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 파워 - 새로운 시대의 권력,
천훙안 지음, 신노을 옮김 / 미래의창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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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거대 권력이 이상하게도 제 힘을 못 쓰고, 그 대신 국지적인 기반의 소소한 세력들이 알게모르게 실속을 챙기는 요즘입니다. 미국 같은 초강대국도 자그마한 집단의 도발에 뾰족한 수를 못 찾고 갈팡질팡인가 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런 데가 있는 줄도 잘 모를 영세한 기업이나 정치 결사가 큰 수익을 올리거나 역사의 향방을 바꿔 놓기도 합니다. "Size does matter."라는 말이 한때 불변의 진리로 통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빙하기를 맞은 거대 공룡처럼 제 한 몸을 감당치 못해 민망한 방황을 일삼습니다. 세상이 운용되는 근본 원리가 바뀌어 간다는 뜻입니다.

엊그제 마무리된 이탈리아 총선에서는 우도 좌도 아니면서 좌절한 근로 대중의 입장을 대변하고, 무엇보다 직접 민주주의를 표방한다는 어느 정파가 단일 정당으로는 최대 의석을 휩쓰는 이변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현상을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 저자는 "각자의 위치에서 미미하게 제 목소리를 낼 뿐이었으나, 어느새 그 작은 파장이 모이고 모여 대세를 흔들어 놓기까지 하는" 우리 주변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힘에 주목하라고 합니다.

독일의 "물리학자" 하켄은 현대 사회에서 조직의 속성이 근본적으로 변용을 겪고 있다고 날카로운 지적을 합니다. 조직에는 타조직과 자기 조직이 있는데, 타조직의 구성원은 그저 피동적으로 움직일 뿐이며, 조직의 이해와 자신 개인의 목적을 조화롭게 매칭시키지 못합니다. 반면 자기 조직은, 조직의 일이 곧 내 일이니 창의력과 의욕이 매 순간 당사자의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게 또 당연합니다. 예전 공산주의 국가에서 텃밭과 협동농장의 소출이 얼마나 큰 차이를 보였는지를 지켜 보면 이 점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월급쟁이들의 고달픈 신세를 wage slave라고 자조하는 말이 있는데, 체제는 자본주의라도 정작 직장에 소속하여 일하는 절대 다수의 사무직종 종사자들이 주인 의식을 못 느낀다는 건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장 구글 같은 곳에서, 누가 회사를 좌지우지하는 "오너"이며 누가 부림 당하는 "아랫사람"인지 한번 살펴 보십시오. 이곳이야말로 자기 조직의 이상에 수렴해 가며 구성원들에게 현대적 혁신의 의지를 이끌어내는 집단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회사 와서 일은 안 하고 백날천날 딴생각만 하는 분자에게는 타조직이건 자기 조직이건 책상이 마련될 리 없습니다.

저자는 성공적인 마이크로 파워가 발휘되는, 자기 조직의 모범적 사례로 조조의 인재 운용 pool을 듭니다. 원소의 장막에서 천하의 인재들은 소모적인 대립만 거듭하거나, 윗선에서 과감히 부여되지 않는 권한의 한계로 인해 포스트에 헌신하지 않고 내내 겉돌았습니다. 반면 조조는 아랫사람에게 한번 업무를 관장시키면 전권을 주다시피했으니 참모들이 신이 안 날 수 없습니다. 이게 바로 타조직과 자기 조직의 극명한 차이입니다.

저자는 이를 통해, "변혁적 리더십과 거래적 리더십을 상황에 따라 선택하여 융통성 있게 적용한다"는 말로 정리합니다(p55). 한국사에서는 이방원이 일으킨 무인정사(제1차 왕자의 난)과 유사한, 당 태종을 권좌에 올려 놓은 거사였던 "현무문의 변"에서, 이세민의 책사 방현령의 공로는 실로 컸습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어느 조직에서건 "내집단"이란 게 따로 있어, 리더가 이런 코어 섹터를 따로 둔 후 적절히 운용하여야 목표가 효율적으로 달성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에 부작용도 있을 수 있으나, 조직에 활기가 떨어지고 타성과 관행에 젖어 움직인다면 형식적 프로토콜이나 어설픈 명분론은 차라리 해로울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의 "내집단 옹호론"은 타당합니다.

