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의 힘 - 끊임없는 자극이 만드는 극적인 성장, 개정판
켈리 맥고니걸 지음, 신예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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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의 힘"! 강원도의 힘은 들어봤어도 스트레스의 힘이란 말은 처음 들어 봅니다. "강원도의 힘"도,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가 만나 빚는 묘한 효과 때문에 대중의 귀에 오래 맴돌았는데, 스트레스의 힘도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스트레스라고 하면 만악의 근원이고 달갑잖은 불청객에 불과한데 얘가 무슨 힘을 발휘하겠으며, 그 힘이 과연 좋은 데 쓰이기나 할까 싶습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이란 걸 하는 이상 스트레스는 어차피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란 말이 있듯이 스트레스도 잘만 관리, 이용하면 오히려 순기능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게 이 책 저자분의 말입니다.

책에는 먼저 "스트레스 사고법"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물론 "해롭다/그게 아니라 장점을 끌어올리기도 한다"의 이분법입니다. 압도적으로, 무슨 스트레스가 나의 장점 발휘에 기여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연구 결과는 우리의 상식과 일치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스트레스의 장점을 발견한다는 증거도 존재한다(p44)." 저자 자신이 최초로 발견했다는 게 아니라, 그저 보통 사람들(저 연구 대상에 포함된)이 실제 스스로 스트레스의 순기능을 찾아내고 그로부터 효과까지 본다는 소리입니다. 어떨까요? 실제로도 "이불밖은 위험해"라며 집 안에서 꼼짝도 않고 머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없고 간에, 우리가 의식을 하건 안 하건 간에, 사람들은 너무 편한 삶이 계속되면 "혹시 이러다 탈(정신적, 육체적) 나는 건 아닌가" 지레 겁을 먹고 일부러라도 모험을 (소소하게나마) 합니다. 작게는 암벽 등반이나 고난도 운동 같은 게 다 포함됩니다. 이렇게 일부러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업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잘 극복하면, 오히려 더 큰 활력과 에너지가 생기기도 합니다.

일부러 빚어낸 스트레스라면 대응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미 그런 걸 스트레스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런데 동기가 뭐가 되었든 간에, 편하고 즐거운 것과 거리가 먼 어떤 불편함이 일단 나의 일상을 가로막고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는 스트레스입니다. 저자는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과정뿐 아니라, "처음부터 스트레스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 자체가 이미 성과의 양과 질을 다르게 해 준다"고 합니다. 스트레스를 좋게 바라보면, 벌써 성과가 나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저자가 정리한 그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p47).

- 스트레스가 실재(實在)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반대: 주의를 돌리려고 애쓴다- 현실 도피)
- 그 근원을 해결할 작전을 짠다(반대: 그냥 감정을 없애는 데 주력한다)
- 타인에게 충고, 조언을 구한다(반대: 술 등에 의존한다)
- 극복, 제거, 변화를 위해 조치를 취한다(반대: 아예 관계, 역할, 목표에 쏟던 에너지 자체를 거둬들인다)

한국사회에 "스트레스"라는 말이 유행하고 대중이 널리 쓰게 된 건 아마 1980년대부터일 것입니다. 당시에 어떤 전문가는 "그냥 일에 전념해서 잡생각을 줄이면 될 걸, 스트레스란 말을 만들어내는 바람에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고도 했는데 그 이전에는 한국인들이 이런 말을 잘 안 썼다는 증거도 됩니다(스트레스 상황 자체야 구석기 시대, 아니 지질시대부터 있었겠지만). 여튼 스트레스 자체를 잊느냐, 아니면 누군가가 (타인의) 직접 스트레스 상황에 개입을 해서 대상화하느냐는 전략적 선택지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책에서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UBS에서 있었던 사례를 듭니다. UBS 직원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 첫째 그룹은 스트레스에 대해 부정적인 기존 관념을 강화받고, 둘째 그룹은 스트레스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주입받으며, 셋째 그룹은 별다른 조치 없이 대조군으로 두었습니다. 그 결과는, 이런 중재자의 개입 덕분에 훨씬 좋은 결과를 보게 되었다는 쪽이었습니다.

책에는 또한 월튼이란 학자에 의해 이뤄진 "사고 방식 중재"라는, 다소 적용 폭이 넓은 기법에 대해 소개합니다. 사람은 그저 타고난 대로, 혹은 오랜 동안 환경에 의해 길들여진 대로 생각의 패턴을 유지할 수밖에 없을까요? 저자는 저 월튼의 연구를 통해, 사고방식이나 세계관은 얼마든지 스스로, 혹은 누군가가 개입해서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이런 개입은 마법이나 SF가 아니라 엄연히 순수 과학과 실증의 영역이라고 합니다. 사고 방식을 바꾸지 못한다는 건 그저 선입견일 뿐입니다(p57). 보다 범용인 사고 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는데, 스트레스에 대한 태도나 대처 방법을 못 바꿀 이유가 없고, 그게 가능하다면 아마도 결과 역시 긍정적이지 않을지요.

사고방식의 (3자) 중재는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p64)

1) 새로운 관점 배우기
2) 받아들이고 적용하도록 고무하는 연습하기
3) 타인과 공유 기회 만들기

스트레스 상황이 공포일 뿐 아니라, 스트레스를 겪으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부터가 공포입니다. 그런데 스트레스에 대한 관점을 바꾸면, 스트레스에 실제 대처하는 능력이 향상되기에 앞서 적어도 저런 공포감은 훨씬 잘 극복된다고 합니다. 공포감이란 게 생각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런 공포감 때문에 도대체 무슨 새로운 과업 자체를 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업에 도전할 수 없으면 성과가 나지 않고, 이는 다시 자신감 저하로 이어집니다.

