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유물과 유적으로 매 순간 다시 쓰는 다이나믹 한국 고대사 서가명강 시리즈 12
권오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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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유물과 유적에 의해 구체적인 내용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막연히 그러려니 하는 상상과 억측에 의해 지탱되는 분야가 아니겠습니다. 저자 권오영 교수는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 등에 출연하여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분이라고 하며, 천안 청당동 유적, 순천 대곡리 유적을 발굴한 당사자라고 책날개의 설명에 나옵니다. 저자의 이런 이력이, 우리 독자들로 하여금 "유물, 유적에 의해 밝혀지는 역사의 진실, 그리고 반전"에 대해 공감을 보내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도 같습니다.

행주산성이라 하면 임진란 당시 권율 장군이 주도한 대첩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이 성의 축조 사실 자체는 무려 7세기 삼국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자의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통설은 계속 무너지고 있다(p22)." 어느 학문 분야이건 한 시점의 압도적 통설이 계속 그 자리를 유지하는 일은 드뭅니다. 그러나 특히 국민들이 중등 교육 과정에서 배워 알아 오던 사항 중 통설들이 바뀌는 것은, 혹은 심지어 "계속 무너지는" 건, 적잖이 충격적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역사, 특히 한국사의 "반전"도 대개 이를 가리키는 취지겠습니다. 물론 진실을 향한 반전은 설령 충격적일망정 결국은 누구에게나 유쾌한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중국에서는 목간이 계속 출토되어, 서력 기원 즈음이나 그 이전의 사실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자료가 나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목간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하며, 종이로 쓰인 문헌이래봐야 7세기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게 드물다고 합니다. 전란과 외침을 많이 겪은 한국사라서 그러려니 이해하지만, 뭔가 크게 아쉽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자는 p25에서 "조금 힘들더라도 쏟아지는 고고학적 물질자료에 눈을 돌려 보석을 캐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말합니다. 책을 계속 읽어 보기 전까지는, 고고학적 물질자료마저 "쏟아지듯" 풍성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짐작했으나, 다음 페이지에서 저자가 말씀하시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독자인 제게는 일종의 반전으로 다가왔을 만큼.

"쏟아지듯"의 이유는 국토 곳곳에서 이뤄지는 건설, 토목 공사의 왕성한 진행 상황에 있다고 합니다(p26). 발굴조사의 건수는 매년 1500~1800건 정도나 된다고 합니다. 상고사의 문헌 자료는 빈약하게 남았으나, 워낙 이 반도에 조상들이 터잡고 산 역사가 길다 보니 이런 종류의 유물은 풍성하게 나오는 거겠죠.

유물 유적 발굴 연구의 최대 적은 바로 도굴꾼입니다. 책에서도 여러 번 이 기막힌 도굴꾼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p32의 창원 다호리 유적이라든가, p;106의 함안 밀산리 유적 등이 그것입니다. 함안 아라가야의 유물을 훔쳐 간 자들은 버젓이 붉은 페인트로 현장에 "196X년 부산 삼부자 다녀감"이라 적어 놓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한국처럼 단일 민족 공동체의 자부심이 강한 나라가 또 없고, 학교 교육 과정에서 민족적 윤리관을 강조하는 사례가 없는데 이런 사람들이 여튼 나오는 걸 보면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유물을 혹 사후에 회수하더라도 한번 도굴꾼의 손을 타면 그 가치가 C급으로 전락한다는 말씀도 있네요.


예전 국사교과서에서 잘 다루지 않다가 근래 중요성이 높아진 게 "환호"입니다. 한자를 그대로 읽으면 둘러싼 호수란 뜻이겠는데, 방형을 한 내부의 환호를 하나 더 짓는 양식은 종전까지 일본의 요시노가리 유적에서나 볼 수 있는 그들 고유의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으나, 최근 춘천 중도 유적 발굴(p145)로 그런 통념이 깨어졌습니다. 여기서도 문헌 위주의 연구가 아니라 유적 발굴에 의해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고 이의 타당성을 심화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튼 여기서 저자는 취락의 발전과 계급의 탄생이라는 명제를 다시 끌어냅니다.

한국에서는 도처에서 볼 수 있는 게 산성이고 그 시대도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올라가지만 (위에서 행주산성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좀처럼 이런 게 발견 안 된다고들 했는데, 저자는 이를 두고 기술적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건 대륙으로부터 최신의 기술을 익힌 백제의 인력이 가세해야 했다는 거죠.

