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경쟁전략은 무엇인가? - 하버드 경영대학원 마이클 포터의 성공전략 지침서
조안 마그레타 지음, 김언수.김주권.박상진 옮김 / 진성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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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경영사상가들의 업적과 이론은 학문적 영역에서만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비즈니스맨들에게 경영 지침을 제공해 줍니다. 흔히 경영인이라면 "탁월한 감"으로 기업을 이끌어간다고도 하지만, 또 그런 직감적 요소를 특정 국면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막연한 감만으로 큰 조직체(작은 사업체라도 마찬가지입니다)를 경영할 수는 없습니다. 관리와 시장 개척에는 체계적인 준비와 실행 과정, 그리고 피드백이 마련되어야 하며, 이 모든 과정을 즉흥적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습니다. 하다못해 룸살롱 사장도 낮에는 도서관에서 필요한 학문적 정보를 검토한다며 자랑하던데, 얼마나 그 정수를 새로 깨닫고 자기것으로 소화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론 없는 실천이 엄청난 맹목임은 두 번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CEO 선까지 갈 것도 없이, 일반인이 자신의 인생을 "경영"할 때에도 어떤 비전과 철학에 기반해야만, 실패와 좌절을 가능한 한 적게 겪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마이클 포터의 정립된 이론 그 핵심 중, 경영인은 물론 일반인들도 요긴하게 참고할 수 있는 유익한 명제만 모아 쉽게 설명한 책입니다. 제가 삼 주 전쯤 피터 코틀러의 이론 중 중요한 부분을 풀어 주거나, 동아시아의 현실에 맞게 잘 개량해서 학계와 일반에 제시한 어느 일본인의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필립 코틀러나 마이클 포터나 사실 일반 독자가 읽고 바로 무리 없이 소화할 수준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론에 정통한 다른 학자가 이 큰 간극을 요령 있게, 솜씨 좋게 메워 줄 필요가 있습니다. 한 권으로 읽는 피터 드러커도 누구를 위해서건 필요하듯, 마이클 포터도 시간에 쫓기는 여러 수요층을 위해 이제는 나올 때가 되었지요. 요약본이 나와도 되도록이면 학문적 권위를 충분히 담보할 수 있는 분의 솜씨면 더 좋겠죠.

저자 조언 마그레타는 현재 하버드 경영대 소속의 Senior Associate이며, 역시 현직으로 HBR의 편집자 위치입니다. 저자는 특이하게도 서문에서 "왜 (이런 성격의 책에, 그리고 마이클 포터 같은 세계적 권위자의 업적을 요약하는 작업에) 내가 집필자로 나서야 하는가?"를 두어 단락 정도 분량으로 따로 설명합니다. 그녀는 HBR의 핵심 필진 중 (당연히, 그리고 여전히) 한 명인 마이클 포터와 오랜 시간 동안 필자와 에디터 사이의 관계로 교감했으며, 본인 자신이 이 분야 이론에 정통한, 전미 범위에서 손에 꼽을 만큼 빼어난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녀는 마이클 포터의 독보적 업적이 구축된 영역인 "경쟁"과 "전략"이라는 주제에 대해, 포터의 본령에 충실하면서도 실천적 의의가 훼손되지 않게, 최대한 쉽고 최대한 실제 적용에 도움이 되게끔, 평이한 언어와 풍부한 실례를 들어 서술합니다. 학문적 자격과 독자의 이해 편의, 두 가지 토끼를 모두 잡을 만한 역량을 갖춘 저자가 확실히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떤 이론이건 개념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잡지 않고서는 출발조차 할 수 없습니다. 조언 마그레타, 그리고 마이클 포터는 이 점에서 실용적인 태도를 취하며, "전략"에 대해 매우 간명한 정의를 내립니다. "전략은 곧 탁월한 성과를 내는 방법이다." 실제로 이 정의는 마그레타 편집장만의 의견이 아니라, 그 세련되고 주도면밀한 이론 전개가 정신의 특질을 이루는 포터 교수 본인이 직접 마련한 문장입니다. 다시 말해, 성과를 내지 못하는 전략은 이미 전략도 아니라는 뜻이죠.

여기서 우리는 책의 편제를 다시 주의깊게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책은 두 파트로 나뉘었는데, 1부의 주제가 "경쟁", 2부는 "전략"입니다. 그런데 위 문단에 소개한 "전략"의 정의는, 2부가 아닌 이 1부에 벌써부터 등장합니다. 왜일까요? 책의 목적도 실용에 있고 경영이론을 공부하는 것도 현실에서 성과를 내기 위함인데, 책의 내용을 전개할 때 구태여 형식에 얽매일 건 없죠. 이처럼이나 실용적으로 "전략의 정의를 경쟁 논의에서 벌써 내세우는" 이유는, 경쟁에 대한 논의부터가 전략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략 없는 경쟁은 토대 없는 건축이며, 이런 이유에서 저자(들)은 전략이 무엇인지부터 독자에게 제시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명제가 또 하나 등장합니다. 경쟁은 반드시, 라이벌들을 제압하고 경쟁력을 상실시켜야 승자, 최고가 될 수 있는 걸까요? 마이클 포터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경쟁은 결국 성과를 내기 위한 과정이지, 라이벌의 제압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가 대뜸 "성과"를 전면에 내세운 "전략의 실용적이고 간단한 정의"를 이처럼 책의 앞부분부터 가르치는 것도 다 이런 고려가 작용해서입니다.

자 그러면, 포터 교수와 마그레타 여사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보다 현명한, 그리고 실용적인 경쟁"은 무엇으로 내용이 채워져야 한다는 걸까요? 이건 문제 제기 단계에서 암시된 바와는 달리 그리 달달한 컬러는 아니고, 오히려 더 살벌한 제안입니다. 혹 실망할 분들이 있을까봐 미리 밝히는 건데요, 이분들이 제시하는 "성과를 내는 경쟁"은 결국 객관적, 절대적(다른 업체와 비교할 게 아닌)인 경쟁력 강화에 중점이 놓여 있네요. 고객, 소비자가 주도하는 시장에서 기업은 백날 "경쟁"을 해 봐야 손해이며, 설령 시장에서 선두 주자라 한들 허울뿐인 점유율만 높을 뿐, 수익, 성과가 안 납니다.

