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0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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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은 그저 말을 아름답게만 꾸미는 기술이 아닙니다. 정확하고 간결하게 나의 의사를 전달하면서도, 듣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의 의견에 최종적으로 감복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 플라톤이며, 그 플라톤의 스승이 소크라테스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시대는 거짓을 진실로 윤색해 대는 기술에 능했던 소피스트가 큰 돈을 벌며 사회에 영향을 행사했던 무렵이었습니다. 이러니 사회에 불신 풍조가 만연했고, 스승이라는 이들이 제자에게 고작 서 푼짜리 거짓을 레슨하면서 연명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말고도 <수사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한 이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수사학들이 번지르르한 요설을 강론하는 테크닉의 열거에 그쳤고, 이후의 수사학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 그 아류에 그쳤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책이 갖는 의의는 무겁고도 넓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수사"를 넘어 우리가 일상에서 내뱉는 말의 의의와 당위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라틴어로 된 사람의 학명 중 하나는 "호모 로쿠엔스"입니다. 말하는 존재인 인간은 말로서 비로소 자신의 존엄을 표현하고 완성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말"을 통해, 개인이 사회에서 존중받고 나아가 사회에 공헌하는 존재가 되는 방법을 궁구하고 성찰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미워하고 한때 큰 다툼을 벌인 적수를 떠올릴 때, 항상 괴로움을 느낄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고 하며, 오히려 "큰 쾌감을 느낀다"고까지 단정합니다(p75). 물론 그 일을 겪던 당시에는 아마 큰 블쾌감이 남았다든가, 찢어지는 듯한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헌데 세월이 지나 그저 돌이켜 보는 회고의 대상이 된 후에는, 거꾸로 그 일을 떠올리며 맹렬히 상대를 질타하고 저주하는 와중에 기쁨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을 통해 불순한 감정을 씻어내고 설욕의 의지를 채우는 과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찌질한(?)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말이 갖는 배설과 정화의 기능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드라마 <스토브리그>에 보면 "그러면 단장님이 돌아오시나요?"라는 (답이 뻔한 질문에) "아뇨, 하지만 나중에 '좋은 단장이었지'라며 추억을 할 수 있게 되죠."라고 답하는 권경민 배역의 대사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해당 대목에서 인용한 구절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온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책 하단에 각주로 설명되는데, 현대지성 고전 시리즈의 상당 권을 번역하시는 박문재 선생님의 정성 들인 문장을 통해서도 우리 독자들은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위대한 지성이자 스승이었던 공자는 "소인배와 여자는 상종할 대상이 못 된다."고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기심이나 중상 모략에 대해 단죄하는 태도에 그치지 않고 그 본질에 대해 자세히 분석합니다(p146). 그의 통찰은 놀라운데, 이에 따르면 "우리는 남의 장점과 성공에 대해 시기하면서 어떤 유형적인 이익을 꾀하는 게 아니라, 남의 장점 그 자체를 불편해하고 괴로워한다."는 것입니다. 장점이 있는 경쟁 상대를 밀어내면 물론 내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등 어떤 가시적인 이익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가망이 없어도, 즉 남을 미워하고 헐뜯는 행위, 표현 자체가 이미 쾌감을 갖다 주며, 보통 사람의 마음에는 남의 장점 그 자체가 이미 큰 상처를 안기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헌데,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하필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일까요? 해답은 뒤에 나옵니다. 당신이 혹 배심원 앞에서 어떤 효과를 노리고 무슨 말을 할 때,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배심원의 시기심을 자극하는 언사를 발설한다면, 당신이 애초에 꾀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뿐이라는 걸 저자는 다소 짓궂게도 지적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고전의 (당시 기준으로) 실용서적인 성격도 엿볼 수 있습니다.