백제는 오래 전부터 현재의 서울 지역에 본거지를 둔 국가였습니다.  책에서도 여러 번 강조되지만 풍납토성 유적의 경우 현재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의 반발 때문에 본격 연구와 발굴이 여러 난관에 봉착하는데, 역으로 고대 유적 하면 무조건 지방에 소재한 걸 떠올리는 현대인들에게, 서울의 꽤 발달한 주거지에 이런 유적이 있다는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기도 합니다. 고대부터 한강 유역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삼국 간에 각축이 벌어졌고, 이를 선점했던 백제가 뛰어난 문명을 누린 선진 권역이었겠음은 자연스럽게 추측이 가능합니다. 남쪽의 풍요한 산출과 노동력을 노린 고구려가 이후 남진해 왔고, 백제가 공주, 부여 등으로 도읍을 옮긴 건 오히려 국력 쇠퇴의 추세와 궤를 같이합니다. 본디 백제는 북방에서 남하한 이들이 주도 세력이었으니 말입니다.

책 말미에서 저자는 좁은 한반도에 애써 우리의 역사공간을 한정할 게 아니라 멀리 터키, 중앙아, 심지어 동남아로 시선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중은 오히려 역사 지평의 확대에 환호하지만, 사실 요즘 지적으로 크게 각성한 일반인들은 더 많은 과학적 근거와 연구 성과에 목말라합니다. 학자들이 충실한 연구 성과를 더 많이 내어놓을 때, 이미 준비된 마음가짐을 한 대중은 보다 편한 마음으로 이를 수용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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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터 - 휴먼 게임의 위기, 기후 변화와 레버리지
빌 맥키번 지음, 홍성완 옮김 / 생각이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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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지구는 그 표면의 일부를 인간에게 허용할 뿐이지만, 인간은 마치 지구 전체를 독점 소유하는 양 방만한 자유를 누립니다. 특히 화석 연료 사용 이후 인간은 환경을 치명적으로 오염시켰으며, 그 결과는 불가역적으로 악화된 대기, 토양, 해양만을 인간 포함 모든 생명체 앞에 직면하게 했습니다. 공기는 모두에게 주어진 자유재라고 불러 왔으나 이제는 맑은 대기로 숨 쉬는 것도 자유롭지 않고, 깨끗한 물을 마시거나 정결한 토양에서 재배된 농산물을 먹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환경 오염에 대한 경각심은 일찍부터 많은 학자, 활동가들이 일깨워 왔으나, 저자 빌 맥키번처럼 "기후 변화의 위험성"을 지적한 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지속적으로 내뿜는 탄소가 일종의 온실 막을 형성하여 온난화를 유발하고, 그 결과 지구의 빙하가 녹아 해수면을 상승시키며, 작물의 생육 환경을 변화시켜 농산물의 산출 결과에 큰 영향을 주는 등의 사실은 그 상당수가 이 저자 맥키번의 최초 환기에 기댄 바 큽니다. 그래서 그의 새 책은 많은 뜻있는 독자들로 하여금 호기심과 기대감을 품게 합니다. 기후 변화에 대해 여전히 확신을 못 갖는 이들도 맥키번의 정연하고 참신한 논증에는 귀를 일단 기울이게 됩니다.

이산화탄소의 높은 농도는 육체적 건강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 인지능력까지 저하시킨다고 합니다. 이러이러한 나쁜 결과가 생길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밝힐수 있다면, 대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차라리 다행스럽습니다. 맥키번은, 가장 위험한 결과라고 하면 어떤 악몽이 우리를 기다릴 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그 자체를 꼽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하면서, 이것이 그저 독자들을 겁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님을 부연합니다. 사실 미래의 어떤 끔찍한 결과에 대해, 불성실하고 현실도피적 성향을 갖는 대중이 보이는 반응이란 일단 애써 신뢰성을 폄하하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중요한 게, 팩트와 과학적 원리를 분명히 이해하고 이를 이웃과 공유하는, 이지적이고 체계적인 태도입니다.

신석기 혁명 이래 대량으로 재배하는 작물들은, 고맙게도 인간의 수요에 잘 순응해 왔습니다. 품종 개량이 되어도 큰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잘 자라주어 많은 인류를 기아로부터 구해 왔죠. 그러나 탐욕스러운 인류가 변화시킨 기후 아래에서는, 이런 작물들도 더 이상 종전처럼 잘 자랄 수 없습니다. 한 예로 옥수수는 생육 과정에서 조금만 고온에 노출되어도 탈이 난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이제 애써 발전시켜 온 먹거리 확보 기술에마저 탈을 끼치기 시작한 겁니다.