여기서 저자들은 (좀 진부한 감이 없지 않으나) 애플의 예를 들며, (전통적 경제학 용어를 빌리면) "독점적 경쟁 시장에서 대체되기 어려운 상품, 서비스를 생산하라"고 합니다. 이 역시 제가 저 위에 잠시 언급한 어느 일본분의 책에서 주장하는 바와 상통합니다. 라이벌을 제압하기보다, 라이벌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만큼 경쟁력을 키우라는 뜻입니다. 가격을 올려도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탑 독이 되라는, 더 독한 충고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이 역시, 라이벌에 대한 (소모적 구태를 통하지 않은, 진정한 선제적, 본원적) 제압임도 우리는 다 눈치챌 수 있죠. "도전의 불씨"마저 근절해 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지혜가 요구됩니다.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무조건 생산 단계에서 후려치기만 하면(내부 공정이건 외부 하청이건) 다 되는 걸까요? 이번 갤럭시노트 7 사태에서도 새삼 이 점이 주목 대상이 된 적 있죠. 마이클 포터는 이런 비용 절감 문제에 대해 근시안적으로 보지 말고, 오히려 어떤 과정에서 소모되는 비용이, 최종 생산되는 상품에 어떤 가치를 추가하는지를 잘 살피라고 합니다. 책에 나오지는 않으나, 이 점은 경영학보다 순수(협의의) 회계학에서도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는 이슈입니다. 특정 이벤트를 비용으로 계상(計上)할 것인가, 아니면 거꾸로 자산(의 일부)에의 평가를 할 것인가는 매우 까다로운 논의를 거치는 딜레마입니다. 물론 가치 평가를 허술히하면 기본적으로 보수성이 지배하는 회계 원칙이 훼손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이클 포터는 좀스럽게 "절약"에만 매달리는 기업가가 혁신을 이뤄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합니다. 제4장이 제2부("전략" 논의의 본격 전개) 처음에 자리하면서 "가치는 모든 전략의 시발점"으로 부각되는 건 마그리타 여사의 탁월한 센스입니다.

연속성은 장기 전략에 생명을 불어넣는 중요한 미덕이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흔히 전략의 유연성을 강조하며, 최초의 프레임을 너무 고집하면 이미 전략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고도 하죠. 저자는 이에 대해 반대합니다. 디테일에 변화를 주되 그 뼈대마저 교체되는 전략은, 이 전략을 접하는 외부(고객 혹은 라이벌)에 혼란을 주며, 끝내는 전략의 설계와 집행의 주체인 조직에게마저 타격을 입힌다고 합니다. 책에서는 시어즈(미국의 유명한 백화점)의 예를 들며, 실제로 저는 삼전의 최근 15년을 보면 마케팅 부문에서 뭔가 큰 혼란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특히 전략의 연속성은, 지금 그 조직이 무엇을 내세우고자 하는지, 그 "핵심 가치"의 설정에서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회사, 조직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합의가 유지되는 한, 가치의 전달 방법은 보다 유연한 모습을 띨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고, 단기 목표에 지나치게 집중하다 대세를 그르치기가 참 쉽습니다. "방법 이슈"가 아니라 온존해야 할 핵심 가치의 침훼(侵毁)에 이르는 실패가, 어느 기업에서건 비일비재한 게 현실입니다.

이렇게 전략의 얼개를, 그리고 특징들을 제시하면 "아 이건 마케팅에 관한 논의구나"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이(특히 현장에서 치열하게 뛰면 뛸수록)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오해를 막기 위해, 포터 교수는 "전략은 마케팅보다 (개념상, 그리고 실제 적용상) 고차원의 개념"임을 강조합니다. 이런 차별점을 분명히 부각하기 위해, "전략"을 논의하는 파트에서 "(핵심)가치"의 중요성을 그렇게나 강조한 것입니다. 조직이 생산하고 창조하는 가치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지는, 기업의 생존 전략에서 중핵에 놓여야만 하며, 마케팅 섹터란 이에 비하면 그저 지엽말단의 비중이고, 위에 쓰인 용어를 다시 끌어들이자면 "전달 방법"의 variation에 지나지 않습니다.

책은 말미에 포터 교수와의 인터뷰를 싣습니다. 특히 일반 독자에게 난해했던 개념과 이론 구조에 대해 본인의 명료한 육성으로, 다소나마 친절하게 "전달, 소통"이 이뤄져서 그를 존경해 온 독자들에게 특히 도움이 됩니다. 권말부록으로는 용어 해설, 그리고 (에디터다운 꼼꼼한 마무리가 돋보이는) 참고 문헌 목록이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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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항공 승무원 청소년을 위한 진짜 진학, 진로, 직업 멘토링 1
MODU 매거진 편집부.이정호 지음 / 가나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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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 승무원이란 직종에 대해 그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일반인들은 많은 오해를 갖거나, 반대로 어떤 환상을 품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고서 저도 비로소 안 사실이지만, 항공사 승무원 채용시 경쟁률은 거의 200대 1에 육박하기도 한다는군요. 그만큼 인기도 좋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이지만, 이 직업에 어떤 자질과 능력, 준비가 필요한지는 여전히 인식이 미진한 편입니다.

이 책은 현재 아시아나항공에 근무하는 두 분의 중견 승무원을 모시고 인터뷰 형식으로 승무원 직종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줍니다. 질문의 수가 많고 그 내용도 상당히 구체적이라서 이 분야 지망생들이 유익한 정보를 많이 얻어갈 것 같은데요. 인터뷰 대상이 된 두 분 승무원은 "환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 가장 모범이 될 만한 마음가짐, 외모, 자세, 능력을 갖춘 분들"로 보였습니다. 책에 실린 수십 컷의 사진을 통해 두 분의 얼굴을 보면 성실함, 근면함, 자상함, 그리고 자신의 직분과 사회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이 물씬 풍기는 모습들입니다. 앞서 승무원 채용 경쟁률이 200대 1에 가깝다고 했지만, 이런 치열한 관문을 통과하고도 각각 십여 년, 이십 년 가까이 근속하는 분들이시니 그 내공과 자질에 대해선 짐작이 되고 남습니다.

