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스타트업 - 지속적 혁신을 실현하는 창업의 과학
에릭 리스 지음, 이창수.송우일 옮김 / 인사이트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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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실현적 예언"이란 개념화도 있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생각 없이 툭툭 내뱉곤 하는 말 하나하나가 의외로, 정말 의외로 우리 자신의 먼 앞길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 구실을 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사 앞에서 동료 곁에서 제깐엔 날카로운 척 결정적 한 마디를 내놓는 척하며 그 나름 "분석의 한 마디"를 꺼내는데, 이게 윗사람 보기에, 그리고 이 상사와 선이 바로 닿아 있는 동료들 보기에 여간 신경 거슬리는 게 아닙니다. 말 자체도 부정확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거니와 아무나 다 알 수 있는 뻔한 이치를 혼자 특별한 안목으로 꿰뚫어 본 양 거드름을 피우는 그 "태도"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거죠. 이런 사람도 남이 발견한 (객관적으로 우월한) 안건의 시방화(specification)을 두고선 "아무나 다 하는 걸 말만 꼬아서 표현했다"느니 뭐니 폄훼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자기한테 할당된 기본 업무를 탁월하게 수행하고서 이런 밉상을 떨어도 떨어야 할 텐데, 일도 못하는 자가 이런 작태를 보이니 승진은커녕 제 자리 하나를 지켜낼 재간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노력을 하는데도, 재능이 있는데도 위에서 안 써 주는 게 아니라, 그 누구한테도 쓰일 가망이 없는 겁니다. 춘추 전국 시대나 중세라면 모를까, 요즘 같이 정보가 흔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경쟁상대조차 뭘 하고 있는지 바로 지득이 가능한 세상에서, 자기만의 노력을 열심히 경주하나 성과가 나지 않는 비운의 직장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노력의 방향성보다는, 애초부터 노력의 질과 양이 남보다 처져서 도태되는 겁니다. 혹 방향성을 처음에 잘못 잡았다고 하죠. 남들이(협업이든 경쟁이든) 어떤 쪽으로 지표를 파악하는지 주변만 둘러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사교성이 전무하고 네트워킹 능력이 없거나 뭔가 지적 장애가 있지 않은 이상, 방향성을 잘못 잡아 애써 기울인 노력이 헛되이 썩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CEO라면 혹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지금 해양플랜트 투자의 대패착 때문에 한꺼번에 부도를 맞게 생긴(어찌어찌 헤쳐나가겠죠) 한국 조선 3사처럼 말입니다. 그 정도 요직에 있는 이가 아니고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그런 종류의 실패는 일부러 할래야 할 수가 없죠. CEO급 과오를 평사원 레벨에서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대단한 희귀성을 지닌 경우겠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운이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실패자, 무능자는 어떤 환경에도 감사하지 않고, 어떤 사소한 우연에 의한 성과도 모조리 자신의 덕으로 돌립니다. 오너의 3세, 4세가 부서에서 이런 행태를 보여도 곱게 봐 주지 않는데 하물며 아무 배경도 능력도 없는 사원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운이 좋은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예언한다." 마찬가지로 능력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과거를 윤색, 왜곡한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모든 게 남 탓인데 이런 사람한테 무슨 발전이 있겠으며 어느 조직에서 쓰임을 받겠습니까.

