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옥수수 - 우리의 음식, 땅, 미래에 대한 위협 GMO
케이틀린 셰털리 지음, 김은영 옮김 / 풀빛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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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된 경작 면적의 농지에다 투입하여 수확량을 획기적으로 걔선할 수 있는 질소 비료가 발명되었을 때, 인류는 마침내 기아와 흉작의 근원적 위험에서 구제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유전자 조작(변형) 작물의 고안 역시 그 초기 단계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 일각의 구조적 빈곤 재생산 기제를 근절시키는 데에 이보다 더 획기적인 성과가 또 있겠냐는 식이었죠.


다만 우리 한국은 GMO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널리 형성되기 전부터 이미 그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같은 속도로 퍼졌다고 봐도 됩니다. GMO가 환영 받는 초기 단계가 있기나 했었냐는 식의 반응이 대부분이지요(GMO뿐 아니라 앞으로 일상에 새로 도입되는 모든 기술상의 발전 양태가, 이처럼 비판적 시선의 검증을 거칠 겁니다). 시민 대중의 경각심이 이처럼 마련된 현상이야 다행스러우나, 문제는 유익하고 필요한 일부 다른 응용 분야의 기술에까지 무작정 적대감을 유지해서는 또 곤란하다는 겁니다. 이성적으로 정직하게 납득,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의견을 가꿔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할까요.

학교 다닐 때 쌀과 밀이 세계의 양대 작물이라고 배운 분들은, 요즘 아이들이 배우는 교재에 새로 "옥수수"가 들어간 걸 알고 좀 놀랄 수도 있습니다. 가공식품 여러 종류에 옥수수가 원료로 대거 사용되기도 하며, 통으로 먹을 수 있는 메뉴 증 노점 등에서 인기를 누리는 품목이 또한 이 곡물이죠. 미국에서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밀과 더불어 이 옥수수 재배가 농업 전체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가뜩이나 성황을 이뤘던 산업적 경향이, 근래 들어 중국 등지로부터의 폭발적인 수요 증대라든가, 육고기 생산의 중간재(가축 사료)로 새로 주목받은 용도 때문에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이 옥수수가 문제입니다. 책 제목을 보십시오, 왜 옥수수가 슬플까요? 무정물인 옥수수가 스스로 슬픔을 느낀다는 뜻인지, 아니면 이미 일상에서 필수 품목으로 곁에 끼고 살아가야 할 이 옥수수를 우리가 슬픔의 눈으로 바라봐야만 하게 되었다는 뜻인지... 답은 "둘 다" 입니다. 옥수수 없이도 익숙한 알상의 편의를 누리기는 더 이상 어렵게 된 현대인이, 죄 없고 순결했던 작물 하나에 몹쓸 짓을 해 놓은 일부 탐욕스러운 업자들 때문에 공연한 건강 걱정, 나아가 치명적인 장해, 질병까지를 얻게 되는 현실, 애꿎은 옥수수를 원망하게 되는 부조리, 이 모두를 담아낸 말이라 하겠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이유 없이 몸이 아프고 동작이 힘들어, 내 몸에 뭔가 이상이 생겼구나 하는 서글픈 각성과 고통이 정신을 휘감았다는  저자의 고백... 체념에 가까운 상태로 현실을 받아들이려 할 무렵 청천벽력 같은 진실을 알려 준 이는 패리스 맨스먼 박사였습니다. 케이틀린 셰털리는 출판사 편집인이었고, 순수 문예와 시사 이슈 사이를 넘나들며 독창적인 글쓰기 활동을 이어간 인기 블로거, 작가였습니다. 이런 분이, 같은 메인(Maine) 주(州)에 사는 맨스먼 박사로부터 자신의 병에 대한 정확한 원인을 듣게 된 후, 집요한 의지와 정의감을 발동하여 일부 양심을 팔아치운 기업의 부조리한 행태를 고발하고, 나아가 이런 무모한 시도가 사업 확장의 필수 구조 중 하나로 편입될 수밖에 없는 이 위험한 체제의 구조적 모순에까지 시선을 돌립니다.

일부 실화에 기반을 둔 <로렌조 오일>이라는 영화에서 감동 받으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의학에 대해 아무 지식이 없던 부모 두 분이, 어린 자식을 살리기 위해 온갖 정보를 파고들고 연구를 거듭하여 마침내 신약 개발에 큰 몫을 보태기까지 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인체에 어떤 난치의 질병이 우연의 개입으로 발생하는 건 그저 자연의 무정한 처사려니 체념할 수도 있지만, 타인과 시민의 건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기업의 썩은 행태가, 건강한 내 몸을 좀먹고 망칠 수도 있었다니 얼마나 충격적이고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진실이겠습니까. 이는 케이틀린 셰털리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우리 중 누구라도 당장 내일부터 빠져들 수 있는 억울한 곤경이며 코 앞에 다가온 위협입니다.