"엄청 스트레스 받아!(p70)" 이처럼 고함치고 짜증내는 건 사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 거의 99%가 보이는 반응일 듯합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 자체가 스트레스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이며, 저 실험에 참가한 이들처럼 누군가의 중재에 의해 스트레스 관점을 변화시키려 노력했다 해도 도로 예전처럼 돌아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른바 스트레스 요요인 셈인데, 그렇다고 해도 그 현실(역시 스트트레스죠)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시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트레스 과학"의 탄생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연원이 깊은데 1939년 헝가리의 한스 셀리에에 의해 이뤄졌다고 합니다(p75). 불쾌한 경험을 한 쥐들은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기고 근긴장이 사라지는(p76) 등 분명한 증상이 나타났다고 하네요. 셀리에는 내분비학자였고 이런 연구는 내분비학의 체계 안에서 이뤄졌으며 따라서 스트레스는 분명 의학적 관점에서 실체를 지닌, 질병과 연관을 갖는 그 무엇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셀리에는 이미 당시에, 해로운 스트레스(distress)의 해독제 역할을 하는 바람직한 스트레스(eustress)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죠(p78).

옥시토신도 결국 스트레스 반응의 일환으로 분비되는 호르몬입니다. 이 호르몬은 사람들에게 사회적 지원망과 관계를 맺으라고 독려(p93)하며, 이 결과로 배려-친교 반응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엔도르핀, 아드레날린, 테스토스테론, 도파민 등은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상황에 도전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낸다고 하는데(p94) 이는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도 적잖게 경험하는 바입니다. 어떤 좌절이나 모욕을 겪었을 때 아 나는 안되겠구나 하고 주저앉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오 그래? 어디 끝까지 가 보자며 오기가 발동할 수도 있는데 이 후자에 저들 호르몬이 끼어드는 거죠.

감정은 뇌에 자극을 주고 이런 자극이 뇌를 성형적(plastic)으로 만듭니다(p96). 저자는 이렇게 활성화된 뇌가, 결국 인격이나 감정 소화 면에서 전보다 더 성숙한 인간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동서양의 옛 성현들이 일찍이 말한 대로, 시련이 사람을 강하게 만들고 성공으로 이끈다는 지혜가 과학의 근거를 갖는 지점이죠. 반대로 스트레스를 회피하고 남탓과 원망, 짜증이 일상화한 인생은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난관을 극복 못 하고 궤도에서 점점 더 멀리 이탈하게 마련입니다.

스트레스는 회피하거나 무시할 대상이 아니라 더 친하게 지내고 객관화해야 할 까다로운 친구에 가깝습니다. 그 방법 중 하나는 크레이스너, 엡스타인 두 분 의학박사의 연구대로 "스트레스를 끊임 없이 대화의 주제에 올리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입니다. 의대생들은 아마 그 나이 또래 중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 집단 중 하나이겠습니다. 이들이 다루는 환자의 끔찍한 모습, 아픈 상태 등이 사실 정상인은 일상적으로 접하기 어려운 스트레스의 근원이고,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배우는 지식 역시 스트레스를 유발합니다.

전통적으로 이들은 감정을 억누리고 환자를 인간 아닌 대상으로만 바라보기를 훈련 받았는데, 그 결과는 사실 예상 외로 비극적임이 밝혀졌다고 합니다(p124). 학생들은 자살하기도 하고, 의사들은 나중에 직업에 대한 진정한 확신을 못 가지며, 이는 결국 의료사고나 분쟁 등으로 이어집니다. 그러고 보니 의사야말로 스트레스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연구를 하기에 최적의 직업임이, 다른 이유 하나가 더 있었던 셈이네요.

"꿈을 이뤄주는 스트레스 과학" 많은 우수한 연구자들에게도 강의 의무는 적잖은 부담입니다. 실제로 제가 학교 다닐 때도 많은 우수한 교수님들이 그렇게나 강의하는 걸 싫어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토로하는 걸 봤습니다. 교수는 분명 사회적으로 극히 선망되는 직업인데도 이런 스트레스와 애환이 있었던 건데.. 알토스 교수라는 분은 스트레스관을 바꾸는 "개입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나서 태도가 180도 바뀌었습니다. 어떤 학생은 "교수님이 내 질문에 답해 주시는 속도가, 내가 내 여친에게 문자로 답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다."라고도 했다네요(p157). 스트레스는 이처럼 잘만 관리하면, 직업에 보다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으로 오히려 탈바꿈해 줄 뿐 아니라, 근원적인 인간관계 향상과 사회성 제고까지도 산출할 수 있습니다.

꼭 타고난 성격이 소심해서가 아니라, 스트레스에 과도하게 시달리고 나아가 스트레스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면 절로 사회 불안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오히려 성격이 밝고 남과 잘 어울리는 "인싸" 유형이 이런 장애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아마 과도하게 가졌던 기대가 정면으로 배반당한 데 대한 좌절의 결과일 수 있죠. 그런데 저자는, "불안증을 앓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리 기능이 통제 불능 상태라고 자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으며", 따라서 "스트레스 반응이나 불암감 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 자체의 전환이 무척 중요하다"고 합니다.(p182)

그래서 스트레스는 존재 자체를 없앨 수 없고, 그 "사용법"이 중요합니다. 그 예로 책에서는 나의 목표가 무엇이고, 목표 달성에 도움되는 건 무엇이며, 나는 과연 사람들 사이에 긍정적 영향을 일으키고 싶은 것이며, 그 변화의 종류와 그를 통한 기여가 무엇인지 의식적으로 반복적으로 생각해 보는 게 중요하다고 합니다(p211). 아무래도 사람이란 동료나 집단 안에서 인정받고 소속감을 늘리며 이를 통해 자존을 높이는 걸 태생적으로 좋아하는 존재이니 말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 사람은 시대가 주는 스트레스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끼는 편이었을 겁니다. 그걸 자기 나름대로 극복해 보려 애 쓰다, 마침내 가장 확실하게 극복하는 방법을 찾고, 이를 사람들과 공유하다가 공동체 전체를 구원(!)하기에 이른 거죠.

"누군가와 더 굳건히 연결되고 누군가의 지지를 받으며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싶은 사람들(p242)"은, 사실은 자신부터 타인에 대한 태도를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그래서 "어떤 지원을 타인에게 받고 싶건 간에, 그 지원의 원천은 자기 자신이라야 한다"는 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사고 방식의 전환,스트레스에의 과감한 (나 자신의) 개입"이 중요하다고 다시 강조합니다. "스트레스를 통해 어떻게 '성장'하고 싶은가?(p307)"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본 적 있습니까? 도피, 회피가 아니라 스트레스에서 나의 성장 그 자양분을 찾을 때, 스트레스가 극복이 될 뿐 아니라 종래의 나보다 키가 한 뼘 더 커 있는 자각을 하게 되며, 그 뿌듯함이야 상상을 뛰어넘지 않겠습니까.