항공사 승무원은 일반의 오해와는 달리 1) 육체적으로 만만치 않은 노동 강도를 요하고 2) 다양한 손님들의 까다로운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긍정적이고 밝은 마음가짐이 절실하며 3) 비상상황이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는 근무 여건의 특성상 순발력과 전문 지식이 습득되어야 하며 4) 일정 기간 간격을 두고 지속적으로 자질이 평가되기에 전문직종으로 분류되는 직업입니다. 특히 2)와 관련, 많은 탑승객들이 4)에 대해 인식이 미진한 편이기에 이 직종의 고충을 배가하는 원인이 되죠. "사치"와도 거리가 먼 직업이라서, 특히 면세점 구매액 한도가 일반인보다 훨씬 못한 100달러라는 말을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분 승무원은 각각 사무장, 부사무장의 직급인 고참들이시라서 승무원이란 직종의 특성, 자질, 고충, 보람, 현황, 전망에 대해 핵심을 꿰뚫는다 할 시원한 설명을 해 줍니다. 아무래도 탑승 손님들 중 일부가 무례하고 거친 매너로 항의, 불평, 시비 등을 해 댈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토로하시는군요. 점프 시트에서 대기하는 모습을 보고 1) "일은 안 하고 가만 앉아만 있네?"라며 비꼬고 지나가는 이도 있고, 2) 승객 모두가 제 자리에 앉아야 이륙을 할 텐데 끝까지 비협조적으로 굴며 오히려 화를 내는 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나라에나 별의별 사람이 다 있기 마련이지만 사실 이런 특수한 유형은 우리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독 잦은 빈도로 노출되곤 하죠. 1)의 경우 자신이 월급 주는 입장도 아닌데 지적(같지도 않은 지적)을 할 이유가 없고(고용주라면 물론 업무의 성격을 알겠으므로 당연히 지적을 안 하죠), 남 일에 신경 안 쓰는 문화가 지배적인 곳이라면 나타날 수가 없는 행태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경력을 쌓은 분들이라 자신의 직역을 넘어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돋보이는 고백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륙 직전 쥬스를 서비스하는데 갑자기 기체가 움직이니 자세가 흔들려 쥬스를 쏟을 수밖에 없죠. 옷을 버린 손님은 불같이 화를 내고, 어떻게든 옷의 얼룩을 지워 드리겠다고 한 후 한참 뒤 세탁한 옷을 갖다 주자, 화를 낸 손님이 오히려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더라는 겁니다. 저는 이 경우 손님의 태도가 이해할 만한 반응이라고 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좀 기다렸다가 쥬스를 내와야죠!"라는 그의 지적은 상식으로 판단하건 법적 기준을 적용하건 타당한 항의입니다. 유능한 승무원이라면 당연히 고려에 넣어야 할 사항이었죠. 그러나 공공장소에서 다른 이들에게 폐가 될 수 있는 고성을 낸 건 그의 불찰이기도 합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절차를 밟아 해결될 수 있는 피해이니 말입니다. 이런 까닭에 자신의 잘못 역시 깔끔하게 인정한 건 역시 정중한 매너가 맞습니다. 이 손님의 태도와 케이스 해결에서 여러 가지를 배웠기에 해당 승무원께서도 이 일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특별히 언급한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많은 이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할 대목은 채용 절차에서 어떤 점을 어필해야 합격할 수 있냐는 점이겠습니다. 무엇보다 면접에서, 이 응시자가 항공 승무원 업무에 적합한 인재라는 점을 그 짧은 시간 안에 심사위원들에게 납득시켜야 한다는군요. 다른 회사, 다른 영역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특히 이 직종의 경우 "일에 적합한 얼굴인지 아닌지 보기만 해도 감이 오며, 만약 채용될 경우 어떤 패턴으로 업무에 적응해 나갈지까지 훤히 그림이 그려진다"고 할 정도라는군요. 면접이란 그만큼이나 중요한 절차이며, 혹 떨어진 응시자 입장에선 추상적 기준이라며 억울해할 수도 있겠으나, 해당 직역에서 오래 근무한 사람들의 "감, 촉"이란 절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전문가들의 직관이란 때로 모든 물리적 기준, 객관적 수치를 능가하는 타당성을 지닙니다.

모든 항공 승무원 지망생들이 부러워할 만한 경력을 가꾸어 온 두 분은 자신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를 털어 놓습니다. 자기 직역에서 버젓한 커리어를 구축한 이들이 (성장기 중)언제부터 직업상을 그려 나가기 시작하고, 어떤 배경을 가진 이들이 지원하게 되는지 매우 시사하는 바가 많은 대목이었습니다. 한 분은 김포공항 근처에서 자라났다고도 하시고, 아버님이 교사이셔서 책임감과 성실을 중요한 덕목으로 훈육받았다고도 하십니다. 두 가지 다, 특정 개인의 상황으로만 넘길 수 없는, 성공한 승무원의 전형적 성장 배경 요소로서 곱씹을 만한 대목이었습니다.

승무원으로 이분들처럼 성공적인 경력을 갖추려면, 무엇보다 성격이 활달하고 밝아야 합니다. 사교적인 품성으로 남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일에 닥쳐서도 감정적으로 거뜬히 소화해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분들 역시 어려서는 부끄러움을 잘 타고, 아무래도 여성이시니만치 남 앞에 나서는 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대학생 시절 여러 "알바직"을 거친 게 이런 사회성 함양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도 하는데요. 한 분은 통신사 프론트에서 방문 고객을 맞는 업무를 맡았는데, 이 체험이 이후 모르는 이들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 등을 씻어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시네요. 지원자들이 깊이 염두에 두고 곱씹을 부분입니다.

외국어 능력도 필요합니다. 승무원직은 아무래도 고객과 소통하는 일이고, 그 소통이 깊이 있을수록 유능한 평가를 받게 마련입니다. 만국 공용어인 영어 등에 능통하지 않고선 소통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두 분은 모두 아시아나 소속이지만, 한국인들이 외국의 타 항공사에 지원하기도 하고(이 경우 한국쪽 노선에 배치), 반대로 일본인, 동남아인 들이 한국의 항공사에서 승무원으로 근무하기도 합니다. 일어, 중국어를 잘하는 것도 유리한 조건이며, 실제로 토익 점수가 높거나 해당 외국어 구사 실력을 증명할 시험 점수를 갖추는 게 채용시에 호의적으로 평가됩니다.