p153에 보면 장노년과 대비되는 "청년"의 특성에 대해 논합니다. 시대가 수천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통성은 그리 많이 변하지는 않았기에 이런 구절들은 지금 읽어도 크게 공감이 됩니다. 그에 따르면 청년들은 세상 경험이 많지 않기에 악의보다는 선의를 갖고 행동하며 희망으로 넘치고 쾌활하다고 합니다. "삶 속에서 아직 굴욕을 당한 적이 없고, 자신의 의사에 반해 무엇을 해 본 적이 없기에 희망에 가득차 있다"는 말도 백 번 타당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 페이지에 주목해 보십시오. "청년이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남에게 해악을 끼치려는 이유가 아니라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고 남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한 동기이다."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언행이 합리화될 수는 없고 청년이든 장노년이든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건 자명합니다. 다만 저자는 "청년의 악행은 그저 유치한 우쭐거림에서 비롯할 뿐 어떤 본질적 악의가 있지는 않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을 겁니다. 또, 청년은 기지와 재치를 좋아하는데 이는 그것이 "우월감을 표현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도 박문재 션생의 박학다식함이 돋보입니다. 각주를 보시면 "원문은 '카쿠르기아 때문이 아니라 휘브리스 때문이다'라고 간략하게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이 문장은 역자 박문재 선생의 사실상 강연이나 다름 없고, 우리는 원문의 난해함을 역자의 설명 덕에 자세히 풀어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된 번역, 또 고전 원어(여기서는 헬라어, 즉 고대 그리스어)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역자의 번역이 이런 데서 돋보이는 거죠.

"수사학"이다 보니 우리가 현재 고전 논리학의 핵심으로 알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법칙에 대해서도 소개와 논증이 자세합니다. 아니 이 부분은 그가 창시했다고 해도 될 만큼 역사가 오랜 것들이죠. 삼단논법, 즉 대전제, 소전제, 결론으로 이어지는 논증의 구조는 아마 이 분야에서 가장 오래된 논리학의 업적이겠습니다. 이를 다시 수천 년 후에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가 연역법으로 집대성한 바 있습니다.

이 책에서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략삼단논법"에 대해 자주 논급합니다. 형식적으로 "삼단"이 명확히 드러난 것은 구태여 분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일상 언어에서, 저 대전제와 소전제 중 어느 하나가 생략되었는지 아닌지를 판별할 때입니다. 만약 생략이 되었다면 그 논증은 유효하나, 그렇지 않고 엉뚱한 문장이 (명시적으로건 암묵적으로건) 끼어들어갔다면 이는 이른바 "논리의 비약"이 됩니다. 이를 잘 살피는 건 나의 주장이 더욱 강력한 설득력을 갖게 하는 데 도움이 되고, 또 상대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논파하는 데도 일정 구실을 합니다.

수천 년 전의 위대한 지성이, 우리 후손들이 기를 쓰고 공부하거나 공부를 해도 습득하기 어려운 지혜의 본체를 낱낱이 해부해 두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서양 고전은 결과가 새로워서가 아니라,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를 그 이른 시기에 철저히 분석해 두었다는 사실 때문에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고전을 읽고, 사람의 말 그 설득력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나의 이성과 말솜씨는 과연 보편 타당한 법칙에 기대어 작동하는지를 진지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을 그저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정신이 맑고 건강하게 유지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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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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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의 신작은 언제나 독자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여태 우리가 봐 오던 일상의 풍경과 흔한 루틴 속에서도 선생님은 비범한 흐름과 독창적인 의미를 짚어 내십니다. 이어령 선생의 담론에 대해서 모든 한국의 독자들이 찬사를 보내는 건 아닙니다. 어떤 이를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억지라며 비판하기도 하죠.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제게 든 생각은, "그런 비판이 딱히 근거를 갖춘 게 아니라, 자신이 보지 못한 걸 선생이 날카롭고도 깊게 캐치했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질투심의 발로"란 것이었습니다. 이 책 에서도 선생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소재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그 끄집어낸 이야기들은, 평범한 우리가 전혀 감을 못 잡던 기발하고 신기한 담론들입니다.