일본 자계서 저자분들 중에 "운"에 대한 논급을 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일본이나 우리나 아직 합리적인 의사 결정 문화가 자리잡지 않고(그래서 최악의 무능자가 요리조리 핑계를 댈 여지가 생기겠고요), 좁은 국토에 사람은 많고 경쟁은 덩달아 살인적이다 보니 "왜 이렇게 운에 의해 모든 게 결정되는가?"라며 한탄하는 이가 많아서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운 역시 머나먼 시간 전에 당신 본인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반대로 남탓 타령에 허송했는지의 냉엄한 응보"라며 일찌감치 결론을 내고 있더군요. 이 책 저자분은 아예 모든 토픽을 "운"이란 키워드 하나로 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운"이란 대상에 대해 이처럼 틀리든 맞든 절절히 사례 분석을 해 보면, 그 역시 다른 모든 난제처럼 통제의 손아귀에 들어 올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저자의 진정성이 과연 얼마나 문장에 배어 났느냐가 이런 책의 가치를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성이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정말 고민을 하고 책을 썼는지, 내가 독자라고 생각하고 정말 이 주제에 대해 절실하게 머리를 짜낸 결과 답 같은 답을 줄 수 있을 자신이 있는지는 문장을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답이 어디 매번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성실히 쓰여진 책을 읽고서는, 독자가 혼자 나중에 정리하는 시간에 자기 생각이 전보다 발전됩니다. 아주 조금이라도요. 회삿일도 마찬가집니다. 정답이나 무슨 구원의 아이디어를 내라는 게 아니라 자기 일처럼 최선을 다해서 머리를 짜내라는 건데 어차피 망한다며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직원을 누가 데리고 있으려 하겠습니까. 행운이건 불운이건 자신이 다 자초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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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책을 읽기로 했다 - 서른 살 고시 5수생을 10만 부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든 기적의 습관!
김범준 지음 / 비즈니스북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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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의 탄생은 기적입니다. 어떤 인생이라도 태어날 때는 부모님 포함 주변 모든 이들로부터 축복을 받고 태어납니다. 그러던 이들이, 왜 자라서는 질시와 모함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스스로의 존엄을 포기한 채 목숨을 끊고, 혹은 무모한 위험에 자신을 방치하여 불구가 되거나 공적 장부에 치욕스런 이름이 등록된(예:전과자) 꼴로 남는 걸까요? 또 어떤 사람은 소속한 회사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고 밀려나 거리를 헤매는 초라한 실업자 꼴이 되는 걸지요?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 1위도 이론적으로 한 해에 52권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리 값진 기록이 아닐 수 있지만, 이 책은 제법 수위권에 오래 머무른, 많은 미국인들로부터 꽤 진지한 주목을 받은 내용을 담았던 책입니다. 그 이유는 읽어 보고 나니 더 분명해졌는데요. 저자가 생사의 기로에서 "6분 동안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체험을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꼭 코마 상태에 진입했다가 깨어난 게 아니라도) 살아난 것도 관심을 집중시키기 충분하지만(그래서 사후 체험이니 뭐니 하며 알고 보면 몽롱한 꿈에 가까운 "브로큰 메모리"를 상품화하는 경우도 있죠), 그렇게 한번 "물건너 갔던" 생을 다시 이어가는 "두번째 기회"를 얻고 정신적으로나 체질적으로나 다시 태어난 사람의 간곡한 증언을 듣는 건 누구의 관심도 끌 만합니다. 위기에 몰렸다가 다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없지만(의식을 되찾는다는 보장이 설사 있다 해도), 권태와 환멸에 찌든 영혼을 가뿐하게 리프레시하고 싶은 욕구와 필요는 누구나 갖고 있을 테니까요.

여튼 저자의 말은 그겁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보니, 매일 맞는 아침이 너무도 반갑더라" 여기에서 새로운 각성이 시작하여, 일상의 모든 시간을 계획성 있게 설계하고,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하겠다는 결의로 자신의 정신이 가득차게 되더라는 거죠. 솔직히 말하면, 만약 저라면 그런 큰 사고를 겪고 대략 6일 정도, 아니 6개월이라고 하죠, 여튼 그런 긴 기간 동안 무의식으로 있다가 깨어났다 쳐도, 모르죠, 직후 6주 정도는 정말 감사하고, 다시 태어난 느낌일 지 모르지만, 이후에는 예전의 타성에 젖은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요.

그래서 저는, 베스트셀러 저자가 되고 전미 권역에 걸쳐 유명인사가 된 건 그저 죽었다 깨어난 희귀 체험을 해서가 아니라, 그 각성한 인격에 그만한 자격을 이분이 갖춰서가 아닐까, 그런 판단을 내렸습니다. 실제로 전세계 70억 인구 중 치명적 사고를 겪고 재기한 사람이 한둘이 겠습니까. 당장 우리만 해도 국회의장을 지낸 김 모 원로 정치인의 경우, 김영삼이나 허문도보다 훨씬 고령임에도 지금까지 생존해 있고, 이미 유신 시절(40년도 전이죠) 뇌졸중 발병 때문에 운신을 못하고 의사로부터 뇌수술을 권고 받았으나 극력 만류한 후 자가 재활 노력 끝에 살아났죠. 전 그게 더 놀랍고, 그런 스트로크가 왔음에도 지금까지 건강히 생존한 게 더욱 놀랍습니다.

