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승자의 생각법 - 무엇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는가
도널드 트럼프 지음, 안진환 옮김 / 시리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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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의 의사라는 게 많은 경우, 그저 드러난 분명한 문언(워딩)만으로 전달되지 않고, 오히려 표정 등 비언어적 매체라든가, 말 속에 숨겨진 다른 뉘앙스로 더 심각한 메시지를 상대에게 알리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건 우리 동아시아인들의 장기이며, 일본이든 중국이든 우리 나라든 "은근한 중에 본심을 알리는 기술, 그를 잘 받아들이는 기술"이 빼어나야 그게 커뮤니케이션의 대가라며, 소통과 관계의 달인이라며 때로는 대인의 풍모로 칭송받습니다. 야마오카 쇼하치의 <대망>에 보면 이 점이 특히 잘 드러나죠.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2년여 동안, 각종 기행과 터무니없는 언사로써 전세계인들을 놓고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는 그저 언더독이라든가 미미한 후보 정도가 아니라, 공당(公黨)의 경선에 참여할 자격도 없는 미친 광대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죠(그는 자신만의 일인 정당을 만들어 이미 대선에 참여했던 적이 있습니다). 다만 그가 공화당 후보로 확정되어 가는 대략 7월경부터, 전현직 유력 인사들이 그의 진영에 합류하는 모습이 뭔가 심상치 않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는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CIA 국장으로 재직한 제임스 울시도 끼어 있었지요(참고로 이 사람은 국장 시절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한 모습이 당시 한겨레신문 기자에게 사진 찍혀 세계적인 특종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사건이었죠). 거물들이 그를 돕는다는 건 첫째 일단 그의 승산이 의외로 높다는 점, 둘째 미친 광대처럼 보이는 그의 언행 이면에 뭔가 영리하고 일관된 전략이 숨어 있다는 점, 셋째 거물들의 자신의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여 유리한 제휴 관계를 맺게 하는 데 그가 탁월한 능력이 있기는 하다는 점, 이 세 가지를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강하게 시사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의사를 밝히기 전에 쓰여졌습니다(한국어로 번역된 것 중에는 당선 이후 기준으로는 처음 출판 허락을 맡은 책이죠. 그는 이미 성공한 청년 사업가 자격으로 1980년대 후반에도 자신의 저서 한국어판을 발간한 적 있습니다). 그리 학식이 깊지 못해서인지, 불필요한 미사여구나 번거로운 수식 없이 필요한 말만 간단하게 전달하는 특유의 어법과 스타일이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모든 서술에서 그런 (이 사람 나름의) 장점이 관철되는 건 아니라서, 어떤 대목은 너무 간명하게만 서술된 탓에 몇 번을 읽고 나서야 의미가 정확히 파악되기도 했습니다. 하긴 정확하고 명료한 문장을 구사하는 건 아랫사람들의 의무이자 덕목이지, 사장님이 번거롭게 차려내야 할 사항은 아니죠. 독자는 물론 그의 서비스(저술한 책 읽어주기)를 돈 주고 구매하는 "고객"의 입장이지만, 트럼프야 "까짓것 못 읽겠으면 그냥 관둬"라며 오히려 갑질을 할 만한 위치이니.

이 책을 읽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원서나 이 번역서의 편집 태도처럼, 저자(혹은 편집자)가 크고 굵은 글씨로 강조해 둔 결론에만 초점을 두어, 자계서처럼 읽어내는 것입니다. 둘째,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트럼프가 그런 결론을 도출한 "자신의 진짜 사업 경험담 회고"를 꼼꼼히 읽고, 어떻게 해서 세계의 경제 수도 한복판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이름 없는 땅을 관광이나 리조트 명소 등으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는지 꼼꼼히 분석해 가면서 읽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늘어놓는 말은 거의 80% 정도를 걸러들어야 현명한 태도이겠습니다만, 트럼프는 못된 소리를 지껄일망정 사업 관련 거짓말은 하지 않는 스타일 같습니다. 그가 새빨간 거짓말쟁이였다면 신뢰를 잃어 사업계에서 벌써 매장당했을 것입니다. 광대짓을 한 건 리얼리티 쇼 출연이나 정계에 데뷔한 후의 일이죠. 무엇보다, 그가 사업 관련 정직한 성공을 거둔 건 그의 이름이 새겨진 미국과 세계 각지의 명소, 랜드마크 건축물 등의 빛나는 성공에서 증명이 됩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그렇게 많은 성공을 그저 요행수나 투기꾼의 촉만으로 이뤄낼 수는 없죠.

트럼프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돈으로 투기꾼 짓을 해서 성공한 케이스가 아닙니다. 목 좋은 곳, 노른자위 땅을 알아보는 감각이 탁월하되, 일단 목표로 삼은 땅이나 낡은 건물이 있으면 이를 두고 최대한의 경제적 가치를 뽑아내는 방법(재건축 혹은 리모델링 방법, 혹은 용도 자체의 근본적 변화)를 상상하고(이 단계에서부터 비상한 크리에이티브가 요구되죠), 그 구상을 현실로 옮기는 실천과 집행의 대가, 마스터더군요. 말은 쉬워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당면의 현실, 현상에만 집착하지 그 이면에 숨은 가능성을 보지 못합니다. 망해가는 건물이나 부지를 보고 "여긴 뉴욕의 새로운 도심으로 확 뜨겠는걸?" 같은 확신을 갖고, 부지마다에 가장 어울리는 역할을 (시대의 트렌드에 따라) 정해 주는 능력과 센스("여긴 레스토랑, 여기는 호텔, 여기는 쇼핑몰이 가장 잘 어울리겠군")는 아무나 갖는 자질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도 신격호 롯데 창업주가 이런 스타일이지만, 그런 그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정도까지는 아니었죠. 신격호 씨는 전후 폐허가 된 일본, 한국에서 일어선 사업가지만, 트럼프는 이미 판이 다 짜여진, 난다긴다 하는 사업의 고수들이 대거 포진한 뉴욕 한복판에서 창업을 해 내 일인자로 올라섰다는 게 중요합니다.

