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인 스노우 팝콘북
단야 쿠카프카 지음, 이순미 옮김 / 서울문화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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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걸 인 스노우"는 둔기로 머리를 세게 맞고선 회전목마 아래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즉사한 소녀 루신다의 사체가 눈 속에 파묻힌 채 발견된 사실을 가리킵니다. 내린 눈이 모든 걸 덮었으니 증거가 남지 않았으며, 이 살인 현장을 본 사람도 현재까지는 아무도 없습니다. 무심히 내리는 눈은 쌓이고 쌓여 모든 걸 덮습니다. 한때 불타올랐던 사랑, 집착, 연민, 증오, 질투, 순간의 정념과 판단 미숙으로 저질렀던 과거까지도 말입니다. 죽은 소녀도 장례식장에서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아련한 추억과 사랑의 대상으로 기억되었으나, "눈 속에 파묻히기 전" 그녀의 실상, 실체, 본모습이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누구의 본 모습이 어떠한지는, 혹시 그(그녀)의 스토커가 가장 잘 아는 법일까요? 이 또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스토커는 대개 자신의 기대를 대상에 투사할 뿐이며,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소년 캐머런은 더군다나 성격이 좀 이상한,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예술가 기질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러 모로 가득한 별난 애입니다. 캐머런은 이웃에 사는 어느 소녀(말 그대로 "걸 넥스트 도어"더군요)를 두고, 짝사랑인지 동물적 본능에 끌린 스토킹인지 그도저도 아니면 광화사처럼 예술로의 승화 매개로 삼은 건지 모를 이상한 동기에서, 참으로 이상한방법으로 매일같이 엿보고 다닙니다. 소녀의 부친 헤이스 씨는 이 소년의 상궤를 벗어난 행동 패턴을 눈치 채고 점잖게 경고도 줍니다. 그 정도 경고만으로도 이 소심한 소년은 눈물에 콧물에 소변(...)까지 지렸을 만합니다.

캐머런은 소설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그 모친 신시아는 본문 중에서 그저 "엄마"로 자주 호칭될 만큼, 거의 1인칭 주인공으로 봐야 마땅한 캐릭터인데도 그 정도 자리까지 오르지는 못합니다. 소설에는 글쎄 매사에 시니컬하다고 봐야할지, 감정 형성에 큰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지(그 동생 에이미는 "언니는 인간 맞어?"라고 묻기까지 하더군요), 아니면 사춘기 소녀 특유의 열등감과 불안감 때문에 원치 않게 괴짜 코스프레를 하는 건지(속은 무척 여리고 감성적이면서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름은 제이드인데도 "셀리"라는 다른 인격을 하나 만들어 내어 노숙자 하워드와 소통하고 가명(가당찮게도 예명?)으로 극본도 쓰는 걸 보면 경계선 인격 장애가 아닌가 싶기도 한데, 여튼 읽으면서 참 기분 나쁜 개성이다 싶었습니다. 생긴 것도 시원찮은 애가 행동까지 저러고 다니니(원래 더하죠) 대체 누구한테 사랑을 받겠나 싶고 말이죠. 여튼 놀랍게도 작품 중 1인칭을 함부로, 시종 일관 쓰는 특권은 이 제이드(셀리)의 것입니다. 뭔가 의미심장하죠.

캐머런의 (도망 간) 부친과 젊은 시절부터 파트너로 내내 활동했던 경찰관 러스(러셀 플레처)는, 캐머런의 부친 리와 많은 비밀을 공유했습니다. 경찰직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섬세한 성격과 감정의 소유자였던 리는, 아름다운 부인 신시아가 멀쩡히 곁에 있는데도 다른 여인과 바람을 피웁니다. 이 여인이 심하게 폭행당한 후 죽자, 리는 (당연하게도) 용의자로 입건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고, 마을 사람들은 경찰 제 식구 감싸기라며 사정없는 비난을 퍼부으며, 이 와중에 리는 가정을 버리고 도피합니다. 리의 마지막 당부는 "러스, 내 아이를 잘 돌봐줘."였습니다. 원치 않게 친구(선배) 아들을 제 아들처럼 주시하게 된 러스도 러스지만, 소년 캐머런 역시 아버지의 이 불미스러운 스캔들이 내내 업보처럼 자신을 따라다니게 됩니다.

예술 쪽에 특별한 재능이 있어도 한 분야로만 발달하는 게 보통인데, 캐머런은 희한하게도 음악과 미술에 모두 능합니다. 학부형들과 친구들 앞에서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할 때, 그는 말그대로 무아지경에 빠져듭니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해서 이 정신적으로 불안한 아이가 무대 공포증 비슷하게 큰 사고나 쳤단 소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마치 다른 영혼이 빙의한 듯 신들린 연주를 해냈다는 소리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후한 미남자인 오 선생님(일본계라고 하네요)은 사실주의 화풍의 천재라며 또 이 캐머런은 감싸고 도는데, 그 모친 신시아에게 다분히 흑심을 품은 까닭도 있지만 이 양반 거짓말은 또 안 하는 타입이라, 재능의 평가에는 거품이 전혀 끼지 않습니다.

이처럼 소설은 한 마을의 다양한 개성 다양한 기질 다양한 사연 다양한 과거(!)를 지닌 인물들을 돌아가며 조명합니다. 이 사연은 때로 먼 과거를 배경으로 전개되기도 하고, 루신다가 죽기 불과 며칠, 몇 달 전까지만으로 거슬러올라가기도 합니다. 미스테리도 미스테리지만, 작은 마을에 옹기종기 모여살며 표면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이 평온한 일상을 꾸려내는 듯한 사람들이, 그 속에는 저마다의 지옥과 활화산을 품고 산다는 실상이 무척이나 충격적입니다. 그리고 이를 우리 독자에게 캐스팅하는 이는, 1인칭 화자의 특권을 혼자 누리는 바로 그 소녀 제이드이고 말입니다.

