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 -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마음의 비밀
대니얼 웨그너 & 커트 그레이 지음, 최호영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정말 멋진 책입니다. 편제도 우아하고, 예거(例擧)되는 샘플들도 적절 참신하며, 문장도 유려합니다. 결정적으로, 점근해 가는 결론과 주제의식도 보편 공감을 끌어낼 만큼 타당합니다(책을 완독하고 좀 더 생각에 잠기면, 참으로 심오하기까지 했다는 판단입니다). 저자 중 대니엘 웨그너는 아직은 활동을 더 이어가실 연령이었으나 4년 전에 아깝게 타계했다고 하죠. 제자인 커트 그레이의 공헌이 이 책에서 어느 정도인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으나, 앞으로 이런 멋진 저술(후속작이 꼭 나왔어야 했는데요. 작금 이 분야 연구가 점점 가속 진행되는 상황을 고려하면)을 또 독자들이 만날 수 있겠을지를 떠올리면 참으로 아쉽습니다.

제목을 보십시오. "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극상, 최하, 평균을 가리키는 건가? 글쎄요. 저는 그보다는, 이 책의 원제에 좀 주목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마인드 클럽". 클럽이라고 해도 다양한 성격과 구조를 가졌겠습니다만, 이 클럽은 일단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가입 가능합니다. 클럽에 못 끼는 이들이라면, 채소 같은 걸 일단 저자는 듭니다. (ㅎㅎ 그러나 속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갓난아이는? 고양이는? 죽은 자의 영혼은? 회사, 기업은? 세번째 것에 대해서는 그 존재를 확증 못한다뿐, 혹 그런 게 있기나 하다면 대번에 가입을 시켜야 하지 않나 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영이라는 게, 생전의 기억도 다 잃었고 관계 일체도 상실했다면, 그래서 그저 부유할 뿐이라면, 과연 "마음"을 가졌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죠. 네번째가 차라리 더 복잡한 문제입니다. 일찍이 기에르케 같은 학자는 "유기체설"을 주장한 바 있고,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거론한 니부어를 꼭 상기하지 않더라도 기업에 속한 개인은 순수 개인적 가치관과는 또 별개의 논리와 목표로 움직이는 법입니다. 마케팅 학자들은 "기업에는 반드시 독자적인 논리와 개성과 정신이 스며있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 기업은 영속하지 못한다"고도 했으니 어찌어찌 ㅎㅎ 앞뒤가 맞아떨어져 가기도 하는군요! (농담입니다)

동물이 고차 사고 능력을 못 갖췄다는 데에는 많은 이가 동의하겠지만,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어난 여러 사고나 범죄 등에 대해 "그들"이 책임을 져야 옳을까요?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현재 사고를 일으킨 동물 등에 대해서는 관련 법규가 살처분 따위를 강제하지만, 그게 그 동물들에 책임을 묻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지은 죄에 대해 벌을 내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대개는 입법 목적이, 같은 위험을 재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인간과 사회를 방위할 의도로 그런 조치를 집행하는 거죠. 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도, 인간에게만 이행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동물은 그럴 자격조차도 없는 겁니다. 아동, 심신상실자, 지적 장애인, 만취자(단, 여기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예외가 적용되나 근래 근본적인 재고가 이뤄지는 편이고, 독일에서는 예전부터 정상인이나 거의 같게 취급합니다[하도 술을 많이 마시니 봐 줄 수가 없음]) 등에 대해 법이 책임 감경을 지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몇 해 전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장애인이 어린 아이를 창 밖으로 던져 숨진 사고가 일어났고, 바로 며칠 전 맹견이 어느 한식당 대표를 물어 사망케 한 끔찍한 일도 있어서 더욱 실감이 나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목청을 높이고, 자신의 과오를 합리화하기 위해 또 엉터리 구실을 지어내는 인간도 이와 같다고나 할까요? 여튼, 어떤 경우에도, 개한테 "책임"을 묻는다면 그건 오히려 인간의 품위를 훼손하는 겁니다. 선반 위에서 무거운 다리미 등이 떨어져 발을 다쳤다고 치고, 그 다리미를 마구 때리거나 부품 해체 하는 식으로 "벌"을 내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습니까? 다만 그 도구가 꽤 보기 싫다거나, 재발 방지를 위해 보관 장소를 바꾸거나 아예 갖다 버리거나 할 뿐입니다. 개도 마찬가지죠. 법에 의해 물건처럼 처분(도살 등)될 뿐이지만, 정말로 "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런 분들은 진짜 개한테 마음이 있고 선악을 분별할 능력이 있다고 믿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뭐 누가 알겠습니까? 사정이 진짜 그럴 수도 있고, 이 책의 흥미로운 탐구 방향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진짜 압권은 물론 우리 "인간 마음"에 대한 분석입니다. 저자는 행위자(agent)와 수동자(patient. 이 단어를 이런 용법으로 쓰는 게 혹 독자에게 낯설까봐, 책에서는 우리의 당혹을 다 이해한다는 듯 친절한 설명부터 베풀고 시작합니다. 참으로 공감 능력이 뛰어난 저자들!ㅋ)로 대별하고, 다시 이를 선과 악 두 상황으로 나눠 2x2 매트릭스 프레임으로 논의를 전개합니다. 결론만 말씀 드리면, 우리 인간의 마음은 일단 타인(그러니 분명 사람입니다)을 평가할 때, 이 네 가지 범주 안에 일단 편입시킨 후, 경우에 따라 대단히 부당한 평가도 내리곤 한다는 겁니다. 히틀러 같은 악의 행위자를 무작정 단죄(심지어 그가 아주 어린 시절 한 일이라든가, 극히 드물겠지만 부분적 선행을 했다고 쳐도)하는 건 뭐 그러려니 합니다만, 테레사 수녀 같은 "영웅"에게도 우리는 그녀의 고통에 대해서는 매우 둔감해진 채, 부당하게 의무와 과업을 지우려 듭니다. 이게 너무나 재밌다는 겁니다. 긍정/부정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이런 타입에 대해 감정의 투사를 안 하려 든다는 거죠. 이를 두고 우리의 마음은 "행위능력은 상당하지만 경험 능력은 없다고 판단한다"는 게 저자의 관점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기제가 무엇인지, 또 지각 대상에 따라 각각 어떤 다른 기제가 발동되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입니다. 이 용어들은 타 분야 용례와 매우 다른 성격이므로 주의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특히 "행위능력"은 법학에서의 쓰임새와 전적으로 무관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그 유명한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의 말을 인용하는군요.

