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불멸주의자 - 인류 문명을 움직여온 죽음의 사회심리학
셸던 솔로몬.제프 그린버그.톰 피진스키 지음, 이은경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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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두고 흔히 "필멸의 존재"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에 대해 어떤 식으로건 저항하려고 듭니다. 이 책의 제목 일부에는 "불멸주의자"라는 개념이 쓰이고 있는데요. "~주의자"가 있다면 "~주의"도 이미 정립된 용어가 있다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책에서 분명한 출처 제시와 함께 쓰인 용례로는, 우리가 잘 아는 앨런 해링턴의 <불멸주의자>가 있을 뿐이고, 워낙 광범위한 출전과 실증 연구 결과들을 인용하는 이 책의 부지런한 태도가 꼭 아니었다고 해도, 다른 쓰임새나 맥락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불멸주의자"는 해링턴의 그 함의, 혹은 명시적인 정의에 따라 이해하면 충분하겠고요. 해링턴의 그 책이 다소 난해한 것과는 달리 이 책은 너무도 재미있게 쓰여져 있습니다. 어찌나 재미있는지, 이 책에서 아무리 설득력있는 결론을 제시한다고 해도, 우리가 필멸의 존재라는 그 사실이 조금도 극복되거나 부정되지 않는다는 냉혹한 진리를 잠시 잊을 만큼입니다. "필멸이 필멸인 줄 깨달음으로써 오히려 필멸의 비극성을 잊는다"는 말이 역설적으로 들리기에 충분한데, 아닌게아니라 이 책의 주요 목표 중의 하나가 이 대목을 재미있게 짚는 것이기도 합니다.


책의 첫 부(部)가 "공포 관리"라는 주제라고 나와서 이게 대체 어떤 내용을 다루는 건가 궁금했었는데요. 여기서의 "공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리킵니다. 생존을 위해 구비된 강한 체력, 치명적 살상력, 회복 능력 등을 가진 동물과는 달리, 우리 인간은 육체적 자질로만 따지만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이라서인지, 다른 동물에게는 과연 그에 대한 어렴풋한 자각이라도 있을지 의심스러운 "죽음에 대한 강렬한 의식"이 존재하고, 일상에서건 특별한 위기 상황에서건 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통제할 필요가 존재했다는 거죠.

어떻게 하면 "나의 육신이 사멸하고, 그에 따라 나의 정신까지도 완전히 없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잘 달랠 수 있었을까요? 우리의 조상들뿐 아니라 그 조상들이 체득해 지금의 우리들에게 전수한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저자들은 일단 "자존감"을 꼽습니다. 이런 자존감은, "나에게는 연약한 육신 외에 그 무엇이 있음"을 스스로에게 강렬히 납득시켜, 죽음 그 자체, 혹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다른 위협, 다른 생명체 앞에서 인간을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다만, 책에서는 특별히 첼리스트 요요마의 예를 들어, 진정한 자존감이 잘 형성된 인간은 딱히 거만하지도, 딱히 비굴하지도 않은, 자신 내면의 평안을 유지할 정도로만 긍지를 가진 유형임을 역설합니다. 무작정 허장성세를 벌이고 거짓말을 지어내는 식으로 과잉행동을 벌이는 인간은, 자존감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었기에 이 같은 특성을 보인다는 거죠. 감정의 통제를 수단으로 "죽음에의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을 개발했다는 저자들의 주장에 혹 미심쩍어하는 분들은, 우리가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는 우리의 연약한 운명"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는 우리의 내면이 과연 무엇 덕분에 그럴 수 있는지 곰곰 생각해 보시면 납득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 자존감만으로는 이런 공포를 완전히 떨치기에 불충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유한한 개체의 숙명을 넘어 더 긴 단위의 생존과 번영을 구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상징적 불멸성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데에까지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인간은 먹고사는 문제가 아직 해결되기 이전에도, 사후 세계의 이미지를 애써 그려낸다거나, 죽은 동료나 조상들의 안위를 기원하는 의식(儀式)을 행했다는 뜻입니다. 본격적인 도시 시설의 정립보다, 죽은 자를 기리는 사당들의 건립이 먼저라는 고고학적 증거는 우리에게 많을 것을 시사합니다. 동물들이 당장의 허기를 면하는 일 외에 어떤 다른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모습을 보신 적 있습니까? 인간은 이 "죽음에의 공포"가 어떤 식으로건 마음 속에서 진정되지 않으면 다른 일을 못하는 그런 존재였던 겁니다. 여기에서 종교, 예술 등 문화의 상당 부문이 파생하고, 예컨대 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대사를 앞두고서도 군사 훈련보다 제의에 더 신경 쓰는 특이한 풍습이 생긴 거죠. "내가 내일 싸움에서 죽어도, 나는 그저 죽어 사라지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존재할 것이다!"

내가 죽고 나서도 존재가 사멸하지 않고, 천국이나 그 어떤 피안에서 복락을 누릴 수 있으려니 하는 믿음만으로는 그러나 뭔가 부족합니다. "자존감"이란 외모의 아름다움, 성격이나 자질의 긍지 등에서 유래하는데, 외모란 나이가 들면 시들게 마련이고, 다른 정신적 특질은 (때로는 생존 경쟁에서 심각한 위협이 될 수도 있을) 타인들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확고한 근거를 갖기 힘들죠. 물론 참된 자존감은 내적인 잔잔한 확신이지 타인의 인정 여부에 달린 게 아니긴 합니다만 여튼 이것만으로는 유한한 존재의 숙명에 대한 절망감을 완전히 떨치기 힘듭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신념, 살면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관 따위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추상적이긴 하나 때로는 구체적 사물보다 더 강렬한 위력을 발휘하는 이런 가치관상의 여러 이념들은, 인간이라는 종(種)이 지상에서 없어지지 않는 한 지속되는 게 당연합니다. 불멸의 신념, 가치를 위해 살다 죽은 이들은, 많은 이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이런 기억 속의 칭송이 육체적 삶의 짧은 수명을 보상해 주는 것으로 여기기에 이릅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하지 말라!"