승무원 업무 이해에 큰 도움이 될 여러 사진이 실린 게 장점이겠고요. 영화잡지 씨네21에서 이름을 자주 접하던 최성열 기자의 "작품"이어서 "과연!" 싶기도 했습니다. 두 분 승무원을 담은 여러 사진들은 그저 개인의 용모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업무와의 연계에 포커스를 둔 "자료"에 가까운 성격이라서 특히 유익했습니다. 다만 인터뷰이 두 분 모두 여성이시고, 이미 남성 승무원들이 많이 활약하는 현실을 반영해서 그쪽으로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소개했으면 어땠을지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제가 남자가 아니라서..."라는 솔직한 답변에서 친근감과 매력도 느껴졌지만, 남성인 대학생, 대졸자, 혹은 10대 청소년들도 이 책에 관심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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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넥스트 도어
알렉스 마우드 지음, 이한이 옮김 / 레드박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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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킬러 넥스트 도어", 즉 "이웃에 사는 살인자"에 대해선, 사실 이 소설 속에서, 최소한 양적으로는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습니다. 보통 이런 소재를 선택한 장르 소설에선, 이유 없이 희생자들이 죽어나가고, 독자와 소설 속의 다른 인물들에게 아직은 그 정체가 숨겨진 "킬러"가 조용히 자신의 독백과 동선을 이어 가고, 그를 쫓는 경찰이나 탐정이 별개 공간에서 자신만의 탐색을 벌이고, 새로이 희생자가 될 누군가가 등장해서 안타까운 죽음에 이르는 장면이 제시되고, 이런 여러 시퀀스가 교차되어 독자의 마음을 졸이는 게 공식 비슷할 겁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여러 인물들, 같은 다세대 주택에 거주하는 각 세대의, 그 처지도 다양한 인물들이 한 번씩 돌아가며 시퀀스의 중심을 차지하지만, 킬러와 그의 희생자들 중심으로 스토리가 펼쳐지지는 않습니다. 킬러는 물론 여러 "껀"을 해 내고 전리품들을 자신의 집에 잘 간직해 둡니다. 그가 전리품을 간수하는 방식이 다른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지만, 여튼 소설 막판에 다다를 때까지 킬러의 동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건 없습니다. 이 점이 특이하더군요.

이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인물들은, 살인 사건이나 범죄와 얼핏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아주 평범하고 때로 선량한 데다(선량하지 못할 때가 제법 많습니다) 상황과 환경에 치이고 상처 받고, 당장 내일의 삶도 장담 못하는 절박한 처지에까지 몰립니다. 킬러보다는 이런 평범한 주변 인물들이, 자신들의 특별한 사정 때문에 이런저런 곤란을 당하고, 한 건물에 산다는 점 외에도 여러 국면에서 삶의 색깔이 비슷한 처지끼리 모여 하소연도 하고 도움(자질구레한)도 받고 상처를 달래는 모습이 부각됩니다. 이런 일상적인(?) 구질구질함 속에, 조용한 킬러가 조용하게 자기만의 열띤 작품을 완성하는 장면이 스리슬쩍 삽입되는데, 대부분의 독자는 이런 끔찍한 범죄자에 시선을 주기보다(작가가 혹 잊을까봐 독자에게 자주 찔러 주는데도) 이들의 수다와 좌절, 좌충우돌 소동에 더 몰입하게 됩니다.

이 건물에 거주하는 이들, 셰릴, 콜레뜨, 할머니, 망명자 호세인만 놓고 보면 3/4가 여성인데다(ㅎㅎ), 잘생긴 남성이긴 하지만 망명자라는 사실부터가 약자임을 드러내는, 뭔가 사회적 취약 구조가 어떤 식으로든 작용해서 그 열악한 위치를 마련한, 일종의 희생자들입니다. 그러니 작가는, 킬러가 소녀들을 죽이고 끔찍한 콜렉션을 만들듯, 영국이라는 웃기는 나라(작중에 실제로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가 마치 저 음산한 킬러처럼, 이들 불쌍하고 비참한 이들을 양산해 내었다는 암시를 하는 셈입니다. 작가의 정치 성향이 대단히 리버럴, 진보 쪽임을 눈치챌 수 있죠.

킬러는 드러나지 않게(정말, 내내 존재감 없다가 마지막에 확 부각될 뿐입니다) 범죄를 저지르고, 범죄를 저지르는 바는 없으나 추한 모습 못된 마음을 만방에 전시하며 "못난 사회 구조"의 얼굴 노릇을 하는 로이 프리스는 킬러의 범죄 온상, 그리고 저 약한 여성들의 난관에 대해 발판을 마련하는 역할입니다. 독자는 킬러보다 이 120kg에 육박하는 탐욕스런, 버릇 없는 중년 남성에 대해 더 적의와 경멸을 보낼 만한데요. 이건 다분히 작가의 의도입니다. 드러난 나쁜 짓은 로이 프리스, 안 드러난 진짜 나쁜 짓은 "그 킬러".. 여기에,  작품 중간쯤에 역시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중년 사내가 셰릴의 성을 사려다 지갑을 뺏기고 나중에 셰릴을 폭행하는 에피소드가 끼어드는데, 이 역시 사회의 무능하고 추악한 면을 중년 남성이란 배역을 빌려 표현하려는 작가(여성입니다)의 계산이죠.