옥수수가 임자를 만났다? 아뇨, 임자를 만난 건 일부 악덕 기업과, 이들의 범죄행위에 공범으로 끼어든 무책임한 정부 당국입니다. 사실 독자로서 저는, 어쩌면 이렇게 절묘한 우연으로, 글 솜씨 좋고 논리적 사고를 할 줄 알며 부당한 압력에 무기력하게 굴종하지 않는 의지까지를 지닌 저자에게, 이런 면역학상의 재난이 닥쳐서 우리 독자, 시민 모두가 GMO의 위험성에 대해 충격을 받게 되는 건지, 그 과정의 적시성(適時性)에 새삼 놀랐습니다. 허나 다시 생각해 보니, 놀랄 일도 전혀 아닙니다. 유병률이 낮고 발생 빈도가 떨어지는 특수 희귀 질환이 하필 저자 셰털리 여사를 덮친 게 아닙니다. 이 저자와 같은 과정을 거쳐 몸이 상하고, 아프면서도 그 이유를 모른 채 진통제나 투약하며 희망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정도로 위험한 기제가 우리의 일상을 감싼다면,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2세들이나 이 저자가 겪은 불행에서 피해가라는 법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옥수수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일찍부터 그 위험성이 지적되었는데도 "나는 괜찮겠지"하는 안이한 마음가짐으로 사실상 부도덕한 기업 행태와 무책임한 정부의 자세에 면죄부를 준 우리 모두가 문제였습니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이 책에는 뜻밖에도 "사람 냄새 나는 사연과 이야기, 감동"이 충만합니다. 서점에서 이 책을 빠르게 일별한 분이라면 혹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이 아닐지 착각할 만도 하게, 기승전결과 감성이 묻어나는 문장과 튼튼한 서사가 가득합니다. 그저 고발의 사연이라면 분노와 각성과 불안으로 책을 덮고 말지도 몰랐으나,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는 훈훈한 공감, 연대의식까지를 함께 충전한다는 게 큰 차이입니다. 또, 고달팠던 추적과 투쟁 과정에서 오히려 진정한 인간애에까지 눈을 뜬 저자의 정신적 성숙이, 이 책 텍스트 곳곳에 성과로서 배어났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옥수수는 슬프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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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7번째 기능
로랑 비네 지음, 이선화 옮김 / 영림카디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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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재밌습니까. ㅎㅎ 책을 덮고도 온 몸을 간질이는 듯한 흥분과 감동, 지적인 위트가 남긴 잔잔한 파문 때문에 원 도통 마음을 주체 못하겠네요.

움베르토 에코 선생이 대략 지금으로부터 2년 전쯤 타계하기도 했는데, 그의 대표작 <장미의 이름>을 보면 (내용 누설일 수도 있지만 워낙 유명한 책이고 그 내용이니 잠시 주접 좀 떨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이 세상에 알려질 때 초래될 엄청난 혼란을 막기 위해, 고루하고 인습적인 사고 방식에 꽉 사로잡힌 어느 수도사가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이들을 하나 둘 죽이고, 그 사뵨마저 세상에서 말살하려 든다는 내용이 나오죠.

글쎄 그 결말을 알았을 때 독자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는 짐작이 어렵습니다. "와 무려 시학 2권이라니, 정말 기독교 중심의 세계가 한순간에 붕괴할 만도 했겠는걸?"이라며 전율을 느낄 만한 발상이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세상은 아드소와 윌리엄 수도사의 시대 이후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 사고를 많이 겪은 탓에, 등장인물들의 반응이란 그저 과장된 호들갑으로밖에 안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정말 중세의 한복판 어느 시점에 그 저술(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저작이 완성되었을 뿐 아니라 내용도 소설 속처럼 웃음과 해학을 옹호했다 치고)이 공개되었다면, 가톨릭이 세속과 정신 세계까지를 공히 장악했던 당시 유럽의 질서가 정말로 붕괴되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스콜라 학파(프로테스탄트는 교부 학파는 긍정해도 이 스콜라 학파의 지향점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합니다)가 그토록이나 맹신해 오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기반이 느닷 정반대의 지표를 향해 달릴 수도 있었다는 그 상상만으로도, 허약한 지반 위에 아슬아슬 세워지던 신학의 바벨탑이 한순간에 무너질 만한 위험성을 내포했었다. 뭐 이런 "역사적 사실"을 풍자하고 싶었던 에코의 (그마저도 일종의) 유머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억누른다고 없던 신앙심(혹은 공포심)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사회와 백성의 의식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되었으니, 설령 이지적인 신학자들이 모두 냉소적 주지주의 앞에 백기를 들었다 해도 여전히 기층 민중은 로사리오를 읊고 천국행을 기도했을 겁니다. 계몽이란, 사회 경제적 실물 구조의 변화로부터 비로소 추동되는 거죠. 또, 유능 달변의 신학자들이 새로 출동하여 분명 어떤 출구를 모색했을 겁니다. 말로 우겨서 안 되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네요. 답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말로 안 되는 건 없다." 씁쓸하지만 이 말은 아주 부정적 의미에서 진실입니다. "말'이란 그 발생의 초기에는 대개 마법의 주문 그 자체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브라만의 제사 주문과 경전 구두 계승에 쓰였던 산스크리트가 얼마나 까다로웠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이 언어는 그 까다로운 문법과 복잡한 접변 규칙 때문에 결코 일반 대중 사이에 입말로 퍼질 수 없었습니다. 하긴 따지고 보면 한국어도 그 꼬이고 꼬인 문법과 조음법의 난해성이 장난 아닌데 이처럼이나 많은 언중에 의해 쓰이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합니다.

