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의 여자들 1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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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들은 다 알겠지만, 매컬로 여사의 대하 역사 소설 <마스터즈 오즈 로마>의 제5부 제목이 "카이사르"이고, 그에 앞선 이 제4부의 제목은 (오히려 부가어가 몇 더 붙은) "카이사르의 여자들"입니다. 우리 상식으론 "어떠어떠한"이라든가, "~의 무엇"이 붙은 제목이라면 그 후편에 배치되거나, 아니면 본편이 아닌 외전으로 구성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대뜸 생각될 텐데도 말이죠. 매컬로 여사가 이 넷째 사연(총 3권)을 구상하고 완성할 무렵이라면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진 시점도 아닌데 왜 이런 편제일까. 그런 의문은 역시 책을 직접 읽어 봐야 풀릴 수 있습니다. 풀려도 아주 시원하게 풀립니다.

역사 소설만이 이룰 수 있는 미학적 성취랄까 존재 이유라 하면, 현전 기록의 빈 부분을 메꾸고 그 타당한 (잃어버린) 고리들을 건전하고 학식 깊은 상상으로 복원하는 데에 있겠습니다. 바로 이 점에 매혹되어, 이미 정사서나 연구서들을 두루 읽고 제법 지식을 쌓은 독자들조차 (양질의) 역사 소설에 열광하며, 저자의 담론과 이야기 속으로 신나게 빠져 드는 것입니다. 한편, 잘 짜여진 역사 소설은 과거 행적의 그럴싸한 복원 외에도, 문학 본연의 기능인 "고아한 인간성의 강조, 감동과 보편적 주제의 만남"이 가능하기 때문에, 故 매컬로 여사처럼 탁월한 작가의 걸작을 읽는 체험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자 보람입니다.

"로마의 마스터(즈)"라 함은 누구입니까? 1부의 제목이기도 한 "로마의 일인자"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나 술라 중 한 사람이기만 해야 정해진 답일까요? 소설의 배경이 된 당대에는 "primus inter pares"라 불린 이 최고의 실력자는, 사실 시대의 과제와 소명을 영웅적으로 해결해 온 여러 걸출한 인물들에게 두루 붙었으며, 무려 반 밀레니엄을 공화정 체제로 이어온 그들에게, 제정 시기의 현란한 이름들이 아니라 해도 여럿이 존재했음이 명백합니다. 한편으로, primus inter pares는 그저 동료(par. 저 라틴어 pares의 주격 형태)들 중의 으뜸이라는 뜻이니, 스스로를 신 혹은 그의 아들로 지칭한 오리엔트(나중에는 로마 제국 역시)의 군주와는 다른, 보다 겸손하고 합리적인 자세와 세계관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제위에 오르지도, 천수를 다하지도 못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였지만, "로마의 일인자"라는 어구가 첫번째로 연상시킬 빼어난 정치가, 군인, 지도자가 그라는 점에는 아마 거의 모든 이들이 동의할 것 같습니다.

지난 3부에서 우리 독자들은 광기 어린 독재자, 어린 시절의 상처와 고생이 그 영혼에 깊은 흠결을 남긴 불행한 영웅 술라가, 어떤 모습으로 최후의 몸부림을 치고, 또 어떤 과정으로 정치적 몰락에 다다랐는지 실감 나게 살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새로운 시대가 희구할 만한, 전혀 새로운 타입의 파격적인 영웅이, 전혀 예상 못 한 지방 신흥 가문에서 어떻게 "라이징"하는지도 숨죽여가며 지켜 보았습니다. 저는 그 스트라보의 아들, 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자칭)의 행적을 볼 때면 역시 그만큼이나 거침 없는 개성에다가, 유서 깊지 못한 (그러나 당대의 활력이나 재력은 누구 못지 않은) 가문의 귀한 아들이, 이 혼란스럽고 무가치한 방황을 일삼는 시대를 일거에 쓸어버리겠다는 듯 난폭히, 그러나 화끈하게, 창과 칼을 휘두르는 장관 혹은 혼란상이, 꼭 일본 전국 시대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지난 적폐를 청산하고 활짝 열리려면, 저처럼 머리에 든 것 없고 발상은 무모하며 도대체 당면한 위험이 초래할 수 있는 재앙 그 치명적 크기를 계산할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런 무법자 타입이 아니면 구질구질한 폐습과 썩은 기득권을 일소하지 못합니다. 그쪽이든 여기든 언제나 사정이 그랬습니다.

이 4부에서, 2부 말미에 어린 소년으로 첫 모습을 보였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제 어엿한 청년으로, 그것도 뭇 여인의 혼을 쏙 빼어놓을 만한 미남자로 자라나, 역사에 남을 그의 치적만큼이나 유명한 엽색 행각을 이어갈 서곡을 요란하게 연주합니다. "여인들"이란 어구가 4부 전체의 제목에 붙어도 이상할 바 조금도 없을 만큼, (원서를 이미 다 읽어 본 독자로서) 이 4부에 담긴 사연은 말 그대로 "여자들과 정신 없이 얽혀드는 카이사르의 호색한(好色漢) 행각"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 나이우스 폼페이우스도, 먼 옛적 알렉산더 대왕을 연상케 할 만큼 늠름한 미남자이며, 한창 때의 욕구를 어떤 식으로건 풀어야 할 만큼 정력적인 면모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행위" 혹은 "연애"와는 다른 것이, 그의 스타일(이라 부를 만한 게 혹 있다면)은 그저 폭력적이고 투박하며 일방적입니다. 반면 카이사르는 섹스를 할 때도, 상대에게 긍지와 보람을 느끼게 할 만큼 예술적인 소통에 성공하는 능력자입니다. 여자는 그저 육체적 자극만으로, 남자가 베푸는 충격의 무식한 강도(强度)만으로 행복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한 남자가 상대 여성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사랑하는지는, 전희와 본 의식, 후희의 전과정에 걸쳐 남자가 들이는 성의와 기교의 수준을 느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카이사르는 어느 여성에게나 최고의 연인이었으며, 일시적이든 정식 혼인을 거친 관계이든 그의 곁에 머문 여인들에게 생애 처음으로 육신의 절절한 환희를 느끼게 해 준 은인과도 같은 남성이었습니다. 매컬로 여사의 작품 중에 형상화된 젊은 카이사르(아마 실제 역사에서도 이랬을 개연성이 크지만)는, 이처럼 도무지 실존했을 법하지 않은, '마스터 오브 러브"에 가까운, 에로스의 현인태(現人態)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카이사르는 어쩌면 이렇게 완벽한, 여성들의 위로자이자 극한의 연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은 이미 1부, 2부에 충분히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위대한 인물에게는 위대한 어머니가 항상 배후에 버티고 있었으며, (비슷하게도) 사랑스러운 남성 역시 애정을 듬뿍 담아 성장기 내내 양육한 살뜰한(그리고 아마, 본인 역시 한때 매력적인 여성이었을) 어머니가 길러내는 법입니다. 사랑을 넉넉히 받고 자란 남성이라야, 다른 여자를 바른 방법 효과적인 테크닉으로 사랑할 수 있고, 또 여성으로부터 아낌 없는 사랑을 받는 법입니다.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위대한 정치가이자 매혹적인 연인(현대 영어로 표현하면 smooth operator)을 한 남성의 육신 안에 동시에 빚어낸,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다 할 가장 성공적인 어머니였습니다. 이리 어머니 한 편에다 공을 다 돌려도 되는 것이, 그 부친 가이우스(아들과 이름이 같죠)처럼 유약하고 우유부단한(게다가 일찍 죽기까지 한) 위인에게 아들이 무슨 좋은 영향을 받았을 것 같지가 않아서죠.