설령 부동산 감식, 구상, 설계 감각이 탁월하다 해도, 그 다음이 진짜 문제입니다. 뉴욕 같은 곳에 부동산의 소유권, 혹은 용익 물권. 담보권 같은 게 어디 보통 치밀하게 짜여져 있겠습니까? 소유권은 (현재 소재도 파악 안 되는) 누군가가 갖고 있고, 애써 그 사람과 타협을 이뤄 놓으면 이번에는 그의 채권자나 동업자를 찾아 다른 이해관계를 해소하고 금전으로 마무리지어야 땅이 내 것이 됩니다. 사람들을 찾아내어 일일이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보통 사람 같으면 땅 한 필지에 무슨 이렇게나 복잡한 재산권들이 얽혀 있는지 아예 이해가 안 됩니다. 사람을 설득하는 것도 예사 기술이 아닐 뿐 아니라, 그렇게 설득하려면 법률 관계와 경제적 전망 등에 대해 정확한 파악과 사업 구상이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 노른자에 재산권을 보유한 이가 어디 바보라서 아무 말에나 넘어가겠습니까?

이렇게 어렵사리 내 땅으로 확보한 후라 해도, 이번에는 관청을 찾아가 어떤 규제가 내려져 있는지, 이를 완화하거나 최대한 유리하게 적용할 방법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건축 행정 법규에 달통한 수준이라야 하겠죠. 모든 여건이 마련되어 내 구상대로 일을 벌일 수 있다 해도, 가능하면 최소로(부실 아닌 범위에서. 트럼프는 싸구려로 원가를 후려치는 방식을 엄청 싫어하더군요. 이 책을 읽어 보면. 하긴 그런 편법으로만 일관하면 적당히 돈을 벌 수는 있어도 이 정도로는 성공하기 힘들죠) 비용을 들이고, 최대한 미관을 아름답게(트럼프가 아주 집착하는 면 중 하나입니다) 만들려면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걸 또 고민해야 합니다. 이걸 뜻대로 해내려면, 골조 시설, 자재의 특성, 토목 방식 등 건축 전반에 걸쳐 전문가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류 건축가(트럼프는 일류 아니면 고용을 안 하더군요)가 안을 들고 와도 이게 자기 구상에 맞는지 더 개선을 요구하든지 판단할 수가 있죠. 대충 일을 해서 그만큼 어디 돈을 벌 수 있었겠습니까. 집요하고 매사에 끝장을 보는 성품이 오늘날의 그를 만든 비결입니다.

트럼프는 리얼리티 쇼 출연 제의를 받고 엄청 망설였다고 합니다. 이 점도 우리가 선입견으로 가진 바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라 흥미롭더군요. 이런 멍청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왔다가 내 위신과 명성에 먹칠만 하는 건 아닌가? 이럴 때 그가 믿는 건 (일단 한 번의 의심과 회의를 거쳤다가) 정직하게 떠오르는 그의 감각이라고 합니다. "그거 괜찮을 것 같은데?"라고 열정, 의욕이 확 솟구치면 그때부터는 좌고우면 하지 않고 밀어붙인다는군요. 이런 건 사람이 타고난 자질이라서 누가 따라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남겨진 그의 명언 중 하나는, "열정과 의욕이 생기는 일은 누가 아무도 격려 해 주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추진할 수 있다."였습니다.

트럼프는 이 책에서, 그가 만나고 겪어 온 많은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실명까지 거론해 가며 회고합니다. 어떤 이는 교섭 상대자로서 깐깐하게 굴었지만, 일단 약속한 바는 반드시 지키는 인격자라면서, 이런 사람이 협상 과정에서는 힘들게 해도 결국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게 하는 조력자나 마찬가지라는 취지(트럼프는 좋다 싫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등 직설적인 표현만 하는 사람이라, 제가 이 서평에 쓰는 어휘처럼 추상적인 말은 책에 없습니다)로, "휼륭한 인격자"라 평하며, 자주는 아니라도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런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며 의외의 극찬을 합니다.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며, 리스펙트를 보내야 할 대목에서 정확하게 멈추며 겸손해할 줄도 아는 게 그의 장점이라 하겠습니다. 이게 가식이 아니라 그 나름으론 다 진심이라는 게 특이합니다. 반면, 제때 대출을 안 해 주며 앞에서 하는 말과 뒤의 행동이 다른 어느 은행장(여성이며, 이분도 꽤 유명한 인물입니다)에 대해선, "내가 아는 가장 무능하고 어리석은 뱅커"라며 가차없는 독설을 퍼붓습니다.

자계서를 읽으면서도 그 속에 담긴 팩트를 어렵사리 추출, 본격 경영서나 실무서처럼 읽을 수도 있고, 반대로 경영학 교과서를 읽으면서도 "인생의 지혜가 이 중에 담겨 있음"을 깨달으며 (고차원의) 자계서 독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트럼프는 세련되고 학식 높은 대화를 할 줄 모르는 인간이지만, 그의 말은 일단 허투루 들을 것이 없고, 좋든 싫든 반드시 말 중에 뼈를 심거나 유익한 제안을 담거나 하는 식입니다. 동양인들이 예로부터 즐겨하던 고맥락 소통(전혀 아닌 것 같은데)에 능한 유형이며, 이 사람의 개성을 잘 알아야 한국의 앞길도 순탄할 뿐 아니라, 일단 사업가로서 그가 눈부신 성공을 거둔 과정은 누구 눈에도 흥미롭고 유익하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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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 전문직의 미래 - 빅데이터, 인공지능, 기술혁신이 가져올 새로운 전문직 지형도
리처드 서스킨드.대니얼 서스킨드 지음, 위대선 옮김 / 와이즈베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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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에 어느 포털에 게시된 언론사의 기사(조만간 외국어 간의 완전한 통역이 가능한 AI 소프트웨어가 등장한다는 내용) 밑에 이런 덧글이 달린 걸 본 적 있습니다. "통역사가 직업을 잃을 정도 같으면 다른 직업은 뭐..."