인문학 쪽에선 학자를 표방한 이들이 날로 먹는 것 아니냐 오해를 받아도, 언어학 한번 공부해 보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갈 겁니다. 촘스키가 현실 정치에 관해 때로는 지나치게 과격하고 비현실적이거나 심지어 자가당착, 위선적인 주장까지 발설해도 대중이 그를 지지하는 이유는, 젊은 시절 한창 천재성이 빛날 때 그가 남긴 업적의 볼륨이 워낙 두터워서인 이유도 있습니다. 수학과 언어학이 언젠가 정직한 크로스를 이룰 때, 인류 문명과 정신에 얽힌 영원한 비의가 풀릴지도 모릅니다. 여튼 지난시절 언어학의 역사와 한계로 새로 규정하다시피헸던 롤랑 바르트 같은 천재가, 무려 "언어의 일곱번째 기능"을 발견했고, 이로 인해 특별히도 위험을 느낄 만한 세력이, 일이 커지기 전에 서둘러 그를 암살해 버렸다는 가정, ㅎㅎ 얼마나 재밌습니까.

다시 움베르토 에코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푸코의 진자>에서,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고(체제의 폭압에 의해 할 일을 빼앗긴), 재기는 넘쳐나던 젊은 재사들이 장난스럽게 위서를 만들었으며, 이 문헌의 정체성에 대해 터무니없는 오해를 한 세력에 의해 큰 위험에 봉착한다는 웃지 못할 사연이 우리 독자들을 전율(경악 혹은 허탈)케 했죠. 이 소설 역시 비슷한 분위기와 발상을 공유합니다. 더 이상 이야기하면 내용 누설이 될 것 같아 자제합니다만, 역시 기호(학)와 언어의 소재란, 이지적 스릴러와 미스테리를 창작하는 데 아주 제격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소설 중에는 소위 기호학의 허접성(!)을 지적하는 대목이 다 나오는데, 에코가 저 화제작들을 집필하고 근 30년이 지났습니다만 후배의 눈으로 보아도 여전히 기호학의 기반은 뭔가 허술합니다. 에코가 들으면 서운해할 수 있어도 그런 천재가 갖고 놀 때에나 주목을 받지, 어설픈 이가 기호학 운운하면 오타쿠 이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 짖궂은 성적 농담 소재의 아슬아슬한 담론도 나옵니다만, 하... 본디 좌파 지식인 중에 취향 독특한 분이 워낙 많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하며 피해갈 수 없는 함정이긴 합니다. 역주 중에 누구누구를 가리켜 소크라테스의 연인이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만, 글쎄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어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질 수도 있겠습니다. 괴악한 취미를 뜨르르한 성인 현철들이 공유했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 한구석이 후련해질 수도 있겠으나, 흠 글쎄요.

솔직히 말해 에코의 소설은 미스테리 장르물로 읽자면 독창성이 떨어집니다. 결말에 이르기까지 그가 늘어놓는 엄청난 담론들이 재미있어서 감히 거기까지 흠을 못 잡을 뿐이죠. 반면 이 작품은, 청소년기에 에코의 작품을 읽고 어지간히 큰 자극을 받았을 법한 저자에 의해 그 점이 철저히 반성된 듯(?), 물과 기름처럼 불상용 최악의 팀웍을 자랑하는 듀오의 개성이 재미나고, 그들이 조심스럽게 접근해 가는 미궁의 정체 또한 꽤 정성들여 고안되었습니다. 롤랑 바르트를 비롯 서유럽 지성의 거물들 이름이 대거 등장하는 텍스트에 위압될 걱정이 드는 독자들도, 순전히 추리물 읽는 재미로 한번 도전해 볼 만합니다.

에코의 대표작들을 읽은 분들이라면 이 작을 놓칠 수 없고, 아직 안 읽은 분들이라면 이 책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리로 손길이 갈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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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시 페이션트 에디션 D(desire) 14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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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현재 "에디션D"라는 기획의 일환으로 계속 출간 중인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출판사의 설명에 의하자면 에디션D는 "인간 내면에 숨겨진 은밀한 욕망의 세계를 탐험하고, 인간이라는 가장 불가해한 존재에 대해 깊은 이해"를 추구하는 컨셉이라고 합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이 시리즈의 7, 8권인 엠마뉴엘 아산의 <엠마뉴엘>을 읽고 간단한 독후감을 남겼으며, 이후 <데미지>, <크래시>, <비터 문> 등 주로 각색된 영화로 대중 사이에 더 널리 알려졌을 만한 다른 "구성품"들도 구매해서 읽었습니다. 원작들은 사실 서로 다른 동기와 배경, 주제를 바탕으로 세상에 태어난, 혈통이 먼 각각의 걸작들이지만, 이런 동아리 안에 함께 넣고 감상하니 색다른 맛이 더 추가되는 게 또 사실입니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원작이 맨 부커 상을 받고서 몇 년 후 레이프(랠프) 파인즈와 줄리엣 비노시(지금 생각해 보니 의미심장한 캐스팅이네요) 주연의 영화가 큰 화제를 불렀을 때 원서(얼마 후에 한국어 번역서도 나왔습니다. 이 책과는 텍스트가 다른)로 읽었는데, 난해하면서도 고혹적인 문장과 분위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책"에서도 같은 역자분의 솜씨로 몇 년 전에 번역본이 나온 걸로 아는데 이번에 이 시리즈에 함께 엮여 새 장정을 입고 우리와 만나게 되네요.