경찰관 러스는 제이드와 캐머런에 비하면 겉도는 인물, 아저씨인 것 같아도(물론 스물 한 살 청년 시절 과거도 자주 플래시백됩니다) 아픔과 트라우마와 미칠 듯한 갈등(겉으로는 안 드러납니다)을 겪는 이는 바로 이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라틴계 이네스와 일찍 연을 맺었으나, 어느날 정성들여 차려 준 멕시코 전통 음식을 너무 맵다는 이유로 손도 대지 않자 이네스는 그날부터 남편에게 정이 확 떨어집니다. "이 바보 같은 그링고는 내 안의 감정, 정서, 영혼을 전혀 이해 못 하고 있다." 근데 제 생각에는, 이네스 입장에서, 남편이 음식에 손도 안 대었다는 것보다, 싫으면 싫다고 말이라도 분명히 하지 좀비처럼 멍하게 있었다는 게 더 진저리쳐졌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러스의 처남인 거인 이반은 형을 살고 나와서는 느닷 신흥 종교(가톨릭의 변종이라고 하네요?흠)에 귀의해서는 매부에게 준엄하게 충고까지 합니다. "자네는 범죄자들을 체포하고 다니니 스스로가 꽤 우월한 사람처럼 느끼지? 범죄자 중에 당신보다 훨씬 인간다운 사람이 많다는 걸 죽어도 자넨 모를거야." 이 말에도 러스는 딱히 반박을 못 합니다. 리의 그 사건이 있은 후로 러스의 몸에서는 뭔가 혼이 빠져나간 것만 같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사연이 "DNA처럼 나선형으로 꼬여들어가는(책 중에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중에, 우리는 정작 "눈 속에 파묻혀 죽은 소녀의 죽음" 그 진상에 대해서는 잠시 잊기도 합니다.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요? 평소부터 루신다를 질투하고 미워하던 제이드? 가질 수 없는 걸 가지고 싶어했던 캐머런? 알고보니 뒤에서 호박씨 까는 엉큼남 오 선생? 덩치도 크고 반사화적 성향 가득한 전과자 이반? 범인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목격자가 안 나타났던 이유도, 충격적인 사건의 실상과 결정적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었고요. 전에 제가 읽은 어느 한국 작가의 장르 소설과 분위기, 결말이 무척 비슷한데 내용 누설이 될 수 있으므로 서평 중에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미스테리물로 보기보다 사람들의 어두운 기억과 상처를 교묘히 더듬으며 공감과 충격을 유도하는 이야기 솜씨가 놀라운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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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미소
줄리앙 아란다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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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자신의 인생이 큰 고비를 맞을 때마다 누군가가 다가서서 따뜻한 미소를 지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 게 어디 있냐? 삶은 본래 고난의 연속이요, 각자가 알아서 헤쳐 나가야지."라고 퉁명스레 내뱉는다면, 물론 말이야 맞는 말이겠으나 그 사람 본인은 참 각박하고 여유 없으며 이미 황폐화한 삶을 사는가 보다 하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암만 맞는 말이라 해도 우리는 일일이 입 밖에 내어 그 불쾌한 진실을 재확인할 만큼, 필사적으로 스스로의 기분을 망치려 들 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자기 기분만 망칠 뿐 아니라 남들 비위까지 상하게 하는 민폐입니다. 이런 걸 모른다면 이미 "망쳐질 기분"조차 스스로 없애버린 답 없는 인생이며, 이런 사람이 남과 함께 사는 법이야 당연히 알 리가 없습니다.

소년(소설 중후반부로 가면서 청년, 장년으로 성장합니다만) 폴 베르튄은 아주 평범한 프랑스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평범하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만큼의 행복을 누리고 자라났다는 게 아니라, 그 시절 평범한 프랑스 농민들처럼 고되고 희망 없는 삶을 살 뻔한 처지였다는 뜻입니다. 농촌 생활이란 일이 몹시 고될 뿐 아니라, 농업이라는 저부가가치 산업의 본질적 속성 때문에 중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손에 쥔 재산은 그것대로 적은, 빈곤과 고통의 악순환에 갇힌 절망의 생으로, 이 소설 속에서는 묘사됩니다. 프랑스는 중세 이래 풍요로운 1차 산업의 소출로 왕성한 국부를 누린 나라라서, 다른 곳은 몰라도 프랑스의 농촌만큼은 각별한 낭만이 있을 줄 착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1789년 대혁명 당시에도 농민들의 삶은 그저 목숨만 간신히 붙어 있었을 뿐, 천대와 멸시와 중노동의 고통으로 점철된 지옥상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비교적 젊은 작가님의 작품이라서, 이런 분들의 데뷔작이 흔히 그렇듯 자전적 사연 아닐까 짐작했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1인칭 주인공 폴 베르튄은 1930년대에 태어나 성장기 주요 국면에 나치 독일의 침략이라는 큰 트라우마를 겪었고, 이 과정에서 아버지를 잃습니다. 농촌의 가장들이 종종 그렇듯 책임과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불쌍한 식구들 위에 폭군처럼 군림하려는 욕구만큼은 무척 강한데, 소년 폴 베르튄은 부친의 죽음을 보며 오히려 (죄의식 가득한) 해방감을 느끼는 걸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우리 독자들은 그의 "해석,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사태를 객관적으로 재구성할 필요도 있는데, 소년 폴에게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그의 증언과 고백이 모두 객관적 사실과 일치하지만는 않을 겁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죠. "나치놈들에게 용감히 대들다가 목숨을 잃은 거야." 폴은 냉소적으로 받아들입니다만 우리 독자들이 꼭 (어린)폴의 판단에 전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을 겁니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가세는 여전히 어렵고 폭군의 자리는 맏형 "자끄"가 바로 계승하니 폴은 여전히 행복을 못 누리는 처지입니다. 이 젊은 폭군 자끄에 대해서는 딱히 옹호할 여지를 저도 못 찾겠습니다. 아버지는 어쩌면 나약한 몽상가 기질만 다분한 막내 폴이 딱하게 여겨져 "저런 식으로는 이 거친 세상 못 살아나간다. 현실의 한계가 빤한데 나라도 가슴 아프지만 독한 심성을 길러줘야 하지 않겠는가" 같은 걱정에서 폴을 그리 가혹하게 대했는지도 모릅니다. 허나 자끄는 자기 부친에게서 나쁜 본만 받았을 뿐, 어린 형제들을 배려하는 마음씀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영리한 폴과 정치적 타협을 시도하는가 하면, "네놈의 그 악마 같은 미소가 너무 싫어! 네 그 미소가 아버지를 죽인 거야!" 같은 황당한 반응도 드러냅니다.