스트레스를 내 편으로 만들면 위협을 도전으로 바꾸고, 믿음의 촉매제가 되어 주며, 회복력을 북돋우는 약이 됩니다. 독이 아니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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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조노믹스 - 미래 비즈니스의 패러다임을 뒤바꾼 아마존 혁신 경영의 비밀
브라이언 두메인 지음, 안세민 옮김, 김용준 감수 / 21세기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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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닷컴은 온라인 서점으로 출발했으나 이제는 (사이버) 매장 안에서 다루지 않는 것이 없는 일종의 백화점으로 만인의 뇌리에 각인되었습니다. 20여년 전 탄생시에도 화제가 되었지만, 당시 비슷한 포지션이었던 반스앤노블(물론 훨씬 오랜 역사의, 오프라인 유통망을 지닌 굴지의 도서 유통업체였지만)은 지금도 그저 온라인서점일 뿐이고, 1990년대 리테일 최강자였던 월마트 등은 입지가 현저히 위축되었습니다. 당시에도 잘나갔지만 지금은 아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마존닷컴의 성공 비결은 분명 심층 분석의 가치가 있습니다. 아울러 전도 유망한 벤처기업인 레벨에서 이제 세계 굴지의 기업가가 된, 오너 베조스의 천재성과 경영 철학 역시 궁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p46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베조스가 온라인 소매 산업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빠르게 확대해 나가며 전통 소매업체에 위협을 가하고 있지만, 이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아직도 우리는 "책 팔다가 백화점 된 곳" 정도로 아마존을 인식하지만, 아마존의 사업 영역과 그 혁신의 여파는 이미 소매업을 넘어 산업 전 분야, 전 방위에 미친다는 뜻입니다. 다음 문장은 "아마존이 고객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인공지능 분야에 투자하면, 이것이 인공지능 플라이휠을 더욱 세게 구동시켜 때로는 아마존의 자체 산업이 되는 제품과 서비스가 탄생하기도 한다." 즉, 타 산업에 침투하여 기존의 강자들을 몰아낼 뿐 아니라, 산업의 재편과 해체를 유도하는가 하면, 아예 전에 없던 산업과 제품, 서비스를 만들기까지 한다는 뜻입니다.

아이폰 안에 시리가 있듯이, 아마존은 인공지능 "비서" 알렉사를 만들었습니다. 이 알렉사는 가정에 있는 각종 전자기기, 설비를 원격으로 작동, 제어할 수 있고, 유저의 취향을 파악하여 음악을 골라 틀어 주는가 하면, 이 체제를 탑재하고서 앞으로 생산되는 다양한 제품의 두뇌 구실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아마존은 이제 주요 가전 기기 기업이 되었다(p49)."고도 합니다. 물론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며, 예전부터 삼성, 엘지 등 하드웨어 영역(아무리 고부가가치 하이엔드 제품을 만든다 해도)의 강자가 결국 이들 소프트웨어의 지배자들에게 종속되고 말리라는 오랜 우려를 다시 상기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번다는 말처럼요.

몇 년 전 트럼프가 아마존을 두고 "우체국을 후려쳐서 돈을 버는 악덕 기업"이라 폄하한 적이 있었는데, 의외지만 아마존은 미국 정부와도 꽤 친하며 오히려 유착 관계를 의심받을 정도입니다(이래서 트럼프와 따로 놀며 대립하는 딥 스테이트 음모론이 인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라고 해도 마냥 방산업체에 우호적인 건 아닌데, 역사상 최초로 "군산복합체"란 말을 만들어낸 이가 바로 아이젠하워였습니다. 여튼 아마존은 "클라우드 컴퓨팅 사업을 통해 CIA, 국방부와 수십억 달러 규모의 사업 계약을 체결했다(p62)"고 합니다. 바로 앞 페이지에는 사업가, 공직자로서 크게 성공했던, 제프 베조스의 할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이분은 1960년대(민주당 집권기죠) 기밀 군사시설 고위직으로 봉직했으며, 간접적으로 인터넷의 탄생(본래 미 국방부 인프라)에 기여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니 손자 제프의 이런 빛나는 인생 행보와 방향성이 결코 우연이 아닌 셈입니다.

예전에 경제학자 케인즈는 "장기적으로는 모든 게 균형을 이룬다"는 반대 진영의 주장에 대해 "장기적으로는(=결국) 우리 모두가 죽는다"고 되받아침으로써, 당장 우리가 활동하고 살아가는 "단기, 지금"에 효용이 없는 모든 정책, 이론에 대한 깊은 회의를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제프 베조스는 반대로, "모든 것이 장기적이다"라고 일찍부터 지지자, 주주, 투자자들에게 말해 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장기적으로는 결국 이익이 된다"거나 "올바르고 유익하다"고 말할 때, 그 숨은 뜻은 "단기적으로는 바보짓하는 거다"라는 말에 별 다름 아닙니다. 사업도 마찬가지라서, 길게 보고 정도 사업 경영한다고 하면 조롱이나 당하기 좋죠.

