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기분 -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나를 찾아온 문장들
이현경 지음 / 니들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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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란 참 화려한 직업 같은데 그런 직종에서도 여러 가지 애환이 있나 봅니다. 하긴 사람 사는 모습이 어딘들 비슷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죠. 이 책은 우리가 SBS, 특히 피겨 스케이팅 중계 할 때 그 낭랑한 목소리를 익히 들어 온 이현경 아나운서의 솔직한 고백이 담긴 책인데, 읽으면서 뭔가 뜨끔해지는 대목도 있고 인생을 깊이 성찰하는 계기도 던져 주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그게 너의 한계야." 사람이 직장이나 혹은 어떤 조직이건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일관성, 규칙성, 성실성인데, 때로는 이게 "한계"로 지적 받을 수도 있나 봅니다. "의외성"이란 게 있어야 재미가 있다는 말씀은 물론 옳으나, 재미가 또 다는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피겨로 바로 연결시켜서 연기의 레귤러함과 파격의 미, 이쪽으로 화제를 옮기는 게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이런 재주는 그것도 흔한(?) 규칙성의 일부일까요, 아님 어떤 깨달음의 효과일까요?

누구든 익숙한 루틴에만 빠져 있으면 지겹기도 하고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그 익숙함을 못 견뎌하는 게 보통인데, 저자는 그런 루틴 속에서 자신만의 무엇을 찾아내는 데에 특별한 의미를 두시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건 사람마다 다 성향, 가치 부여 정도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데 높은 가치를 두는 사람은 결국 그 길로 가야만 하는 게 아닐까요. 또 그 사람이 어떤 직종에 종사하는지에 따라서도 다른 결론이 나올 듯합니다. 루틴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직종도 있을 겁니다. 아닌 직업이 훨씬 많겠지만.

"그러다 보면 나만의 춤사위를 인정 받는 때가 온다.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내가 나만 믿어 준다면" (p51)

사실 꼭 어떤 위인이 되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어떤 업적을 후세에 남기지 않더라도, 나와 내 주변의 지인들이 알아 주는 사람이 된다면, 또 무엇보다 내 자신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만 되어도, 그래서 죽음의 자리에 행복하게 눈을 감을 수만 있어도 그 사람이 인생의 승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가치에 대해 누구보다 자신이 정확히 평가하고 있으므로, 내가 내 자신의 마음에 든다면 그게 최고의 성취 아닐지요.

우울증은 어떤 특별한 사건이 계기가 될 수도 있고, 별 이유 없이 찾아와서 끈덕지게 사람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저자님의 경우 부친상을 당하고, 또 얼마 안 되어 세월호 사건이 터져 더욱 우울증이 심해졌다고 합니다. 확실히 세월호 사건은 많은 국민들을 힘들게 만든 사건이고, 이런 사건이 개인적 불행에 덧이어 일어났으니 얼마나 힘드셨을지 쉬이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기억하는 한 떠나지 않는다(p69)." 이런 인디언 속담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는데, 기억을 곱게 다듬어야 남은 사람들 마음에 상처가 안 남을 듯도 합니다. 돌아가신 분들보다 더 힘든 건 언제나 남은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예전에, 하드 렌즈에 대해 어떤 전문가께서 (제 기억으로는 다른 방송도 아니고 바로 SBS에 나와) 하드렌즈가 당장은 불편해도 눈 건강에는 더 좋다며 홍보하시는 걸 본 적 있는데 저자께서도 혹시 자사 방송을 보고 결정하신 건 아니었는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책에 나오는 대로 유난히 뭐가 안 맞는 체질이 있기 마련입니다(그저 심리적 불편함일 수도 있지만). "뭐 다 지난 이야기다.(p82)"라며 아쉬운 커리어 구축의 챈스를 놓친 시기를 담담히 회고하는 데서 일종의 달관이 느껴지기도 했네요.

세상에 운이 따라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따로 있을까요? 멘토 노릇을 잘해 주셨으니 직분 중 중요한 몫을 잘해 낸 셈이라 누군가가 "잘했다"며 토닥여 줄 만도 한데, 그런 사람이 곁에 없어 아쉬움이 더 컸던 것 아니었을까 제 멋대로 짐작해 봤습니다. 운 좋은 사람을 운 계속 좋게 이끌어 주는 그 사람이 바로 더 큰 실력을 갖춘 사람 아닐지요. 그런 사람이 곁에 있기에 운 좋은 사람더러 운 좋다고들 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탕수육을 먹고 싶은 사람은 탕수육을 먹고, <트랜스포머>를 감명 깊게(?) 본 사람은 그 감명을 유지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떤 조직 문화가 개인의 취향을 강요하는 부분이 있다는 말은 들어 봤지만, 특정 직종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일반, 혹은 국외자들의 선입견이 개인의 영역을 침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처음 해 보게 되었습니다. 하긴 평범한 시청자인 저부터도 아나운서가 안경 끼는 문제, 취향이 어떻다는 문제에 대해 일정한 편견을 갖고 있으니 뭐. 이것도 일종의 폭력, 혹은 이기주의가 아닐지요.