책에서는 그런 까닭에, 어떤 인간(들)이 경우에 따라 다른 신념,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게 대하는 동기가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아메리카 대륙(뿐 아니라 여느 다른 식민의 예에서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에 처음 정착한 유럽인들은, 그들을 환대하고 아무 생존에의 위협이 되지 않았으며 지극히 선량한 품성을 지닌 원주민을(모두가 다 그랬다는 게 아니라 특히 그런 특성을 지닌 종족까지도) 잔인하게 학살하고, 학살하면서 쾌감을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이 책의 태도에 따르자면, 자신들이 소중히 믿고 받들어온 가치에 반하는 삶(그것이 더 우월하고 더 성숙한 것임에도)을 사는 타인들이, 이제 자신들의 가치관을 우습게 여길 수 있다는 사실이, 직접 생명에의 위협을 가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분노를 자아내었다는 겁니다. 중근세 유럽이나 인도, 중동에서 왜 아직도 종교로 인한 생사에의 분쟁이 잦은지도 이것으로 설명이 가능한 게, "죽음에의 공포"를 떨치는 수단이 그들에게는 종교 외에 딱히 마련된 바 없었다는 뜻입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으니 죽자고 싸움이 날 밖에요. 이런 이론이라면, 상대가 자신의 신상을 위협한 것도 아니고 감정상의 상처를 줬을 뿐(?)인데도 죽기살기로 칼부림이 나는 이유도 다 설명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숙명적으로 "슬픈 불멸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력을 통해 불멸의 존재가 될 수만 있다면 전혀 슬퍼할 이유도 없거니와 노력을 쏟는 매 순간이 환희로 가득찰 것인데, 이 생의 기쁨이 그저 유한할 뿐이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너무도 슬픈 것입니다. (책에 이런 말은 나오지 않지만) 이 생에서의 삶이 기쁘면 기쁠수록 그에게는 더 근원적 절망을 안겨 줄 수도 있습니다. 미인이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며 더 큰 한숨을 짓는 이유와도 같습니다. 싯다르타 역시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의 존귀한 신분이 가져다 준 너무나도 큰 행운 때문에, 그에 비례하여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절망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의 절망이 너무나도 컸기에, 그 절망의 크기에 비례하여 그가 얻어낸 깨달음의 크기도 실로 위대했던 거죠.

이 책에서는 다양한 연구자, 철학자들의 가르침이 인용되지만, 특히 오토 랭크의 여러 재치 있는 표현과 함축적인 금언이 인상깊습니다. "상징적 불멸을 취득"했다든가 하는 문장들...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게 억울해서, 상징적으로 뭘 만들어 내어서라도 영원히 살 것처럼, 혹은 "이것만 해 내면 영원히 사는 거나 마찬가지임!"을 인간들끼리 합의하곤 근원적 슬픔을 떨쳐 내려 했던 그 발버둥.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만은 공개된 자리에서 성행위를 하지 않는데, 이 역시 종의 신체적 특질에 기인했다기보다는, 후손을 남기기 위해 발버둥치는 동물의 모습을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한 정신적, 후천적 동기라는 설명이 그럴 듯합니다(확실히 다큐에서 야생 동물의 교미 장면을 보면 뭔가 슬퍼지는 느낌이 들긴 하죠). 이는 어디까지나 문화적 요인의 학습에 기인한 것으로서, 대낮의 공개 성교가 묵인되는 일부 종족도 있다는 반증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럼 공개된 자리에서의 식사는 왜 금기시되지 않는가?" 제 생각에는 인간의 양분 섭취는 날것을 그대로 뜯는 게 아니라 "요리"라는 문화적 프로세스를 거치는 행위이며, 이 때문에 부끄러움은커녕 오히려 존재의 위신을 과시하는 의미까지 갖게 되었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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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그랜트도 모르면서
루시 사이크스.조 피아자 지음, 이수영 옮김 / 나무옆의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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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직도 종이 잡지, <타임>이라든가 <뉴스위크>, <피플> 같은 고퀄의 천연색 사진과 위엄 있는 텍스트가 쿨하게 배열되고 빼곡히 박힌 옛날식 미디어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을 텐데요. 인터넷 혁명은 그런 세대에게서 참으로 많은 것을 일시에 앗아간 셈인데요. 잡지란, 신문이란, 책이란 여전히 페이퍼 포맷이라야지 "앱"이 다 뭔지 하는 느낌은 정신적 활동상이 막 피크에 이르던 세대가 겪은 상실감이라야 그 대표할 자격이 있을 것 같습니다.

