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끝에서 나눈 대화 - 귄터 그라스, 파트릭 모디아노, 임레 케르테스… 인생에 대한 거장들의 대답
이리스 라디쉬 지음, 염정용 옮김 / 에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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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에 대한 환상이 사라진다."

마케팅 (혹은 어느 부서라도) 담당자들이 치밀한 기획 끝에 소비자, 시장의 심판을 받는(선택이 되느냐 안 되느냐) 바로 그 순간을 두고 "moment of truth"라고도 부르죠.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다들 희망 섞인 관측도 하고, 대박 치면 앞으로 뭘 하겠다느니 잔뜩 부푼 포부를 재미 삼아 털어놓기도 합니다. 잘 될 수도 있지만 안 되는 경우도 많고, 이때 환멸이 깨진다는 이유에서 저런 말을 쓰는 건데, 여튼 인간은 누구라도 자신의 삶에 대해 작건 크건 환상을 품고 삽니다. 반면 남의 삶에 훈수를 둘 때에는 그렇게 현실적이고 정확할 수가 또 없습니다.

이 책은, 우리 같은 범속한 이들이 아나라, 나이 지긋이 드신 작가분들께서, "인생에 대한 환상이 서서히 사라져갈 무렵" <ZEIT>誌와의 인터뷰에 응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갖가지 속 깊은 상념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랫말처럼,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는" 법이지요. 생의 후반기 온갖 영욕과 쓴맛 단맛을 다 겪고 "무엇인 인생인지"에 대해 담담한 관조가 가능한 문인들의 말씀이기에, 설혹 젊은 독자들이 읽어도 깨우치는 바가 많을 뿐 아니라 심금을 울리는 진정 가득한 명언이 많은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늙는 것은 죄악이다." 하 이런! 예전에 문인 전혜린은 "서른 그 추함을 어떻게 견딜까."라는 명언을 남기고 죽음을 택하여 전설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늙건 젊건 범속한 우리들은 "Life goes on."을 되뇌며 각자의 일상에 그래도 그 나름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저 말을 (인터뷰에서 한) 쥘리앵 그린은 프랑스 태생 미국인 소설가입니다. 인터뷰 중 부친에 대해 언급하며 "남북전쟁(미국 내전) 참전"이 나오기도 하는 건 이 때문이죠. 유난히 전쟁과 정치, 강대국의 횡포에 대한 평가가 많이 나오는 인터뷰 중 "이라크" 이야기는 2003년 부시 행정부 관련이 아니고 1990년의 걸프전을 환기하는 의도이니 우리 독자들은 오해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린은 1998년에 이미 타계한 분이니까요. 참고로 저 말은 늙음에 대한 경멸과 가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죄악"이 과연 무엇인지를 놓고 재고해 보자는 촉구에 가깝습니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늙으면 죽어야 한다"와, "사는 게 다 죄지요." 중 후자에 더 가깝다고나 할지요.

"Kehrdiannix!" 행동주의 문학을 옹호한 페터 륌코르프는 "당신이 이 말을 이해할지 모르겠지만"이란 전제를 달며 자신의 "초연함, 냉담함"을 표현합니다. 역주에 "신경쓰지 마"라는 독일 북부 방언이라고 친절한 설명이 있죠. 더 상세하게는 이게 니더작센에서 자주 들리는 표현입니다. 이거 원 말은, "Kehr dich(2인칭 친칭 명령) an nichts!"죠. 빨리 말해서 저리 들리는 걸 아예 관용어로 굳게 한 건데요. 우리말로 하면 글쎄... "쫄지마" 정도? 영어로 하면 Back off from nothing 쯤 될 겁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컨테이너선은 갈수록 배의 모습과 거리가 멀어지고, (사회의 부속으로 편입되는) 우리들은 점차 인간의 모습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진다.(p71)" 음울하지만 삶의 씁쓸한 요체를 제대로 파악했지 싶은 그의 명언이더군요.

"영어는 동사, 독일어는 명사, 러시아어는 형용사" 안드레이 비토프는 세류에 휩쓸리기를 거부하고 변함없는 모성으로서의 러시아적 정신 탐구에 헌신한 작가입니다. 인터뷰는 푸틴 체제가 슬슬 제 꼴을 갖춰갈 무렵인 2004년입니다. 단 저 말은 비토프 본인의 창안이 아니라, 세간에 그런 평가가 있다는 걸 떠올려 주면서 자신이 그에 대해 열렬한 동의를 보낸다는 걸 재확인하는 멘트입니다.

인터뷰어 이리스 라디쉬의 "의견, 평가, 정리"가 더 의미심장한데, 그녀는 "... 그 말씀은, 유럽은 이미 수명이 다했고 러시아는 아직 살아갈 날들이 남았다는 뜻인가요?"라고 묻습니다(p97).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앞에서 비토프가 무슨 말을 했기에 저런 질문이 나오나 하실 수도 있겠으나, 비토프의 규정이 무엇이었든 관계 없이(!) 의미심장한 통찰이라고 보지 않으십니까? 이는 "러시아가 옳고 유럽이 그르다." 같은 가치 판단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러시아는 도스토예프스크의 맥락에서 여전히 "타락하고 추접스러운 나라"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오로지 쇼펜하우어적 의미에서(혹은 니체) "생명력"이란 기준으로 하는 말입니다. 다시 이 책 제목을 들여다 보십시오. "삶의 끝에서 나눈 대화" 삶은 정의롭고 가치로 가득찬 것이어서 오래 지속되고, 죄의 응보 때문에 돌연 종지부를 찍는 게 아닙니다.

조지 타보리도 예전 분이긴 하나 이 인터뷰는 04년에 이뤄졌고 이분이 워낙 오래 산 분이라서인지 글과 (우리 한국 독자 사이의) 감성적 갭이 그리 크지 않게 느껴지더군요. "OO 말인가요? 우리는 그 말을 아무데서나 함부로 내뱉지만, 본래 의미와는 전혀 관련이 없지요(이거는 제가 중학교 때 국어쌤도 그런 말을 하던데). 나에게 친척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아흔 둘의 나이에 아이를 만드는 일을 저질렀답니다." 이 말을 인터뷰에서 할 당시의 타보리도 비슷한 나이였습니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독일식 햄 요리가 맛이 끔찍하다고 불평하시네요. 우리도 요즘 굴라시 메뉴를 취급하는 레스토랑이 늘고 있습니다만 이분이 헝가리 분입니다. 젊어서 얼마나 풍미 이슈에 까다롭게 구셨을지도 짐작이 가고 말이죠.