이 4부 1권에는 좀 충격적인 성애 묘사(전편들에 비해)가 종종 눈에 뜨입니다. 카이사르, 뭇 여인에게 성애의 신으로 군림한 그가 본격 주인공으로 구성상 부각되는 단계니 어쩔 수 없습니다. 말과 지성과 배려와 책략과 다양한 육체적 기교와 타고난 미모("체모 하나 없는")로 여자를 녹이는 그이지만, 이런 그조차도 쓴맛을 다시게 한 여인이 두 명 나옵니다. 그 중 한 명은 지면으로 고작 그녀를 접할 뿐인 독자조차 충격에 빠뜨리고 공분을 자아내었던 만행으로 아직 기억에 생생할, 어느 누구의 생모인 포악하고 잔인하며 자기 중심적인 세르빌리아입니다. 역사상 "대체 왜 그가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같은 풀리지 않는 의문을 종적으로 남긴 인물은 여럿이 있는데요. 그 중의 하나가 경력상 절정기를 누리던 카이사르를 동료 여럿과 함께 암살한 브루투스입니다.

그의 먼 선조가 폭군을 축출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이였다는 점에서 누백 년 간 이어온 핏줄의 운명을 거론하는 이도 있지만, 매컬로 여사는 이처럼 그 인물의 성장 과정과 가문 간에 얽혀진 복잡하고 비극적이며 불쾌한 "사연"에서 그 단초를 찾으려 합니다(물론 이 부분은 작가의 상상이므로 그 이상의 의미 부여는 불필요합니다). 행위 중 상대의 엉덩이에 깊은 상처를 새기고서야 직성이 풀렸던 독부(毒婦), 그런 숨막힐 듯한 모친 밑에서 얼마나 큰 반항심과 좌절감, 열등 의식을 키웠어야 했을까 싶은 브루투스, 이 4부에도 잘 드러나듯 어머니의 간부(姦夫)이기까지 했던 시저를 내내 근거리에서 응시해야 했던 브루투스, 용모든 기질이든 매력이든 민활한 두뇌 작용이든 뭐 하나 카이사르보다 나을 게 없었기에 내면을 갉아먹는 고뇌에 시달려야 했던 불쌍한 브루투스가 그의 좌절된 자아를 그런 식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는 거대한 복선이 벌써 여기서부터 깔리는 셈입니다.

신녀를 유혹하고 그 신세를 망치게 함으로써 비열한 자존을 채우려는 어느 한심한 귀족 자제의 에피소드도 들어 있고, 1~3부를 관통하던, 현대 워싱턴 캐피틀 힐(물론 이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따온 이름이죠)에서 벌어지는 정상배들의 모략은 저리가랄 만큼 간교한 정치가들의 책략 다툼도 여전합니다. 여사의 작품은 이처럼 시대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되, 그 속에는 살아 있는 개성과 실감 나는 의지의 충돌이 멋지게 구현되었다는 점은 이미 1부~ 3부를 읽고 등록한 제 지난 리뷰에서도 밝힌 바 있습니다. 번역도 정말 꼼꼼하게 이뤄졌는데요, 예를 들어 "티베리스" 강은 종래 다른 영문 소설의 영향 때문에 "티베르" 강으로들 알고 있지만(심지어 학교 세계사 교과서도 그렇게 나옵니다), 이는 영어식 표기일 뿐이고(그나마 "타이버"로 읽습니다), 이 책에서 올바로 표기하는 것처럼 주격이든 소유격이든 모두 "Tiberis"일 뿐입니다. 로마 시대의 지명이니 당연히 고전 라틴어로 표기해야겠고, 비슷한 예로 우리가 흔히 "도리아"로 잘못 알던 지명 역시 "도리스"로 바로잡혀져 있습니다. 이런 몇 가지 예만 보아도 얼마나 정성 들인 번역과 기획이 이뤄졌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고, 이런 걸작이라면 이 정도의 성의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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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읽는 남자
안토니오 가리도 지음, 송병선 옮김 / 레드스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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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8월, 9월 세 번에 걸쳐, 한국에 번역 소개된 유일한 "동아시아(중국) 배경 법의학 소재 추리소설"인 "디 공(적인걸. 狄仁杰)" 시리즈 중 세 편을 읽고 리뷰를 올린 적 있습니다. 동양인의 생활 방식과 사고의 특성, 독특한 문화 풍습과 세계관이 저들 서양인에게는 매우 흥미롭게 와 닿았나 봅니다. 순전히 픽션으로만 꾸려진 것도 아니어서, 로베르토 반 훌릭의 경우 물론 그의 기발한 상상력과 전달 능력, 치밀한 미스테리 플롯 구성력도 돋보이지만, 상당 부분은 중국의 사서(史書), 기록물에 근거를 두거나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창작된 것들입니다. 이는 같은 동아시아인으로서, 꼼꼼하고도 방대하게 이뤄진 기록물의 깊이와 질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주는 방증이며, 완성도 높은 서브컬처나 대중문학의 훌륭한 소스를 제공해 주는 문화 유산에 스스로 자부심을 느껴 마땅한 일이겠습니다.