이 책은 담은 내용도 참신합니다. 그 중 하나를 예로 들면 "기록이 기억보다 우선한다"는 건데요. 저 역시 겉으로 아주 사소해 보이는 하루하루의 로그(주제는 밝힐 수 없지만)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게 일단 남겨 두면 목표를 일정대로 이루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 체계적으로 장기적인 전략적 사항을 조망할 때도 뭔가 가시적으로 기여합니다. 절실하게 당면한 과제에 부딪히고, 필사적으로 그 해결을 도모해 본 사람이라야 이런 아이디어가 내면에서 솟아납니다. 하루하루를 떠밀리듯 사는 사람은 결국 직장에서도 밀려나는 게 필연일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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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생각에 속을까 - 자신도 속는 판단, 결정, 행동의 비밀
크리스 페일리 지음, 엄성수 옮김 / 인사이트앤뷰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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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에 저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어느 교수님의 저서, 그리고 토론집에서 그런 주장을 발견한 적 있습니다. "임금에는 생활 보장의 요소와 근로 대가의 요소 모두가 포함된다." 지금은 글쎄요 이게 당연한 상식이 된 세상일지 모르겠으나 과거에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의 정당성이 어디까지, 또 어디에서 근거를 마련할지 한창 논쟁이 진행 중이었기에 이게 핫한 이슈였습니다.

현재 근로관계(고용관계)의 유연성 이슈를 놓고서는 여전히 사회 각 계층의 이해를 놓고 대립이 진행 중입니다. 사용자와 노동자는 기본적으로 대등한 관계에 서야 한다며 "함부로 남용하는 해고권"은 철저히 법 밖으로 퇴출되어야 한다는 이들도 있고, 반대로 생산성의 극대화와 보다 많은 이들의 노동 기회 마련을 위해 "자유로운 해고"가 차라리 불황 타개의 돌파구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일부 어르신들이 향수를 갖고 있는 "평생직장"의 신화는 이미 깨어져 지구상 어디에서도 구현되지 못하는 실정이며, 어차피 이 신화도 노동자측에 마냥 유리한 이념이라기보단 사용자 측의 시혜적 스탠스라든가 자본 측의 철저한 주도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들어가는 패러다임이므로, (부담스러워할) 사용자나 (인식이 바뀌고 현실을 직시해야 할) 노동자나 모두 만족 못 할, 언제 깨어져도 깨어져야 할 환각이었음은 분명합니다.

"동맹(alliance)"은 여러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나치 독일을 격멸하기 위해, 기존에 완전히 다른 이해관계를 지녔던 여러 국가들이 맺은 군사 협력 관계도 이 단어로 표현했으며(Allied Forces), 우리 역사에서는 드물게도 자리 보전이 위태로웠던 공양왕이 느닷 권신 이성계에게 제의했던 게 군신(君臣) 간의 "동맹"입니다. 물론 공양왕의 측근들은 "천지가 개벽한 이래 군신의 동맹 같은 해괴망측한 일은 없었다"며 격렬히 반발했고, 이성계 측에서는 이 동맹이 장차 새 왕조의 개창에 큰 걸림돌이 될까 우려한 끝에, 이 제안은 얼마 안 가 무마되고 우리가 아는 바 새 체제의 시작이 진행되었지요.

거창하게 고사(古事)를 거론한 건, 전통적인 노사관계가 현재 전세계에 걸쳐 패러다임적 도전을 맞는 요즘, 어쩌면 기존 시스템의 모순과 비능률 요소를 일거에 걷어낼 혁신이 이 "얼라이언스"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 책을 읽고 난 후 들어서입니다. 사실 이런 식의 고용 형태는 (전통 노사관계가 위기를 맞았다는) 요즘에서야 대두한 게 "전혀" 아닙니다. 이를테면 로펌은 일찍부터 주종 관계가 불분명한 파트너십 형태이며, 소위 "생협" 조직에 몸 담는 분들은 애초에 누가 누구에게 월급을 주는지도 관계 파악이 애매한 편입니다. 이런 평등한 생산 조직 참여 패턴이 마냥 바람직하다는 건 아니고, 이런 조직이 절도(節度)와 기강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성원 개개인의 자질과 모럴이 일정 수준을 넘어야만 합니다.