폴 스스로는 자각 못 하지만 남이 보기에 그는 미소가 참 아름다운 소년인 듯합니다. 이 미소는 애정 가득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고, 어려서부터 그를 지켜 봐 온 달님(그저 la lune이란 일반명사일 뿐인데, 소년 폴은 Lalune이란 이름을 지닌 인격체처럼 받아들입니다)이 더 다사로이 보듬었고, 조금 더 커서는 이웃집 소녀 마틸드를 짝사랑하면서 한층 깊이를 더한 자질, 매력입니다. 폴은 국가가 지운 병역의무를 다하기 위해 몸을 담게 된 군대에서 "제2의 자끄"라 할 부대장을 만나는데, 양차 대전의 PTSD 때문에 좀 정신이 나간 폭군형 관리자입니다. 이 부대장이 미친 듯 발악하며 폴도 구타하고 나중에는 폴의 친구(군대 동기) 장까지 때리는데, 광기의 발작인 터라 정말 무방비상태의 장을 죽기 직전까지 폭행합니다. 이때 폴은 (어디서 그런 주변머리가 생겼나 싶게) 기지를 발휘하여 뒤에서 부대장을 가격하여 기절시키는데(ㅋㅋ), 책임을 추궁받을 게 뻔하다고 생각이 미치자 폴 자신도 바닥에 드러누워 불의의 사고나 당한 듯 연극을 합니다. 이 미친 부대장이 처음에 폴을 찍어놓고 괴롭힌 것도 "그 미소"가 싫어서였다고 하니, 악마에게 혼을 빼앗기고 폭력에 찌든 불쌍한 인간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우리는 눈치챌 수 있습니다.

상급 책임자가 나서서 폴에게 경위를 묻습니다. 위생병은 폴, 장, 부대장을 후송할 때 폴 역시 부상을 당한 게 확실하다고 오판을 했고, 책임자 역시 이 정직해 보이는 청년이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여깁니다.

"자네는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군. 허나 명심하게. 여기는 좋은 사람을 반기는 곳이 아니야."

"여기"는 물론 병영이겠지만, 어디 좋은 사람을 반기지 않는 곳이 군대뿐이겠습니까. 세상 전체가 다 마찬가지죠. 핍박받고 가난할 뿐 마음은 선량한 사람들이 모인 듯했던 농촌도, 알고 보면 얼마나 큰 악의와 광기가 지배하는 곳이었습니까. 나치가 하루아침에 패망하자 악귀처럼 돌변하여 패잔병들을 농민들이 린치하던 모습을 폴은 생생히 기억합니다(아 물론, 독일군 병사들도 못된 짓 많이 한 걸로 나옵니다. 폴의 아버지도 그 과정에서 후유증으로 죽었고요. 하지만 악을 악으로 갚는 순간 놈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는 거죠). 복수라는 허울 좋은 핑계를 걸고 자신의 추악한 광기 해소에 기회를 악용하던 그 농민들의 모습. 린치 중에 죽어가던 독일군 장교 중에는 (규율을 어기고) 폴의 생명을 살려 준 인정 많은 (어느 소녀의) 아버지, 한 집안의 가장도 있었습니다. 마틸드를 짝사랑하는 폴의 모습이 안타까워, 혹은 이렇게 괜찮은 녀석이 내 딸도 지극정성으로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고 여겨, 폴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지 않았을까요. 사람이 가장 초라해지는 건 자신의 은인에게 합당한 보답을 못 하고 현실에 굴복할 때입니다. 폴은 그 독일군 장교 아저씨(얼굴도 모르는 카트린의 아버지)가 린치를 당하고 죽을 때 아무 도움도 못 준 걸 평생의 수치로 간직합니다.

멀쩡한 부인을 놔두고 정부와 바람을 피우려 도피하는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구나 그 무책임한 남편을 손쉽게 비난할 수 있습니다. 허나 어느 선장님은, 나중에 추궁(?)하던 폴에게 이렇게 변명하는군요.

"나는 내 아내에게서, 모든 순수함을 잃고 삶의 비천한 질곡만을 몸에 감고 다니는 어느 늙은이, 곧 나 자신을 보았네, 하지만 그녀(정부)에게서는 삼십 년 전 순수했던 젊은이의 풋풋한 희망을 보게 된다고. 자네가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나? 인생이 그리 단순하게 선악이 재단되는 과정 같나?"

이 말에 이상하게 진한 공감이 되더군요. 물론 아내를 그리도 메마르고 황폐한 존재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고생을 시킨 못난 남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늙고 지친 선장님의 "도피"도 뭔가 사람 마음을 짠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젊은 폴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튼 도피를 도와 준 대가로 그의 배에 "아무 경험도 없는" 풋내기인 자신을 고용해 줄 걸 요구합니다. 이 선장은 황당해하지만, 청년 폴에게서 30년 전 풋풋했던 자신의 이상과 순정을 발견하고, 이후 폴이 벌이는 갖가지 무모한 짓에 "다시 젊어진 마음으로" 신나게 가담까지 합니다. 물론 폴이 띠는 "마법의 미소"도 큰 몫을 했겠지요.

세상사 풍파가 아무리 인생을 높은 파고에 몰아넣어도, 하늘 위에 두둥실 떠 만인의 삶과 일천 가닥 실개천에 두루 따스한 미소를 불어넣는 달님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에 아직 희망이 남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달님의 미소를 밤하늘로부터 받아 각박한 세상에 뿌리고 다니며 "아직 여기, 살만한 곳임"을 두루 깨닫게 하는 폴 같은 사람이 있기에, 우리는 연대와 악수와 포옹이 먼 달나라 이야기만은 아님을 다시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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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1-04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을 겪은 세대들의 작품은 언제나 절절한 치열함이 있었어요. 생각의 막을 깨는 경험이었던 거 같았죠. 인간이 성장하는 큰 도약판이기도 했겠지요. 그 성장이 긍정적 결과와 정립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빙혈님, 2018년에도 건강히 즐거운 독서 생활 꾸려 나가시길요/

