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0 - 소유의 문법
최윤 외 지음 / 생각정거장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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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마도 우리 역시 폐쇄된 사회에서 왜곡된 가치관을 주입 받고 자라나면 별다를 바가 없지 싶습니다. 책 제목을 보십시오. "어젯날 철전지원수의 땅에서 자유를 노래하다." 물론 여기서 철천지원수의 땅이란 대한민국, 혹은 미국을 가리키겠습니다. 대한민국은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세워 미국에 의해 조종되는 나라이며, 미국은 조국 통일을 방해하고 결정적인 순간 전쟁에 참여하여(그를 넘어, 아예 "일으켜") 수많은 동포를 학살한 원수이다... 뭐 이 정도가 평균적인 북한 주민들의 세계관이고 공감대이겠습니다. 사실 한국에서도(놀랍지만) 이런 생각에 경도되거나 동조하는 이가 없지는 않습니다. 여튼, 이 책의 저자들은 한때 철천지원수로 여겨왔던 땅에서 의외로 "자유"의 소중한 가치를 맛보고 완전히 다른 눈이 열리는 감격스런 체험을 한 탈북인들입니다. 그 중에는 우리에게 이름이 익은 이들도 있습니다.

책 처음에는 주성하씨의 글이 나오는데 동아일보에서 14년간 국제부 기자를 지냈다는 말이 있네요. 이분은 텍사스에 체류했고 20세기 초에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였던 갤버스턴이 허리케인에 의해 박살난 후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사실 미국도 여러 유명한 도시들이 있지만 그들의 전성기에 비해 훨씬 뒤떨어진 양상으로 연명하는 곳이 많고 지금 눈으로 보면 "왜 이런 데가 그렇게 유명하며, 심지어 연고 야구단까지 있지?" 싶은 곳이 많습니다. 그 배경을 이해하려면 지난 역사를 알아야 하는데, 이 대목을 읽으면서 현재의 모습뿐 아니라 지난 내력에까지 관심을 두려 하는 그 지적인 자세가 돋보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필자는 축구팬인지 해외 체류 당시 "한국 사이트에서 축구를 볼 수 없는 점이 가장 불편했다"는 말을 합니다.

"왜 그리도 큰 재난을 당한 곳에서 콘크리트 아닌 나무로 시설을 세웠지?" 아마 이에는 여러 답이 가능하겠습니다. 첫째 미국은 정부 주도가 아닌(중국 등과는 달리) 개인이 비즈니스이든 뭐든 이끄는 곳이므로, 그 개인이 "이곳의 사업성이나 영속성은 이 정도다" 싶어 그 계산에 맞게 건물이든 뭐든을 세우는 것입니다. 영토가 광활하고 무엇이든 개인 책임으로 시작하니 이 점에서는 한국이 더 나은 점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으로, 허리케인의 진로가 항상 일정한 건 아니니, 멕시코 만이라고는 하지만 워낙 넓은 곳이라, 다음에도 이 진로를 택한다는 법은 당연 없죠. 반면 한국은 태풍이든 폭우든 상습 침수지가 따로 있습니다.

텍사스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우리는 해외 자원 거래시에 원유 상품 표준 중 하나를 WTI라 부르며 자주 참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I의 원어 intermediate가 무슨 뜻인지를 모릅니다. 모르고서는 온갖 말도 안되는 억측이나 잘못된 정보를 늘어놓는 곳들뿐입니다. 예전에는 이를 "중질유"로 번역했는데 해당 상품은 중질유 아닌 경질유이며 중질유는 표준적 거래 상품이 아예 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이트에는 정제 과정의 부산물이라고 하는데 사전을 찾아 보면 그런 뜻이 있기는 하지만 저 상품은 분명 "원유"이지 정제유가 절대 아닙니다. 이 서평에 적지는 않겠으나 왜 intermediate가 붙었는지를 이해하려면 텍사스, 나아가 남부 일대에 과거 번성했던 중간재 시장이나 거래소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 번영했던 시장은 현재 그 흔적만 남았거나 아예 없어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밀수꾼들은 북한이 어떤 곳인지 다 알아요. 서로 '김정은 저 XX' 같은 말도 하곤 해요." 하다못해 밀수꾼들도 바깥 세상을 접해 본 체험을 통해 무엇이 실상에 가까운지를 (멀쩡한 사람들보다) 더 잘 아는 것입니다. 견식이 넓고 바깥 체험을 해 봤는지의 여부가 이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일본에는 "시골 벽지에서 쉬지 않고 일하느니 차라리 에도에 가서 낮잠을 자라"는 속담이 있다고 하죠. 그런데 북한 밀수꾼들도 아는 진실을 한국 같은 개명천지에서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이들이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게 어쩌면 더 놀라운지도 모르겠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세뇌를 받아 오류와 무지에 빠진 건 뭐 상황이 상황이니만치 그러려니 합니다만.