이 책의 역자께서는 서문의 말미에, '"원제 중 profession의 뜻은 '직업'이란 뜻이므로, '전문직의 미래'보다는 '직업의 미래'라는 게 차라리 적절하다."라는 언급을 하고 계십니다. 제가 위에 인용한 어느 네티즌의 덧글처럼, 도대체 통역사처럼 고도의 지식과 감각과 순발력을 요하는(물론 국제행사의 TV 생중계에 출연 가능할 정도의 일류를 두고 하는 말이겠죠?) 직종마저 "인공 지능이 떨어대는 유세"에 밀릴 정도라면, 사람이 고유의 정신과 육체적 기능으로 AI에 밀리지 않고 지켜낼 수 있는 직업은 하나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자의 지적은 (설령 그런 의도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해도) 백 번 타당합니다. 4차 산업 혁명의 핵심 동력, 트렌드, 지향점 중 하나인 AI가 몰고 올 미래는, "전문직을 필두로 한 직업 전반의 소멸과 퇴조상"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직업 일반, 전반의 위기를 짚어내기 위해선 가장 대체되기 힘든 직업군일 "전문직"의 현 시점(4차 산업혁명이 노도와 같이 밀어닥치는 작금)에서 갖는 위상, 전망, 변화상이 무엇인지 짚어내는 게 가장 중요하면서도 "경제적"입니다.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듯, 전문직은 과연 AI의 효율성(엄청난 저장 용량과 정보 처리 속도를 앞세운)과 원가 우위(사람보다 싸니까 AI를 쓰는 거죠. 아니라면 사람을 고용하는 게 나을 거고요)에 밀려 사멸하고 말 것인지, 전문직이란 막연한 말로 포섭한다 해도 직종이 천차만별인데, 어떤 건 선방하고 어떤 건 근근히 버티며 어떤 건 벌써부터 단순노무직으로 전락하고 마는 중인지, 각론별로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좋은 대학을 나와서 "사"자 붙은 직업만 가지면 열쇠 몇 개가 딸려온다느니 하는, 지극히 전근대적인 낭만과 환상이 뒤섞인 주문이 유행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AI가 선도하는 4차 산업 혁명의 물결은, 이미 "그런 사 자 붙은 직업부터 차근차근 정리해 주겠다는 듯" 공포의 저승사자처럼 다가오는 양 일반에 인식되어 있습니다. 저자 서문에 적힌 한 문장을 읽으며 슬쩍 웃음이 지어졌는데요, 말인즉슨 "... 벌써 이런 논의를 꺼내는 것만으로 이 책을 슬쩍 한켠으로 밀어 놓는 독자들이 많을 줄 안다."입니다.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서점에서 이 책을 펼쳐 든 이들이라면, 아마 이런 "매우 솔직한" 저자들의 언명과 너스레 때문이라도 책 읽기를 도중에 멈출 수 없을 줄 압니다. 5년 전쯤 안철수씨가 재인용한 유명한 말(윌리엄 깁슨) "미래는 벌써 우리 옆에 다가와 있지만, 다만 고르게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처럼, 현장의 전문직들이 전혀 피부로 와 닿지 않는 예언이라면 일말의 불안감도 느낄 필요가 없죠.

다른 한편으로, 전문직은 정말 기술 발전의 도도한 추세 앞에 소멸하고 말 운명일까요? 책 1장의 제사(題辭)에는, J S 밀(공교롭게도 부친의 천재 교육으로 위인이 된 인물이네요. 혹 몇 백 년 후인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인공지능을 가장 싫어했을 법한)과 케인즈(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천재형 두뇌였죠)의 말이 인용되어, 인공 지능 혹은 기계가 주도하는 문명 일반의 암울한 미래를 경고합니다. 사실, 이미 1차 산업 혁명 당시에도 지적되었고 많은 이들에게 곤경과 아픔을 안긴 바 있던 흐름입니다만, 기술의 발전은 결국 사람의 직업을 빼앗고 입지를 축소시키는 쪽으로 대세를 일찍부터 잡은 바 있습니다. 맑스의 공산주의 이념 역시 이런 위기 의식(프롤레탈리아 계급뿐이 아닌, 인류 일반의)에서 싹을 틔운 거겠고요. 이런 관점에서라면 현재의 전문직 잠식, 사멸 징후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시간의 문제일 뿐 조만간 전면적으로 대두할 사회 문제임에 분명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리 문제를 단순화하여 짚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책이 취하는 가장 바람직하면서도 믿음직한 태도인데요. 다시 역자 서문에서 일부를 인용하자면 "... 저자들은 논점의 단순화와 아젠다의 센세이셔널한 선점을 위해, 근거 없이 미래상을 왜곡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위기의 징후가 느껴지만, "이건 모두 현실이 아니야!"라며 무작정 부정한다거나, 정반대로 "우린 이제 죽었어!"라며 지레 절망에 빠지는 식으로는 문제의 해결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위험 중 어떤 건 사뭇 가능성 높은 현실이고, 어떤 건 터무니없이 과장되었으며, 어떤 건 확률이 반반이라 당사자의 현명한 대처에 따라 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근거 없는 낙천주의나 비생산적인 패배주의가 아니라, 정확한 현실 인식과 합리적인 대처 방안의 강구입니다.

역자께서는 본인이 명문대 상경계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이라서인지, 한편으로 "전문직의 점차 어두워져가는 전망"에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며 이 책을 펼쳐든 가상의 독자들에게 독려의 말을 건네며, 혹은 (아마도) 한창 장래 모색에 대한 걱정에 여념이 없을 자녀를 키우는 학부형으로서 "과연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설계하게 도와야 할까?" 같은 고민의 일단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이 책은 참으로 방대하게, 그러면서도 세심하고 치밀한 근거를 들어가며, "과연 지금의 어떤 직업이 살아남고, 어떤 직업은 파괴적 혁신(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의 개념을 그대로 원용하더군요) 없이는 사라지고 말지, 선입견이나 논리의 도약 없이 차분히 짚어 나갑니다.

의료 서비스의 경우, 몇몇 문예나 영상물에서 풍자의 대상이 되듯, 컴퓨터의 거친 알고리즘에만 의존하는 돌팔이들이 스스로의 무능을 폭로하며 전문직에서 퇴출되어 나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분명 지금보다 더 기계에 의존하고, 방대한 데이타베이스에 종속될 것이며, 사물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유효하고 세밀한 정보의 도움을 받아, 치료보다는 예방의 기능에 더 힘을 쓸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의료 서비스의 퇴조를 부른다기보다, 오히려 본연의 인술적 기능으로 복귀하는 것이며, 종합적이고 최종적인 판단은 인간에 더욱 의지하는 결과를 부르겠습니다. 전산처리장치의 장점은 빠르고 정확한 정보의 처리입니다만, 이의 메타적 의미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게 한계입니다.