"어떻게 하든지 꾸역꾸역, 지속하면 어떻게라도 하겠지(p165)."
우공이산이란 말이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힘든 건 남들 눈에 띄고, 어떻게든 튀고 이런 게 아니라, 한결 같은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유지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책 제목은 "아무것도 아닌 기분"이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항상 그 자리에 한결 같은 퍼포먼스로 머물러 있는 그 역량이 위대해 보입니다. 2진이라는 겸손함 속에 사실은 은근한 플렉스가 숨은 건 아닐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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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생활 영어 Step by Step - 가장 알기 쉽게 배우는 초등 영어 Step by Step Book 5
방정인 지음 / 반석출판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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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영어를 두고 "공부가 아니라 체육"이라고 하는 걸 들었습니다. 영어는 공부, 연구의 대상이라기보다(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몸으로 익히고 습관으로 몸에 배게 하는 체험의 과정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겠습니다. 적어도 어린 학생들에게는 좋은 발음을 자꾸 들려 주고, 입으로 따라해 보게 하는 과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 책은 어린이들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상황에서, "그걸 어떻게 말로 잘 표현할까?" 같은 고민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진 책 같습니다. 어른들도 아무리 영어를 오랜 세월 동안 공부했다고 하나, 상황이 펼쳐지면 그에 걸맞은 반응이 말로 척척 안 나옵니다. 이 책은 아이들 입장에서 정말 좀 절실하다, 자주 만난다, 뭐 이런 표현을 가득 담고 있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영어 어지간히 하는 한국인들도 must와 have to 사이의 차이점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이 책은 비록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삼지만 여튼 비슷해 보이는 여러 표현들을 어렸을 때부터 명확하게 구분하게끔 돕습니다. "의지", "외적인" 같은 표현이 어렵다면, 부모님들이 옆에서 아이가 잘 이해하게 도우면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저는 아무리 초등학생용 책이라고 해도, 먼저 부모님이 읽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엄밀히 말해 초등학생이 혼자 보고 혼자 깨치는 책은 없다고 봐도 됩니다. 어떻게 초등학생한테 독학이 가능하겠습니까? 모든 책은 부모가 옆에서 도와 주면서 읽혀야 합니다. 또한, 부모님이 먼저 보고 "아 맞아, 그렇지."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뭔가 납득이 되는 부분이 많아야 좋은 책입니다. 위 사진 보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으시는지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유학을 갈 때, 꼭 보면 어려운 단어는 잘알아도 현지인, 원어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아주 기초적인 걸 몰라서 망신을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잭과 콩나무>에서, 거인이 읊는 이상한 소리 "FEE FI FO FUM!" 같은 게 다른 텍스트 중에 나오면 무슨 뜻인지 몰라 당혹한다든가 하는.. 동물의 울음소리 같은 것도 입시 과정에서는 전혀 다루지 않기에 사실 이걸 초등 과정에서만 보고 끝냅니다만, 이게 가장 기본적인 것이므로 아이들에게 소홀히하지 말고 배우게 해야 합니다. 



초등 영어 말고 성인용(토익이라든가) 생활영어에서도, 예를 들어 (boys!말고도) "guys!" 같은 표현이, 저 위 사진에서 보듯, "남자 1명, 여자 5명"이 있을 때도 쓰입니다. 이게 우리 감각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여튼 저들이 그렇게 쓰므로 익숙해져야겠습니다. 그 외에도 문이 닫혀 있을 때 "누구냐?"가 Who are you?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겠습니다. 이 역시 중1때 이후로는 잘 강조하지 않는 내용 같습니다. 초등생때 확실히 몸에 배게 해야 이후의 모든 학습 내용이 머리 속에, 또 의식 속에 잘 자리잡겠지요. 



sore throat 같은 건 예를 들어 애를 유학 보낼 때, 어디가 아프기라도 하면 그걸 의사한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게 얼마나 유용하겠습니까? 저는 이런 게 특히 어린 유학생의 경우 가장 절실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throat 말고 다른 부위도 적용이 가능하죠. backache 같은 건 철자만 보면 어려우니까 발음을 반드시 같이 하게 해서 익히게 만들어야 합니다. 맨밑에 AIDS도 있네요.



이 페이지는 답을 고르는 게 아니라, 밑줄 친 부분에 1, 2, 3, 4를 차례로 넣어 응용을 연습시키는 게 목적입니다. 어른들은 거의 조건반사처럼,  1, 2, 3, 4만 보면 정답을 고르려 들죠. 정답은 저 모든 선지가 다 해당됩니다. 만약에 동의어를 고르라면 답은 1이겠으며, reach(타동사)를 대신 써도 될 겁니다.


이 책은 부록으로 CD가 딸려 있습니다. 요즘은 출판사 홈페이지에서 mp3 파일을 다운받게 하지만, 홈피가 접속 안 되는 수도 있고 어느날 갑자기 서비스가 종료되기도 합니다. 이 책처럼 아예 CD 미디어를 주면 그럴 염려가 없어서 아주 편합니다. 부모님들은 혹시 모를 파손에 대비해서 내용을 컴퓨터에 백업해 두면 더욱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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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두 번
김멜라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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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입니다. 모두 일곱 편이 수록되었는데 일곱 편 모두가 다, 젠더 이슈를 전면에 내세우거나 한 소설들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소재, 내러티브가 불편한 분들은 뒤에서부터 읽어도 좋겠으며, 뒤에서부터 읽은 멋진 작품들이 마음에 들면 그때 앞의 문제작(?)들을 읽기 시작해도 될 것 같습니다.