이 책은 픽션과 역사 속에서 다양한 사례를 끄집어 내어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어떤 무리든 간에 오합지졸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한 몸처럼 호흡을 맞춰 고도의 성과를 내며 전진할 것이냐의 갈림길은, 리더가 그 집단을 그저 집단에 머무르게 하느냐 아니면 진정한 유기체와도 같은 "팀"으로 재조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말을 하며 그는 <서유기>의 삼장법사 예를 듭니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각각의 이유에서 반사회분자, 조직에 융화될 수 없는 이들이었고, 삼장법사는 이들을 통제할 초능력 따위를 갖춘 인물이 아니었으나, 분명한 목표의식과 불굴의 의지를 지녔기에, 세 "제자"는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 점은 문예로서의 텍스트를 이해할 때에도 무척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p83에, 그저 집단이기만 한 무리와, "진정한 팀"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세계 굴지의 기업을 세워 천문학적 수익을 올리는 경영자 저커버그의 저력과 재능, 비결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죠. 개인적으로 저는 그저 셰어홀더의 자리로 물러나 젊은 인생의 갖은 기쁨을 누리는 데 몰두하지 않고 구태여 CEO의 현업을 지키는 그의 태도가 참 돋보인다는 생각인데요(실제로 닷컴열풍이 불었던 18년 전에는 이처럼 한번 대박을 친 후 카리브해에서 유유자적하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저커버그의 다음과 같은 언명에 주의를 돌립니다.

"경영자인 저는 첫째 분명한 목표를 설정합니다. 둘째로 우리 회사가 하나의 팀으로서 온전히 돌아가게 보살핍니다."

신기하게도 이런 그의 언급은 저자가 이 책을 쓴 취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이어지는 경영자의 소명은 다시 세 가지가 제시됩니다.

1) 수평적 경영을 지원한다: 상명하달식 시스템은 반드시 한계를 드러내게 되어 있고, 타조직의 타성으로 떨어지는 지름길입니다. 저자는 그러나 단서 하나를 다는데, 질서가 문란해질 만큼 수평 방식을 일관해서는 또 곤란하다는 겁니다. 하긴 이렇게 방만하고 놀자판 회사가 되어 버리면 적당주의 요령주의 무능자만 살 판이 나겠지요.

2) 혁신의 문화와 즐거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역시 십여 년 전부터 모든 경영서가 일관되이 독자에게 경각시켜 온 사항입니다. 일은 놀이와 일체가 되는 수준까지 가야 하며, 차원 높고 성과의 질을 바꿀 수 있는 혁신은 즐거운 마인드로부터라야 창출될 수 있다는 게 이제는 상식으로 통합니다. 물론, 놀이를 통해 일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진지한 사원이라야 이런 인센티브가 통하겠으며, 태생부터 분위기를 흐리고 부정적 기조를 확산시키려 드는 자에게는 애초부터 설 땅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리를 깔아주고 놀아 보라고 하면 제대로 놀지도 못합니다.

3) 기업의 문화와 잘 맞는 직원을 채용한다 : 당연한 말 같아도 이게 막상 조직에 적용해 보면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닙니다. 페이스북의 경우 신규 채용시 전 직원이 거의 모두 심사에 참여하다시피하는데, 이건 첫째 이 기업에서 수평적 업무 문화가 일찌감치 조직 전체에 스며 있어야 가능하며, 둘째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의식을 갖고 조직의 모든 활동에 익숙해 있어야 합니다. 페이스북의 경우 거대 규모의 종업원을 고용하여 이윤을 창출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슬림화만을 추구하는 것도 조직의 건강성을 해칩니다. 이게 성문화, 화석화한 매뉴얼에 의해 움직인다면, 매 순간 조직에 엄습해 오는 난제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습니다. 융통성과 기민함이야말로 마이크로 조직의 혁신과 생존 비결입니다.