열심히 업무에 몰두하다 보면 내가 내가 아닌 듯 공황장애도 겪고 때론 그 역시 내 몸의 일부였을 종양 때문에 죽을 고비도 넘기기도 하는 법인데, 특정 세대에게는 그 흔치 않은 액운 때문에 잠시 맞은 휴지기조차 자신의 커리어에 중대 공백을 초래할 어떤 단절로 다가오는가 봅니다. 그것이 사회적 지위이든, 재산이든, 명예감정이든 간에 무엇을 손에 넣었다 상실하는 아픈 느낌은 특히 중년 이후의 인생에게 큰 상처로 남습니다. 음... 특히, 인생의 매 순간을 뿌듯한 성취로 채우며 살아 왔고, 주위의 다른 이들에게 확실한 인정까지 받으며 성과 가득한 사회생활을 해 온 이에게는 더욱 큰 타격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능력"의 감퇴는 그리 한순간에 급격히 이뤄지는 게 아니고, 육체적 매력과는 달리 정신적 수월성은 어른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머리는 쓰면 쓸수록 좋아져!"에 가깝기 때문에, 이런 이들이 일시적 위기를 맞더라도 그 극복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 아닙니다. 그(혹은 그녀)는 이런 존재의 위기를 극복해 낼 가능성이 여전히 더 높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잘 해 왔던 터입니다.

하지만 이런 직위와 평판의 위기가 개인의 노력이나 자질 문제가 아닌, 문화적, 시대적 흐름의 거대한 변화에 기인했다면 어떨까요? "당신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어." 만약 노하우나 지식의 문제라면 그(혹은 그녀)는 부지런히 공부해서 기존에 쌓아올린 정신적 자산에 잘 통합시키면 됩니다. 오히려 예전의 내력까지 다 갖춘 정신이, 새로운 정보까지 더 깊은 맥락에서 소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 "치프" 이머진 테이트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육 개월을 항암 투병하느라 쉬고 온 지금은 좀 상황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녀의 능력과 센스는 종이 위에 깨끗이 인쇄된 잡지라는 판형을 전제로 하여 천재처럼 달인처럼 발휘되어 왔었지요. 지금은? 형체도 없고 무슨 과정으로 생성되어 스마트폰 안에 파고들었는지도 모를 "앱"이 그 화려한(화려했던) 전달자를 대신해 버렸습니다. 그 반 년이라는 잠시 동안에 말입니다. 그녀가 위엄 있게 자신의 의자에 앉아 완성본의 페이지를 넘기며 아랫사람들에게 지적할 건 지적하고 자신의 능란한 솜씨를 나르시스적으로 감탄하던 그 매체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존재 일부도 어디론가 가 버린 것입니다. 자긍과, 영감의 원천과, 삶의 목표까지도.

"당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건 모두 지난 시대의 산물이야. 당신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힘들고, 어찌어찌 몇 걸음은 남들처럼 따라갈 수 있겠지만 있는 힘을 다 짜내야 하지. 그래봤자 그 몇 걸음뿐인데, 남은 여정은 대체 어떻게 감당하려나?" 반대로 젊은이들은 어떻습니까? 나이 든 세대에게 무척이나 낯설고 일일이 감정선을 추스려 대응해야 하는 게, 그들 젊은이들에게는 그저 당연한 환경이고 즐길 수 있는 여건일 뿐입니다. 노력하는 사람(힘까지 부치는)이 즐기는 사람(정력까지 팔팔한)을 못 따라가는 건 너무도 당연하죠. "퇴물"이란 말은 그래서 나온 겁니다. 지식은 배우면 되지만, 센스나 감성은 시대가 바뀌면 통째로 바꾸기에 너무도 힘이 듭니다. 감정선의 집합은 곧 그 사람 인격의 전부나 마찬가지인데, 한번 공들여 내면에 쌓아 놓은 감정의 그 무수한 연결고리들을 어떻게 일일이 손 대겠습니까. 이제 이머진의 상사와 부하들은, "당신의 센스가 낡았으니 당신 자체가 필요없다"고 암암리에 측은한 눈길과 함께 명예로운 퇴장을 권하는 겁니다.

이 소설의 원제는 knockoff, 확신도 없고 감각도 못 느끼면서 어설프게 남들 따라하며 인정은 받고 싶어하는 3류를 말합니다. 3류로 살아온 인생에게는 어찌어찌 하루를 연명하기만 해도 뿌듯할 수 있지만, 이머진 테이트처럼 모든 업무를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센스와 확신으로 처리해 온 이에게는 그런 3류, knockoff 신세로 질질 끌려간다는 게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이자 사형선고였을 겁니다. 당신이라면 시대의 대세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감성을 슬슬 타협해 가며, 별 승산 없어 보이는 적응을 시도하겠습니까, 아니면 "이건 나만의 센스, 나만의 해석이야!"를 부르짖으며 대세와의 정면 승부를 선택하겠습니까?

이머진 테이트를 괴롭히는 문제는 사실 이런 "밑에서 치고올라오는 미래"의 이슈만은 아닙니다. 그녀가 예전에 우습게 본 동료나 라이벌들이, 그녀가 잠시 휴지기를 갖던 그새 상황의 요행 덕인지 채 보지 못하고 지나친 어떤 필연의 지원 덕인지 레이스에서 자신을 앞지르며 그녀의 자존을 다른 방향에서 상처 주는 일까지 벌어지네요. 그야말로 총체적 위기. 그 나름 화려한 생을 살게 해 준 무대에서 퇴장하느냐, 그녀의 자존 대부분을 구성하는 감성과 집착과 애정하는 바들과 멋지게 재활에 성공하느냐, 이는 사실 우리 독자들이 바로 우리의 현실에서 직접 맞닥뜨린 문제와 다를 바가 별로 없습니다. 사사건건 그녀와 대립하는 이브이지만, 사실 이는 이머진이 주인공으로서 발휘하는 특권으로, 실상과 다르게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시도하는 왜곡인지도 모릅니다. 이브 역시 이머진처럼 그녀 나름의 필사적인 생존을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하필 모든 감정선과 취향이 맞부딪는 이머진을 만나게 된 것일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독자에겐 자유가 있습니다. 이머진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그녀가 받는 핍박이 우리의 것인양 일일이 동감하며 성원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뿌듯한 대리만족을 느끼며 책을 덮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머진과 이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관전자의 냉정한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본다면, 혹 직장에서 자신이 겪은 여러 문제들 역시 이처럼 해석과 판단의 문제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고, 보다 현명하게 대처할 수도 있을 거고요. 어느 쪽이든 이 요란하고 재미있고 치열한 사연은, 읽고 나기 전과 후의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런 게 또 작가의 재능인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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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 얽힌 흥미진진 인문학 1 영어에 얽힌 흥미진진 인문학 1
박진호 지음 / 푸른영토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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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고 원어민들과 자유자재로 소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책을 찾아 읽고 뉴스를 즐겨 들으며 드라마나 영화도 자막 없이 감상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공부하는 게 최선일까요? 대학생 때에도 영어는 학습자의 발목을 잡고 안 놓아 주는 마계에 가깝다고들 합니다.