그런데 제프 베조스는 이런 통념을 정면으로 깬 사람입니다. p148에는 그가 프라임 배송 서비스를 론칭시켰을 때의 일화가 나옵니다. 당시 이미 아마존은 마니아층을 형성했고, 천천히 받고 싶은 사람은 낮은 배송료를 물고, 빨리 받고 싶은 사람은 특급 수수료를 내게 하여 배송을 차별화했는데 이런 게 무슨 악덕 상혼도 아니고 상식의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마니아층(혹은 주머니가 넉넉한 소비자)에서는 구태여 특급배송을 선택하곤 했죠. 경제학 기본 원리 중 하나가, 생산자(판매자)는 (그게 가능하다면) 가급적 가격 차별을 실시하여, 더 지불할 의향이 있는 소비자에게 높은 가격을 받아내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겁니다. 꼭 나쁜 것도 아니어서 여유가 있는 사람은 자기 효용만큼 더 내고, 없는 사람은 소비를 줄이거나 안쓰면 되는 게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베조스는 완전히 상식을 벗어난 결정을 내립니다. 프라임 서비스(일정 금액 이상 배송비 무료 정책)를 도입해서, 아마존을 더 자주 이용하고 충성하는 고객에게는 더 큰 혜택을 준 거죠. 경영진은 당연히, 자발적으로 더 많은 비용을 내겠다는 소비자에게 왜 불필요하게 회사가 손해를 감수하냐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베조스의 대꾸는 "소비자에게 더 많은 편익을 제공하여, 아마존에서의 소비가 아주 습관이 되어 버린 유저를 더 많이 확보하는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건 크게 봐서 "박리다매" 정책이고 큰 그림을 본 마케팅 전략이기도 하지만 말이 쉽다고 행동까지 쉬운 건 아닙니다. 눈 앞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걸 사업자 입장에서 편하게 바라볼 수는 없죠.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한때 국민 SNS였던 싸이월드의 몰락 과정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도토리나 배경음악 아이템으로 유저의 호주머니를 알뜰하게 털어가는 영리한 사업체였지만 플랫폼으로서 결국 단명했죠. 단기와 장기를 분별할 줄 아는 비전의 차이이며, 글로벌 강자는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른 법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p101). "베조스의 장기적인 전략으로 아마존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지난 20년 동안 베조스는 현금 자산의 많은 부분을 주주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사업을확장하고 연구 개발에 투자하고 우수한 직원을 고용하는 데 사용했다. 월스트리트가 분기별 수익을 절실히 요구하고, 아마존 주식 가격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을 때, 베조스는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기업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자신만의 성전에 몰두했다." 어떻습니까? 우리네 통념으로는 상장법인이라 함은 시장의 요구에 민감해야 하고, CEO가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으면 그건 퇴출 1순위감이라며 비웃기나 십상입니다.

베조스가 만약 한국식으로 경영했다면 모르긴 해도 단기에 떼돈을 벌긴 했겠지만,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사업이 위축되다 문을 닫고 몰래 꿍쳐 놓은 비자금이나 뜯어먹으며 노년을 살았을 겁니다. 그것도 그 나름 뭐 폼나는 삶입니다만 도덕적이지는 못하고, "세계적 레벨의 위대한 기업가"로서 얻는 존경과는 극과 극으로 먼 경로 아니겠습니까. 이게 한국과 글로벌 스탠다드의 차이입니다.

이처럼 프라임 프로그램은 상식을 벗어난 역발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만, 책에서는 그 성공 비결에 대해 보다 심층적으로 다룹니다(p150). 저자는 이른바 "단절 모델"과 프라임 프로그램을 대조시키는데, 단절 모델이라 함은 책에서도 설명되듯 피트니스 클럽 회원제라든가 무제한 뷔페 식당 같은 것입니다. 혜택이 큰 듯하지만 결국 다수의 소비자들은 혜택을 다 못 찾아먹고 업자 좋은 일만 시킵니다. 마음이 여간 독하지 않고서는, 허용된 시간 안에 제공되는 이익을 다 못 챙길 텐데, 아마존 프라임은 이런 꼼수를 부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일정 금액만 지불하면, 아마존 프라임은 광범위하고 양적으로도 풍부한 서비스를 제공하며, 소비자는 아깝게 뭘 찾아먹고 연회비를 날리는 일이 없습니다. 적어도 회원권제로 업계가 부리는 전형적인 얄팍한 꼼수로는 이익을 남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마존이 얻는 이익이 무엇인가. 소비자는 개별상품을 인터넷에서 살 때, 아마존에 "중독"되어 다른 곳에서 더 이상 가격비교를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소비행위를 할 때 그 소비가 주는 객관적 효용에 의한 결정을 내리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주관적 효용에 따라 행동합니다. 남들이 보기엔 손해가 나도, 나는 이걸 소비함으로써 행복해진다면, 또 주관적 가치가 부여된다면 그 선택을 하는 거죠. 이래서 아마존은 충성스러운 소비자들을 자신의 (광범위한) 생태계 안에 가둬 둡니다. 뭐 아마존 유저들이 그 안에서 행복감을 느낀다면 제3자가 뭐라할 건 아닙니다. 프라임 서비스는 또한, 다른 프로바이더가 제공하지 못하고 아예 상품의 컨셉 자체를 상상 못하는 여러 다양한 "체험"을 하게 돕는데, "체험"은 확실히 이 시대의 키워드이자 아마존이 창립 초기부터 내세웠던 사업 지향성 중 하나입니다.

아마존은 물론 원가 절감을 위한 혁신에 주력하는 기업입니다. 그런 기업은 각종 자동화 시스템 도입을 위해, 기존의 생산성 떨어지는 많은 노동집약적 일자리를 퇴출시키는 데 일조하기도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IT 기업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잃게 한다며 강하게 비판한 적 있습니다. 확실히, 드론으로 택배가 이뤄지면 트럭 운전수, 창고 근로자, 계산원 등이 설 자리가 없어지긴 합니다(p209).