이 소설은 그 반 훌릭의 "디 공 시리즈"와 궤를 같이하는, 그러면서도 현대에 고도로 발전한 법의학의 최신 성과도 충분히 반영한, 게다가 역사성까지 면밀히 구현한 팩션입니다. 작가 Antonio Garrido Molina는 스페인 태생의 소설가인데, 학문적 배경은 인문이나 문예 창작 쪽이 아니라 산업공학입니다. 산업공학이라는 게 사실 공대에 마련된 분과 중에는 가장 문과 색채가 농후하고, 특정 분야를 깊이 파기보다는 두루 너른 분야에의 비전, 이해가 중시되는 쪽이라서, 아마도 인기 대중 작가로 이만큼성공하는 데 바람직한 지적 밑거름을 제공해 준 듯합니다.

주인공은 우리말로 송자, 한자로는 宋慈라고 쓰며, 작가의 모국어이자 이 작품의 원본을 이루는 말인 스페인어로는 "송씨(Ci Song)" 정도로 읽히겠습니다. 작가께서, 역사상 실존 인물인 이 송자(宋慈)에 대해 참으로 깊은 연구와 애정을 기울인 듯, 그의 생애 초반부터 명판관으로 출세의 첫발을 내디디기까지, 상당히 세부적인 대목에까지 묘사가 이뤄지고 있어서 일단 역사에 관심이 있든 없든 책을 펼쳐 든 독자에게 큰 호기심을 심어 가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편입니다. 중국사에 관심 있는, 특히 송나라 때의 원숙하면서도 사대부나 서민에까지 제도의 활력이 고루 미친 시대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이 책은 필독서처럼 다가올 것 같습니다. 중국사에 대해 거의 이해가 없는 독자라 해도, 마치 요즘 미드 CSI 구경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있게 읽어갈 수 있는, 본격 포렌직 스릴러라서 기본의 법의학물에 좀 질린 분들이라면 바로 매혹시킬 수 있겠네요.

자(慈)는 송씨 집안의 둘째 아들입니다. 보통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조명하는 설정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흔히 그렇듯, 주변의 편견과 시대의 질곡 속에 혼자 "고귀한 인간성, 가치"를 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고, 숙연한 마음을 자아내기도 하는 뭐 그런 경로를 그대로 따릅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발리앙이 그러했듯, 혹은 올리퍼 푀치의 최근작 스릴러 <사형집행인의 딸>의 주인공 야콥 퀴슬이 그러했듯, 아니면 톰 롭 스미스의 걸작 <차일드 44>에서 소비에트 압제 하에 분투하는 주인공 레오 데미도프가 그러했던 것처럼, 무지몽매한 민중과 탐욕스럽고 사악한 지배계층이 쉴 새 없이 몰아넣는 곤경 속에서도, 정의롭고 선한 마음의 프로타고니스트는 자신의 의지를 도덕적인 방법으로 관철해 나갑니다.

송자의 집안은 그 가부장의 벼슬길(이래봐야 잡직의 하급 관리지만)을 위해 솔가하여 린안(책에 설명은 없지만 아마 남송 시대의 수도 임안[臨安. 현재의 항저우]인 듯합니다)으로 떠납니다. 아직 소년이었던 송자(이 책에서는 "자"라는 외자 이름으로만 표기됩니다)는 이곳 린안에서 평생의 은사이자 롤 모델인 펭 판관을 만납니다. 마스터는 자신처럼 대성할 기미가 보이는 어린 싹을 특유의 밝은 눈으로 발견하게 마련인데, 송자가 펭 판관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 못지 않게, 펭 판관 역시 이 소년의 총명한 자질과 성실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불의에 굴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착한 성품을 높이 평가합니다. 이 린안에 머물 시절만 해도 그는 아직 여리여리한 소년으로서, 다만 눈에 총기를 빛내며 접하고 마주친 모든 지식을 빨아들이겠다는 듯 의욕과 꿈에 가득차 있을 뿐입니다.

어느 정도는 역사적 기록에 근거를 둔 재구성이겠지만, 송자의 집안 식구, 그 중에서도 손윗어른들은 꽉 막히고 자기 중심적이며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한, 전근대적 인간형들입니다. 그 아버지 되는 분도 지혜롭지 못하고 비틀어진 인간성을 지녔지만, 이 작품에서 어린 송자의 앞길을 가로막는 가장 못된 안타고니스트는 바로 그의 친형 "루"입니다. 의붓형도 아니고 친형이 자기 피붙이들에게 이럴 수까지 있을까 싶을 만큼인데, 심지어 그는 자신의 친아버지에게조차 (한때 자신의 의사를 거스르고 대처로 나가 살았다며) 냉대를 퍼붓고, 이미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부친에게 이제는 자신이 가장이라며 폭언이나 학대도 서슴지 않습니다. 유교의 효순(孝順) 도그마에는 정면으로 어긋나는 모습인데, 실제로 중근세 중국에 이 정도 막나가는 인물이 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참된 인간적 각성이 부족한 채 그저 인습이나 제도적 강압에 의해 유지되는 인륜의 한계를 정확히 내다본, 그래서 재구성에 성공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의 아버지와 끊임없는 투쟁을 벌인 끝에 오늘날의 내 기질이 형성되었다"고 아주 자랑스럽게 회고하는, 우리 눈에는 어이없이 보이는 마오의 영혼 한 구석이 투영되어 보이기도 하더군요. 중근세가 암울한 건 단지 물질적으로 궁핍해서만은 아닙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가족과 같은 일차 집단 안에서는 무엇보다 거짓 없고 진실된 인간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축복이라면, 이처럼 가족 사이에 건전하고 따스한 연대, 사랑의 감정이 구축되었다는 걸 가장 첫손에 꼽아야 하겠습니다.

여튼 갑자기 송자의 할아버지가 죽는 바람에, 송씨 일가는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야만 하게 되었네요. 이 대목에서 작가(혹은 번역자)는 "장례 의식"을 치르러 낙향했다고만 하지만, 서양 독자는 물론 우리들도 "왜 부모님이 돌아가셨는게 공직에서 물러날 사유가 되는지" 어리둥절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인데, 이 표현을 그저 "삼년상"이라고만 옮겼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알다시피 삼년상에 들어가면 공직 생활이건 개인적 학습이건 올스톱입니다. 모든 걸 멈추고 시묘살이를 해야 공동체와 동료들로부터 도리를 다한 사람으로 인정 받는데, 이 풍습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좀처럼 이해 안 되는, 그 비슷한 예가 전혀 없는 경우라서, 심지어 이 작가도 충분히 소화 못 한 채 작품화했을 수 있습니다.