어원, 어근 중심 학습서가 예전부터 여러 종이 나와 있지만 그닥 학습 효율이 오르지 못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작정 철자와 음성 기호에 따라 뜻을 외워야 하는데, 무작정 덤비는 암기처럼 사람 두뇌를 피곤하게 만드는 작업이 또 없기 때문이죠. 사실 기존의 학습서들도 예문이 많이 나와 있어서, 문장 속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지 좀 끈기를 갖고 공부하면 의외로 얻는 게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학습자들은, "책에 더 신경 쓰고 성의를 들이는 게 손해이며, 최소 노력으로 최소 정보만 습득하고 땡이라야 남는 장사"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책 저자의 의도에 잘 안 따라와 줍니다.

이 책은 그런 종래의 학습서들과는 크게 달리, 단어 하나에 스며든 사연이랄까 역사, 문화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역사와 문화적 배경은 그 자체가 인문 컨텐츠의 핵심 구성 요소이므로, 단어 뒤에 깔린 이런 흥미진진한 사연을 추적하다 보면 영어 단어들의 뜻이 머리에 안 남을 수 없습니다. 얼개와 전후 맥락이 촘촘히 끈끈히 이어지는 "이야기"처럼 사람 머리에 오래 새겨지는 정보가 없으니 말입니다.

영어는 많은 학습자(非natiive)들을 어렵게 하는 게, 무슨 뜻인지 몰라 사전을 찾아보면 그 설명해 놓은 항목이 한두 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국어 사전에서 어떤 엔트리를 놓고 봐도, 4번 정도를 넘어가는 어의가 달린 표제어는 매우 드물며 없다시피합니다. 이 많은 뜻 중에 뭘 골라야 할 지도 모르는 학습자가 다수이며, 그 중 많은 이들은 "내가 모르는 게 이렇게 많으니 더 열심히 노력해서 내 지식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게 아니라, 같은 지구인의 언어가 어쩌면 이렇게 모습이 다르고 판이한 과정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같은 위화감에 아예 학습 의욕 자체가 꺾이기 십상입니다.

저자께서는 "우리말보다 네 배 많은 어휘를 가지는" 영어의 단어 코르푸스 특성을 지적하며, 양이 많은 만큼 더 많은 사물과 사연과 인류의 지난 발자취를 담아낸 영어라는 말의 학습을 통해, 우리 인식의 지평이 넓어질 수 있음을 지적하며 일단 독자의 의욕을 고취시킵니다. 우선 이용자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최신의 시사 뉴스에 등장한 여러 어휘를 환기시키며, 한 단어에 담긴 여러 가지 의미,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단어의 뜻들과 인접 의미군의 단어 소개를 구수하게 펼쳐 놓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고 독자의 눈길을 잡아채는 요소입니다.

정치 최근사에 대해 저자께서는 다소 대담한 가설도 책 속에 소개합니다. 뭐 이런 "카더라"급 루머는 일단 독자가 읽기에 구미가 꽤 당기는 것도 사실이죠.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아무개의 먼 방계 후손이라는 역사적 지식부터 찔러 주시고는, 파파라치(이 단어의 단수형, 어원까지 자세히 가르쳐 주는 건 당연하고요)가 그 정부와 함께 탄 고급 승용차의 뒤를 쫓다 비명에 갔다는 "오피셜 경위"를 들려줌과 동시에, 사실은 며느리의 부정을 괘씸히 여기고 시가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그녀를 왕실 차원에서 응징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십니다. 물론 이 토픽이 주제는 아니고, 솜씨 좋으시게도 이에 얽힌 다양한 국면에서 영어 단어의 배경 사연을 설명하는 게 주된 포인트입니다.

찰스 폰지는 현대형 사기꾼의 원조라 부를 만한 기발한 방법으로 선의의 투자자들을 울린 악질 범죄자죠. 이 자가 eponym이 된 여러 파생 어휘부터 해서, 유럽의 지난 경제사가 사실 얼마나 지독한 비리와 비위, 협잡,  강도질에 의해 텃밭을 꾸렸는지 흥미진진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소금"은 영원히 성질이 변치 않기에 음식의 보존부터 해서 사람이 문명 생활을 일구고 사는 데 필수 불가결의 역할을 해 왔는데, 이 salt라는 어근에서 얼마나 많은 뜻이 파생했는지 책은 흥미롭게 짚습니다.