혹 지구 반대편의 낯선 문명을 두고 짚은 의미라면 어차피 내가 모르는 동네니 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텐데, 저분도 나도 똑같이 몇 십 년을 두고 지켜 봐 오던 것에서 나만 못 보고 지나친 걸 저분이 지적하니 질투심이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석학과 일반 독자가 보는 눈이 같을 수야 물론 없겠고, 선생이 거론하시는 소재들이 그만큼이나 일상적인 것들이기에 더욱 "나는 왜 못 봤나 하는 불편한 마음(?)"이 커지는 것이겠죠. 이 책에는 그만큼 평범한 일상과 전통 풍속에서부터 한 올 한 올 끄집어 내 엮은 거대한 의미의 담론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p107에는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ㅎㅎ 전엔 몰랐는데(몰랐던 제가 바보겠고요) 선생님 같은 석학께서 참 어지간히 국뽕이시라는 점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국뽕은 국뽕이신데 인문의 깊이와 근거를 갖춘 국뽕이니 더이상 "뽕"도 아닌 셈이지만요. 왜 김연아 선수가 아사다 마오보다 잘 할 수밖에 없는지를 "다른 사람들이 거론하는 사주"를 들기도 하시고, 선생 자신만의 논거도 드시는데 사실 김연아 이야기라기보다는 선생 고유의 인문 담론입니다(본래 인문이 이런 것이지요). 인생을 떠받치는 네 가지 기둥이 물론 무작정 맹신할 건 아니지만 여튼 선생의 설명을 거치면 새삼 "아 그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삼신 할머니와 배꼽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이 책은 이어령 선생의 독자적인 담론 말고도 다른 민속학자, 인문학자들의 주장이 여럿 인용되고 확대됩니다. 이어령 선생 정도면 자신만의 주장과 착상을 도도히 펼치시고 다른 데 잘 눈길을 안 주실 만도 한데(좋은 건 아니죠) 그 연세에도 후배 학자들의 책과 논문을 이처럼 많이, 자주 찾아 읽으신다는 사실 자체가 또 놀라웠습니다. 삼신 할머니, 석 삼(三)이라는 글자에 "삶"이 들어있다는 주장은 물론 다른 학자분 주장의 인용이기는 하나 선생의 확대 해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듯도 했습니다. 물론 "배꼽" 이야기는 한국 고유의 전통만은 아니죠. 전 개인적으로 세계의 배꼽 운운하는 예전 고 이윤기 선생 책을 읽은 적 있는데 그리스나 인도 등에서도 널리 신봉하는 전통입니다.

기저귀에 대한 담론은 선생께서 일찍이 여러 칼럼이나 다른 책에서도 거론하신 바 있습니다만 이 책에서 총정리가 된 듯합니다. 서양에서는 산모와 신생아를 가급적 분리시키는 문화인 반면, 우리는 "업어서 키운다"는 말이 있을 만큼 엄마와 아기가 밀착되어 생활합니다. 아기가 엄마의 젖을 빠는 힘은 생각 외로 강하며, 엄마 역시 아기에게 젖을 물릴 때 별개의 호르몬이 나옴도 지적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여럿의 의학 논문과 연구 결과가 인용되는데 주장의 당부를 떠나 책을 이런 자세로 저술하신다는 자체가 경이로웠습니다.

다만 예컨대 서양, 그 중에서도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서 영아 살해를 가벼이 여긴다는 말씀에는 100% 동의하긴 어려웠습니다. 물론 영아살해죄가 일찍부터 유럽에서 고안, 규율된 게 만연한 살해 풍조의 반영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만 사실 한국전 당시 고아의 폭증에서 보듯 이런 문제에서 한국 역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죠. 여튼 어려서부터 엄마와 유난히 밀착해서 자라는 한국의 아이들이 커서도 풍부한 감성을 갖게 되고 문화 예술에서 독보적 재능을 발전시킨다는 결론(명시적으로 그 말이 나온 건 아니나 결국은?ㅎ)은 고개를 끄덕이게도 됩니다.

p175에 보면 "조이다"와 "매다"를 대비시킨 한국, 일본의 문화 차이에 대한 상세한 담론이 있습니다. 사실 이런 파트야말로 선생의 전문 분야, 아무도 따라 못 할 독보적인 사고라고 할 만합니다. "도리 시마리 야꾸"라 읽는 取締役(취체역)이란 단어가 있는데 일제 잔재지만 해방 후에도 널리 실무에서 썼습니다. 책에서는 CEO라고 하시는데 엄밀히 말하면 "감사"입니다. 전 저 단어의 일본어 발음이 "도리 시마리 야꾸"인 줄 처음 알았고, 두번째 어근 諦자가 "조이다"란 뜻인줄도 처음 알았기에 이 대목 읽으면서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발굽 蹄의 가차로 쓰고 비유적 의미로 살핀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더군요. 여튼 일본식으로는 "잡아 죄치다"란 의미이며, 한국어의 "매다"하고는 국민성이 너무도 다른 게 극명히 드러나는 대목 중 하나라는 결론이었습니다.

p101 근방에선 출산의 아픔에 대한 말이 나옵니다. 남성이라고 해도 어지간히 둔한 사람 아니고선 여성만이 겪는 출산의 고통이 어느 정도는 짐작이 되며, 이 책에서는 여러 논거를 인용하며 독자에게 그 절절한 감각을 (지면에서 허옹하는 한 최대로) 전달합니다. "좁은 문을 통과헤야..."라는 성경 말씀도 인용되고, 좁디좁은 그 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생명을 얻는 그 과정에 대한 묘사가 가슴을 울립니다.