p134에 보면 환각사지통증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걸 두고 전에는 "유령 감각(원어의 직역에 가깝습니다)"이라고 했으나, 요즘 번역서에는 이처럼 더 기술적 정확성을 기한 번역어가 쓰이더군요. 이미 사지(의 일부)가 잘려 나갔는데도, 왜 어떤 이들은 여전히 그 부위에 대한 아픔을 호소할까? 심리학과 의학이 만나는 기묘한 지점이자 연구 과제이며, 이 책은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제법 구체적인 해명을 실고 있기도 합니다. 플라시보 효과, 노시보 효과 등은 그저 무해하거나 우스운 착각이 아니라, 이런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고통 경감의 수단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최후 통첩 게임은 경제학에서도 다루는 이슈인데, 확실히 근년에는 심리학과의 콜라보가 밀도 높게 이뤄지는 경향이죠. 본디 경제학이란 게 "개인의 합리적인, 또 가장 효용(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이 높아지는 선택"을 탐구하는 데서 시작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논리적 귀결입니다. 이 말이 왜 나오나 했는데, 저자는 "마음의 부정성 편향"을 논증하며, 왜 우리가 어린아이, 오래 사용한 낡은 기계가 내 뜻대로 말을 안 들을(?) 때 더 마음씀을 강화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학문상 난제를 이처럼 일상의 쉬운 예와 결합해서 풀어 주는 게 이런 대중서의 과제이긴 합니다만, 이런 저자의 놀라운 언변과 연상 능력을 보며 그 자체가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기계(꼭 컴퓨터가 아니라도 됩니다)"의 마음이 무엇인지 무의식적으로나마 헤아리는 우리 자신(바보스럽죠)을 메타인지하게 됩니다. 적절한 예시의 항연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만 우리 모두가 기억은 하는 "다마고치" 열풍이 또 빠질 수 없습니다.

몇 달 전 <기억이 사라지는 시대>라는 책(이 책은 "기억의 외주화"라는 개념을 씁니다)을 읽고 리뷰를 남기기도 했습니다만, 이 책에서는 정통 심리학의 성과와 개념을 통해, 날이 갈수록 심화하는 기억의 미디어 의존 현상을 두고 "교류적 기억(transaction memory)" 같은 확립된 범주화를 더 빈도 높게 시도합니다. 그저 내 머리에만 기대는 게 아니라, 두뇌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른 매체에 연상의 끈만 걸쳐 놓고,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할 때는 더듬어 찾아들어간다는 겁니다. 당연, 인터넷이나 웹이 생기기 전에도 인간은 이런 방법을 썼으며, 부부라든가 친밀한 관계에 놓인 "사람"에게도 이처럼 기억의 편린을 위탁합니다. "당신 말야. 그 ..... 뭐였더라?" "아 .... 말이지?" "맞아!" 아주 사이가 나쁜 실패한 부부 아니라면야 일상적으로 보는 풍경이죠. 친구 사이의 추억 공유도 이와 같기에 우리는 그 "기억"을 분담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를 본 친구를 자주 불러내어 감정적 협업을 이루는 겁니다. 혼자 추억에 잠기는 것과 효용이 차이날 뿐 아니라, 기억 자체가 나눠져 있기에 혼자서는 감흥에 온전히 젖을 수도 없죠.

선전이나 세뇌 과정에서 적으로 삼아야 할 인간을 객체화, 대상화할 때, 우선 "이 자는 감정이 없다. 자비심이나 동정 따위가 없고 우리와 공유하는 바가 전혀 없는 동물과도 같은 존재다" 같은 왜곡된 관점을 주입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래야 적에게 사정 없는 공감 결여(그러니, 반대로, 공감 결핍이란, 그런 왜곡을 하거나, 그런 거짓 선전을 듣고 잘못된 판단을 한 이의 특징이죠)의 공격을 퍼부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꼭 누가 시켜서 그러는 것만도 아닙니다. 남을 공격하고 싶을 때 딱히 근거가 없으면, 자신의 동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멍청한 인간들도 워밍업이나 하듯 습관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르기도 하죠. 대체로 아주 유치한 자충수에 가깝기 때문에 악행과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만. (생각없는 동물도 여튼 살처분은 당합니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튜링 테스트, 고대인들이 일찍부터 발견해 낸 "마음, 아니무스", 전두엽 절제술 등 대중서에서 자주 접한 "마음의 전통적인 토픽"들을 다시, 다만 저자의 개성적이고 신선한 관점으로 재핵석된 채로, 만나게 됩니다. "마음"은 꼭 깨어 있고 명징한 의식하고만 연결되는 걸까요? 저자는 수면 중의 마음(?), 뉴런이 어느 정도 활발히 작동하는지는 서술하며 "마음"의 알쏭달쏭한 실체에 한 걸음 더 파고들어갑니다. p222에서도 다른 책들에서 종종 접하던 "최소 의식 상태" 등이 낀 스펙트럼 도식화가 보이는데, 아는 내용이라고 해도 저자의 설명이 워낙 유려하여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자폐아에 대해 우리가 그처럼 관심(물론 저자, 혹은 독자로서 인식적 관심이지 동정이나 공감은 아니겠습니다만....)을 쏟는 이유는, 이 환자, 수동자의 정확한 상태를 파악함으로써 역으로 우리 자신의 의식, 마음에 대해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첵 원제가 "마인드 클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진짜 "클럽" 이야기가 나와줘야겠는데, 이 책 7장에서는 개인 단위가 아닌 집단 레벨에서 어떤 다른 차원의 인식(혹은 왜곡)이 이뤄지는지, 혹은 개인의 능력을 떠나 다소는 신비의 영역에 접근하며 어떤 깨달음에도 이르게 되는지(상당수는 신빙성이 크게 떨어지나, 저자의 관심은 타당성 여부가 아니라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규명 쪽입니다)에 대해 흥미진진한 논의가 펼쳐집니다. 마녀사냥, 음모론 등은 아주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조금만 신경을 집중하면 오류라는 걸 금세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에 가담하여 갖가지 광기를 연출하는데, 이런 사람들도 사석에서 만나서 말을 하면 "자신이 가담 안 한 음모론, 집단 광기"에 대해서는 태연히 비판을 한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대개는 참된 자존감이 크게 떨어지는 미숙한 인격이라, 집단 심리에 휘둘려 순간 자신의 에고가 크게 확장되는 양 착각을 하곤 그 맛을 못 잊어 어리석은 충동에 자꾸 빠지는 거죠. 저자는 "링겔만 효과" 등 다양한 개념화를 통해, 집단 속에 빠짐으로서 자신 개인의 (못나고 초라한) 마음을 잃고, 대신 난폭하면서도 거대한 "집단의 마음"을 거짓 이식하는 어리석음을 신랄히 분석합니다.

"신 헬멧은 가장 심오하고 가장 강렬한 종교적 경험이 어쩌면 뉴런의 과잉 자극에서 비롯한 것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여기서 신 헬멧이란 마이클 퍼싱어라는 과학자가 고안한 장치로서, 종교적 법열이라는 게 일개 전기적 자극의 유도 결과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뒷받침합니다(종교를 전혀 안 믿는 이에게도 전기적 조작을 통해 비슷한 환희를 느끼게 할 수 있음). 이 역시 내심으로는(속"마음"으로는?), 우리 모두가 다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꼭 종교가 아니라도 궁극의 경지 비슷한 게 있다고 기대를 걸어 온 이들에게는 참 맥빠지는 결론이지만 말입니다. 신의 마음이란 결국, 마음에의 침잠을 통해 유한성을 극복하려 발버둥친 우리 불쌍한 인간들의 간절한 희구를 가상으로 투영한 개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죠.