"나는 히틀러를 직접 보았습니다. 1933. 1 빌헬름 슈트라서의 어느 발코니에 서 있던데 무척 슬퍼 보이더군요.(p117)." 누군가의 표정이 어둡거나 밝거나 단호하거나 불안하거나 한 건 제 생각으로 대체로는 보는 사람 마음에 달린 겁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두고만큼은 타보리의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습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슬픈" 사람이 아니었겠습니까? 세계와, 자신과, 보편과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스스로의 운명을 잘 알았기 때문에 말입니다. G E 레싱의 <현자 나탄>에 대해 말하며 (그 앞에서) 느닷 TV의 의의에 대해 논하는 건(타보리와 라디쉬 모두), 이분이 본디 텍스트와 공연예술 모두로서의 "연극"에 엄청 열정을 쏟은 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라도, 혹은 잠시라도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나는 나의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닌지 절망에 빠지고 두려워집니다." 문인에게 있어 집필뿐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우리들 역시 익숙한 루틴의 그 무엇이 빠져나가면 잠시라도 당혹감에 압도됩니다. 데리다, 베케트, 롤랑 바르트, 조르주 바타유 등의 작품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저런 공황 상태에서 특히 그랬다는 뜻이겠죠?)고 고백하는 마이뢰커는 우리가 그의 작품을 읽으며 으레 그런 분이겠거니 짐작했던 대로 섬세하고 상처 입기 쉬운 마음의 결을 인터뷰에서 무시로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질문이 꽤 재미있습니다. "(그럴 때) 글을 쓰는 건 당신인가요, 당신의 자아인가요?" 라디쉬는 저 위(이 책 맨처음) 쥘리앙 그린의 말("내 글은 누군가의 말을 받아적은 것들이다")을 상기하며, 이 질문을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린의 인터뷰는 1990년대 중반에 이뤄졌고 지금 이 만남은 04년 중에 이뤄졌습니다(간접으로 차이트 지의 연륜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죠. 이제 중견을 넘어 거물 대접을 받는 라디쉬는 저때만 해도 30대 아니었겠습니까). 이 질문에 마이뢰커는 "나도 에른스트(에른스트 얀들)이 내 귀에서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나이로는 (아직도 생존해 계신) 마이뢰커가 얀들보다 한 살 위입니다. 아쉽게도 얀들과의 인터뷰는 이 책에 없습니다. 이 이슈는 마치 18세기의 괴테가 말한 "데몬"을 떠올리게도 하네요.

이 책에서 우리 한국 독자들이 가장 유의깊게 볼 만한 대목은 귄터 그라스와 마르틴 발저의 조인트 인터뷰입니다. 두 분이 동갑이고 문예나 사회 활동에서 (누구나 다 알듯) 평생의 동지로 살아왔습니다. 책에는 2015년 그라스의 서거를 회고(우리 한국에서도 당시 큰 반향이 일었죠. 80년대 학번 어르신들에게 특히 의미 깊은 문인이며, 1989년에 드디어 해금된 영화 <양철북>도 많이들 아실 겁니다)하는 라디쉬의 건조한 듯 의미심장한 감회가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참 멋진 말씀이, "아우슈비츠가 도덕적 곤봉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입니다. 아니, 그 전에, 도덕이 곤봉 노릇을 하면 이미 그건 도덕도 아닙니다. 간혹 우리는 엄혹한 위기의 시대에는 정작 숨어서 뭘 했는지 모를 사람이, 투쟁과 고난을 거쳐 다 이뤄진 밥상에 날선 목청만 높이며 숟가락만 올리려는 경우를 보곤 합니다. 논리의 비약도 심하고 매사가 견강부회인데다 인성도 참으로 거칠고 나쁜, 그러면서도 간악한 거짓말쟁이더군요.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 시도는 대개 도덕과 무관한, 추악한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는 비뚤어진 영혼의 흉계가 그 이면에 깔려 있기 십상입니다.

책은 (섬세한 기획의 결과물이니 당연한 결과일지 모르지만) 정말로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 할 연령의 문인들만 만나, 치열한 언어와 투명한 통찰로 그들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라디쉬의 "맹활약"이 오히려 더 볼만합니다. 인터뷰 앞에는 라디쉬 본인의 "회고, 감상"이 일일이 정성스레 쓰여졌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라디쉬의 책이라 불러도 될 듯합니다. 인터뷰의 질은 인터뷰어의 공력과 천재성에 전적으로 좌우된다고 봐도 되는데, 이 책은 정말 흔한 인터뷰의 범주를 넘어선, 그 자체로 힘찬 미학과 지긋한 교훈, 멋진 감성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길 삼가(그러나 자신 있게)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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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지막 대륙
미지 레이먼드 지음, 이선혜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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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나오는 대로 1979년 "에어뉴질랜드901"이라는 비행기가 재난을 당한 적은 실제로 있었습니다만, 오스트랄리스라는 이름의 남극 크루즈 여객선이 정착빙에 부딪혀 715명의 사상자를 낸 대형 참사가 빚어진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처럼 남극이 "책임 있는 관리 당국"이 부재한 채로 방치되며, 게다가 남극 조약이 종료되기까지 하는 몇 십 년 후에 이른다면, 이런 사고가 언제든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여튼 역자 후기에 나오는 대로 이 소설은 이른바 "재난 장르"는 아닙니다. 남극 대륙이라는 예외적 환경에서 다양한 아종의 펭귄들, 그 밖의 동식물군에 정을 붙이며 생업에 정열을 쏟는 어느 전문직 여성이, 여느 통상의 대륙에 사는 남들처럼 개인적인 사랑, 직업상의 갈등, 관계 속에서의 마찰과 유대를 두루 거치며 생의 일정 시점에서 어떤 겨결론에 도달한다는 사연입니다. 사람은 남극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환경 속에서도 인격 파탄과 완전한 안식 중 어느 지점에도 도달할 수 있는, 감정과 상상을 통해 존재 방식을 결정하는 유일한 동물입니다만, 누구에게는 그 배경(무대)가 하필 남극이라면 마치 사막의 구도자가 맞는 특별한 운명처럼 우리는 그이의 유별난 운명과 행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인공은 1인칭 시점으로 내내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데보라 가드너입니다. 대개 5년 전 "그 참사"가 빚어졌던 언저리에서 과거 회상이 주를 이루는 어조이지만, 많은 대목에서 시제는 현재를 취하며(엄연히 5년 전 과거인데도요), 아주 간혹 십수 년 전 대학원생 시절로 돌아가기도 하다가, 결말에서는 본 주소를 내내 두고 있었던 오리건 포틀랜드(남극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도 집은 여기를 삼았습니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짓습니다.