빙혈 2018-01-04 21:04   좋아요 1 | URL
옳은 말씀이십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치열함 끝에 부쩍 자란 정신의 키로, 더 순수해지고 더 이웃과 가족에 정직해지려는 영혼의 뭄부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AgalmA님도 새해에 하시는 일 모두 잘 풀리시고 원하시는 성과 모두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유로 - 공동 통화가 어떻게 유럽의 미래를 위협하는가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박형준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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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보의 비대칭성 이슈는 경제학자들을 꽤 오래 괴롭혀온 난제 중 하나입니다. 신고전학파가 그 이른 시절 "완전 균형, 완전 청산"을 (감히) 주장할 때부터, 왜 그럼 현실에서는 그 깔끔하고 아름다운 지복점을 찾기 어려운지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문들은 지엽말단의 예외나 일시적 교란으로 취급되고 말았을 뿐, 아름다운 경제학 이론의 대(大)체계에 근본적인 회의를 부르지는 못할 요인 정도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의 쾌거 이후로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 현상이 그저 일시적 예외가 아닌, 이론의 정합성을 근본에서 무너뜨릴 수 있는 상수 자격으로 더 심각하고 진지한 조명을 받게 되었죠. 더 중요한 상황 변화는, 이른바 인터넷 혁명을 계기로 일뱐 대중들도 엘리트들 못지 않게 중요 정보에의 광폭 노출이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정책 결정에까지 제법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입장을 견지해 온 그가 "유로 화의 근본 위기"를 들고나온 건 시의적절할 뿐 아니라 학자적 양심과 지평에 비추어 일관되고 어쩌면 당연하기까지 합니다. 단일 유럽의 통화인 유료는 그 태생 시점에서는 많은 축복을 받고 시작했습니다. 진보 진영은 생산요소 중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실업률 0의 달성에다 상품 가격의 균등화까지 머지 않은 미래에 이뤄질 것을 기대했습니다. 보수 진영 역시 싼 값에 노동력을 쓸 수 있다는 희망을 다분히 품었고요. 예전 노 대통령은 단일 통화 출범 즈음(그의 대통령 취임보다 훨씬 앞선 시점의 일)을 회고하며 "사람 사는 세상이 이게 올바른 모습 아니겠는가."라는 코멘트도 한 적 있습니다. 이랬던 유로화가, 재작년의 브렉시트 파동, (그 훨씬 이전)그리스, 이탈리아, 에스파냐, 아일랜드 등의 불확실한 경제 전망 때문에 그 존재의 근본에까지 회의의 그늘이 드리워지는 겁니다.

유로의 장래에 대해 냉소적인 건 삼십 년 전에는 대개 보수 진영과 유대 자본 측이었습니다. 세계는 달러를 기축통화 삼아 그럭저럭 잘 돌아가는데 왜 "인위적으로" 새로운 장치, 제도를 비싼 비용을 들어 만들어내는가, 그를 부양하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추가 비용이 투입되겠는가, 취지는 좋아도 각국의 경제력이 천양지차인데 어떻게 부실과 거품이 끼지 않겠는가 등등이었지요. 스티글리츠 교수의 입장은 (자칫 잘못보면 결론은 비슷한 듯 해도)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요약하면 "유로는 초심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좌초 위기를 맞은 것이다" 정도입니다.

저자 스티글리츠 교수는 우선 유로화의 운용에 결정적 입김을 끼치는 "최종 보스"인 트로이카를 맹비난합니다. 여기서 트로이카라 하면(꼭 스티글리츠 교수뿐 아니라 다른 맥락, 입장, 진영에서도 쓰이는 말이지만), IMF, 유럽중앙은행(ECB), EU 집행위원회를 가리킵니다(p30). 이 책은 "폐쇄적이고 근시안적이며 (이미 정보의 비대칭성이 상당 부부 극복된 현실을 애써 외면한 채 과거의) 그림자, 환각에만 빠져 있는(이상은 독자인 저의 요약입니다) 저들 엘리트 트로이카의 과오로 유로는 고사 직전이다"라는 메시지를, 500여 페이지 분량 내내 강조, 증명, 확장, 전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도 1998년 당시 마찬가지였지만 이들 "트로이카"가 위기 국가에 찾아와서 도와준답시고 돈보따리를 들고 와서 내리는 처방이란 매우 단순하고, 효험이 의심스러울 만큼) 획일적입니다. "허리띠를 졸라매라." 한 마디뿐입니다. 첫째도 긴축, 둘쩨도 긴축만을 강조하는 이 단일 처방은 그간 많은 진보진영, 리버럴 경제학자들의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다만 한국은 워낙 모범생 국가라서, IMF가 내리는 처방(이라기보다 지시, 명령)을 한치의 망설임, 어긋남도 없이 실천, 복종했고 유격훈련 코스나 마치듯 졸업장을 따 냈습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트로이카(유럽 안 국가라면)의 이런 (가짜)만병통치약에 대해, "그 나라의 기층 민중, 서민, 중산층이 겪어야 할 엄청난 고통을 전혀 '비용'으로 계상(計上)하지 않은, 잔인하기 이를데없는 방안"으로 신랄히 비판합니다. 노엄 촘스키(물론 그 천재 언어학자 말입니다)도 그의 저서에서 비슷한 비판을 한 적 있는데, "이들 강자의 대변인들은 약하고 가난한 나라에 가서는 살인적인 고금리(우리도 당시 그랬습니다)로 서민을 괴롭히고, 자기네 나라에서는 제로 금리 정책을 강권한다." 같은 대목이 나오죠. 이 지점에서 두 석학은 견해를 공유하는 셈입니다.

긴축은 왜 나쁜가? 저자의 분석은 선명하고 설득력이 높습니다. 씀씀이를 줄이라니 (가뜩이나 침체된) 투자심리는 자본을 다른 나라로 유출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씀씀이가 줄면 사람이라고 어디 더 많이 고용하겠습니까? 단순 노동력이건 고급 인재건 해외로 유출되기 십상이니 그 나라 안의 생산품은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추락합니다. 실제로 트로이카는 그리스 위기 당시 "국민들이 해외(독일 같은 곳)로 나가 돈을 벌어와서 국가 부채를 갚으라"고 명시적으로 주문했습니다. 마치 1970, 80년대에 한국 노동자들이 중동에 파견되어 땀흘려 번 돈을 고국에 송금하던 현상, 혹은 월남전 당시 파병 군인(급여의 상당 부분은 정부 수중에 들어갔습니다)이나 서독 파견 광부, 간호부(당시 용어)들의 사례와 비슷하죠. 기층 국민의 고통과 수고는 대변 차변의 기장 요소로써 싹 무시한 발상이라야 이런 처방을 거침없이 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잔인하고 비정하며, "반민주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본"의 장부에서 보기만 한다면 그저 합리적이고, "흑자"인 발상이겠지만 말입니다.