책 후반부에는 유독 우리 나라에만 있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한 살을 먹는" 문화에 대한 지적이 있으며, 재미있게도 책 앞부분에는 요즘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는 "태명 문화"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선생님 책에서 항상 느끼는 건, 젊은이들 사이에서의 유행, 감각, 문화 같은 데에 선생이 항상, 그 고령에도 불구하고 귀를 쫑긋 세우시고 이처럼 책에 반영을 하신다는 점입니다. 반면 꼰대(선생님보다도 훨씬 젊은)는 대개 젊은이들 문화에 대한 무관심, 무지가 큰 벼슬인 줄 착각한다는 게 공통점이죠.

생명만 가졌다고 다 사람인 게 아니라, 엄마 품에서 적어도 삼 년을 품기고 그 살가운 정성을 다 묻혀 내야 비로소 "사람", 그 중에서도 "한국 사람"이 된다는 게 선생의 결론입니다. 안 그러면 사람이 채 못 된 채 "생쑈"를 하는 반편이로 떨어진다는 거죠. 여기서 선생은 공자의 어록(이자 우리 민족이 오랜 동안 경전으로 모신) <논어>를 인요하여 재아와 그 스승 공자가 "계급장 떼고 맞장뜨는" 장면을 인용합니다. 말씀은 백 번 맞으나 저는 항상 의아했던 게 왜 공자쯤 되는 대스승이 면전에서 제자를 깨우치지 않고 마치 뒷담화하듯 마무리를 지으셨냐는 거죠. 과연 공자님이라서 면전에서 차마 싫은 말씀을 못 하신...?

세계에서 엉덩이에 반점을 갖고 태어나는 민족이 우리만인 줄 알았으며, 소설가 한강의 십 몇 년 전 작품 <몽고반점>도 이를 소재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선생은 꼭 그렇지가 않으며, 다만 삼신할미가 엉여 세상에 나가라는 뜻으로 후려갈긴 흔적이라며 의미를 부여하는 건 우리뿐이라는 취지이십니다. 삼신할미는 유독 한국에서만 큰 위상을 갖는 독특한 신화적 존재인데, 우리가 이런 존재를 무속과 전통에서 섬기는 이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p305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푸르스트"라고 나오는데 "프루스트"가 맞겠네요. 여튼 프루스트의 소설 유명한 서두를 통해 서양 아이들은 "어머니와 헤어지는 데서 얻게 되는 스트레스"를 어린 나이에서부터 지각하는 반면, 한국 아이들은 그런 게 없다는 겁니다. 맞는 말씀이긴 하나 과연 그게 순기능만 있는지는 ㅎㅎ 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아무튼 책은 매우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에는 그저 맞는 결론, 정보만 습득하는 게 아니라 저자의 생각을 비판적으로도 따져 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성숙시키는 데에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선생님처럼 익숙한 우리 전통의 소재를 놓고 이처럼 흥미진진한 담론을 펼치는 책을 읽노라면, 채 당부를 따지기도 전에 그 흐름에 빨려 들어간다는 게 신기합니다. 나라가 어려운 국면에 놓일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근본을 살펴 따지고 우리를 이 먼 미래에까지 살려 놓은 조상들의 깊은 얼과 배려(이게 곧, 비유적 의미에서의 "모태"입니다)를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이 책은 또한 형식, 편집이 독특합니다. 마치 아포리즘 모음이나 시처럼 짧은 단락이 구분되었는데 내용상 물론 죽 이어지는 줄글이지만 주(note, 註)가 각 단락 밑에 달려 있고, 이런 형식상의 배려 덕분에 마치 서사시를 읽는 듯 즐거운 착시를 부릅니다. 여튼 이런 파격도 서슴지 않고 독자 앞에 베푸는 저자의 젊디젊은 상상력과 혁신 정신도 엿보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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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의 완벽한 탈출 하늘을 나는 조랑말 케빈의 모험
필립 리브 지음, 사라 매킨타이어 그림, 신지호 옮김 / 위니더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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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케빈의 활약상을 지켜 본 독자들도 솔직히 말해서 그의 행보를 마냥 마음 편하게 구경하고 동참한 건 아닙니다. 이 녀석은 뭔가 사람 마음을 아슬아슬하게 만드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밉상은 아니고 우리는 여튼 케빈을 끝까지 응원하고 감정 이입하게 됩니다. 케빈이 사람 마음을 이끄는 이런 비결이 무엇일지 저는 이번 편을 보고 어느 정도 알게 되었네요.