주성하 기자의 여기 글에는 계속 "의성이"가 등장하는데 물론 공저자 조의성씨를 가리키는 말이겠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저는 예전 미국 액션 스릴러 <에일리언 2>가 떠올랐는데, 그 영화에서 주인공 여성 리플리는 본인 코가 석 자이면서도 어린 소녀 뉴트를 구하기 위해 애를 쓰며 결국 구해 냅니다(만 이후 3편 시작에는 죽은 걸로 나오며 이는 속편 감독의 구제불능 비관주의 세계관이 한몫했죠). 자유의 소중함은 나 개인의 생존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어떤 "기치"의 상징적인 귀환도 거들어야 그 느낌이 더 절실해지는데 이 책에서도 조의성씨의 존재가 자유의 소중함을 독자에게 더 절감케 합니다.

"사실 부모와 나라는 선택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출신지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 같아요."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물론 북한은 일단 우리의 대화 상대로 인정이 되고 시작해야겠습니다만, 권력을 휘두르는 김정은의 온갖 만행에 대해서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그런 압제로부터 탈출하여 우리 민주주의 체제를 찾아온 북한 주민들에 대해서는 멸시의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은, 혹 자신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이들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탈북인 전체를 두고 "배신자"라고 하던데, 그런 사람들은 혹 "김정은에 대한 충성, 신의"를 중시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요?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한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에 대해서는 "혐오, 차별"을 지양하라면서, 반대로 탈북민에 대해서는 비열한 모욕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중 잣대도 어디 이만한 게 또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반공주의니 냉전시대 사고니를 들먹이는데, 그런 건 모르겠고 비판의 초점은 자신이 다스리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김정은의 폭압과 독재에 놓인 겁니다. 히틀러니 박정희니 전두환이니에 대해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 아닙니까? 왜 김정은만 여기서 예외가 되어야 합니까?

요즘 미국이나 호주에서는 산불 때문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가 봅니다. 이 책에서도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자연 피해가 잠시 언급되는데, 저자들은 "산불보다 더 무서운 건 인간이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멀쩡한 팩트를 놓고도 기막힌 왜곡을 일삼거나, 자신의 이익에 맞춰 교묘히 비트는 못된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자분들은 인생에서 극적인 체험과 모진 고생을 한 분들이기에 아마 우리들보다 더 그런 악종들을 더 많이 마주쳤을 듯합니다. 이런 인간들을 두고 무슨 용서니 뭐니 한가한 개념을 적용하는 건, 마치 김정은의 신년사처럼이나 무의미한 시도일 것 같네요.

한국은 영어 공부를 하기에 참 편안한 환경입니다. 원어민의 발음이나 감성에 노출될 기회가 많고, 그런 시도를 하는 데에 무슨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지도 않는, 그야말로 천혜의 환경입니다. 환경은 이렇게 좋은데 정작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그에 비해서는 드문, 참 이상한 실태이기도 합니다. 2부에서 시작되는 조의성씨의 회고담은, 더군다나 상대적으로 젊은 분의 이야기라서 더욱 공감이 잘 됩니다. 아무리 우리 중에 불리한 여건인 이들이 있다고 해도, 아무려면 탈북민보다 불리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책의 2부를 읽고 사람이 진정으로 배움에 뜻을 두면 불가능할 게 없겠다 싶었습니다. 영어 공부는 둘째치고, 이제는 미국 여행을 간다고 해도 아마 그 풍광과 현상이 다른 눈으로 보이지 싶었습니다. 자유란 그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며, 의식주만 해결된다고 만족하는 건 개돼지나 다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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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날 철천지원수의 땅에서 자유를 노래하다 - 주성하와 탈북 청년들의 아메리카 방랑기
주성하.조의성 지음 / 북돋움coop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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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우리 역시 폐쇄된 사회에서 왜곡된 가치관을 주입 받고 자라나면 별다를 바가 없지 싶습니다. 책 제목을 보십시오. "어젯날 철전지원수의 땅에서 자유를 노래하다." 물론 여기서 철천지원수의 땅이란 대한민국, 혹은 미국을 가리키겠습니다. 대한민국은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세워 미국에 의해 조종되는 나라이며, 미국은 조국 통일을 방해하고 결정적인 순간 전쟁에 참여하여(그를 넘어, 아예 "일으켜") 수많은 동포를 학살한 원수이다... 뭐 이 정도가 평균적인 북한 주민들의 세계관이고 공감대이겠습니다. 사실 한국에서도(놀랍지만) 이런 생각에 경도되거나 동조하는 이가 없지는 않습니다. 여튼, 이 책의 저자들은 한때 철천지원수로 여겨왔던 땅에서 의외로 "자유"의 소중한 가치를 맛보고 완전히 다른 눈이 열리는 감격스런 체험을 한 탈북인들입니다. 그 중에는 우리에게 이름이 익은 이들도 있습니다.