책은 후반부에서 주로 젊은 독자층을 겨냥하여, 우선 첫번째 직장을 어디로 골라 몸닫을지를 고민하라고 조언합니다. 경력의 시초점은 결국 그 사람 인생의 전체 경로를 규정하다시피하죠. 목표의식이 분명치 않고 너절한 도피자의 이론이나 페티시처럼 숭배하는 인간은 어느 조직에서건 반드시 도태되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록펠러가 사회 첫 걸음을 뗄 때 몸담았던 공장 관리자의 역할에 특히 초점을 둡니다. 몇 방울이면 충분할 용접을, 수십 방울을 흘려 가며 원가가 낭비되는 현장을 보고, 그는 즉시 시정을 모색합니다. 이런 노력이 어디 용접 공정에만 한정되었겠습니까? 타성에 젖지 않고 모순과 낭비 요소를 귀신 같이 발견하는 그의 눈은, 몸담는 직장마다 연간 수억 달러를 절감하면서도 고도의 성과를 내는 원천이었습니다.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체적으로 업무에 임하며 생생한목표를 발견하고 성취하는 조직이야말로 마이크로파워의 참된 진원입니다. 40년 전쯤에 일본의 칸반시스템, 저스트 인 타임 방식 등의 고안은 세계 경영계에 충격을 주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이 역시 마이크로파워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이런 조직에서는 점차 중간관리자의 할 일이 없어지는데, 한국사회 원하청 구조에서 중간책들이 저지르는 수없이 많은 "갑질" 물의를 보면 아직 우리가 갈 길이 참으로 멀다고 하겠습니다. 중간관리자뿐 아니라, 오너도 없고 부하직원도 없는, 모두가 대등한 자격에서 신 나게 일하고 이윤을 나눠 갖는 조직이야말로 미래형 직장의 수렴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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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가이 - 일본인들의 이기는 삶의 철학
켄 모기 지음, 허지은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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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 제목 "이키가이"에서 일단 "이키(いき)"란, 문자 그대로는 (들고나는)숨, 호흡, 활동이 왕성한 기간, 목숨을 뜻합니다. 意氣라고 새긴다면, 우리말에서 쓰는 용법과 같습니다. 그러나 역시 책에서 설명하는 내용(p15)이 가장 중요하겠으므로 그에 더 주목하자면, 이때의 용법은 生き, 活き, 즉 우리말로는 "생기"란 뜻이 됩니다. 한편 "가이"는 効, 甲斐 등으로도 쓰는데, 우리말의 "보람"과 통합니다.

책의 같은 페이지에서 저자는 이 "이키가이"라는 말을, 일본인들이 매우 자주 쓴다고 전합니다. 커다란 성취를 올렸을 때는 물론이고, 소소한 쾌거를 맛봤을 때도 그리 주저하지 않고 이 표현을 적용한다는군요.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비록 원하는 대로의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그에 대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고 후회가 남지 않는다면 당사자들은 얼마든지 자랑스러워하면서 즐겨 이 말을 쓴다는 점입니다.

예전에 저는 일본인들의 품성을 평가한 어느 고문헌에서, "일본인들은 악착 같이 굴기는 하나 간사하지는 않은데, 쓰시마인들은.... (이하 생략)"이라는 대목을 읽은 적 있습니다. 일본인들의 민족성에 대해 그 평가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어도, "악착같음"에 대해서는 거의 의견이 일치한다는 뜻도 됩니다. 사실 일본은 길게 늘어지기만 한 국토 넓이에 비해 경작지가 태부족하고, 인구는 많으나 물산이 적고, 천재지변이 잦아 사람이 살기 그리 적합한 땅이 못 됩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은연중 정신 속에 스며든 게 바로 "이키가이" 정신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책을 다 읽고 나서 들었습니다.

얼마 전 신기술을 발명하고도 그 이익이 고스란히 소속 법인에 다 귀속되다시피하여, 이에 반발한 엔지니어들이 소송을 낸 사건이 일본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한국 같은 경우 엔지니어들에 대한 대우는... 글쎄요... 일본에 비해서는 낫다고 봐야 하는지, 그래도 대기업에 다닌다는 평판과 명예가 금전적 부분을 어느 정도는 만회하는지 아리송합니다만, 일본인들이 느끼는 상실감에 비해선 적은 편이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저자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영광스럽게도) 직접 인터뷰한 기억을 떠올리며, 이 거장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독자에게 전합니다.

"보상은 돈도 돈이고 팬들로부터의 찬사도 찬사이지만,  창작 작업에 몰두하는 그 자체로부터 얻습니다."

이 말은, 미야자키 감독 같은 거장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산업에 종사하는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손에 쥐는 대단히 미미한 보수가 문제는 문제 아닌가 하는 전제에서, 해당 거장이 스스로 토로한 내용입니다. 그러니 그 역시 구조의 모순에 대해서는 의식을 한다는 뜻도 되죠.

제 생각에, 이른바 열정페이다 뭐다 해서, 쥐꼬리만한 대가를 받고 그저 체념적으로 만족하라, 사회가 다 그런거지 뭐, 이런 결론은 아니라고 봅니다(혹시 그렇게 곡해된다면 주의가 필요하죠). 당연하게도, 나의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누군가가 가로챈다면 싸워서 도로 뺏어야 합니다. 이는 당연한 의기의 발동일 뿐 아니라,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 정의를 위해서라도 발휘해야 할 의무입니다. 헌데 그런 경우 말고, 아무리 애를 쓰고 그 결과가 좋았다 해도, 그 당사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대가가 귀속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꼭 최적화된 구조는 아니라서, 결과가 나쁘게 떨어지는 수가 오히려 더 많습니다.