애플이나 구글의 경우 직원 개개인이 대등한 입장에서 아이디어를 안출하고, 충분한 자율이 부여되어도 업무의 질이 떨어지지 않기에 그런 형태의 운용이 가능한 거죠. 이 책은 주로 실리콘 밸리의 예를 들고 있는데, 이런 형태의 느슨한 듯하면서도 고도의 업무 효율, 유연성을 유지할 수 있는 조직이 되려면, 역시 균질한 인쟁 pool 사이에 자율적이면서도 꽤 유기적인 네트웍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부정과 정실이 개입해서도 안 되며, 투명성과 업무창의성이 자발적으로 유지되어야 "얼라이언스"가 존립 가능하다는 자각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출신 대학을 놓고 어떤 카스트 구조니 뭐니 하면서 이의 강제적, 전면적 해체를 주장하기도 하는데 일단 사적인 조직에 대고 국가적 강제를 들이대는 자체가 자율과 민주주의 원리의 중대한 위반입니다. 뿐만 아니라 학창 시절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인맥과 평판이야말로 고과의 기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효한 조직의 건설과 점검, 지속적인 작동을 위해 생각외로 중추적 기능을 행사한다는 결론, 이 책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었습니다. 비공식적으로 아이비리그 출신들이 미국 주요 정부 기관을 이끌어 나가는 현실에 비추어 보아 이는 이미 유효함이 검증된 모델이기도 합니다. 조직의 틀을 비공식과 공식 두 가지 프레임으로 묶어, 상황에 따라 A 혹은 B를 유연히 끌어댈 수 있다는 논리가, 여태 경색되고 침체된 국면이었던 경영 이론 중 조직론에 아주 신선한 활기와 충격을 줄 듯합니다. 이론을 떠나 우리처럼 동문회 네트워크가 촘촘히 구성된 사회에서 적용해 보기에 대환영인 그런 시론이기도 합니다. 현실을 외면하고 비뚤어지고 종래의 틀에 고착된 사고 방식으로는 좀처럼 수용하기 힘들, 멋진 아이디어로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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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가의 질문
박영준 지음 / 북샾일공칠(book#107)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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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건 신(이라고 불려야 마땅할 극소수의 인간)에게나 가능한 과업입니다. 무에서 유는커녕, 유에서 유를 만들어내기도 어렵고, 어쩌면 유에서 약간의 유를 까먹지나 않고 유지한다는 것도 요즘 세상에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지나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가진 돈을 얼마나 잘 굴리냐의 게임입니다. 돈을 굴리겠다고 빌려갔으면 이자를 치러야 하고, 물건이나 시설을 사용하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봉건사회와 달라진 면이 있다면,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개인들이, 그저 현상 유지나 하며 유유자적할 여지를 거의 용납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대개 농민들에게 가혹한 지대와 부역이 착취되었던 배경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생명, 재산, 신체의 자유)을 지켜주는 대가(對價)가 있어야 하지 않냐는, 보호자를 자처하는 영주들이 내세운 명분이었죠. 안정된 시스템의 영속이 전혀 내일을 담보할 수 없던 세상, 언제 외적이 침입해 애써 가꾼 소출을 잿더미로 만들고 처와 자녀의 안위를 해칠지모르는 상황에서, 어쩌면 차변과 대변이 그럭저럭 균형을 맞추는 거래였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이러던 무법천지가 지금 개명된 세상을 맞이하여 저처럼이나 안정을 찾은 게 기적일지도 모릅니다. 기록되지 않은 부분은 물론, 기록된 부분만 살펴 봐도 어떻게 이런 미친 폭력과 혼란상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문명이 버텨왔는지가 놀라울 뿐입니다(서로 싸우다가 일찌감치 다 자멸해 버린 게 아니라). 그러니 테러리스트라든가, 국가 간 무력 긴장이 고조되는 국면이 있어도, 지난 수천 년의 역사상에 비춰 볼 때 이만큼이라도 평화가 유지되긴 하고, 간헐적 혼란이 발생한다 쳐도 불가피한 면이 있겠거니, 혹 내가 작은 힘이라도 보태어 모두가 편해지는 길에 조금이라도 빨리 다가설 수는 없겠는지, 건설적 사유와 고민을 해야 그게 인간의 도리겠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비즈니스와 일상 경쟁의 장(場)도, 벌써 평온한 영역나눔이나 상생의 판이 실종된지는 오래입니다. 사방천지가 다 레드오션이며, 정코스를 걸어서 지갑을 채우려는 생각은 딴 우주의 생명체나 먹을 법한 한가한 발상입니다. 블루 오션은 패러다이스가 아니라,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생명을 걸어야 할 험난한 미션일 뿐입니다. 도달한다고 끝이 아니라 그 텃밭을 지키는 데에도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처럼 경쟁이 치열한 현황에서, 과연 누가 살아남고 승자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을까요?