책 처음에는 주성하씨의 글이 나오는데 동아일보에서 14년간 국제부 기자를 지냈다는 말이 있네요. 이분은 텍사스에 체류했고 20세기 초에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였던 갤버스턴이 허리케인에 의해 박살난 후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사실 미국도 여러 유명한 도시들이 있지만 그들의 전성기에 비해 훨씬 뒤떨어진 양상으로 연명하는 곳이 많고 지금 눈으로 보면 "왜 이런 데가 그렇게 유명하며, 심지어 연고 야구단까지 있지?" 싶은 곳이 많습니다. 그 배경을 이해하려면 지난 역사를 알아야 하는데, 이 대목을 읽으면서 현재의 모습뿐 아니라 지난 내력에까지 관심을 두려 하는 그 지적인 자세가 돋보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필자는 축구팬인지 해외 체류 당시 "한국 사이트에서 축구를 볼 수 없는 점이 가장 불편했다"는 말을 합니다.

"왜 그리도 큰 재난을 당한 곳에서 콘크리트 아닌 나무로 시설을 세웠지?" 아마 이에는 여러 답이 가능하겠습니다. 첫째 미국은 정부 주도가 아닌(중국 등과는 달리) 개인이 비즈니스이든 뭐든 이끄는 곳이므로, 그 개인이 "이곳의 사업성이나 영속성은 이 정도다" 싶어 그 계산에 맞게 건물이든 뭐든을 세우는 것입니다. 영토가 광활하고 무엇이든 개인 책임으로 시작하니 이 점에서는 한국이 더 나은 점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으로, 허리케인의 진로가 항상 일정한 건 아니니, 멕시코 만이라고는 하지만 워낙 넓은 곳이라, 다음에도 이 진로를 택한다는 법은 당연 없죠. 반면 한국은 태풍이든 폭우든 상습 침수지가 따로 있습니다.

텍사스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우리는 해외 자원 거래시에 원유 상품 표준 중 하나를 WTI라 부르며 자주 참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I의 원어 intermediate가 무슨 뜻인지를 모릅니다. 모르고서는 온갖 말도 안되는 억측이나 잘못된 정보를 늘어놓는 곳들뿐입니다. 예전에는 이를 "중질유"로 번역했는데 해당 상품은 중질유 아닌 경질유이며 중질유는 표준적 거래 상품이 아예 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이트에는 정제 과정의 부산물이라고 하는데 사전을 찾아 보면 그런 뜻이 있기는 하지만 저 상품은 분명 "원유"이지 정제유가 절대 아닙니다. 이 서평에 적지는 않겠으나 왜 intermediate가 붙었는지를 이해하려면 텍사스, 나아가 남부 일대에 과거 번성했던 중간재 시장이나 거래소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 번영했던 시장은 현재 그 흔적만 남았거나 아예 없어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밀수꾼들은 북한이 어떤 곳인지 다 알아요. 서로 '김정은 저 XX' 같은 말도 하곤 해요." 하다못해 밀수꾼들도 바깥 세상을 접해 본 체험을 통해 무엇이 실상에 가까운지를 (멀쩡한 사람들보다) 더 잘 아는 것입니다. 견식이 넓고 바깥 체험을 해 봤는지의 여부가 이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일본에는 "시골 벽지에서 쉬지 않고 일하느니 차라리 에도에 가서 낮잠을 자라"는 속담이 있다고 하죠. 그런데 북한 밀수꾼들도 아는 진실을 한국 같은 개명천지에서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이들이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게 어쩌면 더 놀라운지도 모르겠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세뇌를 받아 오류와 무지에 빠진 건 뭐 상황이 상황이니만치 그러려니 합니다만.