"우리가 지금까지 다룬 모든 마음 중에, 신에 대한 물음은 아마도 가장 논란의 소지가 클 것이다.... (중략).... 그러나 결국은 두번째로 흥미로운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마음만큼 흥미로운 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을 연결다리로 삼고 저자는 마지막 10장에서 "인간 자신의 마음"을 웅대하게 정리합니다. 사후 정당화, 실행 의도, 의무 장치, 몰입 등 역시 전통적인 심리학 개념, 장치 등을 통해, 저자는 이처럼 심오한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가 가진 건 지각뿐이다. (부처님의 말처럼) 사물은 그 보이는 것과 같지도 않고, 또 다르지도 않다."

심리학이 의심의 여지 없는 전통 과학의 본령이면서, 또 왜 우리에게 그토록 유용한 도구인기도 한지 잘 확인시켜 주는 멋진 책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회계사는 보았다! - 회계사의 눈으로 기업의 '뒷모습'을 밝혀내다
마에카와 오사미쓰 지음, 정혜주 옮김 / 도슨트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회계사는 대개 소심하고 꼼꼼하고 내성적이며 남 앞에 주견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는 성격처럼 간주됩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접하는 "진짜 회계사" 중에는 안 그런 분이 훨씬 많은데도 말입니다. 이 작고 유익한 책 표지 일러스트에도, 그런 우리들의 전형적인 선입견을 모두 충족이라도 하듯, 머리 기장 짧고 안경을 썼으며 날카로운 눈빛을 번득이는 캐릭터 하나가 그려져 있습니다. 단, 뭔가 심상치 않은 광경이라도 목격했는지 표정, 그 중에서도 입매가 비장한 모양새입니다.

예전에는 회계사를 두고 "기업의 판사"라고까지 일컬었습니다만, 지금은 그런 높은 평판과 선망이 많이 주춤해진 모습입니다. 이 책 중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지만 이른바 "적정의견"의 허상이 어느 정도나 심각한지 이제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공감대가 확산된 탓도 있습니다. 장부상에 뻔히 드러나는 사기 행각, 모순된 분개, 뻔뻔스러운 분식 등을 두고도 불의 앞에 눈 감거나, 오히려 적극 가담까지 하는 "비겁한 전문직"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거죠. 그래도 이 책 저자님처럼 정의롭고 예리한 진짜 회계사, "검객"들도 많기에 아직은 기업 비리가 사회 전체를 더립힐 지경까지는 가지 않은 듯합니다.

이 책은 우리 일반 독자들도 교양, 상식으로 익혀 두어, 일부 타락한 기업에서 흔히들 저지르곤 하는 눈속임, 잔재주, 가까운 미래에 닥칠 심각한 부실의 징후를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앞서 간파해 낼 수 있을지 아주 요긴한 팁들을, 예화와 함께 제시합니다. 예로 든 이야기들이거의 전부 실제 일본에서 벌어졌던 큼직큼직한 스캔들이기에, 우리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의 생생한 실증, 케이스 스터디도 시도해 볼 수 있고, 우리가 어차피 직장 생활 하며 익혀 둬야 하는 상식, 교양의 일부인 회계 지식의 activation, 프라이머로도 활용 가능합니다. 요렇게 아주 드라마틱한 사례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봐야, 지식이 그저 머리 속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실감과 흥미를 덧입힌 채 다가올 수 있습니다.
 
꼭 비리 같은 사례만 다루는 건 아닙니다. 저자께서 말하고 싶은 건, 대체 기업의 재무제표와 여러 전자공시 자료에서 우리가 무슨 "스토리"를 읽어 낼 수 있는지입니다. 일단 이 책에서는 반 세기가 지나는 동안 가전제조 분야에서 금융으로 주력 업종이 완전히 바뀌다시피한 SONY의 예를 p38에서 듭니다. 여기서 저자께서 주로 활용하시는 자료는 캐시플로 계산서인데, 사실 이건 일본식 용어죠. 우리는 실무에서, 또 교과서나 법규정에서 "현금흐름표"란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2010년부터 대체로 비금융과 금융 부문의 액수 크기가 역전된 듯 보입니다. 특히 2013년에는 전년대비 83%가 감소하는 등 가전분야가 쇼킹한 타격을 입습니다만, 이 차이를 금융분야의 26% 상승분이 어느 정도 보전하는 모양새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 소니의 이사가 기자회견장에서 당사는 금융사업을 핵심 사업으로 삼습니다 같은 발언을 할 가망은 전혀 없는데, 이는 '일렉트로닉스의 소니'에 아직도 그만큼 강력한 브랜드 파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p39)" 이처럼, 기업이 대외적으로 전략적 표방을 하는 이미지와, 그 사업의 실속, 내실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날 수 있으며, 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재무제표의 분석입니다. 이 과정에서 추이라고 할까, 시계열 자료의 분석이 의외로 큰 구실을 함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코지마는 요즘 어느 연예인이 CM을 부르며 광고하는 안XX자 때문에 한국에서도 부쩍 인지도가 상승했지만, 일본에서는 가전 전분야를 통틀어 꽤 높은 매출을 올리던 중견 기업이죠. 뜻밖에도 저자는 어느 택시기사에게, "사원을 쓸데없이 울리는 기업"이란 평가를 듣습니다. 이는 비전문가인 개인의 판단에 지나지 않으나, 저자는 이 기사의 예사롭지 않은 한 마디가 어떤 실증 근거를 갗췄는지 따로 알아보기로 합니다. 이처럼, 마치 평범한 이웃 아저씨처럼 소박한 동기를 품고 격의 없는 어조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사실은 꽤 큰 종합 회계 사무소의 대표님입니다만)

요즘 한국에서도 큰 문제가 되는 비정규직 문제, 무분별하게 인건비를 그저 줄이는 데에만 신경 쓰느라 정작 피용인의 사기 문제는 고려하지 않고, 이를 통해 무형의 부작용만 양산한 게 이 기업의 실수였다고 저자는 매출총이익, 급여, 매출액 등의 대조를 통해 주장합니다. 라이벌 업체인 케즈덴키는 사원의 평균 급여가 높은 데도, 또 이런저런 압박을 주지 않고 알아서 잘 하라는 다소 방만한 분위기인데도 여전히 실적이 좋고, 사원을 닦아세우는 어느 곳은 실적이 심각히 떨어졌습니다. 이럴 때, 저자의 언급처럼 마스시타 고노스케의 시대를 앞서 간 혜안이 떠오르기도 하고(불경기에도 해고를 자제), 혹은 독재자이긴 했어도 헨리 포드 같은 이가 취한 "생산직 고급여' 정책이 생각나기조 하죠.