역주에도 나옵니다만 저자는 논의의 근본 틀을 "수렴이나 발산이냐"의 이분법으로 일단 단순화합니다. 유로라는 통화, 유럽 연합이라는 단일 정치 단위(의 지향)는 "수렴'을 위해 만든 것입니다. 한 지역 안의 자원과 노력과 의지가 사방팔방으로 분산, 휘발하는 상황은 어느 관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만을 낳습니다. 통일은 획일화, 억압의 기제가 아니라, 모두의 노력과 정성을 보다 효과적인 방향으로 조직화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다름이 있는 곳에 불화, 전쟁이 언제나 발생했던 만큼, 유럽은 (두 차례의 끔찍한 전쟁을 겪고 나서) 더 이상의 다름과 분열을 조장하기보다, "하나의 가치로 수렴하기"를 선택했습니다. 각국의 경제상황은 천차만별이었음을 집행부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일 통화 사용이라는 강력한 조치로, 이 "다름"은 "모두가 넉넉하게 잘 살게 되는 지복점"으로 점차 수렴해갈 것임을 그들은 확신했던 겁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책 중에도 나오지만) 이 단일 통화 유로라는 장치가 많은 결함을 안고 있음을 당시부터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심) 그들의 성공을 응원했고(여기서, 싸늘하고 이기적인 유대 자본의 심성과는 극과 극의 차이를 보이죠), 이 흥미론운 실험 귀추를 주목했습니다. 이제 이 두꺼운 책은, 거대한 실험의 중간 평가 보고서이자 동시에 저자 본인의 (학문적) 입장에 대한 임시 결산 마니페스토이기도 한 것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보급판 서문(원 서문이 있고 보급판 서문이 따로 있습니다)으로 돌아와 보십시오. "우리들 중 그 누가 트럼프 같은 위인이 미국 대통령직에 오를 미래를 예견할 수 있었던가?" 보급판과 하드커버판의 출간 시점이 1년 정도 차이 나니, 이 (추가) 서문은 그 사이의 시대적 격변에 대한 임시 보론(補論) 구실(혹은, 호외[號外] 노릇?)도 하는 것입니다. 책은 대석학이 쓴 책치고는 마치 신문 칼럼 읽히듯 쉽게 내용이 파악되고, 영어권 독자들(원서를 읽는 층)을 위한 배려이긴 하나 예컨대 SECULAR 같은 단어도 "경제학 용어로서, 어느 경제 구조에 만성적으로 배어 든 속성을 가리킴" 같은 설명을 저자 본인이 해 놓고도 있을 만큼 친절합니다. "알렉시 드 토크빌"처럼 현행 표준 외국어 표기법에 충실한 번역도 깔끔한 편집의 미덕을 자랑하고(다른 책은 "알렉시스" 같은 오류를 종종 노출합니다), 적절히 개입하는 역주는 혹 스티글리츠 교수의 평소 지론이나 이 책 자체의 지향에 덜 밝은 독자들이 행여 샛길로 빠지지 않게 적정 지점에서 주의를 환기합니다. 정확한 동시에 친절한 본문이라고 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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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세계 - 미국 외교정책과 구질서의 위기, 그리고 한반도의 운명
리처드 하스 지음, 김성훈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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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세계 정세가 요동치지 않았던 시절은 없었습니다. 한국사만 해도 900여차례가 넘는 외침을 겪었다고는 하나, 독일 등 유럽의 중근세사를 살피면 도대체 이렇게 전란과 분쟁이 잦았던 땅에 어떻게 사람이 터잡고 살 수나 있었는지 고개가 갸웃해지곤 합니다. 언제나 대립과 갈등이 잦아들 날이 없던 세계였지만, 그 중 상당 국면은 "요동과 위험의 원인이 무엇인지, 나는 누구이며 적은 어떤 이들인지"에 대한 인식만큼은 명확했습니다. 가장 최근의 정세 위협 요인이었던 미소 냉전 역시 "누가 싸우는지, 왜 싸우는지"에 대해서만큼은 모두가 다 알고들 있었죠. 뜻밖의 돌발사태로 의외의 해법이 찾아지긴 했으나 그 일이 아니었어도 미소 대결은 아마 원만한 타협, 혹은 점감하는 긴장의 소강으로 마무리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헌데 작금의 세계 정세 불안은 모든 것이 불확실성에 싸여 있습니다. 미국과 북한의 갈등이 고조되지만 과연 이 두 나라가 전쟁 상대로 격이 맞기나 할까요?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중이 협력한다고 하지만 과연 두 초강대국이 서로 진정어린 "협력" 관계를 유지한다고 보는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IS 등 극단주의 세력은 표면상 미국과 서유럽을 겨냥해 테러 등 도발을 감행하지만, 이들은 그럼 러시아와 중국 등과는 우호적인 관계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고, 러시아나 중국의 지역 분립 세력과 언제든 연대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양국은 국가 분열 사태를 막기 위해 진압과 격멸에 총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나아가, 과연 중국과 러시아는 언제까지 불안한 동맹을 유지할까요? 표트르 대제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을 때까지 동진한 이래 두 거인은 단 한 시점도 사이 좋게 지낸 적이 없습니다. 같은 이념 하에 공산주의 국가를 세운 시절조차 둘은 일촉즉발지경까지 치달았습니다. "누가 나의 적이고 친구인지, 무엇을 위해서 싸워야하는지" 그 당사자들조차 갈피를 못 잡는 게 현재의 국제 정세입니다. 저자 리처드 하스 교수의 인식은 이런 질문에서 그 단초를 마련합니다. 책 제목의 DISARRAY는 그만큼 드러난 현상 모두가 아직 무슨 실체인지 감을 잡기 어렵고, 전례 없던 이런 불확실성이 위기를 키우는 중요 요인 중 하나라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장 중 하나가 '새로운 세계질서 2.0’입니다. 이 신질서를 뒷받침하는 가장 큰 원리는 "주권에도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명제입니다. 영어로는 sovereignty인 이 오랜 개념은, 번역어로는 "주권"인데 과연 낱말 속에 "권" 자만 있지 의무나 책임을 뜻하는 요소(형태소)가 없습니다. 사실 이 말은 봉건제 하에서 상위의 통치자나 교황에게 함부로 간섭 받지 않을 권리를 내세우는 데서 비롯했으니 그에 의무 같은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겠죠. 주권 자체도 간신히 명색만 유지할 판에 무슨 한가로운 의무를 고려했겠습니까.