남극 같은 극한의 원격지에서 수 개월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이들에게는, 현지에서 부부처럼 "커플(해당 대목에서는 이 흔한 단어에 특볗한 의미가 주어지더군요)"로 지내다가, "원 대륙"으로 복귀해서는 본연의 가족에게 자연스럽게 소속되곤 하는 관계가 종종 생기나 봅니다. 그럴 만도 하겠다 싶어도, 다시 생각해 보면 뭠가 거북한 느낌이 드는 게 또 당연합니다.

주인공 데보라 가드너는 아직 미혼인데다 본인 표현(p217)에 따르면 남자를 진지하게 사귀어 본 적이 없습니다. 대학원생 시절에는 채드, 데니스 등이 생각나는 정도이며, 그 중 전자와는 제법 깊은 사이까지 진행되었는지 임신까지 한 적도 있지만 출산은 하지 않았습니다. 중반쯤에 보면 "다시 관계가 복원된" 켈러 설리번에게 청혼을 받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호칭이 "미스 가드너"입니다. 한 번도 결혼을 하지않았으니 당연하며, 이런 까닭에 그녀는 별반 께름칙한 느낌 없이 어떤 이성과도 가벼운, 혹은 진지한 관계를 만들 수 있지만 그녀가 사람 고르는 데 까다로운 편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유년기에 그녀가 부친의 부정(不貞)을 뜻하지 않게 눈치챈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친의 생일보다 한참 앞선 시점, 하트가 그려진 축하 카드를 아빠가 쓰는 걸 훔쳐봤는데, 이 일을 기억한 그녀가 몇 달 후 엄마에게 주어진 카드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한 걸 지적하며 가정은 결정적으로 파탄이 났던 거죠. 그 전부터 이 부부는 어린 딸의 눈에도 꽤 어색한 관계였는데, 이 악몽 같은 기억 때문에 뎁 가드너는 내내 소극적인 대(對) 이성 자세를 가지게 되었나 봅니다.

그녀는 학창 시절 내내 그리 여성스럽지 않은 모습을 유지했고(지금 키가 180cm에 가까우니 저 시기에도 작은 키는 아니었겠죠?), 친하게 지낸(그녀의 평가에 의하면 "정말 괜찮은") 친구 알렉이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남사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알렉은 우리 독자들이 빤히 눈치챌 수 있지만 남성 동성애자이며, 이런 그와 깊은 공감을 나눴다는 고백으로 미루건대 그녀 역시 적잖은 혼란을 겪었음도 감지할 수 있겠네요. 물론 그녀는 우리가 봐서 알듯 이성애자입니다.

켈러 설리반은 변호사 자격도 가졌었고 실력도 좋았지만 더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나서다 석사 학위를 세 개나 단기에 추가하는 등 뛰어난 지성을 갖춘 사람입니다. 한 번 결혼에 실패했고, 그래서인지 뎁에게도 조심스러운 태도였지만(뎁은 본래가 조심스럽고요), 결국 다시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고 뎁은 (아마도) 두번째의 임신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관광객 케이트- 리처드 아처 부부를 알게 되는데, 리처드 아처는 젊은 나이에 여러 사업에 손을 대어 큰 돈을 번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책 뒤표지에는 이런 대화가 인용되었는데요.

"남극 대륙에 온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아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과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는 사람이로요."
"이곳은 저한테 마지막 대륙이에요. 전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셈이네요. 당신은요?"

사실 이 대화는 p248에서 케이트와 뎁 두 여인이 주고받는 내용이 살짝 바뀐 것입니다. 해당 대목에서 케이트는 "남극은 나의 일곱 번째 대륙"이라고 합니다. 넉넉한 형편에 육대륙을 다 다녀 봤다는 자랑으로도 들리는데(그렇게 듣는다면 물론 오해입니다), 뎁은 "여긴 저의 세번째 대륙이지만 마지막 대륙"이라며 "마지막"이란 말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합니다.

(이하 약간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설령 더 이상 숨을 곳도, 갈 곳도 없는 이들이 우연이건 필연이건 택한 행로가 남극이었다 해도, 반드시 그곳에서 물리적 파국을 맞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객선 오스트랄리스는 정말로 백 년 전  저 북극해 근방의 타이타닉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는데요. 이 과정에서 아깝게도 켈러 설리반과 딕 아처가 목숨을 잃습니다. 약간은 위험 중독 증상이 있는 아처는 (맞는 진단인지는 의심스러우나) 뱃멀미 때문에 부착한 패치형 약 때문에 극한 상황에서 판단력까지 잃습니다. 여튼 두 남성 모두, 그들이 각각 사랑했던 여성들 "앞(물리적 거리는 다소 납니다만)"에서 평소보다 더 품위 있는 대처를 하려 애썼음은 분명합니다.