저자가 앞서도 지적했지만 "그 앞날을 알 수 있는 재앙"은 그나마 대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고마운 편입니다. 진짜 무서운 적은 그 정체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재앙이죠. 얼마 전 코비드19의 악영향으로 살던 집에서 내쫓기는 미국인 수가 늘어나리라는 보도가 나왔는데, 맥키번은 이와는 별개로 2050년이면 기후 난민 때문에 본연의 터전에서 내쫓기는 "기후 난민"이 대폭 증가하리라는 예측을 내놓습니다. 그린란드 빙하가 녹기 시작한다는 충격적인 뉴스는 벌써 많은 이들을 걱정시켰고, 주거 가능 지역이 늘어난다거나 원유가 발견되었다는 소식도 문제의 본질을 개선하지는 못합니다. 부작용이 순작용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아무리 변화하는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고 혁신이 중요하다고는 해도, 사람이란, 혹은 종족이란, 수백 수천 년 동안 살아온 고유한 패턴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전통과 습속이 흔들릴 때, 인성도 파괴되고 민심도 흉흉해지기 마련입니다. "그 지대 중 일부는 삼십 년 전만 해도 물에 잘 잠기는 곳이 아니었다." 인도네시아 어느 주민이 했다는 이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매년 나는 홍수인 것 같아도 그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뜻이죠. 치수 기술과 각종 인프라가 발달하는 속도를, 기후 변화로 인한 재앙의 증가세가 압도해 버리는 겁니다.

"지옥에서 온 문제". 이 말은 저자가 어느 정치학자와 인터뷰 했을 때, 그가 기후 파생 이슈를 가리켜 쓴 표현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이런 비유도 씁니다. "으르렁거리는 호랑이는 (으르렁거리는) 정확한 그 순간에 우리를 잡아 먹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30년 안에는 이 호랑이가 우리를 잡아먹을 것이 분명하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디 30년씩이나 걸리겠습니까? 눈을 감고 호랑이를 그저 못 본 척하는 인간은 당장 몇 초 후에 살과 뼈가 찢기는 고통을 겪을 게 분명하죠. 반대로, 정신만 잘 차려 대비하면 설령 호랑이 입에 물려 어디로 끌려가는 중이라도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역대 어느 권력자보다도 진보성향임에 분명하지만, 그 역시 역설적이게도 재임 기간 중 치명적인 기술 하나를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셰일가스 채굴 기법이 그것인데요. 우습지만 처음에는 환경주의자들도 이에 대해 환영하는 태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모두가 아는 상식이 되었듯이, 셰일에서 가스 혹은 오일을 뽑아내는 파쇄술은 물을 많이 소모할 뿐 아니라 주변 환경을 치명적으로 더립힙니다. 저자가 특히 가슴 아파하는 게 이 대목입니다. 트뤼도 총리 역시 "잘생기고" 진보적인 정치인이지만 "자기 나라에 1730억 배럴 오일이 있는 걸 알고도 가만 놔둘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닙니다. 안타깝지만 우리 역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이해하지만 동시에 반대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p116에 나오는 엑슨의 CEO 렉스 틸러슨은 트럼프 행정부 초대 국무장관을 맡았다가 석연치 않은 과정으로 물러난 사람이라서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름이 눈에 익습니다. 이사람이 엑슨 CEO로 재직시 집행한 광고에는 환경주의자들(이 책 저자 맥키번 같은 이들)을 두고 유나바머나 찰스 맨슨 같은 자들이라고 비난한 게 있다는데, 후자는 몰라도 유나바머는 그 취한 방법이 아주 지독하게 범죄적이었을망정 메시지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사실은 있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 즈음에 검거되어 큰 화제를 불렀었죠.

"초보자용 슬로프였던 것이 이제는 최상급자용이 되었다." 파리 기후협약 체결 당시에는 그리 달성하지 어렵지 않았던 목표치가 이제는 거의 불가능 수준으로 치달은 결과에 대해, 지구물리학자 마이클 만이 한 말이라는군요. 많은 이들이 경각심을 갖고 활동했지만 현재 인간이 내뿜는 CO2의 배출 속도에는 오히려 액셀러레이터가 밟히는 수준이라니 놀랍습니다.

2부 시작에선 저자 개인사가 잠시 나오는데 흥미로웠습니다. 그는 자신을 "순진했던 청년"으로 소개하며, 1960년이기에 "위대한 사회" 같은 슬로건에 익숙했다고도 하는데 존슨의 재임기에 그는 유아~ 초등 저학년 정도였겠으므로 읽으면서 조금 고개가 갸웃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그가 고교를 졸업했을 무렵 기록된 (하나의) 빈부 격차 지표가 역대 가장 낮은 수치였으며, 지금도 이 기록이 깨어지지 않는다는 씁쓸한 팩트입니다. 이것은 무슨 기득권층의 횡포 같은 게 아니라, 중산층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거나, 산업 구조가 더 이상 대량 생산 대량 소비 패턴이 아니라는 점에도 기인하며, 소수의 혁신가가 부를 독점하는 4차 산업 혁명 추세와도 무관치 않습니다.