중국은 남중국해 일원에 영해로서의 특수 성격을 주장하면서 이른바 "구단선론"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인공 섬도 지어 놓았고 역사적 연원도 충분히 존재하니 이 라인 안으로 넘어들어오지 말라는 경고인데, 이걸 두고 흔히 A2/AD라는 말(전략의 일환)을 쓰기도 합니다. 여튼 이때 중국이 내세운 명분이 "주권 행사"인데, 중국을 두고 구차하게 그 주권이 부인당할 만한 한계국가라고 인식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이유에서 뭔가 주장이 참 궁색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제까지 아무나 다 잘만 다니던 공해가 일국의 영해로 바뀌는 판에 근거라는 게 고작 "주권 행사"라니. 여튼 주권이라는 근거에서 그토록 강력한 현상의 변경이 초래될 정도라면, 이제는 주권에 시시한 방어적 개념만 부여하고 말 게 아니라, 그 강력해진 외양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도 함께 지워야죠. 본디 모든 권리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아니었습니까.

세계 평화는 강대국 간의 알력으로만 신음하고 위협 받는 게 아니라 약한 나라들이 고질적으로 치르는 시련과 문제 때문에도 심각하게 흔들립니다. 저자는 과연 국제정치학계의 대석학답게 섬세한 개념 구분으로 독자의 이해를 돕는데요. 예컨대 국가로서의 위신은 유지하지만 국제 사회에서 발언권이 약한 나라는 weal power, 그렇지도 못하고 자국 내부의 통일성이나 정체성도 간신히 연명해 가는 나라는 weak state로 명명을 달리하는 식입니다. 미국이 1990년대 초에 페르시아만 일대에서 대규모 군사 작전을 폈을 때 쿠웨이트의 주권을 회복시킨 후 그 선을 넘지 않고 일단 작전을 종료했으며, 대신 이라크에 대해서는 이른바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여 재기를 막은 사실은 유명하죠. 이때 아직 소련이 망하기 전이었는데 냉전의 공식 종료 이후보다 오히려 저때가 미국의 위세가 가장 등등하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세상에 "비행 금지 구역"이라니! 그러나 군사력이 현저히 불균형을 이룬 판에 당장 쳐들어가서 정권 자체를 와해시키지 않는 걸 고맙게 여겨야할 판이라고 할까요.

르완다 사태, 아이티 사태(모두 1990년대 전~중반에 벌어진 국제 위기였습니다) 모두 각각의 국가들이, 자국 국민 일부를 무력으로 공격하거나(이라크의 사담 후세인도 외국인 쿠웨이트뿐 아니라 엄연한 국민인 쿠르드족 거주지에 독가스를 살포한 적이 있습니다), 자국민을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한 사실이 있다는 게 공통점이라고 저자는 지적합니다(p127). 후자의 경우 "보호하지 못했다"는 수동적 국면에서 그친 게 아니라 공격을 은연중에 방조, 교사한 혐의까지도 받는 거죠. 이른바 R2P는 이제 하스 교수에 의해 "주권의 새로운 의미로 편입될" 국가 내적 의무 중 하나로, "자국민을 정당하고 적법하게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이미 주권을 논할 자격을 잃는다"는 함의에까지 이어집니다.

이란의 경우는 보다 복잡합니다. 미국은 특히 오바마 행정부 당시 이른바 "전략적 인내"라는 방침을 꽤 오래 유지했고, 제거(elimination)보다는 제약(constraint)이라는 틀로 해법을 마련하려 들었습니다. 국제 조약에 있어서 합의 문언은 그 타당성보다는 체결 당시의 협상력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안타깝지만 냉혹한 현실인데, 저자는 당시 국제 유가의 등락이라든가 이란 주변의 정세에 비추어 더 유리한 협상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큰 폭으로 양보한 건 매우 유감스러운 결과였다는 한 마디를 빼놓지 않습니다.

인도- 파키스탄 간의 긴장은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닌 해묵은 과제 중 하나입니다. 1990년대 후반에 파키스탄, 인도 양국이 핵무장을 완료함에 따라 남아시아 일대의 지정학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는데, 그전까지는 명분상으로야 어떠했든 자원과 영토와 인구 수 면에서 열세인 파키스탄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추세였습니다. 저자는 "이미 상당수 무슬림들이 인도 사회에 동화되어 잘 살고 있는 형국에 별개의 무슬림 국가가 북동부에 따로 분립하는 자체가 인도에 대한 모독"으로 해당 국가의 지도자들이 인식한다고 정리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도 아대륙 전체에 대한 지배권은 10세기 이래 파키스탄(현재의 명칭) 일대의 펀잡인들이 특유의 무공과 의지로 내내 유지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권력 구조 하부만을 간신히 지탱해 온 인도인들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게 조상 대대의 명예에 비추어 모욕적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종교 대립 문제가 아니죠. 여러 정치 세력이 아슬아슬한 연합으로 형식상 민주정체를 끌고 온 인도와는 달리 파키스탄은 군부 정권이 국가를 장악한 독재 시스템이었습니다. 지아 울 하크가 사고로 죽고 민주화의 봄이 열리는가 했으나 이내 무능과 분열상만을 노출하고 곧바로 무샤라프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며 종래의 독재로 다시 회귀했죠.