고향으로 내려와 가부장이자 맏형의 독재에 시달려야 하는 송자는 그런 와중에서도, 병으로 고생하는 자신의 여동생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한창 나이때라 또래 소녀에게 눈길이 갈 만도 하건만, 엄마가 없는 이 집안에서 동생 병간호하느라 무지막지한 형이 부과하는 노동을 수행하느라 기운이 남아나질 않습니다. 이처럼 이 장편 소설에서 "사람처럼 보이는 유일한 캐릭터"는 주인공 송자뿐입니다. 그 아버지 되는 위인도 어쩌면 자식에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한심하고, 한편으로 그 장남이 휘두르는 폭거에 비굴하게 굴복하는 모습이 처량하기도 합니다.

이런 환경이 주인공 소년 송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우선은 그의 연약한 여동생을 버젓한 성인으로 키워내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불굴의 정의감까지 이어지는 동력인 듯 보입니다. 펭 판관이 아니었다면 바른 길을 찾지도 못했겠지만, 일단은 착한 주인공이 범죄를 적발하고 정의를 세우는 판관으로 성장하기까지는 그의 내적인 자질이 더 강력한 동력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의 농장에선 물소가 쟁기질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과거 한국을 소개할 때 외국의 교과서에서 이처럼 물소가 농사에 쓰이는 그림이 나오곤 했다는 사실도 떠올랐습니다. 남중국은 제주도보다 다소 저위도인데, 과거 중화 문명의 영향을 깊이 받은(그 중에서도 남중국의 망명 정권과 교류가 잦았던) 우리를 그런 식으로 오해한 것도아주 무리는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수한 두뇌와 불타는 사명감 중, 어느 것이 명판관(현대의 명탐정)을 키워내는 데 더 우선적 요소일까요? 물론 둘 다 필수불가결의 자질이나, 이 작품은 송 자 소년의 정의감과 바른 인성이 그를 (앞으로) 위대하게 만들 불씨였다는 전제에서 이야기를 이끌고 나갑니다(앞으로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 것도 같습니다). 물소가 쟁기를 끌고 나가는 질퍽한 논에서, 잘린 머리 하나가 발견되고, 이 머리는 소년이 몰래 사모하던 소녀의 아버지임도 드러납니다. 형과 지방관은 무슨 꿍꿍이인지 이 끔찍하고 억울한 죽음을 은폐하려 듭니다. 개인 차원의 불의와 부조리가 결국은 비틀리고 왜곡된 시대상 전체를 상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흥미진진한 장편은 앞으로 이어질 장대한 시대물, 스릴러의 시작을 알리는 흥겨운 나팔소리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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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관한 거의 모든 것 - 빅뱅부터 암흑 에너지까지, 우주를 이해하다
로베르토 트로타 지음, 이지연 옮김, 이충환 감수 / 교보문고(단행본)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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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주는 광막한 공간입니다. 우리 태양계 주변의 우주가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그간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로 상당한 부분이 규명되었습니다만, 아직도 너무나 많은 비밀이 여전히 베일에 싸인 채 남아 있습니다. 이를 밝혀 내기 위해 전세계에서 최고의 두뇌들이 성실하고 치밀한 자세와 열의로 연구를 거듭하고 있으나, 그들이 애써 알아낸 성과들조차 너무도 난해하고 복잡한 내용이라서, 이를 일반인들이 쉽게 받아들이고 공감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자신만의 언어로 가르쳐 주고 퍼뜨리기란 매우 힘든 형편이죠. 과학이 인간의 삶을 조건을 이만큼이나 바꿔 놓고, 보편 초중등 교육이 대중에게 무상으로 이뤄지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말입니다.

저자는 우주를 연구하고 그 비의를 파헤치는 이름 높은 과학자이지만, 언제나 어린 학생들, 그리고 열성적인 대중과 격의 없이, 인터넷이나 기타 여러 매체를 통한 즐거운 대화를 시도하는 멋진 지성인입니다. 이 책은 서문부터 어려운 말 전혀 없이, 친근하게, 특히 과학에 대해 깊은 지식이 없거나 아직 낯설어하는 독자를 즐겁게 초대하는 듯 따뜻한 환영의 인사로 채워집니다. 어른들이 읽어도 물론 유익하지만, 막막하고 광활하며 끝도 없이 펼쳐진 우주에 대하여 막연한 동경을 품은 어린이들이, 아무 부담 없이 동화책처럼 읽어 나가면 딱이겠다 싶은 그런 책이에요.

우리 인간은 우주의 중심에 서서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할 자격이 있을까요? 아직 지식도 부족하고, 심지어 발을 디디고 사는 지구의 환경에조차 잘 적응 못하던 시절에도, 인간은 엄연히 우주의 한복판에 놓여, 태양과 달과 금성(베누스)과 화성(마르스)이 우리 주위를 돌며, 우리 인간의 장래 운명, 지난 과거 행적에 대한 평가와 예언, 심판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신의 섭리에 복종하고 인간의 무력함을 인식하기는 하나, 모든 공간의 한복판에 자리하여 현상과 사건, 체험의 의미를 판단할 자격은 오롯이 인간에게 있다는 게 그들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인간들은 이런 생각에 바탕하여, 하늘에 수놓아진 별들을 (마음대로 상상대로) 이어붙여, 별자리를 설정하기도 하고 그 배경 설화, 전설을 창작하여 후대에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그저 무의미한 거대한 공간으로 인간의 의지를 짓누를 수도 있는 캄캄한 우주에 대해 자기 나름의 "질서와 희망"을 부여한 셈인데요. 과학자들은 전설이나 신화에 대해 전혀 관심 없을 것만 같아도, 고도로 발달한 천체 망원경으로 매일같이 우주를 들여다 보며 하는 일 역시 결국은 저런 고대인들의 작업, 노력과 크게 다를 바는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는, 가까운 미래에 우주로부터 어떤 재앙이 닥치리라는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기에, 현실의 당면 과제인 지구에 터잡고 사는 문제에만 집중해도 무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우리가 우주 중심에 자리하건 아니면 그저 머나먼 변방의 미미하게 떠도는 작은 행성에 붙어사는 초라한 처지건 간에(사실 우주에 중심이란 없습니다), 저 광활하고 캄캄하여 슬프기까지 한 공간을 향해 열심히 망원경의 초점을 맞추며 진리의 일단을 파헤치려 듭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이처럼, 일시적인 개체의 생물학적 번식과 존속에 얽매이지 않고 무한히 큰 존재를 향해 시선을 주고 정력을 기울일 수 있어서 존엄한 존재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처음 "암흑 물질"의 존재에 대해 설명을 내어놓았을 때, 사람들은 이미 상대성이론으로 확고한 명성과 업적을 쌓은 그를 향해 비웃었습니다. 자신의 이론(중 방정식)으로 설명 안 되는 부분을 모두 "암흑 물질"이라는 모호한 변수로 뭉뚱그렸다면서, 학자로서 무책임한 처사라고까지 비판한 이들도 있었지요. 이 책에도 나오지만, 최근 관측 결과 중 하나가 다시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시사점을 제시하면서, 반 세기를 훌쩍 넘기는 통찰력을 보인 그의 혜안에 다시 감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추세입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초대칭 입자의 모임"으로 암흑 물질의 본질을 파악하는 일군의 과학자들 입장을 소개하며, 어린 독자들에게 초대칭 개념에 대한 설명을 쉽게 풀어줍니다. 암흑 물질과 초대칭 입자라는 두 가지 까다로운 개념을 독자는 직관적으로, 또 통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죠. 마치 원시, 고대 신화를 읽는 듯한 느낌이라서, 지금 과학책을 읽는지 설화집을 읽는지 모를 만큼 집중하고, 또 마음에 오래 남길 수 있는 서술입니다.