철학자, 사상가, 문학가를 평가할 때는 어떤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그가 속한 시대를 얼마나 잘 대변하는지로 정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아인 랜드가 소개되는데, "자기 할 일이나 잘하자"는 아메리카식 실용주의가 강조되는 부분이죠. 이어 러시아 혁명 때문에 모든 부와 사회적 지위를 빼앗긴 그녀의 가계애 대해 자세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녀의 <파운틴헤드>에 나오는 건축가 로크는 트럼프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라고 하는데, 실제로 트럼프의 주된 필드인 부동산 개발 역시 건축가의 일과 어느 정도는 통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저자 맥키번이 이토록 길게, 작가 랜드와 트럼프를 인용하는 이유는 물론 랜드의 작품 곳곳에 녹아 있는 개인주의적 보수 이념을 신랄히 비판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 이 소개와 비판을 읽고 오히려 랜드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된 이들도 (역설적이지만) 있을 겁니다.

빌 클린턴은 특히 미 흑인 유권자에게 큰 은인으로 평가될 만큼 진보적인 정책을 편 대통령이었지만 이 책에서는 그의 세계화 정책 등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또 석유 재벌 코크 형제 역시 다뤄지는데 p155에 제인 메이어의 책 <다크 머니>가 인용되는 중에서이며 저도 이 책을 읽고 3년 전에 리뷰를 남긴 적 있습니다. 여기서는 볼셰비키 혁명의 참된 진로(그런 게 혹 있다면 말이죠)를 크게 퇴색시키며 자본가들과 검은 협업을 도모한 스탈린도 비판되는데, 이런 걸 보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등이 얼마나 탁월한 예언서(?)였는지 새삼 실감됩니다.

재생가능에너지 운동은 그저 기술적 장벽에만 부딪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보수적 반대 세력에 의해서도 좌절됩니다. 티파티 진영에선 이에 대해서도 그 결과를 과학적으로 불신한다든가 해서 반대하며, 태양광 발전이 현재 노정하는 비효율성은 이들의 좋은 타겟이 됩니다. 그러나 저자는 여튼 태양과 바람으로만 산출되는 에너지가 우리 인간이 기댈 곳이 되어야 하며 그런 세상이 반드시 오리라 확신합니다. 여기서도 그는 "휴먼 게임의 무력화"를 걱정하는데, 서두에 나왔지만 이걸 그가 구태여 "게임"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결과의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큰 히트를 친 <특이점이 온다>의 저자 레이 커즈와일도 이 책에서 다뤄지네요. 저자와는 개인적 친분도 있어서 그는 3부 초두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하는데 이건 책에서 직접 읽어 보십시오. 3부의 제목은 "게임의 이름"인데, 이것은 영어 숙어 중 "진짜 중요한 것"을 가리켜 "네임 오브 더 게임"이라 부르는 것에서 유래합니다. 또 이 책의 부제에서 인류의 오랜 여정을 두고 "휴먼 게임"아라 스스로 명명한 점에도 주목해야겠죠. 맥키번은 이처럼 짜임새 있고 입체적, 다중적으로 의미가 통하는, 치밀한 한 권의 책을 참 잘 쓰는 재능이 탁월한 저자입니다.

커즈와일이 미래에 대한 또하나의 멋진 책을 써 줄 주기가 되었는데, 여튼 최근에 알파고로 큰 걸음을 디딘(혹은 그렇다고 세인들이 말하는) 인공지능에 대해 그가 뭐라고 새로운 비전을 펼칠지도 기대되지만 그의 지인(?)인 맥키번의 "썰"도 재미있습니다. 아직은 약(弱)인공지능만이 시중에 등장했으나, 컴퓨터 한 대가 범용으로 인간만한 지능에 도달하는 시대가 열린다면, 이는 호박벌 한 마리가 케인즈 경제학을 이해하는 만큼이나 놀라운 결과라고 말합니다. 사실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은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을 개척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이해 못하며, 또다른 사람은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걸 이해하는 양 거짓말을 일삼고 코미디를 연출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같은 바보를 뛰어난 사람들이 상처 준다며 저주까지 합니다.