이 경우, 책임 소재를 추궁할 수 있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허나, 어디 대고 하소연도 못할 억울한 상황이 알고 보면 더 많죠. 이 때 분노를 간수하지 못하고 아무데나 화풀이를 해야 할까요? 자포자기 심정으로 일을 방치하다시피 팽개쳐야 할까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래 봐야 자기 손해이며, 나아가 자신을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님, 은인, 지인,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도와 준 이들에 대해 엉뚱하게 분을 풀어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책임을 물을 장본인을 못 찾았다면, 그의 정체가 드러날 때까지 은인자중해가면서 응징의 저력을 길러나가는 게 차라리 현명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이랄까 비결은 바로 "이키가이"입니다.

"이키가이"라고 꼭 일본어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사람이 매사에 생기에 가득하고 넘치는 의욕을 발휘할 곳 어디 없나 눈이 반짝반짝한 사람은 어디 가도 환영을 받습니다. 저 사람하고 일하면 앞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고, 설령 이 조직에서 아직 필요한 기능을 습득 못 했어도 금방 배워서 다 따라잡을 것만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누구로부터도 쌍수를 든 인기를 끄는 게 보통입니다.

앞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예가 잠시 나왔습니다만, 저자는 이런 평가와 해석을 하는군요. 잠시 인용하자면 "작가가 행복에 가득 차서 그려내고 창작해 낸 작품은, 그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그 행복의 기운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아이들은 행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바로 구별해 낸다.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이 그처럼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건, 주된 향유층인 아이들이 그의 작품에서 풍겨나오는 행복을 바로 캐치해 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맞는 말입니까? 아닌게아니라 자신의 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룬 거장은, 표정도 행복하고 자세와 태도에 긍정적인 기운이 넘칩니다. 이런 분들은 자신만 행복한 게 아니라, 전혀 무관한 남들에게까지 그 밝고 맑은 기운을 전파합니다. 얼마나 고마운 분들입니까. 사화의 빛과 소금이란 이런 분들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죠.

저자는 이런 생기를 가리켜 지속가능성과도 연결된다고 합니다. 물론 행복한 사람이건 그렇지 못한 이건 길어야 사람의 수명은 백 년을 넘기 힘듭니다. 그러나 행복한 사람이 남긴 자취는 마치 그윽한 향수의 발산처럼, 당사자가 가고 난 후에도 오래 그 자리를 지키며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지속 가능성의 미덕입니다. 당장 건강에 한정시켜 봐도, 행복한 사람은 얼굴과 태도에 확신과 정열이 스며 있습니다.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이고, 그 사람이 하는 일은 손대는 것마다 성과가 좋습니다. 반면 마음에 부정과 어둠이 가득 깃든 이들은 남의 일까지 망칩니다.

한국의 SK가 과거 "선경그룹"이었던 시절, 그 회사의 3대 사훈 중 하나가 "꼼꼼하게 일처리 마무리하기"였습니다. 허술하게 대충대충 마무리하는 자세로는 남도 망치고 나도 망칩니다. 저자는 책에서 왜 근래 일본이 갑자기 관광대국으로 부상했는지를 두고 이런 분석을 합니다. "일본에는 코다와리 정신이라는 게 있는데,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심혈을 기울이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마음자세를 가리킨다." 아주 적합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이 단어의 정확한 뜻이 뭔지는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려운데, 일본인들끼리는 이심전심으로 통한다는군요.