켈러나 뎁이나 남극의 생태에 워낙 애정이 깊다 보니 해당 분야의 지식과 현황에 아주 밝으며 특히 펭귄에 대해서는 그 지식의 깊이나 애정의 강도를 누가 따를 수 없습니다. 남극에서는 분해자의 활동조차 극한의 저온에서 억제되다 보니 죽은 생물의 사체를 포함 무엇도 썩지 않고 흉한 모습 그대로 방치되며, 그 와중에도 특수 박테리아나 전염균은 펭귄 등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어 전문 인력의 특별한 방역 조치가 항상 뒤따릅니다. 이 과정에서 승객들과 크고작은 마찰도 따르게 마련이고요. 무심한 행동 속에 환경을 오염시키거나 생태계에 작은 위험이라도 전파하는 관광객들에 대해 이들은 항상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직무상 의무라는 이유 말고도 그들에겐 "다른 대륙에서 받은 상처"를 이 마지막 대륙에 대한 애정으로 대신 치유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나 짐작되기도 합니다.

급작스러운 결말에서 뎁은 많은 상처를 입었으나 결국 살아남고, 켈러의 딸을 출산한 후 그 특별한 이름을 가진 고양이를 키우던 집 주인 닉과 결혼하게 됩니다. 여기서 독자들은 약간 놀라게 되는데, 아마도 바다를 보지 않으면 역으로 멀미가 나던 그녀의 증상도 5년이나 지난 지금 많이 나아지지 않았을지, 더불어 관계의 진전에 대한 부담과 공포도 사고로부터의 호된 그 경험을 통해 (역으로) 적잖은 치유가 되지 않았을지 기대도 해 보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마지막 대륙은 다시 첫 대륙으로 전환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법이니요.

"세상의 끝, 만물의 기원"이라는 소설 마지막 문장은, 저 앞 p25의 "fin del mundo, principio de todo"라는 스페인어 어구와 같은 뜻입니다. 이 구절을 모토로 삼는 우수아이아는 아르헨티나의 "땅끝마을"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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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수 없는 일이야 현대지성 클래식 16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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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수 없는 일이야." 허나 세계사의 모든 재앙은 선량한 시민들이 방심하는 새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1258년의 바그다드 대학살, 1527년의 Sack of Rome 같은 참사 역시 당대인들은 아무도 그 가능성을 점치지 않던 벼락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저때로부터 다시 수백 년 전 훈 족의 유럽 침공 역시 그들(서유럽인들)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재난이었겠는데요. 당시 성직자들은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며 당대인들의 참회를 유도했다고도 합니다. 넉넉히 세속화한 현대에 들어서는 성직자들의 저런 소명은 재능 뛰어난 문필가나 예술가들의 몫이 되었으며 그 유력한 "증거" 하나가 바로 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쓰여진 시기는 1935년입니다. 이때면 FDR이 당선되고 뉴딜 등을 의욕 가득히 밀어붙일 시점이죠. FDR은 나중에 4선에까지 성공합니다만 이때는 아직 다음 재선에 성공할지조차 마냥 낙관은 못 할 무렵이었습니다. 많은 사회학 서적에도 나오듯 공화당 지지층과 초상류 계급은 FDR 공포증에 떨며 사석에서 대화를 나눌 때 "그 사람"이라고만 지칭했다고도 하죠. 이때 공화당 진영에서 내세운 게 "독재는 곤란하다"였는데, 다수 국민의 일시적 지지를 바탕으로 법치와 원칙이 무시된 채 포퓰리즘 정책이 마구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민주당 진영에서는 상대당의 반격에 대해 "공포 신드롬"이 일지 않았을까요? 그들 입장에서는 FDR의 피치 못할 경기 부양 정책 드라이브에조차 신경증적으로 반응하며 좌절시키려 드는 공화당, 보수 측의 움직임에 마찬가지의 두려움을 충분히 느꼈을 겁니다.

정파들은 여론의 지지가 상대 진영에 쏠린다 싶으면 서로 "포퓰리즘"이라며 비난의 날을 세웁니다. 내 편이 우세하면 국민의 엄중한 뜻을 업은 것이며, 상대가 우세하면 대중 선동, 포퓰리즘이라며 저속한 여론몰이에 기댄 비겁함을 마구 비난합니다. 우리는 저 시기 역사의 승자가 FDR의 민주당이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승자 측(즉 민주당 지지자나 리버럴)의 공포감이나 신경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버트 랭커스터 주연의 <엘머 갠트리> 원작자라든가, 예전 세계문학 전집에 반드시 포함되던 <메인 스트리트>의 저자로 우리가 잘 아는 싱클레어 루이스가 이 재미난 풍자 문학의 author인데요. 과연 재기발랄한 그 답게 가상의 정치상황을 들어 미국 정치 시스템의 모순과 단점을 신랄하게 풍자합니다.

1935년이면 아직 나치가 유럽에서 그 위험성을 심각하게 드러내기 전입니다. 라인란트 재무장, 안슐루스(오스트리아 병합), 심지어 베를린 올림픽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잊고 있지만 히틀러 치하의 독일은 아직 빵 하나에 몇 억 마르크를 호가하던 무서운 인플레이션이 유발한 경제 난국에서 아직 회복이 안 되었을 시절입니다. 사실, 회복될 조짐이 끝까지 안 보이자 히틀러가 무리한 도발을 일으키기도 한 건데요. 경제적으로 비실거리는 독일이 그런 무리수를 둘 줄은 당시 (반대 진영의) 책임 있는 정치인들이 미처 몰랐다고 해야겠습니다. 싱클레어 루이스 같은 문인들이 마치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위험의 예조를 알고 이런 문학 작품을 창작해 낸 셈입니다.

전쟁이 발발한 후면 상대 진영의 주요 인사나 지도자에 대해 사정없는 폄하와 모욕이 가해지지만 이때만 해도 그 호칭이 조심스럽습니다. 이를테면 나치 독일 선전상 괴벨스에 대해 여전히 "박사"라는 경칭을 작품 중에서도 꼬박꼬박 달고 있으니 말입니다. 허나 싱클레어 루이스는 자국 내에 불고 있는 심상찮은 "우익 독재의 역풍" 조짐에 적잖이 노심초사했던 듯합니다. "만약 우리 미국에서도 애국주의, 보수주의를 내세워 히틀러 같은 극우 독재자가 부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때는 바야흐로 영화, 라디오 등 대중에 동시에 접근할 수 있는 매체가 발달해 갈 무렵인데, 이 작품 중에도 등장하는 윈드립 대통령(물론 가상 인물입니다)은 대중의 감성 격동에 필요한 모든 자질을 다 갖춘, 참으로 위험한 정치인입니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감정" 속으로 들어가 마음껏 파묻힐 수 있고, 그 감정을 적절한 제스처 속에 담아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수천만 독일 민중을 홀리고 사로잡은 비결이 아니었겠습니까?