기존의 인간적 결함을 새 기술이 그저 교정하는 수준에 그친다면 이는 휴먼 게임에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퍼 기술은 어떻습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인간 게놈 지도가 완성되었다면 서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공동으로 발표까지 했습니다만 현재까지도 우리 인간이 어떤 질환을 획기적으로 치료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무지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쟁자들은 분명 한계를 뛰어넘는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이런 기술들이 이제 휴먼 게임에 종지부를 찍을 만큼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히틀러 같은 악마들이 추종하는 유전적 수월성을 인위적으로 갖춘 맞춤형 아기의 등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노벨상을 젊었을 때 받은 왓슨 역시 "누가 못난 아기를 원하겠는가?"라고 한 적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물려받은 유전자적 무작위성은, 결정론으로부터 어떤 정신적 자유를 우리 자신에게 허용한다." 물론 특정 정치적 지도자로부터 내려받는 지령이 절대 진리인 줄 아는 일부 몰지각한 인간들에게는 이런 자유가 큰 의미를 갖지 못하겠지만, 인류가 근세 이후 이룬 계몽주의적 자각은 현재의 번영과 부를 낳은 주된 원동력임에 분명합니다. 이제 기술의 발달로 이런 혜택을 반납해야 한다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겠습니다.

"신이 사람을 창조했을 때, 죽음도 그 일부가 되게 했다." 이는 수메르의 신화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불멸을 추구하는 건, 그 불멸이란 게 추구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결과를 부른다는 게 저자의 통찰입니다. 또 이 책에서 계속 반복되는 논지 "휴먼 게임"에 종지부를 찍는 셈이 되는 거죠. 어니스트 베커도 여기서 다시 인용되는데 그는 프로이트를 두고 틀렸다고 단정하면서, "섹스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죽음을 대하는 태도"라고 합니다. 하긴 인간이 성에 그토록 집착하는 건 바로 자신의 죽음을 극복하려는 (무의미한) 발버둥이라 봐도 되죠.

레스터 써로는 1990년대에 <헤드 투 헤드>를 써서 한국에서도 큰 유명세를 탄 경제학자입니다. 일종의 게임 이론 사례인데, 누구나 다 하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 결정을 한 사람만 하지 않으면 그 사람만 공동체에서 바보가 된다는 거죠. 그러나 정의를 위한 투쟁이 결국 무력하기만 하겠습니까? 저자는 "비폭력은, 행동하는 다수가 무자비한 소수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규정합니다. 저자는 이를 환경보호운동에 그대로 적용하여, 우리가 각자의 마음과 심장까지 바꿀 수 있다면 저 무자비한 소수, 즉 산업 자본 엘리트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는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의 시기를 낙관적으로 바라봅니다. 그가 보기에 이 시기에는, 많은 대중들의 지적 수준, 인지 능력, 공감대 등이 기록적으로 확산한 성과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는 스티븐 핑커를 주로 인용하며 자신의 논거로 삼습니다. 그는 비인간적으로 연산 능력만 확대된 존재를 "로봇"이라 보며, 평범한 시민들의 공감과 연대야말로 이런 악의 세력을 격퇴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 규정합니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공감과 연대의 가치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가 되며, 그런 공동체는 결코 "falter"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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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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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사람은 죽고 나서 심판의 자리에 선다는 게 동서양 불문하고 거의 공통된 상상의 지점입니다. 물론 죽어 보고 나서 귀환한 사람이 없기에 정확한 실상은 알 수 없지만, 주어진 생을 열심히, 보람되게 사는 게 인간의 도리이며 생각이 그에 미치지 못 하면 사람 값어치를 못함이나 다름 없다는 판단이, 문명권을 가리지 않고 공통적으로 보이는 결과가 좀 신기하기도 합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이 작품은 희곡인데, 옮긴이의 권말 해설을 보면 "첫 희곡 <인간>은 전통적인 형식을 좇지 않아 소설로도 읽혔다"고 합니다. 이 작품도 지문이 그리 많지 않아 아주 전통적인 희곡 형식이라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대신, 대화 위주로 구성되었기에 독자가 읽기에는 편합니다. 지문도 거의 없고 배경 설명이 적기에, 이런 형식은 정말 저승의 심판장에서 극히 제한된 이동만으로 이뤄지는 이야기에 적합한 듯합니다.