그러나 저자는 "거꾸로, 이런 기계가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섬세하고 창의적인 일자리가 새로 등장할 것"이며, "아마존 고" 매장에서 젊은이들이 일부나마 이런 일을 맡고 있다고 합니다. 글쎄 앞으로 아마존 계열 기업이 얼마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지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모르겠습니다만, 폴 버호벤이 묘사한, "로봇이 모든 일을 대신하고 실업자는 쓰레기통을 뒤지는 디스토피아(p210)가 도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네요. 이에 대해 저자는 마냥 낙관하지도 않고 모호한 말로 괜한 기대를 품게 하지도 않으며, 다만 개별 노동자가 "긱 경제"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른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보편적 아젠다로 부상한 지금, 근거가 있든 없든 아마존닷컴이 저런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괴물"이란 비판에 대해 마냥 눈감고 귀닫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이에 대해 그들은 "아마존닷컴에 서비스와 제품을 납품하는, 이전 같으면 판로를 못 찾고 사장되었을 수많은 중소업체들이 아마존이란 플랫폼에서 활로를 찾았고, 그들은 다시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p223)."고 합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아마존은 약품 유통 산업, 헬스케어 산업에도 진출하려 시도합니다.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게, 충성스러운 유저들의 다양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인공지능 시스템을 경쟁력 있게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임직원 중 적지 않은 수가 의약학을 전공한 사실도 그 배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게 단지 개별 기업의 탐욕과 야망이 아니라, 미국은 본디 공보험체계의 미비로 아프면 그냥 치료를 포기하는 환자들이 많은 나라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사망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현상만 봐도 알 수 있죠. 아마존은 혁신을 통해 조기에 병의 징후를 발견하고, 유통망 혁신을 통해 약값을 낮출 수 있다고 공언합니다. 사실이라면 아마존에 충성스러운 유저들은 뜻밖의 곳에서 진짜 낙원을 발견한 셈입니다.

마지막에는 "그럼, 이렇게 사방에 문어발을 뻗치는 공룡 기업과, 지난시절 독점의 폐해 때문에 철퇴를 맞았던 각종 트러스트, 카르텔과는 무엇이 다른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만합니다. 이 책의 장점은 외부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그것대로 소개하면서, 아마존의 지향점을 과장 없이 설명한다는 데 있습니다. 책에는 20세기 초 마크 트웨인이 말한 "도금시대(gilded age)"란 유명한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들 암울한 시대의 약탈적 독과점 기업과 아마존의 차이점이라면 결국 소비자와 얼마나 긴밀히 소통하고 공감하느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돈을 치르고 거래가 끝나면 안면몰수였던 지난시대의 기업과 달리, 아마존닷컴은 초심을 잃지 않고 고객의 입장을 중시하는 친구로 남는다고 말합니다. 여튼 기업이 이 정도로나마 대중을 상대로 정서적 배려를 하는 제스처도 처음 보는 모습인 건 분명합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이 기업이 전례 없던 혁신을 이어나가는 이상 아마 소비자와 함께 나눌 몫, 되돌려 줄 몫도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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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1 (특별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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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다른 건 몰라도, 어려운 주제를 어린이용 모험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가독성 최고로 표현하는 재주만큼은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당할 작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소설 전편을 통해 "감정이 농도 짙게 흐르는 기억은 유독 강하게 뇌 속에 남는다"는 말이 나오지만, 이 책에 나온 뇌신경학 여러 원리와 "당신이 몰랐던 진짜 역사"의 편린들은 아마 독자들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습니다. 이 책 2권 p242에는 "더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승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법칙(?)은 작가 자신에게도 적용되지 않겠나 싶어요.

p26에 "그렇게 우리는, 아니 자네들은.."이란 말은, 역사에서 언제나 "them and us"로 나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영원한 간극을 실감케 합니다. 이 신작 <기억>의 주제는, "그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왜곡된 진실을 언제나 회의해 보고 비판할 줄 알자는 쪽이니 말입니다. 이 대목에 나오는 로베르 조르주 니벨 장군은 2차 대전의 매국노(1차 대전 구국의 영웅) 페탱과 동갑이죠.

주인공 르네는 역사 교사이며, 신비한 능력을 지닌 오팔의 도움을 얻어 전생(前生)의 자신(들)인 (여러) 영혼과 교감합니다. 처음에 아직 재주가 서투를 때는 먼발치에서 영화처럼 구경만 하다, 슬슬 스킬이 늘수록 대화도 나누고 "그보다 더한 것"도 시도합니다. 전생 중 하나인 메노는 갤리선의 노잡이 노예인데, 적절한 시점에 르네가 개입하여 "내면의 소리(웹툰 마음의 소리가 생각나네요)"를 들려 주어 그(라기보다 자기 자신)가 바른 선택을 하게 돕습니다.

이 1권에서는 자주 로마인들의 의도적 역사 왜곡 중 하나로 "카르타고 인들은 식인 습관을 지닌 야만인"이라고 한 행적을 거론합니다. 이는 전근대 사회, 심지어 현대에 들어서도 지배층이 피지배층에게 그릇된 타자의식을 주입하여 "누구누구는 너의 적"임을 세뇌하는 관행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이겠습니다.

책에는 없지만 신대륙 선주민에 대한 잘못된 지식 중 하나가, 미개인은 머리 속에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이것은 신(이나 어떤 초월적 존재)의 계시"라며 폭주한다는 것이죠. 그저 자기 생각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현재는 이런 인식이 백인층의 왜곡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작가 베르베르는 이런 잘못된 선입견을 재치있게 비틀어 이 소설의 제재로 활용하지 않았나 싶네요. 우리도 어느날 문득 좋은 생각(영감)이 떠오르면 전생, 혹은 후생의 "나의 영혼"이 잠시 찾아와 조언을 베푼다고 여겨야겠습니다. ㅋ

베르베르 특유의 여전한 유머도 여기저기서 보이는데 이를테면 p126에서 "자신은 언제나 조정이 싫고 요트가 좋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제2권 p74에서는 다시 "요트의 진화를 보면 메노가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고도 합니다.

베르베르의 특유의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통찰도 여전히 빛납니다. p126에는 고통의 중단이 곧 쾌감이라고 하며, p128에는 행복한 삶은 주관적이라는 타당한 진리를 되뇝니다. p134에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정신은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제2권 p77에서 이 대목이 오팔의 말 "게브가 가르쳐 준 대로..."에서 반복되기도 하죠.

저 뒤 p186에는 하고자 하는 확신만 있으면 못 할 일이 없다는 말이 다시 나오는데, 2권의 p293, p303에는 "정신의 자유로운 운용"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또 하나의 전생에서 사무라이였던 르네는 "적아 칼을 뽑고 내가 그걸 대비하는 사이에 무한대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걸 깨우치는데 많이 공감되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건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르죠.

p137에서는 "지진? 가끔씩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삶이 지루하지"라는 게브의 말이 나오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대로 "일체유심조"가 아닐까 합니다. p141의 "무사태평함과 그에서 비롯한 삶의 힘"이라든가, p146의 "살아있는 한 삶에서 만나는 이런저런 불행은 잔파도에 불과하다"는 말 등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돕습니다. 저 뒤 p346에는 스트레스가 잦으면 해마에 구멍이 나고 이것이 기억력 감퇴를 유발한다는 신경학 지식이 나오죠. 그러나 강한 사람이라면, 저 게브의 말처럼 "삶에 있어 일종의 자극" 정도로 잘 소화할 수도 있습니다.