읽다 보면 저자만의 흥미로운 관점도 많이 발견되더군요. "라틴 계 민족은 대개 성적으로 문란한 게 보통이라 이런 규제 방법이 실효가 있을지 의문이다." 같은 다소 과감한 진단, 종교 개혁을 촉발한 메데치 가문 출신 교황 레오 10세의 "발가벗은 소년들을 시중들게 한 호사" 언급 등등. 영어뿐 아니라 역사 전반에 대한 폭 넓은 이해가 있어야 이렇게 끊김 없이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영어 어원과 뜻을 풀어낼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을 느끼며 책을 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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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오브 카드 3
마이클 돕스 지음, 박산호 옮김 / 푸른숲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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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최고의 필력과 최고의 상상력입니다. 구절구절이 명언이고 배경이 영국을 벗어나는 대목에서도 어쩌면 그렇게 정확한 실사가 바탕된 사연이 이어지는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놀랍니다.

<하우스 오브 카드>는 드라마 포맷도 정말 재미나게 만들었지만, 그 진미와 진수를 접하기 위해서는 원작 소설을 읽는 게 필수입니다 정말. 만약 많은 세월이 지나고 나서 일시적 센세이션이나 동시대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공감적 특권 등 거품이 일절 걷히고 나도, 이 <하우스 오브 카드> 시리즈는 불멸의 걸작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그저 정치 풍자 소설(풍자라곤 하지만 경박한 유머 코드에 의존하는 바도 별로 없고요) 영역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세련되고 기발한 대사(이 매력이 가장 크죠), 소설가(작가가 전업 소설가 출신이 아니지만)가 가장 들여다 보기 힘든 정계의 초(超) 엘리트들의 생활상을 세밀하고 핍진하게 묘사한 그 성취, 런던의 정가에만 그 초점이 머무르지 않고 글로벌 정치, 나아가 어느 나라에나 두루 적용될 범속하고 타락한 세태에의 비판 등이 심오하고 보편 타당한 주제에까지 발전하는 그 속 깊은 구조.... 이 정도면 반 밀레니엄 전에 나온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비겨도 어디 떨어질 것 없습니다.

정치 엘리트들(대부분 신분상으로도 귀족 출신이죠. 물론 그 부자-피트 등 몇만 빼고)의 그 소피스티케이티드한 말투와 사고 방식은 평범한 작가가 쉽게 상상, 모방, 구현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특별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특별한 사고방식을 갖췄고, 대개는 우월한 부모에게서 특별한 두뇌까지 물려받았기에 발상 자체가 남들보다 다른 게 보통이죠. 평범한 두뇌가 비범한 이들의 행동, 생각에 접근한다는 게 어렵고, 그래서 이런 특별히 선택받은 계층과 집단의 생활상은 그들을 가까이서 접해 본, 본인도 그들과 출신성분, 정서, 가치를 공유하는 작가만이 허구의 세계 속에서 재창조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선택받은 특수 계급의 잘나가는, 아름다운, 우아한, 남이 넘볼 수 없는 이야기만 가득하다면 오히려 독자들에게 반감이나 사기 딱 좋았겠지만, 다들 아는 것처럼 이 소설은 이들 선택받은 정치인들과 그들의 축복받은 가족들이 얼마나 범속하고, 평범한 이들보다 모럴이 더 타락했으며, 일초일각을 치사한 계산에 매달려 지내는지를 신랄하게 드러내고 풍자합니다. 사실 이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다우닝가와 웨스트민스터의 터줏대감(나이 불문)들이 찌들고 이기적이며 교활한 부류는 아닙니다. 사람인 이상 그렇게 남 보여주기에 몰두하며 거짓을 늘어놓고 매스컬레이드로 자신을 무장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튼 한때 정가에서 촉망받는 장래를 보장 받았다가 한순간에 몰락을 맛본 작가는, 어느 정도는 분풀이삼아, 어느 정도는 "나라(나아가 세계)가 이런 식으로 가선 안 되겠다"는 우국충정의 발로에서(?), 또 어느 정도는 "이게 진짜 나의 적성!"이라는 각성에서 이 멋진 장편을, 완성도의 희생 없이, 이어갑니다.

이 3권은 다소 뜬금없이, 수십 년 전 아직 영국 통치 하에 놓여 있던 키프로스로 배경이 옮아갑니다. 프랜시스 어카트가 아직 새파란 장교 시절의 과거가 잠시 독자들 앞에 제시되는 거죠. 서유럽에서는 귀족의 자제들이 장교 신분으로 군에서 복무하는 게 특권 중 하나입니다. 영화나 소설을 보면 왜 저렇게 능력 좋은 인력이 고작 부사관(NCO)에 머무나 하고 의아할 때가 있는데, 그게 다 출신 계급이 나빠서입니다. 이 앞부분에서도 청년 장교 어카트와 그에 항명하는 병장의 이야기가 잠시 나오죠. "영국놈들 물러가라! 키프로스 독립 만세!"를 외치는 꼬마 둘이서 위험한 화기를 갖고 숲 속에서 영국군 소대와 대치하는데, 냉혹한 귀족의 피가 흐르는 우리 프랜시스께서는 "숲에 불을 질러 애 둘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사병들은 "애들이나 죽이라고 내가 군에 들어와서 총을 잡은 건 아니다"고 반발하지만, 지혜나 용기가 탁월하진 않아도 상황의 정치적 수습에는 (벌써 그 시절부터) 발군의 수완을 보였던 프랜시스는, 망설임 없이 (비교적 쉬운) 군사적 행동으로 손수 후환의 빌미를 제거하고 동시에 현장에 있던 사병들과 (그들을 꼼짝 못하게 할 손씀을 통해) 이후의 명예에 누가 될 수 있는 진실의 은폐를 위한 타협에 성공합니다. 이럴 경우를 두고 "될 성 싶은 나무는.. "이란 속담을 쓰는 거죠?