일제 강점기 소설가인 김동인의 단편 중에 <명문>이라는 게 있는데, 진실된 기독교 신앙을 갖고 평생을 살다 마침내 사후세계의 주재자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만 그 심리가 아주 부조리하고 부당합니다. 항의하는 주인공에게 재판장은 "하하, 여기도 그저 법정일 뿐이다!"라며 비웃습니다. 명감독 리들리 스콧의 다소 속물스런 영화 <프로메테우스>를 보면 "피조물보다 열등한 조물주"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지금 베르베르의 이 희곡에도 "사려깊지 못하고 그저 직업적 관성으로 피고인들을 다루는" 저세상 법조인들이 등장하는데, 정말 이런 사람들이 영혼을 다룬다면 이 생을 열심히 사는 우리들의 두 어깨에서 맥이 쫙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도 이들 역시 어떤 최종 결정권자는 아니어서, 이승으로 환생하기도 하고(안 하려 드는 게 보통이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진짜 신의 존재를 의식하는가 봅니다. 그저 "의식"할 뿐 확신하는 게 전혀 아니어서, 세상의 궁극적 이치에 대해 무지한 건 우리 물질계의 인간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베르베르의 요 직전 작품 <기억>에도 환생, 윤회의 테마가 다뤄졌더랬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억>에서는 환생만 소재로 쓰였으며, 이 작품에서처럼 무슨 죗값이라든가 업보(業報), 카르마 같은 것은 언급되지 않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지상에서 예컨대 주인공 아나톨 피숑 같은 이가 재판장으로서 함부로 피고인들을 저승으로 보내든가 하면, 그 남겨진 업보가 이승의 일, 개별 영혼의 행로를 어지간히 꼬이게 한다는 식의 설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피숑 씨가 (동종 업계에 종사함에도 불구하고) 저승의 법정에서 유난히 푸대접을 받는 겁니다. 일을 똑바로 안했다는 거죠.

재판장 가브리엘은 이런 이유, 즉 일을 슬로피하게 진행했다는 이유로 피숑 씨를 갈굽니다(그러니 동종 직종인으로서 무능자에 대한 경멸감, 견책 같은 게 작용했습니다)만, 검사 베르트랑은 좀 다른 이유에서 피숑 씨를 부당하게 취급합니다. 저승의 법정에서 마땅히 취급되어야 할 사안인 듯은 하지만, 피숑 씨가 인성과 감수성, 공감 능력, 정직성 따위가 부족했다는 이유로 그를 몰아세웁니다. 주어진 진짜 재능을 발휘하지 않고 속물스럽게 판사직을 택한 것도 죄목 중 하나라는군요. 제 갈 길을 갔다면 제라르 드파르듀 같은 배우를 능가했겠다는데, 작품 후반부에는 유언을 분명히하고 오겠다는 피숑 씨는 "국세청한테 사기친다"는 부당한 비판도 듣습니다. 근데 자칭 진보파인 드파르듀도 탈세 비슷한 짓을 저질러 큰 비난을 받았죠.ㅎ

베르트랑이 유독 이런 태도를 취한 이유는 카롤린을 짝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변호인 카롤린은 피숑 씨의 생애 내내 그의 수호천사였습니다. 그러니 마치 영화 <토탈 리콜(1990)>에서 마이클 아이언사이드가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미워하는 것처럼(ㅋ) 피숑 씨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겠죠? 존경 받는 법관이었던(과연?) 피숑을 함부로 "아나톨"이라 이름을 부르고(친하지도 않으면서), 그를 "자기중심적이고 단선적으로 세계를 보는 멍청이들"의 범주에 함부로 집어 넣습니다. 물론 피숑 씨가 실제로 그런 멍청이였을 수도 있으나, 제 생각에는 뺀질뺀질하고 이기적인 속물이었을망정 멍청이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멍청이의 정의가 대단히 자의적이긴 합니다만, 70페이지가 지나도록 아나톨 피숑은 자신이 죽은 사실을 못 깨닫습니다. 우리 독자들은 두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벌써 눈치를 다 채었는데도 말입니다. 판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이 멍청이라면 다른 시민들이 참 피곤하고 불안해지는 게 사실입니다. 피숑 씨가 다소 이기적인 건 맞지만(출세를 위해, 또 충동적인 기분에 의해 첫사랑을 버림), 멍청했으면 과연 그런 높은 자리에 올라갔겠습니까? 그가 아주 늦게 사실을 깨달은 건, 생에 대한 집착이 그만큼 강했고, 속물적으로 선택한 삶의 경로가 일단 정해진 후에는 하나하나의 처분에 매우 집요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는 그가 자신의 생을 그만큼 사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자신이 죽었다는 현실을 깨달은 후에는 그의 판단이 매우 빨라집니다. "생이 감옥이었으니 차라리 여기 머물겠다"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정말로 멍청한 이승의 장삼이사들에게선 이런 말도 안 나옵니다. 항소하는 권리가 없는 법정이 어디 있냐며 지금 절차를 만들라는 정당한 항변도 합니다. 가브리엘도 명색이 판사인데 이런 말에 귀를 닫을 수 없습니다. 카롤린은 "그의 영혼은 아직 어리다(p87)"는 말도 하는데 이게 철이 덜 들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나이에 비해 아직 열기가 죽지 않은 순수함에 대한 지적일 수도 있습니다.