<홍이>는 좀 무서운, 읽기에 따라서 호러처럼도 받아들여지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중경은 형사인데, 어느 독거노인(할머니)의 죽음을 사건으로 처리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난생 처음 맡게 된 "시체 썩는 냄새"에 기겁합니다. 여기서 그는 할머니 말고 어떤 "개"와 만나게 되고, 아주 어렸을 적 시골 마을에서 만난 닭, 개, 그리고 훨씬 전 죽은 어떤 이름 모를 원혼에 공히 붙여진 이름 "홍이"를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중경과 그 삼촌은 여러 "홍이"들에 대해 일종의 죄책감을 공유하는데, 무슨 생각인지 우연히 만난 어느 여성과의 사이에 낳은 자신의 아이에게 "홍이"라는 이름을 붙여 줍니다. 그리고 그 아이(중경의 조카)는 커서...

<스프링클러>는 "불"에 대해 공포심을 가진 어머니, 그 어머니를 몹시도 미워하는 아버지와 형(세준), 어머니에 묘한 동료의식을 가지는 주인공 세방의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 역시 "젠더"가 전면에 드러나는 이슈는 아닌데, 평론가 김건형은 권말의 해설(p264)에서 세방의 모친이 겪은 "비숙련 여성 노동자들의 기숙사에서 발생한 화재"를 환기하며, "감정의 젠더적 패턴으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만 어째 좀 억지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뭘로 해석하건 읽는 독자의 자유이며, 정답이 있는 건 아니겠으니 각자 편안히 읽으면 좋을 듯하네요.

<에콜>는 어느 공시생의 이야기인데, "공무원"이나 "고시"라는 말은 한 번도 안 나오고 그 자리를 "리본"이라는 말이 대신 채웁니다("완장"이 아니라는 뜻이겠죠). 주인공은 고시나 공시에 합격해서 멋진 인생, 남들 앞에 군림하는 뽀대나는 인생을 누리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저 남을 돕고 기계적으로 성실한 일만 처리하는 "로봇"이 되는 게 그의 꿈입니다. ㅎㅎ 책소개글에서 이 부분을 잘못 읽어서 저는 이 작품이 SF 비슷한 건 줄 착각했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저 역시 "에콜"이라는 단어를 "앵콜"로 처음에 잘못 읽었는데, 작품에는 정말로 간판의 탈자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왠지 엥콜보다 에콜이 더 뭔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한 그분은 풍속업을 영위하는데, 매번 시험에 떨어지는 주인공이 목소리만으로 해석하는 "그녀(들)의 전혀 다른 세계"가 볼만합니다.

<적어도 두 번>은 말이 안 통할 것 같은 교수 "유파고"에게 계속 말을 걸며 소통을 시도하는 어느 목소리가 들려 주는 이야기입니다. "지위"와 "X위"를 의도적으로 혼동하며, 특정 부위를 "그리스식으로" 바꿔 부르며 허위의 벽을 허물려는 집요한 말걸기가 인상적입니다. 말이 안 통하는 관계는 결국 두 맹인의 상호 응시나 마찬가지겠는데, 읽으면서 본문 안으로 유파고 씨를 좀 불러들여 말을 시키고 싶은 건 독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호르몬을 춰줘요>는 어느 인터섹스 청소년의 이야기인데 읽으면서 징글징글해지는 대목도 많았지만 생각을 많이 하게 돕는 묘한 푸념, 호소, 당당한 표백이 좀 놀라웠습니다. <어린 왕자>가 좋은 이유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몰라서"라는데,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말을 듣고 그런 생각을 처음 해 볼 듯합니다. 마틴 가드너의 수학 대중서를 보면 "이 그림이 할머니로 보이는지 아니면..." 같은 게 있는데 모든 게 다 보는 사람 마음에 달려 있으며, <어린 왕자> 본문 중에도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 모자로 보이는 게 보통이라는 말이 나오죠.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이른바 "탈코 패션"을 한 여자처럼도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어린왕자를 왕자라 부르는 건 남자라서가 아니라 자기의 왕국을 갖고 있어서이다(p21)"라는데, 글쎄요 소설의 맥락을 떠나 말 자체로만 놓고 보면, princess regnant도 역사상 엄연히 있었으므로 뭐 이게 맞는 말은 아니겠습니다.

"현대 음율 속에서
순간 속에 우리는
너의 새로운 춤에
마음을 뺏긴다오"

이 가사가 본문 중에 두 번 나오는데, 저 노래와 가수가 젠더 코드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저도 성장기에 저 노래를 들었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태원의 어느 클럽에서 묘한 복장을 하고 묘한 춤을 추며 저 노래를 부르는 묘한 성별을 가진 분(작중에 묘사된)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비로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사실 저 부분 가사가 "현대 음율 속에서"인지도 이 소설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그렇게 어려운!). TVN의 <놀라운 토요일>도 아니고....