이에는, 문제를 제대로 짚었지만(인건비와 관리비의 상승이 적자 초래), 그 대응을 졸렬하게 했느냐, 아니면 직원의 사기도 고려해 가며 현장의 여론과 분위기를 존중했느냐에서 명암이 갈렸다는 게 저자의 진단입니다. 케즈덴키는 아예 정규직 정책을 더 강화했고, 야마다는 계약직을 늘리되 정규직(이 책에서는 "정사원"이라고 표현됩니다)도 소폭으로 같이 늘려가는 절충책을 택했습니다. 어느 회사 혼자서만 줄곧 고전한 이유를 저자는 여기에서 찾는 것입니다.

코지마는 어떻게 해야 해법을 찾을 수 있었을까? 대안 없는 비판은 무익할 뿐입니다. 저자는 이 회사의 문제가, "종업원 1인당 메출액이 적음"이란 뚜렷한 지표에 집약되었음을 발견합니다. 즉 직무 구조의 합리화, 효율화를 꾀하진 않고, 양적인 비용만 줄이기에 급급했던 게 패착의 본질이었던 셈입니다. 한국의 많은 기업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리라고 봅니다.

닛산도 경영위기에 직면하여 직원을 줄이되, 인당 급여는 삭감하지 않아 "일단 남은 사람들의 노력만으로 회사를 살려 보자"는 공감대를 확산시킨 게 회생의 비결이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 사례에서는 재미있는 대목을 또 하나 짚는 게, 코스트다운을 밀어붙이다 보면 납품업체(하청업체, 혹은 협력업체)에 가격 후려치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여파가 품질 하락으로 이어지지 않을까요? 닛산은 그런 부작용을 대체로 피해갔다고 분석됩니다. 이 비결에 대해서는, 거래선의 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일단 계약을 유지하는 업체들은 일감이 늘어나므로 매출액 면에서는 오히려 더 나아지는 여건입니다. 물론 거래가 끊긴 업체들은 당장 타격을 받겠으나, 이는 앞에서 말한 희망퇴직 정책과도 맥이 닿습니다. "남은 이들에게 최대한 후하게 대접하여 일단 회사를 살려 놓고 보자."

저가항공은 우리보다 조금 앞선 시기 일본에서 활황을 띤 업종입니다. 이 선도업체 중 스카이마크란 곳이 있었는데, 한때 잘나가다가 특정 시점부터 (캐시플로 계산서에 나오듯) 현금 흐름이 급격히 줄어듭니다. 우리가 기업 분석할 때 그렇게나 현금 실탄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가장 나쁜 사례가 이 5장에 나오는 셈입니다. 왜 이렇게 캐시플로가 심각한 악화를 겪었냐면, 바로 무리한 투자 때문입니다. 무엇에 투자를 했는가? 바로 에어버스 A380을 여섯 대나, 그것도 엔저가 두드러질 불리한 시기에 환차손이란 역풍까지 안아 가며, 터무니없이높이 매겨진 가격을 아무말않고 지불하는 악수까지 두었기 때문입니다. 저가항공사의 명목과 본질에 맞지 않게, 이런 초호화 자산을 매입하려 든 동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죠(신분 상승 기도?).

마지막 장 도XX의 사례에서, 기업이 언제 컴컴한 속임수를 부리는지 그 개탄스러운 일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례가 소개됩니다. 우리가 회계의 ABC를 학교에서 배울 때 중간, 기말고사에서 단골로 출제되는 게 공사진척에 따른 회계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무작정 모범 답안을 보고 암기하기보다는, 이치를 따져 가며, 다른 방안도 가능할 텐데 왜 하필 이 원칙에 따르냐는 식으로, 능동적 문제의식 속에 이해를 해야 효과가 높을 겁니다. 다리처럼 유형 자산을 건설할 때는 누구나 동의할 만한 가시적 기준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말씀처럼, 소프트웨어 개발처럼 눈에 잘 안 보이는 활동이 문제인 겁니다(이뿐 아니라 R&D 전반이 다 그렇죠). 있지도 않은 자산을 완성되어 가는 것처럼 부풀리거나, 반대로 비용에 과다 계상하기가 일쑤인데, 이 항목이 너무도 많아 회계감사인 입장에서는 전수 조사가 어렵다고 합니다.

무형자산의 평가에서 분식을 일삼고 결과적으로 피해를 사회에 떠넘기는 도덕적 해이는 지탄 받아야 마땅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누가 어느 구석에서 잘못을 저지르는지는, 시민 모두가 감시의 눈을 뜨고 살피는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 주인으로 사는 국민이 되려면 그래서 공부가 중요하고, 그 중에서도 이처럼 살아 있는 섹터와 활동에 바로 응용이 가능한 지식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웹을 뒤바꾼 아이디어 100 100 IDEAS 시리즈 8
짐 볼턴 지음, 홍석윤 옮김, 장병탁 감수 / 시드포스트(SEEDPOST) / 2017년 9월
평점 :
품절


아름다운 책입니다. 책의 내용과 형식상 아름다움이 독자를 매료시키기에, 책의 주제인 "웹"까지 덩달아 아름다워 보이게 만든다고나 할까요? 일찌감치 특급 엔지니어, 분석가들은 "인터넷이란 말부터가 낡은 어휘가 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는데, 현재 웹은 너무도 우리의 일상에 깊이 파고들어 그저 당연한 공기나 가재도구처럼 인식되기도 합니다. 해서, 그 "아름다움"을 느끼기란 여간해선 어려운데, 당연한 게 결코 당연하지만은 않았다는 진리를 우리는 여기서도 실감하게 됩니다. 웹은 초기의 그 어설픈 걸음마를 딛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름답기도 하고 동시에 대견하기까지 한 녀석입니다.