"주권적 의무" 개념의 정립은 생각보다 쉬운 과제가 아닙니다. 심지어 그 창안자인 하스 교수 본인에게조차 그렇습니다. 의무의 개념은 곧바로 그 국가가 "정통성"을 과연 가지고 있느냐로 연결되는데, 이로써 그저 강대국에 대한 항변권 정도의 의미에 그치던 "주권" 개념은 더 입체적인 성격이 새로 입혀지는 셈입니다. 정통성이 부족한 주권은 권리만 내세울 뿐 의무는 내던지다시피한 불완전한 명분이며, 이는 예컨대 1989년 당시 민주화를 요구하며 천안문 일대에 모인 군중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덩샤오핑 정권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지적입니다. 이 책에서 내내 강조되는 건, 도대체 자국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기본권을 탄압하는 국가가 과연 대외적으로 주권을 말할 자격이 있느냐 하는 의문입니다. 명백한 부조리를 두고서도 "현실적 제약"이라는 비겁한 핑계를 대며 외면하는 데에서 현재의 국제 정세 불안이 유래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닙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유럽 근세의 정치적 위기가 봉합되고 disarray가 진정되었듯, 북핵 위기이건 혹은 그 어떤 지역적 긴장이건 전쟁 없이 마무리되려면 국가 모두가 참여하는 이성적인 논의의 장이 우선 열려야 하며, 그때 이 "세계 질서 2.0과 주권의 신개념 정립"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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탭 TAP - 모바일 비즈니스에서 승자가 되는 법
아닌디야 고즈 지음, 이방실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상품의 외관과 기능, 디자인만큼이나 큰 혁신이 필요한 분야가 바로 광고입니다. 어제까지 요긴하게 쓰이고 시대의 트렌드를 상징하는 듯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상품과 서비스들이 오늘은 까맣게 잊혀져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지만, 우리들 소비자들도 그게 마땅한 세상의 이치나 되는 것처럼 자신의 변덕과 지조 없음을 합리화합니다. 그리 쉽게 잊을 요량이었으면 애초부터 돈 들여 살 필요도 없지나 않았는지, 이처럼 기호와 취향이 쉽사리 바뀐다면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부질없는 트렌드나 유행처럼 나 자신도 참 뜬구름 같은 영혼이 아닌지 다소의 자괴감마저 들곤 하죠.

기업이든 그 기업의 홍보를 대행하는 업체이든(이 책의 취지에 따르자면 어떤 중간 단계를 거칠 필요 없이, 똑똑한 기업이 소비자와 직접 소통하는 양상이 더 바람직하겠지요), 소비자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 자사의 상품과 서비스의 특장을 잘 납득시키는 메시지를 보낼 방법만있다면 여한이 없을 겁니다. 대부분의 광고는 귀찮고 번거롭고 불쾌하며, (책 중 표현에 따르면) creepy하기까지 합니다. 반면 어떤 광고를 만날 때면 그 광고가 팔아대는 아이템이 불가사의하게도 "바로이거다!" 싶을 만큼 마음에 쏙 와닿기도 합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후회감이 들어도 구매와 지불은 이미 완료된 후죠. 소비자에게 일시 눈속임 술수를 부리라는 게 아니라 타인과 대중의 마음 그 정곡을 찔러 내 웨어를 안 사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요령은 누구나 배우고 싶은 알짜 노하우,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진짜 혁신은 애드버타이징을 넘어선 커뮤니케이션 섹터에서 언제나 간절히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단지 관계자들이 뻔한 현실을 애써 외면했을 뿐이죠.

tap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p14 중반부 이하 참조). 하나는 "소비자들이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는 동작"을 가리키고(이는 소비자가 시장을 향해 메시지를 청하는 동작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업들이 "이런 소비자가 남긴 흔적을 활용"하여 최적의 메시지를 보낼 방법을 탐색하는 전략입니다. tap이란 단어에 "기존 정보를 솜씨껏 활용하다"라는 뜻이 있는 줄은 많은 분들이 처음 알 법도 합니다. 판매자를 향해 "톡톡" 두드려 오는 소비자의 마음을 잘 헤아려 "여기 저 듣고 있어요."라며 톡톡 두드려 가며 구애자의 눈빛에 화답하는 기업의 센스 있는 리액션, 바로 시장에서 성공하는 위너의 날랜 몸짓과 지혜로운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암만 좋은 상품이라도 우격다짐으로 소비자에 떠넘겨서는 안 되며, 강매나 강권은 요즘 세상에 기업이 자기 무덤을 파는 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세일즈, 마케팅은 뭔가 찜찜한 걸 팔아치우는 게 아니라 쌍방이 모두 행복한 소통과 만족으로 웃으며 이루는 눈빛과 미소의 교환과 같습니다.

다음소프트 송길영 부사장의 추천사를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 만화 드래곤볼을 보면 일곱 개의 구슬을 찾아다니는 주인공들이, 일곱 개를 모두 모았을 때 소원이 성취된다는 부푼 꿈을 안고 벌이는 모험...."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느낌은, 과연 마케팅의 비결은 어쩌면 이 저자가 소개하는 아홉 가지(두 개가 더 많아요) "포스"에 다 녹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 시장과 소비자를 연결하는 매체가 미흡하거나 듬성듬성했을 때는 저마다 상황에 맞춰 각각의 막연한 방법론을 전개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백 년 전 니콜라 테슬라가 예견했듯, 대부분의 개인들이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가상의 망을 통해 외부와 열심히 소통하는 지금, 소비자의 편의가 증진된 만큼이나 기업들도 시장에서 한판 승부를 봐야만 할 시점과 수단이 눈앞에 바싹 닥쳐온 셈입니다.

첫째는 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는군요. 구체적으로는 고객이 누구인지 아는 게 이 "맥락"을 아는 단계이며, 그의 신상과 정체성을 알라는 게 아닙니다.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어떤 양상, 방법(mode)으로 행동하는지는 경우에 따라 다 달라지며, 그가 무슨 기분(mood)인지도 역시 수시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어쩌면 사람을 아는 것보다, 이 맥락, 즉 모드와 무드를 아는 게 마케팅에서는 더 본질인지도 모르고,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전자는 알 필요가 없는 정보일 수도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기업에 제공하는(엄밀히 말하면 소비자가 3자 정보 제공에 동의한 후라야 하지만) 정보 중 가장 핵심적인 건 "위치"입니다. 제아무리 좋은 서비스와 상품도 이를 소비해 줄 당사자가 머나먼 곳에 떨어져 있으면 어필하기가 어렵죠. 그 사람이 근방에 왔을 때 날래게 접근해서 권유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 관련하여 재미있는 예시와 제안이 책에 많이 나오는데요. 우선 상품과 소비자 간의 단순 거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1.5km 거리지만 반대 방향에 놓인 샵과, 3km 떨어졌지만 지금 그가 향해 가는 도중에 자리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까?" 질문에 대한 답은 누구로부터도 같게 나올 겁니다. 이런 종합적 상황 정보를 두고 "geo-awareness"라고 부른다는군요.