(내용 누설에 주의하십시오)
아나톨 피숑은 막판에 마음을 바꿉니다. 그러자 재판관인 가브리엘이 이번에는 자신이 환생하여 아무개 씨의 아기로 태어나겠다고 자원합니다. 그 자리는 (아마도 생각보다는 괜찮은, 우리 독자들이 선입견[베르트랑 때문에 생긴]을 지우고 보면 그럭저럭 좋은 법관이었을 듯한) 아나톨 피숑 씨가 대신해도 될 듯합니다. 이 역시, 한 번 정도는 생을 살아 보고 더 좋은 법관이 되고 싶었던 가브리엘의 회심이라지만, 피숑 씨의 태도로부터 약간은 영향을 받은 게 아니었을까요?

가브리엘은 아마, 지상의 삶으로부터 너무 오래 떨어져 지내다 보니 지리 감각을 잊은 듯합니다. ㅎㅎ 작품 중에는 "티롤 근처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어느 나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티롤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사이에 자리한 지방입니다. 여기에서 스칸디나비아는 멀고도 멀죠. "너를 죽게 하지 못한 건, 다 너를 강하게 만든 것이다"라는 말은 얼마 전 출간되었던 <기억> 중에서도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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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사업가 김대중 3 - 길이 아니어도 좋다
스튜디오 질풍 지음 / 그린하우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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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안경잡이 과장은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 여직원의 서랍 안에서 복표가 발견되자 바로 가책을 느끼며 부장과 상의하려 들지만, 부장 이놈이 인간이 아닙니다.

"어차피 조선인 하나 나간다고 문제 될 것 없어."
"이건 처음부터 잘못된 겁니다!"

아무튼 과장은 생각보다 강한 태도로 제 잘못을 바로잡고, 주인공뿐 아니라 "그의 책상"도 함께 사무실로 다시 들입니다.

이 대목에서 주인공은 드디어 미인 차용애씨와 장래를 약속합니다. 선남선녀가 연을 맺는 장면은 언제나, 누가 봐도 흐뭇합니다. 한편 강남진도 친구에 질세라 홍숙희라는 여인을 데리고 오는데, 초면인 주인공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고 "그짝 야그는 이짝에게 많이 들었소."라며 걸쭉한 서남 방언으로 말을 건네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매력적입니다. 이 시절에도 이처럼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여성이 있었겠죠. 후편에서 이 캐릭터가 맹활약하는 에피소드들이 나올까요? 왠지 기대가 되면서도 살짝 걱정이 앞섭니다.

주인공은 말을 더듬으며 대답합니다. "반갑습니다. 김대중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이 장면에서도 가네보 공장의 혹독한 착취상이 다시 언급됩니다. 이야기가 우습고 재미있어서 서사 자체에 빠져들다가도 독자로 하여금 곧 긴장의 고삐를 잡게 하는 이런 점이 뛰어납니다.

성격이 괄괄한 홍숙희는 예비 신랑을 다그치며 당장 공장을 관두라고 합니다. 알고 보면 생각이 깊고 나이 어린 남편을 배려하는 마음이 사실 지극한 점이 이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강남진은 올 때마다 빈대떡만 시키는데, 아주머니는 정겹게 나무라며 물리지도 않냐고 말합니다.

양동시장은 예나 지금이나 명물이죠. 작품에서는 세피아 톤으로 이 시대 풍경을 잘 살려 표현하여 나이 든 독자에게나 젊은 층에게나레트로 정서를 어필하도록 세심한 배려를 베풉니다.

이제 상황은 바뀌고 일본인들이 물러간 후 대앙조선공업의 간부들이 찾아와 청년 주인공(위원장)에게 대표직 취임을 부탁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조선인들이므로 대화 중에 다 사투리를 씁니다. 여기서 큰 포부를 다지게 된 주인공은 다시 회사를 나오고 자신이 창업하여 "목포해운공사"를 차립니다. 월급도 많이 주는데 구태여 왜 힘든 창업을 하냐는 질문에, 주인공은 "답이 앞에 있지 않냐"고 대꾸합니다.

창업하면 고생길이 훤하죠. 맞습니다. 그래도 큰 뜻을 품은 사람은 자기 사업을 해야 합니다. 또 주인공과 같은 사람은 어딜 가도 보스 노릇을 해야지 남 밑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또 일은 야무지게 해서 어느 보스 밑에서도 인정을 받고 출세를 하는 타입이지만 말입니다.

주인공의 대사 중에서 "가당치도 않아라~"에서 "않어라"라고 했으면 더 서남 방언 다웠을 뻔했다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대양조선공업 전무의 대사가 참 우스운데 "김대중 위원장님 참 거시기하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가 그것입니다. 주인공도 이 말에 당황했는지 "거시기.요?"로 말을 받습니다.