무사태평함과 그에서 비롯한 삶의 힘! p289에서 르네를 조사하던 형사는 그의 범죄 혐의보다 초연한 태도를 두고 더 큰 증오심을 표현합니다. 소인배가 더 우월한 존재를 질시하는 이런 모습은 제2권에서 원시 인류가 아틀란티스 인들을 공격하는 장면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p150, 또 제2권 p100에는 "나비 효과"라는 말이 나오는데 십여 년 전 미국 영화 <나비 효과> 역시 (일기장의 도움과) 정신 집중을 통해 위험한 순간마다 붕 자신의 과거로 여행하는 이야기였죠. 어쩌면 베르베르도 그 영화를 통해 영감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맞을 듯) p152에는 "법률상 아버지의 30퍼센트 이상이 사실은 남"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사실 프랑스인들의 혼외 관계는 상상을 초월하게 문란하죠. 영화 <셸부르의 우산>도 사실은 이런 모티브를 조금은...  p175에는 아버지가 요양 중인 시설 이름이 "파피용"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게 "나비"라는 뜻이며 같은 제목의 영화도 있습니다. 그 영화의 주제는 "자유"입니다.

시설에서 르네의 아버지는 "사람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p177)를 보이는데  르네는 이걸 두고 "혹시 아버지의 선택"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합니다. 많은 환자들은 "아프니까 저런 행동을 하지" 싶은 동정의 시선을 받지만, 사실은 그 중 상당수가 의도된 행동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 작품에서 르네의 부친 그 동기는 2권에 가서야 제대로 드러나고요. p181에 "간유 한 잔"에서 와 정말 비위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부친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사회 해체를 주장하는 히피의 삶에 크게 공명했다는 말이 있는데 p278, p166, p178 등에 나옵니다.

p183에서 다윈의 말이라며 "그들이 이긴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건 사실 다윈이 생전에 가장 경계했던 태도입니다. 이른바 사회적 다윈주의에 대해 다윈 본인은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었죠.

르네의 여친 엘로디는 과학 교사인데 p211에서 "그래서 나는 남자들에게 너는 여자들에게 이용당하고 만다"고 하는데 신중하긴 하지만 뭔가 피해의식이 비춰지기도 했습니다. p332에서는 다시 전문가들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고, 2권 p84에도 다시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1권에는 남녀 관계에 대해 작가 베르베르의 유익한 통찰이 나오는데, p212 남자를 파멸시키는 여자의 유형에 대한 언급, p215에는 "성적인 접촉이 배제된 그저 편안한 융화"가 최종지점일 수도 있다는 말도 나옵니다.

p274에는 유명한 에릭 번의  교류 분석 이론이 나오며, 르네를 향해 너의 행태는 "퇴행 분석이 아니라 그냥 퇴행"이라고 꼬집는 말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p392에서 "슈멩 데 담의 전투 교훈" 같은 건 절대 그렇지 않고 유익하죠.

한편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줄기는 게브와 르네의 소통이겠는데, p136에 벌써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나의 전후생"이 언급됩니다. 2권 p97에는 오팔의 말로 "어쩌면 당신이 역사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꿔 놓은"이 나오고요. 아마 1권 p136에 저 말이 나왔을 때 많은 독자들은 예사로 여기고 넘어갔을 겁니다.

p220에서 구두장이 신발이 가장 더럽다는 말은 우리네 속담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와 비슷하지 않을까도 생각했습니다. 초연하고 이상적인 삶을 사는 게브 들의 독특한 삶의 특성 중에는 "(p244)우리에게는 잉여가 발생하지 않아" 같은 게 있어 마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떠올리기도 했네요. p305에는 뇌 활용 방법이 언급되는데 아마 재발견만 된다면(!) 자계서 주제로 짱일 것 같습니다. 여튼 그들의 삶은 매우 평온하고도 이상적이며 p305의 폭력에 대한 경멸이라든가 p243의 육식에 대한 혐오, p247의 "무려 80억이 사는 공동체라면 애 다루듯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겠군!" 같은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2권 p238에는 이것 관련 "우리 조상들은 짐승이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나옵니다.

p358에는 게브와 그의 배우자가 서로 싸우는데 경지에 이른 현자답지는 않은 행동입니다(ㅋ) p359에서 "우리는 대체로 건강함"을 자랑하나, 소설 2권에서 p111 배 위의 다툼이라든가, 2권 p114에서 드디어 병에 걸린다든가 하는 장면은 그들 존재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p383에서 다시 나오듯 사실 그들의 기술 수준은 형편없습니다.

p258의 "집단의 기억"이란 키워드는 사실 이 작품 전체의 주제어에 가깝습니다. 2권 p347에도 "인류는 기억을 되찾지 않으면..."이란 말을 통해 그 과제의 절박성을 다시 일깨웁니다.

p291에는 감옥과 호스피스의 공통점에 대해 뼈아픈 한 마디가 있는데 마치 이번 코로나 사태 때 스페인에서 벌어진 노인 유기 사태가 생각나더군요. p313에 그 유명한 "메스머라이즈"라는 단어의 어원이 나옵니다.

p319에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명언이 나옵니다. 맥락상, 마치 예전 6. 25때 대중 사이에서 유행한 "먹고 안 죽으면 보약이다"가 떠오르기도 하더군요. 이것 관련 2권의 p116에 "시련은 끊이지 않는다..."도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문장입니다.

p322에서 "어떤 거짓말쟁이들은 탐지기도 속을 만큼 자신의 말을 믿는다"는 말이 나오는데, 한편으로 신념의 중요성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팩트를 무시한 채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비판도 되는 문장입니다.

p337에 "아틀란티스는 그리스어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역시 기록의 맹점 내지는 "승자의 기록이 낳는 왜곡"의 예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의 상상대로 아틀란티스가 설령 있었다 한들 그 endonym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죠. 우리가 아는 페르시아나 그 수도 페르세폴리스 역시 페르시아어가 아니라 그리스어이듯 말입니다.

p354 이하에는 마치 닥터 멩겔레 같은 괴물 의사 쇼브가 나와 "기생 감정"의 불필요성과 해악이라든가 "잡초 제거(p330)" 같은 요설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 중 일부는 매우 타당성이 크기도 하죠. 안타깝게도요.

p370에서 한때 프랑스 식민지였던 크메르에서 자신의 또다른 전생(상좌부 불교 승려)을 만난 르네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결국 광신이라는 점에서 같다"는 소중한 교훈을 배웁니다.

