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선집 - 종교개혁자 루터의 에센스 세계기독교고전 35
마르틴 루터 지음, 이형기 옮김, 존 딜렌버거 편집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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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다 보니 마르틴 루터의 사상과 종적을 되새기고 기념하는 책이 많이 나옵니다. 루터는 위대한 개혁가이고 사상가이기도 했지만 빼어난 문장력을 통해 주옥 같은 저술을 많이 남긴 문필가이기도 했는데요. 정작 그의 본거지였던 독일에서도 "전집" 출간이 아주 활발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존 딜렌버거 학장은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인데 오래 전에 루터의 전집 출간을 뜻깊게 기획한 분이고, 이 책은 그 일부를 한국어로 정성스럽고 정확하게 번역한 "선집"입니다(전집은 전집대로 있고, 이 책은 처음부터 "선집"의 성격으로 간행되었습니다). 그 두께도 상당하지만 폰트 크기도 꽤 작은 편이라서 완독하는 데 제법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번역은 이형기 교수님의 솜씨입니다. 워낙 저술, 변역 활동이 왕성하신 분이지만 어딘가 낯익다 싶은 느낌을 받는 분도 있을 텐데, 1994년에도 이 책은 제목을 달리하여 출간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다이제스트 社의 사명도 바뀌었고 이곳에서 출간하는 고전 시리즈도 산뜻한 디자인으로 새 옷을 갈아입는 중이라 새로 한 권을 소장하는 것도 뜻깊지 싶습니다. 예전 텍스트다 보니 예컨대 p16: 밑에서 아홉번째 줄을 보면 "아이제나하" 같은 표기가 눈에 띄긴 합니다(현행 표기법대로라면 "아이제나흐"). 외래어 표기법뿐 아니라 용어 사용례도 다소 예스러운 느낌이 드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정확한 옮김을 더 선호하는 편이라서 오히려 반가웠습니다.

본문(물론 마르틴 루터 본인의 저술) 중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고, 저자 서문에서도 다시금 강조되듯, 루터는 참으로 강직하고 한번 형성한 신념을 완강히 내세우는,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었습니다. 이런 인물들이 흔히 그렇듯, 적과 비판자를 많이 낳기도 했는데, 서문에서는 상세하지는 않아도 그런 적수들이 그에 대해 어떤 평을 했는지도 잠시 짚습니다. 저자의 평가는 그들을 신랄히 공격하지는 않아도, "이제는 교조적인 태도에 불과하다"는 정도로 평가합니다. 돌려말하면 "판에 박힌, 이미 설득력을 잃은(루터 지지자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재반박됨으로써)" 지적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뜻이죠.

신학의 본고장에서는 구교든 신교든 혹은 제3진영이든 과거의 낡은 공방은 이미 발전적 타협이나 상호 승복이 많이 이뤄진 편이고, 대립보다는 화해와 포용이 더 강조되는 분위기이며 이 책도 그런 기조를 상당 부분 반영합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예컨대 칼 바르트 같은 이가 "독일 특유의 이교적 돌출로서 20세기의 히틀러 숭배 현상과 비견할 만한" 같은 언명을 한 건, 읽으면서 매우 당혹스러워지는 대목이었습니다. 이런 언사가 지나치다는 건 두말할 나위 없지만, 한편으로 당시의 종교개혁이 민족주의적 색채를 일정 부분 반영했다는 일말의 진리를 분명히 지적한 셈이니 말입니다. 물론 책의 기조는 (당연히) 극단적으로는 이런 견해도 있다는 정도의 취지입니다.

루터는 그저 자신만의 단색적 확신에 가득찬 평면적 지성에 그친 인물이 아니라, 대단히 명료하고 논리적인 사고로 기독교 신학에 커다란 방법론적 기여를 남긴 천재형에 가까웠습니다. 예컨대 그는 교황청 측과 오랜 공방을 거치면서 논박하기를 "교회가 성경과 동일한 위계의 권위를 갖지 못할 뿐 아니라(이른바 sola scripta), 그 공의회 문서라는 것들도 서로 일관성을 지니지 못하여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폅니다. 물론 문헌이란 문언(Wortsinn) 자체만 놓고 볼 게 아니라 그 맥락과 해석을 어떻게 파악하는지가 또한 중요한데, 상대의 주장을 공박하며 자체 모순을 지적하는 건 그가 광폭의 지지와 설득력을 얻어가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질이었습니다.

편자 딜렌버거 박사는 루터의 저술을 현대적 의의로 해석함에 있어(해석일 뿐 아니라 독일어에서 영어로의 번역이기도 합니다) 루터 고유의 용어례를 여러 다른 개념으로 적절히 치환하여 수용할 것을 권하는데, 이를테면 "칭의"보다는 "은혜"와 "자유"로 바꿔서, 혹은 확장하여 받아들이자는 제안 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제안은 본문이 아니라 편집자 각주(이 책의 원주)에서 등장하는데, 물론 본문 격인 서문도 딜렌버거 박사 본인의 저술이므로 그 기조는 서로 같습니다. 이에 대해 찬반 양론이 갈릴 수 있지만, 루터 역시 성서 그 자체의 권위를 지닌 위인은 아닌 만큼 후대인들이 얼마든지 시대 상황에 맞게 포용적으로 재해석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편집자의 주장에 찬성하는 바입니다.

서문은 이 선집 출간 기획을 주도한 딜렌버거 박사의 서문도 있고, 마르틴 루터가 생전에 이미 나왔던 라틴어판 "전집(물론 자신의 저술)"에 붙인 서문도 따로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그 유명한 라이프치히 토론의 맞수였던 에크(에키우스)의 태도와 거동에 대해 개인적 평가와 회고를 잠시 펼치는데, 개인적 만남이나 토론장에서의 공식적인 회동에서나 그에게 그리 좋은 인상은 못 받은 듯합니다. 여튼 그는 토론에서건 한 인간으로서 당당한 처신으로건 신학적 입장의 완결성에 관해서건 자신의 승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딜렌버거 박사가 루터 저술 속의 "자유"가 뜻하는 바에 대해 간략하고 간접적으로나마 재정립의 의도를 표현했지만, 루터 본인이 "과연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명료하고 시원하게 답한 논문도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또한)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루터 자신도 메타적으로 언급하듯 이 두 문장은 외연상 서로 모순되는 언명입니다. 허나 이미 루터의 사상(나아가 그리스도교 전체의 노선)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이 두 명제가 전혀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신묘한 일치를 이룸을 잘 납득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적절하게도 빌립보서(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 2장을 인용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과 종의 형상을 입은" 자유자이자 동시에 종이었다며 자신의 결론을 보다 선명히 밝힙니다.