엄마, 버즈, 맥스, 데이지, ... 이들이 케빈을 대하는 태도? 혹은 살가움? 이런 건 조금씩 차이가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닮은 구석도 하나는 아주 뚜렷하죠. p24를 보면 엄마의 말,

"우리는 케빈을 팔지 않아요."
가 있습니다. 이 말에 저는 약간 뭉클해지기도 했는데, 그렇죠. 우리 케빈은 누군가가 그 존재를 대신할 수 없는 녀석입니다. 어떤 뜻에서건 "얘를 판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늘을 나는 말, 그 심상의 원천은 페가수스입니다. 페가수스는 페르세우스가 아끼던 천마인데, 신으로부터 이 날개 달린 말을 선물 받은 후 그는 인간의 자식(반인반신)으로서 할 수 없던 과업까지 멋지게 해 냅니다.

어찌 보면 이 조랑말 케빈은 징구에게 찾아온 도라에몽 같기도 합니다. 혼자 힘으로는 그저 무력하고 때로는 또래보다 더 무기력한 느낌에 젖는 건 사실 어린이때 대부분의 아이들이 갖는 공통적인 기분일 겁니다. 그런 때에 초능력 비슷한 걸 가진 한 어깨를 빌려 주어 문제를 해결하게 도와 주는 친구. 이런 존재를 두고 돈 몇 푼, 혹은 무슨 대가를 치르건 간에 "판다"는 건 있을 수 없죠.

"누가 알겠니? 지금 이곳에는 온갖 종류의 괴물들이... "(p58)

그렇습니다. 도라에몽이 찾아 도와 준 진구의 세계에도 그저 착한 사람들만 사는 게 아니었죠. 아니 원래는 착한 이들만이 관계와 공간을 채우는 세상이었을 겁니다. 그러던 게 나쁜 친구, 친구들을 괴롭히는 친구, 자기 욕심만 채우는 친구, 나쁜 어른들... 이런 게 진구의 시야와 세상에 서서히 들어오는 거죠. 세상에 그저 엘프나 천사만 가득하다면 고민할 일도 없고 머리를 쓸 일도 없습니다. 어쩌면 이런 악한 존재들 덕에 우리는 성장하고 더 성숙해지며 바른 마음도 다지는 것입니다.

케빈도 감정이 (당연히) 있습니다. 케빈도 "남들이 나를 이런 쪽으로 봐 주었으면" 하는 에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대목에서 미소를 머금게 되죠. 약간의 자뻑은 케빈도 차마 떨칠 수 없고 이런 약점? 개성? 때문에 우리는 케빈을 사랑하게 됩니다.

"어린이는 계약서에 사인을 못해. 누나는 어른이 아니니까 그 계약은 효력이 없어."(p73) 여튼 못된 인간들은 무엇을 손에 넣기 위해 잔재주를 부립니다. 어린 누나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무엇을 하는 줄도 모르고 나쁜 어른의 마수에 놀아났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케빈도 만능이 아니기에, 마치 예전 미드 <전격 Z작전>의 인공지능 자동차 키트처럼 나쁜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꼼짝도 못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하죠? 구해 와야 합니다. 우리들이요.

여튼 이런 뜻밖의 전개에서 저는 작가 필립 리브가 혹시 <전격 Z, 작전>의 어느 에피소드에서 영감을 받아 이 편을 완성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드라마에서도 마이클이 키트를 구하러 악당들의 "회사"에 잠입하여 결국은 구해 내죠. 만능일 것 같아도 의외의(사실은, 우리 독자들이 일찍이 혹시 이렇지 않을까 하고 의심은 해 본) 약점이 있어서 이처럼 한번 걸렸다 하면 답이 없을 것 같은 그런 함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뽀빠이 아저씨가 시금치를 먹고 힘을 내듯, 혹은 렉스 루서의 마수에 걸린 슈퍼맨이 클립토나이트 목걸이를 떨쳐 내고 제 기력을 찾듯, 케빈은 잎사귀를 우걱우걱 먹으며 힘차게 발을 내딛습니다.