세월은 흘러흘러 무대는 이미 그가 다우닝가 관저의 주인으로 십 년째 권좌에 머무는 현재로 옮겨옵니다. 근본 없이 얄팍한 처세술만으로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오른 자는 결정적 단계에서 몸에 배지 않은 센스의 결핍으로 자기 신상과 자기 집단 전체에 누를 끼칠 과오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제프리 부자-피트(Geoffrey Booza-Pitt)라는 젊은 장관이 바로 그인데, 이 이름에서 "부자"는 富者나 父子도 아니고 강부자 김부자도 아니며 영미권에서 흔히 착각하는 것처럼 미들네임도 아니고, 성씨의 일부분입니다. 이 푸른숲에서 나온 한국어 번역본은 적절하게도 하이픈을 다 살려 표기하고 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 번역본은 셰익스피어의 출생지(이 소설에서 중요한 배경 구실을 하는, 당연히 그 연극 상연 전용 극장 소재지이기도 한) 스트랫퍼드온어펀에이번 같은 지명을 띄어쓰기 없이 다 붙여쓴다든가 하는 적절한 태도를 줄곧 유지합니다.

야, 일국의 수상(총리)를 해먹으려면 이처럼, 순간의 재치로 여러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수완이 있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독자로 하여금 절로 들게, 프랜시스는 젊은 시절 그 능구렁이 같은 정치술이 어디 가지 않아, 저 서투른 부자-피트가 지역당협 위원장(우리식으로 따지면요)의 아내(아마 트로피 와이프겠죠?)와 저지른 부정을 무마해 주고, 동시에 이 부자-피트의 정치생명을 한번에 끝장낼 "자술서"를 챙깁니다. 세상 사는 데 거저가 어디 있겠으며, 지금껏 근본도 없는 놈을 그 자리까지 끌여올려준 은덕이 또 얼만데 이 정도는 받아내야죠.

본래 저렇게 성씨에 하이픈이 붙으면, 부계 모계 어느 쪽이든 성씨에서 떨굴 수 없는 명문 집안 간의 결합이며, 대개 한사(限嗣) 상속의 법적 근거를 명확히하기 위한 창씨일 수 있습니다. "피트"라고 하면 옛 잉글랜드 귀족 가문의 방계 같은 느낌이고, "부자"는 모르긴해도 남아프리카에서 보난자로 한몫잡아 큰 부를 일군 보어인(아프리카너) 가문 같은 느낌도 주지요. 족보가 너무 분명하면 위조한 게 들통날 테고 해서 저런 식으로 출신 성분을 조작하는 건데, 근본 없는 이들이 자신의 구린 과거를 감추는 흔한 수법이라 하겠습니다.

지은 원죄의 끈덕진 응보가 어디 안 간다고, 수십 년이 흘러 버젓이 일국의 수상 직위에까지 오른 지금, 다시 키프로스. 지중해 어디나 다 있으나 유독 여기만 빼고 매장된 석유가 기를 쓰고 비켜간 그 키프로스에, 왜 대체 석유가 (그 호조건에도 불구하고) 매장되어 있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드디어 밝혀지는데, 이런 미공개 정보는 먼저 발견한 자에게 엄청 유리한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대통령님, 설마 여기에 관심이 없진 않죠?" 그 대통령(북키프로스)은 다시 영국의 수상에게 의사를 타진합니다. "관심 있으시죠?" 정치가 부패라는 악령과 손을 끊을 수 없는 건, 바로 이런 "엄청 돈되는" 미공개 정보를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직위이기 때문입니다. 제국주의자들이 물러가니 자기들끼리 싸움이 붙어 종전보다 더한 지옥상을 연출하는 한심한 작태도 이 소설 속에서 또한번 조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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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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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학부 시절에 가장 인기 있던 표준적 경제수학 교과서로 통하던 책을 쓴 A C Chiang이란 저자가 있었습니다. 중국계 미국인이던 그분의 성씨는 한자로 쓰면 張씨였는데(가장 흔한 중국 성씨이기도 하죠), 영문 표기가 같은 (그분보다 훨씬 어린) 이 작가님은 姜씨입니다. 姜은 표준 북경어 발음으로 "쟝"에 가깝지만 여튼 이분은 Chiang으로 자신의 성씨를 표기하네요. 중국은 광대한 나라라 한말로 중국계라고만 하면 어디 출신인지 따로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분의 빼어난 작품 몇(본래 과작을 하는 분이라)을 모은, 그리고 탁월한 번역이 함께해 준 이 선집을 몇 번 거듭 읽어 봐도, 과연 그 먼 선조가 중국 어느 지방 출신일지 감 잡을 수 있는 대목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 작가의 실물적 정체성(거기 대해 구태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면)은, 그저 천재적 두뇌를 지닌 미국인 정도로만 정리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물론 작품들 중 하나에 "동양적 인(仁)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았다"는 어렴풋한 한 마디가 들어있긴 했지만 말입니다.