루터는 위대한 주석가이기도 해서 기독교 성경 본문에 대한 그의 해석과 설명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고 학습의 주요 참조 교재 노릇을 합니다. 그가 신도와 독자들에게 특히 주목하기를 청하는 세 요소는 첫째가 믿음이요 둘째가 그리스도, 셋째가 전가(轉嫁. imputation)입니다(p159). 마지막 요소 "전가"에 대해서는 책 저 앞 p49, 라틴어 전집 서문에도 잠시 언급됩니다. 이 세 요소가 서로 따로 떠돌아서는 안 되며, 언제나 참된 믿음 안에 하나로 결합해야 함을 그는 누누이 강조합니다.

이성이 권위와 무지몽매를 극복하고 대중의 계몽으로 나아갈 것을 주창하던 시대 또 한 명의 거물이었던 에라스무스(에라스뮈스. 이하 이 책의 표기를 존중합니다)와 주고받은 공방, 혹은 루터가 일방적으로 그에게 퍼부은 날선 공박도 이 선집에 실려 있습니다. 편집자도 수시로 상기시키듯 뛰어난 지성을 지닌 에라스무스였지만 교황이나 황제, 혹은 귀족들과의 대립각 세우기를 매번 회피해온 게, 온순한 성정을 타고난 그의 선택이었습니다. 물론 강한 권세와 무력을 지닌 진영뿐 아니라 붓으로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한 루터 같은 매서운 논객과의 대립도 그는 가능하면 피하려 들었는데요, 이 논문은 소극적 자세로 일관하는 그에 대해 자존심을 정면으로 자극하여 논쟁의 장으로 유도하고, 나아가 썩은 구체제의 혁파 대열에 동참할 것을 권하는 목적이었겠습니다.

여기서 그는 형식상으로 에라스무스의 저술 <자유의지론>에 대한 논박 구조를 취하며 준열하게 자신의 논지를 전개합니다. 본디 "누구의 어떠한 책에 답하다" 같은 포맷은 고대 그리스 이래 뛰어난 사상가들이 즐겨 취해온 저술의 한 형태입니다. 특이하게도 이 논문의 제목은 "노예 의지론"인데, 물론 노예에게 의지가 있을 리 없으므로 신랄한 패러디 기법의 일환이겠습니다. 마치 마르크스가 푸르동의 책 <빈곤의 철학>에 대해 <철학의 빈곤>을 써서 통박한 사례나, 하이에크의 <노예에의 길>에 얽힌 전후 사정도 함께 떠오르는 듯하고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확신에 찬 주장을 기뻐하여야 한다!"라든가, 로마서 10장과 마태 복음을 인용하며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confess)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며" 같은 문장에서의 "시인"과 이를 같은 맥락으로 연결합니다. 책에는 그런 말이 안 나오지만 관련 구절에는 "(반대 개념으로) 부끄럽게 여기며"도 나오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신이 부족하면 이는 곧 자신의 믿음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뜻(시인?)이나 마찬가지라는 함의도 은근 담는 구절입니다. 루터의 숭고한 확신은 물론 존중되고 높이 받들어져야 마땅하나, 이를 현대인의 여타의 비 신앙적 지적 소통과정에 무비판적으로 도입하는 것도 또한 매우 곤란한 일입니다.

루터 하면 또 야고보서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유명하죠. 이와 관련 그는 저술에서 "이전에 나는 야고보서를 거부하였지만 이제는 높이 평가하며 가치있는 것으로 본다"고 표방하여, 혹시 (그럴 리가 만무하지만) 이 문장이 일종의 recantation이 아닐까 잠시 눈을 비비고 열독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니었고요. 그는 근본적인 입장의 수정 없이 "사도적 입장의 저작으로 볼 수 없다"는 선언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여러 교양서에서 읽어 알듯, 그는 이 책이 칭의를 "행위"에 의한 것으로 돌리는데 이는 성서의 다른 교의와 상치된다고 판단합니다(물론 그의 입장이며, 현재는 프로테스탄트 쪽에서도 많은 견해와 해석상의 변화가 자리잡았습니다). 둘째로 그는 이 책이 부활, 수난,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나 그 어떤 회상을 담지 않았다고 비판합니다. "어떻게 고립된 이 한 사람의 기자(記者)가 성서 전체와 바울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라며 포효하는데, 솔직히 사도 야고보가 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바빌론 유수(이 책에서는 "포로"라는 표현을 씁니다)를 빗대어 루터는 로마 교황청의 성경에 상치되는 독단적 교리가 믿음의 성도들을 타락하고 사악한 로마의 포로가 되었다는 뜻으로 준엄한 비판을 내놓습니다. 물론 이보다 앞선 시기에 있었던 "아비뇽 유수"도 같이 떠오르죠. 이 글에서 루터는 로마 교회의 7성사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그 타당성과 권위를 공격하는데, 바로 이 과정에서 야고보서 5:15가 언급되며 이 범위 안에서 그가 야고보서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도 마련되지 않았겠습니까.

세속의 권세에 대한 복종의 문제는 참으로 민감한 이슈입니다. 편자 서문에서도 언급되지만 그는 농노 해방이나 사회적 계급 철폐에 대해서는 단호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는데, 편집자의 해설(또, 우리 시대의 중론이기도 하지만)로는 사회에 전적인 무정부상태가 도래하는 결과를 막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어떤 진리가 앞에 놓여 우리의 눈을 밝히는 건 물론 엄청난 축복이지만, 어디까지가 정의와 자유를 위한 확신이며 어디서부터가 광신, 독선인지 판단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루터의 지혜가 가득 담긴 이 책이 우리에게 그런 한 이정표를 마련해 주길 기원하며, 먼저 어리석은 우리 자신들의 정신이 개안(開眼)되어야 마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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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서문
버크.베카리아.니체 외 27인 지음, 장정일 엮음 / 열림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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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이 위대하다고 해서 반드시 본문(과 결론)까지 위대하라는 법은 없지만, 서문이 시원찮으면 그 뒤의 내용은 읽어볼 필요도 없이 무가치한 내용이라는 게 이 책 편자 장정일 작가의 주장입니다. 장정일 작가는 그간 많은 독자(열혈 독서가이기도 한 자신을 포함하여)들이, 서문은 상대적으로 소홀히하고 본문에만 치중한 독서를 하지는 않았는지, 지도(map이든, 혹은 guide이든[한자로는 서로 다르지만]) 없이 무작정 모험에 뛰어드는, 그래서 극적인 감흥보다는 오독이라는 함정에 빠질 위험이 무척이나 큰 여정을 자초하지는 않았는지, 더 즐거운 여행("독서")과 더 진지한 탐독에의 길을 권하기 위해 이 책을 펴낸다는 취지를 밝힙니다. 물론 이 책의 "서문" 중에서지요. 이 "서문"은 그간 왜 장정일 작가의 신작 신저 활동이 뜸했는지에 대해서도 약간의 암시를 그의 팬들에게 줍니다.