일단 밤하늘(물론 공해로 인한 방해가 없어야 하겠지만)을 바라볼 때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건, "아름답다!"라는 탄성입니다. 정말 우주에 별들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아름다운 것인지, 그 광대한 무작위에 인간이 애써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건지는 아직은 모릅니다. 각각 억만 년의 광년 거리에서 제각기 서로 모른 채로 뿜어내는 에너지의 기다란 자취가 이제서야 인간 눈에 도달한 게, 우연히 단일 평면에서 빛나는 듯 착시를 보일 뿐이라는 설명(맞긴 하죠)으로는 인간의 이 날개 돋친 인문적 상상력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그런 건조한 설명과는 별개로, 인간은 우주를 관찰하고 수식을 풀며, 신이 숨긴(혹은 방치한) 섭리에 한 걸음 한 걸음 더디나마 접근해 나갑니다.

추운 밤 따스한 음료 한 잔을 마시며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의 그윽한 눈길이 아니라도, 별들은 알 수 없는 이유와 과정을 통해 다른 별을 잡아먹기도 하고, 덩치를 키워나가기도 하고, 태어날 때의 맹렬한 기세를 뒤로 한 채 초라히 사멸하기도 합니다. 한 여인(누구라도 무관합니다)이 커피를 음미하며 억지로 심어 넣고 꾸며 낸 사연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견해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천체 과학에 무지하건 그렇지 않건 인간이 꾸는 꿈과 내린 결론은 누구에게나 결국 같은 셈입니다. 별의 탄생과 성장, 소멸에 대해 대단히 간명하면서도, 저자는 이처럼 시적인 문장과 발상으로 우리 독자에게, "겁 먹지 마, 네 생각이 어쨌든 맞았단 뜻이야!"를 속삭입니다.