책 앞에 나온 케인즈의 명언에도 드러나지만, 새로운 생각을 해내는 것보다 낡은 다수의 고정관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하는 게 몇 배는 더 어렵습니다. 바꿔 말하면, 인간은 자기 반성, 때로는 전면적인 자기 부정을 통해 거듭 태어날 수 있어서 위대한 것입니다. 기계는 치밀하고 실수가 없지만, 기계의 지능에 발전이란 없으며 "창조주"인 인간이 재 세팅을 해줘야 새로운 분야 작업을 개시할 수 있습니다. 구글이 알파고를 통해 "자체 학습"이 가능한 지능을 구현하겠다고 했지만 마케팅 표어와 학문적 성과를 혼동해서는 곤란하죠.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결정하는 문제에 대해, 기계의 건조하고 융통성 없는 결론이 냅다 내려지는 걸 과연 환자 중 몇이나 이의 없이 수긍할 수 있을까요?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도 인간이고 기적을 일궈내는 것도 인간의 영역입니다.

세무나 회계 서비스는 이미 많은 부분이, AI까지 갈 것도 없이 오래 전부터 소프트웨어를 통해 해결되는 중입니다. 하지만 빈도가 줄지 않는 각종 경제 사범의 현황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의 놀라운 창의성과 교활함(?)은 치밀한 법망을 빠져 나가며, 이를 적발해 내는 것도 인간의 육감이 하는 일입니다. 법률 서비스는 법정에 출석하여 펼치는 변론이라든가, 언어 속에 스며든 모호한 의미차이로 인해 쟁송의 승패가 180도로 바뀌곤 하는 현상들이, 그저 기계적인 처리만으로는 대체가 요원한 형편이죠. 20여년 전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을 때, 일부에선 사이버 가수, 사이버 배우들이 모든 엔터테이너를 실직시킬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사람의 귀를 가장 잘 만족시킬 수 있는 음색과 선율, 사람을 가장 흐뭇하게 만들어 줄 신체 비율과 이목구비의 배치... 이런 것들은 현재 하나도 실현되지 않은 채, 단 한 명의 슈퍼스타 캐릭터도 사이버상으로 개발되지 못한 채 여전히 개성 넘치고 매혹적인, 디지털 파라미터로 도무지 함수변환되지 못한 연예인들이 은막과 모니터를 누비는 모습이죠.

책의 결론은 그렇습니다. 전문직들이 뼈를 깎는 혁신과 선제적 대응을 하지 않으면 현재의 모든 특권적 위치와 고소득은 (과거 육체 노동자들이 그러했듯)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AI가 진화하고 4차 산업 혁명이 전에 없던 상품- 용역의 생산- 소비 구조를 창출해도, 시스템의 문제를 발견해 교정하고 업그레이드하는 임무는 여전히 인간의 창의성에 맡겨져 있는 겁니다. 농경 혁명 이래 언제나 인류가 걸어 온 족적처럼, 낡은 건 쓸려나가고 새로운 건 대접받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기술의 진보는 (압제적인 스카이넷이나 매트릭스의 도래가 아닌)인류의 공영에 이바지하는 거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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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유언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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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만큼 같은 종의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개성을 지니고 태어나며 성장하다 사멸하는 동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애써 발전시킨 나만의 특성과 물질적인 풍요와 정성들여 가꾼 관계를 뒤로 하고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점도 슬프지만, 생의 근원적 아픔은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 혹 내가 누구인지 어렵사리 알아낸 후에도 이를 주위의 요구와 상황에 힘들게 맞추거나 타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그의 정체성 자체가 그를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이들은, 교활한 의도와 서투른 표현으로 자신의 출신과 현재의 신분을 어리석게 거짓으로 꾸며 대기도 하지만, 세상이 그런 수작에 넘어갈 만큼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죠. 물론, 아주 드물게는, 시대가 빚은 비극 속에 자신의 여러 정신적 코드가 절묘히 조율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아픔과 역사의 상처를 함께 추스르고 살아가야 합니다. 과연 연약한(대체로는) 일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과제일까요?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아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마지막 수업을 이끌면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모어를 잊지 않는다면 감옥에 갇혀서도 그 감옥의 열쇠를 갖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남깁니다. 언어는 그저 일상의 욕구나 파편적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그 개인의 지난 삶, 추억, 존엄한 개성, 소중한 깨달음, 심지어 그의 조상과 겨레가 속한 집단 무의식과 문화 유산까지 오롯이 담아내고 있는 거대한 도서관과도 같습니다. 러시아 남성과 결혼하여 먼 이국까지 옮겨와 살아가다 뜻밖에 역사의 격류에 휘말려 온갖 몹쓸 일을 다 당한 샤를롯이란 프랑스 여인에게, "프랑스어"는 그저 처음으로 배운 언어라는 의의 외에 엄청난 무게와 집착과 존재의 근원으로 작용했습니다.

한 여성이 어떤 남성에게 끌려 백년해로의 연을 맺음은 그저 생물학적 충동이 빚은 우연의 산물로 치부할 수 없습니다. 가시버시로 공동의 삶을 일구고 살아가다 후손을 같이 만들고, 그들에게 소중한 추억과 애정을 공유하거나 물려주며 온전한 개체를 성숙시켜 가는 과정은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구태여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의 작업만큼이나 숭고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낳은 아이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배워 입과 몸에 익은 모국어(러시아어) 말고도, 자신의 정체성과 교양과 아련한 기억을 형성하는 질료인 프랑스어를 가르쳤습니다. 프랑스어로 된 옛날 이야기, 프랑스어 가사가 붙은 노래, 프랑스어로 쓰여진 절정기, 원숙기의 문화 정수가 고스란히 담긴 문학,... 어머니에게 이국의 문화, 그 중에서도 세계인의 동경 대상이 될 만한 선진 문화의 핵심을 배울 수 있는 아이들이란 얼마나 행복한 존재들이겠습니까.