출판사 서평 중에 이런 구절이 보이더군요. "머리를 쓰는데 가슴이 뜨거워진다!" 이 선집의 성격과 개성, 혹은 성취를 요약하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문구도 없을 것 같습니다. 소위 하드 SF 작품들(단편이든 장편이든)을 "즐기면서(문학이니까 당연히, 즐기지 못하면 그게 독서라고 할 수 없죠)" 읽어 가려면 사전 지식이 필요하고, 사전 지식이 충분히 갖춰진 독자라도 작가의 의도와 호흡을 맞춰 가려면 머리를 적잖이 써야 하겠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드 SF의 정수를 즐길 만한 능력이 되는 독자라면 테드 창의 단어 구사 하나하나, 구성의 의도마다에 감탄을 보내며 작품의 음미가 가능하겠고, 지식이 설령 부족한 독자라도 이야기의 감동적인 전개에 인문적 전율을 체험하기에 충분합니다. 2년 전에 개봉되었던 SF 영화 <인터스텔라>가 영화치고는 하드한 편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실제로 킵 손 교수가 따로 이에 대한 논의만 모아 대중서 한 권을 내기도 했죠) 특히 한국 관객들은 그 감성적 코드만 따로 뽑아 즐길 줄을 알아서 천만 흥행을 달성시키기도 한 예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아직은 젊은 편이지만 활동 기간을 감안한다 쳐도 꽤 적은 수의 작품만 발표한 그인데, 이 책에는 모두 여덟 편의 단편이 역자분에 의해 추려져 정확한 우리말로 옮겨졌습니다. 저는 읽으면서 테드 창의 원래 세계도 우아하고 탁월하지만, 작품 본연의 의도가 이처럼 분명하게 전달되게 표현할 수 있다는 한국어 독해의 체험도 상쾌하게 이뤄 준 역자께도 감사 드리고 싶어지더군요. 처음부터 테드 창(다시 말하지만 그는 중국인의 인종적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외모만 지녔을 뿐 영혼은 이미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류의 미국인입니다)이 한국어로 작품을 쓴 게 아닐까 착각할 만큼요.

어떤 작품이 심오한 주제와 사색의 결과를 담는다고 해도, 그런 작가의 성취가 독자에게 바로 공감되게 하는 건 또 별개의 과제입니다. 어쩌면 그저 사색가, 사상가이기만 한 인물의 특질과, 작가적 재능이라는 게 이 지점에서 준별되는 게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테드 창은 그저 자연과학도 출신 작가라기보다, 그 어느 정통파(?) 인문 소양을 쌓은 이보다 더 정밀하고 깊이 있게, 인간 보편의 주제를 파고들어간 본격 문학에의 기여자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의 표제로 선택된 구절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출처인 <네 인생의 이야기>는 어느 어머니가 딸에게 들려 주는 내러티브 형식(에다, 분리된 어느 충격적인 공적 체험의 첨가, 분리, 융합?ㅋ)을 띠고 있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렇게 거칠게 요약하는 자체가 이 작품을 제대로 대접한는 게 아니죠. 주인공 여성은 언어학자인데, 어느날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그녀의 연구실을 찾아와 "기괴한 언어"의 녹음 파일을 들려 주며 자문을 구합니다. "이것이 언어입니까?" 주인공은 확답을 피한 후, 혹시 외계인과의 접촉이 있었는지를 묻습니다. 이게 그녀의 직분상 당연히 도출되는 결론이었는지, 그 밖의 정보를 참고하거나 직감 따위를 함께 동원한 성과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1인칭 주인공은 의도적으로 이런 정보를 상대(우리들 독자, 혹은 그녀의 딸인 "2인칭" 주체)에게 감춥니다. 대신 그녀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지적인 추론" 결과로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헵타포드라는 외계 생명체(혹은 의식 주체)가 "체경(looking glass)"을 통해 정부 고위 당국과 의사소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체경은 화학적으로 활성화되어 있었기에 어떤 분명한 통신의 매개로 쓰임이 입증되는 형편이고요. 이 체경에 등장하는 "거울 저편"의 그들과 필사적인 소통을 이루면서, 언어학자인 그녀는 패턴 분석을 통해 그들의 언어를 우리식 문법으로 정리하려 애씁니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음성언어는 어차피 시간 차원의 지배를 받으므로(누구든 둘 이상의 음절을 동시에 발화할 수 없습니다) 시간 순으로 정돈되어야만 하지만, 문자언어는 2차원(적어도) 평면에 표시되는 게 보통이므로 연대기순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즉 인간은, 말을 할 때와 달리 글을 쓸 때는 여러 심상과 생각, 사건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다는 겁니다(일단 가능성으로는요). 이들 헵타포드의 B형 언어는 이를 현실화하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딸에게 들려주는 "너와 네 아빠, 그리고 엄마인 내가 겪은 인생 이야기"를 위의 외계인 사연과 교차하며 다룹니다. 딸이 2인칭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의 시제(tense)도 독특한데,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다 아는 걸 보면 (우리 눈치로)이게 분명 과거의 일이지만, 시제는 미래, 최소한 미래로 보일 법한 현재입니다. 이미 인식의 지평이 동시간대의 동시 지각으로 넓어진(?) 화자라서 미래의 일을 과거처럼 바라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외계인과의 소통 체험과 언어 연구를 통해 그녀는 주체와 격체의 치환, 과거와 미래의 교차가 적어도 부자연스럽지는 않은 지적 작용임을 받아들이게는 되었습니다. 이 작품에선 작가의 깊은 언어학적 소양도 잘 배어나는데요(도대체 모르는 게 뭐야?), The rabbit is ready to eat. 이란 문장을 두고 상(相. aspect)의 근원적 모호성에 대해 많은 숙고의 결과들을 토로합니다. 이런 게 다 중국어 발화 상황을 근거리에 둘 수 있었던 작가만의 이점이었을까요?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본래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연속선상의 시간 개념에 대해 무신경한 편입니다. 여기서의 헵타포드 종족은 이방인(alien)으로서의 동양인을 함의하는지도 모릅니다.