(이 소설 속에서) 루스벨트는 재선에 실패하지만 여전히 여유 있고 인지한 미소를 머금으며 평정심을 잃지 않는데 이런 모습이야말로 당대 미국인들에게 다가온 그의 평균적 이미지였습니다. 의도적으로 작출된 이미지라기보단 그의 본모습에 가까웠다고 봐야 타당하겠는데요. 무솔리니나 히틀러, 혹은 지금의 트럼프 처럼 의도된, 연출된 분노를 가득 담은 표정과는 정말 대조되죠. 역사에 진짜 승자로 남은 지도자들은 이처럼 그 인간적 본모습을 들여다봐도 품격과 여유가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반동분자"라고 하면 보통 집권에 성공한 공산 정부가 반대파를 색출, 검거, 숙청할 때 씌워붙이는 오명입니다. 헌데 이 작품 중에서는 우습게도 윈드립 정부(당연히 우파)가 반대파를 지목하고 탄압할 때 즐겨 부르는 누명으로 자주 쓰입니다. 소련에서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하자 이에 대항수라도 놓듯 이탈리아에서 불과 몇 년 후에 극우파 독재가 시작되었는데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한 건 그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지나서였습니다. 전체주의 정권의 불건전한 속성이란 좌우를 막론하고 공통되는 점이 많다는 걸 그는 날카롭게 비꼬는 셈입니다.

출판, 인쇄의 자유도 탄압 받습니다. 도리머스 사장이 들고 온 비분강개한 내용 가득한 원고를 보고서 식자(공)실장 댄 윌거스는 강력히 항의합니다. "전 이녹 아든이 아니에요!(사장님에 대해 마냥 충성스러울 수 없다는 뜻을 서투른 은유로 표현한 말)" 미니트맨에게 끌려가서 총살 당하기 싫다는 건데, 여기서 미니트맨은 나치 독일의 SS와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정치적 반대자를 체포, 감금하는 concentration camp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재현됩니다. 사실 소수파에 대한 탄압과 마녀사냥은 미국 역사에서 그리 드물게 보던 바도 아니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니, 근거 없는 소립니다. 무엇인가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야, 현실의 기정 사실화, fait accompli, 혹은 옐리네크적 의미에서 "사실의 규범력" 같은 것은 모두를 지배하는 지상 권력으로 군림합니다.

사실 FDR이 대중의 지지를 확고히 얻던 무렵에 이런 소설이 나왔다는 건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좀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이란 유럽에서 이민 온 "실향민"들이 세운 근본 없고 위태로운 공동체였으며, 혹여 유럽 본토 전역이 나치와 파시스트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면 이의 영향을 북미에서 어떤 방식으로 받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판이었습니다. 1932년 소위 보너스 아미의 시위를 군대가 무차별 진압한 것도 어쩌면 파시즘 대두의 전조가 될 수 있는 사건이었는데(적어도 진보 성향의 지식인들은 충분히 그렇게 받아들일 만했죠), 더군다나 미국에는 본디 독일 출신의 이민자가 무시못할 상당수를 점하는 인구 분포가 뚜렷했죠.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을 보면 개전 후 독일계 미국 시민이 이웃들로부터 린치에 가까운 폭행을 당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소설은 딱히 특정 인종을 편들거나 적대시하는 게 아니라 "다수에 의한 횡포"가 빚는 불의, 공포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하는게 본 의도인 듯합니다.

이 소설은 1980년대에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던 미니시리즈 <V>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졌죠. 막상 이 소설을 읽은 분들은 대체 외계인 다이애나가 벗겨진 가면 아래 파충류의 퍼런 피부를 드러내며 쥐 한 마리를 맛있게 먹어치우던 그 드라마와 이 정치 풍자 소설이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할 수도 있습니다. <V>를 블루레이 디스크 등으로 다시 보시면, 서두에 다소 의아한 장면들이 펼쳐지는 걸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명백히 반 우익 풍자라는 걸 이제는 모두가 알 수 있죠. 원래 제작진은 소설의 내용에 충실하게 드라마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방송사에서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막았다고 하죠. 제작진은 아마도 당시 배우 출신 레이건 대통령이 너스레를 떨어가며 강경 우익 드라이브를 펼치는 모습이, 반 세기 전 싱클레어 루이스가 예언한 디스토피아와 꽤 닮아간다는 느낌을 받고 이 기획을 밀었을 겁니다. 이 걸작을 2018년에 한국에 번역해 준 출판사의 의도에 대해서도 살짝 흐뭇해지는 면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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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 묘보설림 2
루네이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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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에는 사랑하는 마음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더 큰 개념이라고 일각에서는 주장합니다만 역시 사람마다 생각이 다 갈릴 수 있는 부분이겠습니다^^ 헌데 이 소설은 어느 특정 종교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내용도 아니면서 제목이 저리 "자비"라고 붙었습니다. 작가의 깊은 뜻은 이 작품을 직접 읽으면서 독자 개개인이 깊이 새겨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한 제 생각은 이 서평 말미에 써 보기로 하고요.