장정일 작가에 의해 선정된 여러 "빼어난 서문"들은, 그저 서문이 빼어나다고 해서 뽑혀 나온 게 아니라 그 서문이 담긴 책 자체가 위대한 명저라서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책을 이끄는 단서, 비밀번호가 얼마나 그 본체의 위대함에 걸맞게 위대하게 쓰여졌는지를, 이 책을 읽고서 확인해 보라는 뜻입니다. 이 책이 그 서문들이 실린 위대한 저작은 모두 30권인데, 이름난 고전들이긴 하나 역시 우리 독자들이 제목을 들어봤다는 사실만으로 잘 안다고 착각하고 넘어간 저술들이 꽤 많을지 모릅니다.

책을 읽으며 놀란 건, 어느새 이런 위대한 저술들이 한국어로도 꾸준히 번역되어, 장정일 작가 같은 분에 의해 "발견, 편집"되어 이처럼 책 한 권으로 그 서문들이 엮일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번역자들의 면면도 뛰어난데, 독서 환경이 이쯤이나 갖춰졌는데도 여전히 고전들이 미답 미독 상태라면 그건 독자의 게으름을 어지간히 타매하고도 남을 만하다 하겠습니다. 이 책은 편자의 의도대로 위대한 서문이 얼마나 그 본문을 잘 요약, 예고, 압축하는지"를 확인하는 의의도 있겠지만, 채 읽지 못한 고전들의 흥미진진한 teasing을 즐기고 나아가 공부한다는 효과도 매우 클 듯합니다. 책 뒤에는 장 작가가 저본으로 삼은 원저들이 일일이 소개되었고, 저 역시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이들 중 몇 권을 대출, 구입해서 꼭 완독할 생각입니다. 정말로 서문만 읽고 어디가서 아는 척을 한다면, "위대한 서문"에 감화받은 보람조차 없는 위선자나 속물이 아니겠습니까.

명저의 서문이라고 해서 반드시 독자의 무지와 비겁함을 신랄히 꾸짖거나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질책만 담긴 건 아닙니다. 반대로 (장 작가도 그런 말을 합니다만), 권력자와 부호에 굽신거리며 책을 출간하게 해 준 재정적 후원과 검열 과정상의 관용에 과도한 감사와 아부를 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여튼 우리는 그런 민망한 언사와 관행을 통해서도 당대 사회상의 일면을 엿볼 수 있고, 현재 우리가 누리는 출판과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재삼 확인, 각성하게 됩니다.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는 군사학 교본에서 마치 클라우제비츠의 여러 교리나 명언들처럼 자주 인용되는 명언을 남겼는데, 바로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 서문은 황제에 대한 굴신이나 아부가 아니라, 언제나 유력한 장군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황제의 심기를 최대한 편안하게 하고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하면서 애국심과 우국충정 가득한 조언을 상주하는 뜻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우아한 표현이나 비범한 천재의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은 채" 자신이 그간 변방에서 복무하며 후임자나 동료에게 매뉴얼로 전수할 만한 유익한 군사 교리를 간명하고도 실용적으로 정리한 본문에 앞서 그 취지와 목표를 서술한 이 서문은, 위대한 장군의 문장과 말솜씨가 어떤 미덕을 갖춰야 하는지 잘 드러내보인다고 하겠습니다.

바보들이 타고다니는 배는 용도나 구조가 그리 운명지워졌기에 바보 아닌 현자는 절대 태울 수 없습니다. 바보들은 바보 배를 타고다닐 때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을 깡그리 잊고, 같은 바보들 사이에서 열등감을 희석하며 세상의 표준과 천도를 전복하며 바보 특유의 쾌감을 만끽합니다. 현자 제바스티안 브란트는 장 작가의 해설에 나오는 대로 에라스뮈스나 보카치오에 앞서 풍자 정신의 정수를 선보인 선각자였는데, 다만 권력자나 위선적 성직자만 풍자한 게 아니라 바보 특유의 본성으로 질서를 어지럽히고 허풍과 참언, 궤변을 일삼는 하층민 무지렁이 바보들에 대해서도 통렬한 조롱을 퍼붓습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에라스뮈스의 격언집 서문에는, 16세기 네덜란드인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고전 그리스어 어휘가 난무합니다. 하긴 동로마 제국이 망하고 인문학 서적과 학자들이 대거 아드리아해 이서(以西)로 유입, 망명해 온 사정을 그대로 반영하기도 하며, 본인 자신이 그리스, 라틴 고전에 막힘 없이 달통한 석학이었기에 어떤 논지를 펴고 문헌을 분석해도 이런 황홀한 방법론을 마음껏 과시, 적용할 수 있었겠죠. p51 중간쯤에 나오는 <수다 사전>은, 그 바로 옆에 로마자 철자가 병기되었듯이 Suida(Suda도 맞는 표기입니다)라고 쓰며, "수다 떤다"고 할 때 그 수다가 아님은 명백합니다^^ 이 서문에서 저술되는 다양한 예문, 예증과 이론은 사실 서문이라기보다 그 자체로 완결, 독립된 훌륭한 수사법(rhetoric) 강의입니다.

서문의 중요성을 재확인, 절감하게 된 계기 중의 하나로 장 작가가 중요하게 거론하는 책은 열한번째로 등장하는 사드 후작의 <사랑의 범죄>입니다. 장 작가는 행여 일탈적 극단적 유미주의에 자신이 혹 일말이라도 동조나 한다는 오해를 피하고 싶었는지, 이런 괴물의 지향에 조금이라도 공감해서 이 서문을 발췌한 게 아니라, 그의 문학적 족적에 왜 그리도 많은 프랑스 지성인들이 소중한 시간과 정력을 기울여 관심을 쏟았는지 "그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는 의도를 (역시 서문에서) 밝힙니다. 이 대목뿐 아니라 책에서 인용한 모든 "서문"들은, 그저 텍스트만 인용된 경우도 있고, 원주와 역주가 함께 실린 경우도 있는데, 후자의 경우 권말에 후주 형태로 모두 빠진 편집입니다.

p357(의 재인용 원주)에 보면 사드 후작은 펠루티에의 <켈트 족의 역사>의 한 대목을 거론하며 헤라클레스의 어원이 켈트어에서 왔음을 주장합니다(특이하게도 이를 일반명사, 혹은 직분의 명칭으로 새기고 있네요)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의 거의 일치된 결론, 정설은 "헤라의 영광"이라는 그리스어가 그 어원이라는 쪽이니 행여 현대 독자들이 읽고 오해는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 사드 후작이 원용하는 펠루티에는 역사학자 시몬 펠루티에이며, 사드 후작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생존,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장 자크 루소는 위대한 계몽주의 사조가 완성되는 데 큰 기여를 한 불멸의 지성이지만 정작 자신은 주장하던 신조와 현저히 다른 삶을 살아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 모순적 인물이었죠. 책에서는 그의 대작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서문을 뽑아 놓았는데, 한 줄 한 줄에 통찰과 위엄과 권위와 총기가 서린 문장도 최고지만, 역시 후주에 보면 그가 특별히 이런 어휘, 표현을 쓰게 된 배경 분석이 잘 나옵니다. 제네바는 "프로테스탄트의 로마"라고 불릴 만큼 유명한 신학자들이 활동했고, 상업적으로도 크게 번성한 "위대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제네바의 정치사회적 구조가 어떠했는지를, 이 서문과 주석을 통해 우리 독자들은 흥미롭게 엿볼 수 있습니다.