역자 후기에도 나와 있듯 본디 작가부터가 "플롯을 의식 않고 썼다"고 밝혔더랬습니다. 정체 불명의, 아마도 "영국 국적"으로 추측되는 어느 환자를 둘러싸고 몇 사람이 한데 모여 나눈 대화가 내용의 중심인 이 소설에서, 어떤 줄거리를 찾아내는 건 어려울 뿐 아니라 오히려 초점을 비껴가는 헛된(잘못된) 노력일 수 있죠. 이걸 생각하면 앤서니 밍겔라 감독은 이 장편을 그저 "소재"로만 삼아 자기 이야기를 그냥 펼쳤다고 보면 될 듯합니다. 그 영화에서 "드라마"의 힘은 대단했거든요.

이 작품이 과연 에로티시즘을 표방했는지도 조금은 의문입니다. 하지만 에로티시즘 코드를 염두에 두고 읽으니 초회독때 안 보이던 부분이 보이는 것도 같았습니다. 영화는 사실상 원작과 꽤 다른 길을 걸었으니, 상당수 독자는 소설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펼쳐 읽는 셈이나 마찬가지일 텐데요. 일단 작가가 스리랑카(출생 당시 영국식민지 "실론") 사람이며, 대종은 아니라도 곳곳에서 끈적한, 그러나 품위의 외투를 여러 겹 걸친 고상한 문장들이 속출합니다. 이 점에서 러디야드 키플링의 여러 작품들과 통하는 데가 많습니다(키플링은 영국 혈통이나 태생이 인도이며 생의 대부분을 여기서 보냄).

소설 중에 키플링의 장편 <킴>이 여러 번 언급되고, 역자 후기에서도 텍스트 연관성이 분석됩니다만 그 작품 말고도 <정글 북>의 여러 단편과 많은 코드를 공유합니다. 예컨대 사막(사막과 정글은 같은 혹서의 심상이긴 하나 생태의 면에서 극한의 대조를 이루죠)에서 한 OO이 법열에 들떠 춤을 추다 스스로 흥분하여 OO하고, OOO을 특정 용도로 사용한다는 식의 서술은 <The Spring Running>에서의 나른한 탐미주의를 연상케 합니다.

이뿐 아니라 분명한 소속 없이 이중, 삼중의 간첩 일을 하며 떠도는, 솜씨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 OOO(혹은 OOO OO. 이름은 밝힐 수 없습니다) 같은 인물들은, 키플링의 <왕이 되고.. > 등 여러 작품들에 등장하는 "실패한 모험주의, 식민주의의 사생아들"과 닮았습니다. 정작 세 인물이 모여 기괴한 발상과 체험담과 상처를 공유하는 이탈리아의 모 수도원은, 험난하고 곡절 많은 바깥 세상과 꽤나 단절된 안온한 별세계라는 점에서 아이러니입니다. 얼핏 보아 연관이 없어 보이는 온갖 이야기가 반시계 방향으로 굽이치며 한 지점(이기나 한지도 불확실하지만)으로 흘러가는 모습에선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 잠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역자는 등장인물 킵에 대해 "시크교도이면서도 영국 공병인" 둘 이상의 혼란스런 정체성을 한데 가졌다고 정리하시지만, 사실 시크 교도는 한때의 격렬한 항쟁을 거쳐 제국주의에 완전히 순치된 후 영국군 내에서 특별 대우를 받았으므로 그리 모순되는 갈등의 신분 설정은 아닙니다. 다만 킵이 보병이 아닌 "공병"이란 점에 주의할 필요는 있겠죠.

p191 셋째 줄에 보면 "... 전쟁이 펼쳐지는 또하나의 극장이 되었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본디 theater에 "전역(戰域), 작전 구역"이란 뜻이 따로 있습니다. 허나 "극장"이란 말에서 옮아오는 연상, 이미지가 독자를 좀 도와 줘야, 그저 "전역"이라고만 할 때 생기는 기술적 용어 특유의 건조함을 피할 수 있겠죠(이런 작품에서는 더군다나). 번역이란 게 본래 오답, 정답으로 딱 잘라 가를 수 없는 회색지대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해당 언어를 열심히 익혀 원어로 읽어내는 것일 뿐이며, 뭐가 맞니 그르니 아무리 따져 봐야 답이 나올 리 없습니다. 다른 언어계에 속한 단어 각각에 본디 일대일대응 관계가 숨어 있지를 못한데 그게 다 무슨 헛수고이겠습니까.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건데 다만 어느 하나가 작가의 본의를 좀 더 담아낼 수는 있겠죠.