방에 무작위로 뿌려진 수십, 아니 수백개의 동전이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어김없이 앞면을 향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 누구라도 이에 대해 대단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겁니다. 학교에서 확률론을 깊이 있게 배웠건 아니건 말입니다. 오래 전 인간은 우리가 터잡아 사는 지구라는 행성 외에 다른 터전이 없고, 다른 고등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신의 유일한 피조물로서 자부심을 가졌고, 경우에 따라 광신으로까지 옮아가기도 했죠. 많은 과학자들은, 앞에서 든 동전들의 비유처럼, 확률적으로 그 무슨 존재이든 외계의 저편에서 우리와의 소통을 고대하리라고 전망합니다. 하지만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이 민감하고도 여전히 난해한 문제에 대해, 반쯤은 과학자의 냉철한 시선으로, 반쯤은 꿈꾸는 소설가, 이야기꾼의 마음가짐으로, 독자들에게 "당신의 생각은 어떤지?"를 되묻습니다. 분명 정확하고 권위 있는 과학자의 상념인데, 따뜻한 동화 같은 거죽에 싸여 평범한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하듯 전달되는 게 놀랍습니다. 과학이 여전히 부담스러운 독자들이라면, 이 동화책 같은 과학책을 예쁜 일러스트와 함께 읽으며, "우주 물리학은 곧 인간이 꾸어온 꿈"에 다를 바 없었음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큰 소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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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릴리언트! - 나카무라 슈지, LED로 세상을 밝히다
밥 존스턴 지음, 민청기 옮김 / 양문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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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과학, 혹은 그 무엇이든, 그것이 위대한 가치를 지녔다면 그 이유는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닙니다. 인류 중 많은 이들, 인간들에게 폭 넓은 혜택을 빚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칭송 받아야 하며, 반대로 숱한 생명들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그에 공연히 찬사를 바칠 일이 아니기도 합니다. 과학이 진정 위대한 이유는, 그것의 성과가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켰거나, 현존 혹은 잠재의 위험을 눈에 띄게 감소, 제거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헌을 하는 데에 반드시 명문대 졸업이나 번듯한 학위가 필요한 건 아니겠습니다. 또 그러한 업적을 기리는 상(償)이, 버젓한 학위 보유자에게만 한정하여 주어져야 할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나카무라 슈우지(中村 修二)씨는 일본의 지방 국립대를 졸업했으며, 명문대 병설 대학원에 불합격했을 뿐 아니라, 마쓰시다 입사시에도 여러 결격 사유가 눈에 띄어 입사하지 못한, 대체로는 평범하다 할 수준의 엔지니어였습니다. 최근 몇 년 간 그의 생애를 다룬 책, 혹은 그가 직접 자기 주장을 담아 쓴 책이 여러 권 나오는 이나모리 가즈오 씨가 마침 이분의 가능성과 역량을 눈여겨 봐 그의 회사 교세라에 입사할 기회를 얻었고, 이후 이름도 없는 중소기업에 몸 담게 되었을 뿐, 인재의 제 가치를 알아 주지 않는 풍토 때문에 자칫하면 이름 없이 한 생을 마칠 뻔한, 남 보기에 그저 조금 두드러진 열정을 지닌 정도의 엔지니어였습니다. 비록 나이 40이 넘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는 하나, 일본이나 우리 나라나 이런 성격의 학위 수여가 사회에서 어떤 평판을 받고 마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뢴트겐, 막스 플랑크, 퀴리 부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채드윅 같은 쟁쟁한 석학, 영재 출신들, 위인전에나 실려 마땅한 인생들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경력을 꾸려 온 이분은, 201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모두가 의아해했지만, 노벨상 위원회는 그와 다른 두 분의 (공동)업적이 이 유서 깊은 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판단했고, 설명을 들은 학계와 세계 언론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브릴리언트! 이 단어는 물론 (사람의 품성이나 두뇌가) 영리하다는 뜻도 지니지만, 일차적 의미는 "환하게 빛나는"이란 형용사죠. 토머스 알바 에디슨이, 아이들 전기에도 나오고 우리 모두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천 번이 넘는 실패 끝에 일궈낸 전구 발명"을 이룩한 이래, 인류는 백 년 넘게 별 큰 개량이 이뤄지지 않은 백열 전구만 써 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들어 발광 다이오드라는 새로운 구조가 개발되었고, 2007년에 고휘도 청색 LED가 이 세 분, 이름도 없는 중소기업 연구원들에 의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일개 전구 따위의 개량이 무슨 큰 업적이냐고 되물을 수 있어도, LED처럼 다양한 분야, 시설, 장소, 상황에 적용되는 보편적 부품도 드물거니와, 성능이나 수명 면의 현격한 희생 없이 더 저렴한 비용으로 다량 생산이 가능하게끔(그것도 여러 단계를 뛰어넘어) 설계 구조를 혁신하는 건, 결코 만만한 수준의 창의적 쾌거가 아닙니다. 뻔해 보이는, 더 이상 살펴 보지 않은 구석이 과연 남아 있을지 의문인 분야에서 보란 듯이 이뤄내는 업적이 더 어려운 법이며, 동종업계에 종사하던 많은 이들이 "아, 왜 그걸 놓치고 못 봤을까?"라며 탄식하게 만들기란 흔히 보는 현상이 아니죠. 그런 순간은 역사책을 통틀어 몇 번 등장하는 게 고작입니다. 그런 극적인 사건을 우리는 우리와 동시대에 목격한 것입니다. "전기 회로의 개량"이 "힉스 입자", "인공지능", "블랙홀 이론" 등에 비해 초라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당장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에 잔잔한, 그러나 필수적인 편의를 제공하는 폭과 깊이로는 이만한 업적이 또 없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LED 발명 자체가 나카무라 슈지 씨 등의 최초 업적은 물론 아닙니다. 이미 40여년 전부터 실용화, 대량 생산의 가능성이 넉넉히 점쳐졌고, 다만 이 기술 분야가 어느 정도 성숙기에 접어든 후로는 그 구조의 복잡성 때문에 어지간한 전문가라도 그 속성을 "한눈에 파악"하는 게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소소한 개선이 아니라 총체적, 비약적 혁신이 이뤄지려면 전체 구조가 한눈에 들어와야만 그 방법이나 방향성, 미진한 부분, 취약점 등이 모색될 텐데, 어지간히도 꾸준히, 그리고 굵직굵직한 발전이 그간 축적되었다 보니 엔지니어들조차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하는 형편이었던 겁니다. 사실 이런 구조가 P와 N형 반도체의 단일, 혹은 다중 접합을 통해 이뤄진다는 정도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도 물리 시간에 가르쳤던 내용입니다. 더 환하게, 더 오래 지속되게 회로를 만들려면, 이들 소자가 최적화된 모습, 패턴으로 배열되어야 하는데, 이게 초기 단계에서는 몰라도 현대 LED 회로처럼 고도로 집적된 부품을 놓고는, 연구의 양적 축적에 따른 자동적(?) 개선을 제외하고는 근본적인 환골탈태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걸 이분들이 거의 뿌리채 바꿔 놓았다고 할 놀라운 업적을 이룬 거죠. 다른 연구진들의 과거 수십 년 간 쌓아올린 업적이 만만치 않았기에, 이들의 혁신이 더 놀라운 겁니다. 마치 삼십대에 접어든 이가 갑자기 키를 15cm 더 키운 게 안 믿어지는 것과 비슷하죠.

저렴한 가격에 더 나아진 성능으로 보다 많은 이들(주로 가난한 나라의 빈곤층)에 결과적으로 엄청난 편의를 제공하게 된 업적이기에, 마치 괴테가 죽을 때 남겼다는 말처럼 "더 많은, 더 많은 빛을!"이 연상되어 더욱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돌이켜 보면 인간이 무지몽매한 의식으로 그저 먹고살기만을 위해 발버둥치던 아찔한 원시에서 이만큼이나 진화해 온 게, 어둠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려는 정신, 혹은 밝음을 희구하며 발버둥치는 인류의 간절한 몸부림, 그 중요한 단계의 상징과도 같은 업적이 아닐지요.

순수 이론적 측면에서 고찰해도, 일단 그들의 성과와 연구는 반도체 공학의 핵심 기반을 이루는 양자 역학 정수의 상당 부분이 원용됩니다. 뿐 아니라 이 책 저자의 평가에 의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로 평가받아야 할 나노 기술"이라 불릴 만큼, 최첨단 유기화학, 분자 생물학의 성과를 융합한 대단한 쾌거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매우 고무적인 건, 이들이 별볼일 없어 보였던 일개 중소기업의 연구원 출신으로 이처럼 놀라운 업적을 이룬 데서도 알 수 있듯, 자기 분야에 열의와 애정을 가지고 몰두하는 어떤 엔지니어도, 심지어 연구 전성기를 지났다고 할 연령대라 해도, 평지돌출 파천황의 놀라운 업적을 낼 수 있음을 다시 확인했다는 점입니다. 만약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이고 투명한 과정으로, 성실하고 열정 넘치는 엔지니어들을 주목하여 이들이 안정적으로 자기 일에 전념하게 지원해 준다면, 한국에서 제2 제3의 나카무라 씨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제 적성의 소중한 배양이 자신과 국가, 나아가 전 인류를 위한 소중한 발걸음일 수 있음을 어려서부터 가르치는 게 필요합니다. 특히 소홀해지고 있는 작금의 과학 교육 실정을 보면 이 부분이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군요. 뿌리지 않은 곳에서 어떻게 무엇을 거둘 수 있겠습니까? 언제나 노벨 상 수상자가 배출될까 개탄만 할 게 아니라, 그 바른 길이 바로 지척에 있었음을 이 소탈하고 수수해 보이는 늙은 엔지니어의 지난 치열한 삶이 잘 보여 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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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시간을 걷다 - 한 권으로 떠나는 인문예술여행
최경철 지음 / 웨일북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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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처럼 우리와 정서, 문화, 취향, 살아온 지난 내력 등이 판이하게 다른 지역을 여행하려면, 물론 가벼운 마음으로 현지에 떨어진 후 자연스럽게 와 닿는 느낌대로만 즐기다 와도 본인만 뿌듯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래도 미리 공부랄까 마음 자세 같은 걸 다듬고 갔다 오면 아마 남는 게 더 많고 더 충실한 시간이 되는 게 보통입니다. 준비를 해야 주어진 시간도 더 알차지고, 행여 돌발 변수가 나타나도 유연히, 별 손해 없는 대응도 가능하기에, 요즘은 다들 각자 능력 범위에서 (따로 돈 들 것도 없는, 그저 공부니까) 뭔가 챙겨 보고 떠나는 게 보통이죠.