장 작가가 개인적으로 매우 매혹되었을 법한 보들레르의 <악의 꽃(들)> 서문도 실렸습니다. 시집의 서문답게 역시 시의 형태인데, 이에 대해서는 역시 이 책 서문 중에 장 작가가 자신의 지론(?)을 간략히 언급한 대목이 있으니 꼭 되돌아가서 참조할 필요가 있네요. 막스 뮐러의 소설 <독일인의 사랑> 서문은 매우 짧지만 소설의 서문이 어떤 구실을 해야 하는지 이보다 더 의미심장하게 일깨우는 모범도 드뭅니다. 과학자의 저술은 어디까지나 본문의 논증과 상술에 그 진가가 놓인다고 여기는 이들이라면, 장 작가가 작심하고 뽑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얼마나 품위 있고 유려하며 짙은 인문 향취를 풍기는지 확인할 수 있겠네요.

장 작가는 서문에서 그런 말을 합니다. "서문을 꼼꼼히 읽으면 이후 집필 과정에서 저술가가 당초의 계획과 이후의 성취가 어느 지점에서 미묘히 어긋나는지 알 수 있다." 우리들의 다짐이나 작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의 것이라도 초심은 순수하고 "위대"하지만, 중간 과정과 결과는 누구보다 스스로가 창피해 똑바로 응시할 수 없을 지경이죠. 위대한 지성의 발걸음은 그나마 이 정도밖에 초심과의 유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겸허히 옷깃을 여밀 수 있고, 동시에 사람인 이상 완벽한 초심에의 회귀, 완성 수렴은 있을 수 없음을 알고 마음을 놓을 수도 있습니다. 위대한 고전의 통로로 우리를 이끄는 이 서문들을 세밑에 읽어 내고, 내년에는 고전 완독의 당찬 포부를 다져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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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패리시 부인 미드나잇 스릴러
리브 콘스탄틴 지음, 박지선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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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영화로 바로 만들어도 엄청 빨려들어가듯 보게 될 것 같아요. 시점 전환이 한 번(정확하게는 두 번) 일어나는데 이를 어떻게 처리해도 몰입감 최고인 "반. 전" 드라마가 뽑아져 나오지 싶습니다.

이 소설은 어느 캐릭터(주인공.. 일까요?)의 대사 딱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곧 알게 될 거에요."

"그럼요. 최고의 전문가에게 배운 걸요?"

책 표지에 보면 <퍼블리셔스 위클리>誌의 서평 한 구절을 인용하여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 있는 미스터 리플리>라든가 아이라 레빈의 <죽음의 키스> 등과 이 작품을 비견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교활하고 타산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사이코패스 만신전("복마전"이 더 맞겠죠?)에 우리 앰버 님도 이름을 올릴 만하다는 건데, 사실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늘어놓으면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그 평론가나 일개 독자인 저나 그 정도까지밖에 말을 못 하겠지만, 사실 리플리 군과 버드 콜리스의 내공과 자질과 성취(...)에는 이 앰버가 한참 못 미치죠. 뭐 탐 리플리나 버드나 결국 실패자들이라는 점에선 별반 '텔런티드"하지도 못했지만 말입니다. (아이쿠 이거 두 장르물 고전을 한꺼번에 스포일링하다니)

장르물에서 사이코패스들은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비열하게 약자들을 갉아먹고 사는 유형이며(이 정도나 되면 차라리 괜찮은데 머리가 워낙 멍청한 탓에 지가 되레 뒤통수를 맞고 이불킥하는 찌질이도 있죠), 다른 하나는 인간성과 양심을 애저녁에 포기한 채 사회적 신분 상승 사다리를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며 사기극을 벌이는 유형입니다. 전자는 아니고 전자 기분을, "흉내를" 내어 보려는 저능아들 중에 지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이 후자의 유형에 억지로 세팅하고 찌질한 쾌감을 느껴 보려는 저능한 유형도 있는데, 그 중에 몇은 후자한테 잘못 걸려 돈도 털리고 전과자가 되는 극히 한심하고 처량한 운명을 맞기도 합니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누구하고 누구가 정확히 여기에 해당하지는 않지만(만약 그렇다면 이 서평은 몹쓸 스포일러죠), 여튼 두 유형의 잘못된 인간이 외나무다리에서 조우할 때 어떤 비극, 아니 코미디가 벌어지는지 잘 보여 주는, 근래 양산되는 사이코패스물의 뻔한 궤도를 지적으로 비틀어 독자에게 쾌감을 안기는 작가의 재치가 빛나서 좋았습니다.

앰버(일단 이 이름으로 부르겠습니다)는 외모나 자질 면에서 아주 선택받은 사기꾼 재목(...)은 못 됩니다. 물론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하고 (후반부에 나오는 누군가의 평가를 빌리자면) 자기 도취에 빠진 면이 있어서 일을 어설프게 하면서도 자신은 꽤 잘한다고 착각하는 타입 같습니다. 혹은, 심리학 용어를 빌리면 "투사(projection)"라고 해서, 지가 그러면 남도 덩달아 그런 줄 알고 자신의 미숙하고 모자란 생각을 남의 것으로 엉뚱하게 전가하는 습관, 자다가 봉창 뜯는 헛소리 잠꼬대에 물든 타입이기도 합니다(그래서 그 나름 꽤 그럴싸한 재주를 지닌, 위 고전 두 캐릭터와는 나란히 놓으면 좀 곤란하다는 거고요). 앰버는 그리 성공적인 사기꾼이 못 되었는데도(못 되었기 때문에 이런 늦은 라운드까지 밀린 거죠) 예의 자기도취에 빠져 인성은 인성대로 망치고(잘못된 인간이긴 하나 아직 한 조각 양심이 남아 있고 오히려 그것때문에 더 초라하게 보입니다) 어설픈 계획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겁니다.

반면 그녀가 등쳐먹으려는 대프니는 우리 독자들이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는 고상한 인물입니다. 무난한 성장 과정을 거쳤고 양친도 다 훌륭한 인품을 지닌 분들이어서, "저분 참 괜찮군." 같은 평가를 유보 없이 망설임 없이 내려도 되는 착한 여인이죠. 서양의 명명 방식과 숨겨진 뜻에 쥐뿔도 모르는 얼치기의 단견으로는 전혀 짐작을 못했겠지만(근본 없는 싸구려 상식을 함부로 갖다붙이는 억지 견강부회야말로 이 땅에서 속히 peish되어야 할 적폐입니다), "대프니"라는 이름부터가 전형적으로 이 소설 속의 대프니 같은 우아하고 착한 여인을 상징하는 일종의 기호입니다. 짧은 상식과 천박한 속물 심리에 쩔어 있는 인간은 짐작도 못할 사항이죠.