볼셰비키 혁명은 분명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상당수의 노동자들에게 해방이라는 환희를 안겨다 준 세계사적 사건이었겠습니다. 스탈린의 리더십 역시 저개발의 수렁에 허덕이던 상당수 러시아인들에게 산업화의 혜택을 가져다 주었으며,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야수적이고 능률적인 이민족의 침공이었던 나치의 미친 시도를 퇴치한 공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시 많은 수의 인민들, 특히 이 책의 저자이자 사실상 이 소설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안드레이 마킨의 가족들에게는, 공산당의 붉은 혁명이 소중한 인생과 영혼의 연속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안긴 끔찍한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린 소년은 파리에 방문했던 니콜라이 2세에 대한 기억을 급우들 앞에서 자세히, 진실되게 말해 주다 공산당 당국의 지목을 받아 가족 전체가 큰 고초를 치르게 됩니다. 그러잖아도 부르주아 출신에다 배우자가 외국인(자본주의 국가인 프랑스인)이란 사실 때문에 새로운 국가 체제에서 안정적 삶을 누릴 수 없던 처지였으니, 이들에게 닥친 끔찍한 운명은 책의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도 상상이 되고 남습니다.

망명자 신분으로 프랑스에 체제하는 시간 역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도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나 조선족, 혹은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느낄 만한, 그리고 겪을 만한 소외감이나 직접적인 고통, 불편과 비슷하겠죠. 아이는 그의 신분, 출신이 학교 급우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내내 국외자로 겉도는 신세입니다. 그는 분명 프랑스 문화에 익숙하고, 대화에 끼기 위해 열심히 화제를 익히며, 서툴지만 열심히 프랑스어를 말하고 씁니다. 외할머니가 가르쳐 준 지식, 그녀와 함께한 추억 위에 기반한 소중한 발성, 문법, 기능이지만 텃세 강한 원어민들이 보기엔 여전히 낯선 이방인의 발버둥에 지나지 않습니다. 러시아에서는 혈통 속의 프랑스성이 문제가 되어 축출된 아픈 과거가, 이제 외할머니의 모국인 프랑스에서는 자신과 부모, 가족들의 러시아 연고가 차별의 표징으로 작용합니다. 마치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는 자이니치로 지문 등록 대상이 되며 경원시되고, 한국에 건너와서는 반쪽발이라며 멸시받던 슬픈 운명과 비슷하다고나 하겠습니다. 중간에 낀 자의 영원한 주변인 지위가 부르는 비극은 세계 어디서나 공통입니다.

역자 이재형 교수께서 적절히 지적한 바처럼, "의식과 시선, 자아의 이중 분열"이야말로 이 자전적 소설의 핵심을 관통하는 몸부림입니다. 마음의 평온을 얻은 이는 무엇을 보건 어떤 감정을 느끼건 그 일관성과 전일성(wholeness)을 유지합니다. 한 번은 이렇게 느껴지다, 다른 한 번은 전혀 이질적이고 생경한 감성에 압도당하곤 하는 혼란이 그를 비껴갑니다. 반면, 주인공처럼 색과 결이 판이하게 다른 동과 서의 두 문화적 유산이 핏줄 속에 뇌리에 자리잡은 자아는, 매 순간 두 번의 필터와 프레임과 수용체가 정신을 교차하는 기묘한 체험을 겪어야 합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무엇을 수용해야 참다운 자신을 안심할 수 있을까요.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몽상가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정신적 특질이 이중적으로 형성된 탓이 컸겠죠. 그는 제정 러시아가 멸망하기 20년 전 프랑스를 방문한 "로마노프 가의 마지막 황제 부처(夫妻)"의 장엄한 행렬, 가극 <르 시드>를 관람하는 장면(외할머니의 기억) 들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20년 후 그들과 그의 일족이 혁명군에 의해 비참하게 처형당하는 장면(부모와 자신이 들은 간접 전언) 등을 교차시킵니다. 소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시제(tense)입니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력처럼 행위자를 붙들어매고 자유를 빼앗는 접착물"이 바로 시간입니다. 이 품위 있고 고귀한 혈통을 지닌 황제는, 서로 적대적인 과거와 미래 속에 붙들려 사지가 찢길 게 아니라, 주인공의 몽상 속에서 화해하는 과거와 대과거 속에서 다시 예전의 평온과 위엄을 찾습니다. 물론 마땅히 있어야 할 조화와 온유함 속에서 가장 큰 안정을 찾는 건 주인공자신이겠습니다. 3대에 걸친 그의 가족들이, 비정상적인 역사의 격동 속에서 입은 상처가 너무도 컸고, 그런 모진 운명을 겪을 만한 죄야 저지른 적 없었으니 어떤 식으로건 사면과 치유가 필요했겠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19세기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펠리스 포르, 예의 그 차르 니콜라이 2세(이 책에서는 프랑스식으로 "니콜라스"로 표기됩니다), 늘어지는 특유의 저음으로 전쟁 독려 방송을 했던 스탈린(사실 그도 프랑스어가 서투른 마킨만큼이나 러시아어가 서투른 그루지야인이었죠), 소름끼치는 독재자의 주구 베리아(그가 모스크바 전체를 자신의 하렘으로 삼고 차를 타고 다니며 여인들을 헌팅했다는 일화도 목격자의 생생함으로 낭독됩니다)까지, 역사의 부조리와 질곡 탓에 모진 운명을 겪었던 주인공의 육성에 담김직한 여러 실존 거물들이 거명됩니다. 역사란, 사회란, 평온하고 선량하게 자신의 공간에서 조용한 생을 마칠 수 있었던 개인들의 삶에까지 이처럼 짙은 그늘을 드리울 수 있는 것인지요. 혹은, 참된 소속감과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고뇌하고 방황하는 게 어디 망명자들만 겪는 아픔과 상실의 산물일지요. 이 소설은 특수 상황에 놓인 개인의 회고담을 가장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근원적 고뇌의 몸부림을 정직하고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목의 "프랑스 유언"은 프랑스식 유언이란 뜻도 되고, 물질 아닌 무형의 언어를 통해 묵직한 유산을 물려 주려 했던, 죽은 외할머니의 소중한 말들 정도로 새길 수 있습니다. 아틀란티스가 결국 존재하지 않은 이상향에 대한 고대인들의 간절한 희구가 빚은 상상이었듯, 주인공에게 프랑스 땅이 갖는 의미도 환멸과 원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잦아들지 않는 동경과 희망 등을 고스란히 담은 것이겠습니다. "선(善)에도 끝이 없고, 악에도 한계가 없는(정말 절묘한 표현이죠. 도스토예프스키도 그 숱한 명작 중에서 자신의 조국에 대해 결국 저 말을 하고 싶었던 건데요)" 말 그대로 애증이 교차하는 러시아 역시, 과거의 상처를 거대한 암흑과 죽음의 눈밭에 덮어둘 저주 받은 헛간이 결코 아님도 명백합니다. 하나도 버거운 조국을 둘씩이나 둔 저자의 육성을 많은 분들이 귀기울여 들어 보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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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치하야 아카네 지음, 박귀영 옮김 / 콤마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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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あとかた, 한자로는 跡形(적형)이라 쓰는데, 우리말로는 "흔적 "정도와 뜻이 통하겠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얕은 연계로나마 이어지고, 접근 방법이 다르긴 합니다만 여튼 여섯 개의 도막들이 같은 주제를 부각하고 있어서 전체를 하나의 장편으로 보는 데 무리는 없을 것 같고요. 불꽃-손자국-반지 까지는 앞 장의 의미 심장한 소재가 뒤의 장 제목으로 바톤을 릴레이하는 식입니다. 넷째 장 "화상" 부터는 이 공식(?)이 관철되지 않을 뿐 아니라, 투신 자살한 차장님이 어렴풋한 배경으로만 언급될 뿐 사실상 단절된 스토리라서 그 부분이 좀 아쉬웠습니다. 저처럼 이런 느낌이 드셨던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그저 옴니버스 연작으로 받아들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불꽃". 여직원인 나는 "지인"의 소개(좀 모호하죠)로 연상인 유부남을 만나게 됩니다. 좀 있으면 그럭저럭 괜찮은 남자와 결혼까지 할 예정인데도 그렇습니다. 혼인이 정말, 흔한 말처럼 "인생의 무덤"이라도 되는 것처럼 겁이 났는지 아니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앞두고 모든 게 권태와 싫증의 더께가 씌어 보이기라도 하는지, 우리들 독자에게는 대단히 낯선 어조로 그녀는 이렇게 내뱉습니다. "결혼을 앞둔 때가 아니었으면 만나지 않을 남자였다." 제가 책에서 그대로 인용한 문장이며, 혹시 정반대로 말해야 할 걸 잘못 쓴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녀에게 이상한 동조를 보내게 됩니다. 버젓이 약혼자가 있는 그녀가 별 생각 없이 기어이 몸까지, 그것도 여러 번, 섞게 된 건 이 중년남성이 풍겨 대는 지독한 회의와 불안과 달관과 체념과 애처로운 몸부림 때문입니다.