주성하 기자의 여기 글에는 계속 "의성이"가 등장하는데 물론 공저자 조의성씨를 가리키는 말이겠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저는 예전 미국 액션 스릴러 <에일리언 2>가 떠올랐는데, 그 영화에서 주인공 여성 리플리는 본인 코가 석 자이면서도 어린 소녀 뉴트를 구하기 위해 애를 쓰며 결국 구해 냅니다(만 이후 3편 시작에는 죽은 걸로 나오며 이는 속편 감독의 구제불능 비관주의 세계관이 한몫했죠). 자유의 소중함은 나 개인의 생존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어떤 "기치"의 상징적인 귀환도 거들어야 그 느낌이 더 절실해지는데 이 책에서도 조의성씨의 존재가 자유의 소중함을 독자에게 더 절감케 합니다.

"사실 부모와 나라는 선택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출신지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 같아요."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물론 북한은 일단 우리의 대화 상대로 인정이 되고 시작해야겠습니다만, 권력을 휘두르는 김정은의 온갖 만행에 대해서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그런 압제로부터 탈출하여 우리 민주주의 체제를 찾아온 북한 주민들에 대해서는 멸시의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은, 혹 자신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이들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탈북인 전체를 두고 "배신자"라고 하던데, 그런 사람들은 혹 "김정은에 대한 충성, 신의"를 중시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요?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한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에 대해서는 "혐오, 차별"을 지양하라면서, 반대로 탈북민에 대해서는 비열한 모욕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중 잣대도 어디 이만한 게 또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반공주의니 냉전시대 사고니를 들먹이는데, 그런 건 모르겠고 비판의 초점은 자신이 다스리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김정은의 폭압과 독재에 놓인 겁니다. 히틀러니 박정희니 전두환이니에 대해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 아닙니까? 왜 김정은만 여기서 예외가 되어야 합니까?

요즘 미국이나 호주에서는 산불 때문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가 봅니다. 이 책에서도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자연 피해가 잠시 언급되는데, 저자들은 "산불보다 더 무서운 건 인간이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멀쩡한 팩트를 놓고도 기막힌 왜곡을 일삼거나, 자신의 이익에 맞춰 교묘히 비트는 못된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자분들은 인생에서 극적인 체험과 모진 고생을 한 분들이기에 아마 우리들보다 더 그런 악종들을 더 많이 마주쳤을 듯합니다. 이런 인간들을 두고 무슨 용서니 뭐니 한가한 개념을 적용하는 건, 마치 김정은의 신년사처럼이나 무의미한 시도일 것 같네요.

한국은 영어 공부를 하기에 참 편안한 환경입니다. 원어민의 발음이나 감성에 노출될 기회가 많고, 그런 시도를 하는 데에 무슨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지도 않는, 그야말로 천혜의 환경입니다. 환경은 이렇게 좋은데 정작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그에 비해서는 드문, 참 이상한 실태이기도 합니다. 2부에서 시작되는 조의성씨의 회고담은, 더군다나 상대적으로 젊은 분의 이야기라서 더욱 공감이 잘 됩니다. 아무리 우리 중에 불리한 여건인 이들이 있다고 해도, 아무려면 탈북민보다 불리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책의 2부를 읽고 사람이 진정으로 배움에 뜻을 두면 불가능할 게 없겠다 싶었습니다. 영어 공부는 둘째치고, 이제는 미국 여행을 간다고 해도 아마 그 풍광과 현상이 다른 눈으로 보이지 싶었습니다. 자유란 그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며, 의식주만 해결된다고 만족하는 건 개돼지나 다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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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시장의 조건 - 동양의 애덤 스미스 이시다 바이간에게 배우다
모리타 켄지 지음, 한원 옮김, 이용택 감수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무엇이 정의로운 시장일까요? 그 전에, 시장이란 게 정의로워질 수는 있을까요? 경제학의 개조 애덤 스미스는 일찍이 "사람들의 자비심이나 정의감에 호소하기보다, 그들의 (자연스러운) 이기심에 기대는 게 효율성 면에서 훨씬 바람직한 시장을 낳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후 수백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말이 결국 지극히 타당하다는 게 드러났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효율적이기만 한 것보다, 정의롭고 공정한 시장까지를 실현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당연히 가집니다. 이런 바람을 가지는 걸 보면 그간 어지간히 효율적인 시장을 달성하기는 했나 봅니다. 여튼 우리는 정의로운 시장을 가질 자격이 있고, 또 그를 추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시다 바이간은 아직 덕천 막부의 교묘한 통치술이 열도를 잘 지배하던 17세기에 태어나 18세기에 활약한 인물입니다. 일본도 당시 우리처럼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가 사회를 통제하던 시절이지만, 우리보다는 경제적으로 훨씬 풍요했던 듯하며 이는 김인겸의 일동장유가 등 다양한 문헌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튼 이시다 바이간은 "성씨"를 지닌 집안에서 태어나고 훈육된 것으로 보아 "적어도 빈농은 면한 환경"인 것으로 보인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제가 보기엔 그 정도로 박한 평가에 그칠 게 아니라, 적어도 가업 같은 걸 논할 만한 풍족한 집안이었던 듯하며, 자식에게 어떤 생업의 기술(그것도 물리적인 기술이 아닌), 기법 같은 걸 전수할 정도면 상당히 재산을 모았다고 봐야 할 듯합니다. 18세기 일본 같은 신분제 사회였다면 더더욱 말입니다.