2) 반대로 현지에 다녀올 생각은 없지만 그냥 교양과 지식을 쌓고 싶어서 이런저런 책을 들춰 봐도, 해 본 사람은 알지만 책(혹은 인터넷이나 기타 시청각 매체)만으로 접하는 타지, 타향이란 정말 그 진정한 이해에 한계가 있습니다. 안 갔다와 보고 아무리 열심히 파 봐야, 나 자신에게나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기로나 정말 어느 선을 못 넘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타자, 타지에의 이해는, 책도 읽고(폭 넓은 간접 체험), 현지 답사(집중도 있는 직접 체험)가 동시에 이뤄져야 가능합니다.

3) 아무리 역사책을 파고들어도 이해가 안 되던 내용이, 해당 시대와 공간을 배경으로 삼은 소설책 한 권 읽고 말끔히 납득되던 체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합니다. 물론 역사(팩트 사항)와 문학(픽션 속에 스며든 일정한 주관적 지향성)은 구별해야 하지만, 어떤 관점을 내 비전의 메인으로 삼을지는 좋은 기회(적절한 문학 작품)를 만나 더 강렬히 내 것으로 새기고 성숙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직간접 체험으로도 충족 안 되는 어떤 목마른 부분은 상상과 영감의 결정체인 문학으로 해갈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위 1) 2) 3)이 모두 한 권에 담긴, 정말 보기 드문 정성과 내공이 담긴 멋진 책입니다. 저는 지금껏 이런 포맷으로 쓰여진 책을 한 번도 못 읽어 봤는데요. 우리 같은 일반 대중 독자가 읽기 좋게 쉽고 친근한 말투로 쓰여 있지만, 우리의 소양을 쌓아 줄 가르침은 적잖이 깊은 수준까지 파고 드는 서술입니다.

보통 텍스트로만 이어지는 서술이라면 그게 아무리 정확성을 기하더라도 전달에 한계가 있는데, 이 책에는 좀 이해가 어렵겠다 싶은 대목에서 반드시 맞춤형 도판이 등장합니다. 4) 만약 건축이면 말 본문 서술을 돕는 범위에서, 다른 사항이 생략된 평면도, 측면도 등이 딱 옆에 제시됩니다. 5) 주제가 되는 건축물의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양식을 저자나 다른 정평 있는 견해를 통해서만 묘사하면, 아무리 빼어난 문필가의 솜씨라도 역시 한계가 있겠는데, 이 책은 구도가 잘 맞는, 찍는 사람의 의도가 선명히 구현된 사진으로 본문을 뒷받침합니다.

4)와 5)는 다른 책에서도, 이 책에서만큼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전혀 못 보던 시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은, 건물과 유적과 미술품에 담긴 본원적 의미를 캐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역사적 배경을 독자 앞에 제시하기 위해, 6) 맞춤형 지도를 수십 컷 본문에 삽입합니다. 제가 지도 마니아라서 지도책도 모으고 웹 여러 곳에 있는 멋진 그래픽도 혹 보일 때마다 PC에 저장해서 컬렉션을 나름 꾸미는데, 이 책에 나온 지도는 (모르긴 해도) 저자님의 직접 편집이라 제가 딴 데서 본 적도 없고, 텍스트와 긴밀히 연결된 정보를 담은 덕에 본문의 방주(傍註)처럼 기능합니다. 정보는 필요한 걸 적절히 집중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 단계에서 불필요한 사항을 과감히 생략하는 요령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이 책에 실린 지도들은 그런 점에서 너무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른 역사책을 읽으면서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백지도를 하나 펼쳐 놓고 책 텍스트의 설명에 맞추어 손으로 그려 (채워) 가면서 스스로의 이해를 돕기도 하는데요. 이 책을 읽으면서 평소에 머리 속에 그림이 잘 안 잡히던 사항까지 말끔히 이해시켜 주는 지도를 여러 컷 만나 너무도 반가웠습니다. 좋은 책은 이처럼 저자가 자신의 의도를 잘 전달할 뿐 아니라, 독자가 평소에 품던 다른 의문까지 풀어주기도 합니다. 이 모든 미덕이 7) 깨끗한 천연색 인쇄로 이뤄져 독자가 보기에 너무도 편합니다. 이런 책은 저자와 편집진의 노고를 감안해서라도 목욕 재계하고 최대한 맑은 정신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만큼요.

책 표지에 나와 있듯 유럽 중에서도 서유럽, 그 중에서도 독, 불, 영, 서(스페인), 이탈리아의 문명에 초점을 맞춥니다. 대체로 a) 건축물과 미술품 b) 고대(초기 희랍 문명과 헬레니즘, 로마 제국까지 두루)에서 중세에 이르는 시기의 정치사, 문명사 c) 소설 형식으로 풀어주는 민중의 생활사 등 세 가지 줄기가 번갈아 서술됩니다. 한 가지 주제를 아무리 재밌게 풀어도 장시간 집중하면 지루해질 수 있는데, 이 책은 a) b) c)를, 페이지 바탕색까지 달리 잡아가며 적정 분량씩 노출시키기에 독자의 시선을 내내 붙들어 둡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거나 다소 의문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책의 편집과 참신한 구성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무조건 저자의 치밀하고 꼼꼼한 설명에 동조하고까지 싶어졌습니다. 책 읽으면서 이런 느낌과 공감을 갖기도 드문 체험이었네요.