"손자국"은 바로 앞 사연 "불꽃"에서, 관계 중 뚜렷이 남은 손자국을 암시하기도 하고, 투신자살한 그 "풀네임이 누구에게도 기억 나지 않는 차장님"이 난간에 남긴 흔적이기도 합니다. 이 두 번째 꼭지에서 주인공은 예의 그 죽은 차장에 심각히 공감하는, 혹은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는, 바로 다음 사연에 잘 나오듯 일류대를 나오고 좋은 직장을 다니는 모범생의 전형인 인생입니다. 아내는 자신보다 학벌이나 조건이 좋은 편이 못 되지만, 모든 면에서 평균치는 해 주는 무난한 여성입니다. 자신 같은 남편을 만나 행복하다고도 한 것 같은데, 아이를 낳고 일상에 길들여져 갈수록 무엇엔가 단단히 화가 난 듯합니다. 어떤 때는 결혼 반지를 빼놓고도 다니는군요. 외도하는 여성이라면 본인이 거꾸로 화를 낼 일은 없을 텐데, 육아가 힘들어서일 수도 있고 이유 없는 권태와 우울이 찾아와서일 수도 있습니다. 정작 걱정되는 건 동안에 걸맞는 철없는 성품의 아내가 아니라 바로 자신입니다. 점점 가정과 일상이 지겨워지고, 남들 보기에 이유도 없이 목숨을 끊은 차장님이 불길하게도 성큼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반지"는 예의 그 반지, 아내가 정말 집에 빼놓고 다닌 그 반지이기도 하고, 사연의 끝에 갑자기 드러나듯 "다른 반지"이기도 합니다(스포일러일 수 있어 생략). 전혀 아닐 것 같았는데 아내도 어느 남자, 그것도 젊은 총각을 만나고, 달콤하면서도 슬프며 여전히 목마른 육체 관계에 무시로 빠져드는 사이입니다. 사실 반지는 빼놓고 다닐 필요가 없었던 게, 상대 남자는 그녀가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오히려 그 원숙함에 대한 기대가 관계의 진척에 불을 댕긴 셈이었으니 말입니다. 남편과는 모든 면에서 반대입니다. 탄탄하고 매끈한 몸에, 인생에 아무 전망도 없는 하루살이 니트족, 그러면서도 상대의 감정과 느낌의 동선을 두어 발 앞서 파악하는, 솔직하고 거리낄 게 없는 영혼이기 때문이죠. 어느 날 수유 증 젖꼭지를 세게 물어 놀라움과 아픔을 안긴 자신의 갓난아들이 타인처럼 느껴진 후, 그녀는 나의 왜곡된 의식, 나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관계와 시선, 생계와 장래를 위한 걱정 모두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집니다. 나를 절실하게 만들고 나의 모든 걸 점유할 자격이 있는 건 내 머리가 아니라 내 몸입니다. 사람은 몸이 시키는 길을 갈 때 전적인 몰입이 가능하고, 때로 진정한 행복을 찾습니다. 이 점을 거의 완전히 이해해 주는 상대를 지금 만나고 있을 뿐입니다. 그녀가 모르는 게 있다면, 남편 요헤이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라는 거죠.