이키가이의 핵심은 작은 일부터 정성껏 시작하여, 내가 원하던 대로 세심하게 마무리지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정신 자세입니다. 사실 이는 우리 선조들도 얼마든지 자각하고 일상의 실천에 옮겼던 성(誠)과 경(敬)의 마음, 또 단사표음으로 상징되는 청빈의 이념과 통합니다. 결과가 안 좋으면 또 어떻습니까? 최선을 다한 나 자신의 모습이 떳떳하고 뿌듯하면, 이미 나는 그것으로 충분한 승자가 된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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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은 어떻게 우리를 배신하는가 - 국회의원 박용진의 경제민주화를 위한 끝나지 않은 분투
박용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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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패기넘치는 의정활동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박용진 의원의 책입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과연 재벌은 대한민국 거시경제의 중추, 혹은 "화수분"으로서 국민이 믿고 의지할 바가 되느냐 하는 민감한 문제를, 그의 소신에 따라 과감히 분석하는 내용입니다. 이른바 "트리클 다운 효과"라는 게 있어서, 대기업이 활발히 본연의 활동으로부터 수익을 거두면 그 혜택이 "아래"에까지도 널리 미친다는 믿음, 혹은 입장이 있고, 이에 반대하며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잔치에 그칠 뿐이라는 강력한 회의론이 있습니다. 이 둘 사이의 논쟁은 특히 십여 년 전부터 우리 사회 곳곳에서 주목을 끌며 불 붙은 바 있는데, 아직까지도 명쾌한 결론이 난 바는 없습니다. 결론이 나기보다, 사회 전체가 진이 빠진 상태라고 할까요. 여튼 저자는 이 신저에서 주로 이 문제를 논급하고 있습니다.

박 의원은 책 중에서 김종인 전 의원의 말을 인용합니다. 김종인 전 의원에 대해서는 재작년~작년 연간에 여러 사건 때문에 낯익어하는 분들이 많겠는데, 이분이 젊었던 시절 노태우 정부에서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일할 때 남겼던 언행은 사실 그런 이미지와는 꽤 다릅니다.

"노동자들이 이렇게 파업을 해 대니 원 세금은 내가 뭐하러 내는 건지."
"세금은 기업뿐 아니라 노동자들도 내는 겁니다."

지금이야 당연한 상식이지만 당시로서는 이처럼 시원한 주장을, 명쾌한 논리와 함께 내놓는 이가 드물었습니다. 김 박사가 그런 말을 하고서야, 사람들은 세수 총액의 본체에서 노동 섹터가 차지하는 비중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새삼 재고하게 되었죠.

이 책에서 인용되는 김 전 의원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닭을 붙들어매고 키우지 않으면 돌아다니며 농작물을 쪼아먹고 다녀 큰 피해를 보게 된다. 그렇다고 닭을 죽여 버린다면 농가에 더 큰 손해이다."

이 말을 두고 박용진 의원은 이렇개 해석합니다.
"여튼 재벌은 필요하다. 그러나 개혁해야 한다. 재벌을 개혁하는 건 국민에 이익이 될 뿐 아니라, 그 재벌을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그는 "혹시나 있을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인데, 재벌 개혁은 재벌을 해체하고 죽이자는 게 아니다."라는 말까지 덧붙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이 이슈와 관련, 그가 얼마나 깊고 너른 사유 끝에 이 대안과 논변을 제시하는지 짐작이 가능합니다.

2부에서는 외부에서 보기에 상당히 불투명한 과정이 많았던 이재용씨의 삼성그룹 승계과정에 대해 조목조목 짚습니다. 사실 이번 큰 스캔들이 터지기 전에도, 외국 투자자 그룹이 합병 비율의 이례적인 양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소송을 걸기도 했습니다. 국수주의 관점에서 볼 게 아니라, 기업은 해외의 투자자들(꼭 그 사람들 말고라도)에 대해서도 일단 신뢰를 얻어야 살아남습니다. 승계 과정에서 불투명한 점이 자꾸 눈에 띈다면, (위에 인용한 박 의원 말대로) 해당 기업의 건강성과 장래를 위해서도 좋을 바 없습니다.

국민을 위해 단호하고 정의로운 정책을 집행해야 할 관료들이, 정기적으로 재벌 측으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관리 대상"이 된다면 이는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만, 박 의원은 여러 제보와 사례를 통해 이런 우려가 현실에 접근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뇌물을 두고 "떡값"이라 부른다면 그저 완곡한 우회어법이 아니라, 명백한 범죄의 추악한 징표를 희석시키려는 불의한 시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박 의원은 유력 야당(당시. 지금은 집권여당)의 힘으로 촛불 혁명이 성취되었다기보다, 국민의 응축된 에너지가 한시에 폭발한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그 기저에는, 정의롭지 못한 경제 구조의 모순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땀방울의 성과를 거둘 수 없는 현실에 분노한 근로 대중의 활화산과도 같은 에너지가 작동했을 뿐, 특정 정파의 공으로 돌릴 게 아니라는 메시지도 담겨 있죠. 누군가가 잘못을 지적하면 이를 계기로 삼아 같은 모순과 병폐가 되풀이되지 않게 모두가 경각심을 다질 필요가 있는데, 한국 사회는 이 점이 결여되었다고 박 의원은 다시 지적합니다.