영화로 잘 만들기만 하면 꽤나 신선한 충격을 줄 드라마가 될 것도 같습니다. 스티븐 킹이 "지옥과도 같은 무서움, 최고의 캐릭터"라고 평했다는데, 한 챕터에서 어느 캐릭터의 1인칭 시점으로 그의 생각을 독자 앞에 다 드러내고, 다음 챕터에서 철저히 객관화한 그 캐릭터의 행동 결과(대부분은 비참하게 실패한)를 충격적으로 제시하는 기법 등은 스티븐 킹이 애용하는 테크닉이기도 합니다. 저 말 중에 "지옥처럼 무섭다"는 건 좀 생각할 부분이 있는데요. 셰릴이나 콜레트가 이 소설 속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은, 현재 온갖 사회 문제와 경제난에 신음하는 런던 안에서 상당수 시민들이 실제로, 실제로 치러 내고 있는 삶의 모습이며, 이것 때문에 지난해에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잘생긴 호세인을 두고 "목구멍에서 h발음을 하는 동양 남자"라는 구절이 있는데,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물론 유럽인과 거의 차이 없는 음가의 h발음을 합니다. 이란과 아랍에선 가래침을 뱉어내듯 조음하는 [kh] 음소가 따로 있는데 이걸 지적한 거고요. "푸주한의 딸(캐릭터 본인의 표현)" 베스타 할머니가 돼지 로이 프리스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대목에서 이 자가 왜 비뚤어진 인성을 갖게 되었는지 배경이 나옵니다만 제 생각엔 느닷 재산을 상속받았다는 설명만으로도 충분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회의 모순상이 여전히 개선되지 않기 때문에 영국에서 진보 좌파 진영에 표가 몰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스릴러 장르 특유의 박력이나 짜릿한 재미보다 더 마음 속에 상기시켜 주는 좀 특이한 독서였다고 개인적으론 평가하고 싶습니다. "에필로그" 장이 따로 마련되었는데 바로 뒤에 다시 "그 후의 이야기"를 배치한 것도 작가의 의도에 대해 곱씹게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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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는게 만드는가
아라 노렌자얀 지음, 홍지수 옮김, 오강남 해제 / 김영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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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만 얼핏 보면 "신의 존재 여부"를 과감히 논하거나, 21세기에 접어들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는 "유신론 vs 무신론"의 현황을 소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읽어 보면, 그런 추상적이고 어차피 똑떨어진 답이 나오기도 힘든 물음에 시지프스의 도로(徒勞)처럼 무익한 수고를 벌이는 게 아니더군요. 오히려, 아주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로, 때로는 특징적 혹은 무작위로 뽑힌 집단을 두고 벌인 실험을 통해, 중립적이고 과학적 접근으로 "왜 신은 우리 인간의 관념 속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나"를 해명하는 내용입니다.

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않고는 차라리 부차적인 이슈입니다.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면(아주 어리석다든지 하는 이유로), 그 신은 속타서 죽을(?) 지경이겠지만 여튼 인간의 시선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인간은 이런 번거롭고도 부자연스러운 개념을 만들어 내어 자신도 괴롭히고 안 믿겠다는 다른 동족까지 괴롭혔는지, 그 해답이 그런 이유에서라도 필요는 합니다.

일일이 인간사에 끼어들어 악당을 처단하고 불쌍한 이들을 구제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적극성을 보이지도 않는, 냉정하고 초연하며 공감도 안 하면서 전지전능하기만 한 신, 따라서 그 가시적 흔적을 확인도 할 수 없는 저런 신을 왜 인간은 숭배하는지, 지극히 이기적이고 생존 본능에 충실하게 진화해 온 인간치고는 썩이나 안 어울리는 이런 선택("관념론적 신앙")을 왜 거창하게 해 온 건지, 이 책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하나하나 짚어 나갑니다. 그렇다고 이 책은, 그저 과정의 기술에 그친다거나, 최종적인 해답은 독자가 스스로 내 보라며 무책임하게 발을 빼지도 않습니다. 그 나름 대담한 결론까지 낸다는 점에서 독자는 더욱 혹해서 읽어 갑니다. 그리고 제법 알찬 생각거리까지 건지거나, 더 나아가 저자들의 결론에 동조할 수도 있습니다. 논쟁적인 주제를 담았으면서도 흥미롭고, 논의의 과정이 공정하면서도 개성이 뚜렷하기란 그리 쉬운 과제가 아닙니다.

첫째 명제는 유신론/무신론 여부에 관계 없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종교, 특히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윤리적 의무를 부과하는 믿음 체계는, 일일이 마을의 원로나 실력자가 개개인의 뒤를 쫓아 다니며 도덕을 준수할 수고를 덜어 줍니다. 사회가 청동기 시대를 거치며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1차 집단의 윤리가 다양한 개성과 선택을 규율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지만, 일탈 분자의 질서 파괴 행위를 작건 크건 용인하면 공동체 전체의 존속이 어려워지는 건 당연합니다. 종교, 특히 신의 존재를 가정(이 아니라 확신)시키고, 설령 현장에 감시하는 (사람의)눈길이 없다 해도 저 위에서 전지전능한 이가 지켜 보고 있다고 환기시키면, 그저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보다야 훨씬 효과가 강력하다는 겁니다. 요즘 같이 개명한 세상에서는 우스운 아이디어처럼 보여도, 역사 시대 초기 전체가 공존할 지혜가 필요한 단계에선 이게 꽤나 효율적인 발상이었고, 실제로 효과를 크게 보았을 터입니다. 우리 종이 지금 이 정도로나 생존을 이어 왔고 현재와 같은 번영을 누리는 것도 저런 어설픈 믿음 덕분인지도 모릅니다. 소수의 범죄자(어리석기까지 한)가 공동체 전체를 망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 아닐까요?

종교의 효과가 개인보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건 쉽게 말해 이런 뜻입니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개인이 종교적(이라기보다 사회적) 의무를 잘 지킨다기보다, 그저그런 껄렁한 신자가 어떤 특별한 분위기가조성되었을 때 이런 의무를 더 확실히 지킨다는 겁니다. 즉 종교는 개인의 생각이나 마음을 일일이 고쳐 먹게 한다기보다, 불특정 다수가 평균적으로 나쁜 마음을 덜 먹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거죠. 이때 저자가 강조하는 건, 이런 기능은 종교적인 기능이라기보다 차라리 친사회적인 기능이라는 겁니다. 종교는 이 경우 다분히 실용적인 효용을 창출하며, 여기서 강조하는 도덕은, 결국은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게 돕는 공리적 메커니즘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누가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시스템 한 구석에 고장이 났을 때 보수 없이도 자발적 봉사에 나서는 건 그게 동기가 종교적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으며, 결국은 개인의 행동으로 사회가 건전한 질서로 복귀한다는 그 실용적 결과가 중요하다는 뜻이죠.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구성원들의 바른 행동으로 사회의 질서가 잡히는 그 결과에 주목하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가 내내 구사하는 "친사회적"이란 용어는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닙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보면 "천하고 가난하며 사악한 종자들에게 죽어서 지옥 간다는 협박도 못 하면 어떻게 교회가 유지되겠소?"라는 어느 성직자(...)의 말이 나옵니다. 여튼 이런 사후 세계에의 엄혹한, 혹은 한없이 희망적인 기제가 개념상으로 구축되면, 사람들의 행동은 아무 현세적 보상이 기대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친사회적(결과적으로는)"으로 재편됩니다. 처벌은 꼭 현세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며, 존재의 필멸성, 유한성이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머리 속에 인식된 이들에게 "지옥의 위력"은 큰 효과를 발휘합니다. 혹은, 현세의 처지에 큰 만족을 못 느끼는 젊은이들에게 "신(사실은 이를 빙자한 권력자의 야욕)의 미션을 수행하면 지복(至福)의 쾌락"이 기다리고 있다"는 미끼로 테러리스트의 길을 부추기는 집단(IS 등)도 있습니다. 샤리프와 렘툴라의 실험 보고서가 이를 직접 표명하지는 않아도, 어쩌면 이 역시 "친사회성 증대"의 범주로 판단하면 (테러리스트= 반인륜 이란 이유에서) 다시 타당성이 확인되는 셈입니다.