모두 여섯 개의 챕터인데, 첫 장은 로마네스크 양식입니다. 이처럼 일단 주된 모티프나 토픽은 건축물이나 미술품 등 현재 우리에게 남아 전해지는 유형적인(tangible) 대상입니다. 건축물과 유적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곁다리를 쳐나가듯 역사 이야기, 심지어 당대를 지배한 사조와 철학의 설명에까지 옮겨가는 식이죠. 앞서도 말했듯 이렇게 이야기를 끌어가도 이해를 돕는 보조 자료가 없으면 서투른 독자는 보조를 못 맞춰 가는데,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독자를 배려하는 품이 압권입니다. 수사(구교의 수도사), 석공, 그리고 제법 긴 분량(함께 모은다면)의 소설에서 중요 인물 중 하나인 클라우스가 등장하여, 건조하고 박제된 꼴이 아닌 피와 살을 갖고 살아 숨쉬는 "인간들"이 받아들이고 꾸려나간 역사, 인문, 미술, 조형 등의 의미가 무엇인지, 시간의 고금을 초월하여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어조와 감정을 불어넣으며 그럴싸한 한 편의 소설이 이어지는데, 이런 다차원의 접근을 통해 독자는 저자의 의도대로, 입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역사와 문화, 사상,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 서유럽인이라는 인간들"에 대한 이해를 넓혀 나갑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저 신학자에 그친 인물이 아니라, 당대 서유럽 문명권이 이해하던 모든 지식을 백과전서적으로 정리한, 중세 전반의 큐레이터적 지식인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를 다루며 종래 우리가 알던 평면적, 파편적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먼저 고딕 양식(성당 등)의 스테인드 글라스로 화제를 꺼내고, 이에 반영된 "빛"의 원리를 중세인이 어디까지 이해했는지를 설명하며, 그 지식 체계의 챔피언이라 할 성 토마스의 견해와 철학까지 논급하고, 이어 중세라는 시대의 성격을 함축적이면서도 풍성하게 정의합니다. 그러니 줄글 한 편을 읽으며 건축, 미술, 종교, 역사 모두에 독자가 접근, 공감, 이해하는 셈입니다. 모든 지식이란 분야별로 따로 놀아서는 죽은 지식이며, 참된 지혜란 가능한 많은 사항이 이처럼 유효한 하이퍼링크로 연결연결되어야 생성 가능하죠. 뿐 아니라 이렇게 영양가와 밀도 있는 공부를 해야, 여행 갈 마음도 부쩍 내키지 않겠습니까? 한 번 갔다 온 곳이라도 말입니다.

르네상스라는 전혀 새로운 시대의 조류가 문화계, 지식인을 중심으로 도도히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기독교(구교)의 몰락이 반드시 그와 수반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역사상의 모든 조류와 사상, 대세는 반드시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배타적으로 몰아내어야만 제 자리가 잡히는 건 아니죠. 그러나 가톨릭의 교세는 유럽 전체에서 전반적, 불가역적으로 퇴조하는 모양새였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 (이런 성격의 책에서 꼭 다룰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상세히 개인적 논증을 펴고 있습니다. 물론 특정 종파를 비하하자는 게 아니라, 앞선 두 챕터에서도 자상하게, 또 주제(건축과 미술)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설명이 나왔듯, 직전 시대의 성과와 미덕(아쉬운 대로라도)을 그대로 이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배려의 산물에 가깝습니다. 동시에, 이 책이 그저 건축 양식이나 명소, 미술품에 대한 단선적 설명이 아닌, 인문과 역사 전반을 조망하자는 보다 깊숙한 저술의도를 잘 실현하는 시도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바로크 시대로 넘어가며 처음 등장하는 내용이, 주인공들 중 하나인 프란치스코가 어느 과부의 화형식을 무기력하고 침통하게 지켜 보는 장면입니다. 언제나 시대의 전환이란 점이적(漸移的)이어서,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풍의 잔재와 인습이 미래의 앞길을 (미미하게, 혹은 지저분하게) 가로막기도 하는 법이죠. 책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처럼 연재 소설처럼 이어지는 내용이, 집중만 하면 꽤 재미가 나기 때문에 결코 놓치시기 말길 바랍니다. 이 소설이 또한 시대와 공간을 압축적인 이미지로 한번에 확 전달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바로크 시대 건축물 하면 알프스 이북만주로 떠올리기 쉬운 게 한국의 독자들인데, 이 책은 로마 인근을 두루 짚고 있어 선입견 때문에 소홀하기 쉬운 곳도 살피게 돕습니다. 그러니 아 다음엔 여길 한번 가 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정말 절로 듭니다.

서서히 대영제국의 시대가 열리며 등장인물도 워렌 같은, 그 시절의 전형을 일부나마 대변할 만한 캐릭터가 새로 등장합니다. 신고전주의가 등장하여 정연한 질서와 체제의 미덕을 변호하는 풍조가 생성되는가 하면 계급 혁명의 전조를 예고하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들이 지성계와 예술계에서 이미 두드러진 사조로 부상합니다. 이처럼 모순되어 보이는 거대한 두 흐름이 맞부딪히며 서유럽은 오히려 전례 없는 발전과 혁신의 동력을 마련하며, 건축과 미술에도 이런 인간 정신의 방향과 역동성이 반영되는 흔적이 뚜렷해지고, 저자는 예리한 눈길로 독자에게 일일이 이를 포착하여 주체적인 시선으로 소화해 볼 것을 권유합니다.

책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지금까지 진지한 소통을 이뤄 온 상대였던 그들의 과거가 어떻게 현재에 안착했는지,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대화와 소통의 의의는 무엇인지, 현대 미술과 건축, 그리고 이 분야 거장들의 자취와 업적을 통해 다시 정리를 시도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특히 좋았는데요. 과거 역사, 인문, 문화에 대한 회고는 여태 많은 저자들이 시도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입체적으로 돌아본 서유럽의 역사와 종적이 당시에는 어떤 비중과 색채였는지를 파노라마(그것도 3D)로 보여줬을 뿐이라, 이런 의의를 현재에까지 유기적으로 접목시켜(4차원이라고 해야겠네요)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기까지한다는 거죠. 책을 읽고 나서, 교양이 늘고 보는 시야가 넓어졌을 뿐 아니라, 아 밖의 넓은 세상이 이처럼 친근하고 현재적 의미로 다가올 수 있구나 하는 각성 때문에 문득 영감과 의욕까지 솟게 하는 게... 별 열 개가 아깝지 않은 멋진 체험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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