여튼 이시다 바이간은 마치 초년의 벤자민 프랭클린처럼(생몰 연도도 비슷하네요) 청년시기 여기저기 고용살이를 하며 사회 생활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가 한 일도 다양한 점포의 지배인 비슷한 것이었는데 이 점에서도 프랭클린과 비슷합니다(물론 후자는 찢어질 듯 가난한 출신이었지만).

세상에는 기이하게도 죽고 나서야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들이 꼭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불꽃 같은 생을 살았으나 생전에는 전혀 인정을 못 받다시피했죠. 이시다 바이간은 무난한, 지극히 무난한 생을 살았을 뿐이었으나, 대체로는 그처럼 상인이었던 제자들에 의해 그의 "사상"이 연구되었고, 나중에는 상인 계급을 넘어 무사들까지 그를 존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어쩌면 조선과 일본이 결정적으로 근대 이후에 갈라지는 지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조선의 지배 계급은 지극히 편협한 성리학적 세계관을 갈수록 교조화했으나, 일본은 반대로 일개 상인의 "생각"이라는 것을 사회 개량과 진보를 위해 연구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석문심학은 결과적으로 우수한 노동자를 길러내는 사상이었다" 바로 뒤에는 "그렇다고, 노동자의 정신을 마비시켜 시스템에서 효율적으로 부려 먹는 도구를 길러내는 건 아니었다"고 뒷붙입니다. 역시 저는 개인적으로 이 점에서도 프랭클린 사상과 비슷한 점을 발견합니다. 정치가 안정되면 활발한 계층 이동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고, 사람들은 가업 비슷한 테두리 안에서만 자아 실현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자기 분야에서 더 뚜렷한 성취를 이루거나,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상에 보다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사상에서 강조하는 노동자상은 "근면 검약 정직"입니다. 뭐 현대가 요구하는 직업인상과 그리 큰 차이가 나지도 않습니다. 4차 산업혁명이 아무리 창의력을 강조하더라도, 게으르고 허황한 거짓말을 일삼는 이가 대우 받을 리야 없지 않겠습니까.

저자는 책 내내 석문심학, 즉 이시다 바이간의 사상과 애덤 스미스의 사상 체계에서 유사한 점을 발견합니다. p73에서는 스미스의 명저 <도덕감정론>의 일부가 인용됩니다. 그 책은 대체로 종교를 거르고 이성과 논리의 영역에서 도덕을 정의하려는 의도에서 저술되었으므로, 오늘날 우리 독자가 지레 착각하듯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기"만을 강조한 책은 아닙니다. 공맹을 숭앙하는 유교 문화권에서는 어떤 일방적인 지령, 주문이 도덕의 전부인 양 착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서양 고전은 도덕의 배후를 캐며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를 더 깊게 파고듭니다. 물론 칸트는 정언 명법이라는 것도 지적했으나, 그 방법론에 정언명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자체가, 이유 불문하고 뭘 무조건 해야 한다는 맹목적 사고를 지양하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이기심을 억제하고 박애를 발휘하는 것이 인간 본성의 완성이다." 이기심이 시장 작동의 근원임을 강조한 <국부론>의 핵심 테마를 생각하면, 이것이 과연 같은 저자에게서 나온 말인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지만 애초에 스미스가 "이기심 예찬, 만능론자"는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당연한 말입니다. 그 전에, "이기심이면 다 된다"를 외치는  사람이라면 제 정신이 아니라고 봐야겠죠. 책에는 더 의미심장한 말도 나옵니다. "시장참여자라면 일단 도덕적이라야 한다." 오히려 이기심에 의해 작동되는 시장이므로, 참여자가 비도덕적이라면 바로 그 시장과 체제는 파탄이 나기 마련입니다.