"인터넷이 인쇄기의 디지털 대체물이라면, 웹은 이동식 활자다." 이 책 p57에 나오는 저자 짐 볼턴의 말입니다. 바로 뒤에 나오지만 그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에 따른 기독교 성경의 배포를 빗대어 이 "사건"을 감개어린 어조로 회고하는 겁니다. 구텐베르크의 쾌거, 지식과 권위 독점의 타도가 지금으로부터 근 육백 년 전 사람들이나 동시대의 목격이 가능했던 대단히 희귀한 변혁이기에, 이 저자의 벅찬 의미 규정이 새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그 축복의 강도와 파급력을 실감케 한다고나 하겠습니다. 이 파트에 언급되는 CERN은 물론 우리가 아는(몇 년 전 힉스 입자의 발견으로 세계적 유명세를 탄) 그 연구소입니다. 그들 연구자들이 경과와 성과를 공유하기 위해 만든 프로토콜(이 책 pp. 44~45도 참조하십시오)은, 이제 널리 세계인을 이롭게 하는 편리한 탐사선, 브라우저(여러 종류가 있고 아직도 주도권 경쟁 중입니다만)로 다시 태어나 우리에게 정보의 민주화를 통해 권력과 부의 재분배에까지 그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책은 모두 100가지의 테마를 다룹니다. 이 중에는 "사건"도 있고, 여러 사건과 연구를 통해 초기의 형태와 기능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엘리먼트"도 있으며, 도구도 있고 포맷도 있고 현상도 있고 트렌드도 있습니다. 범주의 층위가 다른 이런 여러 "주인공"들을, 자유자재로, 또 살뜰히 살펴 초대장을 보낸 후, 이렇게 예쁜 책 한 권에 큐레이션으로 마련한 저자, 역자, 출판사 들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센스 있고 매력 넘치고 귀한 신분의 빈객들이 성장(盛裝)을 한 채 우아한 무도를 즐기는 모습은, 그냥 구경만 해도 뿌듯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이 책은, 그 무도회를 구경하는 옵저버(우리 독자들)까지도 충분히 배려한 진행까지 마련합니다. 어쩌면 주(主)와 빈(賓)이 하나가 된, 무아지경의 놀이터가 바로 웹이고 인터넷인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와이파이는 처음에 와이브로, 와이맥스 등과 헷갈리곤 하던 통신 기술입니다. 뒤의 둘은 현재 거의 잊혀지다시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만, 와이파이 역시 그 태반이 된 시초 기술이 탄생한지는 의외로 꽤 오래되었음을 이 책은 어느 미녀의 흑백 사진을 통해 독자에게 의미심장하게 상기시킵니다. p68 사진의 주인공은 헤디 라마르(이 책의 표기로는 "라마"인데, 우리나라 나이드신 영화팬들도 그리 알고 있을 겁니다), 1940년대 후반 성경 소재 에픽 걸작으로 꼽히는 <삼손과 데릴라>에서 완벽히 원형 심상을 구현한 그 전설적인 여배우입니다.

치렁치렁 곱슬곱슬한 흑발 때문에 누구 눈에도 유대 혈통이 드러나는 외모인 그녀는, 합스부르크 치세의 번영한 빈(Wien)에 오랜 세월 머물러 살았던 풍족한 가문의 소생이었습니다만, 흥미롭게도 종교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케이스입니다(이런 경우가 꽤 많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분이 두뇌까지 총명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데, 빼어난 공학자의 자질까지 겸비했던 그녀는 오늘날 와이파이 활용에 핵심적으로 쓰이는, "주파수를 건너 뛸 수 있는 무선 통신"의 아이디어를 무심히 몸매 관리 비법에 대한 수다 끝에 거론했고, 이것이 해당 기술의 특허가 그녀 이름으로 공동 등록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창시자라고까지 치켜세우기엔 다소의 무리가 따르기도 하지만, 여튼 순간 번득이는 영감을 구체적인 창의로 변환시키는 데 능한 그들 민족 고유의 개성이 확인되는 또하나의 대목이기도 합니다.

간단한 텍스트를 활용한 기술에 불과한데 웹을 돌아다닌 모든 로그를 자그마한 덩치에 모두 간직, 기억하는 쿠키, 때로 범죄자의 구린 행적을 폭로하는 결정적 증인 구실도 하는 이 귀여운 이름을 가진 녀석도, 여튼 웹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속 편히 망망대해를 유영하는 우리의 편의에 크게 기여합니다. 우리가 사우나나 여객선, 항구, 공항, 역(과거)에서 사용하곤 했던 물품표 중 증거증권이란 게 있는데, 본디 이것은 발행자(수탁인)과 수령자(위탁인) 사이에서만 오가야 정상이죠. 쿠키도 초창기에 비슷한 원리였던지라, 오늘날 우리 상식으로는 놀랍지만 1997년 당시 해당 태스크 포스는 제3자 발행 쿠키가 금지되어야 한다고 권고했다는군요. 이건 비유를 하자면, 유가증권 중 예컨대 약속어음 같은 것에서 배서, 인수를 배제하자는 주장과 같습니다. 많은 폐해와 부작용, 범죄를 예방할 수 있겠지만, 대신 거래에 큰 불편이 따르겠죠. 우리도 암묵적으로 제3자 쿠키를 매번 내 컴퓨터에 앉히면서 웹을 서핑하는 겁니다. 다만 이용자가, 주기적으로 쿠키를 삭제(브라우저에 따라 이름을 확인해 가면서 지울 수 있게 옵션도 마련합니다)해 주면서 표적 광고(지금도 당하고 있습니다)를 피하는 수 말고는 없죠.

이 책에 실린 100가지 아이디어 중 "하이퍼"라는 접두어를 단 아티클이 두 꼭지가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와 하이퍼카드입니다. 전자는 오늘의 웹을 만든 아버지들이 그저 기능과 효용에 몰두하다 우연히 이룬 성취가 결코 아님을 증명하듯, 창의적이고 영민한 정신이 언제나 바른 방향으로 몰입하고 사로잡히는 주제가 "인문적 자유"임을 잘 확인시켜 줍니다. 올바른 인문의 상상이, 기술이건 자연과학이건 모든 의미 있는 발전을 추동하는 것입니다. 짐 볼턴의 감동적이고 유려한 문장을 이를 잘 표현합니다. 하이퍼카드는 글쎄요, 적당히 나이가 있지 않다면 떠올리기 힘든 프로그램 아닐까 싶은데요. 저자의 기술에 따르면 이 역시 건전한 네트워크, 올바른 소통을 꿈꾸던 정신들이 빚어낸 총아이나, 선(Sun) 같은 더 개방된 분위기에서 탄생했다면 대표 브라우저로 더 커나갔으리라며 아쉬움, "개탄"을 토로한다고 하네요. 여기서도 애플의 폐쇄성이 또 지적되는 셈인데, 그렇다 쳐도 어차피 MS의 끼워팔기 공세(이 책 꼭지 No. 22를 참조하십시오) 앞에 위축되지 않았을까요.

헉! p154를 보십시오. 이 책에는 아름다운 여배우 사진이 뜻밖에도 자주 게재되었군요. 저주받은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그러나 훗날 작가, 감독, 개발자, 과학자, 심지어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영혼에 영감을 준 <블레이드 러너>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큰 혼란을 느끼며 담배 한 모금으로 번민을 달래는 레이첼의 자태입니다. "너는 인간이냐 기계냐?" 이 물음을 인간이 컴을 향해 던지면 튜링 테스트 같은 거고, 기계가 (인간이 작성한) 메일에 대고 물으면 그건 바로 "캡차"입니다. 저자는 재치 있게도 이를 "역(逆) 튜링 테스트"로 규정하는데, 사실 5% 유의수준 이슈만큼이나 이 인위적 기준은 미심쩍고 막연하며, 과학에 속한 중 가장 비과학적 색채가 짙다고도 생각합니다. 무튼 기계와 인간이 어디서 감정적, 가치 판단 개입의 소통을 이루는지 살필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하죠.