이 책은 결국 "경제민주화야말로 민주화의 완성이요 국민 행복의 종착점"임을 알기 쉽게 증명하는 기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돕는 주장이 많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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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시장을 주도할 크로스 테크놀로지 100 - 융합과 재생으로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신기술들
닛케이 BP사 지음, 이정환 옮김 / 나무생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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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의 핵심 키워드를 여러 각도에서 포착할 수 있겠지만 이 책 저자들이 선택한 컨셉은 "융합과 재생"입니다. 평지돌출형, 파천황격의 전혀 새로운 기술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런 것들은 제아무리 최고의 인재가 투입된 분야라고 해도 극히 드물게 안출될 뿐입니다. 그보다는 지금껏 무관해 보였던 분야 간의 융합을 시도한다거나, 이 융합을 통해 처음으로 발견되는 "재생"으로부터도 유용하고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할 수 있으며, 이들의 쓰임새 역시 원천 신 기술 못지 않다는 건 산업의 다양한 국면에서 얼마든지 발견되는 실정이죠.

한국에서도 많은 CEO들이 참조하는 일본의 정평 난 언론사인 일본경제신문의 자회사인 닛케이(日經)사(社)에서 발간한 이 책은 주로 일본 산업계를 뜨겁게 달구거나 장래성이 촉망되는 "융합, 재생"의 기술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우리 산업계가 미래를 내다보는 것보다 훨씬 넓은 스케이프에서 전략을 꾸리는 게 저들의 저력이므로, 저들이 응시하는 먼 지평과 요긴한 디테일을 가까운 발치에서 엿보는 게 어쩌면 꽤 영리한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기안 올려야 할 때 좋은 아이디어가 잘 안 떠오른다면, 이런 책을 보고 좋은 영감을 얻거나 참고될 단서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바이오매스는 요즘이야 한국의 중등 교과서에서도 중요 이슈로 다룰 만큼 널리 알려진 토픽입니다. 바이오매스 응용의 단연 큰 장점은, 첫째가 재생의 컨셉에 가장 충실하다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현재 화석연료 사용 과정에서 빚어지는 갖가지 부작용을 피해갈 수 있다는 데에 있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제2세대 바이오매스 원료로 조류를 이용한 방식을 소개합니다(조류는 쉽게 말해서 "해조류(海藻類)"이며, group of birds가 아닙니다). 이는 제트연료를 만드는 데 중점적으로 그 효용이 연구된다는데, 관련 업계에서는 "자동차, 선박에 비해 항공기는 연료와 엔진에 의해 움직이는 방식으로 마지막까지 남을 분야"라고 합니다.

관련 기업과 (정부 기관인) 일본 에너지청에 의해 이 사업이 주도되는데, 해당 지역의 특수한 사정(대개는 장점으로 활용될 수 있는)을 최대한 감안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터라, 그만큼 비용도 절감되고 종사자들의 사기도 높은 듯합니다. 현재 한국도 지방분권을 추진하는 중이지만, 해당 지역의 전문가들이야말로 현지의 특장점(혹은 취약 사항)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처지이므로, 지역 자치를 광범위하게 허용하면 할수록 산업의 효율과 혁신 역시 용이하게 추진되는 한 예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율주행 체제가 전면 도입되면 무엇보다 서투른 운전자들의 실수 때문에 초래되는 각종 사고가 방지된다는 점이 좋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충돌하지 않는 자동차의 개발"이야말로 시스템 작동의 핵심이겠는데, 그간 여러 책들에서 다소 피상적으로 커버한 바와 달리 기술의 세부 국면까지 그 발전상을 소개한 점이 좋았습니다. 이를테면 정차 상태에서 차간 간격이 좁아져 차선이 보이지 않는 경우, 선행 차량을 그저 따라가면서 핸들 조종을 할 수 있게 돕기도 하는 옵션을 넣었다고 합니다. 이때 "본다"는 건 물론 시스템 단말의 센서가 정보를 취합하는 과정을 뜻하겠죠. 사람이 운전자인 경우 (다소 위험하긴 해도) 고개를 삐쭉 내민다거나 잠시 밖으로 내린다거나 해서, 최소 동작으로 융통성을 발휘해 어떤 "판단"을 할 수 있겠지만, 기계는 이게 어렵지요. 이런 대목을 보며 여러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시나리오를 촘촘히 마련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습니다. "전면 도입"에는 아직 갈 길이 많이 남기도 했겠고 말입니다.