OOO은 과연 사이코패스인가? 사실 이 작자가 아주 악질인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빈틈없이 치밀한 두뇌를 지니고 뭘 벌이는 타입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현실에서 종종 목도되는, 이 축에 끼지도 못하면서 뭘 흉내낸답시고 돌아다니는 저열한 종자들에 비하면 거의 신이지만 말입니다). OOO은 그저 분수에 넘게 풍족한 환경에서 버릇이 잘못 들어 자신을 지옥에 빠뜨린 좀 모자란 위인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정확할 듯합니다(그러니 자식들도 하나같이 복제품 만들듯 그따위로 키우는 거죠).

놈은 앞에서는 위선과 가식으로 과장된 예의를 차리다가(상대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한없이 낮은 사람입니다, 라고 한다면 절대 날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는 반어법 주문을 강제하는 건데, 본인이 한없이 낮은 인간이라는 건 본인이 너무도 잘 안다는 뜻도 되죠ㅋ), 뒤로 돌아서면 온갖 험담과 지저분한 폄하를 일삼는, 거의 정신병 수준의 이중인격자입니다. 이중인격도 무슨 구체적 목적이나 있어서 부리는 수작이면 누가 뭐라고 할 건 못 되는데, 그것도 아니고 제 존재를 엄습하는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을 망각해 보려는 반사적 몸부림의 산물에 불과하니 딱하고 불쌍하다는 말이 나올 밖에요.

OOO은 여튼 미국 부유층들의 습관은 충실히 모방하여 미술품, 문학 등에 대한 폭 넓은 소양을 자랑하긴 하며, 유창한 프랑스어 구사가 신분 유지에 필수 조건임을 강박적으로 내세우는 등 무슨 흉내를 내어도 제대로는 내어 보려고 애씁니다. 허나 일부 졸부의 자식들은 어디서 배워도 밑바닥 사기꾼 흉내를 어설프게 익혀 그딴 걸 세상사 스킬이나 구사하는 듯 착각을 하니 이걸 보는 입장에서야 그저 아연실색할 밖에요. 개탄을 해야 하는지 하염없는 동정을 베풀어야 하는 건지 원.

잠시 우리의 앰버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앰버는 물론 뭘 열심히는 합니다. 구경꾼들이 보기에 눈물겹도록 말이죠. 하지만 사고 방식이 너무도 미숙한데(사기를 치려면 최소한 본인 자신은 냉철하고 객관적인 판단이 확실히 서야 합니다), 예컨대 아무 잘못 없는 부친을 성폭행범으로 팔면서 "자기 세탁소에 애들 일 시킨 건 아동 학대 아님?" 같은 터무니없는 합리화를 일삼습니다. 이런 논리라면 부모는 아이가 성장한 후 18년 동안의 학비와 분윳값을 청구해야 마땅할 겁니다. 그런가하면 본인은 섹시한 자태를 뽐내며 호구로 물으려 든 잭슨 패리시에게 고혹적인 셀카를 보냈다고 착각하지만, (책 한참 뒤에 나오는 OOO의 반응은) "그 생쥐 같고 촌스러운 화이트 트래시(책에서는 적절한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일 뿐입니다. 사람이 어설픈 자기 도취에 빠지면 이처럼 실상이 안 보이게 마련이죠.

1부를 읽으면서 독자들은 대프니에 대해 엄청 동정할 수도 있고, 반대로 경멸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착한 것도, 악인의 먹잇감이 되어 사화악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좋지 않다." 이 두 반응은 모두 타당하며, 관점이 다른 독자들이 결말에 가서 두루 (각자의 방식으로) 만족하게 만드는 게 작가의 센스고 재능이었습니다. (구체적인 건 직접 읽어 보고 판단해들 주시고요)

(입이 근질근질해서 조금만 스포하겠습니다. 곤란한 분들은 이 아래부터는 보지 마시고요)
좀 이상하지 않던가요? 세상 어떤 여자가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그럭저럭 약은 데다 적절히 볼 만은 한 다른 여자한테 그렇게나 "많은 자리"를 내어줄지요. 한편으로는 "자기 자리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그냥 내주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가지고 노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의도대로 일이 척척 풀리면 뭔가 의심을 좀 해 봐야 하는데 그냥 낙관에 빠져 즐기기만 하는 걸 보면 앰버가 참 어설픈 "소셜 클라이머"인 건 분명하지 싶습니다. 무조건 자기 편할대로만 생각하고 싶어한다고 할까. 1부를 보면 (이후) 그렇게나 잦게 찾아온 위기 징후가 그녀의 눈에는 조금도 감지 안 됩니다. 완전한 맹인과도 같습니다. 이래 갖고 누굴 등쳐먹겠습니까. 정작 동정을 받아야 할 쪽은 대프니가 아니라 이 앰버인지도 모릅니다.

앰버는 수법이 참 빤하고 판에 박힌 타입이기도 합니다. 늙은 비서 배틀리를 사직하게 꾸미거나, 식모 마틸다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도 지나고 나서 보면 다 불필요한 음모이고 소동인데, 이런 단계에 이처럼 공을 들이는 걸로 보아 하층민 근성은 좀처럼 떨칠 수 없나 봅니다. <오디세이아>를 인용하며 자신의 처지를 텔레마코스에 비기는 것도 혀를 내두를 만한 무지인데, 속으로 (그 나름 공부 좀 했을) 잭슨도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만 본인만 눈치 못 챈 거죠. 그레그가 잭슨에게 나이 어린 걸로 한 방 먹인다 어쩐다 하며 본인만의 의미 부여, 과잉 해석을 열심히 시도하는데 이게 다 사기꾼으로서는 결격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세계에 빠져 혼자서만 허우적대는 거죠. 사이코패스는 철저히 상대방을 물건처럼 대해야 하는데 잭슨에게 감정적으로 너무 빠져 버린 것도 그녀의 자질 하자(?) 중 하나겠습니다.