안정적으로 자신의 진로와 수입원을 지킬 수 있었던 미온적 경쟁만이 진행되던 때에도, 구태여 큰 모험을 하며 미개척의 시장을 넘보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무리수를 둬 가며 분수에 넘는 과한 투자를 일삼는 것도, 지난시절 그런 선구자(...)들이 대성공을 거둬 그 자녀들에게까지 거대한 부와 자산을 물려준 사례를 보고 자극을 받아서인 면도 있습니다(근본적 이유는 그런 개인적 팩터보다, 자본주의 자체의 무한 경쟁 유발 구조 때문). 억을 가진 자는 조를 내다보는 게 당연한 생리이죠.

제로원이란 말 그대로 "제로"에서 "원"을 만드는 도약의 첫단계를 지적하는 개념입니다. 어떤 이들은 "제로에서 원을 만드는 게 아무리 놀랍다고 해도, 이미 원헌드레드를 가진 이가 투헌드레드로 가는 게 훨씬 쉽고, 결과면에서 200배의 차이가 나지 않는가? 물론, 무한대의 격차를 유한한 수로 줄였다는 게 대견하긴 해도." 처럼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맞긴 한데, 저자의 관점대로라면, 이런 사고야말로 현재의 덫에 걸려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고착적 시야의 맹점입니다.

사물은 어떤 특정 지점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추세라는 게 있습니다. 현재의 지점이 높아도 구조가 부실하고 내면이 위태롭기에, 급강하의 곡선을 탈 운명만 남은 경우가 있고, 맹렬히 exponential curve를 타며 상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뉴튼의 업적은, 거리(s)만 재고 끝났던 과거와 달리, 그 거리를 장기간에 걸쳐 축적한 속도(v)라는 인자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아냈으며, 그에 그치지 않고 다시 속도를 쌓아올리는 가속도(a)의 속성까지 파고들어 실체를 규명했다는 것입니다. 리먼 사태때도 추세를 일찌감치 주목하여 대재앙의 도래를 예측한 이들은, 손해를 최소화하며 파국을 남들보다 미리 떨어내었을 뿐 아니라,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이들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챙기기까지 했습니다.

제로원의 breakthrough를 한번 맛을 본 경제주체는, 그 추세를 이용하여 타 분야에서도 남들을 훨씬 상회하는 성과를 거둡니다. 에컨대 이건희씨 같은 경우,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의 기업이 한국 내에서조차 2인자에 머물렀다는 냉엄한 사실을 우리는 종종 까맣게 잊곤 합니다. 시야가 국내에 머물러 있으니, "그때 2등하던 이들이 지금은 1등하는 것 아냐?"처럼 안이하게 정리하고 마는 건데,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뭐 고작 그렇게 본다고 쳐도, 알고보면 20등과 10등의 차이보다, 1등과 2등의 실력 차가 더 큰 법입니다. 20등은 바짝 분발하면 3등도 4등도 할 수 있지만, 2등은 가진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도 1등을 추월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로 시야를 넓혀 보면, 등수 안에도 없던 기업이 어느 시점부터 탑텐을 오르내리는 현상은, 예컨대 1980년대에 활약하다 지금은 이세상 사람이 아닌 몇몇 일본 기업인들이 목도라도 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있어서도 안 될 일"이라며 쇼크사로 두번째 죽음을 맞이할 만한, 극히 예외적인 prodigy입니다. 우리는 남의 성취에 대해, 그저 배아픈 마음에 아예 실체를 외면하고 너무 가벼이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진정한 제로원 모범 사례는, 현상에 얼마든지 안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고, 모든 걸 걸고 다른 차원의 도약을 성공시킨 이건희 같은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한국에서 넘볼 자가 거의 없는 재벌가의 2세였다는 점을 상기해 보십시오.