고도를 기다려도 고도가 결국 오지 않을 뿐더러 고도가 대체 무엇인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부조리의 극한에서, 인간은 차라리 주관적 육욕에 침잠하며 다른 방향의 "탐험"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영국인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멋대로 세운 가정 위에 기이한 의식과 소통과 의미의 재규정을 시도하는, 어찌 보면 다분히 희극적인 "극장(무대)"의 재현을 통해, 작가 역시 인도인인지 영국인인지 정체성을 규정 못 할 자신이 결국 "환자"나 다를 바 없다는 자조적 고백을, 이처럼 해체적 인격들의 설정을 통해 털어놓는지도 모릅니다.


흠, 말도 하지 않고 뭘 보려 들지도 않는(할 수 없는) 어느 정체 불명의 환자에다가 제 편할 대로 "영국" 국적을 붙여 놓고 온갖 정신적 방황의 향연을 벙벌이는 이들을 보며, 전쟁만큼 인간의 인습과 루틴을 통째로 헤집고 원점에서의 재출발을 강요하는 계기와 사태도 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의 청마 유치환이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라고 노래했듯, 사막에 불시착하여 대추야자에 자신의 타액을 섞은 후 공존과 재생을 돕는 수수께끼의 부족들 사이에서, 우리 모두는 환자임을 새삼 깨닫고 무슨 신분으로 재 각성하여 눈을 뜰지 모릅니다. 그 순간이 현생 속이긴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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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근담
신흥식 역주 / 글로벌콘텐츠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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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채근담>은 여러 판본이 출간되어 있습니다만 이 책은 한학에 깊은 조예를 쌓으신 한조 신흥식 선생이 번역하고 주(註)까지 다신 책입니다. 채근담은 교양 있는 동아시아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익하고 심오한 격언집입니다만, 유불선 중 어느 한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조류의 가르침 그 정수를 고루 담기까지 한, 동양 인문의 결정체에 가까운 역작입니다. 머리에 든 것 없고 천품이 천박할수록 박약한 지능으로 고전을 함부로 폄하하는 풍조가 근래 일어서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만, 이런 와중에도 성현들의 지혜를 오롯이 담은 멋스러운 책들이 계속 출간되니 그나마 세상에 희망의 불잉걸이 아직은 남았다는 생각도 드네요.

채근담은 전/후집 양권으로 나뉜 편제입니다. 전집은 수신의 도에 대해 주로 평하고 논하지만 대개는 유가의 입장에 근거를 두었으며, 후집은 앞서 말했듯 불가와 도가의 심원한 진리까지를 반영합니다. 채근담의 어느 판본이라도 이 고전에 대한 해제를 잘 베풀어 놓았으나, 특히 역주자 신한조 선생님의 서문은 참으로 정갈합니다. 글이란 그저 건조한 지식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고아하고 풍취 높은 표현 속에 수양의 깊이를 증명하는 바 큽니다. 이런 그윽한 문구와 은은한 어휘를 통해 저자와 독자는 인문의 소통을 완수하고, 대 성인의 심오한 깨우침은 면면이 전승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어휘에는 한자어가 일일이 병기되어, 우리가 일상으로 쓰다시피하는 단어가 기실 어떤 속뜻까지를 품었는지 심사숙고할 계기까지 마련해 줍니다.

사람들의 경우와 계제를 보면
갖춘 이도 있고 갖추지 못한 이도 있는데,
어찌 나로 하여금 홀로 갖추어지기를 바라겠는가?

人之際遇, 有齊有不齊, 而能使己獨齊乎

(p60. 책 본문에는 물론 한자음이 일일이 달려 있어 독자에게 최대한 편의를 도모합니다)

결론은, 마치 역지사지하는 자세로, 상대를 보아 가며 그 속사정을 알고 교류의 양태를 그때그때 융통성 있게 달리해야만 진정한 의사의 합치가 이뤄진다는 뜻이겠습니다. 이는 유가에서 목민관이 명심해야 할 자세로도 해석되지만, 역자께서는 맨 아랫줄의 "법문"이란 어휘에 유의하여 개인 수양의 도(道) 쪽으로 새기십니다. 타당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언뜻 저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첫 문장이 생각나기도 하더군요.

고전으로부터 올바르고 청아한 문구만 인용해 댄다고 이를 과연 바른 배움의 자세라 평가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준엄히 방자한 편법을 꾸짖으며, "자신의 단점을 덮고 사적으로 이용하는" 못된 마음가짐이란, "적에게 무기를 내어 주고 도적에게 양식을 대어주는" 한심한 작태나 다름 없다고 하십니다. 말 한 마디를 주워듣고 그 깊은 맥락도 모르면서 비천한 교만을 부리듯 남발하는 몹쓸 처신이란, 이처럼이나 오래 전부터 경각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태어났다면 아마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치도곤을 맞아 폐인 신세가 되었을 겁니다. 바탕이 천한 자는 먼저 마음을 수양한 후 사악한 기질을 말끔히 걷어낸 후에야 비로소 책을 가까이할 수 있습니다. p149에 보면, "의식을 깨끗이하지 못하고 밝은 마음을 구하려는 건, 마치 거울을 향해 먼지를 뿌리는 것과 같다"는 말씀도 나옵니다.