무신론자는 어떤 경우에도(흑인이나 [미국에서는 소수파인] 가톨릭이나, 여성이나, 심지어는 모르몬, 동성애자보다 더) 나쁜 취급, 불신을 받는 게 흥미롭다고 저자들은 지적합니다. 어떤 기독교도는 "설사 내가 다니는 교회도 아니고, 다른 교파로 적대한다 해도, 그가 아무 것도 안 믿는 사람보다야 더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같은 말을 합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고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이는 종교 관념이 희박한 동양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 주장 같습니다. 한국이라면 오히려 무교라고 밝히는 이들이 더 합리적이라는 인상도 주고, 기독교라 해도 자파에서 이단이라 점찍은 이들에게는 무교인(잠재적 고객)보다 더 가혹한 대접을 하는 게 현실입니다.

이 책에서 드는 예 중 가장 재미있는 게 "코코넛을 운반하는 운전수들"입니다. 힌두의 신전까지 코코넛을 그 원산지로부터 옮겨 가야 하는데, 중간에 가로채거나 의무를 태만히하는 이도 없이, 일단 앞 "주자"로부터 바톤을 넘겨 받은 모든 운전수들이 착실히 이를 (아무 대가 없이) 운반핝다는 겁니다. 인도 사회가 정직하고 이들이 교육을 충분히 받아 명예를 지키는 까닭일까요? 전혀 아니겠죠. 그 비결은 오로지 "마 타리니 신이 무슨 응보를 내릴지 몰라서" 같은 아주 원초적인 두려움입니다. 이처럼 종교적 신념은 경제 질서를 원활히 작동시키는 핵심 팩터이기도 합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예전에 사회를 선진 질서와 그렇지 못한 혼란으로 양분하는 원인으로 "트러스트"를 꼽은 적이 있죠. 이런 "신뢰"가 종교적(거의 미신적)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도, 이성적인 형량 과정을 거쳐 자발적으로 이뤄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사회 질서의 고도화 단게에 차별이 생기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열등한 개인들의 예를 들며 "이런 문제도 하나 해결 못하는데 A의 효용이 대체 무엇이냐?"며 유치하고 미숙한 불평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심지어 자신의 예를 들며, 나 자신이 효과를 못 봤으니 아무 필요 없는 것이라며 일반화의 폭주 그 끝장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 책에 실린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을 인용하여, "종교가 있어도 이 모양인데 종교가 없으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관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은 "신이 창조하여 완전무결한 인간이 오늘날 이지경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기보단,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이 정도까지 발전한 게 어디냐며 대견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훨씬 건전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이 있고 없고, 어느 종교가 그르고 옳고가 문제가 아니라, 종교든 뭐든 어떤 제도와 신념의 도움을 빌려 인간이 얼마나 나은 삶(물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을 살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그 공리적 결과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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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빈 동지 - 세상이 변화하기를 바라는 열망, 그 중심에 서다
로자 프린스 지음, 홍지수 옮김 / 책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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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는 트럼프 같은 국외자가 주류, 그것도 보수 정당 후보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었지만, 고령의 좌파 아웃사이더가 경선 과정에서 끝까지 유력 지지세를 유지하며 존재감을 확인시켰다는 점이 아마도 긴 시간이 지난 후엔 더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질 것 같습니다.

버니 샌더스 노인은 정치에 입문한 지 삼십 년이 되어가며, 거물급 정치인으로 발돋움한 지는 겨우 십여 년 정도지만, 그와 나이 차가 8년 정도 나는 어느 영국의 외골수 진보 성향 정치인은 그의 나이 삼십 대 중반부터 내내 의원 경력을 쌓으며 지금껏 근 사십 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궁을 지켜 왔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낙선 한 번 없이 의원직을 유지한 점도 대단하지만, 도대체 타협을 모르며 입문 당시의 노선과 신조를 거의 원색 그대로 지켜 왔다는 사실이 더 놀랍습니다. 이분은 이처럼 한사코 순수한 소신을 내세우며, "국회의원의 존재 이유는 어디까지나 자신을 뽑아 준 지역구민을 정직히 대변하는 데에 있다"라는 원칙만을 최우선으로 강조했고, 지금도 그런 태도에 변함이 없습니다. 진보정당이라고 해서 이런 원칙파를 언제나 우대하는 게 아닙니다. 그의 고집이 너무도 강했던 터라, 지난 수십 년 동안 노동당의 주류, 수뇌부는 이분에게 그 연륜에 맞는 당직이나 정부 요직(2차 대전 이후 노동당도 오랜 기간 동안 정권을 잡았습니다)을 맡긴 적이 없습니다.

"저 동지가 당수 자리를 언젠가 맡을 날이 있을까요?"
"예끼, 농담도 분수가 있어야지."

"왜 그렇게 일반 유권자들과 오래 시간을 끌고 대화를 해? 지금 '제레미 짓' 하고 있냐(donig a Jeremy)?"