이시다 바이간 역시 자신의 저서에서 공맹의 법리를 인용합니다. 아니 인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당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듯 공맹의 사상, 심지어 그에 주석을 단 주희의 말마저도 "모두 천리에 공명하는 것"이라며 도그마화합니다. 이 대목에서 실망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사람은 그가 산 시대의 한계를 절대 벗어날 수 없고, 오히려 시대의 요구에 적응하여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설파한 바이간의 지혜에 감탄하는 게 맞습니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고 설파하려는 자는 대체로 그 의도부터가 순수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저는 최근에 어느 공직 후보자의 모난 언동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미국 같은 나라에서 저런 사람이 고위직이 되려고 나섰다는 자체가 예삿일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고 할지.

예전에 고 정운영 교수 같은 분은 "소비가 미덕이라는 얼빠진 말을 하는 자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도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일본의 어떤 정치인을 겨냥하여) "돈을 많이 쓰면 쓸수록 경기도 점점 좋아집니다" 같은 발언을 맹비판합니다. 소비이건 뭐건 공동체 구성원이 인정한 범위 안에서만 인정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의도이며, 또 그가 인용하는 이시다 바이간의 사상 핵심이라는 겁니다. 사실 이 말, 즉 소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 디플레의 함정을 벗어나기 위한 정책적 독려이며 특정 시대 일본 특정 정치인만이 아니라 누구든 해 온 말이지만, 여튼 저자는 비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정치인은 우리 한국인도 잘 아는 누구이지 싶습니다.

일본인들은 불교 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사회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우리도 그랬으나 조선의 성립 이후에는 불교가 천시되었고, 그의 건설적인 유산은 정신적으로 거의 배제되다시피했습니다. 물론 이에는 불교가 고려 시대 내내 관제화, 형식화, 부패한 자체 잘못이 크게 작용했지만, 이는 일본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귀한 것은 천한 것을 죽여도 좋다" 같은 바이간의 말은 일견 충격적이지만, 동아시아 당대 풍조를 생각하면 상식선에서 받아들여지는 정도였을 겁니다. 어떤 선비라면 이를 "파사현정" 정도의 맥락으로 해석했겠지요.

조선도 수시로 찾아오는 자연 재해에 큰 타격을 받았지만 18세기의 교도 역시 사회적 재난에 신음하는 이가 많았나 봅니다. 바이간 역시 자원 봉사 활동에 나서 많은 이들을 구제하였으며, 바로 이런 점에서 그가 입으로 떠드는 위선자에 그치지 않고, 아는 바를 실천에 옮기는 지성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내것으로 받아들여라." "소비에 매몰되어 본분을 잊지 말라.""환경을 탓하기 전에 나의 문제를 돌아보라." 어느 시대에나 두루 적용될 만한 금언이요 행동 철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상가를 배출할 만한 역량이 갖추어졌기에 에도 중후반기가 그토록 번성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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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 이노베이션 - 세상을 흔든 한국형 혁신의 미래
이장우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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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국 산업 발전의 원동력 중 하나라면 당연 K-POP의 선전입니다. 한류 열풍이 일어난지는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만, 트렌드라는 것은 특히 엔터테인먼트계에서는 수시로 바뀌는 것이어서 과연 얼마나 한류가 오래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방탄소년단이 미국 빌보트 차트 정상에 오름에 따라, 이제 한류는 일시적인 마이너 트렌드가 아닌, 세계인이 즐겨 소비하는 문화 흐름 중 뚜렷한 하나의 지류가 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새로운 산업 섹터로의 자리매김이며, 무엇이 이런 괄목할 만한 성공을 가능케 했는지는 분명 경영학의 관점에서 분석될 가치가 있습니다.

책에서는 먼저 우리 한국인이 정작 K-POP에 대해 갖고 있는 온당치 못한 선입견에 대해 짚습니다. 우리도 다들 기억하지만 1990년대 후반에서 21세기 초에 걸쳐, 갑작스럽게 인터넷 인프라가 확산 보급됨에 따라 그 부작용 중 하나로 불법 공유 문화가 널리 퍼졌습니다. 물론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미국도 냅스터 등의 문제가 심각했고, 중국은 지금도 무법천지나 마찬가지입니다. 여튼 K-POP은 이처럼이나 불리한 여건에서 출발했으며, 현재까지도 정부가 나서서 대중 문화를 보호하는 중국과는 천지차이라 할 만큼이었습니다. K-POP은 이런 걸 보면 거의 자수성가형 산업 역군입니다.