성정이 조급한 자는
타오르는 불꽃과 같아서 만나는 것마다 태워버리고
은덕이 적은 사람은
차고 맑아서 만나는 것마다 반드시 죽게 하느니라.

燥性者火熾 遇物則焚
寡恩者氷淸 逢物必殺 (p76)

어찌 이런 자들이 타인에게만 해악을 끼치겠습니까? 이미 나쁜 성정이 조직과 공동체, 심지어 가정 안에서조차 간파되어, 해롭고 간특하며 악의를 품은 그 바탕을 다들 멀리하니, 남편에게건 자식에게건 직장 상사나 동료에게건 사갈시되는 게 당연합니다. 결국 해악의 발등은 자기 자신을 향해 찍고 마는 것입니다. 저 뒤 p175의 가르침("성정이 조급하고 마음이 거친 사람은 한 가지 일도 올바로 이룰 수 없고....")과도 함께 새겨야 할 대목입니다.

p77에도, 또 p60에도 "방편"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때마다 역주가 달려 있습니다. <채근담>은 명대의 저서인데 오늘날 널리 쓰는 한자어와도 제일의(第一義)가 거의 같다는 사실에 주목하게도 됩니다.

곧은 선비는 복을 구하는 마음이 없기에
하늘이 곧 무심한 곳으로 나아가서
그 복을 채워주고
간사한 사람은 재앙을 피하고자 애를 쓰나
하늘이... (중략)... 그 넋을 빼앗느니라

貞士無心徼福 天卽就無心處牖其衷
憸人著意避禍 (天卽就著意中)奪其魄 (p94)

보통 <사기> 중 태사공자서 일부를 인용하며, 세상에 천도가 없어 악인이 번영하고 선인이 곤경에 처하는 부조리가 흔하다고들 하나, 이 중 상당수는 능력 없고 나태한 자의 비루한 자기 합리화에 그치는 수가 많습니다. 악하다고 해서 반드시 강한 게 아니고, 때로는 그지없이 비틀린 심성을 가진 자가 그저 무능의 허물을 선(善)으로 치장하여, 자신의 실패를 호도하는, 참으로 속 보이는 너절한 변명을 일삼는 작태도 우리는 간혹 봅니다. 세상의 이치는 그리 허술하지 않아서, <도덕경>에 보면 天網恢恢 疏而不失이란 말도 나옵니다. 이 문구는 꽤 유명하여, 저는 서양의 어느 추리소설에서도 한 인용을 접한 적 있습니다.

能脫俗便是奇 作意尙奇者 不爲奇而爲異
능히 속세를 벗어나면 문득 이를 기이하다고 하나
고의로 기이한 체 하는 자는
기인이 아니면서 기인인 체 하는 것이니라. (p148)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각성 없이 그저 현인의 모양새만 가장하여 세상을 속이려 드는 무도한 사술이 횡행했던 듯합니다. 한편 이 장의 후반부에는, 그저 속세와 과격히 절연하려는 자는 청렴의 의도가 아니라 격렬한 성정의 발로일 뿐이라며 훈계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진정성도 없으면서 그저 과격한 언사로 지위를 노리는 속물들이 반드시 경청해야 할 가르침이겠습니다.

寒燈無焰 弊裘無溫 總是播弄光景
꺼진 등은 불꽃이 없고
헤진 갖옷에 온기가 없다 함은
삭막한 광경을 희롱한 것이니라. (p196)

이는 불가의 훈시를 다분히 담은 문구입니다, 차디찬 예식만을 내세우며 정작 인간된 도리와 훈훈한 인정을 잊는다면, 그런 사람은 참된 경지에 이를 수 없으며 자신의 행로까지도 망치고 만다는 의미겠죠. 혹 노자(도가)가 공자를 꾸짖었다는 고사도 연상된다고 할까요. 유교 윤리가 사회의 지배 교리로 자리잡은 현실에서, 융통성과 여유를 좀 남길 것을 요구하는 불(佛), 선(仙)의 개탄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p52, p91, p197 등에 보면 역주자님의 친필(한글, 한자)과 힘찬 붓놀림의 흔적이 도판으로 실려 있습니다. 서화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가외의 선물입니다.