이처럼, 소신의 순수성을 지나치게 고집해도, 같은 진영에 자리한 동지들로부터조차 소외되기가 쉬운 게 세상사의 공통된 이치입니다. 그런데 그가 정치를 시작하고 근 사십 년이 가까워오는 지금, 헤럴드 윌슨, 제임스 캘러헌, 닐 키녹, 존 스미스, 그리고 고든 브라운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거물들이 이 거대 진보 정당을 주름잡았지만, 이분은 한직이든 문제아 역할이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의석 한 곳을 지키며 동시에 노동당의 오랜 가치와 이념을 수호해 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작년(2015) 9월, 이분은 노동당 안에서 최고급 의복을 빼 입고 출신 학교의 세련된 어투를 자랑하고, 평민들은 알아 들을 수 없는 미사여구를 입에 올리며, 신사의 우아함으로 좌파의 가치를 수호한다던 위선적 거물들 사이에서 그저 농담거리로만 여겨졌던 일을 드디어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전당대회에서 최다 득표를 얻으며 자신이 40년 동안 몸 담았던 당의 대표가 된 것인데요. 그는 지난 달 열렸던 재신임격 투표에서 또다시 재취임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이분의 이름은 제레미 코빈. 현재 영국의 근로 대중과 양심적 지식인들 상당수의 희망으로 떠오르는 정치인이죠.

이 책은 제레미 코빈의 일대기와 그에 대해 바르게, 혹은 그릇되이 알려진 사실들에 대한 차분하고 공정한 검증을 담습니다만, 반드시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일단 특정 이슈가 거론되면, 어린 시절의 제레미와 현재의 코빈, 혹은 청년 시절의 그가 어떤 입장이었는지 교차해서 조명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제레미 코빈 노동당 당수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독자들뿐 아니라, 시민의 참여를 지향하는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그 구체적 이슈에 대해 저 서유럽 선진국의 좌파 정당, 그 정치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싶을 이들에게 아주 유용하겠습니다. 이 책은 그래서, 인물에 대한 책이자 이슈에 대한 책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노동당의 골수 좌파(좌파 중의 좌파) 한 인물을 통해 특히 1980년대(대처 수상 집권기) 노동당 전체의 역사를 둘러보고, 당연하게도 영국 최근세사를 동시에 분석하는 의의도 갖습니다. 책 맨앞에는 역자님이 간단하게 영국 정치 제도에 대한 개념잡기식 설명을 붙인 글이 나오는데, 정치제도나 헌법 사항에 대해 밝은 독자라 해도 최근의 개혁 과정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특히 2010년 이뤄진 법 개정은 영국의 내각제가 독일식의 "건설적 내각불신임제"에 꽤 많이 다가간 흔적이 역력하기에, 어떤 과정으로 이런 혁신이 이뤄졌는지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물론 이런 개혁은 상당 부분이, 코빈 같은 소신파 정치인들의 분투와 노력에 빚진 바 큼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제레미 코빈은 보통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뜻밖에도 현실 정치에 몸 담은 이들 중 가장 좌파적인 스탠스를 고집하는 인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코빈 가가 어떻게 중산층 가문으로 성장하였으며, 조부모와 부모 대에 윤택한 환경을 형성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밝힙니다. 노동당 유력 인사 중에는 이튼 스쿨, 옥스브리지 출신도 많고, 그 중에는 가문 대대로 세습 귀족을 지닌 이들조차 상당수입니다. 그러나 제레미 코빈처럼 도대체가 타협을 모르는 원칙을 고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요. 그의 먼 조상 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짐작대로 어려운 여건에서 고된 노동, 혹은 기술 발휘로 착실하게 돈을 모은 이들의 후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풍이나 집안 내력이란 한 사람을 판단할 때 결코 무시할 수 없으며, 저런 환경에서 성장한 이였기에 체제와 시스템을 마냥 긍정적으로 보기란 태생적으로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레미 코빈의 부모는 흥미롭게도 집안, 특히 어머니 쪽 가문의 만만찮은 반대를 무릅쓰고 맺어진 연이더군요. 이 부분 관련 저자의 집요한 취재와 조사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이 부부는 특히 금슬이 좋았는지, 제레미의 손윗 형제 이름을 일일이 익혀 두느라 잠시 독서 속도가 느려질 정도였습니다. 피는 못 속인다고 이분의 형들 역시 정말 성격이 만만찮은 분들이고, 한번 누구한테 원한을 품었다거나 반대로 호의를 가졌다 하면 그 감정을 끝까지 가져가는 타입들이더군요. 전형적인 영국 중산층의 넉넉한 지원 덕에 그는 좋은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그의 타고난 기질은 주위와 융화하는 과제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머리가 좋지는 않았으나 대신 매사에 열심이고 진지했다." 이런 평가가 말해 주듯 그는 가슴 속에 담아 둔 소신이 새로 습득하는 지식을 무척 까다롭게 필터링하는 내면의 구조를 가진 인물이었고, 이런 까닭에 공부를 잘하지 못했으며, 결국 졸업도 못 하고 사회로 나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행로와 선택에 아무 미련도 갖지 않는 그였으며, 우리들도 당연 그라면 그러려니 하고 넉넉한 이해에 도달합니다.

제레미 코빈 같은 타입이 이성을 사귈 때는 어땠을까요? 유복한 집안에서 마련해 준 사회 진입의 발판을 잘 활용하지도 못한 채 불쑥 성년을 맞은 청년을, 그 어떤 여성이 호의적으로 봤을 리 만무할 것 같지만, 그의 첫째 부인 제인 채프먼은 "성실하고 신념에 불타는 남자였으며, 당시에는 외모도 준수하게 보였다." 라고 회고합니다. "첫째 부인"이라는 타이틀에 너무 구애받을 건 없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원래 이혼과 결별도 쿨하게 이루는 게 오랜 전통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고 예전에 이희호 여사가 "제가 보기엔 매력적이었어요." 라며 KBS 아침마당 프로그램에 나와 술회하고, 방청객들이 큰 웃음을 터뜨리던 장면이 기억났습니다. 제가 보기에 책 표지에 나온 사진, 그리고 유튜브 등에 올라온 영상에서 그의 모습은, 노인치고도 준수하며 위엄이랄까 인생을 알차게 살아온 이들 특유의 건강함이 물씬 풍기는 듯합니다. 뭐 어때서 그러시는지 ㅎㅎ

제레미 코빈 하면 그 과격한 소신에 걸맞게 행동거지나 정치 스타일도 꽤나 단선적이고 다변일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이런 선입견은 그를 직접 만나본 이들에 의해 여지없이 부정됩니다. 그는 심지어 첫째 부인과 헤어질 때에도, 직선적이고 격정 넘치는 상대의 의견 개진에 일절 응하지 않은 채 조용히 "반대"의 뜻만 표시하고 보내 줬다고 하는군요. 의원이 되고 나서 그의 입장에 반대하는 정치인이 "당신 내가 전직 프로 권투 선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라며 위협적으로 나오자 "나는 프로 달리기 선수라고 하죠."라며 그 자리를 그냥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그는 토니 벤 같은 좌파 거물을 우상으로 삼았지만, 자신은 말도 서투르고 사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부족한, "전형적인 지방 의회 의원이나 하면 딱 맞을 타입"이었다고 합니다.