정성껏 꾸려진 모든 책의 공통점 중 하나는 충실한 인덱스입니다. 이 책 자체가 웹에 바치는 예쁘고 작은 인덱스인데, 그것도 부족해서 책 말미에 따로 사항 인덱스를 또 갖춰 놓았네요. 저런 인덱스 항목을 무엇무엇으로 잡았느냐에서 저자만의 가치, 컨셉, 지향이 또 드러나게 마련이죠. 오늘날의 성취와 자부가 있기까지 어떤 계단을 밟았을까를 벅차게 회고하는 작업은 언제나 흥미진진하고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과연 시드페이퍼에서 낼 법한 알차고 예쁜 책, 너무도 잘 읽었습니다. 책을 쓰신 분, 다듬으신 분 모두의 아름다운 마음이 오롯이 담겼다고나 할까요.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드페이퍼 2017-10-27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시드페이퍼 출판사입니다. 먼저 이렇게 길고 정성스런 리뷰를 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이 책은 영국의 예술 전문 출판사 로런스킹에서 꾸준히 출간되며 많은 사랑을 받은 아이디어 100시리즈의 완결판으로 출판사내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출간한 책입니다. 그러나 분야가 웹이라는 점과 이전에 나왔던 영화, 광고, 그래픽디자인, 패션, 예술, 사진, 건축과는 살짝 다른 방향성을 담고 있어 어느때 내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던 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감사한 리뷰를 보니 마음이 더없이 따뜻해집니다. 저희 책을 읽어주시고 아껴주시는 독자분들을 위해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만들고, 많이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소중한 리뷰는 저희 블로그에 담아가 많은 분들께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고, 포근한 금요일 저녁 보내시길 바랍니다.

-시드페이퍼 드림
 
예쁜 여자들
카린 슬로터 지음, 전행선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초반에 아줌마들이 티격태격하는 이야기가 나와서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빅 리틀 라이즈)> 같은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더군요. 조금만 말을 꺼내도 내용 누설이 될 것 같아 리뷰 쓰기가 조심스럽지만, 여튼 뒤로 가면 갈수록 추악하고도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나고, 사건의 스케일도 엄청 커지는, 창작에 공을 많이 들인 뛰어난 소설 같았습니다. 재미있기는 한데 소재가 꽤 불편한 것도 사실입니다.

아줌마들이 티격태격하는 이야기 바로 직전에 굉장히 충격적인 인트로가 깔리긴 합니다. 갓 보호관찰에서 풀려난 멀쩡한 아주머니, 아직도 웬만한 젊은 남성에게 끈적한 시선을 충분히 모을 만한 미모를 간직한 분이, 바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술 두 잔 마신 후 같이 귀가합니다. 바람직하죠. 바에서 배우자를 만나는 게, 만약 배경이 한국이라면 그 빈도가 얼마나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집에 들어갈 게 아니라 으슥한 곳에서 간만에 기분 좀 내어 보자고 합의까지 보았다면? 역시 권태 때문에 서로의 체취만 멀리서 맡아도 진저리치는 실패한 부부보다야 훨씬 낫습니다. 나무랄 건 아닌데, 조심은 했어야 옳았습니다.

"조심을 안 한 피해자가 잘못이지!" 이게 아니라, 괜찮은 사람들이 공연히 쓰레기 같은 범죄자들의 밥이 된 결과가 안타까워서 하는 소리지요. 피해자를 오히려 비난하고 드는 후진적인 풍토는 미국에서도 여전히 일각에서 살아는 있나 봅니다. 조금 뒤로 더 넘어간 후리디아가 동네 아는 분과 테니스 치다가 격분하여 반 고의로 부상을 입힌 에피소드에서 지나가듯 등장합니다. 피해자나 그 가족(피해자이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합니다) 입장에서는 치가 떨리기에, 그런 반응이 나왔을 법도 합니다. 충분히 이해는 가는데, 우리 독자 입장에서는 리디아에게도 쉬이 동감을 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너무 상처가 많은 분이고, 그런 못된 일을 겪기 전부터도 이미 그녀는 성격이 좀 불안정한 타입이었으며, 이후의 대처 방식도 그리 현명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끔찍한 상처를 입었더라도, 자기 파괴가 답이 될 수는 없죠.

"조심을 안 한 게 잘못이야!" 글쎄요. 사람에 따라서는 정말 이런 말을 들어야 할 경우도 있을지 모릅니다. 남편 폴 스콧을 두고 하는 소립니다. 그렇게나 똑똑하고, 매사에 사려 깊은(다 읽고 나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세심히 분위기를 세팅해 가는 작가의 너무도 노련한 솜씨 때문에 이 정도는 독자도 처음부터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왜 하필 그런 무모(미국은 치안이 불안하잖아요)한 충동에 이끌렸을까요? 평소의 그 답지 않은 행동입니다. 무장 강도, 성폭행범의 공격에 대응하여 그는 용감하게, 아내를 지키려 위험을 무릅쓰고, 놈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고 "죽습니다".

스릴러에서 드물지 않게 세팅되는 긴박한 상황에서 그래도 독자의 마음이 덜 불편(어차피 픽션이니까요)한 결단을 취한 폴이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이거는 정말 중간까지 읽어가야 아는 건데) 폴은 그런 행동이 어울리는 위인이 아니었습니다. 위험도 잘 피해다니고(분위기나 기분은 다른 선택을 통해서도 낼 수 있죠), 혹 판단착오로 위험에 빠졌다 해도 자기 목숨을 걸고 아내를 구한다.... 폴에게는 안 어울리죠. 물론 우리는 폴이 진짜 그런 사람(용기 있는 순정파)이길, 혹은 노력을 통해 그런 사람으로 바뀌길 기대하며 책을 내처 읽어 나가게 되지만(이게 이 작품의 진짜 매력입니다.

"폴! 우리를 실망시키지 마! 운명은 바꿀 수 있는 거라고! 당신은 할 수 있잖아!"), 사람 타고난 모양새란 게 그리 쉽게 휙휙 편할 대로 고쳐지는 게 아니죠. 이런 분들, 더 어려운 과업도 척척 해내는 능력자(ㅠㅠ)들도 있지만, 대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할 진짜 숙제는 내내 피해 다닙니다. 그래서 정상인 범주에 못 드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을 그리 능숙히 조종하면서 왜 자신은 못 바꿉니까? 사이코패스가 비난 받아야 할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는 거지, 무슨 머리가 좋다느니 매력이 많다느니 이런 게 잘못이 아니죠. 많은 이들은 그저 시샘 때문에 이들을 비난할 뿐, 남을 속이고 중상모략해서 부당한 이익을 챙기려는 못된 심뽀는 거의 공유하다시피합니다. 매력도 없고 무능하면서도 멘탈만큼은 똑같이 타락한 건데, 비난을 할 자격이 없죠.