아무튼 결말에서 상식적인 독자에게 통쾌감을 선사하는 것도 좋고, 은연중 뉴잉글랜드 귀족들의 다채로운 생활상을 묘사하며 독자에게 구경거리를 안기는 작가의 여유와 풍부한 상식도 돋보였습니다. 사이코패스물로도 읽을 수 있지만,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랐으면서도(안 그런 앰버는 정상참작의 여지라도 있다고 하겠으나) 제 감정과 인격 하나를 못 추스려 스스로를 저런 지옥에 빠뜨린 버릇 나쁜 속물의 행각을 통해, 자본주의의 구리고 축축한 이면을 풍자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아, 재미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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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된 마케팅 그로스 해킹 - 프로세스와 실행 전략 바이블
션 엘리스.모건 브라운 지음, 이영구.이영래 옮김 / 골든어페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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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경영 모든 분야에서 종전의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종전 방식이라는 그 이유 하나로 지양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정설로 통하는 요즘입니다. 마케팅 영역도 예외가 아니라서, 종래의 구태의연한 접근 방식으로는 소비자들에게 염증이나 혐오감만 유발하기 좋을 뿐이며, 일은 일대로 힘들고 직원들의 사기나 떨어뜨릴 뿐 아니라 효과조차도 나지 않습니다. 윗사람이 자신이 예전에 통했던 방식이라며 무작정 후배들에게 강제 주입하는 패턴은 참으로 미련할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점유율 하락, 대내적으로는 조직의 건강도에조차 악영향을 끼칩니다. 이 모든 게, 효과도 없고 집행도 어려운 과거의 마케팅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려는 관리자들의 어리석은 판단에서 기인합니다. 서양 속담에는 "똘똘한 병사는 현명한 장군을 가려 본다."는 게 있는데, 이런 이치는 특히 한국처럼 점차 똑똑해지고 있는 직원들이 조직 하부를 채워가는 풍조에서 특히 잘 적용된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로스 해킹"이란 좀 생소하게 들리는 용어일 수 있습니다. 일단 신제품이나 서비스를 고객들에게 어필할 때, 종전의 창구나 채널을 통하지 않고 타겟으로 삼은 고객들에게 개인적으로 밀착(up close and personal)해 가며 생활형으로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이에는 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한 회사 조직 전체가, 부서를 가리지 않고 전사(全社)적으로 행동하며 진정성 깃든 홍보와 전파에 주력한다는 데 주안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개발과 홍보가, 이 제품이 속한 산업 전체의 성장과 장래를 함께 중시하는 전략과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철저한 기획을 거쳐 주의 깊게 실행에 옮긴 (마케팅)방법론" 이것이 저자들이 주장하는 그로스 해킹의 요체입니다.

해킹이라고 하니까 무슨 남의 시스템 보안 허점을 틈타 무단으로 침입하여 정보와 데이터를 유출, 조작하는 행위만 연상하시는 이들도 있던데, 그런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제품 개발의 초창기부터 모든 직원, 즉 CEO나 엔지니어, (기존의) 홍보 책임자, 디자이너 등이 일체가 됩니다. 일단 너는 개발해라 나는 평가만 시행하겠다, 윗선에서 검토가 끝나면 익히 해 오던 대로 기계적 홍보에 주력한다 같은, 영혼 없는 분업과는 전혀 다릅니다. 종래 이런 식으로 직원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각개약진하고, 현장이나 소비자들이 부정적 피드백이 들어오면 그때서야 굼벵이처럼 마지못해 움직이는 방식은, 요즘 같은 혁신의 시대에 더 이상 통하지도 않고, 생산자조차 "그래 갖고 과연 통할까?" 같은 원초적 불안감이나 품기 좋은, 폐기처분되어 마땅한 구태요 적폐이기 때문입니다.

"그로스"도 그렇고, "해킹"이라는 단어에 다시 유의해 보십시오. 예전 제품은 일단 팔아치우고 소비자에게 불량품이든 뭐든 떠안기면 그만이었습니다. 이런 제품은 일시적으로 생산자에게 가냘픈 현금 흐름을 가능케 하겠으나, 전혀 지속적인 성장을 장담 못하는 일회용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로스 해킹"은 혁신적인 마케팅도 마케팅이지만, 마케팅 그 이상입니다. 제품과 서비스, 나아가 기업의 "성장"까지도 내다보고 소비자와 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방식이며, "그로스"는 바로 이런 영구적 성장을 의미합니다. "해킹"은 전방위적으로 "씨"를 뿌린 다음, 활기차게 개간하여 소득을 올리는 활동입니다. 활동이 자발적이고 변화 무쌍하기 때문에 지루해질 틈이 없고, 무엇보다 환경의 변화에 교감하고 즉시 반응하는 스타일이라 요즘 같은 혁신을 강조하는 분위기에 매우 잘 부합합니다. "해커"는 그저 결과만을 바라보고 묵묵히 전진하는 공장 노동자가 아니라, 변화와 도전을 즐기며 소비자와 직접 소통하는 기획자요 플레이어에 가깝습니다.

어떻게 이런 "진화된" 마케팅 기법(사실 마케팅이라기보다 기획과 관리, 총괄, 평가, 소비자와의 소통 일체를 포함하는 "그 이상"임은 이미 앞에서 말했습니다)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이는 스타트업의 궁여지책이었습니다. 이른바 work the number라고 해서, 무작정 다수에게 전화 걸고 전단지 뿌리고 권유, 모집만 해 대면 그 중에 얼마는 "낚여 든다" 같은 믿음도 한때 널리 퍼졌으며, 아직도 이런 방식에 기대어 영업 하는 이들(회사들)도 많습니다. 또, 불특정 다수에게 어필하려면 불특정 다수에게 "도달"할 수 있는 유력 매체를 통해야만 합니다. 거대 신문, 잡지, TV 등이 그것이죠.

스타트업은 개발 도상국이 아니라 주로 선진국, 안정된 developed countries에서 성황이며, 이런 나라들이라면 일용직, 임시직이라 한들 인건비를 마냥 낮춰서 쓰기가 어렵습니다. 하물며  거대 미디어의 한 지면 한 광고타임을 빌려 쓸 자금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들이 의존한 홍보 수단은 소셜 미디어(소위 SNS)라 불리는 한정된 가상 공간에서 소수 인맥을 통해 입소문을 퍼뜨리는 것이었는데, 이게 의외로 종전의 채널이나 방법론보다 효과가 더 좋았던 겁니다.

우리네 카카오톡이 처음에 어떻게 일반 소비자들에게 다가섰는지 한번 되새겨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카카오톡은 처음에 "공짜 문자"라는 기능 하나로 이동통신 가입자들에게 어필했는데, 이 "입소문"의 위력이 당시에는 매우 컸습니다. 지금이야 일정액 이상 요금제라면 원칙적으로 문자메시지(구 컬러메일 포함)가 무료지만, 당시에는 (이미 원가가 0에 수렴했음에도 불구) 매달 무료 발송분이 제한되어 있었죠. 한편 3G가 막 완성단계에 진입했던 터라 데이터는 (속도가 꽤 느렸을망정) 무제한으로 제공했던 시절입니다.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그들은 망 중립성이라는 정책 기조에 편승하여 거의 전국민 서비스(앱)로 단기에 도약했는데, 자그마한 회사에서 사원들이 본래의 직분을 가리지 않고 고객들의 요구와 질문에 일일이 응대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바로 그게 그로스 해킹의 모범입니다. 카카오톡이 또, TV나 신문 등에 전통 방식의 광고를 많이 집행하던가요? 저는 당시는 물론 지금도 그 회사가 그런 식으로 소통, 홍보하는 걸 못 봤습니다. 만약 홍보비 때문에 거액을 출혈하여 이자 상환에 성장 대가 상당 부분을 희생했다면 오늘날의 카카오는 저리 어엿한 입지를 찾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로스 해킹은 사장이나 기획자, 기타 직원 모두가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프로세스이지만, 막상 이것도 컨셉 자체를 전사(全社)가 공유하며 일체가 되어 띄워보기란 무척 어렵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이런 독자의 기분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저자들은 "처음이 어려울 뿐" (책에서 설명하는대로) 모범 사례를 (일단은) 따라해 보며 회사 전체에 분위기를 물들이다 보면 탄력이 붙는다는 식으로 독자를 독려하는군요.