마케팅에서 예전부터 강조해 오던 팩터 하나가 "모멘트 오브 트루스(truth)"입니다. 소비자가 마음을 결정하는 바로 그 순간인데, 개발자나 벤터, 마케터 입장에서는 오래 전부터 고안해 온 제품이 과연 어필에 성공할지 아닐지 여부를 놓고 온갖 시나리오를 다 짜오다 이제 이 짧은 순간에 다다라 그 답을 비로소 보게 된다는 뜻이죠. 이 책에서는 그 순간을 더 짧은 단위, 더 짙은 밀도로 정의합니다. TV 방영 시간대 중에는 "프라임 타임"이라는 대역이 있는데, 무슨 뜻인지 구체적으로 몇 시 대 근처를 말하는지는 관계자 아니라도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항이죠. 이처럼 대략 몇 시부터 몇 시까지가 황금 시간대라는 규정은, 이제 시대에 많이 뒤떨어진 낡은 틀이 되었습니다. 상품군마다 그 잠재적 소비자에게 제대로 어필할 수 있는 시간대가 다 따로 정해져 있으며, 책에서는 아예 구체적으로 몇 시 몇 분인지까지 업계에서는 모색한다고 합니다. 이걸 두고 "마이크로 모멘트"라고 합니다.

이 "시간" 팩터뿐 아니라, 다른 여덟 가지 요소에 대해서도, "단기" 아닌 장기 판매에까지 두루 적용될 만한 논의일까요? 저자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합니다(이 서평 둘째 단락 중간쯤에서 저도 언급했습니다) p147에서는 필립 코틀러의 한 저서를 인용하여 "장기적인 영향력을 만들어내는 데에도 모바일 마케팅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확언합니다. 사실 모바일 중심이 아니라 이미 "모바일 온리"를 운위하는 세상에서 이런 논의(과연 모바일 마케팅이 장기적으로도 효과가 있을지를 따지는 것)는, 답이 빤히 정해진 판에 번거로운 우회 절차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앞에서 "위치" 팩터가 소비자의 로케이션을 뜻했다면, 나 좀 봐주세요 하는 판매자의 위치, 어필 과제는 책에서 "부각성"으로 표현됩니다. 어쩌면 모든 담당자, 책임자 들이 가장 골머리를 싸매는 과제이겠는데 원어는 salient(명사형은 saliency)입니다. 먼저 본 걸 선명히 기억하는 건 초두효과, 반대로 나중 것만 기억하는 건 최신효과라고 부릅니다. 이 장은 다른 챕터들에 비해 짧은데 주로 논의의 초점은 "무슨 쿠폰이 어떻게 누구에게 효과있게 다가가느냐"에 놓여 있습니다. 책 읽으면서 쿠폰에 죽고사는 게 나뿐이 아니고 모든 소비자가 비슷한 태도이며, 몰 관계자들도 이 문제에 얼마나 목을 매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네요. 어떤 메커니즘으로 특정 쿠폰이 내게 왔다가는지 알고 싶다면 특히 이 장을 주의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비좁은 공간이 특히 의미있는 이유". 이른바 혼잡도에 대한 논의는 이 책에서 가장 잘 쓰여진 대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던데요. 행동경제학이나 마케팅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소비자 자신도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모를 절묘한 이치를 확실한 근거와 예시와 함께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저자도 그런 의견을 내놓는데, 도대체 왜 혼잡도가 증가한 만원 지하철 안 같은 곳에서 애드 메시지에 대한 증가(감소가 아니라)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영악한 마케터라면 이유를 따지고 들 시간에 고객의 명확한 행동 패턴을 철저히 따라가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이 효과가 얼마나 지속성이 있는지를 캐려면(혹은 이런 책 한 권을 써서 까다로운 독자들을 납득시키려면) 역시 이유 제시가 필요합니다. 저자는 그 명석한 두뇌로 "모바일에의 몰입도와 공간 혼잡도의 선형 비례 관계"를 짚습니다.

위치와 이동궤적은 또 다른 개념입니다. 이미 수 년 전부터 노드스트롬(백화점)이나 패밀리달러(할인점) 등의 업체는 물론 베네통 같은 브랜드에서도 개별 고객들의 이동궤적에 대한 유의미한 분석을 시작, 어느 정도는 매뉴얼화한 시나리오 세트를 완성해 가는 중입니다.  2001년작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온 맞춤형 광고 시퀀스가 그리도 큰 인상을 남겼는지 어느 책이나 보고서를 봐도 이 예를 거론들 하는데, 이 책에서 인용하는 NYT의 보도에서는 이미 SF가 현실이 되어 버린 업계의 현황을 확인해 줍니다.

워너메이커의 명언은 오늘날까지도 마케팅부서의 난제를 잘 요약합니다. "분명 홍보에 쓰이는 돈 반 이상은 낭비되고 있는데, 문제는 그 돈들이 어디서 어떻게 낭비되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 난제를 두고 저자는 "테크놀로지 믹스" 팩터로 요약합니다. 우선 사용자들은 여러 스크린을 사용하여 "장터"에 접근합니다. 여러 개의 스크린이라 해서 어렵게 생각할 건 전혀 없고, 누구든 스마트폰 하나로만 채널 삼아 물건을 사지는 않죠. 저만 해도 책은 PC를 통해 이것저것 따져본 후 구매를 결정합니다. 어떤 건 이상하게도 꼭 TV 홈쇼핑을 통해야 싸게 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품목이 따로 있습니다. 기업은 한 매체에 몰빵하지 말고, 각 "스크린"이 이룰 수 있는 시너지 효과를 따진 후에 메시지 안배를 결정해야 한다는 충고입니다. 각 디바이스가 대체 관계인지 보완 관계인지도 잘 따져 봐야 합니다.

"효율보다는 균형을 따져라." 지난 2차, 3차 산업혁명시대가 효율, 능률 일변도의 단색적 척도로 모든 걸 평가했다면, 이제는 소통의 진정성 유지를 위해서도 (혹은 정말 광고의 직접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소비자의 감정선에 안착하기 위한 균형 감각이 가장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하긴 누구라도, 설령 최상이 상품을 구매할 기회를 손에 넣을망정, 그 과정에서 감정이 상하는 걸 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정보를 얻어내되 필요 최소한으로, 가장 무리 없이 유쾌한 방법으로 고객과 소통하고, 지혜를 발휘하여 우아한 어필을 하는 길이 이 책에 많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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