"빅데이터"는 요즘 안 쓰이는 분야가 없습니다.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에서 항상 다루는 게 "대수(큰 수)의 법칙"입니다. 고작 십여 번 정도 시도할 때, 주사위의 눈 특정 숫자가 반드시 두 번은 나와 줘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아예 모든 시도에서 같은 눈이 나오기도 하죠. 허나 수백 번, 수천 번을 시도하면 대개는 1/6에 각각의 근원사건 누계가 수렴합니다. 이제 인터넷 혁명으로 데이터의 크기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보험료의 책정은 얼마든지 합리적인 수준으로 낮춰 잡아 고객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한 4년 전에 삼성화재 다이렉트 섹터에서 "자신있습니다"라는 문구를 광고에 활용하던데, 그 말은 내부에서 설계한 모델의 정합성에 자신 있다는 뜻이었겠죠. 이 과정에서 빅데이터가 얼마나 요긴하게 쓰일지야 강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안전운전을 하는 자동차(운전자)에 특히 할인 혜택을 주는 텔레마틱스 포맷에 대해, 특히 아이오이닛세이-도와 社에서 힘차게 추진한다는 설명이 잘 나와 있으나, 우리 보험업계도 Kb, 동부 같은 데서 주력 상품으로 개발해 놓고 있죠.

뭐니뭐니해도 한 나라의 거시경제를 먹여살리는 건 제조업입니다. 책에서는 금속 3D 프린팅과 협동 로봇, AR 등이 맞물려 어떻게 "연결되는 제조업"의 그림이 그려지는지 흥미롭게 서술합니다. 과연 3D 프린팅 기술이 대량 생산 분야에서 실제 효용을 내어 가며 구현될지는 초미의 관심사인데, 이 책에서는 현재 업종의 첨단을 걷는 GE(제네럴 일렉트릭) 그룹, 스트라타시스(이스라엘 자본, 법인이라고 하네요) 등이 어떻게 현황을 주도하는지 자세히 소개합니다. 예전 책 보신 분들은 스웨덴의 아캄, 독일의 컨셉레이저 등의 혁신에 대해 잘 아실 텐데, 그새 이들이 GE에 합병되어 트렌드의 중핵이 다시 미국으로 옮겨온 현황을 이 책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IoT는 실시간 노인 돌봄 기능, 의료 정보 체크, 빌딩 정보 모델링 등에 폭 넓게 응용됩니다. 물론 응용 분야를 개별 거론한다는 자체가 의미없을 만큼 미래 산업의 새로운 펀더멘털이자 플랫폼이 되는 시스템이지만, 이 책에서는 그간 이 기술이 다른 산업 어느어느 분야의 디테일에 깊숙히 파고들었는지 응용의 백화제방 현황을 잘 소개하고 있어, 마치 쑥쑥 커나가는 아이들의 키를 재는 양 뿌듯한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물론 그저 소비자의 입장에서 레이스의 향방이 어디로 갈지 점치는 한가한 관전자 모드에 그쳐서는 안 되고, 향후 몇 십 년 동안 선발자가 헤아릴 수 없는 규모의 로열티를 꼬박꼬박 받아가는 모습을 구경만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뒤처지면 애써 노력해 번 돈을 남 호주머니만 채우게 되는 셈이니, 시스템의 주형이 형성되어 가는 이 중요한 국면에서 결코 낙오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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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 1 - 제1부 그 별들의 내력
송은일 지음 / 문이당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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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에, 처연한 감상이 절로 치솟는 작품이었습니다.

"반야"의 뜻이 뭔지 아시나요? 범어 "프라즈냐"가 빠알리어(부처님 시대의 입말) "빤냐"로 바뀌고, 이게 한역을 거쳐 굳어진 단어입니다. 음차로 형성된 말이긴 하지만, 한자로 새겨 보아도 얼추 비슷한 뜻이 되는 게 신기할 정도죠. 산스크리트 문자(데바나가리. 힌두어 등도 이 문자로 표기합니다)로 쓰면 प्रज्ञ입니다. 뭐가 저렇게 짧아지나 할 수도 있는데, प्र는 प와 र가 합쳐진 글자이며, ज्ञ는 ज와 ञ가 한데 모인 꼴입니다. 이는 해당 언어를 공부해야 그 체계에 대한 이해가 가능합니다. 헌데 너그러우신 부처님도 그런 뜻이었겠고, 많은 선승들은 치열한 문자 공부를 통하지 않고서도 그저 바른 마음과 수양으로도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겼다니 다시 한번 마음이 숙연해지곤 합니다.