사실 제가 놀란 건, 저 노래 가사 중에 특정 부분이 "리듬 쳐줘요"가 아니라, "리듬 춰줘요"였다는 점입니다. 이건 인터넷 검색을 해 보고 알았는데, 리듬은 "치는" 거지, "추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엄밀히 말하면 전자도 틀린 겁니다만). 하, 그런데 "춰줘요"였다니, "그 가수분(소설 속에 잠시 나오는 분 말고 유명한 그 연예인)"은 리듬을 추시는 분이었다는 건가... 여튼 그래서, 이 단편(읽고 나서 상당히 머리가 아파집니다만)은 제목이 "호르몬을 춰줘요"입니다. 하긴, 어떻게 해도 호르몬을 "칠" 수는 없죠.(그럼, 출 수는 있고?)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의 (개인적) 부작용 중 하나는, 앞으로 김XX님의 그 노래를 들을 때(자주는 아니겠지만)마다 IS가 생각날 것 같다는!

"그 도서관"에서 빌려 왔다는 <털 없는 원숭이>는 데스먼드 모리스의 고전인데, 그 책에는 젠더 이슈에 대한 설명은 여튼 없습니다. "교미"가 짧은 토픽으로 나오기는 하는데... 뭐 어쨌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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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세계경영이 있습니다 - 가장 먼저 가장 멀리 해외로 나간 사람들의 이야기 2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엮음 / 행복에너지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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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서야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무역 대국이며, 코로나 진단키트를 전 지구에 수출하는 나라이지만 30년 전만 해도 존재감이 미미했습니다. 이런 이른 시기부터 그 보는 시야를 세계로 넓힐 것을 강조하며, 대담하고 창의적인 발상과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경영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대우그룹의 창업자 김우중씨입니다(창업 자체는 1960년대로서 훨씬 이른 시기). 1980년대 후반이면 아마 청소년들 사이에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읽힐 무렵입니다. 그 즈음 대우그룹은 (이 책에서 보듯이) 세계 곳곳에 지사를 설립하고, 공장을 세워 현지인을 고용하며 "대우"라는 브랜드를 널리 알릴 시절입니다.

"대우맨"들은 그 당시 특히 소속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다고 합니다. 다른 대기업들도 창업자의 신화적인 행적이 널리 알려졌지만, 제 생각에 대우는 창업자뿐 아니라 그가 거두어 아끼고 키웠던 휘하 사장급 인물들도 그에 준하는 유명세를 탔던 기업인데, 다른 대기업에서는 이런 예가 비교적 드물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삼성에서도 진 모 씨, 현대에서는 이 모 씨(이분이 훨씬 선배지만) 등이 있긴 했지만 말입니다. 제 생각에 그 비결은, 대우만의 독특한 기업 문화에서 비롯한 것 같습니다. 대담하고 어떤 격에 얽매이지 않는 창의적 사고를 회장부터가 독려(p29)한다든가 하는 게, 특히 삼성 같은 곳이라면 좀 찾아보기 힘들겠죠. 현대도 오너의 그 숨막힐 듯한 카리스마 때문에 자유로운 행동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카길이나 더나번트 같은 원면 메이저가 된다는 꿈을 꾸었다..." 이동근 대화아이앤씨 상무의 회고인데, 역시 저는 이 역시 그 당시(저자가 회고하는 1990년대 초중반) 다른 대기업에서는 쉽사리 갖기 힘든 포부나 다짐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필자는 원면 수출입의 경우 더 이상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이는 물론 대우가 갑자기 그룹 해체가 된 까닭도 있겠으나, 그간 산업 구조가 크게 바뀐 까닭도 있겠죠. 또 당시에는 대학생들 사이에 MBA 코스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미시간大에서 수료 중이던 저자를 비롯한 여러 대우맨들에게 김 회장이 끝까지 지원을 약속한 점(p28)도 인상 깊었습니다. 이 역시 다른 회사였다면 좀처럼 지켜지기 어려운 약속이었을 겁니다.