391에는 드디어 수시로 영혼 둘이 합쳐지며 더 큰 힘을 발휘하는데 르네-이폴리트가 아예 이름으로 나옵니다. 이 비슷한 예는, 2권 p91의 르네 -게브, p306의 르네-야마모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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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2 (특별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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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부터 르네의 모험은 스케일이 훨씬 커지고, 전생들과의 치열한 소통이 이어질 뿐 아니라 그가 현생에서 맞닥뜨린 다른 골칫거리들과의 투쟁도 가속화합니다.

사실 역사선생 르네는 별 힘도 없고 유약한 개인일 뿐이기 때문에 그 혼자 힘만으로는 우리 독자가 뭘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p10에서는 "모두가 나의 전생"이라며 역사교사의 각성과 다짐이 두드러지며, 그 이상의 존재에 대한 열망도 다시 강조됩니다. 저 뒤 p90에서 "이폴리트의 용기와 피룬의 침착성"이 함께 강조되는 미덕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p107에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필연성의 지배를 받는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기억>이라는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저 뒤에 나오는 "과연 우연일까?(p232)"라든가 "우리 모두는 우연히 태어난 게 아니다(p348)"도 마찬가지입니다.

p140에는 오팔 역시 "현생의" 나쁜 기억 때문에 고통 받았다는 고백이 나오는데 1권에서 여친 엘로디가 사이비 같은 전문가의 꼬임에 넘어가 자기 삼촌을 감옥에 넣게 된 아픈 기억과 비슷합니다. p154에는 전생에 마녀사냥으로 희생자가 된 이들의 아픈 기억이 이어지는데 이와 반대로 p301에서는 "(가해자로서) 더 이상의 업(業)을 짓고 싶지 않다"는 르네의 충고가 나옵니다. 르네는, 평소에도 동양 사상에 깊이 천착한 작가 베르베르의 페르소나인 셈이네요.

p155에서 베르베르는 캐릭터들의 입을 빌려 저술가 쥘 미슐레를 또다시 까는데 이미 1권 후반부에서도 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나왔더랬습니다.

p119, p162에는 두 번, 르네의 이름을 딴 "네에의 방주"가 나오는데 이게 바로 우리가 아는 "노아의 방주"일 것입니다.


p164에서 비로소 "자네 키가 그렇게 작았나? "라며 게브가 놀라움을 표시하는데 우리 독자들도 2권 이 대목에서 그들이 거인족인 줄 처음 알게 됩니다. 1권에서는 p358에 게브 부부가 "서른 몇 살 짜리 아기"라며 르네를 부르는 대목이 있었죠. 근데 이건 그들의 장수성만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습니다. 그들은 1권에서 우리 인간들보다 열 배의 수명을 사는 걸로 나옵니다. p169에서 멤피스가 "두번째 심장(그들 언어로)"이란 어원이 등장하네요.

p191 이하에서 "전에는 몰랐던 부정적인 감정을 발견"하는 게브들의 안타까운 투쟁에 대한 동정어린 언급이 있습니다. 한편 그들에게 선 문명의 존재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남겨야 한다는 오팔의 말이 나오는데, 작가 베르베르가 십수 년 전 미국 영화 <프리퀀시>에서 아마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p213에 나오듯 "세상은 돌고도는 법"이며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습니다. p242에는 "더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승자"란 말이 나오는데 작가 베르베르 자신에게도 해당되겠네요. "진실의 영역보다 믿음의 영역을 더 중시하는" 인간 종족의 불쌍한 한계도 다시 비판됩니다. p248에는 뉴스에 부정적인 평가가 다시 나오며, p219에는 "뉴스를 보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병원을 보고 파리 전체를 이해하려는 어리석음과 같다"는 말도 나옵니다.

p270에는 "살의가 한순간에 경외심으로 바뀌는 인간의 한심함"에 대한 비판이 있는데 러디야드 키플링의 고전 <왕이 되고자 한 사내> 중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p317에는 "우리를 섬기는 데서 희망을 찾는 소인족"을 보고 연민을 표현하는 게브 족의 말이 있는데, 글쎄요... 소설 후반에는 충격적인 반전이 있습니다. 이 대목은 종교에 대한 비판입니다.

p299, p334에는 각각 "선택을 피하는 손쉬운 삶"과 무조건적인 복종에 대한 회한이 언급되며, 우리 동양인들의 심성을 날카롭게 꿰뚫어봤다고 생각되네요.

앞서 언급했듯 르네 개인은 별반 힘이 없는 개인일 뿐입니다. p327, p355에는 "두 존재를 뛰어넘는 에너지"가 간절히 필요하다고 하는데, p389에 나오듯 "아직 113째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뿐입니다. 인간 존재의 존엄은 자유의지에 있으며, 순간의 선택과 자존의 추구를 통해 우리는 미미한 개인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 뿐입니다. 약간 슬프면서도 묵직한 메시지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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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는 자폐증입니다 - 지적장애를 동반한 자폐 아들과 엄마의 17년 성장기
마쓰나가 다다시 지음, 황미숙 옮김, 한상민 감수 / 마음책방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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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속으로 낳은 아이가 혹 어디가 아프다면, 어머니 입장으로서는 그보다 더 큰 시련과 죄책감이 또 없을 터입니다. 그래서 아픈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은 모두 영웅이시며, 그런 시련을 용케 피해간 다른 이들에게 과연 생의 목적과 존엄이 어디에 있을지 다시 한 번 깊은 생각을 하게 돕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합니다. 아니, 그들과 우리가 다르다는 생각 자체를 극복해야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겠고요.