"반야"는 그 한 몸에 온갖 지혜를 담아낸 기이한 처녀입니다. 남장을 햐면 귀여운 사내아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정색을 하고 꾸미면 안 넘어갈 수컷이 세상에 없을 만큼 색기 넘치는 자태를 가졌습니다. 이런 반야이지만 속세에 태어나길 천것으로 태어나, 신상에 닥쳐오는 온갖 위험과 신이한 알림, 징후 같은 걸 몸에 끼고 살다시피해야 합니다. 그런 반야에게는 타고난 지혜 말고도 세상에 부대끼며 몸에 밴 안목과 요령이 점차 늘어, 이런 어리고 연약한 몸으로 어떤 대처가 가능할까 싶은 상황에서도 기적 같은 반전을 일궈 내는 품이 독자를 감탄하게 만듭니다. 물론 그녀에게는 신기(神氣)가 내내 감도는 운명적 재주가 몸에서 떠나질 않습니다만, 이런 건 이점이라기보다 차라리 저주에 가깝습니다. 그녀를 지켜 주는 건 결국 무녀로서의 신통력이라기보다, 엄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권력욕과 이욕의 칼날 같은 서슬을 모면하는 뱀 같은 슬기입니다.

이 고을 사또 김학주는 소년 등과를 한 수재 관료입니다. 희한하게도 천것들이나 앓는 무병이 내내 그의 몸에서 떠나지 않아, 그는 맑은 정신과 빼어난 지성에도 불구하고 삭신이 안 쑤실 날이 없습니다. 이런 무병이 흔히 그렇듯, 상대와 마주하면 그 검은 속셈과 비루한 계산, 감정의 동요가 눈에 훤히 보입니다. 병이 떠나면 이런 통찰은 간곳없이 사라지니 신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가의 가르침이란 본디 "사불범정"이라 하여 괴력난신을 이야기하지 않고, 무속은 물론 불가의 영향력과도 맞서가며 오랜 세월을 투쟁해 온 객관적 관념론의 총체입니다. 이런 유생들 중에서도 장차 최상층부에 자리하여 무리를 이끌 김핟주 같은 이가, 단지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그 이점과 쾌감을 놓지 않기 위해 제 몸에 신기(천한)를 달고 산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반야는 어린 나이임에도 척 보자마자 김학주의 슬프고도 컴컴한 운명과 체질을 직시합니다. 사또도 이 반야가 자신의 그런 속마음을 (일급 무녀이므로 당연히) 들여다보는 줄 알고, 고수들끼리만의 화통함으로 직설적인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반야는 사또의 깊은 곳 변덕과 정욕의 발동까지를 훤히 캐치하여 살벌한 수(手)를 말로 두는데, 김학주 역시 능글능글하게, 그러면서도 등골 서늘해지는 위엄을 풍기면서 받아넘깁니다. 언제나 반야는 복채에 있어 같은 정책(?)으로 나가고, 김학주도 제 그릇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확인시키기 위해(그럴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죠) 대담한 언사를 서슴지 않습니다. 둘의 이 맞대면 장면이 특히 볼만했습니다.

세상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고루 교차하고, 그 중 천벌을 받아 마땅한 패륜과 불의가 저질러지는 줄 뻔히 알면서도, 사신계는 인간사에 함부로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섭리라는 룰을 지켜야 하며, 필멸의 인간계에서도 여튼 권력자들이 부려 대는 위력은 충분히 파괴적이기 때문입니다. 반야는 이 두 "포스" 사이에 끼어, 한편으로 제 한 몸의 물욕과 육욕을 영리하게 달래고, 다른 한편으로 어린 나이에 서글프게도 깨닫게 된 궁극의 법칙 한 자락에 줄곧 충실하며 진영 충돌의 파국을 막고자 몸부림칩니다.

미복을 하고 야밤에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영조(이단. 연잉군)과의 조우도 무척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엄청나게 큰 기운이 느껴졌으나, 한편으로 너무도 슬픈 분이었다." 이보다 더, 저 대군주의 성격과 기질과 천품을 잘 요약한 평가가 있을까요. 한편으로, 천한 신분이 뜻하지 않게 세상사 가장 깊고도 위험한 이치에 접해 노출되는 온갖 위험과 한을 풀어내는 방법은 마치 육(肉)의 교접이라도 된다는 양, 다양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정한의 물적, 정신적 표출 묘사는 약간 낯이 뜨거워지면서도, 보잘것없는 인간의 아귀다툼, 드잡이가 결국 저런 몸짓하나로 다 설명되지 않나 싶기도 해서 많은 감흥이 교차하게도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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