일단은 기존의 업무 부서간 장벽을 허물고, 다소는 책임과 권한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과정에서, 서로 과실 떠넘기기, 혹은 반대로 영역 침해라면서 갈등이 격화할 소지마저 다분히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자들은 이에 대해, 공통의 목적을 분명히 설정해 주고, 일단 과제들을 단기와 소량으로 잘게 나누어, 매 단계마다 인센티브를 성과자(팀)에게 분명히 지급하는 방식으로 이 잠재적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제언합니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바로 "그로스 해킹"의 이론적, 실제적 창안자들이 이런 말을 하니 신뢰가 생기며, 조직 안에서 한번 실천해 보고 싶은 게 사실입니다.

페이스북도 한때는 일개 스타트업이었던 만큼 당연히 이런 "그로스해킹"을 거쳐 오늘날 세계의 총아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물론 그로스해킹이라는 말 자체는 없었고 그들 역시 정확히 무엇을 하는 중인지, 마케팅 면에서 종래의 방식과 그들이 진행하는 신 기법 사이에 차이가 나는지 인식도 없었겠습니다만). 이렇게 하면 안 되더라, 반대로 과거에는 이런 방식이 잘 먹혔었다 같은 "구전 전통"은 언제나 어느 조직에나 널리 퍼져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전통에 근거한 조직 관성 역시 직원들을 확고히 장악하는 무형의 힘이며, 이런 관성에 저항하면 "민심(?)"이 이반하는 광경도 흔히 보고, 사장에 대한 신뢰나 충성도까지 하락합니다. 저자들은 이런 경우, "데이터의 힘"으로 사원들을 설득하고 조정할 것을 강력히 충고합니다.

재구매율, 사용자 재방문 실적은 과연 내(회사의) 아이템이 제 자리를 잡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로스 해킹"은 소비자 개개인과 소통하여 자신의 웨어(ware)를 머스트 해브로 확실히, 감성적으로, 생리적으로 소비자 개인에게 각인시켜야 그게 성공입니다. 스타트업뿐 아니라 과거에도, 성공하는 기업, 될성부를 나무는 그 유지율이 남들보다 압도적인 수치를 기록하는 데서 그 싹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스타트업이라면 더군다나, 열성적인 소비자들이 피드백 남겨주고 재구매해 주는 그 열의와 빈도를 통해, 그 성공 여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개인의 일상이건 조직 안에서의 성과이건 가장 힘든 게 스스로의 자취와 업무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방식과 과정입니다. 그로스 해킹 방식은 종전의 거대 미디어 의존 패턴과 달리 고객과 직접 소통을 중시하므로, 이런 자기 평정이 어떻게 객관적으로 이뤄지는지가 무척 중요합니다. 저자들은 ICE 방식, PIE 방식을 각각 예로 들며, 나와 나의 동료들에 대해 냉혹하면서도 정확한 "점수 매기기"가 반드시 뒤따라줘야, 이 열정과 정성(情誠)으로 무형화, 정성(定性)화한 새로운 방식이 과연 원활히 작동하는지 온당한 판단이 가능하다고 충고합니다.

현대인은 기계의 부품이 되기를 거부하는 주체적 인간형입니다. 영혼 없이 판에 박힌 구호를 외치기보다, 내 마음에 깃든 정직한 메시지를 타인과 나누고 소통, 공감하고 싶습니다. 제품과 서비스의 탄생 과정에서부터 일개 평직원인 내가 부모처럼 개입하고, 이거 괜찮다고 입소문을 내며 더 많은 이들과 원활히 교류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신나는 일꾼 되기, 진정한 자아 완성도 꾀할 수 있지 않을까요? 돈도 적게 들고 직원들도 신나게 만드는 이런 혁신 마케팅이야말로 직장과 사회 전체에 활기를 부여하는 상생의 일처리 방식 같습니다. 회사 다니기에 재미가 나야 하고, 그저 물건 사는 게 돈 깨지는 괴로운 출혈이 안 되게 소비자도 뭔가 흥이 나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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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생태계 - 생성-성장-소멸-재생성 순환 체계 단절로 침하되고 있는
NEAR재단 엮음 / 21세기북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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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정글이 되어서는 안 되고, 약자나 성장 유력 주자나 자신만의 고유한 몫을 추구하며 전체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선순환 생태계"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근래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또 이제는 정치적 입장을 불문하고 이런 조화로운 생존의 도모 옹호가 대세가 된 듯한 느낌입니다. 무분별하게 성장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거나, 재벌 독과점의 풍조를 예찬하는 풍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허나 어떻게 해야 "생태계의 조화로운 조성"이 가능한지,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장들이 엇갈리며, 무난한 중론이 모아지기도 어려운 상황이죠.

저자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 본디 한국처럼 정부 주도의 강력한 드라이브로 경제 성장을 추구하는 나라에서는, 정책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각 단계의 사이클도 짧아서 기존 생태계에 주는 충격도 크다....." 그러나 개발과 성장이라는 과실의 수확이 이 모든 부작용과 충격을 어느 정도는 흡수해 준다며 그간의 고도 성장이 이뤄 온 긍정적 효과에 의지할 수 있었던 게 과거상이라고 정리합니다. 현재는 이런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며, ".. 노동 생산성과 자본의 한계 효율이 급속도로 낮아지는 지금" 잠재적인 성장률이란 거의 바닥까지 떨어졌으며, 이런 충격파는 생태계에 대해 거의 병리적인 상처를 남기고 선순환을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게 만든다고 저자들은 단언합니다. (p18)

저자들은 어느 나라의 경제이건, 경제 생태계 단독으로 조화로운 생리와 성장, 유지가 기대될 수는 없고, 정치 생태계, 사회 생태계가 두루 그 곁에서 건강한 호흡과 대사를 이뤄야 경제 역시 건강한 작용 유지를 보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허나 한국 사회는 이마저도 낙관하기 힘들며, "과잉 정치, 이념화, 담합 구조의 덫에 빠져" 헤어날 수 없는 악순환의 무한 루프를 그저 뱅뱅 돌 뿐이고, 대통령 5년 단임제의 나쁜 생리에만 적응한 관료제의 병폐까지 더해져 국가의 장기 과제를 소신껏 추진할 수 없는 풍토까지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거시경제가 건전하고 참여 성원 모두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운용되려면 신 산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가능해야 합니다. 허나 기업은 더 이상 R&D를 놓고 역량을 쏟아 붓는 모험, 결단을 선호하지 않으며, 지난시절 고 이병철 회장 등이 보엿던 미래에의 통찰과 소통은 이제 재벌 총수들에게서 좀처럼 찾기 힘든 미덕이 되고 말았습니다. 중국의 추격도 무섭게 이뤄지는데, 이미 중국은 우리를 추격해 온다기보다 첨단 산업 분야에서조차 몇 발짝 앞서가는 세계의 거인, 선두주자로 위상을 바꾼 지 오래입니다. 한국은 재래식 공산품 시장에서도 중국산에 밀려 경쟁력을 잃었고, 신산업 동력 역시 그들에 선수를 놓쳐 장래의 도약 발판 마련도 기대하기 힘든 판입니다.