주인공 천쉬성은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에서 그 삼촌에게 양육되어 간신히 공업고등학교를 마친, 세상에 의지할 데 없는 처량한 신세입니다. 그렇다고 소설 속 전형적 주인공들처럼 각별한 노력으로 현실의 장애를 헤쳐나가는 인물도 아니고, 이런 사람이 이런 악조건에서 어떻게 생존이 가능할까 싶기만 한, 지극히 평범한 가난뱅이 노동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인성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예컨대 루신의 <아Q정전>에서처럼 혼자만의 세계에서 자신을 특권층으로 세팅하거나, 세상 이치를 혼자 다 깨닫고 오히려 주변을 측은히 여기거나 경멸하는 (자신만 빼고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코미디를 연출한다거나, 뭐 이런 쪽으로 풍자의 매개 기능을 맡을 수도 있겠죠. 허나 천쉬성은 심지어 그런 쪽으로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와 그의 주변 사람들이 겪는 비극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와 체제에 대한 비판, 풍자 쪽으로 자연히 독자의 눈길을 돌립니다. 무언가는 잘못되었기에 현실에서 이런 부조리가 빚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설은 청년 천쉬성의 매우 미숙한 대응이 빚은 자잘한 사고, 천쉬성 주변에서 더 미숙하고 한심하기까지 한 태도로 자신의 처지를 지옥에 빠뜨린 다른 인물들(멍건성 등)의 웃지 못할 사연, 그 와중에서도 자신을 사랑하고 보살펴 주는 여인(위성)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과정. 아이가 일찍 안 생기자 친척에게서 언청이 갓난아이 하나를 입양하는 곡절 등을 온정 어린 시선으로 다룹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비분강개한 어조로 독자에게 각성을 요구하거나, 반대로 졸라 풍의 자연주의 프레임에 사건을 고정시키고 담담한 관찰을 일단 청할 수도 있을 겁니다, 작가 입장에서는요. 제가 보기엔 둘 중 어느 편도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을 이런 악조건에 가둬 놓고, 도덕적으로 타락시킬 수까지 있단 말인가!" 예를 들면 한국의 1970년대가 낳은 걸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든가,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등이 이런 태도에 가깝겠죠. 김동인의 <감자>는 일단 냉정한 내러티브를 유지하긴 해도 결국 급작스럽고 충격적인 결말에 이르러선 독자들에 주는 정서적 효과 면에서 저 작품들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대지>는 어떨까요? 전 소장 작가 루네이(路內. 로내)의 이 장편이 (길이는 훨씬 짧아도) 저 펄 벅 여사의 대작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딱히 잘난 사람, 악한 사람, 선한 사람도 없고, 환경과 출생이 부여한 우연 요소에 의해 운명의 격랑이 좌우되는 모습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주인공 천쉬성은 노년에 이르러서조차 그 불리한 출발점에서 크게 나아진 모습도 아닙니다만, 용케도 그 질곡의 시대를 그 나름 요령으로 버티고 살아남은 사람답게 "다소의 진보"를 손에 거머쥔 사람처럼 인상이 남는군요.

천쉬성은 지극히 평범한 가난뱅이 노동자였지만, 우리 독자들이 잘 살펴 보면 원가 근성이랄까 깡다구 같은 게 있는 편이었습니다. 그가 공장에서 여론을 몰아나가니(타고난 선동가 같은 축에도 못 끼는데) 위에서 함부로 못 대하게 되는 품을 봐도 그런데, 잘난 것 하나 없어도 남자는 누구를 배필로 맞느냐에 따라 밖에서 기가 살고 안으로 자기 적성, 운명을 찾아 나가는 힘이 길러질 수 있다고 봅니다. 아내 위성이 그에게 베풀어 준 도움은 그래서 작다고 못할 정도고요. 다음으로는 (참 비유가 기묘한데) "텔레비전에 나오는 국민당 여자 스파이"처럼 보이는 바이쿵췌(백공작)이 왕더파의 희롱에 정면으로 반발하여 얼굴에 큰 상처를 낸 사건도 그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스파이는커녕 이 공장(최악의 일자리입니다)에서 가장 험한 일에 배정된 것만 봐도 그녀의 처지가 짐작되고도 남지만 말입니다.

천쉬성이 처음으로 잡은 일자리인 페놀 공장 직공의 처지가 어떠한지는 두 에피소드로 잘 요약됩니다.

"장화를 신지 마. 장화가 문드러지거든."
"하지만 발이 문드러지는 것보단 낫잖아?"
"둘 다 싫어."

사회주의 국가지만 국민과 노동자의 생활을 전적으로 국가가 책임지는 게 아니며, 노동자 개개인의 과실을 들어 장비나 의복은 얼마 안 되는 급여에서 본인 부담으로 해결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뿐 아니라 직장에서 과실을 저질렀을 때에도 (그저 목숨만 연명하도록) 급여에서 천천히 벌과금을 삭감하는 식인데, 명색이 사회주의 국가라면서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방법치곤 참 졸렬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페놀에는 물론 독성이 있지. 헌데 공장에 다니다 보면 면역이 생겨 그럭저럭 버티게 돼. 그러다 공장을 그만두면 그때부터 암이 생기는 거야."

참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집니다. 사람이 이런 억지스러운 자기 기만을 의식 속에 불어넣어야 현실을 버틸 수 있다면, 그걸 과연 사는 중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을지. 하긴 후진 사회주의 국가의 극한 상황이 아니라도 매 순간을 (아무도 안 속는) 거짓과 망상 속에서 보내는 광인도 있지만 말입니다.

소설 속에는 관제 데모도 몇 번 등장하는데 시위나 집회가 시민 개개인의 자연스러운 분노 결집이 아니라 이처럼 윗선에서 조장하는 흐름에 따라 "출세와 충성심 과시"를 위해 이뤄진다는 게 참 이상했습니다.
예를 들면 "4인방 타도" 같은 게 그것인데, 물론 4인방이야 1970년대 중국을 이런 거대한 거지 사육장으로 만든 일등 원흉이긴 해도, 그의 타도를 위한 집단 움직임까지 상부의 조종에 기댄다는 게 참 답이 없는 미개한 모습으로 보였네요.