인생에는 이처럼, 비밀 통로와 같은 어떤 미궁이나 곤경이 반드시 하나쯤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날개는 신(혹은 부모님의 DNA?)이 준 선물이지만 이를 활용하는 지혜는 우리 스스로가 짜 내고 실행에 과감히 옮겨야 합니다. 우리 케빈의 성공적이고 "완벽한 탈출"은 이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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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요가합니다 - 분주한 일상에 충만한 기쁨
아카네 아키코 지음, 김윤희 옮김 / 미호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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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어떤 친구가 저와 함께 요가하러 같이 다니자고 한 적이 있습니다(다른 친구가 저더러 "뇌호흡"도 같이 해 보자고도 했는데 그건 좀 찜찜해서 거절했습니다만). 결국 못 나갔지만 여튼 체형이 바로 잡히고 마음의 평온을 얻는 데에 요가는 확실히 효과가 있긴 하겠으며, 적어도 한국에서 많은 "지지자"를 얻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본디 이처럼 육신뿐 아니라 마음을 바로잡는 첩경이 요가이긴 합니다만, 이 책은 본격적으로 "마음 요가"를 가르치고 있더군요.

책은 모두 84개의 이야기 꼭지로 이뤄져 있습니다. 84라는 숫자에 어떤 뜻이 담겼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으나 그 한 마디 한 마디 제목이 독자의 차분한 공감을 유도합니다. 재목만 잘 읽어도 마음이 절로 정돈되는 듯한 느낌이나, 본문은 그보다 더 명징한 언어들, 마음이 착해지는 언어들로 이뤄집니다. 참 책이 제목 그대로다 싶었고, 읽기만, 아니 눈길을 주기만 해도 기도나 명상이 이뤄지는 것 같았습니다.

"개념에 얽매이지 말고 마음에 바람이 통하는 일상(p64)" 말은 쉽지만행동으로 옮기기가 어렵죠. 왜냐면 이미 우리 마음 속에는 못된 욕심 주제 넘은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모든 잡된 개념, 개념 같지도 않은 개념이 썩 사라지게 할까요? 저자는 이를 두고 요가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요가의 요체는 쓸데없는 동작을줄이고 필요한 것만 남기는 데에 있습니다. 개념, 머리 속을 어지럽히는 개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개념은 그보다 더 간단한 다른 개념으로 대체되며(이른바 오캄의 면도날), 어떤 개념은 아예 건설적인 사고에 필요 자체가 없습니다.

불교에는 제법무아, 제행무상이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우리가 일상이건 일에서건 집착하는 이른바 "에고"라는 게 실상은 아주 부질없으니 즉시 버리고 더 큰 세계로 자연스럽게 합일하라는 거죠. 특히 서양 문명의 경우 남과 구별되는 내 자신의 개성을 찾고 나의 욕구에 충실하여 이익을 도모하라는 분위기가 주조인데, 이게 다 쓸데없는 집착이라는 겁니다. 내가 내 이기적인 욕구를 안 내세우면 잡된 분쟁도 그치겠지만, 구태여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일단 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요. 그것만 해도 어디겠습니까. 책 p82에 이에 대한 자상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p95에는 "새장 속에 갇힌 새"라는 말이 나옵니다. 새장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죠. 만약 우리가 중력이라는 새장이 없다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것입니다. 능력의 부족도 결국 새장입니다. 우리가 지적 능력을 어디서 무한정 끌어다 쓸 수 있다면 회사에서 칭찬도 받고 승진도 하며 자영업자라면 세상 손님을 모두 모을 수 있겠으나 "새장" 때문에 그게 안 됩니다. 그런데 저자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상에 새장 따위는 없다는 겁니다. 그럼 왜 우리는 우리의 뜻을 못 펴는 걸까요? 답은 p95 이하에서 스스로 찾아 보십시오.

p104에는 우주의 바나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주의 바나나가 대체 뭔가요? 저자가 요가 수행을 위해 인도 모처에 머무를 때, 어느 원숭이가 냉큼 저자 손에 든 바나나를 나꿔 채 가고 사람들은 박장 대소를 하더랍니다. 이때 요가 행자가 "저건 선생님의 바나나가 아닙니다. 우주의 바나나입니다." 라고 하더라는 거죠.