그렇게 한번 몸에 밴 체질과, 영감을 상시화하는 능력은, 이제 다른 분야에 전이되어 폭발적 생산력을 추동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생의 단 한순간이라도 체험을 해 본 이라야 공감할 수 있는 주문들입니다. 전에 겪지 못했던 성취를 해 내고 온몸이 전율하는 느낌은, 다시 그 느낌을 찾기 위해서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목표에 온전히 정진하게 만듭니다. 조직에서 성과를 내고 인정을 받으며 만인의 부러움을 산 채 단상에 오르는 나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경쟁에서 승리한 자만이 맛볼 수 있는 원초적 쾌감은, 정글에서 전력질주하여 경쟁자를 따돌리고 맨 먼저 먹잇감의 따스한 육질을 물고 입가의 피를 핥는 사자의 긍지에나 비길 만합니다. 이미 백을 가진 자라 해도, 편안히 200과 300을 바라기보다, 뜻밖의 미개척지에 알몸으로 달려들어 보는 편이, 장기적으로 자신의 밑천을 더 굳건히 지킬 수 있는 길입니다. 공격은 최상의 방어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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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기 인간관계론 (반양장)
데일 카네기 지음, 최염순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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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천금의 가치를 지닌 생각도, 효과적인 화술을 통해 상대에게 전달하지 못하면 그런 고귀하고 유용한 생각이란 처움부터 부재(不在)함만 못합니다. 현대는 바야흐로 소통의 시대라고 하나, 이미 이 시절부터 데일 카네기는 그 소통의 비중과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대중에게 깨우치려고 했던 거죠.

총 15장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각 챕터가 모두 실용적이고 효과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으며, 실전에서 잠시라도 잊어선 안 될 교훈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개인 사이의 대화(물론 비즈니스 상대일 수가 많습니다)"와,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 연설", 이 둘로 크게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경제 활동을 하는 이에게 필수적 생존 스킬이며, 후자는 사람에 따라 큰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직업적으로 많은 이들 앞에 나서야 하지 않더라도, 예컨대 회사에서 높은 분들을 상대로 PT를 할 때에도, 이 책에 나와 있는 원칙들은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아니, 잊어선 안 될 원칙들이 전부라고 해도 됩니다.

데일 카네기는 링컨의 사례를 여러 군데에서, 거의 쉼 없이 인용하고 예거합니다. 그만큼 링컨이라는 인물의 자취가, 데일 카네기라는 이 저자, 그리고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영향을 끼친 바가 컸다는 뜻입니다. 링컨은 이 셋째 권, <성공대화론>에서도 예외 없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는 일단 메모를 중시하는, 몸에 밴 습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전(事前)의 준비란 누구에게도, 또 어떤 목표를 위해서도 필수로 요구되는 과정입니다. 즉흥의 연기, 수행이 언제라도 가능한 사람은 천재이겠으나, 그런 사람은 애초에 극히 그 수가 드뭅니다. 아무리 능수능란한 사람이라 해도 사전의 준비는 필요합니다. 메모는 이 연설에 있어 사전준비의 필수 요소였습니다.

그런데 메모만 평소에 열심히해 둔다고 반드시 실전 상황에서 훌륭한 수행이 보장될까요? 링컨은 평소에, 즉 실전에 임박해서가 아니라 평소부터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정리하고 다듬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준비된 연설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 역시, 이런 그의 깊이 사색된 상념과, 이를 타인에게 정확하고도 간곡히 전달하려는 그의 성심 성의가 반영된 결과물이었습니다.

이 제3권이 아닌, 다음 편 제4권에 나오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 교과서에서까지 필수로 공부하게 하는 명문 중 명문인 이 게티스버그 연설이, 과연 당대, 아니 게티스버그 싸움터 바로 그 현장에서, 연설 당일의 청중들에게 얼마나 큰 호응을 받았을까요? 데일 카네기가 전해듣고 연구한 바로는, 요즘 말로 "분위기가 싸해지는" 실패작이었다고 합니다. 왜인가? 당대의 일반적 관행이었던 긴 길이의 상투적 표현 가득한, 기독교적 훈계와 엄숙함으로 가득한 연설이 아니고, 담백하고 짧은 내용이었기 때문이죠. 당시 청중들의 기준으로는 "뭐 저런 성의 없는 연설이 다 있어?" 정도였을 겁니다.