"화상- 비늘- 음악"은 스무 살을 갓 넘긴 방황하는 청춘들이, 아직 관계의 강박과 공연한 가식에 찌들 염려가 없으면서도 그 나름의 상처와 아픔과 불안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벗어나려는, 그러면서도 현재의 제약에 자발적으로 길들여져 가는 사연이 (앞 세 도막보다는) 긴밀히 이어진 구성입니다. 소녀는 얼굴 윤곽이 또렷한, 매우 아름다운 용모이지만 이 때문에 상처를 더 깊이 더 넓게 받으며 커 온 불행한 인생입니다. 혼혈이면서 사생아인 그녀는 이기적인 생부로부터 물질적 지원을 넉넉히 받았지만 어느 집단이건 환경에건 넉넉히 소속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평판 좋은 사립학교에 유년 시절부터 다니긴 했으나 본인의 부적응으로 기회를 다 놓쳤고, 얼굴만 간신히 알고 지내던 존재감 0의 범생이와 예기치 않던 동거(아닌 동거)에 들어갑니다. 이 범생이가 살던 자취방이 저 위에 나온 다른 인물들과 같은 건물에 속했기에, 아주 약한 물적 연계로 이야기가 이어지는 거죠.

생계를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지만 여튼 관계에 주린 그녀는 불필요한 푼돈 알바도 하고, 몸을 파는 것도 아니면서(마음만 먹으면 인기가 좋을 텐데) 지카게 씨의 가게에도 들락거립니다. 지카게 씨는 아무 연고도 없는 세계의 재난지역, 빈곤지대를 찾아 자원 봉사도 나서고 의사 선생과 열애에도 빠지는 등 그 나름 멋지게 사는 인생이지만 역시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에 몸을 떠는 "in need"의 상태지요. 여자에게 아주 큰 매력도 안 느껴지는 외모인데 자신이 게이라는 고백을 듣고 난 후에야 그 소년이 요염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어느 새 어디까지나 자신의 정직한 느낌이며 어디서부터가 그간 자신을 거쳐 온(흔적을 남긴) 남자들의 시선인지도 모를 만큼, 편안하고 익숙한 혼란에 빠져 드는 그녀. 인생이란 참 묘한 게, 퍼즐의 절실하게 어긋난 부분을 맞추고 나면 다른 부분이 반드시 흐트러져 있습니다. 감정에 충실하면 현실이 위태로워지고, 현실에 어렵사리 적응하면 내 감정은 나를 타인처럼 멀리하며 보듬어달라고 아픈 흔적을 들이밉니다. 적당한 상대와의, 다른 것 안 보고 체온만 나누며 체액만 교환, 공유하는 섹스가 이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다면 인생의 비의는 이미 오래 전에 풀렸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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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의 소녀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모두가 브루클린의 소녀로 알고 있던 그녀는 사실 "브루클린의 소녀"가 아니었으며, 이 소녀는 십 년 후 또 한 번 끔찍한 일을 겪고 나서야 처음으로 브루클린의 소녀가 되었다! 기욤 뮈소의 이 신작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전작들과는 달리 스케일이 매우 커졌으며, 배경은 파리, 알사스-로렌, 낭시, 대서양 건너 뉴욕을 넘나듭니다. 미국에서 잠시 유럽을 들렀다가 아내(혹은 딸이라든가)를 잃고 사랑하는 이의 행방을 찾아내려 필사적으로 애쓰는 남편, 아버지 들의 모습은 우리가 여러 영화에서 봐 왔는데요. 이 작품은 정반대로, 프랑스에서 갑자기 연인을 잃게 된 주인공이, 그녀를 찾아내려면 그녀의 "숨겨진 과거"를 조사해야만 하겠다는 결의로 미국의 그녀 고향까지 찾아가서는, 세계가 놀랄 만한(말 그대로입니다) 비밀을 파헤친다는 내용입니다.



주인공은 이미 한 번 이혼의 경험이 있는, 그에게는 몹시나 사랑스러운 어린 아들까지 딸려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매우 유능한 엔지니어인 나탈리란 여인과 맹렬한 사랑에 빠져 결혼했었으며, 아직 말도 채 못 뗀 테오도 그녀가 낳아 준 아들입니다만, 저 나탈리는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몹시도 무책임한 여성이었습니다. 재능도 있고 야심도 충만한 그녀는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이 두 식구가 걸림돌이 될 뿐이라고 아주 당당히 털어놓고서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둘을 떠나고 맙니다. 이 충격적인 체험 때문에 주인공은 여성 일반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시각까지 갖게 되지만, 병에 걸린 어린 아들 때문에 찾은 소아과에서 뜻밖에도, 아름답고 유능하고 마음까지 따스한 젊은 의사(곧 개업의가 될) 안나를 만나게 됩니다. 안나 역시 테오와 주인공에게 끌려, 얼마 있지 않아 결혼식을 올릴 작정입니다. 속 모르는 이들 보기에 참 운이 좋은 남자다 싶겠지만, 본래 사랑도 이를 받을 만한 자격 있는 이에게나 찾아오게 마련이죠.

소설가인 주인공 "나(이름은 '라파엘 바르텔레미'라고 하네요)"의 시점에서 거의 모든 사연이 전달되기 때문에, 혹시 작가 기욤 뮈소 본인의 아이덴티티가 어느 정도나 묻어날까 궁금해하는 분들도 있겠습니다. 대중 소설 창작으로 유명세를 타고 물질적 풍요도 누리는 그이지만, 부도덕한 방법으로 취재(소설가도 현장을 돌아다니며 소재 연구를 해야만 하는 직업이죠)하는 일은 결코 없다며 자부심을 갖고, 전직 NYPD 요원(한국계인 "수연"으로 설정됩니다)에게 "당신 소설이 한국에서 꽤 인기 있다고 해서, 내 올케가 사인을 부탁하더라" 같은 말도 듣는 걸 보면 어느 정도는 연계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 좋은 그에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서는 절대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한국의 팬들을 의식, 혹은 배려한 흔적이라면 이 대목 말고도, 한국의 범죄 소재 장르 영화(과연 뭘까요?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를 즐겨 본다는 짤막한 언급에서도 드러납니다.