수단은 현재 남부의 남수단이 독립한 상태지만 한때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하던 나라였죠. 차백성 필자는 이미 2000년에 퇴직한, 앞의 이동근 필자와는 세대가 다른 분입니다. 책의 특징 중 하나는 필자들이, 자신들이 한창 젊은 열정을 불태우던 시절의 사진을 골라 책에 실었다는 건데, 역시 상사맨들이라 스타일이 깔끔하고 댄디하다는 사실입니다(그 당시 기준으로 ㅎ). 현지인과 격의 없이 친하게 지내라는 주문은 대우뿐은 아니고, 당시 중동에 진출한 대부분의 기업들이 그리 방침을 정해 사원들에게 지시했습니다. 현대 같은 경우 어느 책에 "가서, OOO고 OOO라"란 말도 있었는데 표현이 다소 과격해서 전에 읽던 중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아마 1980년대를 산 어른들 같으면 여행가 "김찬삼씨"를 잘 알텐데 이 책에도 그분 이름이 나옵니다. 당시에는 한국인 여행가가 드물었기 때문이죠(해외 여행 자체가 금지된 시절). 차 필자는 현재 그 김찬삼 씨처럼 여행작가로서의 삶을 사시는 듯합니다. 필자는 또한 "나는 학창 시절 그리 성적이 좋지 못했으나, 호기심은 남들에 결코 못지 않았다"고 하시는데, 이런 분들도 기꺼이 품고 그 장점을 살려 주는 게 바로 대우만의 독특한 문화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대우가 1980년대 말에 동유럽에 진출했던 건 널리 알려졌으나, 프랑스에도 현지 공장을 두었던 건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유재활 필자는 당시 로렌 지방에서 근무했는데, 책에도 나오지만 도데의 <마지막 수업>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죠. 프랑스이다 보니 한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그곳만의 독특한 노조 문화도 하나의 장벽이었을 텐데, 글에서는 그런 부분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언급이 어렵다는 건 대우가 현지인 노조와 아주 잘 융화했다는 뜻도 됩니다. 몇 년 전에도 미국 월풀이 LG와 삼성에 반덤핑 제소를 했습니다만 결국 이들 기업이 현명하게 위기를 넘겼듯이, 1990년대 초에 대우도 프랑스에서 비슷한 곤경을 겪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2003년에 프랑스 대우 공장이 문을 닫았는데, 이런 일이 생기면 그동안 애써 쌓아온 현장의 암묵지가 묻혀 버리는 게 안타깝죠(p63. 또 저 앞 p29).

대우하면 또 1980년대에는 VTR이 유명한데, 기기뿐 아니라 컨텐츠를 담은 테이프도 유명했죠. 현재 OCN이란 채널이 있지만, 이게 1990년대 중반에는 DCN이었고 이때 D가 대우의 약자입니다(p77). 그 이야기가 p66 이하에 나오는 우형동 대표의 사연입니다. 재미있는 건  HBO가 이들 대우맨들에게 친절히 사업 분야의 특징이라든가 노하우를 가르쳐 주는 대목이었습니다. 또 제가 눈여겨 본 건 이 케이블 채널 설립 과정이 민간 주도가 아니라 1990년대 초 정부가 정책 가이드라인을 먼저 내어놓고 우 저자 같은 분이 나중에 그에서 구체적인 착상을 얻어 추진했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그때와는 크게 달라져 민간에서 무엇이든 먼저 시도가 이뤄지죠.

중국은 지금도 우리에게 큰 시장이지만 대우를 비롯하여 한국의 대기업들은 당시 덩샤오핑이 갓 개방을 시작했을 때 이미 중국에 열심히들 진출했습니다. 책에는 이미 1987년에 푸저우에 진출했던 대우 이야기(p96)가 나오네요. "진짜 영업맨은 SKY출신도 아니고 MBA출신도 아니다. 오로지 '들이대' 출신이다.(p99)" 바로 이게 바로 대우 정신입니다.

대우는 영업이나 무역, 제조 분야만 있는 게 아니라 금융 섹터도 강했습니다. 한국에서 몇 개 안 되는 대형 IB 중에 "미래에셋대우"가 있는데 박현주씨의 미래에셋도 물론 굴지의 업체였지만 그와는 별개로 뒤의 "대우(증권)"을 잊으면 안 되죠. "경제와 산업이 몸이라면 금융은 피가 되는 것이다(p105)." 사실 대우는 차입경영으로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역으로 그만큼 자금 조달 능력이 탁월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책에서는 "증권사관학교"라는 말도 나옵니다(p106).가치투자의 철학으로 지금도 전설로 꼽히는 템플턴 경을 직접 만나기도 하셨는데, 책에도 잘 나오지만 영국은 특히 금융가라는 게 일류 학교를 나와 인맥으로 엮이지 않으면 발도 못 붙이는 풍조로 유명하죠. 이런 곳에서 업적을 이룬 구자삼 필자 같은 분의 역량이 참 존경스러웠습니다. 단, 책에도 나오지만 대우증권은 본래 대우 계열사는 아니었고 삼보증권을 대우가 나중에 인수한 거죠. 대우는 본래 이처럼 인수해서 경영하는 계열사가 좀 많았습니다.

지난주 금요일 두산인프라코어에 대해 현대중공업이 인수한다는 보도가 나와 주식시장이 크게 들썩였다가 진정되었습니다. 두산인프아코어가 (현재 모기업인 두산이 크게 힘듦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알짜기업임이 다시 확인된 해프닝이라고도 할 수 있죠. 이 두산인픙라코어, 또 공작기계 등이 원래 대우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이 역시 1970년대에 정부의 권유(p122)로 대우가 인수한 기업이지만 말입니다.