우주의 바나나! 성경에는 "흙에서 나와 흙으로 가는..."이란 구절이 나옵니다. 흙이 본디 속할 곳인 흙으로 돌아갈 뿐이나 허무할 것도 아니고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내 것을 원숭이녀석에 뺏겼다고 비통해할 것도 없습니다. 내 손도 원숭이 입도 모두 우주의 한 자락이고 우주 그 자체입니다. 부분도 전체도 경계가 없습니다. 생각과 마음이 이에 미치면 무엇이 서럽고 무엇이 아프겠습니까?

사람을 가장 지치게 하는 건 인간관계입니다(p33). 나도 에고 덩어리이며 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 없이 많은 에고와 에고가 맞붇잊고 진창 싸움이 벌어집니다. 이 판에 전쟁이 벌어지고, 누군가 하나는 땅바닥에 맞아 뒹굽니다. 저자는 여기서 하나의 제안을 합니다.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옳다는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기서 저자는 "당신이 틀리고, 타인이 옳습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무대리"란 만화에선 직장에서 치이고 박살 날 때마다 "그저 내가 못난 탓이거니"로 돌리라고도 했습니다(다분히 반어적, 자조적). 물론 맞습니다. 내가 잘나면 안 터지죠. 그런데 그렇게 자기 부정을 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내세우는 게, "나도 옳지만 더 차원을 넓혀 '우리'가 옳다"라고 생각을 고양, 승화시켜 보라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허상을 극복하고 자연스러운 본성에 다다르게 됩니다(p80).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갖가지 집착을 가지며, 요행히 얻은 행운을 두고 나의 참모습이라며 타인에게 강변하게도 됩니다. 이런 게 쌓이다 보면 자신이 자신의 모습에 대해 과대망상을 갖게 되는데 워낙 경쟁이 치열한 현대이다 보니 망상이나 허세가 거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최대 피해자는 이런 허세를 견뎌 줘야 하는 옆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품을 걷어 내고 자신, 정직한 자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만이 남도 편해지고 나도 편안한 마음으로 안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분량이 짧은 책이지만 마치 요가를 잘 끝낸 날씬한 몸을 보듯, 필요한 가르침만 오롯이 담긴 착하고 지혜로운 책, 아니 스승을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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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 침묵으로 리드하는 고수의 대화법
다니하라 마코토 지음, 우다혜 옮김 / 지식너머 / 2020년 1월
평점 :
품절


일본이나 우리나 사람 사는 모습, 사회 구조가 닮은 구석이 많다 보니(닮은 만큼이나 그 차이점도 엄청나긴 하지만) 이슈에 따라 일본 분이 쓴 책에서 해답을 딱 맞게 얻는 수가 많습니다. 이 책도 제게는 그런 책이어서, 그간 꼬이고 얽힌 관계에 대해 좋은 시사점을 얻기도 했습니다.

인터넷, 특히 유튜브 등에서 TED 컨텐츠를 종종 보시나요? 저자는 여기서 특히 프레젠테이션의 달인들을 보고 많은 걸 배운다고 합니다(p32). 여기서 저 달인들은 그저 일방적으로 자기 할 말만 떠드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청중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래서 일정 지점에서 공감을 유도하고, 자신의 메시지에 대해 더 깊은 몰입도 도모합니다. 예전에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도 연설 시에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며 되묻는 화법을 자주 구사했고, 지금은 심X정 대표가 자주 쓰는 방법인 듯도 합니다. 여기서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프레젠테이션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잊지 말라, 그것은 바로 '설득'이다."입니다.

"토킹스틱(p96 이하)"은 예전에 저도 이 주제 하나만을 다룬 책을 한 권 읽은 적 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자들이 부족의 소통과 그를 통한 평화를 끌어내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죠. 저자는 한때(대략 12년 전?)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끈 스티븐 코비의 자계서 <성공하는...>에서 이 토킹스틱 이야기를 다시 끌어냅니다. 분쟁이 극에 달하면 우리는 보통 "말이 안 통하는군."이라며 침묵의 단계에 들어갑니다. 이 침묵이 이후 더 발전적인 소통으로 승화할지, 아니면 "갈데까지 가"게 되는지는 다양한 변수가 좌우합니다. 토킹스틱은 말하자면 후자의 길로 이끄는 일종의 도구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이 책의 진짜 주제이기도 합니다.