과시형 인물은 다변에다 방대한 지식을 과시하며 상대를 압도하려 애쓰는 게 보통인데, 이 제레미 코빈은 정확히 그 대척점에 위치한 사람이라 볼 수 있죠. 이 제레미 코빈이 정치를 갓 시작한 하원의원 시절, 대처 수상이 출석한 자리에서 직접 그녀에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취임하기 전 2700명도 채 안 되던 노숙자가 지금은 27,000명을 헤아리는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에 대한 그녀의 답은 "이즐링턴 같은 곳의 지방의회가 빈집을 활용하는 데 서툴러서 아닐까요?"였는데(이때 노동당 의석에서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고까지 책에 다 나옵니다), 이 말은 중앙정부 측의 반대당 집권 지역 실정에 대한 독설일 뿐 아니라, "지방의원 깜냥밖에 안 되는 자가 의회의 존엄도 모르는 무슨 턱도 없는 원색적 발언이냐"는 대처 수상의 불편한 심사가 드러난 발언이기도 하죠.

제레미 코빈은 이 책에도 나오는 것처럼, 노동당 내 주류 인사들에 의해 "출당"이라는 큰 위협적 조치를 당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대의정치는 본디 "무기속위임"이기 때문에, 지역구민의 개별 의사 변경(그런 게 측정 가능하다면)에 일일이 구애받을 필요는 원칙적으로 없기는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코빈은 그런 태도야말로 정치인의 무책임과 위선을 폭로하는 악폐라고 여겼기에, 언제나 지역구민의 의사를 현지에서 청취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고 실천에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런 게 당시 노동당 수뇌부의 눈에 아주 거슬렸던 겁니다. 여튼 자신이 몸 담고 자신의 자아를 확장하여 종신토록 헌신하고자 하는 당(黨)이 그 충의를 고깝게 본다면 이런 것만큼 당사자에게 서러운 일이 또 없을 겁니다. 앞서 말했듯 그런 전횡을 휘두르려 한 "높으신 분들"은 지금 간데없고, 백오십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노동당의 지휘와 기치는 지금 그의 몫입니다.

제레미 코빈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인물로 유명합니다. 소위 패션 좌파라고 부를 수 있는 인사들의 특징을 보면, 귀족이나 중산층 출신이면서 의식적으로 노동자 말투를 꾸며내어 대화하고 연설하는 타입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레미 코빈은 자신이 중산층 출신인 사실을 타인이 보기엔 필요 이상으로 부끄러워하는 듯 보였지만, 그렇다고 그를 애써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는 게 특이합니다. 참고로 코빈 전 전 대에 노동당 당수를 지낸 고든 브라운 같은 경우 너무 티가 날 만큼 옥스브리지 출신이라 이것 때문에 표가 깎일 것을 우려한 이들이 있었을 정도였죠.

제레미 코빈의 한계 중 하나로 지목되는 게, 그가 좌익에 입문할 때 지배적인 분위기가 그랬던 것처럼, EU(당시에는 EEC)에 대해 지나치게 적대적인 태도라는 점입니다. 이번에는 그는 브렉시트에 찬성했는데, 이는 주류 진보 진영의 스탠스와 동떨어진 태도일 뿐 아니라,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혐오스러운 구태"로 지적되기까지 합니다. 사실 이 점은 그의 나이(그가 속한 세대)를 감안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닌데, 어지간히도 한번 옳다고 마음 먹은 소신을 안 바꾸는 그의 퍼스낼리티를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긴 합니다. 그가 청년기를 보낼 무렵이면, 성장의 한계에 직면(특히 광대한 시장과 자원을 보유한 미국과 대조할 때)한 자본가들이 정치인들과 손잡고 저개발국의 잉여 저가 노동력을 흡수하려 고안한 장치로 시작한 프로젝트이긴 합니다. 그러나 지금 EU를 이렇게 인식하는 측은 거의 아무도 없고, 오히려 진보, 리버럴들이 차별 없고 국경 없는 세상을 이루려 활용(역이용?)하는 마당이 된 게 대세입니다.

한 인간에 대해 그 진실성과 깊이를 가늠하려면, 말로 내뱉은 바를 그의 일상과 삶 속에서 얼마나 실천을 해 내는지를 보고 판단하는 게 (가혹할 수는 있어도) 가장 확실한 기준입니다. 이런 기준에서라면 우리의 "코빈 동지"는 정치인에게 기대할 수 있는 중 가장 완성된 인격자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동료, 혹은 적대 진영의 인사들이 그를 놓고 평가하는 말 중 일관된 게 있습니다. "그가 이상으로 삼고 내세운 주장들은, 당시에는 아무도 동조자가 없었으나, 지금 돌이켜 보면 어느새 보편적 공감의 가치들이 되었다." 바로 이런 게 진보(progrssive)의 본래적 정의이며, 도덕적 기반이자 존재 이유입니다. 토니 블레어가 제3의 길을 내세우며 모두의 기대를 모았을 때, 자신의 자녀를 고급 사립 학교(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에 보낸 게 들통나자 많은 이들이 지지를 거두었습니다. 코빈은 반면 정색을 하고 공교육을 옹호하며 자녀에 대해서도 이 원칙을 그대로 적용했는데, 심지어 그는 (자녀가 아니라 아예)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예외가 없었으니(ㅎㅎ) 말 다했죠. 과연 우리 같으면 이런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산다며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할 수 없기에 국내, 심지어 국외에서조차 이런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에게 무한한 갈채를 보내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 표지만큼이나 발갛게 상기된 가슴으로 책을 덮을 수 있는, 독자를 부끄럽게, 동시에 뿌듯하게 만들어 주는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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