밑바닥에서도 생존을 위한 간특한 꾀와 사술이 난무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이를테면 가난, 무능, 질병, "비혼(!)" 등의 별의별 희한한 사유를 들어 당국에서 보조금을 타먹는 행태인데, 쉬성이 처음에 동료들의 신망(...)을 얻은 게 이런 잔재주를 통해서였습니다. 사이비 지상 낙원을 공언하고 다닌 사회주의가 인민을 기만하고 착취했다면, 밑바닥 노동자들은 이런 식으로 상층부와 체제를 농락하는 거죠. 모두가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저열한 콘 게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설령 불리한 환경에 처했다 해도 이를 자신의 힘으로 딛고 일어나야 스스로와 타인에게 떳떳한 의식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수중에 돈이 많아도 패자로 남을 수 있고, 돈도 없고 의식도 썩은 철저한 루저도 얼마든지 보는 세태입니다. 가공 인물 천쉬성은 희한한 방식으로 못난 시대, 사회로부터 살아남아 이런 기이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지만, 보는 우리들은 마치 이 지상의 사연이 아닌 듯 꼬이고 비틀린 개인과 시스템의 좌충우돌을 보며 감동, 격분, 죄의식, 안도감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차분한 관조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람의 가치관과 성향과 운명은 대체 어느 선까지 환경과 "체제(소수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예외적 구조)"의 영향을 받는 건지, 오늘 내가 누리는 편의와 행복은 어디까지 나 개인의 능력과 정당한 대가에 기댄 건지, 생각해 보면 그리 간단한 답이 안 나오는 문제임에 나의 사유가 이르러 다시 생에 대해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역시 인위적인 시스템의 가동만으로는 각종 병폐가 해소될 수 없다. 융통성과 연대 의식만이 정답이다." 가혹한 법치를 앞세운 진(秦)이 멸망하고 한(漢)이 창업된 후 그 지도층이 새삼 깨달은 진리였습니다. "생산 시설보다는 사람이 먼저다!" 이 당연한 사항이 유물론적 세계관 속에서는 많은 이들에게, 특히 정당 수뇌부에게 금세 안 떠올랐나 봅니다. 사람, 인간애가 거세된 앙상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란, 무자비하게 노동을 착취한다던 자본주의보다 현실의 국면에서 더 나은 성과를 못 거둘 뿐 아니라, 부가가치 창출도 인간애의 달성도 모두 실패했을 뿐입니다. "자비"란 그래서, 다소 엉뚱하지만 통렬한 방식으로 "실패한 체제"의 은폐된 좌절을 따스이 응시하는(동시에 개선을 촉구하는) 대안에의 몸부림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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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올림픽 백과 - 궁금해요! 동계 올림픽의 모든 것
정인수 지음 / 기린미디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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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만국기 도안을 보여 굉장히 흥미로워합니다. 지구상에 그토록 많은 나라가 대륙 혹은 섬 각 지점에 오밀조밀 배치된 것도 신기한데, 온갖 도형과 색채를 조합하여 "우리 나라는 이런 모양새로 상징될 수 있어!"라고 뽐내듯 나열된 그 조형의 성찬이라니. 헌데 이런 국기를 앞세우며 그 나라를 대표할 만한 빼어난 신체 능력을 지니고 또 발휘하는, 한창 나이의 청년들이 서로 기량을 겨루는 "운동회(실제로 중국에서는 이 번역어를 씁니다)"라니 얼마나 더 가슴이 설렐까요. 어른이 되고서는 그저 심드렁할 수 있지만(특히 그 이면에 숨은 타락한 정치 행태가 보도되거나 하면), 아이들 때는 이런 국제 행사, 매년도 아닌 4년마다 귀하게 열리는 대회가, 특히 설레는 마음으로 주시하게 되는 구경거리입니다.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구경거리의 참맛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규칙과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후라야 합니다. 대충 보고 알 만하다 싶어도 더 철저히 따지고 들어가면 그간 놓쳤던 숨은 묘미를 더 속속들이 음미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고가의 장비와 수트를 마련하여 겨울 스포츠를 따로 즐기는 분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많은 이들은 아직도 무슨 종목이 있는지, 어디에 포인트를 두고 즐겨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남의 집 경사 대하듯 데면데면해할 뿐입니다. 올림픽의 국내 개최가 몇 주 남지도 않았는데(이 기회를 놓치면 생전 다시 맞이나 할 수 있을지 싶은) 아직도 열기가 뜸한 건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불경기나 정치적 의기소침 같은 이유가 아니라, 동계 스포츠 자체에 대해 낯선 느낌이 먼저 들어서이죠.

하계 올림픽에 대해선 그 개최지나 연도까지 정확히 외우는 분들도 많습니다. 의식적으로 뭘 외운다기보다는 다큐나 홍보를 통해 워낙 많은 정보가 유통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머리에 남아서이죠. 그러나 동계 올림픽이라면 비교적 근래에 개최된 대회들이나 장소(국가, 도시)도 꽤 낯섭니다. 하지만 정보가 질서 있고 알기 쉽게 잘 정돈된 책을 집중해서 읽고 나면, 왠지 나도 동계 올림픽 박사님이나 되어 있을 듯한 뿌듯함이 느껴집니다. "아이들 책인데..." 하시는 분은, 성인인 저도 이 책 무척 집중해서 읽었고, "아 그랬었지." "그게 그런 거였나?" 해 가며 무척 몰입되는 독서였다는 점 자랑스럽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책이라면 아이들 책이 (어른에게조차) 훨씬 유익하다는 점 새삼 강조하게도 되고요.

하계 올림픽이나 FIFA 월드컵도 그렇지만 남한보다는 북한 선수(단)이 먼저 두각을 나타내고 성과도 올렸습니다. p47에 보면 무려 1964년 인스부르크 대회에서 스피드스케이팅 3000m 여성 종목에서 북한의 한필화가 은메달을 따 내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빙속이나 육상의 트랙 종목이나 동양인이 메달권에 입상하기가 무척 어려운데 극동의 이름도 없는 나라 출신이 당당히 시상대에 올랐으니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사실 자체보다 한 선수의 오빠 되는 한필성씨 관련 상봉 사연이 더 널리 화제가 되었지요. 이 대회가 북한으로서는 최초 참가였는데 이 대회를 통틀어 "아시아인 유일 메달 획득"이라고 합니다.