"웃기도 하고 눈도 그럭저럭 마주칩니다!" 의사에게 반론을 가하는 엄마는 그런 말을 할 만한 자격(특별학교 교원)도 갖춘 분입니다. 그러나 비록 보통의 유형과 다를망정 의사는 그녀의 아이가 자폐증임은 확실하다며 가슴 아픈 진단을 내립니다. 이제 현실을 직시하게 된 엄마는 그러나 의기를 잃지 않고, 우리 소중한 아들에게 어떤 도움과 배려가 필요할지를 고민, 연구하게 됩니다. 이처럼 모든 영웅은, 부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가진 현실에 대해 결코 도피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이 특히 요즘 자주 강조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 아이는 단지 특별할 뿐이다." 그래서 지적 장애가 있는 분들이 참여하는 올림픽을 (패러림픽과 달리) 스페셜 올림픽이라고도 부르죠. 어떻습니까? 우리는 일상과 깊은 심리 속에, "특별하다"는 어의 중 과연 그런 뜻을 담고 생활합니까? 생각해 보면 정상인이라 자칭하는 우리 모두의 "정상성"은, 고작 유전자 배열의 우연적 장난 그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뚤어진 인간들은 자신보다 나은 사람의 재능을 두고는 "우연의 산물"이라 폄하하며, 반대로 이처럼 우리한테 아무 해를 끼치지 않는 이웃에 대해서는 터무니없는 우월감을 품습니다. 장애인이라는 폄하 자체가 없어져야 하겠으나, 구태여 그런 부당한 폄하가 간신히 올바른 대상을 찾는다면 바로 저런 비뚤어진 심뽀의 소유자들이 그 목표 지점이겠습니다.

"우리 훈이가 어떻게든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아무래도 이런 자녀분을 둔 어머니들이 맨먼저 믿고 의지할 곳은 그런 특수 교육기관입니다. 무사시노히가시교육센터는 훈이가 그나마 주변에 조금 관심을 갖게 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효과가 있기는 했습니다(p87). 하지만 소수를 제외하고는 세상이라는 게, 이 못된 세상이라는 게 특별한 아이들에 대해 특별한 배려, 아니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않습니다. p107에는 천주교회의 어느 신도가 훈이에 대해 가정 교육을 똑바로 하라며 어머니에게 면박을 준 이야기가 나옵니다. 종교인이라면서 이런 한심한 처신을 하는 인간이 어느 나라에나 있기 마련이며, 동시에 일본식 친절과 예의라는 게 사실 그 한계가 뻔한 위선이기 쉽다는 점도 다시 확인 가능했습니다. (좀 비약인가요?)

훈이는 자폐증세도 있지만 특정 식품에 대한 알레르기 증상도 있는데 알레르기라는 게 결코 우습게 볼 질병이 아니죠. 여튼 이런 이중의 어려움 때문에 엄마는 훈이를 맡기고 교육할 만한 시설과 학교를 찾기가 더욱 힘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엄마는 훈이보다 훨씬 몸이 아픈 아이들도 보게 되는데, 그를 통해 세상에는 정말 다양하고도 특별한 상황이 있음을 확인하셨나 봅니다. 우리들도 이런 과정을 거쳐야 타인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될 텐데, 이 책에 나오는 가슴 아픈 사연은 그저 다른 세상 일일 뿐이더군요. 한번쯤은 "이렇게 살아도 되나?" 같은 의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질 필요가 있어요, 분명.

도호대학의료센터에서 엄마는 좀 다른 진단 결과를 듣게 됩니다. "훈이의 행동은 자폐의 집착이 아니라 강박성 장애인 것 같습니다(p147)." 그런데 세상 누구보다 훈이를 잘 이해하는 엄마였기에, 의사의 이런 진단은 금방 납득이 갔죠. 리스페달, 데프로멜 등을 처방 받았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훈이의 증상은 나아지질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TV에서 인지행동요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엄마는 새로운 시도를 해 보았고, 도쿄 대학 병원의 최고 권위자를 만나고서야 약물 치료가 아닌 대면 요법으로 효과를 봅니다. K 의사를 특별히 잘 따르는 훈이를 보고 엄마는 조금이나마 안도하게 됩니다.

이 책에서 우리 독자들은, 아픈 아이들이 서로 비슷한 증상을 보이고 마는 게 아니라, 정말 각각의 방법으로 힘든 투쟁을 한다는 걸 알게 됩니다. 어떤 증상 하나를 치료하고 호전시키면, 그대로 낫고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증상 하나가 새로 나타날 수 있다는 거죠. 과잉교정의 일환이라고도 보이는데, 훈이가 자신이 새로 들인 습관을 엄마에게도 막 적용하려고 든 겁니다. 사실 어린 아기를 키울 때 말을 잘 안들어서 얼마나 엄마들이 고생을 합니까. 그 어린 심성이 몸이 커서도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이에게 장애가 있든 없든 그 아이를 키우며 엄마는 부모가 된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요즘 광고를 보며 "나를 엄마가 되게 해 줘서 고마워"라고 하는 장면을 봤는데,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이 괜히 명언이 아닙니다. 아픈 아이를 키우는 자체가 여간한 시련이 아닌데, 그걸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엄마들이란 영웅을 넘어 성인에 가깝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건, 치료에 대한 정보 공유가 좀 체계화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아픈 아이를 치료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게, 도대체 어디를 어떻게 찾아가야 아이를 그나마 좀 낫게 할 수 있는지 일일이 엄마가 발견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게 더 막막해 보이더군요. 사회가 이런 특별한 아이들의 길 하나를 온전히 마련 못 한다면, 그 성원 모두가 사실 죄를 저지르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의 존엄이 보장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의 평안과 권익도 결국 어느 순간에서는 침해되게 마련입니다. 무관심도 때로는 죄악이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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