김우중 창업주가 말년을 베트남에서 보낼 만큼, 베트남과 대우는 매우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p145에 보면 "베트남의 자원, 토지는 결국 베트남인에게 돌려 줘야 한다"는 김 회장의 말이 나오는데, 이런 정직한 철학이 있었기에 베트남에서 대우가 그리 큰 신망을 얻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GYBM은 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되듯 대우경영 철학의 정수인데(영어학원이 아닙니다) p151에도 다시 이 말이 나오네요. p13 머리말 중에 보면 신장섭 국립싱가포르대학(한국의 서울대를 능가하는 명문대죠) 교수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책좋사 카페에도 이 신 교수와 김 창업자의 대담을 다룬 책이 2014년에 이벤트로 나온 적 있습니다. p400 이후에, 대우의 세계 경영 정신을 현재의 청년들에게도 가르치는 GYBM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다뤄집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책 맨 앞 이동근 필자의 글에서도 주무대였는데 p152 이하의 김상태 필자는 그분보다 몇 년 연상이지만 여기서 다루는 이야기는 몇 년 후의 사연이고, 분야도 1차 산업이 아니라 IT로 매우 다릅니다. 막심, 비올라, 이고르 등 여러 이름이 나오는데 우즈벡은 구 소련의 영향력이 강해서 이름들이 이렇습니다. 며칠 전 부산에서 패싸움으로 뉴스가 난 "고려인"들도 대부분 여기서 온 사람들이죠. "미스터 킴은 나의 스승입니다." 이처럼 대우맨들은 현지인과 참 잘 융화하고, 모두가 윈윈하는 사업 패턴과 성과 달성에 능합니다.

"처음 듣는 말과 글을 익히며 잘 적응해 준 아이들이 무척 고맙고 대견했다. ... 그때는 그것이 김우중 회장을 비롯한 대우가족 모두의 워라밸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지금도 가슴에 이슬이 맺힌다(p167)." 이처럼 대우맨들의 회고에는 어떤 비정함, 각박함이 없고 한결같이 인간적입니다. 그래서인지 (이책 말고) 생산직 근로자들의 추억에도 대우맨이라는 회고에 반드시 모종의 따뜻한 자긍심이 담겨 있습니다.

"자율권을 존중하고 도전의식을 북돋는 기업 문화는 때때로 기적 같은 일을 많이 만들어내었다(p211)." 조봉호 두인코 부회장의 회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벨기에에 거점을 구축한 그는, 점-선-면의 전략 구상에 따라 차근히 현지를 공략합니다. 그는 또한 "오너나 경영자처럼 장기 변화는 모르지만, 중단기 전략에 관해서는 탁월한 감각이 있었다"며 자긍심을 표현합니다. (당시) 젊었던 사원이 이 정도로나 자신감을 갖게 된 것 역시 대우만의 기업 문화 강점입니다.

유태현 필자도 저 앞의 차백성씨와 비슷하게 해외 건설 파트에서 근무하신 분인데 "당시 너무나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월급을 많이 받으려면 해외 현장 근무를 자청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죠. 중동 건설은 익히 잘 알아도, 저 먼 중남미 에콰도르 키토에까지 한국인들이 진출했었나 싶은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때 공사는 여러 문제가 발생하여 결국 중단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실무에 대해 크게 배운 바가 많아 보람이 있었다는 회고가 인상적입니다. 이후 이분은 (우리가 잘 아는) 사우디, 리비아 등으로 다시 현장 근무를 합니다.

대우세계경영 하면 바로 폴란드가 생각나죠. 현지인들에게는 "대우"라는 발음도 어렵고 DAEWOO라는 철자는 더 어려운데 오히려 이걸 역이용해서 TV 광고를 만들어 동네 꼬마들까지 "대-우-대-우"를 중얼거리게 한 일화가 아주 유명합니다. 대우는 비교적 사원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는 문화가 잘 알려져 있는데, 권오정 과장(필자)에게 당시 현지 CEO였던 S사장님은 굉장히 무섭게 대했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도 상무께서 찾아와 달래 주었다는 사연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기업에선 좀처럼보기 어려운 모습 아니겠습니까.

"대우는 기술력 측면에선 삼성에 버금가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메이텍이 가져갈 수익성도 좋을 것이다.(p276)" 인천 제물포고를 졸업한 전영석 필자는 특히 대우전자가 어려울 시절 맹활약한 분입니다. ODM이 OEM과 어떻게 다른지도 나오는데, 생산자가 설계까지 책임지는 게 ODM이며, 금형 기술 수준이 큰 역할을 한다고 하네요. 이후 동부를 거쳐 위니아에 매각되었는데, 필자의 말씀은 "큰 책임감을 느낀다"이지만 저는 독자로서 이 대목을 읽으며, 모기업이 공중분해되는 와중에도 이처럼 생명력을 (현재에까지) 이어가는 그 놀라운 흐름에 경의를 바치고 싶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얼마 전부터, 모르는 분야에 대담하게 도전하는 정신을 강조하는 "후츠파" 이념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런데 구태여 낯선 히브리어를 쓸 게 아니라, 이미 1970년대부터 적극적 도전 정신을 내세우고 이런 창업자의 DNA를 임직원에게 보급한 대우의 멋진 사례를 먼저 들어도 좋겠습니다. p186에는 명품 고가 자동차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 마티즈를 판 최안수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패기와 도전 정신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청년들에게 "공무원 시험 준비"가 아니라 벤처 창업을 독려하는 나라가되어야 하며, 그 중심에 이미 1960년대부터 샐러리맨 신화를 일군 김우중의 대우 정신이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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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큰 기술, 일본 소부장의 비밀 - 왜 지금 기술을 중시하는 일본 기업에 주목하는가?
정혁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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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부장은 소재, 부품, 장비를 가리키는 약어(略語)입니다. 한국 역시 이제는 오랜 동안 제조업 강국의 위상을 지켜 왔으므로 소부장 강국 중의 하나입니다만, 그래도 아직은 일본의 저력과 깊이를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작년 여름 일본이 불화수소 금수를 단행함에 따라 급속히 소부장의 국산화를 도모했으며, 지금은 놀랍게도 상당 부분에서 성과를 크게 내는 상황입니다. 일부 몰지각한 층에서나 비관적인 시각을 노출했을 뿐이며, 불필요하게 자국 비하에 나섰던 이들은 현 시점에서 달성된 가시적 성과를 보고 크게 반성할 일이겠습니다. 천성이 무지한 데다 체계적 사고를 할 능력이 없으면, 감정에 기반한 폭주를 하다가 망신이나 당하기 마련이죠. 불화수소가 뭔지나 어디 알겠습니까?