클레어는 아름다운 여인이고, 내내 허술한 수컷들이 자신의 매력에 홀려 빌빌대는 꼴을 어쩌면 다분히 가학적으로 즐기며 살아왔다고나 할, 그 나름 축복받은 인생이었습니다만, 역시 이기적일 뿐 아니라, 모든 동기가 말끔한 양심에서 우러나오지는 않는, 쉽게 동일시를 이루기는 좀 어려운 타입입니다. 그녀는 "죽은" 남편 폴이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속였고, 내내 "훔쳐 보고" 있었으며,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나 자신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재미로 그토록 오랜 연극을 벌였다는 사실(이라고 일단 그녀는 판단합니다)에 치를 떨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 어디로 도피하건 인터폴의 추적도 받을 만한(연방 형법 차원의 범죄임은 말할 것도 없고) 끔찍한 일에 연루(적어도)되었음도 눈치 채게 됩니다. 혹시 이 책을 읽는 남성 독자들은, "와 야동 숨기는 방법이 저런 게 다 있구나. 흠, 통화 추적 안 당하려면 쌧컴 쓰면 된다는 거지?" 같은 나쁜 교훈은 습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별 쓸모도 없고, 이미 그 정도는 파훼법이 다 알려져 있습니다. 괜히 주목이나 끌죠.

클레어와 그 언니 리디아가 그리 건강한 내면이 아니라는 점은 앞에서 말했습니다만, 이것도 그녀들의 어린 시절, 끔찍한 사건이 터져 집안 분위기가 줄곧 정상이 아니었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를 해 줘야 합니다. 이런 논리를 잘못 확장하면, "상처 있는 사람은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같은 일종의 낙인 이론으로까지 부당한 일반화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여튼 지난 18년 동안은 몰라도, 리디아나 클레어나 지금 이 대단히 불행하고 불쾌하며 당혹스러운 비극을 접하고서는, 매우 성숙한 처신을 하려 애쓰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작가는 분명히, 특히 여성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당신 같으면 못난(여러 이유에서) 언니를 그 오랜 불화의 시간을 딛고 화해하려 들겠는가?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온갖 추악한 진실을 정면으로 대해야 하는데, 그저 믿고 싶은 대로 편하고 믿고 말지 이제와서 불편한 진상을 수용, 소화할 자신이 생기겠는가? 차라리 루저인 언니를 마음대로 단죄하고 왜곡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이 점에서 클레어는 정말 용감합니다. 또, 그런 클레어를 바로 보고는 이제부터 다시 우애를 회복하여 감싸려 드는 리디아도 일단은 높이 평가를 해 줘야 하겠습니다(그러나 좀 더 읽어 보시고요). 소설은 숨겨진 미스테리의 진상이 하나 둘 밝혀지는 과정도 빼어나게 잘 쓰였습니다만, 이처럼 등장인물들의 내밀한 심리, 미칠 것 같은 갈등을 세심히, 적나라하게 들춰 내어 독자 앞에 드러내는 기법도 빼어났습니다. 어리석은 타입은 마음이 불편하면 무작정 남탓만 하고 들지, 이처럼 자신의 내면에 곪은 상처를 들여다 볼 생각을 않죠. 죄를 내가 뒤집어쓰라는 게 아니라, 남이든 나든 원인 소재를 정확히 알고 치료를 해야 "자신이 앞으로 안 아플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치를 모르고 취학전 아동처럼 무작정 눈에 먼저 띄는 타인에게 원인을 전가하며 큰 소리로 빽빽 우기는 이들을 보면, 하등 동물을 보는 양 딱해질 뿐입니다.

이 소설이 특히 재미있는 건("재미"라고 하면 좀 어폐가 있긴 합니다만), 모든 현재의 비극 그 배후를 캐고 들어가면 반드시 부모 대(代)에 그 원인이 싹트고 있다는 시사입니다. 내용 누설 우려 때문에 자세히는 말 못 하지만, 폴과 클레어 커플은 알고 보니 "부모 대에서부터" 달갑지 않은 연이 한 자락 얽혀 있더군요. 서브보컬처럼 간헐적으로 다른 톤을 빌려 들려 오는 "어느 분"의 목소리는, 계속 들어 보니 그 청자가 "그의 다른 딸"이었습니다. 이건 이유가 있더군요. 지척에서 달콤한 대화를 빙자하여 접근하고는, 바디 스내처처럼 상대의 내면으로부터 정보를 모조리 빼가는 무서운 인간 스캐너, 그 자의 본명이 후반부에 밝혀지고, 왜 하필 그들 부자(부자였다니!)가 다른 "부녀"를 주시하게(관음하게) 되었는지도 서서히 드러납니다.

[아래 내용은 읽지 마십시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중반쯤부터 낌새를 챘을 겁니다. 범죄의 징후가 보이면 사소한 가능성부터 일일이 의심하고 들어야 마땅한 경찰서장이, 왜 클레어에게만은 과도한 안심을 시키며(그 나름 둘러댄 근거가 치밀하기는 했습니다. 결국 그게 가짜였지만) 덩달아 독자에게까지 사태의 때이른 진정을 시도한 걸까요? 또, 그의 죽음이 페이크였다면 그런 연극의 공권력의 개입 없이 과연 가능했을까요? 시민의 공적 사망이 뒤집혀지는 전개라면, 작가가 바보거나 작품의 스케일이 엄청 커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이 소설 작가는 엄청 똑똑한 분이라서, 소설은 정말 장난 아니게 파장을 불려 가며 독자를 빠져들게는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진행을 그리 달가이 여기지 않습니다만 이 스릴러가 워낙 치밀한 준비를 거쳐 이뤄진 작업이라 흠을 잡기도 힘들더군요)