명대에는 점차 사대부의 불만과 좌절이 사회의 문란한 풍기와 맞물려 체제 불안 요인을 형성했으며, 한참 전 남북조의 현실 도피 청류 추구도 아니고 학인 본연의 수행도 아닌, 개인 선에서의 과격한 불만 표출이 흔한 풍조였습니다. <채근담>의 저자는 그런 지식인들에게, 설령 체제의 모순이 개인을 옥죄더라도 선비란 먼저 자신의 인격을 갈고 닦은 후에야 세상을 향해 명분과 결의를 주장할 수 있다고 은근 타이르는 듯합니다. 하긴, 이런 이치가 어찌 명나라 말기에만 해당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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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진단과 처방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송인창 외 지음 / 원더박스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시대가 바뀌면 제도를 운용하는 방식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과거의 영화와 안락에만 젖어 낡은 해법만을 고집하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합니다. 한국 경제에 중병이 든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어떤 이들은 "병이 있으면 고칠 약도 반드시 있기 마련"이란 말도 하죠. 의학적으로야 반드시 타당한 언명은 아니라 해도, 사람 사는 세상에 난관이나 장애가 닥쳐도 적극적으로 궁리를 계속하면 반드시 돌파구가 찾아진다는 뜻으로 새길 일입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이 말의 정확한 뜻은, "그때(에)는 맞았으나, 그때의 방식을 지금 적용하면 그런 태도는 잘못이다." 정도겠습니다. 혹 잘못 해석하면, 그때의 방식은 옳고 지금 하는 건 잘못되었다." 정도로 정반대의 오해를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이 어구는 어느 유명 영화 감독(이 시끄러운 시국의 와중, 소리소문없이 또한번 충격적인 발표를 하신...)의 화제작 제목 문구를 재치있게 비튼 데서 유래했다는 것 정도는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죠(p325 이하 에필로그에도 저자들이 스스로 밝힙니다).

학교에서 코스(코즈 혹은 코어즈. R H Coase. 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 정리 정도는 경제학에 깊은 소양이 없는 분들도 이름 정도는 접했을 것입니다. "외부 효과" 이슈는 당시만 해도 경제학에서 풀리지 않는 난제 중 하나로 여겨졌는데, 이를 로널드 코스가 간명한 방식으로 증명해 낸 것입니다. 이분의 업적에 대해, 대개는 정부의 개입을 금기시하며 자유 방임주의의 타당성을 간접으로 뒷받침했다고도 여겨지만, 저자(필진 중 한 분. 참고로 이 책은 전현직 고위 경제관료들이 의기투합해 저술했습니다)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코스 정리가 규격화하여 널리 유명해지게 된 배경에는 코스 본인이 아니라 스티글러의 해석, 변형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도 하는데, 이에 대해 코스 본인도 불만이 많았다고 하네요.

여튼 1장에서, 저자는 "코스의 눈"으로 재벌 문제를 바라보자며, 발표 후 근 30년 동안이나 학계의 주목을 끌지 못했으나 뒤늦게 발견되어 "사회적 비용(개별 경제 주체 차원의 비용이 아닌)"에 대한 논의와 함께 논쟁의 핵심에 서게 되었음을 지목합니다. 코스는 여기서 물론 불필요한 정부 개입이 매우 해로울 수 있다며 피구(A C Pigou)의 주장에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언제나 정부의 개입을 반대한 건 또 아니며, 때로는 정부가 적절히 시장에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견해네요. 저자의 시각은, "이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과 정책 선택의 문제"라는 겁니다. 하긴 경제 정책에 도그마가 어디 있겠습니까. 타이밍과 여건을 봐서 유연하게 태도를 바꿔가며 액션을 취하는 게 정답이고 능력이죠.

재벌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이미 기업의 이해와 오너의 득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국면이라는 건 공지의 사실입니다. 삼성의 총수가 구속된 후 경영 투명성 제고에 대한 기대 때문에 오히려 주가가 상승한 건 이런 사회적 합의를 방증합니다. 코스의 이론은 오히려 "기업을 기업답게 재편성하여 기업도 살고 사회도 동반성장을 도모해야 하며, 일부 극소수 지분권자의 탐욕 추구에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에 가깝습니다. 물론 저자의 주장이지만, 어떤 특정 정치권에 친분을 둔 폴리페서가 아니라 정부에 몸담은 경제 관료의 선명한 입장이므로 그 설득력이 더하다고 하겠습니다.

아직도 고도성장이 필요하고, 또 가능한가? 여기에 대해 저자는 "생산성은 노동이나 자본보다,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에 더 큰 영향을 준다."라고 말합니다. 생산성이 경제성장에 영향을 준다니 얼핏 잘못 보면 동어반복 같은 느낌을 줍니다만, 여기서는 보다 장기적 관점의 생상성을 가리키며, 귀속 주체는 "사회 전반"이고, 노동 생산성이나 자본 생산성 같은 개별 요소 한정이 아니라고 새겨야 할 듯합니다. 그 다음 줄 쿠즈네츠(물론 쿠즈네츠 파동 할 때 그분입니다)는, "경제 성장의 원천은 기술 발전"이라고 했는데, 이 맥락을 보면 여기서의 생산성은 슘페터적 의미의 "혁신"에 가까움도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2장 말미에서 이른바 "낙수효과"의 의의를 전면 부정합니다. 이미 특정 계층의 소득 증대가 다른 계층의 영역으로 확산하지 않고 각각이 고립된 strip처럼 폐쇄 경로에서만 순환하는 현상이 도처에서 목도되기 때문입니다. (지표로서의) GDP 무용론이 대두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이런 까닭에 저자는 소득 등 양적 통계 외 다양한 인덱스를 개발해야 국민의 복리를 정확히 계측, 반영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당연한 소리 같아도 정책 결정 섹터에서 종전의 양적 지표가 업무 조정, 판단 과정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살핀다면, 경제 관료 출신의 이런 제언은 울림이 상당합니다.