노동 시장 역시 경직성이 개탄스러운 실정입니다. 왜 노동 생산성에 비해 임금이 과도하게 높은지는, 저자들은 크게 두 가지 요인을 짚습니다. 하나는 생활에 필요한 필수 기본 지줄 비용의 비중이 꽤 높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 안전망의 질적 양적 기능이 미비하기에 임금에서라도 넉넉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려는 노동자층의 욕구가 교섭 과정에서 전투적 대립상을 소모적으로 도출한다는 분석입니다. 타당한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장래를 기약할 수 없는 불안이 사회 전체를 좀먹다 보니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저출산 국가가 되었는데,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과도한 출산을 억제하기 위해 3자녀 이상 가구에 대해 과태료까지 부과하던 규제를 떠올려 보면 실로 상전벽해의 감회가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계 부채는 물론 우리뿐 아니라 미국도 심각하고, 어느 나라건 생애 소득 전체 전망을 고려치 않고 무분별하게 대출을 받아 일단 쓰고 보는 풍조는 경제 전체를 심각히 위협하는 불안 요인이 됩니다. 허나 한국은 전반적인 개인 소득 증대 가망이 희박해진 국면에서, 여전히 구조적 요인으로 가계 소비가 줄지 않고, 이른바 "하우스 푸어"라는 신조어 생산, 유행 풍조를 봐도 짐작할 수 있듯 빚 내어 어렵사리 장만한 집이 언제 시한 폭탄으로 변해 중산층과 서민의 살림을 벼랑으로 몰지도 매우 불투명한 국면입니다.

1990년대부터 한국 정부는 "이제 내수도 넉넉히 키워야 경제의 지속적이고 건실한 성장을 이끌 수 있다"며 정책의 기본 방향 전환을 암시했습니다. 또 중국 경제가 무한한 잠재력을 유지할 수 있는 동인은 바로 든든한 인구 집단 덕에 활기가 줄지 않는 안정적 내수 시장의 확보로 기업들이 마음 놓고 사업을 영위할 수 있다는 환경적 여건에도 크게 기대는 면이 있죠. 그러나 한국처럼 국토가 좁고 자원이 빈약한 나라에서는, 기본적으로 더 인구가 많고 더 부존 팩터가 넉넉히 포진한 다른 국민경제에 수출을 늘려 부가가치를 해외에서 창출, 유입해야 지속적이고 질적 우위에 선 건전한 경제 사이클이 마련될 수 있습니다. 저자들은 말합니다. "일본도 과거에 비교적 큰 인구 볼륨을 기반으로 내수에 기댄 구조 걔혁을 꾀했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보듯 "잃어버린 20년"의 거대한 침체와 상흔에서 헤어날 줄을 모릅니다. 우리도 똑 같은 전철을 밟을 수는 없습니다.

자연 생태계에도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의 3각 구조가 존재하듯, 경제 생태계 역시 생산과 소비 못지 않게 "분해"의 기능을 원활히 이뤄 상품과 서비스의 유통, 순환이 경화, 교착 상태를 피할 수 있게 어떤 장치적 담보가 이뤄져야 합니다. 저자들은 이를 두고 금융 기관의 원활한 작동이 이를 적절히 대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헌데 한국 경제에서 가장 경쟁력이 취약한 섹터 중 하나가 금융 영역이다 보니, 이런 기능마저 아직까지는 소기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은행으로부터 대출한 원금은커녕 이자도 제대로 변제 못 하는 한계 기업은 그 수효가 줄지 않을 뿐 아니라, 금융기관 역시 이를 필터하고 유효한 모니터링, 심사를 벌일 역량이 대단히 미비합니다.

금융 기관 본연의 소명은, 투자자로부터 여유 자금을 끌어들여, 그들에게 소정의 과실과 성과를 약속하고, 이를 현장에서 간절히 자금 수혈을 갈구하는 유망 기업들에게 적기 적시에 수혈하는 중개자의 역할입니다. 과거에는 대출을 정계의 압력으로 특정 대기업에 몰아다주는 악성 풍조가 뿌리뽑히지 않았으며, 현재는 이런 폐습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대신 대기업들이 사내에 쌓아둔 유보금을 도통 시중에 풀지를 않아 성장의 과실을 모두가 누리지 못하는 악순환의 한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금융 기관 역시 착실히 성장할 기업과 그렇지 않고 흉내만 내다가 도태될 부실 단위를 잘 준별하지 못하여, 악성 돌연변이(좀비 기업)의 생태계 출현을 방조하다시피 합니다. 여기에 금융기관의 성장과 쇄신을 더욱 위협하는 미래 인자는 바로 "핀테크 산업"의 도전인데, 구태의연한 영업방식과 과거 패턴에만 의존한 전략 기획으로 이 거센 미래의 변동 요인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게 업계의 중론입니다.

어떻게 해야 한국의 경제가 다시 과거의 활력을 찾고, 서민과 중산층, 대기업 모두가 공존 공생하는 양질의 속성을 재 장착하겠습니까? 저자들은 이 책에서 많은 대안을 내놓습니다만, 그 중 하나가 수천 수만 명을 먹여살릴 수 있는 인재의 육성과 지원책입니다. 과거에도 정부와 기업은 성실한 인적 자원, 특급 엔지니어 후보군을 우대하고 그 감별에 정성을 쏟아 왔습니다. 대개 과거에는 일본 등의 선진국에서 시행하는 기업 전략을 카피하거나, 심지어는 책략을 통해 기술을 훔치는 방식으로 "추격형 성장"을 꾀했습니다. 이런 방식을 현재는 중국이 답습하는 셈인데, 중국의 재래식 산업 구조가 지닌 확고한 경쟁력과 국가 주도의 영리한 전술 구사를 우리가 대응, 감당해 내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그런 방식이 미래에 더 이상 먹혀들지도 않는다는 데에 나라 안팎에서 거의 합의가 이뤄진 편입니다. 언제까지 과거의 향수에 얽매어 소중한 미래의 비전을 도외시하겠습니까?

미국이 제조업 경쟁력을 잃고서도 아직 세계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건 "일찍이 세상에 없던 아이템과 서비스"를 무수히 만들어내는 그들의 창의성에 비결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간 축적된 활발한 정치적 에너지를 산업과 핟문으로 방향 전환하여, 혁신과 창의로서 세계의 도전에 맞서야 합니다. 그것이 오염과 방해 없이 맑은 산소를 마시며 건전한 재생산을 무한 담보, 가동할 수 있는 생태계 유지의 근본 방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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