"아니 그래서 결론이 뭔데?(p101)" 부부싸움이 더 나쁜 단계로 치닫는 중 남편이 보통 보이는 반응입니다. 저자는 여기서 남편들이 종종 잊는 점이 있다고 하는데, 아내는 이런 상황에서 그저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 자체를 조성하려고 한다는 거죠. 그 의도를 모르고 남편은 "상대, 즉 아내의 의도, 혹은 결론"만 성급하게 알아내려고 합니다. 남편을 두고 무조건 단세포라며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남편들이 깨닫지 못하는 건, 애초에 이런 싸움에 무슨 "결론"이라는 게 있기가 힘들다는 겁니다(아내에게건 남편에게건 말입니다). 만약에 만약에 아내가 "결론"이 있다면, 그럼 뭐 남편은 그에 무조건 따를 작정이었겠습니까? 만약 마음에 안 들거나 비합리적인 구석이 있다면 바로 불복하고 또다른 싸움으로 접어 들었을 거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이 뭔데?"라고 묻는 건 그냥 싸움을 이어가자는 거밖에 아니죠. 이런 점에서 "일단 같이 해법을 모색하게끔 분위기부터 만들자"는 아내의 암묵적인 제안은 남편의 그것보다 타당합니다. 이건 뭐 입장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성격이 아닙니다. 애초에요.

남들 앞에 서면 일단 몸이 배배 꼬입니다(p120). 사람들, 수많은 청중들이 쏘아 대는(꼭 적의 어린 게 아니라 호기심, 호의도 있지만 말이죠) 시선의 힘을 배겨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이겨내야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은 물론, 달인까지는 가지 않아도 PT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성과를 만드는 조직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발표자는 상대의 눈을 일단 바라보고(사람들이 많으면 그들과 일단 일일이 눈을 맞추고)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지면서, 몸짓과 손짓은 크게 하라고 저자는 조언합니다. 사실 이게 주관적인 자신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상대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겠다는 마음이 확실히 서면 의식적으로 하지 않아도 절로 그렇게 되는 것 같더군요.

저자는 현직 변호사인데 실제로 상대와의 물리적 거리를 조절함에 따라 다른 소통의 요소, 즉 메시지라든가 태도라든가 분위기가 조절된다고 합니다. p131 이하에 이 말이 자세히 나오는데 어찌 보면 이 책 제목이 직설적으로 전달하는 내용 본체이기도 하겠습니다. 무조건 우호적인 소통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 상대를 제압헤야 할 필요가 있을 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효과적이며, 상대를 압박하려면 실제로 거리를 바짝 좁히라고도 합니다. 이를 두고 저자는 "물리적 거리를 통한 관계성까지의 조절(p133)"이라 정리합니다.

"개방형 질문"과 폐쇄형 질문은 제가 지난주에 읽은 어떤 책에도 나온 주제인데 이 책(p170)에서 또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청중을 어느 정도 자신의 공감대 영역 안에 끌어들이거나 묶어 둘지에 따라 화자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말이 그렇다 뿐이지 사실 개방형이니 폐쇄형이니 하는 건 일도양단으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독자인 저 역시 과연 책에서 설명하는 모든 개념이 과연 현실에서도 칼 같이 적용이 될까 하는 의구심이 많았습니다만 저자 역시 그런 태도였네요.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건가. 이는 말 듣는 사람을 얼마나 배려하는지에 따라 자연히 따라나오는 "지혜, 융통성, 유연함"에 의해 결정된다고 합니다. 자세한 건 p173 이하에 저자의 처방이 나옵니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성현의 시 구절에도 나오지만 우리는 이성을 가진 인간, 또 그 이전에 사람으로서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사회인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거리와 힘 조절이 가능합니다. 그게 안 되는 건 이기적이고 유아스러운 자기 욕심이 앞서서입니다. 힘 쓰는 게 문제가 아니라 힘을 조절하는 게 어려우며, 그 "거리"의 조절이야말로 소통뿐 아니라 인간 관계의 달인, 아니 달인까진 아니라도 최소한 남 하는 것만큼은 하는 사회인으로서의 도리임을 잊어선 안 되겠습니다. 평균도 못 하는 사람이 꼭 달인 어쩌구를 입에 쉽게 담기 마련이고, 공감은 죽어도 못 하는 인간이 남더러 자신에 공감 못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생떼를 쓰며 입에 거품을 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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