어린 테오에게나 이제 갓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자신에게나, 갑작스러운 축복처럼 찾아왔던 안나, 이런 그녀가 느닷, 여러 폭력의 흔적과 함께 실종되었으니 라파엘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신세. 하지만 그는 열정과 애정과 정의감 못지 않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세부 사항은 물론 눈을 큰 범위로 돌려 뜻밖의 돌파구를 찾는 지혜(소설가적 재능이겠습니다), 장애와 위험에 굴하지 않는 실행력 등을 두루 갖춘 사람입니다. 안나 역시 (잠시 트러블은 있었으나)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했던 총명한 여성인지라, CCTV에 촬영된 그 납치의 순간에도 예비 신랑 라파엘의 이름을 또렷이 부르며,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구조, 구원의 순간을 열망합니다. 이런 아내가 자신을 믿고 그 정말적인 순간에도 희망을 놓지 않고 있음을 확신하는 그이기에, 사무치는 애정이 적실한 지혜로까지 승화되어,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던 난제를 차근차근 해결하는 과정이 독자의 마음을 감동으로 채웁니다.

소설 도입부에는 여러 차례,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시대의 이정표와도 같았던 정치인(위대한 인물이었건 부정적 이미지로 남은 실패자건 간에)들의 이름이 자주 언급됩니다. 지스카르 데스탱, 자크 시라크, 니콜라 사르코지, 그리고 미국의 줄리아니 시장이나 클린턴 대통령까지. 한 시대를 상징하는 여러 정치, 문화적 환기물들은 이들 정치인 말고도 여러 연예인, 예술인들의 이름도 등장하기에, 처음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쳤으나 중반 이후 스케일이 엄청 커지면서 일종의 아득한 복선이었음을 깨닫게도 되었습니다. 부도덕한 정치인의 출세와 영향력 확대가,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에까지 엄청난 개별적 비극을 안길 수 있다는 해석도 그닥 비약은 아닐 것 같고 말이죠.

소설가 라파엘, 그리고 그의 오랜 친구(이 친구라는 게, 참 양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잽니다, 네) 형사 마르크(유독 어린 테오가 잘 따르죠)는 안나의 행방을 찾기 위해 말 그대로 전방위에 걸친 탐색 노력을 펼칩니다. 주변 인물들의 탐방은 물론 그녀가 졸업한 고교, 의대생 시절 묵었던 자취방까지 방문하는가 하면, 그녀와 실낱만큼이라도 연이 닿을 과거의 사건 기록까지 일일이 들춥니다. 이 과정에서 이 두 남자들이 알게 된 건, 안나가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신분이 바뀐, 세탁된, 그 근본을 알 수 없는 여인이라는 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부터 누구라도 주목하게 만든 아름다운 외모를 내내 유지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번이 처음이 아닌, 이미 십 대 시절 비극적인 납치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 이름이 안나가 아닌, 미국식 "클레어"였으며, 혼혈 외모와 뛰어난 프랑스어 발음(신분 세탁 후 이미 오래 이곳에 거주했으므로) 탓에 못 알아봤지만 미국 태생의 미국 국적자였다는 점까지. 본디 그녀는 이스트할렘(이곳은 맨해튼 區 소재입니다) 태생이지만, 언론에서 부르기 좋다고, 혹은 은근한 비하의 목적에서 "브루클린의 소녀"라는 별칭을 붙입니다. 그리고 "브루클린 소녀 실종 사건"은 영구 미제 상태로 남아 있었는데, 안나가 십여 년 전의 바로 그 브루클린 걸이었다는 게 비로소 드러난 거죠. 한 사람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가 된다는 게 진정 확률적으로 있을 법하지 않은 비극인데, 작가 기욤 뮈소는 이 점을 소설의 전혀 다른 대목에서 슬쩍 지적함으로써 의미의 복합층을 형성합니다. 여튼 안나가 클레어임이 드러나면서, 이 스릴러는 본격적으로 독자를 롤러코스터의 스릴로 몰아 넣습니다. 진짜 모험은, 진정 충격적인 사건의 진상은 지금부터 펼쳐지거나, 벗겨지는 베일을 놓고 완강히 저항합니다.

기욤 뮈소의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특히 나란히 거론되는 더글라스 케네디의 개성과 대조되는 점인데) 주변 인물들의 사연과 개성이 매우 다채롭게 설정되는 게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닙니다. 스토리 중 치명적인 비밀을 캐치하곤 연인이었던 언론인에게 전화를 건 후 목숨을 잃은 여기자 플로랑스의 경우, 자신과 어머니를 매정히 버리고 젊은 여인의 품에 안긴 아버지를 그리도 원망하며 성장했건만, 어느새 멀쩡한(아니, 멀쩡하다고는 못하겠네요) 가정을 파탄내며 이기적인 사랑을 키우고 있던 그녀이니 말입니다. 이 작품은 특이한 게, 이미 라파엘이란 주인공이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물들이 돌아가면서 한 번씩 자기 시선으로 사태를 설명하는 챕터들이 꾸려진다는 점입니다. 그 중에서도 플로랑스의 회고 파트는, 이미 죽은 자신이 살인 사건 직전의 상황을 (혼령의 관점에서) 술회한다는 점에서 유별난 형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나, 아니 클레어의 축복받은 자질(아름다운 외모와 총명한 두뇌)의 유래가 궁금했던 독자에게는, 소설 뒤로 가면서 과연 콩 심은 데 팥 나는 이치가 없음이 확인되곤 합니다(자세한 건 스포일러라 생략). 태드("테드"가 아닙니다) 코플랜드는 이 소설 속에서 2016년(소설이 창작, 발표된     바로 올해입니다) 미국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뽑힌 인물인데, 흥미롭게도 다른 인물들은 모두 실명이 거론되는데도(크리스 크리스티, 칼리 피오리나, 젭 부시 등) 마르코 루비오만 이름이 빠져 있어 혹시 그를 염두에 두었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갈수록 아니더군요. 오히려 당적만 반대일 뿐 여러 모로 빌 클린턴을 연상케 하는 개성들의 부여였습니다. 전형적인 소시오패스의 특징을 지닌 다른 여인이 후반부에 등장, 독자를 전율케 하는 여러 악행을 저지릅니다만 그 묘사가 판에 박힌 투도 아니면서 참신한 실감이 전달되게 몇 줄로 지난 행적을 요약하는 대목에서 과연 기욤 뮈소구나 싶었습니다. 반전이 없으면 섭섭한데 착실히 사건 진행을 따라온 독자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또하나의 진실이 숨어 있었으니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춰선 안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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