아무튼 일본에는 여전히 강한 기업이 많고, 그 중 상당수는 소부장 섹터에서 특유의 저력을 발휘하는 중입니다. 이제는 일본을 총제적 롤 모델로 삼고 맹종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럴수록 겸허히 남의 장점을 배워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강자로 거듭날 수 있는 길입니다. 지금 증권시장에서는 제약바이오뿐 아니라 5G, 2차 전지 등에서 큰 랠리가 일어나는데, 이 섹터 모두에서 소부장은 매우 중요하며 눈 밝은 투자자들에 의해 주가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일본 기업의 장점까지 겸한다면 이런 기업들(의 주식)은 앞으로 더욱 성장주로서 각광 받을 것입니다.

나가시노 전투는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 막강했던 다케다 가문의 전력을 격멸했던 역사적 전투인데, 여기서 저자는 신상목의 책을 재인용하여 그 혁신의 정신을 지적합니다. 또 이후 덕천막부가 천하를 재통일한 후, 다소 이상하게 들리는 "쇄국 정책과 서양 문물 수입의 병용"을 정책으로 채택하는데, 여기에도 일본 특유의 실용주의가 드러납니다. 인공섬 같은 건 1990년대 부산에서도 추진하려다 만 적이 있는데, 에도 막부는 17세기에 이미 데지마라는 인공 섬 건설을 나가사키 상인들에게 발주한 바 있습니다.

본래 일본이 명치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도모할 때는 프랑스를 모델로 삼았으며 근대 민법전 제정 작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1871년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프랑스가 크게 패하고 바야흐로 독일 제국이 창립되자 일본도 시선을 돌려 독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빛나는 과학 발전상이라든가, 다른 나라가 좀처럼 따라올 수 없는 공학 부문의 선진상은 일본에 강한 인상을 주었을 터이며, 이후 유카와 히데키 교수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 에사키 레오나, 이후 다나카 고이치 등의 수상은 일본 과학과 기술의 놀라운 성취를 증명합니다. 특히 마지막 분은 학벌도 경력도 두드러질 게 없는 회사원 출신이라서 더욱 놀라웠죠. 저자는 이에 대해 "신기술 연구를 지원하는 기업 문화"의 소산이라고 지적합니다.

요시노 아키라 씨는 리튬이온 전지의 개발로 노벨상을 받은 엔지니어입니다. 지금은 리튬이온 전지가 안 쓰이는 데가 없다시피하지만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최신형 PCS폰에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만든지 3년 동안 전혀 매출이 발생하지 않다가 1995년이 되어서야 팔리기 시작했다(p86)." 과연 우리 같으면, 근 10년을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할 이런 무모한 도전이 싹을 피울 수 있었을까요?

한국에서도 1960 ,70년대에 심각한 식량 부족 현상이 일어나서 혼식 장려라든가 술 제조 제한 등의 조치를 정부가 취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알아서 잡곡류가 웰빙 식문화를 이끄는 등 환경이 크게 변했지만 말입니다. 일본도 1차 대전 후 쌀 가격이 폭등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합성주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마치 요즘 유행하기 시작한 배양육하고도 비슷할 듯합니다. 일본은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대량으로 미곡을 수입(약탈)하여 오히려 가격 폭락 사태를 부릅니다.

일본의 이화학 연구소는 과학자의 낙원으로 불리며(p94), 이는 "연구 성과를 바로 산업화"하는 데에 탁월한 그들 특유의 기업 문화에 기인합니다. "출신 대학, 소속기관, 전공 등 영역의식은 조금도 찾아보기 힘들었다(p95)." 우리 기업 문화하고는 너무도 차별화되는 풍토이며, 한국이 사실 가장 고질적으로 앓고 있는 병폐를 극복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책은 앞에서 일본과 독일의 역사 발전상의 공통점을 짚었습니다만 과연 그래서인지 일본과 독일은 "가족 기업 성격, 장기근속 일반화, 종업원 중심 경영(p103)" 등에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도 코스닥이나 코스피를 보면 강한 중소기업이, 그것도 소부장 섹터에서 서서히 늘어나는 추세입니다만 여전히 대기업 중심의 생태계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굴지의 대기업도 대기업이지만, 경제, 특히 제조업 섹터가 중소기업 위주로 돌아갑니다.