확실히 현재의 한국 대중음악은 1990년대, 그 당시 기준으로 "신세대 문화"라 일컬어지던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이 당시 음악은 외국, 그 중에서도 미국이나 일본의 댄스 뮤직류를 베끼는 경향이 뚜렷했죠. 그런데 책에서는(또 주류의 평가는) "현재 K-POP은 아이돌 중심으로 사업 모델을 설정한다"고 하여, 어느 나라에서도 잘 볼 수 없는 개성을 띤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이뿐만 아니라 현재의 대중음악은 안무나 곡의 완성도 면에서 과거 한국 음악과 비교할 게 아니며, 컨셉을 분명히 잡은 곡의 스타일, 또 아이돌 멤버들의 칼군무와 라이브 가창 실력면에서 분명 진화를 이뤘습니다. "진화"라는 표현은 예전 가수 주현미씨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뿐만 아니라 K-POP은 틈새시장을 공략한, 전략적으로 뚜렷한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성장한 산업이기도 합니다. 사실 제가 개인적으로 보기에도 해외에서 K-POP을 소비하는 젊은층은, 약간은 기존에 소외되고 주변으로 밀려나 보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K-POP이 이들의 니즈를 매우 정확히 짚고 그들을 공략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멋지게 성공한 것입니다. 한국에서 K-POP을 흔하게, 심드렁하게 봐 오던 이들은 정작 이 점을 그저 간과하기 쉽습니다. K-POP의 성공에는 그 나름의 "철학"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산업의 관점에서 K-POP을 다루니만큼 그 혁신의 중심에 어떤 파이오니어들이 있었는지에도 주목합니다. 이수만, 이호연, 박진영, 방시혁, 양현석이 그들입니다. 이수만은 일찍이 현진영과 와와라는 새로운 컨셉의 연예인을 데뷔시켰으며, 이후의 성공담은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호연 회장은 이 책에 그 경력의 시작이 체육 교사라고 나오는데 개인적으로는 새롭게 얻은 정보였습니다. 물론 카라, 핑클 등을 론칭한 분이며, 그 외에도 "아이돌"이라는 2인조 그룹을, 한국에서는 최초로 (말 그대로) 아이돌 컨셉으로 데뷔시킨 인물이기도 하죠. 다만 이분은 시련이 많아서, 책에도 나오듯이 코스닥 상폐라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고인이 되었죠.

K-POP은 결코 평탄한 성장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는커녕 타국도 아닌 본토 한국에서의 푸대접 때문에 오히려 싹도 못 틔우고 말라 죽을 뻔했다는 게 책의 평가입니다. 이 때문에 방시혁은 모교 서울대학교 졸업 연설에서 자신을 키운 게 분노였다는 말도 한 적 있습니다. 그 "분노"라는 게 물론 음악인들을 향한 처우 문제가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K-POP은 그래서, 입지를 이만큼이나 다진 현재에서조차, 앞으로 당면할 미래의 도전이 매우 험난하리라 예상됩니다. 보통 산업이 어떤 입지를 다진 후라면 앞으로는 좀 편한 진로를 잡겠거니 기대가 되는데, K-POP은 심지어 그렇지조차 못하다는 뜻입니다. 책에서는 다만 혁신가의 행태와 신세대 프로듀서들이 절묘한 협업을 이뤄, 더욱 질 좋은 산출물을 빚어 감에 따라 미래를 대단히 희망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유연한 혁신의 리더십과 태도는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벤치마킹해 마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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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서양미술 인문여행 시리즈 14
샤를 블랑 지음, 정철 옮김, 하진희 감수 / 인문산책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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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혹은 어떤 분야이건, 기존에 어떤 성과가 이뤄졌으며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켜 왔고, 어떤 기법으로 예술가가 자신의 영혼, 의도를 담아내는지에 대한 "언어적 설명" 같은 게 필요합니다. 일류 예술가의 솜씨까지는 당연히 몰라도, 어떤 감식안(eye for beauty) 같은 것이나마 모두가 갖출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타고난 눈이 없다면, 그걸 갖춘 사람한테 말로나마 설명을 들어야 일류들(과 그들의 작품)에게 최소한의 공감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죠. 그 공감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최상의 상태로 끌어올려 구상의 형태로 남긴 그 의지와 성취를 엿보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도 조금이나마 그 비슷한 사람이 될 수 있겠으니.

