콜라 부비에 본인의 말. 책에서 인용합니다), 두 젊은이들의 여행록입니다. 지금은 벌써 다른 세상으로 건너간 그들에게 독자로서, 소박하게, 하나 부러웠던 건, (이런 놀라운 책, 혹은 당대 평자들의 표현처럼 "경이의 책", "지혜의 책"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차치하고라도) 제네바에서 카불까지 피아트를 몰고 기나긴 횡단을, 비교적 자유롭게 이룰 수 있었다는 그 사실이었는데요. 냉전이 한창이었을 당시에 오히려 가능했던 여행 방식이고, 지금은 이 코스 곳곳에서 정정이 불안한 나라들의 불쾌하고 당혹스러운 말썽, 나아가 참극들이 거의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이런 장도(長途)의 여정이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할 형편이라서죠. 만약 이런 계획을 누가 세우고 실천했다간, 부정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뜻에서 당사자의 "육신"이 파괴되기 십상입니다. 껍질을 깨고 더 성숙한 영혼으로 거듭남이야 바람직하겠지만...

아마 당시 티토가 다스리고, 인종청소니 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지옥도를 지상에 펼쳐 보이기 훨씬 이전이었겠지만, 유고슬라비아(지금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등 여러 후신들로 쪼개진)를 통과하며 이처럼 낙천적이고 활발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들. 물론 본인들의 표현대로, 이미 경화되고 박제화하여 마음이 그 안에서 질식할 듯한 껍질을 깨는 중이라 준(準)전시상황의 내면이긴 했겠지만 말이죠. "헝가리 국경에서 마케도니아까지" 모든(全) 전(前) 유고인들이 한데 모여 다시 "콜로"를 출 수 있고, "빵가루를 입힌 갈비, 백포도주, 고기 만두"를 먹을 그 날은 언제 다시 올까요. 헤세를 직접 접대하기도 했던 부비에 씨의 모친의 (그 악명 높은) 요리솜씨가 동반되어야 하겠지만 여튼 자리는 흥겹고 신나며, 뭔가 근원의 안식과 여흥이 자리할 듯합니다.

이 책에도 잘 나오듯 앙카라는 아나톨리아 한복판에 위치한, 신생 공화국(신생이라니! 그러나 이 말이 차라리 과분할 만큼 어려웠을 시절)의 수도로 새로 데뷔한, 이들의 표현에 의하면 "목가적이라는 말의 뜻이 뭔지 새로 가르쳐 줄 만한" 풍경을 그 옆에 낀, "아르카디아를 연상케도 하는" 고장이었습니다(지금이야 뭐..). 히타이트 유적이 지근거리에서 화제에 오를 만큼, 메소포타미아 제국(諸國)이나 비잔티움 황조가 오랜 동안 국고의 텃밭, 국세의 기반으로 삼은 땅임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하죠. 숭그를루를 지나치기 전 왜 바빌로니아(현 이라크 남부)가 화제에 오를까 궁금하다면, 본디 이 땅들(터키니 이라크니 하는)이 서로 그만큼이나 잇닿은 역사를 지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한 대접과 정직함, 친절함 등은 언제나 터키인들이 잃지 않는 좋은 매너라오." 흠, 그래서, 호의를 악의로 보답한, 이때로부터 이십 년 후의 앨런 파커 감독 같은 사람은 좀 크게 반성할 필요가 있겠네요.

"아제르바이잔 타브리즈"라는 표현을 들으니 위화감이 확 느껴집니다. 물론 이곳은 지금도 (높은 자치권이 보장되며, 소수 인종으로서 여전히 큰 발언권이 보장되는) 동 아제르바이잔 주에 속해 있지만, 지난 역사의 대부분은 페르시아 제국의 여러 수도 중 하나로 기능해 왔죠. 테헤란보다 더 유서깊을 이곳은 그만큼이나 "페르시아적 정체성"도 공유한 곳이니. 저자 두 분은 이곳, 아르메니스탄(이렇게 부르니 정말 낯서네요), 신생 쿠르디스탄(당시 기준. 책에도 나오지만 잠시 부각되었다가 팔레비 왕조에 의해 소멸)을 쌍둥이 같은 처지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둘은 처한 상황이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도 다릅니다. 책에도 나오듯 마치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니콜라 부비에는 이란(그때도 이름은 이란이었습니다)에서 돈이 떨어지자 베르네와 함께 "알바"를 시작하는데, 현지의 약사 세파보드히가 문법적으로 틀린 프랑스어를 말하자 고쳐 주는 대목이 재미있네요. "à dans le 라고 하지 마세요. 도시인 타브리즈 앞에는 그냥 à만 쓰는 거에요. 국가 앞에는 en를 쓰고 말이죠." 그나저나, 왜 그는 이곳에서 사는 게 힘들다고 했을까요? 프랑스도 당시라면 형편이 팍팍하긴 거의 마찬가지였을 텐데(미처 몰랐던 듯).

이들은 이곳 북서부 이란(현대 기준)에 꽤 오래 머무릅니다. 마하바드 교도소에 머문 건 무슨 터키의 빌리, 지미, 맥스처럼 누명을 쓰고 "수감"이 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잠재적 말썽거리를 통제하려 든 교도소장의 "사실상 연금" 시도지요. 교도소를 찾아와 "계약 이행의 문제(헉)"를 놓고 불평을 토로하는,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창녀에게서 이 청년들은 "생의 활기와 맹목적 도약"을 감지하고, 꼭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실행에 옮기지는 않음). 그녀를 다루는 소장의 태도를 보면 이 시절 이란의 행정이 더 문명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 같으면 어딜 감히! 기둥에 묶여서 채찍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죠.