소설 중에도 두어 번 언급되지만(지하실부터 해서) 토머스 해리스의 전설적 장르소설 <양들의 침묵>에서 영향을 받은 바 큽니다. 특히 전지전능하다 할만큼 객체의 심리를 훤히 꿰고 천리 밖에서 조절하는, 지적이고 섬세한 정신병자 한니발 렉터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실감 나는 캐릭터(들)의 재현은 압권입니다. 뿐 아니라 이 소설은 "피해자" 스탠스의 여성들에 대해서도 실감과 박력, 독자적인 선명한 위상을 배분해 두어, 장르소설의 진화가 능력 있는 여성 작가의 손에서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잘 실증한다고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진짜 취향은 아닌데, 완성도가 높고 재미가 풍부하단 건 분명히 확인해 줄 수 있습니다. 어설픈 피해의식에 가득한 싸이코패스물을 그간 너무 자주 봐 왔던 터라 이 장점은 더 두드러집니다.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은데 리뷰에서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 내용 누설을 서슴지 않는 이기적이고 미숙한 민폐가 참 꼴불견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같은 어리석음을 범할까 싶어서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 부국강병, 변법, 혁명의 파노라마
신동준 지음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 전 중국 근대사의 거인 증국번의 생을 다룬 도서를 읽었습니다만 이 격동기를 산 여러 뛰어난 인물들을 한 권에 묶어 소개한 책이 혹시 없을까 해서 찾아보니 마침 신동준 박사님이 쓴 대중서가 한 권 보이더군요. 책에는 여덟 명의 인물이 다뤄졌는데, 활동 시기가 비슷하기도 하고 서로 얽혀들거나 치열하게 대립한 국면도 선명하기 때문에 책 한 권에 과연 다 커버될 만하다 싶었습니다. 새삼 책 표지로 돌아가 보니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가 제목입니다. 이 시기는 과연 "인물들의 삶"이 역사 전체로 그대로 수놓아지고 전사, 마이그레이션된 시기가 아닐까, 인물로 읽어야 제대로 읽혀지는 시기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임칙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편전쟁 당시 영국상인들의 파렴치한 물품을 모아 소각한, 강직한 청백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대세를 생각 않고 무모한 결단, 극단적인 행동으로 치닫아 소탐대실하는 "그릇 작은 원칙주의자"를 비판도 하는데, 임칙서는 오히려 저 사건 때문에 그 원대한 비전과 현명한 통찰력, 박학다식하고 유연한 지성, 인품이 과소평가된 경우입니다. 책은 해당 사건에 대해, 그가 다른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한 후, 피치 못해 내린 정치적 결단이며, 참으로 매력적인 그의 자질과 개성에 대해 논급합니다. 만주족이 퇴조하고 한족 정통 지식인이 부상한 건 그의 현명한 처신이 유발한 결과였습니다. 구한말 이 땅에도 큰 반향을 부른 <해국도지>의 저자 위원도 그의 후배이며, 공양학의 태두 캉유웨이의 제자입니다.

증국번은 며칠 전 리뷰(와 책)에서도 자세히 언급된 주제 인물이고요. 신동준 저자께서는 오늘날 공사("회사"의 중국어)의 형태가, 이 증국번의 관독상판과 매우 흡사하다고 주장합니다. 증국번의, 시대를 앞서간 혜안에 대해서는 감탄하나, 물경 백 오십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이런 반관반민 형태가 지배적인 중국의 신뢰 부재, 자율성 결여의 풍토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이 교차하네요.

증국번이 엄청난 지주 가문에서 나고 성장한 것과 달리, 좌종당은 아주 어려운 유년기를 보낸 인생이었습니다. 이 어려운 시절 서세동점에 대항해 유일하게 국위 선양에 성공한 게 이 좌종당의 군사 원정이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죠. 야쿱 벡의 위구르 배후에는 특히 러시아가 도사렸는데, 여튼 이런 간접 대결에서 청이 국가 해체 움직임에 쐐기를 박았기에 오늘날과 같은 영토의 판도가 유지되었던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약, 이때 좌종당과 일합을 겨룬 야쿱 벡이 보다 유연한 자세로 동족 피지배층(동 투르키스탄 인들)을 대했다면 이 사건을 계기로 민족적 단합을 이뤄, 오늘날처럼 핍박 받는 소수 민족의 설움을 겪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과분의 위기라는 건 마치 오이가 나눠지듯 땅이 쪼개져 나라가 망하는 걸 뜻하기도 합니다. 유명한 풍자 카툰이 있는데 아래 이미지를 참조하십시오.


이홍장은 오늘날 우리 관점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세계관을 가졌고, 위안스카이 등을 부리며 조선의 내정에도 깊숙이 간섭한 자입니다만, 여튼 중국의 위인은 일단 그의 고국인 중국의 이해를 먼저 염두에 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죠. 저자께서는 "99년 조차" 조항을 두고 언젠가는 후손들이 땅을 찾으리라는 원대한 숙고의 산물이라고 평가하십니다만, 결과론적 해석이라고 봅니다. 영국이 한심한 국위 쇠퇴를 겪지 않았다면, 또 야무진 등소평이 일처리를 그리 해내지 않았다면, 99년은 그저 현상으로 굳어 영원히 외국에 귀속되었을 겁니다. 또, 이홍장이 설령 영구 할양을 싸인해 줬다 해도, 힘을 갖춘 중국이 그걸 묵과하고 있었겠습니까? 다른 조약에 대해서도, 중국은 "이건 제국주의 시절에나 효력을 지니는 불평등조약"이라며 깡그리 무시합니다. 이홍장이 뭘 생각했건 그 은덕을 입어서 오늘의 재귀속이 이뤄진 건 전혀 아닙니다.

캉유웨이는 공양학파의 태두이며, <춘추공양전>에의 깊은 천착을 통해 중국형 부강론을 제기한 석학입니다. 논자에 따라선 출세지향적 언동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광서제는 그와 연합하여 서태후와 맞서려 했으나, 황제나 재상 모두 이 노회한 여걸에 대항하기는 역부족의 기량들이었죠. 캉유웨이는 조선에서도 그의 문명이 크게 알려진 정치-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당대의 명사였으나, 역시 한계도 뚜렷한 인물이었습니다.

양계초는 캉유웨이의 제자(대략 17년 정도 나이 차가 나죠)지만 어떻게 보면 그 스승의 업그레이드 버전입니다. 학문도 깊었지만 현실 참여나 경세의 수단도 더 노련했고요. 요즘 한국의 특정 정당 몇 군데에서 "자강론"이 자주 나오는데, 자강불식의 도그마를 당대에 크게 퍼뜨린 이가 바로 양계초입니다. 캉유웨이와 달리 민족주의 성향도 두드러졌죠. 그가 말하는 "다변"은 말 많다는 多辯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처신할 것을 강조한 취지입니다.

손문은 위안 스카이보다 몇 살 아래인데, 어린 시절부터 연줄을 잘 잡아 마른자리만 골라 앉은 그와 평생의 숙적으로 대립했죠.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가 무너졌지만 어디까지나 미완의 혁명이었는데, 군벌 실력자 위안 스카이의 무력에 기대었기 때문입니다. 허울뿐인 공화정은 끝내 무너지고 위안 스카이는 분별도 없이 황제정을 다시 부활하는데(이른바 복벽), 마치 후한말에 스스로 천자를 칭한 원술이가 생각나기도 합니다(성씨도 같고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결국은 생전에 뭔가 성취를 못 보고 다 실패로 끝난 도전들이었습니다. 엉뚱하게도, 학문적 각성이나 집안 배경도 부족하며 뭔가 인성도 덜 갖춰진 듯한 마오가 결국 천하통일- 외세 배격을 이뤄냈는데, 이는 세계 정세가 그리 돌아가다 우연히 귀착된 지점이 아닐까 봅니다. 인물로 역사를 보는 프레임을 만들지, 아니면 구조적 팩터 분석을 통해 인물을 재규정해야할지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