"전통적이고 억지로 꾸민 듯한 회화에서 자유롭고 활기찬 회화로 변해가는 것을 우리는 바티칸의 '서명의 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p64)" 이 구절을 읽으며 저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서유럽 기사들의 자유로운 놀이 문화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는 역사서의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어떤 문화, 문명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아니고의 한 기준은, 그 문명권에 속한 사람들이 얼마나 자유롭고 활기차게 자신의 감정과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예전에 시진핑도 <태양의 후예>를 보고 "왜 이런 작품이 중국에서는 안 나오냐"며 탄식했다고 하죠. 어떤 드라마 같은 게 무슨 미켈란젤로의 작품처럼 위대한 가치를 지녔다는 게 아니라,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이미 사육되는 동물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게 저의 의도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자유롭기만 해서 예술의 성취가 완료되는 건 아닙니다. 피카소는 "나는 소년 시절부터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릴 수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데서도 알 수 있듯, 자유니 파격이니 하는 것도 기존의 전통이 성취하고 집약한 모든 기법을 달통한 후에야 의미를 가집니다. 첵에서도 "라파엘로의 <디푸스타>의 경우 초창기 회화의 엄격한 규칙을 그대로 따랐다"고 서술합니다. 그래야 "그 반대편에 있는" <아테나 학당>의 창조적인 시도와 결과가 비로소 빛이 (더) 나는 거죠.

천재들은 구태여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심심상인처럼 눈빛만으로 서로 통하는 어떤 경지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말로 설명을 해 줘야 궁극의 경지에 대해 어림짐작이라도 할 수 있죠. 샤를 블랑은 우리가 잘 알듯 19세기 노동 관련 사상가로 평가되는 루이 블랑의 동생인데, 이 책 서문에도 나오듯 당시 부르조아 계층에 미술을 감상하는 관점과 취향의 어떤 표준을 제시한 게 바로 이 저자입니다.

이 책은 당시 부르주아적 미술관의 집약과 표준을 담았지만, 사실 지금의 우리가 읽어도 별 거부감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니 부르주아 아닌, 그들이 혁명을 통해 타도했던 귀족의 패러다임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명작이라 이해하는 거의 모든 예술가의 명작들이 그런 관점에 대부분 기초하여 창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혹 그런 고전으로부터 그렇지 않은 점을 찾아내는 혜안을 갖췄다면, 그 사람이 바로 일류 평론가(혹은 예술가)이겠고 말입니다.

당시 많은 예술가들이 샤를 블랑의 이 책을 탐독하고 이전 시대와 동시대 예술의 정수를 더 잘 이해했다고 하는데, 그 점을 방증이라도 하듯 책에는 저자의 자부심 담긴 구절이 여럿 있습니다. "뒤러, 쿠쟁, 비뇰의 저서 들은 이미 알려진 것 이상의 내용은 담고 있지 못하다(p86)" 같은 말이 그렇습니다. 이 바로 앞 구절에 보면 "가스파르 몽주가 기초를 놓은 도형기하학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원근법에 대한.."이란 말이 있는데, 수학사를 공부한 이들은 알겠지만 수학자 가스파르 몽주는 기하학 외에도 많은 업적을 남긴 천재였죠. 이책 출판보다 훨씬 뒤에 창작된 달리의 한 작품은, 십자가를 4차원으로 해석한 결과를 화폭에 멋지게 담아내었습니다. 천재들이기에 전혀 다른 학문의 성과를 끌어와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말로 설명되는 희극 배우의 무언극(無言劇)은 눈으로만 말을 하는 화가의 무언극과 같은 것이 될 수 없다(p129)." 사실 우리들 관객은 매우 멍청하기에, 저자의 말마따나 과장된 몸짓 아니면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디서든, 정확하게 표현하면서도 강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이야말로 모든 예술의 고충, 즉 완전하고 흠결 없는 표현을 하면서도 동시대 (멍청한) 관객과 소통도 해야 하는 고충을 잘 집약한 것입니다. 반면, 미술가는 그렇게, 즉 정확하면서도 "강하게" 표현한다는 게 어렵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배우와 화가의 공통점은, 둘 다 희극에 가까울수록 개별적인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이다."

"왜 시정(詩情) 그 자체의 원천으로 거슬러올라가지 않고 그 해석에 연연하는가?" 사실 저자의 이 말은, 명작을 보고도 명작인 줄을 몰라서 이런 책(물론 명저입니다만)에 의존을 해야 하는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되는 명언입니다. "보여 주는 장면이 고상해지고 훌륭하게 된다면, 스타일은 (저절로)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p303)" 이 말 역시, 화가 같은 창조자뿐 아니라 우리 어리석은 관객들도, 마음 속에 아름다움과 품위에 대한 바른 눈이 생긴다면, 구태여 이론서를 통해 어떤 기법상의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작품 자체를 보고 온전히 감탄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이 아닌 손가락만 보고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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