"중립국"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1948년 대회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처음으로 열린 행사이기도 합니다. 보통 OX 퀴즈에서 우리나라가 최초로 참여한 올림픽이 런던 대회 아니냐고 묻는데, 이 행사가 몇 개월 전에 열렸기 때문에 틀린 겁니다. 1948. 1이면 아직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이었으나 "KOREA"라는 이름으로 IOC에 가입했던 상태였고, 위에 쓴 대로 북한은 1964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쿼밸리 올림픽에 대해서, 저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걸 몰랐던 게 아니라 아예 이름 자체를 처음 들었습니다. 이 "스쿼밸리"는 책에 잘 나와 있는 대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 소재 스키 리조트의 이름입니다. 관례대로 도시 이름을 딴 게 아니라 상업 시설의 간판을 전면에 내건 유일한 경우이죠. 놀라운 건 동계 올림픽을 대표하는 종목 중 하나인 봅슬레이는, 경기장이 아예 건설되지 않아 열리지 못했는데, 책에는 "참가국이 9개밖에 되지 않은" 이유도 들고 있습니다만 월트 디즈니 같은 장삿속을 앞세운 "회사"가 사실상 주도했던 것도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이런 걸 보면 지금이야 번듯한 구색이고 화려한 외관이라 해도, 그 출발과 성장은 참 어색한 면이 많았던 초보스러운 행사였던 게 동계 올림픽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프랑스는 지형의 영향으로 기후대가 다양한 편이라 동계 올림픽도 세 번이나 열었는데 이건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개최 횟수입니다. 1968년인데 비공식이긴 하나 처음으로 대회 마스코트가 등장했으며, "광고가 새겨진 옷은 입지 맙시다!" 같은 합의가 이뤄지기도 했답니다. 올림픽은 물론 온갖 스포츠 경기 중에 선수인지 샌드위치맨인지 모를 만큼 브랜드가 주렁주렁 빈틈없이 부착된 유니폼이 난무하는 요즘에 참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신선한 외침입니다.

프랑스는 1968년에 이어 1992년에도 동계 올림픽을 개최했는데 우리들도 이름이 익은 알베르빌에서였습니다. 이 대회는 놀랍게도 남성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에서 김윤만이 처음으로 은메달을 따 전 국민들을 놀라게 했는데 어째 나라의 국세가 뻗어나가는 모습을 상징이라도 하듯 전 개인적으로 이 무렵이 한국이 가장 살 만한 시기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성 종목은 지금도 이상화 선수가 정상권에 머물러 있지만 근육량과 체격의 차이가 현저한 남성 종목에서는 동아시아인이 메달 따기가 정말 힘든데, 김윤만의 성과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합니다. 그 외에, "쇼트트랙"이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승격되고, 이미 이 분야에서 한국이 절대 강자라는 정평이 나 있었기에 관계자들은 성적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걱정을 접었더랬죠. 우리 국민들도 미디어를 통해 이 점을 잘 알고 기대치를 한껏 높여 놓은 상태였었고 말입니다.

쇼트트랙이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을 때 고 사마란치 당시 IOC 위원장 같은 이는 "스포츠맨 정신에 어긋난다" 같은 지적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확고한 자기 자리를 굳힌 종목이라 한때 저런 말을 들었다는 게 실감이 안 될 정도이고, 이후에 성장기를 보낸 한국인들이라면 우리 나라가 동계 올림픽에서 당연히 10위권에는 들어 주는 강국으로 이미지를 형성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988년 캘거리 올림픽에서만 해도 우리 나라는 모두 28명의 선수가 출전하여, 단 하나의 메달도 못 따내는, 그야말로 참가에 의의를 두는 정도였습니다.

책에는 이 대회를 두고 "냉전 시대 마지막으로 열린 올림픽"이라 합니다만, 이때만 해도 냉전이 그처럼 갑작스럽게 끝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대회 최고의 스타 중 하나는 "동독 국적"의 여성 피겨 스케이터 카타리나 비트였는데, 우리에게는 "김연아를 아낌없이 격려해준 레전드"로나 기억될지 모르지만 당시 저는 이분을 보며 대체 사람이기나 한 건지, 하늘에서 강림한 엘프나 아니었는지 그저 황홀할 뿐이었습니다. 인터넷에 찾아 보면 대회 끝나고 열리는 갈라쇼에서 이분이 마이클 잭슨의 <배드>에 맞춰 연기하는 동영상이 있는데, 전 그것보다 <빌리진>를 배경음악으로 삼아 문워크를 시연하던 그녀의 동작이 잊혀지질 않네요.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2010년 밴쿠버 대회도 캐나다에서 열렸는데 이때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김연아가 피겨퀸으로 전세계인들 앞에 위상을 확고히한 기념비적인 행사였죠. 김연아는 주니어 시절부터 이미 세계 최강자였으나 성인이 된 후에도 그 기량을 유지할지, 올림픽처럼 시청률과 집중도가 높은 장(場)에서도 과연 침착하게 본연의 실력을 발휘할지 그 부담감을 어떻게 이겨 내느냐가 관전 포인트였는데, 사실 그녀는 기량도 기량이지만 멘탈이 차라리 더 쎈(!) 편입니다. 아니 기술적 완성도도 사실 역대 최강이었지만(제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카타리나 비트에게 꽂혀 있어도, 전성기 기술만 놓고 대조했을 때 김연아가 몇 수 위처럼 보이더군요), 냉정하고 침착한 심리를 유지하는 바로 그 능력이야말로 진정 존경스럽기까지 한 자질입니다.

스키는 선수 키의 146% 이내의 길이여야 하는데(p204), 책 저 앞으로 돌아가 보면 p56에 왜 이런 규정이 도입되었는지 그 내력이 나와 있습니다. 1972년 대회는 일본의 삿포로에서 열렸는데(우표 수집하는 분들은 잘 알 겁니다. 국내에 유독 이 기념우표가 많이 찍혔지요), 일본 선수들이 요령껏 길이를 늘려 체공시간을 연장하는 바람에 금은동을 싹쓸이하는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삿포로는 이 대회를 계기로 국제적인 동계 스포츠 리조트로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되었는데, 부디 이번 평창 대회도 그런 성공적인 사례로 역사에 남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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