대표로 취임한 주인공의 표정은 야심만만하면서도 샤프합니다. 멋지게 태평양으로 갈 일만 남았다는 현장 감독의 설명에, 최선을 다해달라고 주인공은 부탁합니다.

"저 배는 제 꿈이자 희망입니다."

어떤 정치인, 인물의 전기라고 구태여 생각할 필요 없이, 스토리가 치밀하게 짜여진 한 편의 재미있는 만화로 얼마든지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특별한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이는 당연 독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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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사업가 김대중 2 - 이름을 건 약속
스튜디오 질풍 지음 / 그린하우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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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유럽이나 미국 실상을 담은 기록 영화 같은 걸 보면 여성들이 노출을 최대한 자제한 원피스 수영복에 머리수건을 두른 모습을 보곤 하는데 이 만화에도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차이가 있다면 피사체가 조선, 혹은 일본 여성들이라는 점뿐입니다.

여기서 주인공의 친구 차용식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 여동생이 차용애씨이며 바로 이분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첫번째 부인입니다. 이분과는 나중에 사별하게 되죠. 여튼 잘생기고 능력도 좋은 주인공한테 마음을 설레어하는 여성이 한둘이었을 리 없습니다. 게다가 위기에 몰리면 나쁜 놈의 소중이를 걷어차는 임기응변 능력까지 뛰어나지 않습니까? 물론 놈과는 나중에 화해하고 감복까지 시키며 선생님이란 소리까지 들었으므로 문제가 될 건 없습니다 ㅎㅎ

차용애씨와는 이 시점으로부터 1년 전, 유달 해수욕장에서 처음 만난 걸로 나옵니다.

"나 원참 이런 촌놈 XX들! 암튼 멋을 몰라도 한참을 모른당께~ 진정한 모던보이는 더위를 타지 않아부러!"
"땀 아녀! 이것은 목포의 눈물이여!"

참고로 유행가 목포의 눈물은 1935년에 발표되었으므로 아나크로니즘은 아닙니다. 이런 디테일까지도 고증이 정확해서 이 만화가 더 마음에 듭니다. 위 대사는 차용식씨의 몫으로 만화에 나옵니다. 주인공은 꽤 근엄한 분인데 설마 저런 말을.... ㅎㅎ

그러나 다음 대사를 보십시오.
"누구라도 뛰어 들었을거야.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성을 위해서라면."

오 이건 마치, 엘리자베스 1세를 위해 자신의 겉옷을 진흙탕에 깐 랄리 경의 고사를 연상케 합니다. 하긴 미인을 얻으려면 이 정도 능청(책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은 부릴 줄 알아야죠.

"X신 같은 놈들이 XX을 한다. 2원이 돈이냐? 그냥 니 돈으로 채워 넣으면 안 돼?"

전도 유망한 조선 청년이 직장에서 윗사람의 굄을 받고 잘나가면 꼭 이런 못난 놈들이 시비를 걸고 음모를 꾸미기 마련입니다. 고발을 한다느니 뭘 일러바친다느니 병X 같은 수작을 부리지만, 그런 돌머리들의 책동이 어디 잘 풀릴 리가 있겠습니까?

주인공은 정치인으로 활약할 당시에도, "외강내유"라는 말을 곧잘 들었습니다. 이는 그와 정반대 진영에 있던 어느 언론인(아주 유명한 사람이죠)이 한 말인데, 이 말만큼은 딱히 악의를 갖고 한 건 아니라고 저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그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사면복권이 된 후 망월동 묘지를 찾아가 오열했는데, 이 외에도 그는 눈물을 보인 적이 많았습니다. 서러우니까 눈물을 보이는 건 뭐 인간으로서 당연한 감정입니다. 나라를 잃은 청년이 어디 기댈 곳이나 있었겠습니까. 저는 이런 솔직하고 과장 없는 묘사 때문에 이 만화가 더 좋아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타게다의 반응을 보십시오.
"야 일어나봐! 기차역에서 나하고 붙었던 그 김대중이는 지금 어디 간거야? 아무리 상대가 많아도 싸웠던 그 김대중은 지금 어디 간 거냐고!"

이 대사는 이후 그의 행적을 보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사실 한국 역사에서 가장 가망 없는 투쟁을 벌이다가 결국 이긴 인물 아니겠습니까.

"자존심을 밟아 줘야지! 잔인할 만큼 말이야!"
생긴 것도 아주 밥맛 떨어지게 생긴 왜놈이 또 음모를 꾸밉니다.

한편 친구 강남진이 광주에 있는 가네보 공장에 취직하려고 하자, 주인공은 이를 말립니다. 저 1권 중에서도 여성 직공을 착취하는 어떤 시설에 대해 소년이 우려하는 장면이 나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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