<영으로 나누면>은 제가 예전에 영문으로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에서 다시 만났네요. 어떤 천재 수학자(역시 여성이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가 젊은 시절부터 주위의 기대와 촉망을 한 몸에 받고 자라났는데, 연구를 거듭하면 할수록 형식 체계로서의 수학이 너무나 큰 허점을 지니고, 절대적 확실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사실은 다른 (불완전한) 언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편의적 표기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모든 의욕과 신념, 심지어 재능까지도 잃어버린다는 내용입니다. 대학생 시절 그녀는, 남편이 될 칼이란 청년과 교제를 시작하는데, 칼(이 사람은 위의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남편 게리와 비슷한 포지션이죠)의 말을 잠시 옮겨 보면요, "그 얼굴에서 그처럼이나 다른 표정이 나타난다는 점이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저런 깨달음이 담긴 표정을 평소에는 어떻게 감추고 있었는지가 신기했다." 우리가 흔히 "질리지 않은 사람의 매력"이란 게 다 이런 걸 두고 이르는 거죠. 이목구비가 단정하다 아니다를 떠나, 사람의 정신 세계가 단세포성이 아닌, 변화무쌍한 다양한 국면을 두루 포함해야 그 사람하고 함께하는 시간이 지루하질 않죠. 이처럼 테드 창의 작품은, SF의 세계에 인간 보편의 관심사, 일상적 측면까지 깊이 담아낸 작가적 통찰이 단연 돋보입니다. 테드 창이 의도적으로 배열한 작품 표제, 제사(에피그램), 형식 구분 기호가 마지막 9장에서 a=b로 합쳐지는 모습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이처럼 형식과 내용이 혼연일체를 이루는 구조에서, 테드 창은 정말 초지능의 외계인처럼 실험적 소통의 변방을 탐사 중입니다.

이 선집에서 단연 압권을 이루는(제 개인적 생각으로) 단편은 <이해>입니다. 뇌 손상을 입은 평범한 남성이 정부 주도(CIA라고 하네요. 만만하면 불려나오나요?) 실험에 참가하여 약물을 주입받고 초지능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저 추론이나 판단, 연산만 능해진 게 아니라, 감각, 지각 능력까지 극도로 민감해져서, 나노 단위의(ㅋㅋㅋ) 외부 자극만으로도 그 원인과 이후 추이를 정확히 예견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약물 주입이 아니라 해도 정상적인 지능 역시 계발을 하면 할수록 향상되는 이치처럼, 자잠재력의 발견에 아주 기냥 탄력이 붙은 그는 신경 세포 단위의 극미 요동만으로도 상대의 생각을 다 읽어내는, 초자연적 존재(물론 과학적으로 설명이 다 되니 초자연적이라곤 못 하지만 ㅋㅋㅋ)가 되고 맙니다. 헌데, 어디 정부가 실험 대상으로 삼은 이가 이 자뿐이겠습니까? 다른 누가 극히 간접적인 메시지를 전해 와 (그와 비슷하다며) 자신의 존재를 알립니다. 같은 초지능의 소유자지만 지능의 우월과 그 확인이 인생에 있어 최고 수위의 가치이자 목표인 그와, 이 새로운 "동류(자신보다 못한 다른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자가 되려 함)"는 서로 매우 성향이 다릅니다. 이들은 서로의 생각을 알기 위해 말을 할 필요가 없고, 그저 신경 세포 단위의 미세한 동요만으로 상대가 뭔 의도인지 정확히 짚어낼 수 있습니다. 둘 사이에 타협이 불가능한 가치관의 차이를 감지한 주인공은, 이제 뇌파의 발사(?) 등 상대 의식에의 (해킹 같은) 침입을 통해 그의 존재를 파멸시키려 듭니다. 하지만 상대 역시 비슷한 수준의 능력을 지녔는데 당하고만 있을까요? 우리 평범한 인간들로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줄 알지도 못하며, 혹 근처에 있었더라도 이상한 아저씨 둘이서 눈싸움 하는 모습 정도로만 보이겠지만) 구원자 성향인 레이놀즈가 주인공을 제압하길 바라야 하겠는데... 결말도 여태 이뤄진 거창한 전개에 걸맞게 극적으로 마무리됩니다. 제가 보기엔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고지로의 대결 못지 않은, 장렬함과 극적 타당성이 있더군요. 이렇게만 소개하면 장난스런 무협인가 오해하실 수도 있겠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신경과학과 생체 구조에 대한 완벽한 지식이 있어야 형상화할 수 있는 세계였습니다. 최민식, 스칼렛 조핸슨 주연 <루시>도 이 소설에서 큰 영향을 받았음을 독자는 자연스럽게 깨달을 겁니다.

이상의 세 작품이 특히 하드 SF의 개성을 진하게 구현했다면, <바빌론의 탑>과 <지옥은 신의 부재>는 본격 순문학 작가들이 자주 다루면서도 서투르게만 성과를 내는 "엄청난" 주제에 과감히 접근하면서, 테드 창 외에는 누구도 낼 수 없는 심오하고도 상상을 초월한 경지의 결론으로 과감히 마무리되는 내용입니다. <바빌론..>이 SF 장르에 포함되는 건, "분리된 하늘과 땅"이 실은 원통과 같은 연속체꼴이며, 이 때문에 하늘 끝까지 올라가 그에 구멍을 내려 든 주인공이 목표를 달성하고 도로 땅에 떨어졌다는 수학적 설명이 핵심이라는 이유 뿐이겠습니다. <지옥...>은 그나마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테드 창 스럽게" 드라이하고 논리적인 서술에만 의지한다는 이유뿐 이게 꼭 SF로 여겨질 필요가 없죠. 읽으면서 이런 생각지도 못한 대담한 해석과 제안이 그가 우수한 두뇌를 지닌 덕인지, 아니면 책을 많이 읽고 광폭의 사색에 잠긴 시간이 많아서인지, 한참을 고민하게도 되었습니다. 꼭 답을 한쪽으로만 정할 필요는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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