이스파한, 테헤란 등은 모두 지난 시절 제국의 수도들이었습니다(하계, 동계에 따라 수도 여럿을 둠). 이곳에서 여러 지인들(이미 그전부터 연락을 하던 이들인 것 같네요)과 교감한 후, 두 청년은 광야나 험준한 산지로 드디어 문명을 떠나 발길을 돌립니다. 이란 중동부에 보면 사람이 거의 안 사는, 산악과 사막이 죽 펼쳐진 광활한 지대가 있는데, 거기 한복판이 야즈드 사막입니다. 시라즈를 지나 이란 동단의 케르만 주에 도착하고, 이때에도 여전히 차도르를 쓴(세속주의 통치자였던 수상 모사데크 치하였지만) 여인들이 구수한 죽을 끓여 객들을 대접합니다. "묘석보다 더 큰(이런 표현들이 재미있어요)" 기록부에 서명하고 국경의 세관(복무하는 군인들은 차림이 단정치 못했다는데, 국가 기강의 해이를 반영하는 묘사일 수 있죠)을 통과한 후, 그들은 드디어 광활한 옛 제국의 영토를 벗어납니다.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가 시작된다는 반가운 표지판이 눈에 띄지만(그들은 계속 피아트를 타고 여행 중이죠), 이곳 아프가니스탄 역시 사정이 호의적일 리 없습니다(당시에도). 이란 남동부, 인도 북서부,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는 소수 인종으로 발루치 족이 사는데(아주 넓은 자치구를 이룸), 이 이름에는 "불운"이란 뜻이 있다는군요(저는 이 책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일부러 이름을 그렇게 붙여야 불운이 알아서 피해간다는 기대인데, 우리도 아이들 이름을 험하고 천하게 붙여 유년의 질병 등 우환을 쫓으려는 민간 풍습이 있었죠.

"한 청년이 강을 건너가네
얼굴은 한 송이 꽃 같고
엉덩이는 복숭아 같아
하지만 이럴수가, 난 수영을 못한다네."

울림이 알쏭달쏭한 이 지역 민요지만, 아마도 이 책 화자인 두 분과 테렌스는 심심상인으로 뜻이 통했나 보죠? 여기는 아프간이다 보니 본토인이라 할 그 유명한 유목 민족 파슈툰인이 다수입니다(책에서 "파탄 인"이라 표현하는). 지금하고는 상전벽해라 할 만큼 풍습과 풍광이 차이나는데, 한때 영국 세력권(제정 러시아와 다퉜죠)에 있었던 이곳이니만치 심지어 (갓 즉위했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초상화가 발견되는가 하면, "기니로 주시오, 기니로!" 란 말에서 드러나듯 여전히 화폐로서 영국 금화가 통용되네요. 그도 그럴 것이, 영국령 인도에서 철수한 옛 식민지 거주자들을 자히르 샤가 여러 면에서 편의를 봐 줬기 때문이죠. 이로부터 몇 년 후면 민중 혁명으로 축출되지만.

"신비주의자(아마도 수피를 가리키는 것 같네요)도 이 세계의 비밀을 여전히 모르는데
도대체 술집 주인이 어떻게 그걸 그렇게
잘 가르쳐 줄 수 있는지 궁금하네...."

14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하페즈가 남긴 한 구절인데, 이 사람은 부비에, 베르네 두 청년이 몇 달 전 지나쳐 온 시라즈 태생입니다.

바부르 황제가 언제 카불을 다스린 적 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는 델리를 식민지로밖에 여기지 않았고, 그의 후손들은 그래서 끊임 없이 "본향에 돌아가 칸으로 군림하길" 바랐던 거죠. "사람이 사는 세계의 중심"이었던 매혹적이고 융성한(지금은 그러나?) 이곳 카불에서, 박트리아 왕국의 마지막 왕 헤르마이오스는 "앞면에 인도 글자, 뒷면에 중국 글자"가 새겨진 동전을 주조하게 했다고 부비에는 서술합니다. 엄연히 아프간인들 자신의 역사인데도 이를 까맣게 잊어버린 무슬림들이 안타깝다고 하는데, 사실 여기도 그간 인종적 부족적으로 많은 사건들이 교차한지라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죠.

힌두쿠시의 험준함, 반짝이는 잎새의 버드나무가 울창한 카이바르 고개의 녹음을 지나 그들은 인도의 문턱에 도착합니다. 모든 지점은 다른 두 영역의 접촉, 인연의 산물이며, "지속성, 세계의 투명한 명증성, 평온한 귀속"(p660)의 증명입니다. "탄젠트는 구상할 수도 없고 중명할 수도 없는 접촉이다"란 플로티노스의 말을 부비에는 인용하는데, 지구 반의 반 바퀴를 돈 기나긴 여정도, 혹은 보리수 아래에서 우주의 원리를 직관한 석가모니도, 인간 내면의 굴곡 많은 모습을 책 몇 십 권의 분량으로 다 표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비의는 어느 정도 궁극의 미지로 남아야 생산적인 각성을 우리 아둔한 인간에게 제공할 수 있습니다. 방위와 지향 그리고 인문의 다른 얼굴로서 동(東)은 아마도 이들 프랑스 청년들에게 영원한 과제의 단서로 남아 있었을 것 같네요. 그게 곧 "어떤 가르침을 위한 세상의 쓰임새"이기도 하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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