이 사실은, "효과적이고 감동적인 소통"의 실천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잘 증명해 주는 일화라고도 하겠습니다. 나의 진심과 깊은 고민을 가득 담았는데, 막상 그 현장에 모인 이들에게는 별 공감을 자아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저 실패작으로 비난받아야 할까요? 데일 카네기는 이애 대해, 우리 식으로 말하면 "진인사 대천명" 정도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최선을 다했으니 그만"이라는 자기만족적 합리화는 아닙니다. 정당한 노력을 투입하고 나의 진실성을 담은 소통은, 당대 아니면 후대에라도 올바른 평가를 받는다는, 그만의 긍정적, 실용적 가치 중시의 견해에 결론적으로 부합한다 하겠습니다. 이 책에는 2장, 10장 등 여러 곳에서 이 링컨의 사례가 원용되고 있습니다.

자신감이 언제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왜 타인 앞에서 분명한 자기 의사를 전달하는 데에 실패하는가? 로이드 조지와 같은 명연설가도, 정치 초년생 시절, 비유적 표현이 아닌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혀가 입천장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연설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일단 혀가 풀리고 분위기에 적응하면, "하던 연설을 중단하느니 차라리 총을 맞겠다" 고 할 정도로, 대규모 청중 앞에서 자기 말을 열심히 전달하는 경험은 마약처럼 매혹적이라고 합니다. 시작이 반인 셈인데, 그 시작을 상쾌하게 떼기가 그 무엇보다 어렵습니다. 데일 카네기는 "심사 숙고가 자신감을 만들고, 자신감이야말로 멋진 소통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결론냅니다.

인간관계의 기본 원칙이 이 연설과 대화에도 적용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왜 청중들이 연사의 말에 하품을 하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거나 주의를 흐뜨릴까요? 그것은, 연단에 올라서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말하는 이가, 자신들의 관심사와는 전혀 무관한 주제를 갖고 자기만의 소통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청중을 매혹하려면, 청중이 가장 관심있어 하는 주제와 소재를 정면으로 부각하고 다뤄야 합니다. 좋지 않은 사례이긴 하나, 히틀러 같은 자가 독일 국민들을 그토록 매혹한 것도, 그들의 좌절에서 비롯한 불건강한 욕구와 갈망을 정확히 꿰뚫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서 예로 든 링컨의 연설도, 당시 기준으론 너무 짧다는 이유만으로 현장의 청중에게 반감과 실망을 유발했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말할 것도 없고, 시대를 관통하는 청중의 욕구란 "길지 않고 요령 있는 연설"이라는 게 카네기의 주장입니다. 흥미롭게도 카네기는 사도 바울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1장에서 그는 성공적인 소통의 예로 예수의 산상 수훈을 거론하기도 하는데, 물론 그가 종교적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당대 독자에게 가장 쉬운 예시를 들려는 의도였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때로 독설가의 면모를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당신의 가르침이 생소하니 우리에게 설명을 해달라"는 대중의 요구에 그가 "당신들은 미신적입니다."라며 대뜸 면박부터 주고 시작했던 행적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데일 카네기의 원칙에 부합하는 행동은 아닙니다. 그의 가르침은 언제나 "상대방의 감정과 자존을 공연히, 아니 어떤 경우에도, 자극하지 말라"는 걸 상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이 행동은, "짧게, 현대 단위로 2분 정도의 시간 안에 연설을 끝냈다"는 장점 때문에,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습니다. 물론 그의 가르침에 야유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으나, 짧은 시간 덕에 청중들은 주의를 최대한 집중할 수 있었고, "그게 다는 아닐 터이니, 당신의 다음 가르침은 무엇인가?" 라는 일종의 앵콜 요청을 받을 수 있었다는 거죠.

이로 미루어 볼 때, 대화와 소통, 그리고 강연의 요체는, 상대와의 공감과 소통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왜 대화에 약한가? 상대의 마음과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어떤 이들은 성공하는가? 그는 상대의 감정을 정확히 포착해 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성이다 원칙이다 합리성이다를 냉정히 내세우기 전, 상대방의 감정이란 요소를 먼저 생각하고 고려해 보라"라는, 데일 카네기의 일관된 원칙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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