"히든 챔피언의 절반은 독일이다." 히든 챔피언을 다른 말로 바꾸면 이 책에서 자주 나오는 용어인 GNT, 즉 글로벌 니치 탑이겠습니다. p105에서 독일 자동차 기업은 다양한 사업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책 처음에서도 다루었듯 일본 역시 한우물만 파는 기업이 많죠. 물론 이런 장인 정신은 기술 우대 풍조, 기술의 심화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겠으나, 급변하는 트렌드에 제때 적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한 예로 최근 현대차, LG, 삼성, SK 총수 들이 연쇄회동을 가지며 테슬라 주가의 미친 상승이 상징하는 자동차 산업의 완전 재편에 대응하는 제스처를 보였는데, 이런 건 우리 기업들이 재빠르게 현실에 대처하는 기민성의 징표입니다. 한우물만 판다고 능사는 아니죠. 어떤 애널리스트는 "현대차는 주가가 크게 오르지 않는다. 전기차를 만든다 해도 기존 내연기관차의 시장을 그대로 가져올 뿐이 아닌가?"라고 하던데, 독일이나 일본 메이커가 머뭇대는 사이 전기차, 수소차 시장 셰어를 재빨리 점유한다면 당연 시장 선점 아니겠습니까? 최근 상승하는 주가가 이를 증명하고 남습니다.

인쇄는 전통적인 산업 섹터로서, 선명하고 오래 색이 바래지 않는 인쇄는 그 완성도와 고급성을 상징할 만큼 중요한 척도입니다. 일본에서는 돗판과 다이니치 양대 기업이 있어 가히 "백년전쟁"을 이끌어 왔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런 경쟁이 기술의 완성도와 장인 정신의 건설적 경쟁이란 점에서 타 산업 분야에까지 귀감을 이루는 것입니다.

모터는 자동차 등 수많은 장치와 기계에 핵심으로 쓰이는 심장과도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니혼덴산과 마부치모터가 오랜 세월 동안 겨뤄 왔으나 비교적 최근 니혼측이 새로 진입한 파워윈도 영역에서 특히 심한 격돌이 이뤄졌다고 합니다. 이 싸움에서 마부치 측이 의론의 여지가 없는 압승을 거뒀는데 그 비결을 여럿으로 책은 분석합니다. 우리도 매년 "표준품셈"이란 게 계산되어 서점에도 두꺼운책으로 출간됩니다만 마부치 측의 원가 절감 혁신이라는 게 실로 대단했나 봅니다. 마부치는 주문(개별) 생산에서 표준품 생산으로 전략을 바꾸었고, 이것이 연쇄적으로 원가 절감 효과를 낳았던 거죠.

우리 같으면 40년 적자 산업에 과연 투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가치 창출"은 어느 기업이나 쉽게 입에 올리는 구호입니다만 도레이는 말이 아닌 실천으로 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40년 적자 산업이란 바로 "탄소 섬유 개발"을 뜻하는데, 지금은 누구나 알듯 이 탄소섬유 분야가 산업의 전체 판도를 바꿀 만큼 중요해졌지만 198년대에 이런 혜안을 가졌다는 게 그저 놀랍습니다.

반도체는 굴지의 삼전이나 하이닉스뿐 아니라 한국에도 중소기업 중에 세계적 기술력을 자랑하는 곳이 제법 많습니다만 원조는 아무래도 일본이라 봐야겠죠. 반도체용 웨이퍼, 염화비닐 섹터에서 신에츠는 세계 1위이며(p196), 싷리콘, 포토레지스터는 3위라고 합니다. 물론 이제는 한국에서, 특히 포토레지스터 분야에서 세계 정상을 다투는 기업들이 있는데 작년 이후 촉발된 소부장 국산화의 효과입니다. 책에는 특히 PVC 분야에서 LG화학(얘도 이제는 한국에서 손꼽는 가치주가 되었죠. 불과 며칠 전 주가를 보십시오)과 비교하는데, 매출액은 60%이면서도 영업이익이 2배라고 합니다. 이게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저 앞에서도 원가 절감을 통해 경쟁사를 꺾어버린 강소기업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JIT와 칸반 시스템 이야기는 이미 1990년대부터 경영학 교과서에 나올 만큼 도요타의 혁신은 유명하고 모범적입니다. "재고는 절대악" 어떻습니까? 토요타의 혁신은 이미 남부럽지 않게 성과를 달성하던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자기 혁신을 도모한 결과이기에 더욱 대단합니다. 삼성에서 이건희 회장이 1990년대 중반 "불량품 화형식"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글로벌 대기업이 과연 있었겠습니까? 소부장에서는 특히나 혁신과 기술연구가 중요하며, 한국도 마냥 기업 적대적인 풍조를 키우거나 엘리트 교육 지양을 외칠 게 아니라, 오늘날 눈부신 발전을 이끈 인재와 기업이 과연 어디서 비롯했는지, 현실에 기반한 각성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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