과소비가 문제인가, 저소비가 문제인가. 한때 故 정운영 선생 같은 분은 "소비가 미덕이라 주장하는 얼빠진 작자들이 있다"고 일갈하시기도 했으나, 조순 전 서울시장의 말처럼 "경제 이론은 돌고도는 것"이라 어느 한 입장이 무조건 맞다고 간주하기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그때는 맞았으나 지금엔 틀리다"인 겁니다. 결론은 과소비 저소비 둘 다 문제라는 건데(1990년대 초반에는 계층 불문하고 과소비를 해대어 자제하자는 캠페인이 일기도 했죠), 저자는 일단 소득이 고르게 증대되어야 적정 수준, 골디 락스의 소비가 보장될 수 있다고 논의를 정리합니다.

조세와 부채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는 이런 이분법, 택일의 문제가 대단히 낯설게 들립니다. 아니 선택이 어디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이뤄질 범주인가? 그러나 경제 정책 결정자들에게는 마치 일반 회사원의 사훈이나 부장님 잔소리보다 더 피부에 밀접히 와 닿는 이슈이죠. 정부가 국민들에게 공공 서비스를 하려면 재원을 마련해야 합니다. 어느 정치인은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이다"란 말을 하기도 했는데 물론 상식과 현실에서 고루 타당한 지적이긴 하나 이론적으로 정부 재정 충당의 다른 옵션은 국채 발행이나 기타 차입 방식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거시 경제 총공급 총수요 균형 방정식에서 T 항목과 G 항목이 별개인 거죠. T=G 이면 뭐하러 변수를 두 개 따로 두겠습니까.

앞에서 코스의 이론을 스티글러가 명제로 뽑아 대중화(?)시킨 것처럼, "리카도 등가 정리" 역시 현대의 로버트 배로가 "재발견"하여 공식으로 정립했습니다. 원래 고전기 경제학자들의 저서에는 워낙 많은 내용이 담겨 있기에, 후대 학자들이 끊임없이 탐구 분석하여 현재의 실정에 맞는 내용을 따로 추출도 하는 겁니다. 그래셔 20여 년 전 대중서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가 큰 히트를 치기도 했죠. 여담입니다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저 책에 버금갈 만한 히트 대중 경제서가 안 나오는 건 참 아이러니입니다.

정부는 일을 벌이기 위해, 조세를 얼마만큼, 또 국채발행분을 얼마만큼 획정(劃定)해서 재원을 조달할지 선택을 해야 하고(경제학이라는 게 본디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선택"을 추구하는 학문입니다. 돈 버는 방법 궁리가 아니라), 그 선택에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로버트 배로가 드디어 "리카도를 넘어서는" 이론적 지점에 도달했다고 평가합니다.

적자 재정 편성의 득과 실은 분명합니다. 빚이 늘어나면 분명 재정은 부실해지고, 장기적으로 (얼마 전 미국 연방 정부 의 사례나 수없이 잦은 주정부의 곤란상에서 보듯) 셧다운 사태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허나 그렇다고 세율을 무작정 높이면 경제활동인구의 의욕을 떨어뜨립니다. 배로가 제시한 기준은 첫째 세출 사유가 항구적이지 않고 일시적일 때(예: 전시채권. 당연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으나 예를 들어 남북전쟁 당시 링컨은 화폐 증발로 대응하기도 했습니다. 현대 국가의 정부가 결코 모방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둘째 국민소득 감소와 경기 후퇴가 명백히 맞물리는 국면일 때, 이런 경우는 국채 발행의 비중을 늘려야만 합니다.

이를 두고 조세평탄화 이론이라고도 부르는데, 저자는 이의 소개, 정리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 경제단위별로 그 타당성이 입증되는지 현실에서 변별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호주는 선진국, 인도는 개도국이지만 이들 두 국가에서는 공통적으로 조세 평탄화 이론이 잘 적용되지 않는다(경기가 좋으면 오히려 부채가 늘고, 불경기에 부채가 주어듦)는 실증분석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이 이유를 두고 저자는 여러 원인을 소개하는데, 경기대응식 세율 변동 정책이라든가, 가능하면 적자를 줄이려는 정책적 관성 내지 터부 심리 등을 거론합니다.

세상이 바뀌면 그에 대응하는 방식도 바뀌어야 하나 아직도 각주구검식의 고리타분한 관점과 체제를 우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책은 그간 의심의 여지 없는 도그마로 여겨져 왔던 상식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고, 발상의 전환과 인습의 타파만이 번영과 행복을 달성하는 길임을 치밀한 논조로 독자에게 설득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전현직 베테랑 경제 관료들의 차분하고도 학문적 논변을 장착한 저술이므로, 마치 경제학 부교재를 일독하는 듯 간만에 공부 좀 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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